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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해(瑟海)는, 내륙해(內陸海, 大澤)일까, 해(海)일까 [6편∼下]
2026년 10월 25일
○ 「슬해(瑟海)」 과연(果然) 바다(海)일까? 내륙해(內陸海), 곧 대택(大澤)일까?
이에 대한 답(答)은 의외(意外)로 간단(簡單)한 것인데…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土着) 왕조(王朝)였던 “조선(朝鮮)”의 슬해(瑟海)는 대택(大澤) 이름이다」
이와는 다른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슬해(瑟海)’는 ‘동해(東海)’를 지칭(指稱)한다.」 대택(大澤)이 없으므로 다른 대안(代案)이 없다. ‘외통수’라 할 수 있다.
• 전회(前回) ‘6-上’ 편(篇)에서 “슬해(瑟海)”란 어떤 바다를, 어떤 형태(形態)의 바다를 칭(稱)하는가? 에 대하여 설명(說明)하였다.
즉(卽), 슬해(瑟海) [出處 : 鏡城郡 邑志] : 「슬해(瑟海)는 바다에 쌓인 모래가 해마다 그 위치를 옮겨서 그 심천(深淺)의 차이가 매우 심한, 특이(特異)한 바다이다」라고 하였으니, “슬(瑟)”이라는 뜻과는 전혀 무관(無關)한 설명(說明)이고, 두만강(豆滿江) 하구(河口)의 동해(東海)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바다 이름이다. 동해(東海)는 특이한 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 “여기서 필자(筆者)가 의문(疑問)을 떨칠 수 없는 것이” : 도대체 바닷속 모래가 이동(移動)하여 어떤 곳에 쌓여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형편(形便)으로 : 누가 주체(主體)가 되어 해마다, 또는 격년(隔年)… …마다 이를 직접(直接) 조사(調査), 관측(觀測)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또 「바닷속 모래가 이동(移動)하여 쌓여 있다」라면 : 「“슬해(瑟海)”는 한 곳에 고정(固定)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속의 모래 이동(移動)에 따라 슬해(瑟海) 역시(亦是) 계속 이동(移動)되어야 하니, 슬해(瑟海)라는 바다는 고정(固定)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는 곧 《“슬해(瑟海)”라는 바다의 이름은, 비파호(琵琶湖)와도 같이 “거문고”를 닮은 대택(大澤)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주장(主張)에 힘이 실리게 된다는 점이다.
• 중요(重要)한 것은 “무엇하나 딱 부러지게 반도(半島) 동북방(東北方)에 있는 바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한 설명(說明)이 다수(多數)를 이루고 있다’라는 것이다. ‘5,000년(年) 역사(歷史) 이래(以來) 동북방(東北方)의 바다 또는 바닷가 이름도 몰랐다’라는 것은, 이해(理解)될 수 없는 사항(事項)이다.
☛ “슬해(瑟海)”란 어떤 행태(行態)를 가진 바다(海)를 말하는가? : 경성군(鏡城郡) 읍지(邑志)를 인용(引用)해 설명(說明)하기를 : 「슬해(瑟海)는, 바다에 쌓인 모래가 해마다 그 위치를 옮겨서 그 심천(深淺)의 차이가 매우 심한, 특이(特異)한 바다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형태(形態)를 가진 바다(海)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인데, 사실(事實)은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지명(地名)이자 곧 바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1) 「“슬해(瑟海)의 위치(位置)는?”」 그렇다면 「슬해(瑟海)」라는 바다는 어디에 있는 어떤 바다를 말하는 것이냐? 하는 건데 : 반도학계(半島學界)의 말대로라면 슬해(瑟海)의 “위치(位置)”에 대해서, “몇 가지 설(說)”이 존재(存在)하고 있다. “위치(位置)에 대해서… …”
“몇 가지 설(說)”이라는 것은, 사실(事實)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바다가 이곳, 저곳, 여러 곳에 있다는 것 자체(自體)가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➀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 바다를 말한다.」
➁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 북(北)쪽 바다를 말한다.」
➂ 「슬해(瑟海)는 경흥부(慶興府) 동(東)쪽 사오십 리(里)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를 말한다. 【“경흥부(慶興府) 동(東)쪽 사오십 리(里)쯤 떨어져 있는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닷가의 이름을 말한다.”라는 말은 또 다르다.】
➃ 「마천령(磨天嶺) 아래 바다(東海)」를 일컫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설(說)
➄ 「연해주(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앞의 바다(海)」를 일컫는다. 1900년(年) 대(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자(漢字)로 된 지도(地圖)에 표시(標示)되어 있다.
➅ 「내륙해(內陸海)인 바이칼 호수(湖水)」를 일컫는다.
➥ 라는 것으로 정리(整理)되는데, “➀+➁+➂+➃”의 “슬해(瑟海) 설(說)”은, 반도학계(半島學界)의 것인데, 그 시기(始期)가 AD 1,600년(年) 이후(以後)에나 등장(登場)하는 이름이라는 것이고, 그 이전(以前) 것으로는 자료(資料)가 없다.
또 “➄”의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조작(造作)’으로 인하여 함께 이동(移動)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900년(年) 이후(以後)의 지도(地圖) 외(外)에는 논거(論據)는 없다.
또 “➅”의 것은, 「엄숙하고 고요한 바다」 또는 「엄숙하고 곱디고운 호수 바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슬해(瑟海)라는 이름이 어떻게 엄숙(嚴肅)하고 고요한 바다란 뜻인지는 알 길이 없다. 논거(論據), 인용(引用) 근거(根據) 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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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슬해(瑟海)”란 이름의 의미(意味)는 무엇일까?」 “슬해(瑟海)”의 위치(位置)도 정확(正確)하지 않은데, “슬해(瑟海)”란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여러 설(說)이 존재(存在)해 의아(疑訝)할 수밖에 없다. 즉(卽),
➊ 슬해(瑟海) [出處 : 鏡城郡 邑志] : 「“슬해(瑟海)”는 바다에 쌓인 모래가 해마다 그 위치를 옮겨서 그 심천(深淺)의 차이가 매우 심한, 특이(特異)한 바다를 말한다.」
그러나 “슬해(瑟海)”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 「바닷속 모래가 이동, 쌓여 바다 깊이가 깊고, 낮음의 차이가 심한 바다라는 뜻과 무슨 관련(關聯)이 있느냐?」 하는 것이고,
➋ 슬해(瑟海) : 「예로부터 엄숙(嚴肅)하고 곱디고운 호수 바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숙종실록(肅宗實錄)을 근거(根據)로 내놓고 있으나, 실록(實錄)에는 그 위치(位置)만 기록(記錄)되어 있을 뿐, 슬해(瑟海)가 무슨 의미(意味)인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호수 바다’라는 뜻은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 몽고족(蒙古族)들이 말하던 「‘達賴諾爾’라는 말인데, 의미(意味)가 바로 “호수(湖水)가 바다와 같고, 자연(自然)의 호(湖)”」라는 뜻을 임의(任意)로 말하는 것 같다.
• 또 하나의 의문(疑問)은, 「“백해(白海)”로 기록. 조선실록엔 슬해(瑟海. 엄숙하고 곱디고운 호수). 뜻은 배달(倍達)로서 조선(朝鮮) · 한(韓)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라고 하는데… …,
여기서 “백해(白海)”란 말은 “바이칼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민국(民國) 곧 손문(孫文)에 탄생(誕生)된 민국(民國)을 말하는 것으로, 1,912년 이후(以後)에 만들어진 바이칼(Baikal) 호수의 이름이다.」 오늘날 ‘대륙(大陸) 역사(歷史) 조작(造作)’은, 손문(孫文) 정권(政權)으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歷史的)으로 인정(認定)되지 않은 설(說)이나 주장(主張)을 진실(眞實)인 것처럼 하는 것은, 역사(歷史)를 연구(硏究)하는 자세(姿勢)가 아니다.
➌ 「슬해(瑟海)」 : 「“호수(湖水)가 옛 거문고 형태(形態)를 닮았다”라고 하여 슬해(瑟海)라고 하였다.」라는 설명(說明)이 설득력(說得力)이 있을까?
