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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우석을 지지하는 기독교인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모도리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부정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종교계나 의학계나 "생명"이란 단어에 대해 그 숭고함으로인하여 엄숙함마저 감도는 느낌의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윤리 개념에 대해 어떤 특정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좌지우지되고 규정되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왜 그런 것일까?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생명이고 생명체일까에 대해서 연구는 계속 되어야하겠지만,그 해석에 따라 생명윤리의 개념도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 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해석의 방법론적 차이는 각 학계별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존엄성에 대해서만큼은 다를 수 가 없을 것인데,
필자는 특정종교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으나, 과거에 일어났던 세기의 속임수가 역사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만을 가지고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려 합니다.
1,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
거짓말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언제나 순결하며, 오랜 시간 동안 회자되어 왔습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함으로써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의 종교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천동설(2세기)과 지동설(15세기)의 대결은 중세와 근세의 대결, 신앙과 과학의 대결, 교황과 군주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과 진리의 대결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단으로 몰리면 지동설을 주장했던 부루노 신부와 같이 화형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종교 재판정에 섰을 때 끝까지 과학자의 양심을 지켜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법정문을 나서며 독백을 함으로써 교황청의 미움을 받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2세기경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주장해야만 했던 교황청의 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나오기까지 무려 350년가량 비과학적인 엉뚱한 신학적 이론을 유지하기위해 교황청에 반하는 천재 과학자들의 목숨이 다수가 필요했었습니다.
천주교의 생명수호 대회!
지금의
로마 교황청의 뜻(?)을 받드는 대한민국의 천주교 산지인 명동 성당측의 모순된 행동을 보면 지금의 현재 황박사님 상황과 15세기의 종교재판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질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의 천주교는 9월 2일 날 또 다시 15 세기의 종교재판과 같은 역사적 오류를 남기는 일을 벌 일 것인가?
2, 역사가 된 지혜로운 거짓 전술들
역사 속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하는 거짓말은 흔히 계책이라 불리며 흥망성쇠를 좌우할 것입니다.
서양의 단적인 예가 그리스가 벌인 ‘트로이의 목마’일 것입니다. 기원전 1250년 전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은 10년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이 트로이 목마의 속임수를 통해 마침내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동양의 예로써, 촉나라 제갈량의 속임수는 고작 2천5백의 병사로 15만의 대군을 굴복시키는 일화를 낳았습니다.
위나라 사마의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촉나라 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자, 제갈량은 성문을 닫기는커녕 활짝 열어젖힌 채 망루에 앉아 학창의를 입고 윤건을 쓴 모습으로 거문고를 타자 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사마의의 위군은 무슨 계교가 있는 줄 알고 그냥 회군하는 바람에 그냥 앉아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와같이 트로이 목마와 제갈량의 속임수처럼 2가지의 전술 사례가 좋게 사용하면 전략이 되는 것이고 나쁘게 사용하면 매국노들이 즐겨 사용하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9월 2일 날 천주교 명동성당의 생명수호대회란 것은 로마 교황청의 전략일까 계책일까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왜냐하면 매국노들은 우리 지지판을 흔들기 위해 황박사님 지지자로 교묘히 위장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시켜 현혹시키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며, 9월 2일 날 명동성당의 생명 수호대회를 저지하기 위한 이론 공부도 필요하겠지만, 앞으로 이 생명윤리문제가 계속적으로 불거져 나 올 것이 예상되므로 그들의 15세기 종교재판과 같은 엉뚱한 이론과 논리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여러분 나름대로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와같이 생업에 종사하며 황박사님 지지운동하시는 여러분들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드려본다면, 종교적 시각에서의 생명윤리에 대해 올바르게 지지자 운동가답게 해석한 청산
----------------- <이하 청산
“난치병 치유도 생명윤리다.”[국회 생명윤리 세미나 발제내용]( 2007,2,7)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두 축이 있습니다. 바로 법과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은 강제성은 없으나 자발성이 있고. 법은 강제성은 있으나 자발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과 양심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받침이 되어줄 때 사회가 튼튼해지고 안정될수 있습니다.예컨대 부부가 바람을피면 법적으로 제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숨어서 법을 피하며 바람을 피우면 누구도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는 양심밖에 제어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마저 마비되면 이 때는 제어할수 없는 마땅한 방법이 없게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사회지탱의 두 기둥인 법과 양심은 바로 상식에 기초를 두고있으며 상식의 바탕은 휴머니티[인간애]라는 것입니다.
