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광훈 신부님...
정일우 신부님....
지정환 신부님....
천노엘 신부님....
김하종 신부님....
그리고
마가렛.. 마리안느.. 수녀님...
긴글이지만.. 시간내서 한 번 읽어보실만한 내용입니다. 숙연해집니다.
법무부, 뉴질랜드 출신 안광훈 신부에 국적증서 수여
특별공로자 국적 취득이라 이중국적 유지
안 신부 "54년 만에 '온전한 한국인' 됐다"
54년 동안 달동네 주민과 철거민 등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한 안광훈 신부가
24일 법무부로부터 특별공로자 국적증서를
수여 받고 대한민국 국적을 갖게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
50여년간 달동네 주민이나 철거민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힘써온 뉴질랜드 출신
안광훈(78ㆍ본명 브레넌 로버트 존) 신부가
공로를 인정 받아 추석을 앞두고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법무부에 따르면 안 신부는
1966년 한국으로 파견명령을 받아 입국해
원주교구 주임신부로 임명됐다.
이후 69~79년 10년여 탄광촌 주민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80~90년대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철거민과 달동네 주민들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99년에는 ‘솔뫼 협동조합’을 설립,
저소득층의 삶의 질 개선에 노력했고,
2016년에는 삼양주민연대를 설립해
소외된 이웃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34년 간 노동ㆍ빈민운동 투신하다 2005년 중풍으로 쓰러져
"귀화한 한국은 나의 나라…이 땅에서 죽고 묻힐 것"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기자 = 빈민운동의 대부이자 `파란눈의 신부'로 유명한 정일우(본명 John V. Dalyㆍ73) 신부가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사실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정 신부는 현재 부축 없이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고 숨이 차서 10분 이상 말하기도 힘든 상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정 신부는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M. 프라이스 신부(Basil M. Price. 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강대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국내 노동 운동의 선구자다.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를 하던 정 신부는 1972년 학생들이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당시 정 신부는 학생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학교까지 그만두고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시내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정 신부 곁에는 항상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고 이들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상과 철거민의 아픔을 그린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신부는 4일 당시 활동과 관련해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1998년 귀화한 뒤 충북 괴산에 농촌 청년의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 신부는 2004년 말 단식 도중 처음으로 쓰러졌다가 2005년 7월 중풍으로 다시 쓰러진 뒤 모든 활동을 접고 화곡동 그리스도신학대 내 말로이시오 공동체에서 요양 중이다.
정 신부는 "처음에는 빈민을 돕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활동을 하다보니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며 "내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고 죽은 뒤에 묻힐 한국은 나의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푸른 눈의 신부는 김치의 나라에서 치즈로 기적을 일으켰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격인 지정환(85·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 얘기다. 지 신부가 4일 법무부로부터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 됐다. 한국에 온지 57년 만이다.
젊은 시절의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한국행 배에 올랐다. “전쟁의 땅이 희망을 품게 하자”는 이유였다. 첫 부임지인 전북 부안에서 그는 바닷물을 막아 여의도보다 두 배 넓은 간척지를 만들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지로 나눠줬지만 고리대ㆍ노름으로 그 땅들이 다 넘어가는 걸 보며 상처를 받았다.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지 신부는 다짐했다.
부암본당 주임신부 시절. [명인문화사 제공]
하지만 목자(牧者)의 선한 오지랖이 어디 가겠는가. 64년 두번째 부임지인 전북 임실에서 가난이 일상인 농민들을 만났다. 임실이 가진 자산은 초록의 들판 뿐이었다. ”이번엔 아주 조금만 개입하자“는 마음으로 산양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산양유를 치즈로 만들어 농민들의 자활 기반을 마련하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오기가 생겼다.
벨기에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치즈공장까지 지었다. 말만 공장이지 흙벽돌을 쌓고 땅굴을 발효실로 만든 허름한 시설이었다. 약탕기와 막걸리 누룩까지 동원했지만 3년 넘게 실패만 했다. 이탈리아까지 견학을 다녀온 끝에 69년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치즈였다
특급호텔로 임실치즈를 납품하고 치즈를 확인받는 모습. [명인문화사 제공]
미군부대에서 불법유통되는 치즈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이 정성껏 만든 임실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까지 유통망을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72년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국내 최초로 생긴 피자 가게에 공급된 모짜렐라 치즈도 지 신부의 작품이었다. 공장 규모도 커지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개다. 임실이 ‘한국 치즈의 본고장‘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지학순 주교 구속 및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투쟁 중 체포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지 신부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목소리도 열심히 냈다. 70년대 다른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에 동참해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 돼 강제 추방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농촌 발전에 관심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임실 치즈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신부”라는 보고를 듣고 추방 명령을 거뒀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들에게 나눠 줄 우유를 트럭에 싣고 혼자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경찰들을 만나면 '지정환'이란 자신의 이름이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던 그였다
장애인 복지사목에 힘쓴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뛰었던 탓일까. 지 신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오른쪽 다리에 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기 시작했다. 신체 기능이 조금씩 마비되는 병이었다. 그때부터 지 신부는 목발과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3년 간 병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84년 귀국한 뒤 중증 장애인의 뒷바라지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장애인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임실치즈공장은 주민 협동조합으로 변경한 뒤 운영권·소유권을 조합에 전부 넘겼다.