• 瑟(거문고) : [이미지 출처(出處) : 위키백과]
• 바이칼 호수(Baykal, 湖水) (貝加爾湖) / [이미지 출처(出處) : 위키 원]
• 貝加爾湖[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貝加爾湖(俄語:озеро Байкал,羅馬化:Ozero Baykal;布里亞特語:Байгал нуур,羅馬化:Baygal nuur)位於俄羅斯西伯利亞伊爾庫茨克州、布里亞特共和國境內,面積約為31,722平方公里,距離蒙古國邊界111公里,是世界上水容量最大的淡水湖,也是世界上最深的湖泊,最深處達1,742公尺。貝加爾湖為北亞地區不少部族的世居領地,如布里亞特人居住在湖泊東側地區,於該地豢養山羊、駱駝、牛、綿羊。另外,貝加爾湖有「西伯利亞明珠」之稱[5][6][7][8]。貝加爾湖為裂谷湖,有逾1,700種動物及植物棲息其中,而且2/3為特有種[9],聯合國教科文組織於1996年將貝加爾湖登錄為世界自然遺產[10]。
詞源 / 漢朝人稱之為「翰海[11]」,或民謠蘇武牧羊歌詞的北海,五胡十六國時北朝叫「於巳尼大水」,隋唐叫「小海」,18世紀初期的《異域錄》稱之為「柏海兒湖」,《大清一統志》稱為「白哈兒湖」,蒙古稱為「達賴諾爾」,意為「似海湖」、「自然之湖」[12];一說名稱來源於「貝音嘎 嘎拉」(蒙古語意為不滅之火)[13],古人非常崇拜它而視爲「聖海」,民國時期稱「白海」。
《漢書-蘇武傳》記載西漢時期,貝加爾湖在匈奴的控制範圍之內,蘇武被單于流放到「北海」去牧羊。蘇武在北海邊艱難熬過19年才回到漢都長安。[14]
古中國史籍稱貝加爾湖為於巳尼大水、小海、大澤或北海,先後自前3世紀起先後屬於匈奴所屬的丁零部落領地、鮮卑+烏桓所屬的丁零和堅昆部落的領地、柔然、突厥所屬的鐵勒部落領地、安北都護府、回鶻、黠嘎斯+阻卜、遼朝(契丹)、尼倫和迭列斤兩大部落組成的蒙兀國人的活動範圍。著名的蘇武牧羊故事就發生在貝加爾湖一帶。這些遊牧部民長期存在,有時跟南部的中國發生戰爭(比如漢匈戰爭、北魏與柔然的戰爭),有時臣服於中國(如隋唐的全盛時期)。
13世紀起,這裡成為成吉思汗建立的蒙古帝國的領土。14世紀晚期的1388年,明軍在捕魚兒海(捕魚兒海又名貝爾湖,不是貝加爾湖)之戰中打敗北元軍隊,隨即北元後主脫古思帖木兒被也速迭兒刺殺,之後裂解為韃靼和瓦剌;貝加爾湖直到1620年代之前都屬於瓦剌的領土。-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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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슬해(瑟海)”가 “거문고를 닮은 호수(湖水)를 말한다.”라는 말이 설득력(說得力)이 있다면 : ‘바이킬 호수(湖水)’보다는 “흡스굴 호수(湖水)”가 더 적합(適合)하다.
「흡스굴(Hobs Gul) 호(湖)」 : 몽골(蒙古) 북부(北部)에 있는 호수(湖水). '흡스굴'이나 '흡스글' 등(等)으로 표기(表記)한다. 살언산맥[薩彥(薩揚)山脈, (Sayan, Mts(사얀)]【其北迤之賽留格木嶺。繞科布多、烏梁海西北。爲我國與俄羅斯之界山者。曰薩彥山脈。(亦作薩揚), 薩彥之南曰唐努山脈。又南曰杭愛山脈。相並東行。至色楞格河之水源. / 薩彥山脈。(亦作薩揚) : 러시아 연방과 몽골 서부 지역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산맥. 최고봉은 ‘쿠사르디크 산’이다(3,492m). 몽골 어의 '희다'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는 산정(山頂)에 쌓인 눈을 가리킨 데서 유래한다. 동(東) 사얀, 서(西) 사얀산맥(山脈)으로 나누어진다.】의 동(東)쪽에 있으며, 해발고도(海拔高度) 1,600m에 있다. 면적(面積)은 2,760km²로 제주도(濟州島)의 1.5배 정도이며, 몽골(蒙古)에서 “옵스호(ᠤᠪᠰ ᠨᠠᠭᠤᠷ, Увс Нуу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호수(湖水)이자 몽골(蒙古)에서 가장 수량(水量)이 많은 호수(湖水)다. 평균(平均) 수심(水深)은 138m, 최대(最大) 수심(水深)은 267m. 몽골(蒙古) 담수(淡水)의 70%와 전 세계 담수의 0.48%가 이 호수(湖水)에 있다. 이 호수에서 이그 강[ᠡᠭ ᠦᠨ ᠭᠣᠣᠯ, Эгийн гол]이 흘러나가며, ‘이그 강’의 물은 다시 ‘셀렝게강’을 거쳐 바이칼호(湖)로 들어간다.
이름은 튀르크어로 '푸른 물의 호수[청해호(靑海湖)라는 말과 같다]'라는 뜻의 쾩쉬브쾰(kök-sub-köl)에서 나왔으며, 몽골어로는 '바다 어머니'라는 뜻의 ‘달라이 에지(ᠳᠠᠯᠠᠢ ᠡᠵᠢ, Далай ээж)’라는 별칭이 있다. “어머니의 바다”나 “몽골의 알프스”라고 불리며, 러시아 바이칼 호수와 자매 호수라고도 합니다. 몽골 북서부, ‘울란바타르’에서 북서(北西)쪽으로 약 700km 떨어져 있으며, 맑고 깨끗한 물, 풍부한 야생동물 서식지 : 생태 : 민물 연어 등 12종 어류, 200종 이상 조류, 순록, 산양, 곰, 늑대 등 다양(多樣)한 야생동물(野生動物) 서식하고 있다 [出處 : 나무위키 등]
• ‘푸른 물의 호수[靑海湖)’라는 ‘흡스굴(Hobs Gul) 호(湖)’ [출처(出處) : 위키백과]
• ‘푸른 물의 호수[靑海湖)’라는 ‘흡스굴(Hobs Gul) 호(湖)’ [출처(出處)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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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해(瑟海)」에 대한 많은 글이 있으나, ‘관심(關心) 또는 그 위치(位置), 지리적(地理的) 여건(與件) 등으로 보아 참고(參考)가 될만하다’라고 하는 것을 고른 것이다.
(01) 茶山詩文集 1권 / 詩 / [呈外舅洪節度關北營中 : 관북 진영에 계시는 장인 홍(洪) 절도사(節度使)에게 올리다] / 공(公)께서 7월에 북영(北營)으로 부임하셨다.
《馬上新翻出塞歌. 不咸山色接龍河. 牙旗直壓磨天嶺. 寶劍遙淸瑟海波 : 마상에서 변방 노래 새로 지어 부르는데, 불함산 산중 빛은 용하에 닿았으리. 대장기는 곧바로 마천령을 제압하고, 보검 기운 아스라이 슬해 물결 맑히누나 靺鞨村光秋後靜. 女眞烽火雪中過. 寒營莫飮西姬酒. 今日將軍白髮多 : 말갈족의 마을 빛은 가을 뒤에 고요하고, 여진족의 봉홧불은 눈 속에 지나가리. 찬 진영에 미인의 술 마시지 말으소서, 오늘날에 장군께선 백발이 성성하시니》하였다.
• 「슬해(瑟海)」는, ‘말갈(靺鞨), 여진족(女眞族)’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지명(地名)이다. ‘말갈(靺鞨), 여진족(女眞族)’의 옛 터전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기원전(紀元前)의 사서(史書), 기록(記錄)이 이를 증거(證據)하고 있다. 한문(漢文)을 해독(解讀)할 수 있는 분이라면 :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아주 간단(簡單)한 문장(文章)으로 기록(記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卽) 「숙신씨(肅愼氏), 숙신국(肅愼國)은, 서북방(西北方)에서 서방(西方) 사이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에서, 서북방(西北方)이나 서방(西方)도 모른다면?… …또 동북방(東北方)이 어느 곳인지를 구별(區別)하지 못한다면?
바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그렇다.’ 방위(方位), 방향(方向)도 분간(分揀)하지 못하는 인사(人士)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인사(人士)들은 “방가(方可) 사천리(四千里)”라는 거리(距離) 또는 땅의 면적(面積)조차 분간(分揀)하지 못하고 있다.
(02) 茶山詩文集 15권 / 墓誌銘 /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의 묘지(墓地) 명
《端川在摩天嶺下瑟海之濱。風氣寒冽 : 단천(端川)은 마천령(摩天嶺) 아래 슬해(瑟海) 물가에 있어 기후(氣候)가 매우 차다.》라고 하였다.
