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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과거의 악행 덮기 세 가지, 법구경 세상의 품(Lokavagga)
세상의 품(Lokavagga)
1. Hīnaṃ dhammaṃ na seveyya 히낭 담망 나 세웨이야 pamādena na samvase 빠마데나 나 상와세 micchādiṭṭhim na seveyya 맛차딧팅 나 세웨이야 na siyā lokavaḍḍhano. 나 시야 록까왓다노.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 방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견해를 따르지 말고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가 되지 말라. (Dhp 167)ttiṭṭhe nappamajjeyya 욷띳테 납빠맛제이야 dhammaṃ sucaritaṃ care 담망 수짜리땅 짜레 dhammacāri sukhaṃ seti 담마짜리 수캉 세띠 asmiṃ loke paramhi ca. 아스밍 록께 빠람히 짜.
자제하라. 방일하지 말라. 선행의 원리를 실천하라.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p 168)
3. Dhammaṃ care sucaritaṃ 담망 짜레 수짜리땅 na naṃ duccaritaṃ care 나 낭 둣짜리땅 짜레 dhammacārī sukbaṃ seti 담마짜리 수캉 세띠 asmiṃ loke paramhi ca. 아밍 록께 빠람히 짜.
선행의 원리를 행하라. 악행의 원리를 행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p 169)
4. Yathā pubbulakaṃ pass 야타 뿝불라깡 빠쎄 yathā pass marīcikaṃ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ṃ lokaṃ avekkantaṃ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빠싸띠.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Dhp 170)
5. Etha passathimaṃ lokaṃ 에타 빠싸티망 록깡 cittaṃ rājarathūpamaṃ 찟땅 라자라투빠망 yattha bālā visīdanti 얏타 발라 위시단띠 natthi saṇgo vijānataṃ 낫티 상고 위자난땅.
와서 바로 이 세상을 보라. 왕의 치장한 수레와 같다. 어리석은 자는 거기에 빠져 들지만 현명한 자는 집착하지 않는다. (Dhp 171)
6. Yo ca pubbe pamajjitvā 요 짜 뿝베 빠맛지뜨와 pacchā so nappamajjati 빳차 소 납빠맛자띠 so'maṃ lokam pabhāseti 소망 록깡 빠바세띠 abbhā muttova candimā 압바 뭇또와 짠디마.
예전에 방일했더라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Dhp 172)
7. Yass apāpaṃ kataṃ kammaṃ 야싸 빠빵 까땅 깜망 kusalena pidhīyati 꾸살레나 삐디야띠 so'maṃ lokaṃ pabhāseti 소망 록깡 빠바세띠 abbhā muttova candimā 압바 뭇또와 짠디마.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Dhp 173)
8. Andhabhūto ayaṃ loko 안다부또 아양 록께 tanuke'ttha vipassati 따누껫타 위빠사띠 sakuṇo jālamuttova 사꾸노 잘라뭇또와 appo saggāya gacchati. 압뽀 삭가야 갓차띠.
이 세상은 암흑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보는 자들은 드믈다. 그믈을 벗어난 새와 같이 하늘로 나는 자들은 드믈다. (Dhp 174)
9. Haṃsā' diccapathe yanti 항사 딧짜빠테 얀띠 ākāse yanti iddhiyā 아께사 얀띠 잇디야 nīyanti dhīrā lokamhā 니얀띠 디라 록깜하 jetvā maraṃ savāhiniṃ 제뜨와 마랑 사와히닝.
백조들이 태양의 길을 따라서 초월적인 힘으로 허공을 날 듯,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님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Dhp 175)
10. Ekaṃ dhammaṃ atītassa 에깡 담망 아띠따싸 musāvādissa jantuno 무사와디싸 잔뚜노 vitiṇṇaparalokassa 위띤나빠랄로까싸 natthi pāpaṃ akāriyaṃ 낫티 빠빵 아까리양.
