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군맥(軍脈)의 전개과정 민정당 정치자금의 내막 정권 비자금 1兆원은 어디로 인간 全斗煥의 의식구조
<1988년 5월 월간조선>
제1부 하나회 軍脈
청와대 비자금 9억원 행방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것을 군사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걸고 정권을 잡았던 全斗煥 전 대통령은 처삼촌에 이어 친동생이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사태를 맞았다. 국내외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런 독특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권력의 원천이었던 인간 全斗煥의 심리 기저(基底)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는 권력을 인간을, 돈을 어떤 존재로 인식한 사람인가, 이제 우리는 일단 마감된 全斗煥시대를 근거로 하여 그의 인맥과 금맥에 대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글자 그대?돈 본위의 사회인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돈을 통한 접근법이다. 돈과 관련되어질 때 비로소 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全斗煥씨가 [역사적인 돈]과 만난 것은 그를 한국현대사의 전면으로 내보낸 朴正熙 대통령 살해사건뒤 였다.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의 증언을 듣는다.
{어느 날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찾아와서 이런 보고를 했읍니다.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조사하다가 청와대에서 아무데도 기록되지 않은 돈 9억원을 찾아냈읍니다. 박 대통령께서 남긴 재산이 없어 그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것 같아 6억원은 박근혜양에게 주고 1억원은 합수본부 수사비로 쓰도록 빼놓고 2억원은 여기 가져왔읍니다. 이것은 총장님이 쓰시지요.] 받아보니 수표 20장이었읍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장 9억원을 전부 회수시킬까 하다가 대통령 유족에게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어서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고 받은 2억원은 최인수 비서실장을 시켜 육본공금으로 은행에 예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며칠 뒤 이 사실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더니, 그도 전두환 장군이 가져온 5천만 원을 받아 해공군 참모총장에게 2천만원씩 나누어주고 국방부에서도 1천만원을 쓰도록 했다고 합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압수했다는 돈의 정확한 액수를 모르겠어요. 나는 전장군에게, 그런 돈은 적법절차에 따라 써야지 우리가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느냐고 꾸짖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 중 鄭昇和씨의 이 폭로가 보도된 적이 있었으나 全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로부터 아무런 항의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 에피소드는 몇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돈의 자의적 처리의 습관, 적법절차에 대한 이해부족, 鄭昇和씨는 또 12·12사태 뒤 수사·재판과정에서, 또 출옥한 뒤 이렇게 해명한 바가 있었다.
나한테 직접 가져오시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추석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중추가절]이라고 적힌 봉투를 놓고간 적이 있었어요, 수표로 3백만원이 들어 있었죠.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두었읍니다. 10·26뒤 김재규로부터 그런 촌지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밝혀낸 전두환 장군이 나에게 그 리스트를 가져왔어요.
그도 이 돈은 특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했어요. 리스트를 훑어보니 내 이름은 빠져 있었죠. 웃으면서, 나한테도 3백만원을 가져왔던데 그 사실은 말하지 않던가, 하고 물었읍니다. 그는, 김재규가 그렇게 진술하기는 했읍니다, 고 말했어요. 내가 재차, 전장군은 안 받았는가, 하고 물었어요. 전장군은, 나도 5백만원을 받아 썼읍니다, 고 말합디다. 그런데 내가 받은 3백만원이 12·12사태 뒤에는 김재규가 나를 포섭하려고 준 돈인 것처럼 둔갑하여 발표되었어요}
권력을 잡은 뒤 全斗煥 대통령은 돈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을 엿보게 하는 아주 솔직한 표현을 더러 했다. 지난해 봄, 상공부 장관은 중소기업 대표 3백여 명을 데리고 청와대로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장관은 이 자리에서 {각하께서는 중소기업 육성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우리 중소기업 경영인들의 대부라고 하실 수 있읍니다}라고 소개하였다. 이 모임에서 全斗煥 대통령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 참석자는 말했다.
{제가 중소기업을 위해 일을 많이 했읍니다. 앞으로 정치자금을 좀 많이 내십시요. 나한테 돈 달라는 사람이 많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중소기업 사장들은 청와대를 나올 때 한결같이 {돈 뺏길라, 돈 뺏길라}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청와대에 가면 돈을 내야한다고 하던데…}라면서 걱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청와대에서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全 전 대통령은 기업인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자금은 저한테 직접 가져오십시요. 밑의 사람들한테 주지 말고} 정치자금을 대통령이 직접 받는 것은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에 위반이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고 받은 금품은 국가에 몰수, 귀속되도록 법이 정하고 있다.
청탁에 약한 인간상
서강대학교 장달중(張達重)교수는 {정권이 바뀌면 항상 전 정권의 부정부패가 폭로되어 온 것이 한국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이, 박 정권의 부정부패는 두 사람을 둘러싼 측근들의 몫이었는데, 전두환 정권의 경우엔 대통령과 그 혈족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일종의 네퍼티즘(Nepotism:동족중용)현상인데, 그런 점에서 아주 원시적인 부패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全斗煥 전대통령은 인간을 능률이나 기능보다는 인정과 의리 중심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全씨뿐 아니라 전경환(全敬煥), 이규동(李昑)씨 등 그의 처족과 친족들도 혈연, 친면 등 1차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직접적인 부탁에 약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 특징을 이용하려고 많은 이권 청탁자들이 이들의 주변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全 전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탈한 친화력에 감동했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 장점은 全斗煥씨가 대통령이 되지 않고, 예컨대 기업인이 되었더라면 계속 장점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全 전 대통령의 문제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해야 하는 자리에 오르고도 아주 원초적인 인간관계에 얽매여 결과적으로 국민경제를 이권시하는 쪽으로 흘렀다는 데 있을 것이다. 돈과 인사에 대한 全斗煥씨 문중의 사고방식은 이 집안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면도 많다는 분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全斗煥씨가 소년시절을 만주에서 보냈고, 장인 李昑씨(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출신·육군경리감 역임)가 만주군 경리관 출신이란 점을 들어 만주적 분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만군출신과 일군출신을 비교하면 잘 드러나는 현상인데, 1930∼40년대의 만주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스케일이 크고 야심만만하며 집단성이 강하고 인간성이 풍부한 반면에 일군장교 출신들이 가진 뚜렷한 도덕기준이나 사생관, 또는 군인의 본분에 대한 자각이 약하다. 이것은 폭력과 음모와 돈이 판친 [동양의 서부] 만주의 [아수라장과 같은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때문이란 것이다.
10·26뒤의 전환기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의 정치적 조언자이기도 했던 처삼촌 李圭光씨는 육군헌병감 출신이다. 朴正熙 대통령 말기에는 車智澈이 운영하던 사설정보대의 책임자로서 주로 金載圭를 견제하는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1963년 李씨가 관련된 박임항(朴林恒) 장군 쿠데타음모 사건도 李씨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용순씨로부터 정보공작비를 받아 반혁명 음모의 탐지를 한다고 하다가 꾸민 음모로 알려져 있다. 全斗煥씨의 형은 말단 경찰관 출신, 동생은 유도 실력을 자산으로 삼아 대통령 경호실에 근무했다. 이런 친족의 분위기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계속해서 그를 감싸고 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쇄신할 만한 청교도적인 도덕기준이나 결단력을 全대통령은 애당초 갖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돈과 친족에 대해서는 병적일 정도의 결벽증을 갖고 있었던 고 朴대통령 조차도 말기에 가서는 자녀관리에 실패, 10·26의 비극을 재촉할 정도로 독재권력은 인간을 부패시키는 힘이 드세다.
1975∼77년에 육사 교장을 지냈던 鄭昇和씨에 따르면 朴대통령의 아들 志晩군은 과외수업을 열심히하여 제 실력으로 육사입학시험에 합격했고, 1∼2학년 때는 아주 건실한 학교생활을 했다고 한다. 鄭씨는 {내가 육사 교장을 그만둔 뒤에 들으니 박지만군이 엉망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무단외출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붙들려서 육사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鄭씨는 {지만군도 문제였지만 주변에서 돈을 대주고 여자를 소개하는 등 아부하는 자들이 많아 그를 망쳤다}고 말했다. 박근혜(朴槿惠)양이 만든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 崔모씨의 부정을 조사한 당시 정보부장 金載圭는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딸의 읍소에 마음이 약해져 崔씨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았다. 독재자의 인척은 종교적인 또는 이념적인 가치기준으로 엄격하게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그를 이용하려는 주변인물들 때문에 타락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인맥의 저수지는 하나회
혈연과 친면을 중시하고 남의 부탁 들어주기를 좋아하던 全斗煥씨는 지금 그런 점에 기인한 여러가지 사건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나, 그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인간관계 덕분이었다. 그가 돈과 인사에서 공사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정권을 잡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全斗煥씨가 대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국군보안사령부가 아니라 [하나회]란 군내의 사조직이었다. 이 하나회 회원이었던 盧泰愚씨가 또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 조직은 두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세번째의 대통령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파워 그룹을 꼽자면 全·盧 전·현직 대통령 인맥의 저수지인 하나회 출신들을 으뜸으로 쳐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회는 직시할 만한, 깊이 연구할 만한 소재다.
