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울, 꼬레.”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은 억센 프랑스어 발음으로 1988년에 열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대한민국 서울이 확정되었음을 공표했다. 경쟁지인 왜국 나고야를 52: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친 통쾌한 승리였다. 삼삼오오 TV 앞에 모여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국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발표 직전까지만 해도 왜인들은 물론 우리 국민들도 대부분 나고야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으니 기쁨은 2배가 되었다. 국가 발전의 기폭제가 될 또 하나의 호재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올림픽은 6‧25전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악의적인 선전으로 위험한 국가로 인식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1978년 9월 태릉사격장에서 국제사격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이제 우리도 국제대회를 치를 기반과 역량이 갖춰져 있으니 올림픽을 유치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관련 부처에 검토를 지시했고, 곧 긍정적인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다. 올림픽 유치는 ①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될 것이며, ② 남북 대결 또는 경쟁 구도를 벗어나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며, ③ 선진국 진입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979년 4월, 국무총리로부터 올림픽 유치 건의서를 접수한 박 대통령은 즉각 이를 결재했다.
한창 범정부적으로 유치활동을 준비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울려 퍼진 총성으로 모든 국정과 함께 올림픽 유치활동과 준비도 일시에 정지되었다. 다행히 12‧12사태로 국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좌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활동을 계속 추진했다. 정부는 곧 대규모 홍보단을 설치하여 각국 IOC 위원들을 찾아다니며 유치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여 예행연습도 병행했다. 그러나 무능하고 안일한 관료들의 유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일에는 적극 나서지 않는다. 성공하면 본전이고 실패하면 욕만 먹을 일에 어느 공무원이 적극 나서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사비를 들여 각국 IOC 위원들을 찾아다니며 유치활동을 펼쳤다. 그는 먼저 8년 동안 반쪽짜리로 위축되어 있던 올림픽을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놓겠다고 약속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자유진영 66개국이 불참하자, 1984년 LA올림픽 때는 공산권 14개국이 불참했다. 이를 돌려놓겠다는 정주영의 약속은 동서 양 진영 모두에게 호소력이 컸다. 다음은 감성적인 접근이었다. 영국 IOC 위원들이 한국의 경제사정을 들며 나고야를 지지하겠다고 하자 정주영은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으로 경제가 급성장했는데, 만약 이번에도 개최하게 되면 금방 영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말을 들은 영국 IOC 위원들은 그 자리에서 서울 지지를 약속했다. 바덴바덴에서 최종투표가 있기 전날, 일본은 모든 IOC 위원들에게 수만 달러짜리 Seiko 손목시계를 선사했다. 이에 반해 정 회장은 현지에서 근무하는 현대그룹 직원 부인들을 동원하여 정성껏 만든 꽃바구니를 들고 일일이 위원들의 방을 돌며 선사했다. 결국 IOC 위원들은 감성적인 꽃바구니를 선택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 안기부 차장을 역임했던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전국의 안기부 조직을 이용하여 각지의 조폭 두목들을 서울의 한 호텔로 불러 모았다. 박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 올림픽 기간 동안 외국 관광객들에게 단 한 건의 폭력이나 절도나 소매치기도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분이 책임을 지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당시 우리나라 소매치기 수준은 세계 최고였다. 박 위원장의 경력을 잘 알고 있는 조폭 두목들은 지시를 100%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올림픽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은 전 세계에 ‘북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참가한 온전한 올림픽으로서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리고 최초로 흑자 올림픽을 달성하여 세계 스포츠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공했다. 이 기록은 2002 월드컵대회까지 이어졌지만, 무리하게 유치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자랑스러운 전통이 깨졌다. 평창의 후유증은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나라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강원도의 아름다운 준령들을 병들게 할 것이다. 박세직 위원장의 엄격한 관리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2002 월드컵대회와 달리 금전적 부정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1989년 수출증가율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는 효과로 나타났다. 또한 사상 최대인 160개국이 참가하여 동서화해 무드를 조성함으로써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권이 붕괴되는 데도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좌파들은 북한을 염려하여 끝까지 올림픽 개최를 반대했지만, 서울올림픽은 좌파들이 우려한 대로 남북의 체제대결에서 남한이 결정적 우위를 점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 김포공한 폭탄사건, KAL기 격추사건 등을 연속해서 일으켰지만 올림픽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큰 효과는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사실이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한강변 정비, 화장실 개선 등을 통해 국가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어령 박사가 주도한 식전‧식후 문화행사는 세계인들에게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높은 수준을 과시하여 이후 폭발적인 관광객 증가로 이어졌다. 올림픽을 관전하기 위해 찾아왔던 서구 관광객 가운데는 한국의 유서 깊은 고궁과 아름다운 산하에 반해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몇 주씩 머물며 전국 방방곡곡을 관광하러 다니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로 기획된 서울올림픽은 국민적 역량을 확인하고 우리가 내세울 문화적 자산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인식시켜준 자랑스러운 행사였다.
첫댓글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숨은 공로자는 전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성원을 해서 개최한 올림픽이고 계기로 나라를 발전시킨 것이네
당시 IOC 위원들은 착했나보다.
꽃바구니에 감동하게...
나도 꽃바구니를 선물한 적이 있어.
맏이 장가보낼 때...
좀 부담스럽다싶은 축의금을 낸 하객들 몇에게는 꽃다발로 감사 인사를 드렸었지
그런데,
꽃집에서 내게 전해준 말...
이러더라고..
''이런 걸 마라꼬 보내고 야단이야 하면서 나무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꽃도 확 팽개치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10년 세월이 후딱 넘어섰는데도,
아직껏 그 이유가 아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