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고문경찰 노덕술(盧德述 1899~1968년 ). 친일경찰 노덕술 좌측
일본 훈7등 종7위 훈장의 마쓰우라 히로의 친일경력
노덕술은 경북 울산 출생으로 울산 보통학교를 중퇴,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 북해도로 건너간후 귀국하여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근무를 시작으로 친일의 이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울산경찰서 사법계 근무중 순사부장이 되었고 각 경찰서 사법주임을 지냈으며,경부로 승진,서울본정,인천,개성,종로 등 각 경찰서 사법주임,고등계주임을 맡으며 평남 보안과장으로 해방이 될때까지 27년간 사상관계사건을 취급,일제로부터 훈7등 종7위(勳7等 從7位)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 경찰부장을 지낸 자는 황해도 경찰부장 윤중화.해방 직전까지 경시가 된 자는 총 21명이었다.해방 당시 일제 경찰의 경시를 지낸 인물은 최경진,최연,전봉덕,이익홍,윤우경,노덕술,손석도,노주봉 등 8명이었다.노덕술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 드물게 일제경찰 고위직인 경시까지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노덕술이 독립 운동을 했던 동족을 탄압하고,전국 총독부 경찰서에서 27년간 근무하면서 다룬 사상관계 사건은 많다.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 확인된 노덕술의 대표적인 친일범죄
노덕술은 서울 종로서,서대문서에서 근무했던 김영호,이구범과 함께 악질로 손꼽혔던 인물이었다
노덕술등 친일경찰들의 고문은 머리카락을 뽑고 혀를 뽑고 물을 먹이는등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해방후에도 고등계 출신 친일경찰들은 미군정 경찰의 핵심부에 등용되었고,정부 수립 후에도 한국 경찰 핵심부를 장악하여 이승만 정권하에서 거물급으로 행세하였다.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경찰들은 좌익을 색출하고 공산당을 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친일파에서 애국자들로 변신했다.
1927년 혁진회 사건 |
김규직,김진흥을 중심으로 150명의 회원을 가진 비밀 독립 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가
반일 투쟁 및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배일 투쟁사와 조선 역사를 기록한 배일지집(排日志集)을 작성,배부하고 항일 운동을 하자 직접 이 사건을 담당하여 혁조회소속 김규직.김진흥을 고문으로
옥사하게 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
1929~1930년
동래고등보통학교
맹휴사건 |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학생 간에 민족적 감정으로 4~5차례에 걸쳐 발생한 사건.
노덕술은 매번 조선인 학생 탄압만을 목적으로 한 검거에 직접 부하들을 지휘,조선인 학생들
검거에만 앞장섰다 |
1929~1930년
동래유치원 귀국 강연회 |
동래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시 동래군 동래유치원에서 조선인 일본 유학생의 귀국 강연회가
일본 정치 비난이라는 구실로 고등계에 속하는 사건을 직접 담당하여 조선인 강연자 수명을
검거 취조하였다. |
1928년 |
동래경찰서 사법주임 재직시 동래면에 거주한 박일경이 반일 투쟁 단체인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동래노동조합 정치문화부장,신간회 동래지회 간부인 것을 알아하고 사법주임으로서 이를
말살시키려고 검사 취조하였다 |
1932년 |
통영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시 반일 단체인 M.L당 조직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는 죄로 김재학을 직접 검거 천장에 매달아 구타,입에 물을 들이붓고,전신에 폭행을
가하는 등의 온갖 방법으로 혹독한 고문을 강행한 후 송국하여 벌금에 처하게 하였다. |
1944년 |
평안남도 경찰 보안과장 재직시 자동차 수송협력회 이사로 있으며 육상 운반구,화물자동차 등을
징발,군수품 수송에 제공케 하는등 일본 전쟁 수행에 협력하며 독립운동가를 살해한 죄 등이다.
이외에도 노덕술은 일제에 의한 출세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업무와 상관없는 일에까지
뛰어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공적을 쌓기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
노덕술은 해방후에도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을 벌였고,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을 와해시키기 위해반민특위 간부 암살 음모도 꾸몄다.