• 다산(茶山)은, 「슬해(瑟海)는 마천령(磨天嶺) 아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勿論), 이 설(說)에 동조(同調)하는 옛 학자(學者), 관리(官吏)도 있었다. 그러나 왜 그곳이 “슬해(瑟海)”라고 불리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言及)이 없다.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만약(萬若) “반도(半島) 5,000年 사(史)”가 실재(實在)했다면 : ‘우리’들이 사는 땅의 ‘바다(海)의 이름도 몰랐다’라는 것이 되는데… …언어(言語)도, 글자도, 숫자도 없이 오직 금수(禽獸)들처럼 으르렁거리며,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의사(意思)를 전달(傳達)하는 “미개인(未開人)들이 살아온 동네였다”라는 뜻이다.
“맞는 말? 틀린 말?” 답답한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실(現實)이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수없이 많은 진솔(眞率)한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지만, 후손(後孫)들은 이 모두를 반도(半島)라는 아주 협소(狹小)한 땅에 전개(展開)하려 아귀(餓鬼)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만족(滿足)하시는가? 누굴 위한 일? 이게 가장 궁금한 것이다.
… 반도(半島) 땅의 마천령(磨天嶺) 아래에는 동해(東海)가 있고,
… 대륙(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 마천령(磨天嶺) 아래에는 대택(大澤)이 있다. 《살언산맥[薩彥=薩揚, 山脈] 아래에 있는 대택(大澤)은, 해발고도(海拔高度) 1,600m에, 면적(面積)은 제주도(濟州島)의 1.5배(倍)에 이른다고 전(傳)해지고 있는데, ‘푸른 물의 호수(靑海湖)’라고 지칭하며, 남북(南北)으로 길게 형성(形成)되어 있어, 거문고(瑟)를 연상(聯想)케 하고 있는데, 이는 필자의 주관적(主觀的)인 주장(主張)이다.
… 과연(果然) 슬해(瑟海)는? 독자(讀者)들의 신선(新鮮)한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을 기대(期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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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번암집(樊巖集)【채제공(蔡濟恭, 1,720~1,799)】 5권 / 詩 / 〔奉送族叔 慶承 通判鏡城 :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부임하는 족숙(族叔) 경승(慶承)을 받들어 전송하다〕
《〔其一〕關城草色動行輈, 出塞歌傳萬里愁, 鴻鴈書稀天北極, 華夷山積古幽州 : 변방 성의 풀빛 향해 작은 수레 떠나가니, 출새가(出塞歌)가 만 리 길의 시름을 전해 주네. 하늘 북쪽 끝이라서 서신 왕래 힘들 테고, 화이(華夷)의 옛날 유주(幽州)에는 첩첩 산이 막혔으리. 鵰邊瑟海春飛雪, 磧裏金笳月滿樓, 自是主恩無外內, 之官何處不堪酬 : 붕새 나는 슬해(瑟海)에는 봄날에도 눈 날리고, 호가(胡笳) 소리 나는 사막(沙漠) 누대에 달 밝으니, 임금님의 은혜 본래 내외(內外)가 없으니, 어디인들 은혜 갚지 못할 곳이 있겠는가.
〔其二〕親族平康鮮, 功名半刺卑, 怡然赴絶塞, 非不遇明時, : 본관은 흔치 않은 평강 채씨(平康蔡氏)요, 공명은 지방관에 소속된 통판(通判), 태연자약 먼 변방을 향해 떠나니, 밝은 시절 못 만난 때문 아니네. 磧雪春樓見, 溟濤夜枕知. 磨天一片月, 應照戀君詩 : 봄 누대엔 사막(沙漠)의 눈발이 날고, 밤마다 파도 소리 누워 들으리. 마천령에 떠오른 한 조각 달이, 임금님을 생각하는 시를 비추어 주리라.》라고 하였다.
• 〈붕새 나는 슬해(瑟海)에는 봄날에도 눈 날리고, 호가(胡笳) 소리 나는 사막(沙漠) 누대에 달 밝으니 + 봄 누대엔 사막(沙漠)의 눈발이 날고〉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슬해(瑟海) 곁에 호가(胡笳) 소리 들리는 오랑캐들이 사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도 저 밝은 달은 비추고 있으니… …봄이 왔음에도 사막(沙漠)의 누대(樓臺) 주변(周邊)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다」라고 노래하고 계시다.
이곳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땅은,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뜻이다. 슬해(瑟海) 또한 이러한 땅에 있었다는 것이므로 반도(半島) 땅의 ”슬해(瑟海)“가 될 수 없음은 명확(明確)한 것이다. 반도(半島) 땅의 ”슬해(瑟海)“의 대륙(大陸) 북방지대(北方地帶) ‘슬해(瑟海)’의 짝퉁이다.
(04) 번암집(樊巖集) 제8권 / 시(詩). 재필록(載筆錄)
【주-D013】 슬해(瑟海) : 《우리나라 함경북도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동해를 가리킨다. ‘숙종실록(肅宗實錄) 41년(1715) 7월 1일’ 조에 “이른바 슬해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사오십 리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고 합니다.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아서 어떤 때는 육로를 따라 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 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으므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 ‘朝鮮王朝實錄, 肅宗實錄 41年[AD 1,715] 7월 1일’ 조(條)에서 말하는 것은 : “슬해(瑟海)”의 위치(位置)만을 알려주고 있을 뿐, ‘슬해(瑟海)’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연유(緣由)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 땅에서는 ‘숙종실록(肅宗實錄) 41年[AD 1,715] 7월 1일’ 조(條) 기록(記錄)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은 분명(分明)하지만 : 오직 당시(當時)의 “슬해(瑟海)” 위치(位置)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왜 이곳이 “슬해(瑟海)”라고 불리게 된 연유(緣由), 사유(事由) 등은 전혀 설명(說明)하지 않고 있다. 또 경흥부(慶興府)가 ‘반도(半島)의 경흥부(慶興府)’라는 얘기는 오직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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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북관기사(北關紀事) / 山川道里【홍의영(洪儀泳)이 1,807년(純祖, 7) 함경도(咸鏡道) 북병영(北兵營)의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여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북관(北關) 지역에 관한 여러 정보(情報)와 의견(意見)을 12편의 글로 찬술(撰述)하여 1,808년 7월 순조(純祖)에게 진달(進達)한 책이다.】
《蓋自豆江入海, 以北名以瑟海, 亦有界限, 我國漁採有禁不到云。 : 대개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 그 북(北)쪽을 슬해(瑟海) 라고 부르는데, 또한 계한(界限)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하여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 ‘북관기사(北關紀事)’에서 말하는 ”슬해(瑟海)“의 위치는 기존(旣存) 주장(主張)과는 또 다른 곳을 말하고 있다.
旣存 :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 바다를 슬해(瑟海)라고 했다’라고 하였는데,
北關紀事 :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 앞바다가 아니라 : 하구(河口)의 북(北)쪽 바다를 슬해(瑟海)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곧 ”두만강(豆萬江) 하구는 슬해(瑟海)가 아니다. 「그 북(北)쪽 바다가 “슬해(瑟海)”이다」라는 이야기다.
• 사실(事實) 이번 “슬해(瑟海)”라는 바다 이름을 찾다 보니… …과연(果然) 소중화(小中華)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옛 선조(先祖)들은 도대체 뭔가? 하는 의문(疑問)이 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무지무식(無知無識)한 ‘무지렁이’들이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면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사는 동네 이름도 모르면서 살았다”라는 것에는 회의적(懷疑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명(地名)은 하나인데… …이곳, 저곳, 아니 저곳, 아니 이곳… …한다는 것은,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라는 것 외(外), 다른 것은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餘地)조차 없는 일이다.
「우리가, 국민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얽매이며 산다.」라는 것은, 직접(直接) 피부(皮膚)로 느끼지 못하지만 : 「사고(思考) 자체(自體)가 비현실적(非現實的)으로 왜곡(歪曲)되어, 스스로 소국(小國), 제후국(諸侯國)의 백성(百姓)으로 상국(上國), 중국(中國)을 섬기는 것이 생활화(生活化)되어, 자신감(自信感)을 잃고, 자괴감(自愧感)으로 인하여 모든 일에 능동적(能動的)이지 못하고 소극적(消極的)인 태도(態度)로 일관(一貫), 또는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精神)에 심각(深刻)한 장애(障礙)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팩트(Fact)다. 「옛 조선(朝鮮)의 땅에서, 그들은 그 조선(朝鮮)의 직계(直系) 후손(後孫)들에게 “당신”들은 제후국(諸侯國)의 천민(賤民)이었을 뿐이다」라면서 비웃음을 던지고 있다. 이건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것이다. 왜?
