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오늘 아침 신문을 펼쳤다가 유독 한 글자에 눈길이 멈췄다. ‘닻’. 거대한 흐름과 복잡한 해석이 담긴 기사 제목 속에서,
그 한 글자는 이상하리만큼 단단하고 조용하게 마음에 내려앉았다. 닻이라니. 배를 멈추게 하는 물건, 떠내려가지 않도
록 붙들어 주는 장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삶의 비유가 스며 있다.
닻은 그저 무겁기만 해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바다 밑바닥에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가지처럼 벌어진 닻혀가 흙이
나 모래를 움켜쥐듯 박혀야 비로소 배를 붙잡는다. 아무리 튼튼한 쇳덩이라도 바닥이 단단한 바위라면 속수무책이다.
걸리지 않으면, 고정되지 않으면, 거센 바람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예전에 부산 남항 외항에 수많은 선박들이 대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화물을 기다리며 바다 위에 떠 있던 배들은 겉보기
엔 평온했지만, 그 평온은 닻 하나에 의지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돌풍이 불었고, 그중 여러 척이 해안으로 밀려
와 좌초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닻이 바닥에 제대로 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내려진 닻은 그저 무거운 쇳덩이
일 뿐, 배를 지켜주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닻을 내리고 살아간다. 신념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쌓아온 가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평온한 날에는 닻이 있는지조차
잊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바다에서의 경험은 그 사실을 더욱 또렷하게 일깨워준다. 한 번은 태풍을 피해 항로를 바꿔야 했던 적이 있었다. 자연은 인간
의 계산을 비웃듯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고 세력을 키웠다. 그때 배를 돌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 한 번은 출항 준비의 사소한 부주의로 앵커 체인이 풀려버린 적도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본을 놓쳤을 때, 위험은
조용히 스며든다.
결국 닻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다. 그것은 ‘확인’과 ‘책임’의 상징이다. 닻을 내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박혔는지 확인
해야 하고, 풀리지 않도록 끝까지 점검해야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과 선택을 믿지만, 그것이 절대로 흔들
리지 않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린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예상하지 못한 조류가 방향을 바꾼다. 그때 나를 붙잡아 줄 무언가가 없다면,
우리는 쉽게 떠밀려 간다. 문제는 닻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박혀 있느냐이다.
혹시 지금 내 닻은 바위 위에 얹혀 있는 것은 아닐까. 단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붙잡지 못하는 상태는 아닐까. 혹은
바쁘다는 이유로, 익숙하다는 이유로 점검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같은 바다는 단 한 번도 없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닻을 더 깊이, 더 단단히
내려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이 제대로 버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의 닻은 지금 어디에 박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