그는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인 5명의 의원과 특별재판관 5명의 암살 명단을 주며 검찰총장에게 처리해 달라하였다. 반민특위 회원들을 납치,유서를 조작하여 암살한뒤 빨갱이들의 월북을 막으려 사살하였다고 사건을 조작하려 하였다
노덕술: 친일 고문경찰의 대명사(자손이 누군지가 제일 궁금했었습니다.알고보니 22대 전 국무총리 노재봉이 더군요)
노재봉 전 국무총리1936년 2월8일~ (만76세)경남 마산시
노재봉(盧在鳳)- 친일고문경찰의 대부 노덕술의 아들
생년월일 : 1936년 02월 08일
현 직 : 서울디지털대 총장
前 국무총리
직 업 : 공무원, 국무총리
최종학력 :서울대 정치학과 졸
미국 뉴욕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최근경력 : 서울디지털대 총장 ,명지대 정치학과 연구교수
부친 노덕술-일제 때 경부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어 반민특위(反民特委)를 와해시키는 데 지대한 공,친일악질고문경찰의 대부.그의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이 놈에게 고문으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분들은 그 수를 헤어리기 힘들다고 함.이 자 하수인이 친일고문경찰 하판락. 우리나라에 국정원 고문기술은 노덕술이 전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노덕술:(1899~1968)
일제강점기의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울산보통학교 2년을 중퇴한 후 일본인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 경찰을 지원, 경남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친일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8년 경부(警部:해방 후 경감으로 바뀜)로 승진하여 서울 본정(本町), 인천·개성·종로 경찰서 등에서 사법주임을 역임했다. 1934년 평안남도 보안과장으로 승진하기까지 27년간 독립운동과 사상관계를 다루는 고등계 형사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검거·고문하여 일제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는 등 반민족행위를 일삼아왔다.
8·15해방직후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던중 시민들에게 붙잡혀 몇 달 동안 구금되었다가 월남했다. 1946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 의해 수사과장으로 임용되어 좌익계를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검거령이 내린 친일경찰인데도, 오히려 미군정기의 경찰조직에서 반(反)이승만세력을 배제시키는 데 앞장서면서 하루아침에 친일고문경찰이 애국자로 변신했다. 심지어 이승만의 지시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습격사건'에 참여하여 결국 해체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좌우대립의 국면에서 그와 같은 친일경찰들을 중용하여 정권장악에 이용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파동이 일어나자 군헌병대로 피신했는데, 당시 많은 친일경찰 출신이 이승만정권의 헌병대로 들어가 초기 인맥을 형성했다. 헌병중령으로 부산 범죄수사대(CID) 대장과 1955년 서울의 15 CID 대장을 역임했다. 이승만을 사이에 두고 독재의 상징인 특무대 사령관 김창룡과 경쟁하던 중 절도사건관계로 실형을 살다가 김창룡이 암살된 후 출옥하여 잠적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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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28일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 발표! 그 속에 노덕술이 있다 !
지난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3년만에 친일파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지만, 1948년 온 국민의 열망과 관심 속에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수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특위 습격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제 청산의 과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해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를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친일파 문제를 천착해 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3월 10일(일요일) 밤 11시 25분, 53년만에 사라졌던 '역사의 법정'을 연다.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일경(日警)의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으나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중용되었으며, 이후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 암살 사건' 모의를 주도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던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전봉덕, 이익흥 등의 친일경찰 세력들과 함께 독재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2002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에서는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통해 이 시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를 찾아본다.
●주요 내용
일경(日警)의 호랑이, 고문 경찰 노덕술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 "박처원, 이근안으로 이어지는
한국대공경찰의 맥은 노덕술로부터 시작된다."