바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인한 것이다. 「옛 조선(朝鮮)은 사해(四海)를 통치(統治)한, 다스린 천자국(天子國)이었음에도, 겨우 1세기(世紀)의 잘못된 역사교육(歷史敎育) 곧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조선사(朝鮮史) 교육(敎育)으로 인하여 최악(最惡)의 결과(結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누굴 탓하나?
일제(日帝)를?
서남세력(西南勢力)과 손문(孫文)을?
서세(西勢)를?
그보다 더한 자(者)들이 바로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임은 우리는 알고 있다. 일제(日帝)를? 서남세력(西南勢力)과 손문(孫文)을? 서세(西勢)를? 욕한다고 해결(解決)될 일은 없다.
바로 우리의 선배(先輩)들이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가 되고, ‘반역행위(叛逆行爲)’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들을 처벌(處罰)하지 못한 것 또한 식민지(植民地) 총독부(總督府) 관치(官治)에 적응(適應)하며, 순응(順應)하며 살아오며, 이등국민(二等國民)으로, 일제(日帝) 천황(天皇)의 교화(敎化)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백성(百姓)으로 만들어진 결과(結果)다. 곧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결과(結果)다.
‘소수(小數) 조선인(朝鮮人)’들의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이러한 ‘소수(小數)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을 제대로 처벌(處罰)치 못한 것은, ‘100년(年), 500년(年)’ 미래(未來)에까지 ‘치욕(恥辱)된 역사(歷史)’로 후손(後孫)들에 의해 기록(記錄)될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누굴 탓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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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북새기략(北塞記略) /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
《磨天嶺。盤據端川吉州之間。南北道分焉。南謂之南關。北謂之北關。: 마천령(磨天嶺)이 단천(端川)과 길주(吉州) 사이에 버티고 있어 남북으로 도(道)를 나누니, 남쪽은 남관(南關), 북쪽은 북관(北關)이라고 한다. 北關列郡有十。曰吉州,明川,鏡城,富寧,會寧,鍾城,茂山,穩城,慶源,慶興也。: 북관(北關)에는 10개의 군(郡)이 있으니,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鍾城), 무산(茂山),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등이다. 鏡城以北。謂之六鎭。六邑分列於豆滿江邊。曰會寧,鍾城,茂山,穩城,慶源,慶興也。: 경성(鏡城) 이북(以北)은 육진(六鎭)이라고 한다. 6개의 읍(邑)이 두만강(豆滿江) 변에 분열(分列)해 있으니, 회령(會寧), 종성(鍾城), 무산(茂山), 온성(穩城), 경원(鏡源), 경흥(慶興) 등이다.
• 「회령(會寧), 종성(鍾城), 무산(茂山), 온성(穩城), 경원(鏡源), 경흥(慶興)」등지(等地)가 바로 특이(特異) 지세(地勢)인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당시(當時)의 이름을 빌리자면 “대막(大漠)”이라고 한 곳이다.
《地苦寒多風。; 날씨가 매우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 瓦屋皆設風簷。無瓦者編茅累重。隔以泥土以禦風。掣山峒。或用大石。以代瓦。刳大木。立烟筒。高過於甍。以防火災。: 기와집은 풍첨(風簷)을 설치하고, 기와가 없는 집은 띠를 여러 겹으로 엮고 진흙을 발라,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는다. 산간에서는 큰 돌을 기와 대신 쓰기도 한다. 큰 나무의 속을 파내 연통을 만들어 세우되 용마루보다 높여 화재를 방지한다.》라고 하였으며,
• 이러한 풍속(風俗)을 비교해보면 그 땅이 반도(半島)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는 남한(南韓) 땅보다는 당연(當然)히 추운 땅이지만 :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우 춥고, 바람이 많다는 것은, 특이지세(特異地勢)를 가진 땅에서 벌어지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이다.
《豆江入海處。是稱瑟海。登撫夷堡西烽臺望之。則靑黑之色。與天相接。: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自豆江至黑龍江。向南海之間。爲五百七十餘里。南海。卽彼所稱南海也。; 두만강(豆萬江)에서 흑룡강(黑龍江)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南海)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南海)를 말한다.》하였다.
• 북새기략(北塞記略)에서는 “두만강(豆滿江) 하구(河口)가 바로 슬해(瑟海)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句節)이 이해불가(理解不可)하다.
「두만강(豆萬江)에서 흑룡강(黑龍江)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南海)는, 저들이 지칭(指稱)하는 남해(南海)를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 그 남해(南海)란 : 곧 슬해(瑟海)이며, 두만강(豆滿江) 하구(河口)를 말하는 것인가?
‘두만강(豆滿江)에서 흑룡강(黑龍江)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라고 하였는데… …두만강(豆滿江) 하구(河口)에서 백두산(白頭山)까지가 570 여리(餘里)가 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이해(理解)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07) 靑莊館全) 66권 / 入燕記 上 / 正祖 2년 5월
《盛京靈京塔。每年貢人蔘一萬斤於皇帝。則必發賣江南等地。收其利。盛京蔘丁。每丁納蔘五錢。靈古塔納一兩。靈古塔及瑟海地方。亦有珠丁,貂丁。古來稱北珠之爲寶。卽此是也。; 성경(盛京)ㆍ영고탑(靈古塔)에서 매년 인삼(人蔘) 1만 근을 황제에게 바치면, 이를 반드시 강남(江南) 등지에 팔아서 그 이익을 취한다. 성경(盛京)의 삼정【蔘丁 삼을 재배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삼 5전(錢)을 바치고, 영고탑(寧古塔)의 삼정(蔘丁)은 한 사람마다 1냥(兩)을 바친다. 영고탑(寧古塔)과 슬해(瑟海) 지방에는 주정【珠丁 진주를 채취하는 사람】과 초정【貂丁 담비를 잡는 사람】이 있다. 예로부터 북주(北珠)를 보화로 일컫고 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다.》
• “해삼채취(海蔘採取)로 유명(有名)했다”라는 말은 거짓이었다는 건가? 참 알 수 없는 이야기다. ‘북주(北珠)’가 유명(有名)했다는 것이다.
영고탑(寧古塔)이나, 정확(正確)하게는 위치(位置)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슬해(瑟海)에서는 북주(北珠)【북(北)쪽에서 나는 진주(珍珠)】로 유명(有名)했다는 것이 아닌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이렇게 뭔가 나올만하면 : 다시 원점(原點)으로 회귀(回歸)해 버리니…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전개(展開)된 적이 없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기록(記錄)들이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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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耳溪集 5권 / 시(詩), 朔方風謠.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정유년(1777, 정조1) 겨울, 출척당하여 경흥 부사로 보임되었을 때이다〕. 〔孔州謠三疊 : 공주요 3첩〕
[一疊)] 孔州城何處是, 城中人飮豆江水, 東韓地盡瑟海頭, 南去漢陽三千里, 煙火近接女眞村, 風俗猶傳肅愼氏. 海魚兮無鱗. 山麥兮有耳. 衣袴多穿赤狗皮 : 공주성(孔州城) 어드메뇨. 성안 사람들 두만강(豆萬江) 물 마시네. 동한(東韓)의 강역이 슬해(瑟海) 어귀에서 다하니. 남(南)쪽으로 한양(漢陽)과 삼천(三千) 리 거리라네. 민가(民家)는 여진족(女眞族) 부락에 인접하였고. 숙신씨(肅愼氏)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네. 바닷물고기는 비늘이 없고. 산 보리는 귀가 있네. 옷은 대부분 붉은 개가죽으로 지어 입고 [中略]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서 : 「동한(東韓)이란 옛 조선국(朝鮮國)을 말하는 것이고, 그 땅은 슬해(瑟海)에서 끝난다. 또 한양(漢陽)까지 삼천리(三千里)라는 것이다.」
한양(漢陽)은,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으로, 황성(皇城)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역(逆)으로 계산(計算)하면 : 「황성(皇城)으로부터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까지 ‘3’ 천리(千里)이다」라는 것인데, 돌고 돌아가도 ‘2’ 천리(千里)에 불과(不過)하다.
그렇다면 “1” 천리(千里)는 어디에 팔아먹은 것일까? 북(北)으로 “1” 천리(千里)를 올라가면 : ‘러시아(Russia) 하바롭스크’ 땅에 닿는다. ‘1’ 백리(百里) 라면 모르되 ‘일천(一千) 리(里)’는 오차(誤差)는 발생(發生)할 수 없다. 곧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二疊] 《孔州山立峻嶒, 王跡之所興, 白嶽雄蟠天北極, 四時長留積雪與層氷 : 공주 산 높이 높이 솟아 있으니. 왕업이 흥기한 땅이로다. 백두산이 웅장하게 하늘 북쪽 끝에 서렸으니, 만년설과 겹겹 얼음 사시토록 녹지 않네. 中略.》
• 조선왕조(朝鮮王朝) 사대부(士大夫)【여행기(旅行記), 변경(邊境)을 지키던 장수(將帥), 병영(兵營)의 관리(官吏), 토착(土着) 양반(兩班) 등(等)】가 기록(記錄)한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중요(重要)한 기록(記錄) 중 하나는… …「만년설(萬年雪)이 사시(四時)에 쌓여 있다」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봉우리가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라는 것이다.
