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그냥 오락영화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가, 따질 필요가 없이 즐기면 된다는 뜻이지요. 잔혹 폭력영화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정성이 아니라 잔인한 폭력 때문에 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들을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웬만한 정도로 꾸며서는 통하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장면들을 보고 싶어 할까요? 어쩌면 우리 내면에 그런 잔인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러나 극한상황에 몰리면 자기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해하거나 갈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농도는 서로가 조금 다르게 표현됩니다. 어떤 경우 포기해야만 한다면 어느 쪽에서 먼저 손을 놓을까요?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 살아본 햇수를 보아서도 매우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더 살아보았으니 양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애정과 그 밀도로 나타나는 결과이겠지요.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천륜을 배반하는 사건들을 볼 때 부모가 자식을 해하는 경우와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 경우, 어느 쪽이 빈번할까요?
또 한 가지는 부모라 해도 아비와 엄마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원숭이를 실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부정하기 힘든 요소가 들어있다고 여겨집니다. 원숭이를 한 방에 넣고 실험합니다. 한번은 아비와 새끼를, 다른 한번은 어미와 새끼를 넣고 실험한 것입니다. 천천히 방바닥을 뜨겁게 달굽니다. 발바닥이 뜨거워지자 아비와 어미가 하는 행동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비원숭이는 자기 새끼에게 올라탔고 어미원숭이는 자기 새끼를 자기 어깨 위로 올리고 뛰더라는 것입니다. 비단 짐승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아비와 어미가 왜 이렇게 다를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아비야 씨를 준 것밖에 한 일이 없지만 어미는 그 씨를 받아 수개월 동안 자기 몸 안에서 키워야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몸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며 긴 시간을 지냅니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까지 견디며 그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드물지만 옛날에는 아기를 출산하다 엄마가 생명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걸고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만큼 애착이 가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별다른 이야기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치고받고, 찌르고 가르고, 쏘고 부수고, 그렇게 이어집니다. 서로가 복수에 눈이 멀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대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쪽은 아비가 자식을 보호하는데 목숨을 걸고 대듭니다. 다른 한쪽은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려고 쫓아다닙니다. 이것도 대조되는 문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보호하는 쪽의 이야기는 동양인이고 자식이 아비를 해하려는 쪽은 서양인입니다. 꼭 동서양을 비교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지 환경과 경우가 다를 뿐이지요. 아무튼 이야기는 그렇게 대조되어 전개됩니다. 아비를 해하려는 자식의 입장이 밝혀집니다. 자식으로 여겨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 과한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식은 어미가 키우다시피 하였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인식도 문화도 변하였지요. 그러나 이전 세기만 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비는 바깥 사회생활을 통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엄마는 집안에서 자식을 키우고 돌보는 일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이제는 안팎이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양육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도 힘들어 결혼까지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럴지라도 자식을 만들려면 엄마가 수개월 자신의 몸 안에서 키워야 하는 천리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비보다는 엄마에게 자식에 대한 애정이 더 깊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폭력의 배경은 바로 초고속열차입니다. 흔들림 없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인간들이 서로 죽이려 살인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복수의 일념으로 마련한 치밀한 계획 속에서 벌어진 극입니다. 그런 머리로 한다는 짓거리라니, 그 머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인간이기에 가능한 짓이 아닐까 싶어 인간이라는 사실에 비애를 느낍니다. 하기야 수많은 전쟁에서 값없이 희생된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흔히 영화에서도 보지만 군인들이 순간적으로 픽픽 쓰러지는 장면들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전개됩니다. 따지고 보면 저 한 사람 한 사람도 다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마음들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영화 ‘불릿 트레인’(Bullet Train)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