1947년 1월 수도청장 장택상을 저격했던 한 청년의 시체가 한강 얼음 구멍에 버려졌다. 그 후 몇 달 뒤 본명 박성근, 일명 임 화라 불렸던 이 청년을 고문한 끝에 죽게 한 경찰이 검거되었다. 일명 '임 화 고문치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장본인은 바로 수도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문에 의해 죽은 사람은 비단 박성근(임 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해방 전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게 한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일제 경찰 경시를 지낸 8인 중의 한 명!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 "수도청에서 비호했으니 잡는데 석 달이나 걸렸지"
1899년 울산 장생포에서 출생한 노덕술은 일제 치하에서 경시까지 오른 몇 명 안되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일본인 상점의 급사로 출발. 경남 순사 견습소를 나와 말단 경찰 생활을 시작한 노덕술. 보통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에 집안도 그리 좋지 못했던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시대, 동래고보 독립 시위 사건, 흑조회 김규직 고문치사 사건, 통영 M.L당 김재학 고문 사건 등에서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였던 노덕술.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미군정에 의해 '수사 기술자'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중용되었다. 그리고 이후 반민특위 제3조 -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에 해당되어 검거되었지만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후, 노덕술은 보석으로 출감했고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속에서 헌병대로 피신했다. 그에 대한 반민 재판은 종결되지 못했으며,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일제를 위한 반공에서 독재를 위한 반공으로
선우종원 (당시 검사) - "친일파들은 큰 정치세력이었다. 이승만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끝까지 일을 했다" 이렇게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반공투사로, 이승만 정권의 전위대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치 세력을 다지기 위해서 이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면죄부는 좌우 대립과 민족상잔의 한국 전쟁을 통해 주어진 '반공'이었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과 손 잡은 친일파들은 국회 프락치 사건, 김 구 암살 사건, 52년 부산정치 파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깊숙히 개입했고, 그 속에서 노덕술은 '독립운동가를 검거하는 일제경찰'에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경찰'로서 변모해갔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 '자숙'과 '반성'은 그들에게 없었다
하판락(생존하는 일제 고문경찰) - "어디 사람이 약점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현재까지 알려졌던 노덕술의 행적은 1955년 서울 CID(육군범죄 수사단) 대장으로서의 경력이 마지막. 이후 잠적 및 사망으로 추정되던 노덕술의 행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1955년 헌병대를 그만 둔 후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나타난 것은 1960년 7.29 선거였다. 친일경찰로서 악명 높았던 그가 4.19 직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당히 입후보 한 것이다.
이렇게 노덕술이 국회의원 선거에 아무 거리낌없이 출마할 수 있었듯이, 이후 친일경찰들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권력의 중심부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일제 시대 경시까지 지냈던 전봉덕은 해방 이후 각종 정치 공작 사건에 깊숙히 관계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80년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의 원로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그들에게 '자숙'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이광우씨를 고문, 반민특위 법정에 섰던 고문경찰 하판락.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 중 극히 드문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지금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친일경찰들이 대한민국 경찰로 옷만 갈아입는 과정에서, 미군정에서의 친일경찰 출신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경찰 최능진과 같은 사람들은 파면당했으며, 이후 최능진에게 돌아온 것은 '내란음모죄' 혐의와 사형집행뿐이었다.
방송 최초, 중국에서의 한간 처벌 취재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잊혀졌던 친일파 청산의 문제. 그러나 과연 우리 민족은 그 혼란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변명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 지난 해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 처벌 사례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 취재에 이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한국과 유사하게 좌우 대립과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공존했던 중국의 사례를 방송사상 최초로 취재했다.
종전 직후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중국공산당 정부의 대립 속에서도 일본에 협력한 한간(漢奸)들을 엄중히 재판했다. 중국에서는 종전 직후 당시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괴뢰정부인 왕조명의 '남경정부'와 푸이의 '만주국'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실시했고, 이러한 과제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느냐가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 정부간의 국공내전의 성패를 사실상 결정했던 것이다.
본 프로그램에서는 한간 처벌에 대한 당시의 기록들과 목격자, 그리고 한간 피해자 등을 만났다. 중국에서의 한간 처벌을 취재함로써 53년 전 멈춰버린 '역사의 법정'이 다시 세워져야하는 이유를 짚어보았다.