하나회가 노출된 것은 1973년 봄, 육군보안사령부(사령관 강창성.姜昌成 소장)가 윤필용(尹必鏞)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소장)과 그의 부하들을 구속, 조사하면서였다. 이 수사에 참여했던 한 수사관을 기자가 만나 증언을 들었다. {하나회 수사를 하면서 같은 장교로서 화가 났읍니다. 청년 장교시절에 읽었던 [전시의 인간상](Men at War)이란 책이 생각났읍니다. 이 책은 장교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야전장교(Field Officer)는 어떻게 하면 전투에서 이길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부대를 발전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고, 정치장교(Political Officer)는 자신의 보직에만 신경을 쓴다고 했읍니다.
하나회 장교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 수경사·보안사·특전사·경호실·서부전선 등 좋은 보직을 거쳤읍니다. 우리가 파악한 하나회 조직은 육사 11기부터 육사 20기까지였읍니다. 당시 육사 20기 출신들은 조직을 만들고 있었죠. 한 기의 총원의 약 6%가 하나회 소속이었읍니다. 일종의 정원제(T/O)처럼 운영하고 있었어요. 11기에서는 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백운택(白雲澤), 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 등 대구출신들과 최성택(崔性澤), 손영길(孫永吉) 등 경남출신들이 하나회를 창설했었죠. 12기부터는 박희도(朴熙道), 박세직(朴世直)씨 등 경상도 출신뿐 아니라 박준병(朴俊炳)씨 등 충남 출신들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11∼15기까지의 하나회 멤버들의 성분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孫永吉, 金復東씨 같이 육사 졸업성적이 10위권 안에 든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위권 출신들이 더 많았고, 운동을 잘했던 이들이 특히 많았어요.
인사부서 장악
육사 16기 이후부터는 각 기수에서 엘리트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었지요. 각 기수마다 연락책을 맡은 중심인물이 있었읍니다. 예컨대 육사 14기에서는 李모씨가 그런 역할을 했었고, 하나회 출신들은 철저하게 서로를 이끌고 밀어주었읍니다. 全斗煥씨 등 지휘부의 인사들이 군 인사에 개입할 수 있는 부서에 있었으므로 이것이 가능했고, 그 뒤로도 인사 관련부서에는 하나회 출신들이 많이 들어갔어요. 정규 육사출신이 아닌 선배들도 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읍니다.
이들중 몇몇은 영관 장교시절부터 朴正熙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고 그 뒤로 도 尹必鏞, 朴鐘圭씨 등 실력자의 보살핌을 받아가면서 대통령과도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부하라고 생각했지요. 더구나 군 장교단의 중추가 돼가고 있는 정규 육사 출신들에게 영합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생각들도 하고 있었죠.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회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사조직으로 커졌읍니다.
尹必鏞사건은 하나회에 대한 비하나회 출신들의 반감이 노출된 측면도 있었어요. 그러나 수사에 제동이 걸렸읍니다. 보안사에선 일단 하나회 소속으로 밝혀진 장교들을 수도권에서 먼 곳으로 전보시켰는데 사후관리가 안돼 10·26사건 무렵에는 다시 서울 중심의 중요 부대에 몰려 있더군요.
그때 수사가 제대로 되었다면 12·12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들 것이고, 한국의 현대사는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수사를 해보니 당시 하나회 회장은 全斗煥준장이었죠. 尹必鏞 수경사령관이 회장이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尹씨는 하나회에 의해 고문격으로 추대된 상태였고, 오히려 겉돌고 있었어요. 尹사령관의 참모장이었던 孫永吉 준장 등 尹씨의 직계였던 하나회원들은 거세되었읍니다. 孫준장은 하나회 회원이기는 했지만 全씨와는 관계가 소원했고, 적극적으로 하나회 일을 보아주지도 않았죠. 즉 하나회 중에서 지류가 거세되고 본류는 살아 남았어요}
뿌리 뽑지 못한 하나회 수사
그들이 거세되지 않은 것은 朴鐘圭 경호실장의 비호를 받았고, 尹必鏞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다. 朴대통령은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할 때 {全斗煥이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귀띔하기도 했었다. 이 부분에 대해 姜씨는 {불러 캐물은 적은 있으나 협조를 받은 적은 없다}고 했고, 한 수사관 출신은 {협조한 때문에 살아 남았다는 말도 무리는 아니다}고 엇갈린 말을 했다.
{하나회에 대한 수사는 1, 2, 3 차까지 있었죠. 약 70명을 신문했읍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밝혀진 하나회 명단은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하나회의 조직과 명단은 문서로는 남아 있는 게 없었죠. 그런데 중간에서 수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 수사관 출신은 {5공화국의 정계와 군부의 핵심을 장악한 이들은 거의 전부가 하나회 출신이다}고 단언했다.
{盧대통령 메이커로 불리는 이춘구(李春九.육사 14기) 전 민정당 사무총장은 수경사 대대장, 정보참모를 지낸 하나회의 핵심 인물이죠. 배명국(裵明國) 민정당 의원도 하나회. 그는 육사 14기 출산으로서 尹必鏞사건 때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서 일하다가 면직되었는데 10·26뒤 정계에 등장했지요. 역시 육사 14기인 朴正基 전 한전사장은 하나회 출신으로서 尹必鏞 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예편되었던 사람입니다.
14기 출신 安武赫씨(안기부장)도 하나회 출신. 鄭鎬溶·朴熙道 전·현직 육군참모총장도 하나회 출신입니다. 崔世昌 합참의장(대장)도 하나회 출신. 정권안보에 가장 중요한 군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 수방사령관, 3군사령관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고 전임자들도 거의가 그러했읍니다. 3성 이상의 장성들 가운데 하나회 출신이 아닌 사람은 한 두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상계획위원장 이상훈(李相薰)씨(대장예편)는 하나회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비하나회 출신인데 결국은 全斗煥그룹과 화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권정달(權正達), 이종찬(李鍾贊)씨는 하나회 출신이 아닙니다.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 權씨가 탈락되고 李씨의 기반이 악화된 것도, 하나회 회원이 아니라는 것, 겉으로는 실력자인 것 같아 보이지만 핵심세력과는 간격이 있었다는 것과 유관한 것 같아요}
특전사 인맥도 구축
姜昌成씨는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이 하나회를 인정, 회원들에게 군도나 휘호를 선물하는 등 그 활동을 조장한 면이 있지요. 하나회 핵심장교 50여명의 명단을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그 분이 직접 구속, 예편, 감시 등으로 분류했어요. 정호용, 박준병 두 대령도 예편대상으로 돼 있었는데 박대통령이 빼 주었어요}
이때 구속되거나 예편당한 하나회 회원은 孫永吉, 權翊鉉(당시 대령·전 민정당 대표위원), 裵明國(당시 청와대 비서관·민정당의원), 鄭東喆, 朴正基, 정봉화(鄭鳳和.수경사령관 전속부관), 안교덕(安敎德)씨(육사 11기·전 정우개발 사장)등이었다. 이들은 12·12이후 모두 햇빛을 보게 된다. 하나회 수사가 어중간하게 끝난 뒤로는 보안사에서 하나회 회원들에 대한 관찰을 실시하지 않았다.
보안사에 하나회 회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공연히 하나회 회원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보안사령관들의 책임회피였다는 비판도 있긴 하다. 오히려 하나회 수사를 맡았던 이들이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全斗煥 장군은 하나회의 대표로서 일해 왔다.
최고회의 민원비서관, 정보부 인사과장, 육본인사 참모본부, 수경사 대대장, 육군참모총장 부관, 연대장, 공수여단장, 경호실 차장보, 사단장, 국군보안 사령관 등등 全장군의 군경력은 권력의 핵심과 인사부서에서 맴돌았다. 그는 이 직책을 잘 활용하여 하나회 회원들을 요직에 앉히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의 인맥을 구축하게 되었다.
하나회 회원들은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으나 승진, 보직 등 인사를 통해서 금방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장교는 {하나회 회원들은 자기가 원하는 부서에서 원하는 기간만큼만 근무할 수 있는 것 같아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위관급 때 입회하는 것이 보통인데, 기존 회원들과의 인연에 따라 소개되거나 추천되는 형편이기 때문에 능력이나 국가관보다는 지연, 학연, 친면 등 1차적인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하나회 출신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편 의식]이라고 한다. 全斗煥 준장은 제○공수여단의 부단장과 여단장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특전사 인맥이라고 부를 만한 친분관계를 구축하였다.
최세창(崔世昌.육사 13기·대장·합참의장) 박희도(朴熙道.육사 12기·대장·육군참모총장) 장기오(張基梧.육사 12기·전 총무처 장관) 등 12·12사태 때 그의 편에 섰던 후배들과 鄭鎬溶, 盧泰愚씨 등 11기 동기생들과 민정당 오한구(吳漢九.육사13기)의원은 모두 공수 여단장 출신이다. 육사 11기의 세 여단장을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정병주(鄭炳宙) 당시 특전사령관(12.12 때 피격되어 소장 예편)은 {그들과의 불화로 전임 사령관이 그만둘 정도였다.
그들은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과시했다. 정호용씨는 다르게 처신하더라}고 기억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특전사를 확장하면서 이 부대에 대(對) 전복임무, 즉 쿠데타 방지의 기능까지 맡겼다. 기동성이 좋아 전략부대의 성격을 띤 특전사의 확장에 대해 미국 쪽에선 한국군의 독립성을 경계하며 반대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이 부대를 서울 부근에 배치했다. 12·12때는 이 부대가 전복방지가 아닌 전복의 기능을 했다.
