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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첫사랑의 귀환
김지훈과 단 둘이 사과나무카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
난 지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경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나야, 다라.”
“…음...”
“나 지금 김지훈 만났어.”
“..음….”
“잠 깨! 지금 나 그 김지훈이랑 까페에 마주보고 앉아 있다고!”
“그.. 김지훈? 니 첫사랑 그 김지훈?”
“꿈이 아니라고 말해줘.”
경미 목소리가 제 톤을 찾았다.
“다라야, 이거 꿈이니? 나 잠자다 전화 받은 거거든…”
내가 소리를 질렀다.
“꿈 아니고 진짜야!”
‘ ..그래, 이건 꿈이 아니다.’
경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떻게…세상에…그 사람이 널 찾아냈어? 뭐래? 그동안 널 못 잊고 있었대? 다시 만나재? 근데 어떻게 널 찾아냈다니?”
“그게 아니고…기훈씨랑 아는 사이였어. 지훈이랑 나 아직 한마디도 못 했어.”
“뭐야? 너 빨리 물어볼 거 다 물어보고 그다음에 나한테 다시 전화해.”
“경미야! 잠깐. 나 만약 지훈이가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어떻게 하지?”
“…니 맘 가는 대로 해. 하지만 난 지훈씨 말고 기훈씨 쪽에 한 표. 지나간 사랑에 다시 불을 지피기보다는 현재 불씨를 키우는 게 좋다고 봐.”
“무슨… 불씨?”
“독한 년! 꼭 그렇게 부정을 해야만 속이 시원하니? 너 기훈씨 말고 또 누구랑 키스했어?”
“아…기훈씨는 아냐. 그 남자 날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아마 내가 사귀자고 하면 우리 한 석 달 갈까? 그리고나서 난 보기 좋게 차일 거다.”
“으이구..이 웬수. 그래 니 첫사랑 바짓가랑이나 붙잡아라. 끊어!”
경미가 전화를 끊었다. 난 심호흡을 하고 지훈에게 갔다. 지훈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니라니? 기훈이 집에서 조카들 봐주고 있는 거야?”
“응.”
“한국엔 언제 왔어?”
“한 세 달 됐어. 전에도 왔다 갔다는 했었고.”
자, 이제 가장 궁금한 질문!
“결혼했어?”
“아니.”
그가 차를 마셨다. 그리곤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보다니 이상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잘 지냈으니 그가 여기 내 앞에 너무나 근사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앉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가 말했다.
“그때… 나 한국에 온 건 알았지?”
갑자기 혼자 한국으로 가버렸던 지훈. 엄마를 찾아서 한국으로 갔다고 소문처럼 들은 소식이 전부였다. 내가 물었다.
“엄마..만났어?”
“응. 엄마 덕분에 여기서 정신 차렸지. 엄마는..여기서 새 가족들이랑 잘 사셔.”
“기훈씨랑은 어떻게 친구야?”
“기훈이랑은 알게 된 지 한 삼년 됐나? 회사에서 광고사진 때문에 만나다가 아 참, 기훈이 만나던 여자친구도 내가 소개했지.”
“아..”
정말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저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이건 아까 물어 본 거잖아!! 정다라, 정신차려! 나의 반복된 질문에도 그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는 조금은 긴장되어 보였다.
“전에 한번 가봤어. 우리 자주 가던 런던의 그 공원.“
“언제?”
“오 년 전에. ..다라야, 넌 결혼했어?”
“아니.”
“…얼굴이 좀 변했다.”
“너도.”
“그래, 십 년이 지났으니까.”
“맞아.”
그가 갑자기 일어났다.
“어쩌지? 오늘은 내가 갈데가 있어서…우리 내일 기훈이랑 같이 밥 한번 먹자. 전화할게.”
“응.”
그가 나가고 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렇게 할 얘기도 물어볼 말도 없어서 외마디 대답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다음날, 지훈이 다시 사과나무 집으로 왔다.
“어제는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했어.”
“아니야, 약속 있었잖아.”
지훈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약속 없었어.”
“…?”
지훈이 피식 웃었다.
“너무 떨리고 어색해서 도망쳤었어. 미안해.”