● 주요 출연자
<국내 출연자> 강신옥 : 변호사. 92년 국회 김 구 암살 진상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강원용 : 크리스챤 아카데미 회장. 선우종원 : 1952년 부산정치 파동 당시 장 면 총리 비서실장 윤경빈 : 대한광복회 회장 이기형 : 여운형 비서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이원용 : 반민특위 총무과장 이항녕 : 홍익대학교 명예 총장. 일제시대 창녕 군수로 해방 후 양심 선언. 하판락 :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생존하는 고문경찰. 한현우 : 송진우 암살범. 노덕술에게 체포
<중국 출연자> 석원화 : 중국 북단대학교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원 욱 풍, 욱효민 자매 : 부친 욱화신(전 강소 고등법원 재판장)이 한간에게 살해당함 임치파 : 중국항일전쟁사학자, 중국항일전쟁사 학회 이사 주애민 : 중국 흑룡강성 동북문화사연구회 회장 전국무총리 서울디지탈대학 총장 "노재봉" 친일경찰 노덕술 아들 맞다!! http://cafe.daum.net/kokoin/Bxw2/447
5선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면서 유도실력이 10단으로 대한체육회장을 지내기도 한 |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83세, 3월24일)의 회고록 일부분....... 나(신도환)는 수복직후 서울에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을 맡았는데 극히 악질적으로 부역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부부를 만났다. 지하실에서 형편없는 물골로 처형당할 날만 기다리는 그들 부부는 바로 김성곤(쌍용그룹의 창업자, 제3공화국의 막강한 실세정치인이었음)부부였다. 나는 그들과 일제시대때부터 친분이 있었기에 몰래 그들을 빼 주었다. (이상 신도환 회고록에서) 그 김성곤은 훗날 대재벌이 되었고 극우파의 우두머리격이 되었다. 자유를 위해 몸 바친 진정한 반공투사들은 숱하게 빈곤한 상이용사로 전락한 반면 악질 부역자인 김성곤은 극우파의 투사가 된 것이다. 2. 일제시대 수 많은 악질 친일경찰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으로 불리울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그는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으로 여러명의 독립투사들을 실제로 자신의 손으로 고문중에 죽인 사람이었다.(독립투사들의 손톱, 발톱뽑기, 혀 뽑기, 칼로 찌르기들을 통해서...) 그의 아들 이름은 노재봉인데 영삼이하(노태우정권)에서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다. 넓게 생각해서 아버지의 죄로 반드시 아들이 근신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동아, 조선등이 그의 가족상황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의 경우 이를테면 노통의 장인, 과거 영삼이 출범때의 전병민의 장인등등 비단 친아버지 뿐만 아니라 장인 장모에 이르기까지 미운 사람들의 가계를 샅샅이 들추어 내어 낙마를 시도하는 그들이 친일파가 등용될 경우에는 끝내 입을 다물고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노재봉의 아버지가 노덕술이라는 것은 작년에 처음 알려졌다.) 3. 해방후 백범이 환국했을 때 김성수를 위시한 한민당인사들은 백범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12월이었으니 한 겨울이었다) 문앞에서 장장 8시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안 만나주겠다는 전갈을 하인으로 부터 받고 나서 백범과 함께 기거하던 이시영선생을 불러내어 사정사정한 끝에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 엄동설한에 길가에서 선채로 8시간이라...오줌은 어디다 눴을까? 들어가서 백범을 만났는데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장택상등이 큰절을 올렸는데도 맨뒤에서 절을 올리던 장택상이 힐끗 보니 백범은 맞절은 커녕 목례도 않는게 아닌가. 일동이 물러나올 때 까지 백범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악수도 없었다.(이상 장택상 회고록에서) 아마도 백범암살결심은 이미 이때에, 즉 이들이 백범의 숙소에서 나올 때 이루어진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백범에게도 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던가 보다. 동아일보 창간사를 썼던 장덕수와 김성수의 파트너였던 송진우를 암살한 배후에는 백범의 한독당이 있었다는 게 정설인 것을 보면... 백범은 왜 그들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동아를 창간한 김성수등의 친일이 단순한 생계형 친일이 아니라 극히 악랄한 친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김성수는 아직까지도 아이들의 위인전에 대표적인 애국자로 나와있다. 그리고 동아와 조선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언론기관으로 행세하고 있다. - 신도환 회고록- *회고록에선 영삼이하에서 국무총리가 됐다고 나와있지만..실은 노태우정부때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죠. |
첫댓글 _()_ 나무 관세음보살
유익한 정보 고맙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빨갱이 타령으로 피해를 당한 수 많은 피해자를 위하여
연좌제 폐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나,
우리나라는 엉뚱하게도 친일 반역자들의 자손들이 살아 남는 방법으로 활용 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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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_()_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