합수본부의 착상은 10·26전부터
全斗煥 소장은 車智澈 경호실장의 발호를 견제하려는 鄭昇和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盧載鉉 국방부장관의 추천에 의하여 1979년 3월에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0·26사건이 났을 때 全장군이 보안사령관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권을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안사가 군에서 영향력이 큰 이유는 승진·보직 등 인사에 있어서 보안부대의 보고가 중요한 참고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보안부대는 통신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일단 유사시에는 보안사만이 상황을 정확히,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12·12사태 때도 그랬다. 보안사는 국방장관 직속기관이므로 보안부대는 일선 군 지휘관들과는 전혀 다른 인사통제를 받는다. 즉 보안부대장은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일선 지휘관들과 수평적, 또는 독립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全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에 부임하자 보안사의 분위기는 {파워가 있는 사령관이 왔다}고 해서 상당히 밝아졌다. 당시 보안사는 정보부의 견제를 받아 1977년부터 민간부문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보안사 직원들은 {이제는 우리 조직이 활성화 될 수 있겠다}고 기대했고, 全사령관도 {근거자료만 주면 대민간활동을 부활시키겠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 참모들은 민간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당시의 법규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全斗煥 사령관은 10·26사건 이전부터 비상사태 하에서 보안사의 역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1979년 여름 全사령관은 을지연습을 기하여 참모들에게 계엄령하에서 보안사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연구하여 안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때 기안된 것이 합동수사본부의 조직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계엄하에서 보안사가 중심이 돼 합수본부를 조직하고, 이 기구가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하도록 한 것이었다. 10·26뒤에 나타난 합동수사본부는 全장군의 머릿속에 그 이전부터 이미 들어 있었던 셈이다.
全사령관은 10·26사건 직전에도 어느 참모에게 {긴급 사태하에서 정부와 보안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연구,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보고를 받은 全장군은 {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합동수사본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9년 10월18일 부산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비상계엄령이 내려지면서였다.
10·26이전에는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鄭昇和 육군참모총장 사이에 별다른 알력이 없었다. 鄭씨에 따르면 全장군이 인사에 개입을 여러 번 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全斗煥장군은 돈과 관련된 청탁보다는 인사청탁을 많이 한 사람이고 이 청탁은 그의 사적(私的)인 인맥구축과 연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권력의 실체 꿰뚫어 본 全장군
1979년 10월 26일 밤 朴대통령의 죽음이 확인되고 절대권력이 공백상태가 돼버린 상황에서 全斗煥 소장은 許和平 비서실장에게 5·16을 연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全사령관과 그의 참모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0·26 다음날인 79년 10월27일 새벽에 全斗煥 사령관은 국방부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령선포를 의결한 직후, 참모들을 소집하고, 계엄하의 포고령 기안에 대해서 지침을 주었다. 이때 全사령관은 직접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정지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여름에 보안사가, 작성했던 합동수사본부 설치안에 따라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막강한 합수본부가 즉각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全사령관의 준비성 때문이었다.
27일에 발표된 계엄공고 제5호는 全사령관의 지침과 보안사의 복안에 따라서 합동수사본부의 업무한계를 [모든 정보수사기관(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의 업무조정감독]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권력공백기에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27일 아침 全사령관은 정보부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정보수사기관의 장들을 불렀다. 이들은 보안사로 들어올 때 위병들로부터 삼엄한 몸 수색을 받았다. 全사령관은 또 정보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을 모조리 불러 조사하도록 했다. 27일 아침의 합동수사본부 관계자회의에 배석했던 보안사의 한 참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좌중을 압도하면서 상황을 간단하게 장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날 회의에서 보안사의 법무참모는 미리 全사령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둔 바에 따라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전달했다. 일방적 통고가 돼버린 이 브리핑에서 합수본부측은 {중앙정보부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선 안된다. 단 합동수사본부의 허가를 받아서 집행할 수 있다}고 다짐을 놓았다.
이 항목은 全사령관이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다. 어떤 조직도 예산집행권이 박탈되면 힘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을 全사령관은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全사령관은 또 {앞으로 모든 정보보고는 오후5시, 오전8시 두 차례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각 기관에서 합수본부로 파견할 인원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
검찰에서는 이종남(李鍾南) 정경식(鄭京植) 이건개(李健介) 백삼기(白三基) 등 10여명의 검사들을 합수본부로 파견했다. 이들 검사는 10·26사건 수사와 정치문제에 관한 보좌역할 등을 수행하였다.
10·26직후 全斗煥사령관은 직접 崔圭夏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보안사의 대민간활동을 부활시켰다. 보안사에서는 보안사의 대민간 활동을 금지시키는 데 있어서 실무작업을 지휘했던 정보부 수사국장 金淇春검사(현 법무연수원장)에 대해서 불만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10·26뒤에 보안사의 일부 영관급 장교들은 金검사에 패한 어떤 조치까지 거론했으나, 金검사와 중고교 동창 사이인 李鶴捧수사과장의 만류로 金씨는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의 인맥과 금맥(2)
하나회의 작품―12·12사태
12·12사태는 합수본부라는 공적인 조직이 아닌 하나회라는 사조직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하나회 회장으로서 全장군은 이날밤 그 동안 수도권 부대에 심어 두었던 하나회 인맥을 전광석화와 같이 구사하여 군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군인들은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어떤 몫의 일을 했느냐로써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위기에 있어서 생명을 걸었느냐가 동지의 자격여부를 결정하는 제일 요건인 것이다. 제5공화국에서 全대통령이 중용한 기준도 그러하였던 것 같다. 12·12사태에 참여하여 정권에의 지분을 확보한 이들은 제5공화국 시절까지도 그 덕을 보고 있다. 반면에 그런 연고가 없었던 이들은 한때 부상(浮上)했다가도 허무하게 사라지곤 했다.
鄭昇和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러 간 두 대령―許三守(합수본부 총무국장), 禹慶允씨(합수본부 수사국장)는 하나회였다. 12·12때 합수본부편을 들었던 공수여단장 朴熙道 崔世昌 張基梧준장 가운데 張준장만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합수본부안에서도 12·12사태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이는 許三守 許和平 李鶴捧 우경윤(禹慶允)씨 등 하나회 회원들뿐이었다. 정보처장 權正達대령, 참모장 禹國一 준장 같은이는 통보를 받지 못해 그 운명의 밤에 우왕좌왕했었다.
2許1李의 활약
이때문에 12월13일 오전에 보안사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얼떨했다고 한다. 장교들 중에는 영문을 몰라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10·26사건과 12·12사태에서 드러난 全斗煥장군의 과감한 순발력과 줄기찬 권력의지는 그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감각에서 우러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격변하는 상황에서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식으로 핵심을 직격한 그의 행동력은 승부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2월12일밤에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파악하고, 지휘한 것은 全장군이었다. 그의 이런 지휘를 가능케 했던 것은 보안사가 군의 통신망을 장악, 중추신경역할을 평소부터 해온데다가 수도권 주변의 요직에 배치돼 있었던 하나회 장교들의 결정적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全장군의 전화 한마디로 총부리를 돌려잡은 장교도 있었다. 약20년간 그가 투자했던 인간관계의 축적은 이날밤 그에게 한 정권을 선물하였다.
12월13일 全사령관은 보안사 강당에 직원들을 집합시키고 12·12사태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全장군은 {나는 구국와 일념에서 거사했을 뿐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정치에 개입하겠다든지 하는 사욕은 전혀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全장군은 새 정권을 창출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는 보안사에 맡겼고 실질적으로는 許三守 許和平 李鶴捧 등 하나회의 엘리트가 이 업무를 통합, 조정하였다.
비로소 하나회는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許和平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기획, 許三守보안사인사처장은 인물발탁, 李수사국장은 부정축재자 수사 등을 주로 맡았다. 許三守씨는 이때 許文道, 李春九, 李相宰씨 등 많은 인물들을 全장군에게 천거했고, 국회로도 여러 명 보냈다. 정치공작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全장군은 직접 뛰기도 했다.
10·26직후에 해외에 나가 미국에 머물고 있던 전 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씨를 귀국시키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李씨와 사돈관계에 있는 김종희 한국화약그룹회장을 설득,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오도록 했고, 全斗煥보안사령관과의 면담도 주선했다. 李씨가 당시 공화당총재 金鍾泌씨를 공격하는 성명서를 내고 탈당한 것은 이 면담 직후의 일이었다.
국보위의 핵심에 하나회 출신 발탁
1980년 5월 국보위가 발족되면서 하나회출신들은 핵심자리를 잡게 되었다. 운영분과위원에 崔평욱(육사16기·현 국군보안사령관), 재무분과위원에 李春九(육사14기·민정당의원), 건설분과위원에 安武赫(육사14기·현안기부장), 사회정화분과위원에 許三守씨 등등이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국보위를 이끌어 갔다.
10·26뒤 합수본부와 인연을 맺었던 李鍾南·朴哲彦검사는 법사분과위원, 鄭京植검사는 사회정화분과위원, 尹必鏞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제일은행에서 물러났던 이 조(李源祚)씨(전 은행감독원장)는 재정담당자문위원이 되었다. 金鍾必 李厚洛씨 등에 대한 권력형 부정축재자 조사는 처음부터 이들을 정치적으로 퇴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고 사법적인 처리는 고려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수사를 통합 지휘했던 것은 보안사였고, 안기부와 경찰은 보조역할을 했다. 金鍾泌씨 등은 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혀진 뒤 신문을 받았다. 별다른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한다. 이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에 따르면 金鍾泌씨가 가장 의연한 태도를 견지했었다고 한다.