정치나 종교가 그 대상이 동일합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평화를 이루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처음시작은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해 유대민족적인 민족종교가 세계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이 그 시대에는 정치가와 종교인 그리고 무지한 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한 비참한 사형수의 주장과 가르침이 오늘날 세계인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종교로 발전할수 있었던 데는 바로 그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움직일수 있는 휴머니티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애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감격합니다.오늘 줄기세포와 관련된 생명윤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왜 휴머니티와 예수님이야기를 하는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줄압니다만 성경안으로 들어가당시 종교 , 정치 엘리트 집단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는지를 알면 바로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적인 결론에 쉽게 도달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1.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생명윤리 논쟁과 비슷한 논점을 형성하는 문제였습니다.
바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미 구약에도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성전에 받쳐진 진설병이라는 제물을 먹은 사건이 기록되어, 상황에 따라서는 율법의 적용이 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을 따라 죽여야 되나 아니면 사랑으로 용서해야 되느냐는 민중들의 질문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는 지극히 지혜로운 대답으로 사람들이 물러가게 한 다음,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즉 율법은 정죄하는 데 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데 써야한다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번에
실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그 전체적 도의적인 책임만 지고 있는
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두가 죽이려고 하는
이미 배아는 불임환자를 치료할 때 많이 버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불임여성들과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우리 사회의 상식이 인정하고 배려한 결과라고 볼수있습니다. 따라서 난치병 치료연구를 위한 배아의 사용을 우리는 막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죽은자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그 누구도 보일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누구도 따라올수 없고 흉내낼수 없는 능력을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 지배기반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급속히 예수님이 백성들의 지지와 인기를 빼앗아 가자 예수님을 제거해야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지키고 사회가 안정될것이라는 생각을 한것입니다.
여기에는 로마의 총독도 견해를 같이하여 결국 예수를 죽이고 맙니다.
아니면 이렇게 불합리하고 비 이성적인 사태가 일어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는 영웅을 죽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인물을 키워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죽이려고만 하는 사회에서는 영웅이 나올수가 없습니다.그런 사회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얼마전에 한 외신에서 생명공학의 체세포 복제분야는
다시 말하면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영웅을 완전히 몰매를 가해 죽여 놓았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초등학생의 중학생, 고등학생들 어린 학생들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치와 종교지도자 들의 수준은 어린 학생들보다 못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3. 자신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이 말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자칭했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물론 분명히 자칭은 아니었고 연합과 일체를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세력들은 그렇게 왜곡하여 비난하였습니다. 바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덮어 씨운것입니다.
저도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과학적인 발견도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인간은 신이 허락하지 않은 세계에는 결코 도달할수 없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신이 열어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도달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닫아 걸어놓은 빗장을 인간이 열었다면 그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던지, 그 인간이 신이던지 둘 중의 하나일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만 제가 이 문제로 하나님께 깊이 기도했을 때 이러한 음성을 들었습니다.“나는 너희에게 모든 기술과 능력을 주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너희 인간 자신들에게 달렸다.”였습니다.
따라서 복제 기술이 인간복제나 비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기독교 목사로서 당연히 반대할 것 입니다만 치료복제 즉 난치병 환자를 위해 사용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용과 오용을 제어할수 있는 법은 필요하지만 근 본적으로 막는 것은 중세주의 적이고, 원리주의적인 경직된 자세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종교의 비시대적인 성경해석과 적용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장애물이 되어 오히려 나중에는 종교가 사회로부터 배척받는 사태가 올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려서
따라서 저는 생명윤리 논쟁에 있어서 다음 두가지를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1. 근본주의적인 성경해석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계의 체세포 줄기세포의 반대 이유는 배아를 영혼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는 견해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에 뱃속의 아이도 분명 어느 정도 느끼고 의사를 표시할수 있는 존재임을 밝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기 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있다는 귀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본문들이 꼭 뱃속의 아이가 완성된 영혼과 인격을 갖춘 존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사실이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어법이 있습니다.
예컨데,1].세례요한이 뱃속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보고 뛰놀았다는 말씀[눅1장]은 모든 초점이 예수님의 탄생신비를 강조하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태아가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이론을 끌어내기에는 그 초점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이루어진 잉태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원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면 불임치료나, 낙태나 모든것을 다 금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폭행 피해자나, 기형아 낙태등 우리사회가 현실성을 감안하여 인정해 주고 있는 모든 의료행위가 철퇴를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원리적으로 모든이에게 적용할수는 없습니다. 항상 예외가 있는 것입니다.
2].잉태전 이미 하늘에서 예정되었다는 말씀이 (렘
그래서 모든사람에게 적용할수는 없으며 만약 이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한다면 이땅위에 태어날 때부터 불구인 사람과 난치병을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신을 원망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상태로 자신도 고통받고 가족과 이웃가지 고통을 주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이미 출생전부터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면 아마 그 운명을 정하여 준 신을 저주하던지 그 신을 신의 위치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람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와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진리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휴머니티로 가득차있습니다.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의 원래 인간회복이 바로 성경의 목표인것입니다.