지금 그는 어제 카페에서 도망친 일을 사과하고 있다. 십 년 전에 날 떠난 걸 사과하는 게 아니고… 하긴 십 년 전에 헤어진 일을 두고 발이라도 잘못 밟은 것처럼 간단하게 ‘미안해’ 하고 사과할 수는 없지. 그래도 그의 솔직한 발언 덕분에 우리 둘 사이의 공기가 훨씬 가벼워졌다. 그가 말했다.
“기훈이는 바쁘다네.”
“….”
기훈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 내 표정에 모든게 다 쓰여 있었을 거다. 지훈이 기훈에게 ‘영국에서 다라랑 ..어릴 때 만났었지.’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기훈은 지훈이 마치 전쟁에서 죽었는지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나의 약혼자라도 되는 양 순식간에 십리밖으로 쑤욱 하고 물러나 버렸다.
“갈까?”
지훈이 차를 출발하고 말했다.
“기훈이 자식은 괜찮아?”
“…?”
“태미랑 헤어졌는데.”
“태미를 알아?”
“응. 태미를 내가 소개했거든.”
“기훈씨가 태미랑 헤어…졌구나. 언제?”
“음..그 때 영국 갔다 와서니까 한 석달 됐나?”
“왜 헤어졌는지 알아? 기훈씨가… 바람폈나?”
“비슷하지. 태미를 두고 영국에서 어떤 여자랑 호텔에 갔었대.”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설마 그 어떤 여자가 나는 아니겠지?
“파티에서 태미도 본 여자였대. 전날 우연히 카페에서도 보고. 하여튼 그런 얘길 태미한테 다 한 걸 보면 태미랑 헤어지고 싶었던 거야, 기훈이는.”
도대체 기훈은 왜 그런 얘길 자세하게도 태미에게 다 말했던 걸까? 죄책감에? 지훈이의 차가 H호텔 앞에 섰다. 다라야, 너 요즘 왜 이러니? 평생 못 와 본 호텔에 두 번이나 와 보고 그것도 두 번 다 다른 남자랑.
“여기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
그와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내가 물었다.
“집이 서울이 아니었어?”
“서울에는 왔다 갔다 하는데 다시 가야 돼. 이번엔 아버지 모시고 나왔어.”
그가 나와 같은 영국 하늘 아래 살고 있었다니…. 그런데도 그는 나를 찾아보지 않았다. 그건 무슨 의미냐면… 지훈이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생각나니? 그때 ..우리 고등학교 졸업파티 날이었나? 너가 너희 집에 나 숨겨준 거.”
“기억나지. 결국은 너희 아빠가 나 홈스테이하는 집에 찾아오셨잖아. 너는 너희 아빠한테 질질 끌려가고 난 막 울고. 그때 끌려가서 아빠한테 또 맞았지?”
“그런 분이 지금은 병원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신다. 아버지 건강 때문에 모시고 들어온 거야.”
“어디가 아프셔?”
“뇌졸중. 정말 너무 잘 어울리는 병명이지? 그렇게 고함을 쳐대고 성질을 부리시더니. 날 죽일 듯이 그렇게 때리던 분이 본인이 먼저 가시게 생겼다.”
“…그랬구나. 나 병문안 가도 돼?”
“그래. 너 얘기 가끔 하셨어.”
“정말?”
“나 그때 너한테 비참한 꼴 다 보여 줬는데…그땐 너가 많이 의지가 됐어. 너한테 고마운 게 참 많다.”
“아니야.”
지훈이 갑자기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말했다.
“다라야..그땐 내가 잘못했어. 진심으로 미안해. 그런 식으로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도 없이 혼자 한국 가버리는 게 아니었어.”
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저 내가 싫어졌겠지. 남녀 사이에 헤어지는 이유 단 하나지 뭐.”
지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라야, 그건 절대 아니었어. 내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너랑 미래를 함께 설계하기엔…내가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어. 내 앞길도 못가릴 처지라 니 앞에 당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도망친거야.”
