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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선암 지역 장보고 전설의 존재양상과 역사적 변동단계에 관한 연구
궁복으로 태어난 해상왕 장보고...그 이름에서 본 생애와 성과
영암 선암, 당나라 서주, 완도 청해진의 발자취를 찾아서
장보고 전남 영암 선암출신
국두암서 당나라로 건너 감
당나라 서주에서 군사 활동
완도 청해진 방어진지 구축
해상국제무역으로 국위선양
궁복, 힘을 초월한 귀한 존재 어진 복덩이
궁파, 어짊이 있는 힘을 초월한 귀한 존재 성장과 성덕
장보고, 확장하고 지키는 군주가 되라는 뜻
張은 확장, 확대, 개척, 팽창, 성장, 발전, 융성, 증대, 상승, 호전
건덕암, 어진 황제 덕
국도암, 나라의 우두머리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건덕암(거북바위.칠성바위)’ 에서 7년간의 기도 끝에 얻은 귀한 자식, 〈금동이.금복이〉 라는 예명(藝名).애칭(愛稱)으로 대했던, 그 금복(金福)이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로 불러지게 되고, 다시 ‘장보고(張保皐)’ 라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여 ‘확장하고=張, 지키는-保’ 일을 하겠노라고 ‘소리 냈던-皐.’ 이름에 빛나리라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장보고의 삶은 권력(權力)이나 부(副)를 얻어서 번성한 ‘영요영화(榮耀榮華)’ 였다. 그 ‘영(榮)’ 은 꽃가루가 날리는 영광(榮光),명예(名譽).영예(榮譽).영달(榮達)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화려한 인생과 영화로운 삶을 누렸다. 그는 화사한 꽃으로 변신해 계절마다 아름다움을 선사(물품 수출입 및 판매)한다. 그러면서 사람과 새.벌.나비 등(고객)을 불러들인다. 신라와 백성을 늘 편안하게 해주겠다며, 그는 때가 되면 꽃피어 세상을 호화로운, 눈부신, 찬란한, 멋진, 훌륭한 Gorgeous-화사(華奢)하게 만든다. 그리고 ‘요(曜)’ 는 꿩의 화려한 깃털처럼 햇빛이 빛남을 말한다. 이런 화려한 빛남이 늘 햇빛처럼...
우리에게 비춰주고 있다.
그는 또 생활이나 일의 진행이 갖가지 시련(試鍊)과 곡절(曲折)이 많고 변화가 심한 ‘파란만장(波瀾萬丈)’ 했다. 그 ‘파(波)’ 는 ‘바다인생 장보고’ 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물결을 일으키고 치는 물살을 갈랐고, 그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의 ‘란(瀾)’ 으로서, 란은 ‘맥놀이-W1(x)+W2(x)=[2Asin(2ω1+ω2t)]cos(2∣ω1−ω2∣t)’ 처럼 서로 다른 파동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하모니를 이룬다. 두 개의 소리가 하나의 울림으로 퍼져가는, 청각을 넘어서 맥놀이 현상의 또 다른 확장의 빛의 파문(波紋)을 일으킨다. 빛과 파문은 환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광휘(光輝)의 복판(腹板-신라 중심부)으로 등장한다. 황금빛 신라가 그려 놓은 금복(金福-장보고), 그 관능(官能-청해진 정책)의 물결이 점차 여백(바다)을 장악(掌握-해상 재패 및 확장)하며 퍼져나간다. 새로운 황금기(黃金期-해상무역 전성기)가 시작된다. 장보고의 걸작(傑作-무역.개척)이 빛으로 환생(幻生-혁신, 개척)해 암흑을 환희(歡喜-발전.번영)로 바꾼다. 해상무역으로 물결을 이룬 장보고는 물결과 함께 바다 전체를 에워싸는 전매특허 기술력에 기반 한, 완도(청해진) 빛의 바다에서 빛나는 순간의 골드로 빛나는 작품을 ‘해상무역(海上貿易)’ 이라는 진출무대와 함께 몰입형으로 전시 기획.제작, 감독과 관리 역할로 총괄하는 프로듀서로서 ‘펀드 레이징, 주요스텝 고용, 배급자, 공급자, 소비자섭외 담당’ 등으로 프로젝트명의 장보고 연출 作〈골드 인 모션-Gold in Morion〉 리뷰를 개막(開幕-장을 여는 무대)해...
그 위용(威容-해상왕)을 이어간다.
