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92호를 열며____
2016년 겨울,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고 보다
허만욱<본지 편집위원>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화한 〈레 미제라블〉이 배급사인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인 그해 12월 19일에 맞추어 세계 최초로 개봉되었다. 19세기의 소설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 독자들에게 프랑스대혁명 이후 왕정복고기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인간 구원, 부조리한 앙상레짐에 대한 분노와 혁명의 길을 제시하였다면, 2012년 말 2013년 초의 영화 〈레 미제라블〉은 한국 대중들에게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여러 모순에 던져진 한국 민중의 강퍅한 삶과 완고한 체제에 대한 위안과 희망의 텍스트가 되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은 영국의 뮤지컬영화다. 원작의 사건, 인물, 스토리를 공유하면서 뮤지컬 장르의 힘으로 관객의 몰입을 더욱 독려한다. 아울러 방대한 서사를 축약할 수 있는 영화의 장르성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측면들, 즉 전쟁, 평화, 증오, 사랑, 분노, 열정, 배신, 그리고 정의 등 인간사회의 보편적 삶의 모습과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장발장이라는 한 인물의 삶에 투영시킨 사회적 약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정치 변화를 일으킨 자발적 시민혁명이자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한 항변 등을 표현한 대서사적 이야기는 역동적인 카메라의 줌인과 웅장한 음악과 함께 펼쳐지며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개봉된 실사 뮤지컬영화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할 만큼 우리나라에서 〈레 미제라블〉이 환영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 갑작스런 문화적 신드롬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분분했다. 무엇보다 대선 정국 직후 패배감과 허망함과 상실감에 젖어 있던 일군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위안을 주었다는 해석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유권자 중 상당수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절반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이는 바꿔 말하면 또 다른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원치 않았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가 담긴 〈레 미제라블〉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대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세대 간의 갈등이 극대화되며 그 어느 때보다 젊은 세대의 투표 독려 캠페인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선거를 통해 변화를 꾀하고자 했던 젊은 세대들은 결국 그들의 패배로 정의된 2012년 대선 결과에 실망하며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던 젊은 혁명가들로 전이되었고, 혁명에 실패한 그들 이야기와 동일시되면서 아픔과 동시에 희망을 느끼며 위로를 받았다.
빅토르 위고가 보았던 19세기의 프랑스는 현재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객들은 장발장이란 익숙한 안내자를 통해 프랑스의 격동기로 들어가 그 안에서 아직도 변하지 않는 사회적 패배감과 공포감을 만난다. 그러나 정작 ‘레 미제라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잔혹한 고발이 아니다. 용서를 베풀었던 신부, 장발장이 구해주었던 노예, 짝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 등을 통해 선과 악, 용서와 신뢰, 사랑과 휴머니즘을 대비시키며 마침내 세상은 이러한 반성적 성찰에 의해 치유될 수밖에 없다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삶과 성격이 각각 달랐던 수많은 등장인물의 운명 속에서 감지되는 양심과 각성에 대한 성숙함에서 간절한 소망과 위대한 변화에 대한 희망을 본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혁명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광장 중앙으로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혁명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바리케이드의 정상에는 주인공들이 모두 돌아와 있다. 경찰에 사살된 젊은 혁명가들, 슬픈 사랑을 품고 눈을 감은 여인, 외롭고 고단한 생과 마침내 작별한 장발장, 그리고 혁명의 새벽을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까지. 장엄한 노래가 광장을 가득 채운다. ‘들리는가, 민중의 소리가….’ 그들은 모두 듣고 있다는 듯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장면은 이 시점으로부터 4년여 뒤에 일어날 파리코뮌을 예기하는 구원과 희망의 송가다. 오늘은 패했지만 내일은 승리하리라, 라고 그들은 노래하는 것 같다.
그리고 2016년 오늘, 대한민국의 광화문광장에서는 영화 〈레 미제라블〉의 흥행처럼 전연 예상치 못했던 영화속 혁명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가 울려퍼지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래, 국민은 증발된 자존감에 분노하고 허탈해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속을 살고 있다. 이러한 분노와 배신, 혼돈의 극에서 빅토르 위고의 사상과 문학, 〈레 미제라블〉을 다시 접하면서 실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빈자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자비심은 그의 시 도처에서 보인다. 시집 『빛과 그림자』 서문에서 시인은 “무릇 참다운 시인은 자기 자신의 기질이나 영원한 진리에서 오는 사상과는 별도로 그 당대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듯이, 당시 시인들의 사명은 인류에 봉사하고, 밝히고, 지도함에 있었다. 위고는 영원한 진리의 먼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보다 한 걸음만 앞서서 자비심의 횃불을 듣고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는 지도자였다. 그의 문예는 그러한 지도성에 일관되어 있고, 거기에 그의 예술이 있다. 그런데 자신을 문인이자 수필가라고 밝히는 현직 대통령의 언행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궁핍하지만 작가의 책무로써 자신의 삶을 바쳐 진실과 사랑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는 문인과, 지난한 삶을 살면서도 침묵하며 꿋꿋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국민들의 가슴에 허망함으로 깊은 상처를 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대통령의 언행에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