‘난 너만 있으면 행복했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와서 소용없는 말…
“그래도 왜 말도 없이 가버렸어? 나한테 이별통보라도 해주지. 나..좀 힘들었었어. 아니 사실 많이 힘들었었어. 외국이라 더 그랬나봐. 가족들도 없으니까 더 외로워져서.”
“실은 그대로 아버지랑 살았다가는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너 경찰서로 날 찾아왔을 때 그때 결심했어. 그냥 떠나기로. 한국에 엄마한테 가야겠다고 결심했어.”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면….”
“너까지..책임지기엔 내가 너무 어렸었어. 우린 겨우 열여덟에 만났고 내가 영국을 떠났을 땐 겨우 스물 한 살이었어.”
“그래..우린 겨우 스물 한살이었어.”
식사를 마치고 그와 난 그의 차 안에 있었다. 그의 차가 우면동 우리 집 앞에 섰다. 나도 그도 아무말이 없었다. 난 그대로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린 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그와 난 그의 호텔방으로 갔다. 지훈과 난 나란히 호텔 창밖으로 서울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지훈이 말했다.
“저 많은 불빛 중에 왜 우리가 편안하게 쉴 곳은 없을까? 내가 그런 생각 했었던 게 생각 난다.”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어. 그때는 서울 시내 불빛들이 아니었고 런던시내 불빛들이었지만…”
그가 술주정하는 아버지를 피해 날 찾아오면 우린 런던 시내를 함께 배회하다가 공원에서 손을 잡고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린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우리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에 대해서 얘기하곤 했다. 그런 얘기들이 지훈에겐 미래가 현재보다는 확실히 나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얘기들이었다.
처음으로 유학을 와서 입학한 학교에서 영어도 못하는 나는 지훈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다. 어느 날 내게 바나나 껍질을 던진 학교의, 한국말로 하면 쌈짱정도 되는 코니 놈의 멱살을 잡았던 건 바로 지훈이었다. 학교에서 유독 동양 애들만 괴롭히던 코니 일당과 대적할 만한 아이는 지훈이뿐이었다. 지훈은 한국 유학생 아이들의 대장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어느날 농구를 하던 한국유학생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던 코니 일당과의 싸움이 커져서 지훈은 정학을 당했다. 지훈은 주먹 한번 쓰지 않은 피해자였지만 학교는 불공평하게도 힘있는 코니 부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훈의 정학은 지훈아버지의 심기를 건두렸고 결국 폭행으로 이어졌다. 지훈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맞았고 그때 처음으로 내게 한국에 있는 엄마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난 대학을 갔고 지훈은 대학은 커녕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함께 돌보아야 했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그에게 손을 대던 날 경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힘이 없어서 지훈이 아버지에게 맞은 게 아니었다. 지훈은 자신이 방어를 하면서 아버지의 팔이라도 잡게 되면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를 때리는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경찰서로 그를 찾아간 날, 지훈은 내 얼굴을 외면했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지훈은 고맙게도 성숙하고 성공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내게 말했다.
“우리 키스도 못해봤던 거 알아?”
그랬다. 우린 간신히 떨리는 손을 잡고 서로 땀이 흥건해도 놓지 못하는 그런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너무 어렸었나? 아니면 너무 순진했었나?”
31살의 지훈이 내게 다가온다. 그가 내게 키스를 했다.
시간이 블랙홀로 빨려 들려가서 우리가 다시 열 여덟살, 교복을 입고 수업을 듣던 그 맥클린즈 하이스쿨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훈이 한국에 가지 않았으면 우리가 함께 십 년의 세월을 같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지훈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가 말했다.
“다라야..널 잊은 순간들도 있어. 새로운 사랑도 했어. 그리고 나에겐 나만 믿고 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여자가 있어. “
지훈이 나에게 키스를 하자마자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고 그런데도 내게 키스를 했고 날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날 잊은 순간들도 있다고.. …화를 내야 하는데 눈물이 났다. 화가 나기는커녕 가슴이 아프기만 했다. 지훈이 말했다.
“하지만 다라야..난 널 이대로 보낼 수가 없어. 나 어쩌면 좋으냐?”
“…”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 어떡하냐…다라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책임져.”
“…?”
“너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서? 그러니까 책임져. 스물 한살때는 우리가 서로를 책임지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는 나이잖아.”
