등산엔 자신없고 등산복보다 좀 더 이쁘게 입을수있는 트레킹~~~~
여행쟁이들에게는 딱이네요
맛난 도시락 배낭에 메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 할것같습니다.
더 추워지기전 가을단풍을 볼수있는 지금이나..
꽃피는 내년봄정도가 적당할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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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길은 느리게 성찰하고 느끼며 에둘러 가는 수평의 길이다. 지리산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 (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 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여 길을 완성할 예정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km의 지리산길. 본 구간은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주천-운봉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자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 이용수칙 1.산악자전거 (MTB)는 지리산길 훼손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용할 수 없다. 2.도시락과 물, 간식 등을 꼭 준비하고, 쓰레기는 되가져간다. 3.농작물과 열매는 손대지 않는다. (농작물이나 열매는 지역민들의 소중한 재산이다.) 4.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대중교통이용은 도보여행의 일부이다.) 5.마을에서는 먼저 인사하고, 사진을 찍을 때는 꼭 허락을 받는다. (생활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사진 찍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감을 준다.)
인월면 →인월에서 월평마을 앞 1.5km의 제방길은 들판에서 지리산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듯, 저 멀리 언뜻 보이는 천왕봉 자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중군마을에 들어선다.
중군마을 →전투 군단 편성에 있어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이 있고 따로이 선봉부대가 있는 것이니, 그중의 중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 마을에 중군(中軍)이 주둔한 연유로 인해 마을 이름을 중군리(中軍里) 또는 중군동(中軍洞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중군마을은 본업인 농사 외에도 잣과 송이 채취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 하지를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동네 부인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에서 통곡을 하면서 무제를 지낸 풍습이 있던 마을이다.
황매암 삼신암 삼거리 →황매암 쪽의 숲길 또는 삼신암쪽의 임도 길을 선택해서 걸을 수 있다.
황매암 →중군마을 농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황매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나 숲길을 걸어 수성대에 이른다. 수성대 계곡의 물은 현재 인근의 중군마을과 장항마을의 식수원으로 음용될 만큼 맑고 깨끗한 물이다.
수성대 →식수로 이용이 가능하고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렵다. 배너미재 →배너미재 (개서어나무) 수성대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은 전설에 운봉이 호수일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배너미재이다. 배너미재는 운봉의 배마을(주촌리), 배를 묶어두었다는 고리봉과 함께 연결되는 지리산 깊은 산속에 있는 배와 관계된 지명이다.
장항당산 →(노루목 당산 소나무) 장항마을에서 만나는 당산 소나무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신성한 장소로 천왕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어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장항마을 →마을 뒤 덕두산에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1600년 경 수양하러 왔던 장성 이(李)씨가 처음 정착하여 개척을 하였다. 이후 각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산세의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노루 장(障)자를 써 장항 이라 했다. 중군마을에서 배너미재를 넘어 도착하는 장항마을은 수려한 풍모의 소나무 당산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장항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신성하게 당산제를 지낼 만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장항쉼터
버스타는곳 →장항마을을 나오면 만나는 곳으로 인월로 갈 수 있다.
매동마을 →고려 말과 조선 초, 중기에 걸쳐 네 개의 성씨 (서, 김, 박, 오) 일가들이 들어와 일군 씨족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梅洞)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마을은, 각 성씨의 오래된 가문과 가력을 말해주듯 네 개의 재각과 각 문중 소유의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변에는 조선 후기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 (梅川) 박치기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은 퇴수정(退修亭)과 그 후손이 지은 밀양박씨 시제를 모시는 관선재(觀善齋)가 있는데, 우거진 소나무들을 뒤로 두르고 앞으로는 만수천이 흐르며 발밑에는 흰 너럭바위들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박치기의 생존 당대에는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 번씩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 밑 너럭바위, 세진대(洗塵臺)에 모여 풍유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족히 일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불과 삼사십 년 전만해도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맑은 물 위에 달이 떴다 지도록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산내면의 대표적인 생태농촌 시범마을로 지정돼 전통과 개발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마을이다.
중황마을 →마을 뒷쪽 백운산 기슭에 황강사(黃岡寺)란 절이 있고, 북쪽으로 500m 되는 곳에는 풍수지리적으로 꿩이 엎드려 있다는 복지혈(伏雉穴)이 있어 황강사의 황(黃)자와 복치혈의 치(雉)자를 따서 황치(黃雉)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가운데 위치하므로 중황(中黃)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황마을 →상황마을은 꿩의 꼬리 형국으로 뒤쪽으로는 삼봉산(三峰山)이 우뚝 솟아 있고, 동으로는 등구치(登九峙)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면계를 이루고, 해발 400m의 고지대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데,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면내에서 제일 질 좋은 쌀이 생산되었다. 산내와 마천,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던 옛 고개인 등구재는 옛길의 정서를 고즈넉이 간직하고 있어, 땅과 농민들을 이어주던 삶의 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상황소류지 쉼터 →상황마을의 다랑논이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주능선을 볼 수 있다.
등구재 (시집장가 가던길) →창원마을까지는 다랑논과 어우러진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거북 등을 닮았다해서 이름 지어진 등구재는 전북의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의 경계이다. 또한 예전 창원마을 사람들이 인월까지 장을 보기 위해 넘었던, 재를 넘어 지역을 넘어 시집가고 장가가던 길이다.
창원마을 →넉넉한 곳간 마을. 창원. 조선시대 마천면내의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창말(창고 마을) 이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져 현재 창원이 되었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현재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마을이다. 다랑이 논과 장작 담, 마을 골목, 집집마다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아직도 닥종이 뜨는 집이 있다. 함양으로 가는 오도재 길목마을로 마을 어귀 당산에는 300여 년 수령의 너덧 그루의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둥그렇고 널찍한 당산 터를 이루어 재 넘어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고 쉼터를 제공하는 풍요롭고 넉넉한 농심의 지리산촌마을이다.
금계마을 →금계(金鷄)마을로 개명되기 전 마을 이름은 노디목 이었다. 노디는 징검다리라는 이 지방 사투리로 칠선계곡에 있는 마을(추성, 의중, 의탄, 의평)사람들이 엄천강 징검다리(노디) 를 건너는 물목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촌사람들의 정을 징검징검 날랐을 노디가 세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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