또 그 일렁이는 파문(波紋-어떤 일의 영향)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光-세상을 비춤), 그 둘이 만나서 금빛물결의 윤슬(생명, 행복, 풍요, 사랑, 성공, 부, 자손의 번영, 우아함, 찬란함 등) 이 된다. 이 물결은 ‘번영의 시작, 새로운 희망(希望)의 물결-바다로 전하는 희망의 푸른 물결’ 로서...
바다를 춤추게 한다.
장보고는 『포기하지 마라. 결코 좌절하지 마라. 용기를 잃지 마라. 우리 안에는 강한 생명이 숨 쉬고 있으니, 다시 흐르는 희망의 물결 따라, 더 단단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내일을 항해 나아가라. 힘을 내라. 신라를 위대하게』 하며, 이처럼 ‘해상무역 물결’ 이라는 표면상의 이유로 그의 이름 장보고, 장(張)으로 확장하고, 보(保)로 질서와 안정을 위해 지키겠노라 고(皐)로 외쳤던, 그는 이젠 밤하늘 ‘궁수(弓手)자리’ 에서 나타나...
세상을 밝게 비춘다.
군복(軍服)에 단 별(星)이 아닌, 밤하늘에 수놓은 새로운 희망의 스타워즈-Star Wars가 되어버린 장보고, ‘저 벌은 나의 별’ 하며 가슴속에 남아있는 ‘궁복,궁파, 장보고’ 를 떠올리리라 본다. 스타워즈엔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았고, 우리는 자신이 있다. 위대한 민족자(民族者), 진정한 애국자(愛國者) 장보고에 향한 마음은 영원하며, 그가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를 써 나가는 것에 대한 부담 없는 사랑이다. 나의 영원한 파트너 장보고, 그는 세상의 지평(地平)을 넓히고, 신라와 영원한 파트너로서 함께 가려고 장보고를 비롯해 팀원들이 정말 의욕(意慾)이 넘쳤고, 어떤 것이든 ‘도전(挑戰)하고자 하는 의지(意志)’ 을 가지고 있었던 장보고에 대한 사랑과 시선...
부담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다.
영원한 해상지배자로 남은 장보고, 하지만 그는 바다 사나이로서 해상무역의 해상왕(海上王) 했지만, 중앙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종로가 조선(朝鮮) 한양의 중심이라고 본다. 그곳에서 울려 퍼졌기 때문이란다. 1392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우고 도성 중앙 복판에 누각(樓閣)을 짓고 종(鐘)을 달았다. 조선 최초의 종각(鐘閣)이었다.
그는 왜?
전근대 시기 지배자(支配者)가 된다는 건, ‘Time Control-시간을 통제’ 한다는 의미였는데, 종은 시간 통제의 대표적인 수단과 방법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종로대로에 거대한 종을 만들어 종으로서 자신이 한반도의 지배자임을 널리 알리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통치(統治)를 했다. 이렇듯 장보고도 신라 중심인 경주에다 종각을 세웠으면, 태조 이성계 못 지 않은 훌륭한 지배자로 성장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심리를 가져본다. 사실성(事實性)과 초월성(超越性).종교성(宗敎性)이 조화를 이루는 고전미(古典美)의 전형의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Echoes of life the enduring tradition of Unified Silla sculpture〉 특별전을 여는 여러 가지의 물품을 모아 선보인 전시(展示) 흐름과 통일신라인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번영의, 영화로움의 종을 치는 신라의 노래, 〈신라여 영원하리〉의 소리를 들려주는 ‘희망종지기’ 가 되지 못했던...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암 선암→당나라 서주→완도 청해진
여기에서 그의 흔적과 족적, 특히 청해진을 통해 남겨진 그의 업적, 중국.일본 등과 함께 왕래하고 교류하며 남긴 훌륭한 통일신라 조각(彫刻) 형성과 발전 과정, 그 특성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장(場)이 들어서야 한다. 완도에만 장이 들어설 것이 아니라, 영암에서 중국 서주와 일본, 동남아 지역 등에도 함께 장보고의 역사관을 ‘전환기 변화의 모색, 전통 방식의 계승, 사실적인 조형미의 등장’...
새로운 지평을 열다
주제로 생명의 호흡, 신라 장보고의 군사.경제.문화.예술혼의 절정, 청해진, 깨달음의 지혜, 해상무역의 개척, 다양한 해양의 세계, 장보고가 사랑했던 통일신라 문화의 국제적 성격과 신라적 전개를...
국민 사랑 속, 지속되게 해야 한다.
장보고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지만, 장보고가 치는 종소리를 듣고 싶다. 예스럽고, 우아한 해의 찌든 때(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군림)를 씻고 싶어서다 넘실거린 기쁨도, 침잠(沈潛)했던 우울감도, 청아(淸雅)한 종소리로 모두 희미해지러니 하고 만다. 끝을 알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으로 안내하는...
