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한국-일본-홍콩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
▲한국-일본-홍콩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식 장면.
해저 광케이블 통신시대가 시작됐다. 1990년 7월 10일 홍콩, 일본
으로 이어지는 H-J-K 해저 광케이
블이 착공 2년 5개월여 만에 시험
가동을 거쳐 정식서비스에 들어갔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은 물론 미국과도 광통신을 통해 보다 고품질로 전화 데이
터 영상서비스를 주고 받게 되었으며
국제통신이 위성통신과 함께 이원화됐다.
H-J-K 라인이 완공된 것은 5월 30일이었다. 4월 27일 관문국인
제주 성산포육양국이 전남 고흥으로
연결된 뒤 태평양쪽으로 7백1km 지점
에서 홍콩과 일본을 가는 선과 연결됐다.
한국은 H-J-K 라인에 3천4백만달러
(약2백40억원)의 공사비를 부담, 3천7백80회선을 확보했다.
➡️2015년 영화 ‘닥터 지바고’의 오마 샤리프 별세
➡️2012년 ‘할리우드 대표 성격파 배우’ 어니스트 보그나인 별세
➡️2011년 프랑스 발레계 이끈 안무가 롤랑 프티 별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안장식
👉🏿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2009년 7월 10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 묘역에 안장됐다.
안장식은 이날 낮 12시 추모객 등 2만여명(경찰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영구차가 사저 진입도로 앞에 도착하자 장남 건호씨가 노 전 대통령 유골을 가슴에 안고 영구차에서 내려 권양숙 여사 등 유족들과 함께 안장식장으로 들어섰다.
이어 고인에 대한 경례, 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 등 4대 종단 종교의식, 헌화·분향 등이 이어졌다. 헌화·분향에는 유족과 각계 대표 등에 이어 대선 때 TV 찬조연설을 한 '자갈치 아지매' 이일순씨 등 시민대표 14명도 참여했다.
고인 일대기 등을 담은 추모 영상물 상영에 이어 건호씨가 유골이 모셔진 백자합을 석관에 안치하는 봉안식이 거행됐다. 유가족들이 석관에 모래를 넣는 허토에 이어 한명숙 장의위원장과 이병완 전례위원장이 '참여정부 5년의 기록 DVD' 등 부장품을 넣고 석관 덮개를 닫은 뒤 태극기로 석관을 덮었다.
조총 발사와 묵념으로 안장식이 끝나고 높이 40㎝, 가로세로 각 2m 크기의 자연석 형태 '아주 작은 비석'이 기중기로 묘역 위에 얹히면서 노 전 대통령은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이어 일반 추모객 참배가 시작됐다. 행렬은 한때 비석에서 1~2㎞가량 늘어설 정도였고, 한 번에 20~30명씩 묵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안장식 후 노 전 대통령 49재 봉행 및 안장식을 위한 봉하 전례(典禮)위원회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을 통해 "지난 49일 동안 노 대통령과 함께한 국민께 감사한다"고 밝혔다. 또 "오늘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 보내드렸다.
슬픔도, 미안함도, 원망도 모두 내려놓자"며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다시 출발하자. 각자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하자"고 말했다. 전례위원회는 노 전 대통령 묘역과 생가 관리 등을 위한 실무 재단을 곧 설립하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기념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봉하마을 인근 봉화산 정토원에서는 유가족과 전 정부 인사, 주민 등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49재 행사가 열렸다. 49재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회관 앞 특설무대에서는 추모 문화제
'잘 가오, 그대'가 열렸다.
https://tv.kakao.com/v/ML_uqbyrZRI$@my
➡️2005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10차회의 전체회의(서울)
➡️2003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130억살 행성’ 발견
➡️2001년 가수 탤런트 등 유명 연예인, MBC 출연 거부 선언
👉🏿 가수 김건모 신승훈 박진영 g.o.d.와 탤런트 구본승 김정은 등 유명 연예인 100여명은 2001년 7월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MBC가 ‘시사매거진 2580’의 ‘연예인 노예계약’ 편파보도에 대해 사과할 때까지 무기한 출연거부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조성모 유승준 엄정화 김현정 박지윤 디바 싸이 등 유명 가수 대부분이 참석했다. 이날의 기자회견장에는 가수, 탤런트, 개그맨 등 톱스타 100여명, 연예제작자협회 회원사 관계자 50여명, 신문·방송 보도진 100여명 외에도 여학생 팬 300여명까지 몰려들어 격앙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이날 참석한 연예인들은 연예계 일부의 문제점을 마치 전체 문제인 양 표현한 MBC 보도의 편파성과 ‘노예계약’이란 용어 사용을 집중 성토했다. 박진영은 “연예인 계약에 일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를 전체인 것처럼 왜곡한 것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건모는 “MBC가 ‘노예계약’이라는 말을 쓴 것 자체가 우리를 노예로 보고 있다는 말”이라며 “연예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제작자와 동등한 관계다. MBC가 편파 보도를 사과할 때까지 무기한 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해 동석한 동료 연예인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들의 출연거부로 MBC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은 파행방송으로 진행됐다.