“그런데..나 이러고 있어. 널 보낼 수가 없어서.”
“….오늘은 같이 있자.”
그와 난 밤새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팔을 베고 난 잠이 들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음날 일요일 오후에 집에 가자 엄마가 날 보고 말했다.
“너 어디서 자고 지금 기어들어 오냐?”
“이사장님 집에서 오지.”
“이것이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해? 사돈총각한테 전화 왔었어. 너 여기 있느냐고. 핸드폰은 왜 안 받어? 너 어디서 외박이야. 외박이? 내가 사돈네 창피해서 못 산다.”
“경미 집에서 잤어! 근데 기훈씨가…뭐래?”
“뭐래긴..”
엄마가 내 등을 내리치셨다.
“사돈댁에서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내가 말을 했니? 안 했니?”
내가 심술궂게 한마디 했다.
“아빠도 이사장님이 그 충주 수제비 집 아저씨라는 거 아셔?”
“으이구, 당연히 알지! 니 아빠도 최대장님 만났어.”
“아빠도 언니 결혼 찬성하셨어?”
아빠가 부엌에서 나타나셨다.
“여보, 이거 다 했는데?”
아빠가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담그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하게 보였다.
“김치도 담그셔 이젠?”
“놀면 뭐하니?”
엄마가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얘, 니 아빠가 손수 오이 장아찌도 담그셨다.”
“와아.”
아빠가 말했다.
“내가 괜히 그 때 용기를 냈어. 꼴에 시집이나 주면서 당신 안 꼬셨으면 당신 그 양반이랑 결혼했을 거 아냐? 그러면 그러면 지금쯤 이사장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잘 살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엄마는 이렇게 응수를 하셨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내가 ‘옥자에게’ 라는 당신 자작시 한 편에 홀라당 넘어갔으니 얼마나 순진했어? 그저 어느 놈이 돈이 더 많나 그런 거나 생각했어야 했는데….이런 말이 듣고 싶쑤?”
“…”
“여보, 그나저나 정연이 결혼날짜나 빨리 잡자구요.”
“근데 애 셋 딸린 남자한테 정연이를 준다는 게…아무리 남자가 바르게 생긴 것 같다고 해도.”
아빠가 헛헛한 표정을 지으셨다. 엄마도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죠. 지 새끼도 키우기 어려운데 남의 자식을 키운다는 거 그거 쉬운 일이 아니지. 근데 여보, 정연이 걔가 지금까지 결혼하고 싶다고 한 남자들 어디 문제가 없는 놈이 있었어요? 독산동 아줌마가 남자가 이혼한 게 뭐가 흠이냐고 그럽디다. 이혼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같은 거래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두 자동차가 같은 길에서 만나서 충돌하고 만 거래.”
아빠가 말했다.
“사람은 좋아 보이긴 하더만.”
정연언니와 집 앞에 카페에서 만났다.
“언니 뭐야? 집에 와서 얘기하자니까 왜 여기서 보재?”
“석훈씨 만나기로 했거든.”
“언니 정말 결혼하는 거구나?”
“그럼 정말 하는 거지 가짜로 하는 거니? 하긴 나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해.”
언니와 석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석훈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렇게 언니와 석훈이 둘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한 그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저 라라 내니일 그만둘게요.”
“뭐?”
언니가 놀라는 것을 무시하고 내가 석훈에게 말했다.
“좀 힘들어서요. 어차피 한시적으로 일하기로 한 거였는데 다행히 언니랑 사장님이랑 결혼 얘기도 오가고 그리고 언니는 결혼하면 전업주부로 사는 게 꿈이거든요. 그래도 되죠? 사장님?”
석훈이 언니를 보았다.
“정연씨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언니가 말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기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난 출퇴근하면서 라라 돌보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싶어.”
석훈이 침착하게 말했다.
“안그래도 아버지랑 얘기가 있었어요. 정연씨가 아이들하고 좀 더 친해질 기회가 필요할 거라구요. ”
“그럼 다 잘된 거죠? 제가 라라한테는 잘 설명할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말했다.
“왜?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래요. 처..제.”