기묘(奇妙)함이 종소리에 녹아서다.
종은 언제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예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도 그러한다. 종소리의 신성(神聖)함이 인류 보편에 와서 닿기 때문일 것이다. 종의 거리, 종로(鐘路)를 거닐며 든 생각이다. 경주(慶州)의 거리, 신라(新羅)거리를 거닐면 좋으련만...
옛날의 이 길은 노래가 떠오른다.
장보고는 권력(權力)도 부(副)도 쥐었지만, 최고 목표 앞에 그만 어떤 계획이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좌절(挫折)하고 말았다. 조정에 시킨 자객 염장한테 처참(處斬)히 당해서다. ‘태이불교(泰而不驕)’ ,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군자(君子)의 태도를 갖춘 장보고, 그는 잘난 척하고 뽐내며 건방진 교만(驕慢)하지 않았다. 권력 있는 지위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문전작라(門前雀羅)’ , 문 앞에 참새 그물을 친다는 뜻인데, 권력이나 재물을 잃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는...
권력과 부를 얻고자 노력했다.
장보고는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의 ‘권문세가(權門勢家)’ 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평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녔다. 자신에게 위축(萎縮)을 불러준 단어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처럼 ‘취렴지신(聚斂持身)’ , 거두어드리는 신하라는 뜻으로, 지위를 이용하고 윗사람의 권력을 빌어,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고, 세금이나 뇌물을 굵어드리는 일은 하질 않았다. ‘구밀복검(口蜜腹劍)’ , 입에는 꿀이 있고 손에는 칼이 있다는 뜻처럼 말로는 친한 척하나 속으로는 헤칠 생각을 가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은 장보고였다. 그럼에도 왕실,왕가의 계통을 가진 왕계(王系)나 가문이 좋거나 신분 따위가 높아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가진 계층의 귀족(貴族)들은 장보고를 의심했으니, 그의 심정은...
천추(千秋)의 한으로 남는다.
장보고는 절대 믿음과 의를 저버리고 돌아서는 배반(背叛)하지를 않았다. 신뢰를 잃지 않았다. 의리(義理)의 사나이, 믿음이 가는 사람, 용기(勇氣) 있는 자로서의 행동을 똑바로 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했다.
그는 ‘영요영화(榮耀榮華)’ , 권력이나 부를 얻어서 번성했지만, 사치하거나 호화롭게 살지는 안았다. 그들처럼 권력위에 군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평민에서 상류사회 진출에 큰 목적을 두었다고 보다는, 신라 수직사회 상하층 분리의 차별화 된 제도, 이 신분제도를 개선하고 싶었던 마음은 가졌다. 그래서 그는 당나라를 가서 군 생활을 했던 것이고, 자신의 뜻대로 이루게 돼서, 이를 통한 신라에서 무령군 소장이라는 높은 지위(地位)를 맡아 나라에 기여를 해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약한 자의 외로운 외침이라고 할까? 평민출신의 태어난 장보고의 외침은 ‘개척정신(開拓精神)’ 으로 확장한다는 ‘장(張)’ 과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고 안정을 기하면서 발전을 도모한다는 ‘보(保)’ 와 이런 일을 부른다는 ‘고(皐)’ 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꿈을 키웠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면서 신라의 신분제 사회에서 평민(平民, 일반 양인)이 상류(上流, 왕족.귀족), 중류(種類, 하급 관리.군인)로 상승하는 경로로 삼았다. 과거제(科擧制), 향리(鄕吏)의 관직 승진 같은 제도를 밝으려 했다. 군사.무역.외교.문화 등을 담당하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를 통해 평민(平民)에서 상류사회(上流社會)로 가는 진출 무대로 삼았다. 관직(官職)을 통해 신분이 바뀌고, 이후 혼인(婚姻).가문(家門)을 통해 상류세력으로 확장(擴張)되는...
가문화(家門化)도 중요한 이동 경로로 본 장보고였다.
권력자나 지배 계급이 반정부(反政府) 세력이나 혁명 운동에 대하여 행하는, 무력(武力)이나 권력(權力)으로 따위로 억눌려 꼼짝 못하게 하는 탄압(彈壓)의 ‘백색공포(白色恐怖)’ 는 장보가 아닌...
왕계(王係)와 귀족(貴族)들이 아닐까요?
염장을 시켜 그 자격(刺擊)에 의해 한날의 꿈을 꾼 장보고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신라의 신의(信義)를 저버린 배신자(背信者)요. 역사에 가치가 없는...