• 두 봉우리가 있어, 「큰 봉우리가 백산(白山)【백두산(白頭山)】이고, 가운데 봉우리가 장백산(長白山)이며, 또 보다회산(甫多會山)은 나지막하고 작게 보인다.」라고 하였다. 다음 게재(揭載)분으로,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편으로 준비(準備) 중이다.
《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은, 본래 ‘두 개(個)’의 봉(峰)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㈠ 별노합산【別盧哈山=東벨루하봉 : 4,506m】, 또 하나의 봉(峰)은 ㈡ 우의봉【友誼峰=輝騰山=冷山=西벨루하봉 : 4,374m】을 말하는 것이다. 그 외(外)에도 ㈢ 규둔봉【奎屯峰 : 4,082m】등이 있다.》
【➊ 別盧哈山位於俄羅斯和哈薩克接壤邊境,是阿爾泰山脈俄羅斯部分最高的山峰。別盧哈山有兩個山峰,東面較高的山峰高度4,506米,而西面的山峰高度4,440米,1914年首次有人登上峰頂。➋ 友誼峰,原名輝騰山(蒙古語:Хүйтэн оргил),原意為冷山,是位於蒙古國巴彥烏列蓋省和中華人民共和國新疆維吾爾自治區邊界一座山峰,海拔4,374公尺。其西南坡的友誼峰冰川是阿爾泰山脈最大的冰川,也是中國境內海拔最低的山谷冰川。➌ 奎屯峰(蒙古語:Таван богд,俄語:Таван-Богдо-Ула)是中國、蒙古國以及俄羅斯三國的三邊交界點,海拔4104米,屬於阿爾泰山脈,更小範圍為塔彎博格多山嶺。➍ 阿爾泰山脈(維吾爾語:ئالتاي تاغ تىزمىسى;俄語:Алтай;蒙古語:ᠠᠯᠲᠠᠢ · Алтай或ᠠᠯᠲᠠᠢ ᠶ᠋ᠢᠨᠨᠢᠷᠤᠭᠤ · Алтайн нуруу;哈薩克語:Алтай таулары)從中國新疆維吾爾自治區北部、蒙古西部一直延伸至俄羅斯境內、哈薩克東部,呈西北—東南走向,長2,000公里,海拔1,000—3,000米,北部平均海拔2,050米,南部平均海拔2,377米。[1][2]中國境內的阿爾泰山脈屬中段,長500餘千米。高峰有別盧哈山(4,506米),友誼峰(4,374米)、中蒙俄交界的奎屯峰(4,082米)。阿爾泰山脈森林、礦產資源豐富,清朝也稱金山,因為阿爾泰在蒙語中意味「金山」,漢朝就開始有採金活動,至清朝在山中淘金的人曾多達5萬多人。阿爾泰語系亦從此得名。】
[二疊, 繼續] : 《人言孔州惡. 我見孔州樂. 孰謂荒塞遠. 我愛王化博 : 사람들은 공주가 척박하다 말들 하지만, 나는 공주를 낙토(樂土)로 본다네. 황량한 변방 멀다고 누가 말했나. 왕화가 널리 퍼짐을 나는 사랑하노라. 昔日野人據六鎭. 束縛驅使同部落. 卽今朔方歸版圖. 冠服室廬效京洛 : 지난날 야인들 육진을 점거하고, 속박하고 부리기를 저네 부락처럼 했더니. 지금은 북방이 우리 땅으로 들어와, 복색과 거처가 서울을 닮았다네》하였으니,
• 《冠 服 室 廬 效 京 洛 : 복색과 거처가 서울을 닮았다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京洛」이란 뜻이 뭘까? 「경락(京洛) : 나라의 중앙(中央) 정부(政府)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 반도조선(半島朝鮮) 한성부(漢城府)를 경락(京洛)이라고 했다는 그 근거(根據)는 어디에 있을까?
「경락(京洛)」이란 「낙수(洛水)를 말하는 것이고, 낙양(洛陽)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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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耳溪集 5권 / 시(詩) / 朔方風謠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丁酉年, 1,777, 正祖 1)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다.] / 철령〔鐵嶺〕
《北去南來歲月移. 層巒絶壑轉逶迤. 人間始見羊腸險. 劍外誰言鳥道危 : 남북(南北)을 오가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층층 봉우리와 절벽은 더욱 구불구불하네. 인간 세상에서 험난한 구절양장(九折羊腸) 비로소 보게 되니, 검각(劍閣) 밖 조도의 위태로움 누가 말하였던가. 聲敎卽今連朔漠, 山河無復限華夷, 回看瑟海三千里. 飛度重關是不期 : 성상(聖上)의 교화가 지금 북방 사막(沙漠)까지 이어지니, 산하(山河)에 다시 중화(中華)와 오랑캐(夷) 구분 없어라. 삼천 리 떨어진 슬해 돌이켜 보노라니, 다시는 겹겹 관령(關嶺) 나는 듯이 넘지 못하겠지》라고 하였다.
• 위의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중화(中華)였다」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곧 「조선(朝鮮) 천자(天子)의 ‘황화(皇化)=왕화(王化)’가 오랑캐(夷)에게 까지 미치니, 이제는 화이(華夷)의 경계(境界)가 없어졌다」라는 것이다.
이는 곧「성상(聖上)의 교화(敎化)가 미쳤다」라는 말은, 「그 땅을 토벌(討伐)하고 통치(統治)하니, 조선왕(朝鮮王)이 가르치고 이끌어서 올바른 방향(方向)으로 나아가게 하니, 산하(山河)에 화(華)니 이(夷)니 하는 구분(區分)이 없어졌다」라는 말이다.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바로 중화(中華)요, 중국(中國)이었다」 조선인(朝鮮人)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음에도, 그 당시(當時)를 살아보지 못한 못나고 못난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이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삭막(朔漠)」의 뜻이 뭘까? 《Naver 한자사전(漢字辭典) : 朔漠 : 북쪽(北-)에 있는 사막(沙漠ㆍ砂漠)》이라고 하였다. 번역(飜譯)하신 분께서는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없으니, 무조건 “북(北)쪽 변방(邊方)”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 학계(學界)의 한계(限界)를 보여주는 대표적(代表的)인 사례(事例)다. 저자(著者)가 북(北)쪽 변방(邊方)지대를 말하면서, ‘북(北)쪽 사막(沙漠)’을 뜻하는 ‘삭막(朔漠)’이라는 단어(單語)를 선택(選擇)했을까? 이걸 항상(恒常) 염두(念頭)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 《回 看 瑟 海 三 千 里 : 삼천 리 떨어진 슬해(瑟海) 돌이켜 보노라니》라고 하였다. “슬해(瑟海)”까지 ‘3’ 천리(千里) 떨어졌다는 말은 「반도(半島) 조선(朝鮮)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슬해(瑟海)’는 오늘날의 러시아 땅 하바롭스크 동쪽 바다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10) 이계집(耳溪集) 제18권 / 잡저(雜著) 걸명문〔乞明文〕
《丁酉之歲。月貞于坤。兼山子單車一劒。北乘塞垣。躒鐵山。穿鬼門。躡肅愼之墟。薄瑟海之濱。于時層氷裂肌。剛風伐骨。榮衛外逆。神魄內奪。兩眼凝翳。荒於矚物。歷冬徂夏。恧縮煩欝。: 정유년(1,777, 正祖, 1) 10월에 겸산자(兼山子)가 수레 한 대를 타고 한 자루 칼을 들고 북쪽 새원(塞垣)으로 가서 철산(鐵山)을 넘고 귀문(鬼門)을 지나 숙신(肅愼)의 옛터에 이르러 슬해(瑟海)가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두꺼운 얼음은 살갗을 에고 된바람은 뼈까지 스며들어 영위(榮衛)는 겉에서 거스르고 신백(神魄)은 안에서 스러지며 두 눈은 엉겨 붙어 가려져서 사물을 보는 것이 거칠어졌는데, 겨울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자 마음이 위축되고 울적해졌다.》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 「철산(鐵山)을 넘고, 귀문(鬼門)을 지나 숙신(肅愼)의 옛터에 이르러 슬해(瑟海) 가에 도착(到着)하였다.」라고 한 것은, “반도(半島) 땅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관계(關係)없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수없이 반복(反復)되는 설명(說明)이지만 : “숙신(肅愼)의 옛터”라는 말이 바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숙신(肅愼)”은, 동북방(東北方)이 아닌 “서북방(西北方)으로부터 서방(西方) 사이에 있었던 고대종족(古代種族)”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산해경(山海經)과 그 주석(註釋), 회남자전(淮南子傳) 지형훈(墬形訓)」에서 생생(生生)하게, 명백(明白)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능가(凌駕)하는, 반박(反駁)할 수 있는 논리(論理)는 없다. 왜냐하면 「숙신씨(肅愼氏)의 후예(後裔)들인 말갈(靺鞨 : 마자르) 일곱 부족(部族)이 지금(只今)도 동구라파(東歐羅巴)에서 나라를 세우고 잘 먹으며 잘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동북방(東北方)에 숙신씨(肅愼氏), 숙신국(肅愼國)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沓沓)한 이야기다. “후대(後代)의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을 가진 사학자(史學者)들이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야합(野合)하여 만들어낸 ‘허구(虛構)의 조선사(朝鮮史)’에서 나오는 조작(造作)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 학계(學界)도 이제는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한 때다. 기성(旣成) 학계(學界)에 대한 대대적(大大的)인 숙정(肅正)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구(舊) 논리(論理)를 과감(果敢)하게 깨부수고, 민족(民族)과 국가(國家)를 위한 우리의 손으로 만든, 우리를 위한 한국사(韓國史)가 필요(必要)한 것이다.