그의 처제라는 말에 언니와 나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아니에요. 두 분 데이트 하시는데 방해하긴 싫어요.”
집에 생맥주랑 닭을 사가지고 들어가려고 집앞에 호프집에 들어갔더니 정애언니와 큰 형부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제!”
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오나가나 커플들이네.”
두 사람이 날 잡아 억지로 앉혔다.
“왜 두 분이 분위기 좀 잡으시지?”
언니가 닭다리를 뜯으며 말했다.
“너도 10년 살아봐라. 둘이 맨날 보는데 무슨 분위기?”
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이야? 정연이 처제가 결혼할 사람이 …”
정애언니가 말을 가로챘다.
“애 셋 딸린 홀아비.”
내가 말했다.
“그냥 홀아비 아니셔.”
“홀아비가 홀아비지 뭐.”
“언니 , 고현정도 이혼녀고 숙자언니도 이혼년데 같은 이혼녀야?”
“아니지. 숙자 걔는 지금도 보험건수 올리느라 눈에 혈안이 됐지.”
“그래, 그런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교장선생님 좋은 분이셔. 조건보다 사람을 따진다면 정연언니가 탁월한 선택을 한 거야.”
“근데 이혼은 왜 했대니?”
“몰라. 이혼한 게 죄야?”
“얘가 왜 이렇게 날카롭게 그래? 누가 죄래?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이혼할 만 하니까 했겠지. 뭐 성격파탄자라서 이혼했겠어? 언니는 뭐 이혼하고 싶었던 적 없어?”
“그래 있었다. 왜?”
형부의 얼굴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형부. 내가 분위기 다 망치네.”
“아니야. 처제랑 저형이랑 말하는 거 이제 다 익숙해.”
“…?”
“처음엔 당신이랑 처형, 처제 얘기하는 거 듣고 있으면 통역을 불러야 하나 경찰을 불러야 하나 그런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적응됐어.”
“세상에 다 형부 같은 남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니가 눈치가 빨랐다.
“왜? 어떤 남잔데? 요새 만나는 남자 있지?”
“아니. 언니, 음…언니! 내..내 친구가 있는데 어떤 남자를 만났대. 만난지 석 달만에….근데 둘이 서로 확실히 끌렸어. 그래서 키스도 하고..아, 형부 이런 얘기 듣기 불편하시죠?”
형부가 일어서려 했다.
“그럼 처제랑 놀다 와. 난 일어”
내가 형부를 잡았다.
“아니에요. 좀 그런 얘기긴 한데 형부가 남자니까 오히려 잘됐어요. 들어보세요.”
형부가 자리에 앉았다. 언니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닭을 뜯었다. 난 계속했다.
“그래서..둘이 키스를 하고… 실은 여자가 먼저 한 거나 마찬가진데.. 하여튼 남자가 키스를 하고 이렇게 말한거야. 어떤 남자라도 그런 유혹엔 넘어갈 거라고.”
“근데?”
언니가 급하게 물었다.
“근데 여자는 남자가 좋았던 거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남자한테 꼬리 아닌 꼬리를 치게 된거고. 근데 여자는 남자가 믿음이 가질 않아. 고백해봐야 그냥 남자가 자길 가지고 놀 것 만 같고. 더 큰 문제는 이 여자..여자의 언니가 그 남자의 형하고 결혼을 하는 거거든. 그렇게 되면 사돈끼리 사귀게 되는 거잖아.”
“뭐야?”
언니가 닭을 던져버렸다.
“너 미쳤어?”
형부가 조심스레 나섰다.
“왜 화를 내. 여보?”
“당신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얘 지금 자기 얘기 하는 거잖아?”
“아니야!”
내가 부정했다. 언니가 냉정하게 내게 물었다.
“너 바보지? 니 얘긴 거 티 다 나잖아 지금!”
“…아니라니까! 그..근데 ..그 여자한테 갑자기 첫사랑이 나타난 거야.”
언니가 내 말도 듣지 않고 말했다.
“안돼.”
형부가 말했다.
“왜 안돼?”
언니가 핏대를 세웠다.
“당신도 알잖아. 부부는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람이야. 아주 웬수가 된다구. 웬수! 근데 만약 다라랑 그 시동생이랑”
“시동생!!”