미사를 집전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84년 지 신부는 전북 완주군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누워지내야만 하는 중증 환자들의 욕창 치료와 운동 재활에 힘썼다. 이곳을 거쳐 현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만 수백 여명에 이른다. 그가 집전하는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이뤄진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지병이 있든 없든 미사 도중엔 누구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창피함을 느끼는 걸 배려한 것이다.
호암상 시상식에서. [명인문화사 제공]
20여년에 걸쳐 중증 장애인을 치유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 신부는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지 신부는 이때 받은 상금 1억원과 사재를 털어 장애인을 위한 ‘무지개장학재단’을 세웠다. 2007년부터 매년 장애인 학생 20~3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집을 지어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사제 50주년을 맞은 지정환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4일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천노엘(83·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도 지 신부와 함께 국적 증서를 받았다. 아일랜드인인 천 신부는 81년부터 지적 장애인·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인 ‘그룹홈’을 운영해 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국적법은 2012년부터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인요한(57)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2012년 3월 처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번 특별귀화로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이 된 외국인은 7명이 됐다.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지역 경제 발전과 장애인을 위한 두 분의 헌신적 활동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사랑과 나눔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 더욱 따뜻한 사회가 되도록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섯 번째 글로벌 리더를 만나기 위해 전라도 광주의 엠마우스 복지관을 찾았다. 엠마우스 복지관은 지적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재활시설이다. 이 곳에서 장애인들의 아버지인 천노엘(본명 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폐허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봉사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면서 그와 한국의 인연은 시작됐다. 24년간 사목활동을 했던 천 신부는 봉사활동을 하던 중, 광주의 한 장애인 소녀의 죽음을 접하면서 지적 장애인을 위한 삶을 택하게 됐다.
천노엘(O’Neill Patrick Noel) 신부
–– 1932년 12월 19일 아일랜드 출생
––아일랜드 가벨리대학 졸업(1950)
––아일랜드 성 콜롬반 신학대 졸업(사제서품) (1956)
––전남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졸업(석사) (1988)
––전남 장성, 여수, 목포, 광주 성당 주임신부(1957~1985)
––한국 최초 지적장애인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 ‘그룹홈’ 창설(1981)
––엠마우스 복지관 설립(1987)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설립(1993)
––엠마우스복지관 관장(1987~1998)
––現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대표이사(1998~)
경기도 성남의 무료 급식소 ‘안나의 집’.
어김없이 4시가 되면,
“사랑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인생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허기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반기는 이곳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김하종 신부님이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님은 한국에 오자마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신부님은 2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했고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을 가진 '김하종'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코 젊지 않은 나이에도 이른 새벽 미사 후 청소년들과 노숙인들의 쉼터를 돌고, '안나의 집'에서 밥을 짓고, 길거리 청소년들을 위한 '아지트' 활동까지...
신부님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란데요.
요한 씨가 그렇듯, 미혼부인 재우 아빠와 노숙인 미혼모 미자 씨, 그리고 타이어 가게 직원 성훈 씨, 새로 들어온 임씨... 지난 27년 간 신부님이 자식처럼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 자식을 낳아 지금껏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죠.
오늘도 온정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김하종 신부님.
누군가는 마음속까지 시린 겨울날,
신부님은 말합니다.
행복은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나누면서 얻는 것이에요.
기억하시나요? 소록도에서 1962년 27살 때부터 43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평생 봉사한 '천사 할매' 수녀의 이야기. 오스트리아 출신 마르안느 스퇴거(82) 수녀는 11년 전 대장암 판정을 받고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편지 한 통만 남긴 채 동료 마거릿 수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4월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마르안느 수녀가 다시 소록도를 찾아왔고 많은 이들이 두 수녀의 삶을 돌아보게 됐죠. 그리고 한국인들은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그녀들에게 전했습니다. |
|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은 언제나 저런 한줄기 빛같은 분들이 계셔서 밝게 빛나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