유일한 진실을 어기고 거짓을 말하는 자, 저 세상을 포기한 자에게는 행해지지 않을 악이 없다. (Dhp 176)
11. Na ve kadariyā devalokaṃ vajanti 나 웨 까다리야 데와록깡 와잔띠 bālā have nappasaṃsanti dānaṃ 발라 하웨 납빠상산띠 다낭 dhīro ca dānam anumodanāno 디로 짜 다낭 이누모다마노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떼네와 소 호띠 수키 빠랏타.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에 안락을 얻는다. (Dhp 177)
12. Pathabyā ekarajjena 빠타비아 에까랏제나 saggassa gamanena vā 삭가싸 가마네나 와 sabbalokādhipaccena 삽발로까디빳쩨나 sotāpattiphalaṃ varaṃ 소따빳띠팔랑 와랑.
지상에서 유일한 왕권보다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 진리의 흐름에 든 것이 탁월하다. (Dhp 178)
(전재성님역)
법구경에서 13번 째 품이 ‘세상의 품(Lokavagga)’이다. 한역에서는 세속품(世俗品)이라 한다. 24가지 모음 중에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이라는 것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품에서는 거기에서 더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
1번 게송((Dhp 167)에서는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Hīnaṃ dhammaṃ na seveyya)’라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저열한 것이란 무엇일까? 저열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히나(Hīna)’이다.
히나라는 말은 초전법륜경에서도 보인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S56:11)”이라는 문구이다. 고와 락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신 부처님이 극단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이와 같이 표현 한 것이다.
그래서 저열한 것이란 각주에 따르면 “낙타나 숫소와 같은 세련되지 못한 존재에게 해당되는 성질로서 다섯가지 쾌락의 대상을 뜻한다. 그것들은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네 가지 비참한 곳에 태어나게 하기 때문에 저열한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각, 청각 등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저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방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pamādena na samvase)’라는 말은 새김과 알아차림을 느슨하게 하는 성질을 지닌 것을 말한다.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m)’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말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 범망경)에 따르면 62가지 삿된 견해가 설명되어 있다.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가 되지 말라.(na siyā lokavaḍḍhano)’는 무슨 뜻일까?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는 윤회를 강화시키는 자를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야 세속을 증가시키지 않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15:11)”라고 말씀 하셨다.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2번 게송(Dhp 168)에서 ‘자제하라. 방일하지 말라. (Uttiṭṭhe nappamajjeyya)’는 탁발과 관련된 내용이다. 탁발을 다닐 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집을 고르지 않으면 방일하지 않는 것이고, 고르면 방일하는 것으로 본다. 음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경계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선행의 원리를 실천하라. (dhammaṃ sucaritaṃ care)’라는 말은 탁발의 실천에서 부적절한 것을 버리고 가정을 위해서 탁발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열 세가지 두타행이 있다. 이 중 음식과 관련 된 것은 ‘1)탁발음식만 수용해야 한다. 2) 차례대로 탁발해야 한다. 3)한 자리에서만 먹어야 한다. 4)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어야 한다. 5)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ammacāri sukhaṃ seti)’는 무슨 뜻일까? Dhp.III.165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으로 탁발하는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잠잘 때에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걷기, 서있기, 앉기, 눕기의 행주좌와-에서 언제나 행복하게 산다.”라는 뜻이다.
죽음의 사자가 못 찾은 이유는
4번 게송(Dhp 170)에서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evaṃ lokaṃ avekkantaṃ maccurājā na passati)’ 라 하였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를 말한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보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한 각주는 “ 죽음의 신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처럼 보는 자, 즉 공허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자를 보지 못한다.”라는 뜻이라 한다.