➡️1995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해제
➡️1994년 레오니트 쿠츠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선임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재선
➡️1986년 월북 소설가 박태원 사망
👉🏿 1986년 7월 10일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 북한에서 사망했다. 북한은 "서울에서 창작생활을 하다 공화국 북반부로 들어와 우리 당의 문예사상을 받들고 소설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자기의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쳤다"고 추모했다.
박태원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경 법정대학에 다니면서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법정대 예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1933년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과 `구인회`를 결성, 이후 작품활동에 몰두했다.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다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해 작품활동이 금지됐다. 1960년 복권후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집필했고,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간했다.
1930년대에 이상과 더불어 최고의 모던보이였고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그가 월북했다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월북전 그의 생애가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등단 무렵 `성탄제` `사흘굶은 봄 달` 등을 통해 카페 여급이나 서울 변두리 지역의 민중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계급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아니었다는 평가다.
➡️1985년1985년 7월10일 그린피스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서 폭발
👉🏿프랑스 정보기관 DGSE(대외치안총국)의 계획적인 폭발로 폭파된 그린피스의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
➡️1977년 한국,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서 종합우승
➡️1974년 남북적십자사, 1차 실무회담(판문점)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 인혁당 피고인 21명 선고공판, 7명 사형선고
➡️1973년 바하마,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9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창설
➡️1967년 이효상 국회의장 피선
➡️1967년 UN안보리, 콩고의 외인용병 금지 결의안 가결
➡️1967년 제7대 국회 개원
➡️1965년 고대생 10명 오대산 중턱서 조난사
➡️1965년 알제리 혁명지도자 부메디엔 새정부 수상에 취임
➡️1962년 김현철 내각수반 취임
➡️1962년 최초 통신위성 텔스타1호 발사
➡️1961년 능의선 개통
➡️1956년 야당, 국회서 특혜융자를 폭로
➡️1954년 미국평화식량계획의 기초가 되는 미국공법 480호 의회 통과
➡️1953년 한국휴전회담 재개
➡️1953년 소련 부수상 겸 내상 베리야 추방
➡️1952년 신익희 국회의장 피선
➡️1951년 개성에서 제1차 휴전 본회담 개최
👉🏿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 본회담이 시작됐다. 1년이상 끌어오던 한국전쟁이 휴전협상에 돌입한 것은 6월 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가 정전회담을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뒤인 6월 2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월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월 8일, 본회담이 이틀 후 10일부터 개성에서 열렸다. 이후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월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1년15일 만에 휴전협상을 시작했으나 남한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데모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년17일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협정이 조인됐다.
➡️1946년 해방후 최초의 전문-대학입시 실시
➡️1943년 미국의 천문학자 슐레징거 사망 - 사진술을 처음 사용하여 항성위치도의 제작과 별의 시차를 측정
➡️1943년 연합군 시시리섬에 상륙
➡️1940년 프랑스. 제3공화정 폐지
➡️1937년 사회주의 운동가 한위건 작고
➡️1936년 인천에 소년형무소 설치됨
➡️1931년 노르웨이, 그린랜드 합병 선언
➡️1924년 시대일보 자진 휴간
👉🏿 일제강점기 한때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대열에 끼었던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창간된 것은 1924년 3월 31일이었다. 최남선이 시사주간지 ‘동명(東明)’을 폐간하고 일간신문을 발행한 것이 시대일보였다.
사장 겸 주간은 최남선이,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은 안재홍과 염상섭이 맡았다.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싣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연재해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가중되는 자금난으로 경영권을 보천교(普天敎)로 넘겨야했다. 보천교는 증산교 계통의 종교단체였다. 사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보천교는
7월 10일 자진휴간을 선택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경영권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1년도 안 돼 몇 차례 사장이 바뀐 끝에 1925년 홍명희를 사장으로 맞아들여 혁신호를 펴내는 등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1926년 8월 중순쯤, 사원들의 전원 퇴사로 문을 닫았다.
➡️1919년 임시정부, 연통제 공포 시행
➡️1918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문화 (제5회 전국러시아소비에트대회서)
➡️19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발레, 사상 최고기온 56.7도 기록
➡️1910년 독일의 천문학자 갈레 사망 - 1846년 9월 23일에 해왕성을 처음으로 관측
➡️1907년 마산노동야학 설립(한국 최초의 노동야학)
➡️1905년 극작가 박진 출생
➡️1900년 파리 지하철 개통
https://youtu.be/w2mU8QKoj1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