저는 줄기세포도 원 인간회복의 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빨리
2. 난치병 환자의 생존윤리가 배아의 생명윤리보다 더 상위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윤리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는 것은 어떤 원리를 적용하여 모두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자세를 버리는 것일 것입니다.윤리도 생명윤리도 있지만 상황윤리,생존윤리, 통치윤리도 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생명윤리보다 생존윤리가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개인의 권리보다도 국가적인 이익이 강조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보다는 국가가 상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난치병 환자의 생존윤리는 배아의 생명윤리보다 더 상위 개념입니다.배아가 생명이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임환자나 난치병 환자치료를 위해서는 그정도 희생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양심이 허락하는 균형잡힌 상황윤리 아니겠습니까?
그밖에 영혼에 대한 기독교안의 설들을 보면,
1]하나님이 넣어주신 다는 설, 2]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다는 설, 3]육체가 성장하면서 형성되어 간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세가지가 기독교안에 있고 어느것도 정확히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어느 누구도 완성된 인간이 느끼고 누리는 인격의 형성이 배아에게 이루어졌다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될수 있는 가능태로, 그리고 인간생명에 대한 존엄성 차원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 일것입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목사님들에게 말하면 분명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성도나 가족중에 불임환자가 있다면 불임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체세포 줄기세포 치료를 거부하시겠습니까? 라고 어떵 상황을 설정하여 물으면 어느 누구도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바로 원리와 실제 삶의 갭이 주는 괴리가 아닐까요? 이 어정쩡함의 영역에 바로 상황윤리가 필요한것입니다.
이종간의 장기 생산도 다 같은 원리에서 접근해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험용 난자 획득문제도 헌혈과 같은 원리로 제공자에게 증서를 주어 나중 실제 기술이 개발되어 치료를 받을 때 어떤 혜택을 받을수있게 한다면 난치병 가족이나 더 나아가 자발적인 기증자로까지 확대되어 어려움없이 제공 받을수 있으리라 봅니다.
생명윤리문제가 이슈로 등장한 요즈음 '난치병 치유도 생명윤리다'라고 말씀하신 고 강원용 목사님의 혜안이 너무나 필요하고 그립습니다.
정말 우리사회에 미래를 열어줄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 글을 맺습니다.
앞서 초두에 말씀드린것과 같이 이 사회가 법과 윤리를 상식의 바탕위에서 집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정상적으로 100여개의 세계최초, 미답의 배반포를 만들어 넘겨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황박사는 죽이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미즈메디
그리고 국민의 희망과 영웅을 죽인 일부 언론인들은 잘했다고 상까지 받았습니다.
정부와 공영방송은 법과 상식의 잣대도 제대로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듯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경제뿐만 아니라 법과 윤리면에서도 더 퇴보했습니다. 바로 민족의 앞날에 희망을 빼앗고 절망을 안겨주는 꼴인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의 진보를 보기 원합니다.
인권과 정의 그리고 사랑과 용서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간절히 고대하는 것입니다.감사합니다.
그래서 어제 미흡하고 부족한 제 강의를 이 원고가 조금 보충해줄것으로 봅니다.어제는
부족한 사람의 강의를 경청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충분히 저의 생각을 발표할 시간을 마련해보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청산
-------------------<이상 청산
긴 글 읽어 보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생명윤리의 개념에 대해서는 상기의 목사님의 글에 자세히 나타났듯이 다소 종교적 시각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가령 비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천주교를 상대로 설득 또는 이해를 시켜야 하는 우리 황박사님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시각에서 불가피하게 이해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사항들 일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천주교의 생명수호 대회에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반대를 위해 참여 할 지도 모르는 천주교분들에게 우리 지지자들이 조금이라도 설득 또는 이해를 시 킬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지지자들이 배아의 생명윤리와 난치병 환우의 생존윤리 중에서 어떤 개념이 상위 개념일까에 대해서는 천주교인들 역시 사회 통념에 따라 더 잘 알 것입니다.
그저 제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던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에 따라 교황청의 입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교재판과 같은 비과학적 논리와 신학적 해석으로 커다란 모순을 남기는 우를 범했던 것처럼,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대립적 시각에서 제 2의 종교재판을 몰고 가는 우를 또 다시 범해서 후세의 과학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많은 오류와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주교의 성체줄기세포의 연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안식일 날 환자를 돌보며 율법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아직 완벽하지 하지 않은 유사한 성체줄기세포 연구로 생명윤리를 지켜나가는 듯하면서, 난치병 환우의 생존윤리를 무시하는 이번 천주교의 생명수호대회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존중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비종교적 행위는 아닐런지요?”라며 하나님께 감히 여쭈어 봅니다!
<이상으로 상기의 목사님 글외에는 제 개인적인 견해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첫댓글 인간을 향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 스스로가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난치병 치유도 생명윤리다 " 고 말씀하신 고 강원용목사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