그 시동생이라는 말에 내가 질겁을 하자 큰언니가 계속했다.
“정연이한테는 시동생이지! 다라 너랑 그 시동생이랑 사귀다가 설사 결혼을 한다해도 혹시 잘못되고 그러면 이건 피해가 정연이한테도 가는 거라고. 집안이 둘 다 풍비박산 나는 거야.”
형부가 말했다.
“왜 쓸데없이 헤어질 걱정을 해? 그리고 처제가 그 정연이처네 시동생하고 결혼까지 생각하는지는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결혼도 안 할거면서 왜 만나? 정연이 시동생이랑 연애만 하는 것도 웃긴거야. 결혼할 생각도 없이 둘이 그냥 앤조이만 한다는 거야?”
내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얘길 꺼내는 게 아니였어.”
형부가 말했다.
“그 남자, 사람은 어떤데? 괜찮은 남자야?”
김기훈 어떤 사람이지?…건방지지만 조카들을 사랑하고 까칠하지만 날 데리고 병원에 가는 그. 언제나 툭 툭 내뱉는 말이지만 듣고 보면 말이 되는 그의 말. 웃을 땐….그가 조카들과 웃을 때 질투가 날 정도니…그의 미소는 그의 모든 성격의 결함을 다 날려버린다. 그는..그런 남자다. 그는 나의 ‘유혹을 못 이기고’ 키스를 하긴 했지만 그걸 빌미로 사귀어보자고 내게 대쉬하지는 않는다. 그는..그는.. 그는 …그가 어떤 남자인지 난 정말 모르겠다.
“아직은 잘..몰..라요.”
언니가 쏘아붙였다.
“잘 모르는 남자하고 키스했니? 잘 모르겠는 정연이 시동생 될 남자랑 키스했냐구?”
형부가 말했다.
“조용히 해. 여보. 남녀 사이에 그럴 수는 있지.”
정애언니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보!! 당신 원래 이렇게 개방적인 사람이었어?”
내가 나섰다.
“아니! 다 아니야! 지금 너무 오해들을 하신다. 우리 둘 다 술 먹고 좀 실수가 있었어.”
“너 그 남자 당장 때려 쳐!”
“…뭐 우리가 시작한 것도 아냐.”
내가 일어서려 하자 언니가 날 주저앉혔다.
“내 말 잘 들어! 남자는 그래 니 그저 형부 같은 사람이 짱이야. 어떤 여자들은 남편들이 머리를 볶아도 긴 머리를 싹둑 잘라도 못 알아본다고 칭얼대는데.. 그런 거 못 알아 볼 정도로 둔하고 뭘 해줘도 잘 먹고 머리 잘 못 굴리고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그런 남자 만나야 결혼생활이 편한 거야.”
형부가 말했다.
“나 칭찬이지?”
언니가 계속했다.
“너 대충 느낌으론 그 남자 여자들 마음 꽤나 울렁거리게 할 스타일 같은데…안그러고 니네가 키스를 했을 리도 없고. 너 절대 나쁜 남자 좋아하지 마. 나쁜 남자한테 속 썩어 봐야 아이고 내가 이렇게 머리가 모자란 단순한 남자 괜히 찼지 괜히 찼어 후회를 한다니까.”
형부가 말했다.
“처제! 언니가 나 지금 칭찬하는 거지?”
언니에게 절대 비밀이라고 입막음을 단단히 했다. 내가 말을 꺼낸 게 바보다. 게다가 지훈이 얘기까지 했으면 둘이 뭐라고 했을까? 난 정말 남자인 형부의 조언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첫댓글 재미있어요... 날마다 오셨슴 좋겠어요...
제말이요 ㅎㅎ 아침부터 열매방을 서성인다니깐요
난 세번째~~~^^
진짜진짜재밋어요..ㅠㅠ 매일매일오면 참좋겟지만..그건..무리겟죠?ㅠㅠ....
아 저번편에..... 첫사랑만나서... 푹풍콧바람내면서봤어요 ㅋㅋㅋ 아 넘흥분해써 ㅋㅋㅋ 잘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