완전한 열반에 들면 더 이상 마음이 일어 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아무리 찾을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고디까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디까는 재생의식(結生識, (paṭisandhi-vinñāṇa)이 생겨남이 없이 열반에 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왁깔리경(S22:87)에서도 볼 수 있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번 게송(Dhp 171)에서 ‘와서 바로 이 세상을 보라.(Etha passathimaṃ lokaṃ)’이라 하였다. 이 때 세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산천초목이 있는 기세간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있을 그런 세상,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예상을 깨뜨린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이 접촉하였을 때 일어나는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라고 설하셨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객관적 세상이 아니라 주관적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빠져 들지만, ‘현명한 자들은 집착하지 않는다 .(natthi saṇgo vijānataṃ)’고 하였다. 그런 집착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즉 갈애, 사견, 자만, 성냄, 무명, 오염, 악행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조건지어진 것들로서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6번 게송(Dhp 172)에서 ‘예전에 방일했더라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문구를 이해하려면 인연담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 아침이나 저녁이나 빗자루를 들고 승원을 청소하던 ‘쌈문자니’라는 비구가 있었다.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나이 든 장로의 태도가 못마땅해 보였다. 그래서 “이 게으른 자가 사람의 믿음의 공물을 먹고 와서 앉아만 있구만, 왜 빗자루를 들고 한 곳이라도 쓸지 않는가?”라고 투덜 거렸다.
이를 눈치 챈 장로는 쌈문자니를 불러 놓고 “하루 종일 청소만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아침 청소가 끝났으면 서른 두 가지 몸의 구성성분을 관찰하는 등 수행을 하여야 됨을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쌈문자니는 청소하는 대신 수행에 열중하여 거룩한 경지(아라한)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수행자로서 본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의 본분이 수행과 포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한 일에 열중하였을 때 출가의 본분을 잊어 버린 것을 말한다.
오늘날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만드는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방일했더라도’라는 말은 ‘보시, 수행, 경전의 독송 등을 소홀히 했더라도’라는 뜻이다. 빗자를 들고 하루 종일 사원 청소만 하는 것 보다 도(magga)와 과(phala)를 성취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함을 말한다. 그래서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추듯이, 도에서 얻어진 지혜로 이 세계를 밝히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임을 말한다.
과거의 악행 덮기 1, 소금덩이경(AN3.99)
7번 게송(Dhp 173)에서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Yass a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dhīyati)’라는 문구가 있다. 아무리 악한 짓을 많이 하였어도 착하고 건전한 업을 많이 쌓으면 상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야 할까?
소금덩이경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AN3.99)”라 하였다. 소금덩이를 악행에 따른 악업이라면, 강물 같은 더 많은 선업을 지었을 때 악업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강물보다 더 큰 선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과거의 악행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앙굴리말라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과거의 악행 덮기 2, 앙굴리말라경(M86)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수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번뇌다한 아라한이 됨으로서 더 이상 번뇌는 일어 나지 않게 되었다. 비록 과거에 악행을 하였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만삭의 임신부에게 말을 하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하라고 하자 앙굴리말라는 “세존이시여, 저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았는데,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깜짝 놀라듯이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난 이래”라는 말이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태어남’이다. 비록 앙굴리말라의 겉모습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 모습과 똑같다고 할지라도,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성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이다.
번뇌다한 아라한이 되었다면 이전의 앙굴리말라라고 볼 수 없다. 범부가 성자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 처럼 다시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 (M86)’라고 말하라 한 것이다.
과거의 악행 덮기 3, 사유 중지의 경(M20)
소금덩이경과 앙굴리말라경에서는 선업이 악업을 압도하였을 경우 악업은 덮혀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도 있다. 그것은 전재성박사의 역주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역자주: 악을 선으로 덮는다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대치 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善)로 큰 쐐기(惡)를 제거 하는 것(MN.II.116, M20)’ 과 같다. 궁극적으로는 그 착하고 건전한 것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각주, 전재성박사)
과거에 지은 악행에 대한 과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을 엄청나게 많이 지의면 덮혀 질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앙굴리말라경에서와 같이 아라한이 되면 다시 태어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악행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맛지마니까야의 ‘쐐기론’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위따까산타나경-Vitakkasaṇṭhāna Sutta-사유중지의 경, 맛지마니까야 M20, 전재성님역)
지금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났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선하고 건전한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미장이가 작은 쐐기(선)를 이용하여 큰 쐐기(악)를 부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지은 악행도 선행을 지으면 부수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 선행의 결과는 성자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탐욕, 성냄 등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과거에 지은 악행이 떠 오를지라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과거에 지은 악행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현세에서 체험 될 수 있는 과보, 다음 생에 체험 될 수 있는 과보는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는 피해 갈 수 없다. 더구나 살인 업과 같은 중업을 지었을 경우 업의 과보가 무르익었을 때 아라한이라 하여 피해 갈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맹이에 맞아 죽어 가는 앙굴리말라에게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 년, 아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M8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악마의 그물에 갇힌 자들
8번 게송(Dhp 174)에서 ‘이 세상은 암흑이다. (Andhabhūto ayaṃ loko)’라 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무상, 괴로움, 실체없음을 통찰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분명하게 보는 자들은 드믈다. (tanuke'ttha vipassati)’라 하였다.