李厚洛씨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권력형부정축재자 조사를 이끈 기본자료는 정보부에서 보존해온 개인기록철이었다. 보안사에서는 이 자료들을 가져왔다. 정보부장을 지낸 과거의 실력자 등에 대한 기록철에는 손질을 가한 흔적, 심지어 비행을 지워버런 자취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가 만든 민정당
10·26뒤 金載圭 전 정보부장에 대한 수사에서 金載圭의 한달 기밀비(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가 4천만 원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全斗煥본부장은 {이럴 수가?}하면서 분개하더라고 한다. 그 때만 해도 全장군의 금액에 대한 감각이 순진하더라고 당시의 한 부하는 기억했다.
全장군은 권력형 부정부패의 척결과 정의사회구현을 새 정권출범의 당위성과 명분으로 내걸었고, 여당의 이름에다가 [정의]란 낱말까지 달았다. 그러나 그 주체세력인 하나회는 사회개혁에 대한논리적, 철학적 무장이 돼 있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에 대한 숙정은 보안사에서 주관하였다. 인사기록카드를 보안사로 가져 와서 許三守인사처장의 지휘 아래에서 대상자를 선별하였다. 李鍾贊 당시 정보부 총무국장은 許대령의 지휘 아래에서 숙정의 실무작업을 맡았다.
1980년 5월17일 이후 보안사 정보처는 주로 세가지 일에 주력하였다.
첫째는 새 공화국의 헌법개정안 기초작업이었다. 우병규(禹炳奎.현 민정당의원), 박철언(朴哲彦)검사(현 대통령 정책담당 보좌관) 등이 이 작업에 초빙되었다.
둘째는 민정당 창당작업이었다. 보안사는 안기부 경찰 등이 올린 민정당 국회의원지역구 공천후보자들과 자체적으로 취합한 후보자들을 종합하여, 全대통령에게 보고, 결재를 받는 일까지 대행하였다. 이때 全대통령은 보안사의 건의를 거의 전부 수용했고, 다만 2개 지역구의 후보자를 바꿨는데, 선거에서 떨어졌다. 정치정화규제자 선별작업도 보안사 정보처가 주관하였다.
정보부, 경찰, 보안사 등 3개기관에서 각기 작성한 규제후보자 명단을 놓고, 이 3개기관의 대표가 연석회의를 열었다. 정보부에서는 玄鴻柱차장, 경찰에서는 柳興洙치안본부장, 보안사에서는 정보처정치과장 韓鎔源대령 등이 참여하였다. 정보부와 경찰로는 정치인들이 청탁을 많이 했으나 보안사에는 정치인들과 친한 요원들이 적어 그런 청탁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새 정권이 출범하자 보안사는 다시 막후로 물러나고 안기부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1981년 초에 국가안전기획부법을 신설, 중앙정보부법을 대체할 때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에서는 안기부의 기능문제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으나, 결국 각 정보기관의 통합조정업무는 안기부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무리 보안사가 막강하다고 해도 계엄령이 해제된 뒤의 평화시에는 군 수사기관으로서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안기부도 재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얘기다. 全대통령은 안기부와 보안사를 상호 견제시키는 정보기관 운영방식을 채택하였다.
12·12주체세력의 논공행상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힘은 물리력과 돈에서 우러나온다. 이념이 부족한 독재권력이 자본주의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권적과 돈이 친해져 유착돼버린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적 교훈이다. 全斗煥인맥은 이념으로 뭉쳤다기보다 혈연, 지연, 친면으로 뭉친 일종의 동족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은 쿠데타를 통한 정권장악에는 적합하지만 정권유지를 하는 데는 부작용을 드러낼 수 있다.
朴正熙대통령은 5·16쿠데타에 필요했던 인물과 그 뒤 정권유지에 필요한 인물을 가려서 썼지만 의리·인정 등 원초적 감정을 중요시하는 全대통령은 하나회인맥을 그 뒤에도 중용했다.
하나회처럼 배타성이 강한 집단은 피아를 확연하게 구별하는 특징이 있다. 그 단적인 예가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과 禹慶允씨에 대한 대우의 차이일 것이다. 鄭총장을 연행하다가 하복부에 총상을 당했던 (鄭 전 총장쪽에선 합수본부 수사관 사이의 오인사격 때문이었다고 주장) 禹慶允 당시 대령은 하반신이 마비되었으나 준장으로 승진, 예편한 뒤 안기부장 보좌관으로 있었으며 김포공항내의 점포운영권을 얻은 데 이어 1986년에는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내곡리에 약40만평의 덕평골프장 허가를 받아 그해 10월6일에 개장했다. 禹씨는 적자를 보다가 1987년 7월1일에 국방부 공제조합으로 이 골프장을 팔았다.
국방부 공제조합에서는 10억원대 이상의 웃돈을 禹씨에게 지불했고 재산의 실사과정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조합원들로부터 받고 있는 중이다. 이 골프장의 회원은 1천4백여명이며 회원권은 1인당 1천만원이다. 현재 사장은 예비역 준장인 박찬보씨다. 회원 중 1인당 1백여만원을 낸 우대회원에게는(약 2백명) 군인전용인 태릉과 남성대골프장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덕평골프장은 개장 이전에 회원 모집을 할 때 경제관청과 기업체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권의 고삐 역할 12명
정권유지를 위해서, 즉 국민과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데 맥을 잡고, 고삐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다. 감사원장, 안기부장, 국군보안사령관, 국세청장, 은행감독원장, 한국석유개발공사사장, 전기통신공사사장, 한전사장, 사회정화위원장, 경호실장, 청와대 및 민정당의 자금관리담당자 등이 핵심중의 핵심으로 꼽힌다.
감사원장과 사회정화위원장은 공무원들의 비행을 감시하는 책임자다. 안기부장도 국가의 정보·보안업무를 통합·조정하는 책임자이며, 보안사령관은 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파수꾼이다. 국세청장은 기업의 비리에 결정적인 정보를 갖고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감독자이기도 하다. 은행감독원장은 은행의 운영과 인사 및 부실기업의 정리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전기통신공사사장과 한국석유개발공사사장 및 한전사장은 수조원의 현금을 만지고 수조원의 물품을 구매하는 정부투자기관이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굉장한 이권덩어리다. 민정당의 총무국장과 청와대 경호실장 및 총무수석비서관은 정치자금의 경리부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안기부장, 감사원장, 보안사령관, 정화위원장은 권력의 줄, 국세청장, 은행감독원장, 한전사장, 민정당 총무국장 등은 돈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국가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정권의 핵심인 이 12개의 직책을 5 공화국에서 누가 맡았느냐를 살펴보면 全斗煥 대통령의 인사 및 정치자금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자리가 바뀐 곳은 국세청장, 경호실장 뿐이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바꾸지 않은 것은 全·盧 정권 사이의 인수인계에 있어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고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사 창고 열쇠의 관리인을 쉽사리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 12명 가운데 9명은 군인이거나 군출신이고 7명은 경상도 사람이고 네명은 하나회 출신이다. 이 12명의 핵심인물들은 거의가 全대통령의 직속부하였든지, 하나회출신이든지, 예부터 친면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 5공화국에 들어와 공직근무를 오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李祜在 통신공사사장의 경우, 1981년부터 8년째 그 자리에 있다.
정치자금 관리의 핵심인 李建相 민정당 총무장은 경남 진주 출신이며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사 25기로 졸업했으며 종합행정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10·26을 만났고 10·26 뒤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대령의 소개로 보안사 예산 담당관을 지냈다. 1980년에 민정당이 창당되자 중앙당 재정부장으로 들어왔고 다음해 당 재정부장 겸 경리실장이 되었으며 1986년부터 총무국장 직책을 맡고 있다.
그는 성주 이씨 일가지만 李順子 여사와는 촌수를 따질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말했다. 민정당의 자금에 대해서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李국장은 민정당이 盧泰愚체제로 개편되면서 자리가 위태롭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으나 계속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청와대가 관리한 자금에 대해 가장 소상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李在植 전 총무비서관도 李順子여사와 인척관계에 있고 경리장교출신이라고 한다.
李春九·安武赫 콤비의 활약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에는 許三守, 許和平씨 등 육사 17기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5공화국을 마무리짓고 제6공화국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는 민정당 대통령 선거대책 본부장 李春九, 안기부장 安武赫씨 등 육사 14기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두 정권 사이의 가교역할을 맡은 李, 安 두 사람은 全, 盧 두 사람으로부터 다같이 신뢰를 받아왔다.
李春九씨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부하를 혹독하게 다루는 대신 개인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항상 조직의 차원에서 판단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에 대한 무서운 책임감과 사심 없는 사람이라는 평이 그를 중용케 만든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李春九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민정당 간부는 李씨와 친하려면 꼭 같은 스타일이거나 정반대형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李씨와 단짝으로 유명한(아내들까지도 친구사이라고 한다) 安씨는 李씨와 똑같은 인간형으로 볼 수 있는데 일에 대한 집념, 개인적인 결벽증, 조직을 군대식으로 관리하는 방식, 사심이 없는 일처리가 그것이다.
사회정화위원장과 국세청장 및 안기부장이라는 요직 중의 요직을 두루 거친 安武赫씨는 겉으로는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대단히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국세청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중용하여 주요부서에 배치했다. 예컨대 주세계장, 인사계장, 감찰계장에 이른바 유신 사무관을 배치하였다.