〈언제까지 서세(西勢)와 일제(日帝)와 서남(西南) 세력(勢力)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외우고만 있을 건가?」
사학계(史學界)를 개혁(改革), 혁파(革罷)시켜야 한다. 기성학계(旣成學界)를 깨부수고, 민족(民族)과 국가(國家)를 위한 우리의 손으로 만든, 우리를 위한 한국사(韓國史)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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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계집(耳溪集) 20권 / 소차(疏箚) /〔進興王肇乘箚 : 흥왕조승을 올리는 차자〕
《乾坤與之合德。神人爲之夾助。於是乎我太祖大王。以聖神之姿。當千一之運。南征北伐。奄有三韓。創業垂統。立經陳紀。斥佛老之異敎。敷先王之大法。文章煥乎商周。聲明耀于寰海。: 하늘과 땅이 우리나라와 함께 덕을 합하고 신령과 사람이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도와주니, 이에 우리 태조 대왕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로 천재일우의 운세를 맞이하여 남쪽과 북쪽을 정벌하여 곧 삼한(三韓)을 모두 소유하였습니다. 왕업을 열어 후대에 물려주시고 대법(大法)을 세우고 기강을 펼쳐서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을 물리치고 선왕의 큰 법도를 펼치시니, 문물과 제도는 상(商)나라나 주(周)나라보다 빛나고 교화와 문명은 온 세상에 빛을 발하였습니다. 琉球入貢。暹羅獻欵。兀良哈源了浚之屬。相率而聽約束。西連渤澥。東盡瑟海。橘柚之包。貂豽之皮。自南自北。筐篚相望。魚鹽之饒。可埒於吳楚。繭絲之利。不讓於齊魯。유구국(琉球國)에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섬라국(暹羅國)에서 정성을 바쳤으며,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의 무리가 서로 이끌고 와서 명령을 듣고 따랐으며, 서쪽으로는 발해(渤澥 발해(渤海))와 맞닿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까지 다 차지하였습니다. 귤ㆍ유자 같은 과실과 담비ㆍ살쾡이 같은 짐승의 가죽들이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진상되어 그 광주리가 줄줄이 이어졌으며, 어염(魚鹽)의 풍족함은 오(吳)나라ㆍ초(楚)나라와 견줄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은 제(齊)나라ㆍ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는데,
㈠「當千一之運。南征北伐。奄有三韓。: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운세(運勢)를 맞이하여 남(南)쪽과 북(北)쪽을 정벌하여 곧 삼한(三韓)을 모두 소유(所有)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 고전(古典) 원전(原典)에 의하면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 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出處 / 後漢書 韓國]》라고 하였으며,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為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王治月支國 [出處 / 魏志 韓國]》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 한국(韓國)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한(韓)이 있었는데, 마한(馬韓)의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했고, ‘변진(弁辰)=변한(弁韓)’의 남(南)쪽도 왜(倭) 접(接)했다고 하였고, 그 땅은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에 한계(限界)한다고 하였으니, 북(北)쪽과 남(南)쪽은 육지(陸地)였다는 설명(說明)이다.
• 또 「‘세 한국(韓國)’의 영토(領土)는 모두 “방가(方可) ‘4’ 천리(千里)”였다」라는 것이니,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는, 이를 품고, 담을 수 없는 거대(巨大)한 땅에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면적(面積)은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 요충지(要衝地) 땅 대부분(大部分)을 포함(包含)한다.】
• 또한 「위지(魏志)에서는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의 왕성(王城)에서 78개(個) 나라를 다스렸다」라는 것이다. 【월지국(月支國)은 월씨국(月氏國)으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던 고대(古代) 국가(國家)다.】
특히 「후한서(後漢書)는 당시(當時)의 모든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반도(半島)에 없었다.」라는 것을 기록(記錄)으로 증거(證據)해 주고 있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一]之東 / 注 [一]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게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다. 주(注)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해 있는데, 그 산(山) 곧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후한(後漢) 또는 전한(前漢)을 동한(東漢)이니, 서한(西漢)이라고 하였는데, 마한(馬韓)은 서한(西韓)이라고 하였다.
•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라. 「마한(馬韓)의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했다」라고 하였으며, 「변한(弁韓) 역시(亦是) 그 남(南)쪽에는 왜(倭)와 접(接)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이고, 북(北)쪽과 남(南)쪽은 뭍(地)으로, 특히 남(南)쪽에는 몸에 문신(文身)하고, 훈도시(褌)를 찬 왜(倭)가 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이 정도(程度)의 지형지세(地形地勢)도 제대로 파악(把握)하지 못한다면 : 그게 어디 사학자(史學者)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정신(精神)을 좀 차리자.
「맞는 말인가? 정신 나간 헛소린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정신(精神) 나간 ”미친 헛소리“다.
‘후한서(後漢書)나 위지(魏志)’의 당시(當時) 기록(記錄)을 누가 감히 반박(反駁)할 수 있나? 원전(原典) 원문(原文)의 기록(記錄)은, 1500년(年) 이상(以上)을 생생(生生)하게 살아있음에도… …누가 당시(當時)의 이 기록(記錄)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반도(半島) 땅”에 처박혀 놓은 건가? 바로 일제(日帝)와 이들과 야합(野合)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반역자(叛逆者)들이다.
㈡ 《琉球入貢。暹羅獻欵。兀良哈源了浚之屬。相率而聽約束。: 유구국(琉球國)에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섬라국(暹羅國)에서 정성을 바쳤으며,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의 무리가 서로 이끌고 와서 명령을 듣고 따랐다》라고 하였다.
• ‘유구(琉球)에서는 내내 조공(朝貢)을 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해(理解)할 수 있다. 그러나 「섬라(暹羅)는, 오늘날의 태국(泰國)을 말한다.」라고 전해지는데, 섬라(暹羅)가 뭐가 아쉬워서 직선거리(直線距離) 일만(一萬) 리(里) 떨어져 있는 반도(半島) 한양(漢陽)까지 와 조공(朝貢)하겠는가? 뭔가 필요(必要)로 했기 때문인데, 반도(半島) 땅과는 지리적(地理的)으로, 당시(當時)의 형세(形勢)로 봐도 전혀 관계(關係)없는 나라와 나라다.
• 또 올량합(兀良哈)이 와서 스스로 속국(屬國)이 되고 의지(依支)하였다고 했을 때, “당시의 올량합(兀良哈)”은 어디에서 살던 부족(部族)이었을까?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바로 반도(半島) 한양(漢陽) 땅에서 서북방(西北方)으로 직선거리(直線距離) 8000리(里) 떨어져 있었던 오늘날의 당노산맥(唐努山脈) 남(南)쪽과 북(北)쪽에서 살던 자(者)들로 오량해(烏梁海)라고도 한다. 8000리(里) 이상(以上) 떨어져 있던 오량해(烏梁海) 즉(卽) 올량합(兀良哈) 부족(部族)들이 무엇을 얻어먹고자 반도(半島) 땅까지 내려와 항복(降服)하고 의지(依支)했을까?
