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염씨 시조 고려 삼한공신 염형명 본관은 파주(坡州) 단일본이다. 문헌에는 파주 외에도 개성 ·광주 ·양주 ·충주 등 여러 본이 전하나 모두 파주염씨의 분파 세거지(世居地)이다. 파주염씨를 봉성 또는 서원(瑞原) 염씨라 했는데, 이는 모두 파주의 옛 별호이다. 시조는 고려 건국때의 삼한공신으로 사도에 오른 염형명(廉邢明)이며, 중시조는 고려 공민왕, 우왕 등 다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문하시중을 지내고, 곡성부원군이 되신 명재신 충경공 염제신(廉悌臣)이다. 염제신에게는 고려 공민왕이 친히 그려 하사한 초상화가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돌아가신 후 충경공 시호가 내려졌고, 왕명에 의하여 목은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쓴 신도비가 경기도 장단군 묘소앞에 세워졌다. 파주염씨는 고려시대의 명문세도가로 신약(信若)은 명종 때의 명신으로 효자정문이 세워졌으며, 신약의 손자 승익(承益)은 충렬왕 때 크게 세도를 떨쳤고, 또 중시조 염제신의 아들 3형제 국보(國寶:藝文館大提學, 국파공) ·흥방(興邦:藝文館大提學 上護君, 동정공) ·정수(廷秀:右文館大提學 ·청강공)가 모두 공민왕과 우왕 때 이름을 떨쳤으나, 흥방이 당시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이인임(李仁任)의 일파가 되어 문신들을 추방하고 권세를 전횡하다가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에게 1388년 무진참화때 형제등 친인척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이로 인하여 숨어 지내다보니 조선시대에는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때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의병을 일으켜 목숨바쳐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염걸.염서장군과, 염경, 염언상, 염홍립, 염세경 등이다. 이후로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나설 수가 있게 되다보니 조선 인조 때 장령(掌令)을 지낸 우혁(友赫) 외에는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일제 때에는 광복군에서 활약한 염온동, 백의사 총사령을 지낸 염응택(염동진), 염재보, 소설가 횡보 염상섭 등이 있으며, 염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7,170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약 2,000가구가 함남에 집중해 있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3만 2,557명으로 순위는 258성 중 제62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5만 4,533명으로 전국 274성 중 제62위였고, 200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6만 3,951명으로 286성중 제62위다. [출처] 파주염씨 시조 고려 삼한공신 염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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