이 3개 부서는 국세청을 이끄는 데 고삐가 되는 핵심부서다. 일곱명의 역대 국세청장 중 김수학(金壽鶴)·徐榮澤씨를 제외한 다섯명이 군출신이었다. 安씨를 이어 국세청장이 되어 대통령선거를 치른 사람은 육사15기출신으로서 16년간 안기부 대공수사부서에서 일했고 대공수사국장까지 올랐던 성용욱(成鎔旭)씨(감사원사무총장역임)였다.
許三守와 朴哲彦
全斗煥인맥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許三守씨다. 직선적이고 행동력이 넘치는 그는 개혁주도세력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82년 12월에 그가 許和平씨와 함께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 자리를 물러난 것은, 5공화국을 되돌아볼 때 하나의 분수령적 사건이었다. 그의 퇴진은 張玲子사건으로 여론의 치명타를 맞은 全정권 안에서 개혁의지의 불씨가 사라진 것을 뜻했다.
許三守씨가 권력핵심에 남아 있었더라면 全敬煥씨의 횡포가 상당히 견제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許씨는 6·29선언 이전에 全대통령에게 두 번 찾아가 全敬煥씨의 제거를 간청했었다고 한다. 이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全대통령과는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했고 그 뒤부터 盧총재에게 밀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6·29선언의 막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春九 安武赫 許三守 최병열(崔秉烈) 朴哲彦씨 등을 현 정권의 핵심중 핵심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許三守씨가 두 정권 사이를 뛰어넘어 계속해서 핵심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5공화국 출범을 전후하여 보안사인사처장자격으로서 많은 인물들을 천거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민정당내 실력자였던 李相宰씨는 보안사 대공수사 요원으로 근무하다가 10·26뒤 許씨에 의해 천거되어 이사관대우 문관으로 승진, 언론검열을 책임졌었다. 그는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민정당 초대 조직국장을 지냈고 사무차장이 되어 조작과 자금을 담당했었다. 李春九씨를 국보위 재무분과위원회위원, 그리고 사회정화 위원장으로 추천한 사람도 許씨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全대통령은 李春九씨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李씨는 지금도 許씨에게만은 어렵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安武赫, 李春九, 許三守씨 등 제5, 6공화국에 걸쳐서 계속해서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하나회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군내의 하나회 인맥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6·29선언과 12·16대통령 선거에서 큰 공을 세워 盧대통령의 신임도 두텁다.
은행감독원장의 파워
국세청장이 부정적 의미에서 기업체의 고삐를 잡고 있다면 은행감독원장은 긍정적 의미에서 금융계와 기업계의 고삐 역할을 하는 자리다. 글자 그대로 은행의 자금운용과 임원 인사를 감독하는 은행감독원장은 기업에 대한 돈줄의 조정자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 86년 1월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민정당 전국구후보로 결정된 李源祚 전 원장은 역대 원장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언론으로부터는 [금융계의 황제]란 별명까지 얻었고,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선거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큰 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기자는 지난 4월11일 그를 사무실로 찾아가 이런 1문1답을 나누었다.
―尹必鏞 전 수경사령관, 全斗煥·盧泰愚대통령파의 관계는?
{尹선배는 대구중학(6년제) 한 해 선배였다. 나는 브라스 밴드 단원이었는데 육상 선수인 尹선배와 친했고, 학교는 다르지만 동년배인 盧, 全 두 분과도 친하게 지냈다. 아버님이 대구중·고교 교장 등 경북 지역의 여러 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셨다}
―尹必鏞사건파의 관계는?
{혹시 내가 尹장군의 자금관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 때 나는 제일은행 후암동 지점장으로서 尹장군 및 그의 부하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尹장군은 돈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 내가 관리할 자금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범법사실이 없었으나 파면 당하고 말았다. 1년 뒤 진정서를 청와대에 냈는데, 보안사외 朴대통령이 나의 무고함을 인정하여 복직을 허용했다. 김준성씨가 나를 복직시켜 주었다는 말이 있는 모양인데, 그 때는 김씨가 은행장으로 부임하기 전이었다}
―1980년의 금융계 숙정때 관여했다는데?
{10·26뒤 나는 제일 은행 상무에서 청와대 경제비서관(1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숙정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내가 금융계 인사들을 잘 아니까 조언을 해준 정도다}
―l980년에 석유개발공사 사장으로 부임하여 조(兆)단위의 석유비축기금으로써 금융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나는 기금을 공평하게 여러 은행에 예금시키는 방안을 마련하여 실시하였을 뿐이다}
―거액의 기금이 정치자금을 만드는데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컨대 예금에 따른 커미션이라든지?
{그것으로 정치자금을 만들었다면 벌써 소문이 났을 것이다. 공사와 같은 정부투자기업의 예금주에게 은행이 커미션을 주지는 않는다}
―은행감독원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데? {나는 적당히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은행으로 들어오는 압력을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선수표 발행의 금지, 부실기업해체·정리, 단자회사에 대한 규제 등 욕을 얻어먹기 쉬운 일들을 하다가 보니 모함도 많이 당하고 있다. 은행의 임원급 인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에 보장된 감독원장의 권한이기도 하다.
내가 은행 상무일 때 부장급이던 사람들이 지금은 은행장이 되어 있어 나의 조언을 구하는 일도 있다. 원장이 된 후에는, 말단 은행원보다는 상부징계에 중점을 두었고, 징계를 받았던 2천7백여 명에게는 사면도 해주었는데…}
李원장은 20여년의 은행원 경력을 갖고 있고 지점장 시절에는 예금유치에서 신화를 남겼다. 그는 은행의 업무에 소상하고 은행에 영향을 끼치는 자리를 두루 거쳤다. 전, 현직 대통령 및 하나회와도 고락을 같이 했고 민정당 전국구의원후보 10번으로 발표돼 다시 한번 그 끈끈한 관계를 과시하였다.
대구인맥과 하나회인맥의 접목
全斗煥대통령의 인사정책은 권력의 핵심을 하나회출신에게 맡겨 정권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고 경북고 인맥과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기능직 인사들을 전문직에 중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전문가로서 두각을 나타난 대표적 인물이 있다. 5공화국은 법의 왜곡이 극도에 달했던 시대였다. 이 정권은 모든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 했고, 법은 정권의 도구로 전락했으며, 모든 정치·사회문제와 하수처리장이 된 법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제5공화국의 사법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청와대 정무비서관-안기부장보좌관을 거친 朴哲彦 현 청와대 정책담당 보좌관이다(그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후보 17번이며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대통령보좌관 직책을 겸할 것이라 한다). 어느 잡지기사는 이런 프로필을 적고 있다.
{朴보좌관은 5공화국 출범때 개혁작업에 깊숙이 간여한 인물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다가 이번에 등장했다. 노대통령부인 金玉淑여사와는 6촌간으로 노대통령을 막후에서 보필해왔다. 그는 대통령선거때 [미래민족연구소]라는 사조직을 운영, 중요역할을 수행했다. 또 경북고출신들의 비공식 모임인 [주식회사 경맥]에서 {朴사장}으로 통하면서 선거에서 깊숙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張世東경호실장이 안기부장으로 승진, 全대통령에게 부탁해 그를 특별보좌관으로 데려 갔을 정도로 [주도세력]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안기부에서 朴특별보좌관과 가까이 지냈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박씨는 제5공화국의 법적인 문제처리에 깊이 관여하였다. 예컨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 유성환 의원 구속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고 법률 적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박씨에 의해 많이 좌우되었다. 박씨는 검찰과 법원의 인사에도 관여하였고 시국사건의 형량에 대해서 부탁을 하기도 했다. 머리가 명석하고 판단력이 정확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경시하는 면도 있다}
제5공화국 시절의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은 중요한 사건의 처리방법에 대해 朴씨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인척의 공직취임에 제동을 걸면서도 盧대통령이 그를 대통령 정책담당 보좌관으로 발탁한 데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오고가고 있다. 더구나 그가 전국구의원 후보로 발표되었고 그를 줄곧 따라다녔던 강재섭(姜在涉) 서울고검검사까지도 파격적으로 전국구의원후보 32번으로 결정된 것은 그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일이었다.