이러한 사실(史實)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진솔(眞率)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되려면 : 「중원(中原)의 토착(土着) 왕조(王朝)인 “조선(朝鮮)”이 사해(四海)를 통치(統治)하면서 황복(荒服)의 이민족(異民族)을 압박(壓迫)하고, 왕화(王化)를 펼치니, 어쩔 수 없이 내조(來朝)하여, 항복(降服)하고, 의지(依支)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면, 이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인정(認定)받을 수 있다.
㈢ 《西連渤澥。東盡瑟海。: 서쪽으로는 발해(渤澥 발해(渤海))와 맞닿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까지 다 차지하였습니다. 橘柚之包。貂豽之皮。自南自北。筐篚相望。魚鹽之饒。可埒於吳楚。繭絲之利。不讓於齊魯。: 귤(橘)ㆍ유자(柚) 같은 과실과 담비ㆍ살쾡이 같은 짐승의 가죽들이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진상되어 그 광주리가 줄줄이 이어졌으며, 어염(魚鹽)의 풍족(豐足)함은 오(吳)나라ㆍ초(楚)나라와 견줄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은 제(齊)나라ㆍ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번 따져보자.
• 《西連渤澥。東盡瑟海。: 서(西)쪽으로는 발해(渤澥:渤海)와 맞닿고 동(東)쪽으로는 슬해(瑟海)까지 다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서(西)쪽은 서해(西海 : 黃海)이고, 용만(龍彎)은 서해(西海 : 黃海)의 북(北)쪽이니 서북(西北)쪽 끝에 있는 서해(西海 : 黃海) 일부(一部)일 뿐이고, 요동반도(遼東半島)로부터 그 북(北)쪽에 조작(造作)된 발해(渤海)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 의문(疑問)은, 반도(半島) 서해(西海)는 ‘중국(中國) 곧 상국(上國)’의 황해(黃海)다. 그렇다면 아국(我國)의 서(西)쪽은 황해(黃海)에 다하는 것이지, 발해(渤海)에 다한다는 말은 억지(抑止)다. 제후(諸侯)가 감히 천자(天子)의 가르침(敎化)에 딴지를 걸며, 역행(逆行)하는 것은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것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東)쪽의 슬해(瑟海)까지라고 하였는데, 또 다른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북평사(北評事)는 “슬해(瑟海)는 바다가 아니라 대택(大澤)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동해(東海)라는 설명(說明)은, 원문(原文) 내용(內容)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곧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㈣ 《橘柚之包。貂豽之皮。自南自北。筐篚相望。: 귤(橘)ㆍ유자(柚) 같은 과실과 담비ㆍ살쾡이 같은 짐승의 가죽들이 남(南)쪽과 북(北)쪽에서부터 진상되어 그 광주리가 줄줄이 이어졌다.》라고 하였는데,
• 「반도(半島) 땅에서 “귤(橘)나무”가 처음 재배(栽培)되기 시작(始作)한 것은 1900년(年) 초(初)로 열도(列島) 일본(日本)으로부터 묘목(苗木)을 들여와 심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Naver Ai : 제주도 귤나무재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 “감귤 재배의 역사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도입되어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1955년부터 감귤 재배 면적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라고 답변(答辯)하고 있으며,
… 또 ‘국가유산 포털’의 설명(說明)하는 것에 따르면 : 「지정구역 내 귤나무 종류로는 당유자나무 2그루, 병귤나무 2그루, 산귤나무와 진귤나무가 각각 1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귤나무와 진귤나무는 동일 수종으로 보여 각 수종별 2그루씩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나이는 약 100~2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나무 높이는 6~7m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면,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귤(橘)나무 흔적(痕迹)은 없다」라는 것이다. 현존(現存)하는 두 그루의 귤(橘)나무는 100∼200년(年) 정도로 추정(推定)된다는 것이니, 19세기(世紀) 초(初)와 맞물리는 이야기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18세기(世紀)를 살았고, 그 이전(以前)부터 남(南)쪽으로부터 귤(橘)은 진상(進上 : 貢物)되었다는 것이니, 홍양호(洪良浩)가 말하고 있는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㈤ 《魚鹽之饒。可埒於吳楚。: 어염(漁鹽)의 풍족(豐足)함은 오(吳)나라, 초(楚)나라에 견줄 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말씀 역시 반도(半島) 땅에서는 인정(認定)하기 어려운 구절(句節)이다.
• 곧 「AD 1,910년(年) 당시(當時) 어업(漁業)에 종사(從事)하는 호수(戶數)는 겨우 “33,646호(戶)”이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해(西海), 남해(南海), 동해(東海)’ 등(等) 삼면(三面)이 바다이어서 어염(漁鹽)의 이로움은 백성(百姓)들에게 엄청난 이득(利得)을 주어야 했으나, 1,950, 1,960년대(年代)에도 바닷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농촌(農村)에서조차 물고기의 이로움은 전혀 없었다.
㈥ 《견사(繭絲)의 이로움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 ‘견사(繭絲)란 누에고치와 그 실’을 말하는 것인데, 제나라와 노(魯)나라의 영토(領土)를 생각하면 : 「제(齊)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이 근거지(根據地)였고, 노(魯)나라는 산동성(山東省)의 남부(南部)를 근거지(根據地)로 했다」라고 전해지며, 산동성(山東省)을 말해 “제노대지”라고도 하는데, 그 면적은 157,000㎢로 반도(半島) 땅보다 조금 작은 땅인데, 그 인구(人口)는 1억 이상(以上)으로 반도(半島)의 2배(倍)에 이르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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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耳溪集 外集 제12권 / 북새기략(北塞記略) / 백두산고〔白頭山考〕
《遼志。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其內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 요지(遼志)에 “장백산은 냉산(冷山) 동남(東南)쪽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산속의 금수(禽獸)가 모두 희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니, 그곳을 더럽혔다가 뱀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서이다.”》라고 하였다.
• 역(逆)으로, 「백두산(白頭山) 서북(西北)쪽 1,000리 떨어진 곳에 냉산(冷山)은 없다.」 곧 “반도(半島) 땅과 동북삼성(東北三省)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오늘날의 중국(中國) 사학계(史學界)도, 반도(半島) 학계(學界)도, 모두 다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허구(虛構)의 이야기를 진실(眞實)처럼 만들고 있다. 중국(中國) 학계(學界)야, 당연(當然)히 옛 조선(朝鮮)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자신(自身)들의 왕국(王國)으로 만들려 한다지만 :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을 몽땅 뺏기고 반도(半島)라는 협소(狹小)한 땅으로 처박힌 무리는 항변(抗辯)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기 한이 없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 되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약(藥)이 된다.
《大明一統志。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故會寧府南六十里。橫亘千里。高二百里。: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장백산(長白山)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東北)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다. 가로로 1,000리에 뻗어 있고 높이는 200리이다.”》라고 하였는데,
•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東北)쪽으로 1,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걸 역(逆)으로 돌리면 : 「백두산(白頭山) 서남(西南) 1,000여 리(里)에 삼만위(三萬衛)가 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지도(地圖)를 보면서 백두산(白頭山)에서 서남(西南) 1,000여 리를 찾아보자. 과연(果然) 그곳이 어딜까? 구글어스 직선거리로 1,000여 리(里)는 압록강(鴨綠江)이 서해(西海)로 들어가는 용만(龍彎)【義州】앞의 서해(西海)에 닿는다.
그렇다면 : 삼만위(三萬衛)가 용만(龍彎)이었다는 것인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삼만위(三萬衛)는?
㈠ 三萬衛 [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明洪武二十一年(1388年),開原路治所又移到咸平府,並改元為原,開原名稱由此而來。後在此地設三萬衛、遼海衛、安樂州。清康熙三年(1664年)撤銷三萬衛,置開原縣,屬奉天省。開原市(滿語:ᡴᡝᠶᡝᠨ,羅馬化:keyen)是由遼寧省鐵嶺市代管的一個縣級市,位於遼寧省東北部,遼河中游東岸,鄰接吉林省。》
•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즉(卽)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개원현(開原縣) 주변일대(周邊一帶)를 말하는 것으로, “요하(遼河) 중류(中流) 동안(東岸)”을 말한다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백두산(白頭山)은, 이곳 삼만위【三萬衛 : 요하(遼河) 중류(中流)】에서 동(東)쪽에 있다. 따라서 위의 글 “동북(東北)쪽 1,000여 리(里)에 있다”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짝퉁이라는 증거(證據)다.