새장에 새가 있다. 새장에 갇혀 있는 한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새장에 갇힌 새들과 같은 사람들은 악마의 그믈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존재의 대부분은 비참한 곳에서 발버둥 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좋은 곳인 천상계 또는 열반에 든다. 이를 게송에서 ‘그믈을 벗어난 새와 같이 하늘로 나는 자들은 드믈다. (sakuṇo jālamuttova appo saggāya gacchati)’라 하였다.
오온이 악마의 군대인 이유
9번 게송(Dhp 175)에서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님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nīyanti dhīrā lokamhā jetvā maraṃ savāhiniṃ)’라 하였다. 여기서 악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악마의 군대는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2) 분노, 3) 굶주림과 목마름, 4) 갈애, 5) 해태와 혼침, 6) 두려움, 7) 의심, 8) 위선과 자만을 말한다. 악하고 불건전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바로 악마의 군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넓게는 오온도 악마의 군대로 본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세존] Rūpaṃ vedayitaṃ saññaṃ viññāṇaṃ yañca saṅkhataṃ, Neso hamasmi netaṃ me evaṃ tattha virajjati.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
Evaṃ virattaṃ khemattaṃ sabbasaṃyojanātigaṃ, Anvesaṃ sabbaṭhānesu mārasenāpi nājjhagāti.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네.
(빳따경-Pattasutta-발우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물질(Rūpa), 느낌(vedayita), 지각(sañña), 형성(saṅkhata), 의식(viññāṇa) 이렇게 다섯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이다. 오온은 집착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였을 때 오온을 악마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늙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죽음의 신, 악마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보시를 칭찬하고 기뻐한 공덕으로
11번 게송(Dhp 177)을 보면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한다.( Na ve kadariyā devalokaṃ vajanti)’라고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불행하고 비천하고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함을 뜻한다.
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단멸론자에게서 볼 수 있다.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보시에 대한 공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함으로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는 삿된 견해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현자는 보시를 기뻐한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세도 믿는다. 그런자는 ‘그것으로 실로 내세에 안락을 얻는다.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라 하였다. 다른 사람의 보시를 칭찬하고 기뻐한 공덕으로 저 세상에서 천상의 안락을 누리며 행복해 한다는 뜻이다.
가장 허약한 자일지라도
12번 게송(Dhp 178)은 세상의 품에서 정종분이나 다름 없다. 그것은 진리의 흐름에 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에서 유일한 왕권보다 (Pathabyā ekarajjena),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saggassa gamanena vā),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sabbalokādhipaccena), 진리의 흐름에 든 것이 탁월하다(sotāpattiphalaṃ varaṃ)’고 하였다.
전륜성왕이 되면 우주적인 왕권의 지배권을 갖는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권한 같은 것이다. 선행을 하여 26개 천상중의 하나에 태어나면 수(壽)와 복(福)을 누린다. 또 창업을 하여 전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면 전 세계의 지배권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흐름에 든자(예류자, sotāpattipanna)가 되면 가장 허약할지라도 이 생에서 다시 태어나는 다음 7번 째의 생애 안에서는 완전히 해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흐름에 든 님은 1) 개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2) 회의적 의심, 3)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시작 단계의 참사람을 말한다.
2013-05-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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