全斗煥시대는 대구 출신 인맥, 특히 경북고 인맥의 전성기였다. 비록 경남(합천) 출생이지만 全씨는 줄곧 대구에서 학교를 다녀 그의 친구들 중엔 대구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경북고는 인구가 많은 경북지역의 독보적인 명문고교로서 인재배출의 일원화된 창구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도 대구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부의 축적이 높은 곳이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대구 사람들은 한국의 군, 관료 및 재계에 깊은 인맥을 심었고 이 인맥은 全·盧체제의 지지기반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야마구찌 현(시모노세끼 항구가 있는 곳) 출신들이 명치유신뒤 수 십년간 육군을 장악, 수상을 일곱 명이나 배출하였는데, 야마구찌 사람들의 특징은 배타적 단결정신이라고 한다. 대구인맥의 특징을 그렇게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전두환의 인맥과 금맥(3)
제2부 權力과 金力의 유착
정권의 비자금 1조원
비자금은 기업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에도 있다. 물론 합법적 비자금이다.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이 규정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예비비]는 그 사용과 결산을 총액표시로만 하게 돼 있다. 시행령에 따르면 이 예비비를 관할하는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사용신청을 할 때 총액에 대한 추산의 기초를 표시하지 않도록 돼 있다. 사용조서에는 총액만 적어 넣도록 돼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예산은 신청부서에서 {얼마 달라}고 신청만 하면 어디에 쓰는지 물어보지 않고 요구금액을 내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감사원의 감사는 받지만 세목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숫자확인에 불과하다. 결국 국민과 국회가 어떻게 쓰여지는지 확인을 할 수 없도록 법제화된 항목이다. 지난해에 이 항목의 예비비 예산이 얼마였는지에 대하여 경제기획원에선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기자가 다른 방법으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지난 86년에 집행된 [국가안전 보장예비비]는 1천2백96억원으로서 전체예비비의 약60%였다. 5공화국 치하인 지난 80∼86년 사이 전체 예비비의 합계는 1조4천1백50억3천8백만원이었고 [안전보장예비비]는 약62%인 약8천 2백10억원이었다. 87년분까지 합치면 약1조원이란 얘기다. 서류상으로는 이 돈을 신청한 부서는 국가안전기획부로 돼 있지만 대통령이 직접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연락하여 이 돈을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 돈이 법이 정한 목적대로 [국가의 안정보장을 위한 활동]에만 쓰여졌는지, 그런 활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하는 지, 국민은 알길이 없다. 한 정권이 8년간 국민들의 감시를 전혀 받지 않고, 국민의 세금을 1조원이나 썼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다. 그 쓰임새에 대해서 납세자는 알 권리가 있다. 이 예산회계 특례법은 지난 63년에 만들어져 4반세기 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벌당 30억∼50억원 바쳐?
매출액으로 기준하여 한국에서 10대 기업에 드는 회사의 사장을 만나 익명을 조건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 동안 민정당이나 청와대에 갖다 준 돈이 1년에 얼마쯤 되었읍니까?
{아마도 우리같은 대기업은 1년에 30억내지 50억 원은 될 것입니다. 정치자금, 새마을성금, 일해재단기부금 같은 것이죠, 이 가운데는 특정한 이권과 관련된 뇌물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의 정례적으로 갖다주는 돈이지요. 우리는 일해 재단을 설립할 때 3억원을 기부했읍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와서 나중에 10억원을 추가로 더 냈습니다}
―그런 정치자금의 지출을 장부에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기밀비, 접대비, 기부금 등으로 조정하지만 역시 물품 구매비를 적절히 조정하여 실제보다 비싸게 산 것처럼 장부에 위장기록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읍니다} 이 대기업체 사장은 제5공화국 때는 정치자금을 낼 때 꼭 강취당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이권이 많아서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있었는데 5공화국 때는 일방적으로 뜯길 뿐이었다는 표현을 했다. 이 사장은 건설회사사장으로 일한 적도 있다. 그래서 정부가 발주하는 큰 공사를 따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뇌물을 써야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적어도 5%를 바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청와대에 보관돼 있는 새마을성금 장부를 공개하라고 언론이 떠들어 보시지요}라고 했다. {지난해 새마을성금을 얼마 냈느냐}고 물으니 이 사장은 {86년에 청와대에 10억원을 직접 냈는데 비서판이 영수증을 끊어주더라}고 했다.
10대 재벌에 드는 재벌 총수들은 지난해 분기마다 한번씩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대통령에게 약 20억∼30억원 씩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는 확실한 얘기도 있다. 재벌 부인들은 가끔 李順子 여사의 초대를 받기도 했는데 이때도 그들은 맨손으로 갈 수가 없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고 한 당사자는 말했다.
청와대로 창구 一元化
全斗煥대통령이 직접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앞에 예로 든 그 자신의 실토를 들먹일 것도 없이 확실하다. 불확실한 것은 그 자금의 규모일 뿐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은 거액의 정권유지비를 써야 한다. 정통성이 약한 만큼 정권은 불안하고 그 불안을 돈으로 해소하려 드는 것이다.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돈으로 야당공작을 하고, 돈으로 지지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는 공무원의 중립뿐 아니라 돈의 중립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12·16대통령선거의 교훈이 아니었던가. {나 한테 직접 가져오라}는 그의 말대로 全斗煥대통령시대에 정치자금을 만든 방법상의 특징은 정치자금의 모집 창구가 청와대로 거의 일원화되었다는 점이라고 한 소식통은 말했다. 朴正熙정권때는 공화당, 정보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이후락(李厚洛), 김형욱(金炯旭), 김성곤(金成坤), 김진만(金振晩)씨 등이 자금동원력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全대통령은 민정당의 정치자금 모금은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이 정한 테두리 안으로 한정시키고(즉, 양성화시키고), 음성적인 모금을 청와대로 일원화시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全대통령 스스로가 악역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손꼽히는 재벌그룹의 자금담당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5공화국이 출범하고 2∼3년간은 그쪽에서 좀처럼 기업으로 손을 벌려오지 않았다. 기업체에선 오히려 불안해 하였다. 권력과 기업은 적당히 유착되어야 하는데 권력이 깨끗하게 노니까 기업은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84년경부터 권력이 기업을 당기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혼탁할 수가 없었다. 기업이 권력을 유혹한 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권력이 기업을 끌어 당긴 책임이 더 크다. 기업은 돈을 뺏기 고만 있지는 않는 조직이다. 건네준 돈을 빌미로 하여 더 많은 반대급부를 취하려 한다. 그러니 결국은 서로가 이용을 하는 것이다. 권력과 돈은 따로 놀아야 서로 권위가 서는데 함께 유착되는 바람에 서로가 피해를 본 셈이다}
민정당출입기자들 사이에는 민정당이 지난 대통령선거 때 약 4천억원∼약 1조원의 금품을 썼을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92개 지역구 지구당에 직접 내려보낸 활동자금만 해도 1개 지역구당 10억∼20억원씩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각 지역구에서 현지조달하여 쓴 자금도 엄청나고, 용역이나 물건으로 기부받은 것도 많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全대통령은 李春九선거대책위원장을 통해서 선거자금을 전달했다. 이 자금은 김태호(金泰鎬)자금담당 사무차장→이건상(李建相) 총무국장을 거쳐 선거현장으로 공급되었다. 지난 연초에 민정당 사무처직원들은 대통령선거운동 때의 자금집행과 관련하여 불평을 쏟아놓은 적이 있었고 자금통인 몇 사람이 거명되기도 했었다. 盧泰愚총재도 당직자회의에서 {앞으로는 당에도 감사기능을 도입하도록 하라}고 지시했었다고 한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지난해 12월의 현금통화량은 11월보다 약 8천억원이 늘었다. 이 증가율(15.3%)은 86년12월의 증가율의 약 2.3배나 되었다. 지난해 10∼12월 4/4분기의 3/4분기 대비, 현금통화증가량은 86년 동기의 증가량의 약3배인 1조63억원이었다(평균잔액기준). 이는 [계절적 요인과 선거 등에 따른 현금의 수요 증대를 반영하며 화폐발행액이 대폭 증가한 때문]이라는 것이다(한국은행분석). 재미있는 것은 12월 화폐발행고의 약 80%가 1만원짜리였다는 사실이다. 여러 통계를 종합하여 선거에 기인한 지난해 12월의 현금통화 증가액을 3천억∼5천억원으로 추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액수의 대부분은 민정당과 정부쪽에서 지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통계는 하나의 암시에 지나지 않지만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수천억원대를 넘는 돈이 뿌려졌고, 그 대부분은 여권에서 쓴 것이란 사실은 쉽게 뒷받침될 수 있겠다. 이런 막대한 여권선거자금의 저수지가 청와대였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청와대로 들어가는 돈을 추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앞에 등장한 재벌기업사장의 말 대로라면 10대 재벌에서 민정당과 청와대에 거의 정례적으로 갖다주는 돈은 정치기탁금과 새마을성금 등을 합해서 한해에 3백억∼5백억에 이른다는 얘기다. 이런 정치자금은 워낙 거액이므로 주식회사의 장부에서 완전 누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부금, 접대비, 기밀비, 물품구매비로 분식정리된다.
경제계 각종모금현황(전경련 집계) (88. 2.11)
* '84년도 이후 일해재단기금, 새마을선금 등 기탁금액은 미확인
미국 해리티지 재단에도 16억원
全斗煥정권하에서 권력과 금력이 어떤 관계를 유지했느냐의 단면이 드러나는 것은 두 힘의 접점인 기부금이다. 기부금을 잘 분석하면 한 정권의 정치행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계의 각종 기부금지원상황을 전경련에서 집계한 내용은 위 표와 같다. 미국 해리티지 재단은 全斗煥정권을 노골적으로 편드는 연구보고서를 많이 발표해왔다. 이 재단에 대해 안기부가 주관하여 우리 기업체가 16억원을 기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준다(許和平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이 재단 연구소에 5년간 유학했었다). 한 기업인은 {외국의 연구소에까지 돈을 대줘야 하는 우리네 신세가 한심하다}고 푸념했다.