㈡ 역주조선왕조실록 [出處 : 자료문의 연락처: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79-2705] / 《삼만위는 1,387년(홍무 20)에 명의 홍무제(洪武帝)가 ☛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위소(衛所)였다. 그러나 운영상의 문제로 명은 이듬해 삼만위를 요동(遼東)의 개원(開原)으로 옮겼다》라고 하였으니,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로 보면… …「백두산(白頭山)은, 두만강(豆滿江) 유역(流域)에서 동북방(東北方) 1,000여 리 떨어진 북해도(北海道) 서(西)쪽의 동해지중(東海之中)에 있었다는… …이런 역사(歷史) 설명(說明)을 어떻게 표현(表現)해야 할까?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 말하는 것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고, 명(明) 또한 오늘날의 대륙(大陸) 요충지(要衝地)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는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 말하고 있다.
• 학계(學界)는… …말 그대로 : 제정신(精神)을 좀 차려야 하지 않을까? 진짜 답(答)이 없는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다.
「백두산(白頭山)이 가로로(橫) 즉(卽). 동서(東西)로 1,000리 뻗쳐있는가? 그 어디에도 그러한 정보(情報)가 없다. ‘없다는 말’은 ‘1,000리에 걸쳐 뻗쳐있지 않다’라는 말과 같다. 「짝퉁」이란 이야기다.
《通志云。長白山。卽歌爾民商堅阿隣。在船廠東南一千三百餘里。: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長白山)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 : 長白山의 滿洲語)이니, 선창(船廠)에서 동남(東南)쪽으로 1,3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淸一統志。長白山在吉林烏喇城東南。橫亘千餘里。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장백산(長白山)은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의 동남(東南)쪽에 있다. 가로로 1,000여 리에 뻗어 있는데 동(東)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西)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 산(山)들의 줄기가 모두 여기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지만,
• 「실제(實際)는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문제(問題)다. 백두산(白頭山)에서 서(西)쪽으로 심양(瀋陽)까지 1,000여 리(里)는, 산맥(山脈)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동서(東西)로 1,000리 나 뻗쳐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實際) 지세(地勢)는, 전혀 아니다.”
실제(實際)로는 백두산(白頭山)과는 다른 지맥(地脈)이 동북(東北)쪽에서 서남(西南)쪽으로 뻗어 있다. 곧, 「이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과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곧 전혀 다른 땅을 말하고 있다.
○ “슬해(瑟海)”가 어디에 있는 어떤 바다를 칭하는가? 에 대해서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라는 말이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이다. 사견(私見)은 있지만, 그것을 입증(立證)할 수 있는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는 발견(發見)치 못했기 때문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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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몇 구절(句節)은 「옛 조선(朝鮮)의 변방지대(邊方地帶)는, 사막지대(沙漠地帶)로 형성(形成)되어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3)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서수라(西水羅)>는 그의 문집(文集) ‘서계집(西溪集) 북정록(北征錄)’ 편에 실린 글이다. [自丙午冬, 至丁未春, 以北道兵馬評事赴任時作 : 병오년(AD 1,666년 顯宗, 7) 겨울부터 정미년(1667년) 봄 사이에 北道 北道兵馬評事로 부임할 때 지은 것이다.] / 서수라[西水羅] ‘尤’
《來經白草黃沙地, 行到天窮海盡頭 : 마른풀만 가득한 모래벌판 지나서, 이 세상 끄트머리 바닷가에 당도했네. 摠說尋常邊塞苦, 不如身見始堪愁 : 변방이 고생이라 예사롭게 말하지만, 직접 보고 시름겨운 것 말보다 더하네》라고 말씀하셨는데,
• 사기(史記)로부터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당서(唐書) 등등(等等) 또는 당시(當時)의 왕조(王朝) 시절(時節)의 관리(官吏), 학자(學者)들의 변새(邊塞)를 노래하거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한 많은 기록(記錄)에서 「백초황사(白草黃沙)」란 말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표현(表現)하는 전형적(典型的)인, 대표적(代表的)인 문구(文句)다.
박세당(朴世堂)이란 분이 반도(半島) 땅에서 「來經白草黃沙地, 行到天窮海盡頭 : 마른풀만 가득한 모래벌판 지나서, 이 세상 끄트머리 바닷가에 당도했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17세기(世紀)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인 박세당(朴世堂)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실제(實際)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아닌 거짓 지세(地勢)를 기록(記錄)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말은 ”박세당(朴世堂)“이란 분을 모욕(侮辱)하는 말이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존재(存在)하지도 않은, ‘마른풀만 가득한 누런 모래벌판을 지났다’라고 하겠는가? 그곳 서수라(西水羅)를 기는 길에 백초(白草) 황사(黃沙)가 아득하게 널려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13-1) 농암집(農巖集)【김창협(金昌協, 1,651~1,708)】 2권 / 시(詩) 경성(鏡城)
《障塞迢迢地一隅, 磧沙西北是長楡 : 머나먼 땅 변방의 험한 요새 경성이여, 사막(沙漠) 서북쪽엔 느릅나무 울창한데. 白山古雪兼冬夏, 靑海愁雲接曉晡 : 장백산 만년설이 사시사철 변함없고, 청해의 짙은 구름 조석으로 이어지네. 佩劍氣應衝北斗, 彎弓興在射東胡 : 허리에 찬 검 기운은 북두성을 치받고, 활 당기며 다짐하네 동호(東胡)를 맞추리라. 不知漢日燕然石, 容我千秋再勒無 : 먼 옛날 한나라 때 공 새긴 연연석에, 오늘날 내가 다시 공을 새길 수 있을까》하였다.
(13-2) 종성(鐘城)의 객사(客舍)에서
《愁州城外野茫茫, 磧草連天落日黃. 客路已臨胡地盡. 鄕心直共暮雲長 : 수주성 밖 아스라이 들판이 펼쳐진 곳, 하늘 닿은 사막 초원(磧草)아래 누렇구나. 나그네 길 어느덧 오랑캐 땅 닿고 보니, 이내 향수 어느새 구름 따라 깊어지네. 烽傳遠火明孤戍. 江湧寒波下大荒. 不恨樓笳侵曉夢. 歸魂元自阻關梁 : 불빛 전하는 봉화는 외론 진영 밝히고, 찬 물결 솟는 강은 황무지로 흐르누나.새벽 꿈을 깨운다고 망루 피리 한할쏘냐, 꿈속에도 관문 막혀 돌아가지 못했는걸》하였다.
• 「磧沙西北是長楡 : 사막(沙漠) 서북(西北)쪽엔 느릅나무 울창한데. 白山古雪兼冬夏 : 장백산(長白山) 만년설이 사시사철 변함없고」라고 하는 말은,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장백산(長白山)의 당시(當時)의 실제상황(實際常況)을 보고 듣고 한 사실(事實)을 말하고 있다. 느릅나무(楡)는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황(始皇)의 명(命)으로 40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장성(長城)을 쌓기 위해 북변(北邊)에 주둔하고 있던 몽념(蒙恬) 휘하(麾下)의 군인들이 쌓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유새(楡塞), 유관(楡關)이라는 요새(要塞)가 만들어졌고, 특히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 요동(遼東)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나는데 길가에 느릅나무가 일정한 간격(間隔)으로 서 있는데, 바람으로 인하여 모래가 날려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하여 ‘몽념(蒙恬)의 군(軍)이 심은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또 “백산(白山)인 장백산(長白山)은, 사계절(四季節) 내내 만년설(萬年雪) 곧 빙하(氷河)가 겨울철에도, 여름철에도 내내 쌓여 있다”라고 하였다. 2,774m의 높이에서는 가능(可能)한 이야기가 아니다. 곧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이 아니다. 곧 ‘짝퉁’일 뿐이다.
○ 조선영토(朝鮮領土)의 동서(東西) 방향(方向)으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끝이 나고, 산악(山岳) 지형(地形)으로 이어진 곳에 슬해(瑟海)는 있었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슬해(瑟海)”에 대해서는 계속(繼續) 추적(追跡)하고 있습니다. [6편∼下] -끝-
2026년 10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슬해(瑟海)"에 대한 정확한 위치 파악이 정말 아쉽고 아쉽습니다.
계속 추적하고 있으니... ...!
* 다음 게재 예정으로 "백두산(장백산)은 한 봉우리가 아닌 두봉우리를 말한 것이다"
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 서지적 증거를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 또 그 다음 편에는 말 많고 탈많은 "한해"를 옛 고전 원문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 한해는 알타이산맥 동쪽과는 "심 원 한 장"의 관계도 없는 중앙아세아 북방지대 땅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당(唐) 땡의 한해군 지역이라는 考證(고증)이 있습니다.
* 많은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