1986년 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최연규(崔棟圭) 연구원은 [기업의 준조세 부담에 관한 실증적 연구]란 논문을 발표했다. 2백36개 기업체(제조업 1백87개, 무역·도소매·숙박업 19개, 건설업 17개사)를 대상으로 1985년에 낸 준조세를 조사한 것이었다. 1983년의 경우 이들 기업은 매출액의 0.77%를 준조세로 지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해 한국 기업이 연구개발비(R&D)로 투자한 돈이 매출액의 1.11%였다. 1983년의 경우, 준조세가 연구개발비보다 더 많았다. 이것은 정치가 민주화되고 따라서 경제가 민주화돼 준조세의 수준이 내려가면 연구개발비를 증가시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준조세 기운데 새마을 성금은 준조세 전체의 3.29%를 차지했다. 학술·예술·장학관계 기부금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조사대상 2백36개 기업체가 85년에 낸 새마을 성금은 약53억 원이었다. 그런데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85년에 새마을 운동 본부가 전체 기업으로부터 받은 성금은 27억4천만원으로 돼 있어 이 표본업체들이 냈다는 돈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국내 제조업 전체에 대하여 표본 업체의 새마을 성금 부담비율을 적용하면 85년에 약 1백70억원을 낸 것으로 나타나 감사원 수치와는 더욱 차가 커진다. 기업체가 냈다는 성금은 청와대에 낸 것과 새마을 운동본부에 낸 것을 합친 것이고, 감사원 자료는 새마을 운동본부에 낸 것만 계산한 것이므로 한해에 청와대로 낸 새마을 성금은 약 1백40여억원이었다는 추산이 선다. 이런 추산대로라면 지난 5년간 청와대로 들써간 새마을 성금은 약 5백억원이란 얘기인데,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청와대 장부가 공개돼야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삼성, 현대, 대우, 럭키금성, 선경, 쌍룡, 한국화약, 한진, 롯데, 코오롱 그룹 등 한국의 10대 재벌의 주력기업 63개사가 지난 84∼87년 사이의 4년간 지출한 기부금, 접대비, 기밀비는 모두 약 3천1백55억원이었다.
현대그룹(8개사)이 4백89억원, 대우그룹(8개사)이 4백46억원, 삼성그룹(8개사)이 4백46억원, 럭키금성(8개사) 3백7억원, 쌍룡(7개사)이 2백93억원, 한국화약(5개사)이 1백68억원, 롯데그룹(4개사)이 1백28억원, 코오롱그룹(3개사)이 1백23억원의 차례였다. 이 액수는 거의 매출액에 비례하고 있었다. 이 총액의 약 60%는 기부금이었다. 이 3천1백여억원 가운데 정치 자금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3개 항목이 정치자금의 분식처리에 이용되는 계정 인만큼 앞으로 면밀하게 그 변화 과정을 추적하면 실마리가 잡힐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올해 청와대의 예산은 대통령실이 총1백3억원중 판공비가 1백16억원, 경호실이 총1백16억원중 판공비가 약70억원이다. 모 재벌그룹의 접대성 경비는 청와대의 판공비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왜 기부금·접대비가 늘었나
기부금 접대비 및 기밀비의 변화를 보면 특정기업이 어느 해에 특별히 많이 지출한 경우가 눈에 뜨인다. 1987년의 경우, 대한 항공과 호남에틸렌 및 (주)금호가 그런 경우였다. 대한항공은 87년에 접대비 약 5억8천, 기밀비 약 6억6천, 기부34 약 51억원 등 모두 약 66억원을 지출했는데 이는 전년도 보다 약 25억원이나 증가한 액수다. (주)금호는 1987년의 접대비가 86년의 약 1억7천만 원에서 약 9억1천만 원으로 약 5배나 늘었다. 기부금은 86의 약 3억 원에서 87년의 약 27억8천만원으로 9배 가량 증가했다. 호남에틸렌은 기부금이 86년의 약 23억원에서 87년엔 약 51억3천만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3개 회사는 모두 87년에 특별한 일을 치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한항공이 주력기업인 한진그룹은 약 8천억원의 빚더미 위에 있던 대한선주를 인수했다. 부채 47% 탕감, 부재의 20년 분할인수, 그 부채의 15년거치 15년 분할 무이자상환 등등의 금융지원을 받게 된 한진 측에선 {억지로 맡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대단한 이권을 얻었다는 평을 하고 있다.
(주)금호는 1987년의 로비 덕분인지 1988년 2월에 국내선 항공, 국제선항공업, 복합터미널 등 5공화국 최후, 최대의 3중이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회사다. 호남에틸렌은 대림 산업으로 합병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석유화학 공업의 중요 원자재인 에틸렌을 생산하고 있는 호남에틸렌(전남 여천 소재)은 86년에 매출액 3천6백억, 순이익 3백12억원, 이익 잉여금 7백40억원을 기록한 회사였다. 이 회사의 대주주는 80%의 주식을 가진 대림산업이었고 롯데가 20%를 가지고 있었다. 대림산업은 해외건설 경기의 불황으로 위기를 맞아 호남에틸렌을 흡수합병, 회사체질을 개선하려고 했다. 롯데에선 석유화학회사가 전혀 성격이 다른 건설회사와 합병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했다. 지난해 5월 주주총회에서 80% 감자(減資) 합병이 결의되어 호남에틸렌은 대림산업의 석유사업 본부로 흡수되었다. 9백억원의 자본금중 7백20억원을 그냥 장부상에서 없애버리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감자를 실시한 것은 합병뒤의 주식배당 부담을 줄이고 자본금이 작은 대림이 큰 호남에틸렌을 흡수하는 데 여러 가지로 편리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이 일어났고, 롯데에서는 소송까지 제기하기도 했었다. 대림과 롯데가 다투는 과정에서 재무부는 대림 편을, 상공부는 롯데 편을 들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전두환의 인맥과 금맥(4)
민정당 정치자금의 정체
큰 이권이나 특혜, 또는 기업간 대립에 관계되었던 이 3개 회사의 접대성 경비 및 기부금 지출이 매우 많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이 3개회사 중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낸(51억원) 호남에틸렌의 1987년도 주요기부금 명세를 알아보았다.
일해재단 기부금 10억원 보훈성금 1억원 민정당 정치헌금 15억1천만원 새마을 성금(새마을운동본부) 2천만원 한국화학공학회 장학금 3억원 교육시설 확충 지원금(대림학원) 8억원 체육성금(경기·전라도 체육회) 4억원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한 것은 민정당으로 들어간 정치자금이었다. 일해재단, 민정당, 체육회 등 세 군데로 낸 성금이 약 30억 원으로 전체의 약 60%나 적었다. 민정당에 내는 정치자금이 의외로 많은 데 착안한 기자는 다른 회사의 경우도 알아보았다(별표 참조).
표본 기업체의 성금 및 민정당 정치자금 제공 실적
이 표를 보면 5개 은행이 2년간 낸 새마을 성금이 약 9억원으로 집계된다. 항간에는 금융단이 지난 4년간 약1백20억, 증권계가 연 20억, 단자업계가 지난 4년간 약50억원을 새마을 성금으로 냈다고 한다. 이들 19개 표본업체의 성금을 분석하면 민정당에의 정치헌금이 약 52억으로 가장 많고 일해 및 현대사회연구소 기부금이 19억, 새마을성금 13억원 순이다. 이제는 범위를 좁혀 민정당에 내는 정치자금의 성격을 자세히 규명해 볼 차례다.
민정당이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에 보고한 1987년도 회계보고에 따르면 민정당의 수입은 총 3백34억원으로 돼 있다. 내역은 전년도에서 넘어온 것이 22억원, 정치기탁금 2백20억원, 국가 보조금 4억원, 당비 65억, 민정당 후원회에서 거두어 낸 후원금이 20억원, 기타 3억 원이다. 지출은 3백억 원으로서 내역은 운영경비 71억원, 조직활동비 38억원, 대통령 선거운동이 1백31억원, 조사비 2억원, 선전비 18억원, 기타 4억원, 사업비 14억원.
민정당이 발표한 정치기탁금 2백20억원 가운데는 당재정위원 65명이 모아서 낸 이른바 특별당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민정당이 정치자금을 거두는 공식경로는 위의 회계 보고에도 나타나 있듯이 ①선관위를 통한 지정 기탁금 ②민정당 재정위원들의 특별당비 ③민정당후원회의 후원금 ④국가보조금 등 네 군데로 돼 있다.
민정당 재정위원회는 주로 대기업체 사장들과 재력이 있는 민정당원들로 구성돼 있다. 65명(위원장 심정구.沈晶求)의 위원들이 있는데, 현대건설 회장 이명박(李明博), 조중건(趙重建) 대한항공사장, 박은태(朴恩台) 미주화학 회장 등등이 위원들이다. 민정당은 처음에는 대기업체 대표들의 참여를 피하고 사회적인 명망과 신뢰성을 가진 경제인들을 참여시킨다는 방침이었으나 2·12총선을 전후하여 재벌급 대기업 대표들도 개인자격으로 많이 끼게 되었다.
지난해 대기업 대표들은 3억원씩을 내는 등 이 재정위원회가 거둔 특별당비는 1백억원 전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민정당 후원회는 6백54개의 법인기업체, 2백34명의 개인으로 구성돼 있다. 운영위원은 30명이다. 후원금은 한해에 20억원 이상 거두지 못하게 돼 있다.
민정당 당비는 일반 당원은 월 3백원 이상, 일반 국회의원은 월 15만 원 이상, 사무처 직원도 월급의 5%, 중앙집행위원 및 상임위원장급은 30만∼50만 원 이상으로 돼 있다. 정당에 대한 국가보조금은 한 해에 10억원, 이 가운데 제1당은 44.5%를 받는다. 가장 비중이 큰 기탁금을 민정당은 과연 적법절차에 따라 거두고 있는가.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은 일반안(또는 법인)도 중앙선관위를 통해 정당에 정치 자금을 기탁할 수 있고, 이때 어떤 정당을 지정하여 기탁금을 낼 수도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지정하지 않은 기탁금은 의석수 등을 감안하여 여러 정당사이에 배분된다. 전경련의 기탁금이 이런 경우다). 법은 중앙선관위를 통한 정치 기탁금의 한도를 ①개인은 5천만원과 전년도 소득의 1백분의 5중 다액 ②법인 또는 단체의 경우엔 1억원과 전년도말 자본금(운영 자산)의 1백분의 2중 다액이라고 규정했다. 선관위는 이 기탁금을 받았다가 정당에 전달하도록 돼 있다.
민정당 정치헌금 리스트
여기서 자본금(운영자산)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다. 선관위에선 이것을 납입자본금이 아닌 총자산으로 유권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기탁금의 한도액이 굉장히 높게 돼 있다. 이에 대하여 국세청이나 회계전문가들은 {납입자본금으로 보아야 마땅한데 아마도 여당에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것 같다}고 비판적이다.
1987년 8월24일, 호남에틸렌이 민정당으로 지출한 [정치헌금 5억원]은 8월25일자 민정당 사무총장이 발부한 영수증에는 [특별당비]로 되어 있다. 그러나 9월3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 5억원에 대해 [정치자금 수탁증]을 호남에틸렌으로 보냈다. 기탁번호 256의 이 수탁증은 민정당에 지급된 5억원의 정치헌금이 [특별당비]에서 정치기탁금으로 둔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1월14일에 호남에틸렌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치헌금으로서 10억원을 지출한 것으로 경리장부에 기록했다. 실제로 이 장부에 붙은 영수증은 두 가지로서 11월19일자 민정당 사무총장이 발급한 특별 당비 영수증과 12월1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 10억원을 정치기탁금으로 받았다는 영수증(수탁번호 332번)이 또 붙어 있다.
현대그룹에서는 87년에 3억원을 민정당에 정치자금으로 기탁했다. 회사별 장부상으로는 다음과 같이 배분, 정리되었다. 현대 중공업 5천만원 현대 자동차 1억원 대한 알루미늄 1억원 현대 중전기 5천만원 그런데 이 3억원은 민정당의 경리장부에는 李明博 현대건설 회장이 개인자격으로서 재정위원 분담 특별 당비조로 낸 것으로 되어 있다.
청와대의 이권, 골프장내인가
위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 민정당과 중앙선관위는 기탁금과 특별당비와 이렇게 하는 것은 세금 때문이다. 법인이나 개인이 정당에 내는 정치자금은 손비로 인정받지 못해 증여세나 법인세 등 무거운 세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선관위를 통해 내는 정치기탁금에 대해서는 손비로 인정, 법인세 등을 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정당에서는 개인이나 회사가 내는 특별당비를 선관위를 거친 정치기탁금으로 변칙처리함으로써 면세혜택을 받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에 위반되는 것은 분명한데, 민주당의 김용오(金容午)의원이 전국구의석을 받기 위하여 돈을 낸 것이 정치자금에 관하는 법률위반이라 하여 구속된 바 있다. 중앙선관위의 한 당무자는 {어떤 경로를 밟든 그 돈이 결국은 민정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면서 기탁금이 법이 정한 과정을 무시하고 선관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민정당으로 들어가는 데 대하여 큰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았다.
이건상(李建相) 민정당 총무국장은 {특별당비를 정치기탁금으로 처리하기로 한 것은 몇년 전 여야가 정치적으로 합의한 사항이다}고 말했다. 여야가 합의했으면 야당도 그런 혜택을 받아야 할텐데 민주당과 평민당엔 아예 그런 정치기탁금이 들어온 예가 한번도 없다.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은 정치자금을 양성화하여 이 나라의 정치수준을 일보 전진시킨다는 정신으로 제정된 것이지만 현실적인 적용과정에서는 여당과 기업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돼 여당에 정치자금을 내는 이들에게 절세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법은 형해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범준(李範準)교통부 장관은 지난 3월21일 盧泰愚대통령에게 교통부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골프장 허가제도의 개선방안을 건의하였다.
이 보고에서 李장관은 골프장 허가에 관한 문제점으로 ①수요에 비하여 공급의 절대부족으로 이용자의 불편 및 비리가 발생하고 있고 ②골프장 허가의 지나친 규제와 허가절차의 비공개로 이권화 및 국민의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李장관은 앞으로 허가기준에 합당한 신청에 대하여는 공개적인 심사를 거쳐 사업을 승인하겠다고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이 보고는 공식적으로 내인가 제도의 이권화를 시인한 것으로 주목되었다.
내인가란 朴正熙대통령 시절부터 계속되어 왔던 제도이다. 골프장의 허가를 정식으로 받으려면 교통부, 건설부, 환경청, 산림청, 내무부, 농수산부, 때로는 국방부의 합의나 인가를 미리 받아야 한다. 이런 하부단계의 허가를 받고도 정식으로 영업허가가 나지 않으면 막대한 재산상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 대통령이 {이 사람에게 골프장 허가를 주기로 했다}는 뜻이 담긴 내인가 결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 개장한 골프장은 골드, 광주, 중부, 덕평, 설악, 제주, 제일, 뉴서울, 창원, 통도사, 팔공, 한성, 한인 등 열세 군데다. 지금 건설중인 골프장이 12개소, 내인가를 받은 곳이 7개소이다. 全斗煥대통령의 사인으로 문을 열게된 골프장이 32 군데나 된다는 얘기다.
이 32 군데 골프장의 면적을 합치면 6백만 평이 넘는다. 7년간 한국의 골프장이 두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골프장 내인가를 받는 데 청와대에 수 십억원을 내야 한다는 얘기는 공공연하고 직접 수 십억원을 바쳤다는 증언도 있다. 관료들은 대통령이 교통부장관을 젖히고 인허가권을 직접 행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종의 월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인, 친족, 처족에의 기부금
기업체에선 민정당 정치자금, 새마을 성금, 일해재단 기부금 등을 제2의 세금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금은 그래도 매출액과 이익에 비례하여 매겨지지만 이 제2의 세금은 경영상황과 별관계가 없이 정권의 뜻에 따라 액수가 결정되기도 한다. 이런 자료가 있다. 대우조선은 조선불황이 심했던 1984년에 순이익 59억3천9백만원의 약 30%에 해당하는 18억3천3백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이해 대우조선은 접대비 약 6억, 기밀비 약 3억5천만원을 합쳐서 약 27억여원의 접대성 및 기부성 경비를 지출했다. 이것은 순이익의 약 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주식회사 대우도 경영상태가 가장 나빴던 1984년과 85년에 접대비 및 기밀비과 기부금의 지출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 흥미롭다. 84년의 경우 주식회사 대우는 접대비 약 6억8천만원, 기밀비 약 8억6천만원, 기부금 약 42억원을 지출했고 85년에는 접대비 약 7억5천만원, 기밀비 약 10억원, 기부금 37억원 합계 약 10억원을 지출했다. 대우중공업은 1985년에 순이익 약 69억원의 약 40%에 해당하는 기부금 약 26억원을 지출했다.
현대중공업은 1984년 36억4천3백만원의 순이익을 올렸는데 이해 지출한 기부금은 약 3배나 되는 97억2천8백만원이었다. 1985년의 경우에는 순이익이 27억6천1백만원이었는데 기부금은 50억3천5백만으로서 약 2배였다. 금성전선은 1987년에 순이익 30억5백5천7백만원의 약 26%에 해당하는 7억9천8백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쌍용양회는 1987년에 순이익의 약20%에 해당하는 25억2천1백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선경합섬은 1985년에 순이익 약70%에 해당하는 11억9백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한일개발은 1987년에 순이익 71억8천3백만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약 15억1천9백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권력과 금력이 하나 되면 침몰
코오롱 상사는 1987년에 순이익 17억원의 약 40%에 해당하는 6억8천만원의 기부금을 냈다. 12월말 결산 3백23개 상장업체가 지난해에 낸 기부금 총액은 약2천4백27억원, 접대비는 1천 1백18억원이었다. 이 기부 금액수는 86년보다 44%나 증가한 것인데 대통령선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기업체들이 내고 있는 기부금 중에는 全대통령의 동생이 이끌던 새마을 운동본부를 위한 성금, 대통령 본인의 호를 따서 만든 일해재단을 위한 성금, 대통령의 부인이 설립자인 새세대 심장재단을 위한 성금이 포함되어 있다. 全, 盧 두 사람과 친했던 한 군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盧泰愚씨는 옛날부터 全씨를, 비록 동기생이지만 형처럼 대했었다. 全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사석에서도 말을 높였다고 한다. 全씨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런 주종적인 인간관계가 계속될 것이라고 全 전 대통령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두 가지 계산이 깔려 있다. 하나는 아직도 자신을 하나회의 회장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국민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 두 가지 판단이 착각으로 밝혀진다면 그의 힘은 사라질 것이다}
許三守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체험적인 독백같은 것을 털어놓았다. {권력, 돈, 명예는 분리돼야 한다. 한 사람이 이 가운데 두 개를 가지려고 하면 그 무게 때문에 침몰하고 만다} 이 말이 全 전 대통령에게도 적용될 것인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