역적(逆賊)의 죄인(罪人)이다.
장보고라는 그 이름은 성스럽다. 위대하다. 애국심이 깃든...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장(張)으로 보(保)를 위하려 했던, 그러기 위해 소리(皐) 울부졌던 대한민국 진정한 인물...
장보고였다.
그는 나의 바다가 세상 사람들의 바다.
그 해상에서 펼쳐진 나의 무역이 세상 사람들의 무역이다.
~라고 장보고가 내세운 경제(經濟)와 안보(安保) 정책에 대해서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신라를 강하고 풍요롭게’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추진했다. 신라 성장과 인프라 투자에 재정을 투입하는 책임 있는 적극 재정, 방위력과 식량.문물.자원 안보 등을 강화하는 ‘강한 신라’ 정책이다.
장보고는 ‘매칭(Matching). 동조(同調), 병합(倂合)’ 을 통해 진행했다. 이 단어들은 각기 다른 상황과 맥락에서 우리의 의시소통을 풍부하게 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사회적 상호작용, 기술적 연결, 그리고 조직적 통합과 같은 다양한 개념을 포괄하는 일로써, 장보고는 두 가지 이상의 요소로 서로 일치하게 하거나,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는 무역에 있어서 ‘정보검색, 개인화 서비스, 효율적인 데이터 관리’ 로 해상무역을 원활하고 활발하게 했다.
동조(同調)는 상태를 같이 한다는 뜻을 가지며,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됐다. 문화적으로 동조는 집단의 통합과 조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병합(倂合)은 두 가지 이상의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장보고는 해양무역의 재편성 등을 한 것인데, 이는 ‘경제적 효율성, 정치적 안정성, 기술적 발전’ 을 기하는 등 새로운 기능과 서비스를 창출했다. 장보고는 병합으로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 를 가져오는 중요한 과정임을 보여줬다.
두 가지 이상의 요소 중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 남의 주장에 자기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추는 것, 둘 이상의 기구나 단체, 나라 등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장보고는 ‘매칭.동조.병합’ 정책으로 해상무역을 추진했다.
이런 정책적 사고는 자신의 이름 궁복.궁파와 〈장보고〉 에서 비롯되었다. 어진사람이 되겠다고 지어준 ‘궁복(弓福)’ , 청해진을 통해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질서를 회복하면서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개진하여 나라 부강을 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담은 ‘장보고(張保皐)’ 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과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는 주어진 임무를 스스로의 신분.명예로 책임지며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장보고, 그 이름은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권한.능력을 발휘하되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이다. 또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능력.태도로 소임을 미리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방책을 정비하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생명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청해진의 또 다른 이름
장보고의 꿈과 포부, 그리고 나라 사랑으로 설치된 완도 앞바다에 세워진 청해진(淸海鎭), 푸른 바다에 진영을 친다는 이 의미심장한 수식어에 또 다른 수식어들로 표현되고 있다.
정해진, 강해진, 구해진, 성해진, 흥해진, 더해진, 원해진, 전해진 등이 청해진의 ~해진 앞에 다른 의미의 단어로 청해진의 의미와 역할, 활동과 결과 등을 설명한다.
정해진은 장보고가 신라라는 나라를 안전하고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정신으로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기로 왕의 결재를 받아 정했다. 정한 일에는 이것뿐만 아니라 국제자유무역이라는 해상.중계무역과 해양로를 확실히 명시하며, 그 기준과 법에 따라 이용.추진하게 했다.
강해진은 해상질서와 국제무역의 고통 받는 사람, 그 고통을 뚫고 나가는 힘이 있는 사람, 그래서 더 강해진 사람 장보고와 신라를 만들었다.
✱구분 : 디즈니+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신라
✱공개일 : 840~년도
✱작품편수 : 총 10부작
✱극본 : 장보고
✱연출 : 장보고
✱출연 : 신라인, 당나라인, 일본인, 동남아인
이 리뷰에 스포일러가 있는데, 비주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보고가 출연한다는 것 자체로만으로도 이 작품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그리고 여태껏 장보고와 부하들이 같이 출연한 작품이 많았음에도 기록에는 그리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아했다. 상상만 해도 잘 어울려 보일 것 같은 조합을 아직 한 번도 안 써먹었다. 더군다나 1.2회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극본을 집필한 이가 장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은 회 차가 더더욱 기대가 되었는데, 장보고가 여러 직품의 각본을 함께 썼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세 번째 청해진 집필적인 작은 인물등장에서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게 하던 초반의 엄청난 흡입력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 영암 선암에서 태어난 장보고, 그의 나이 17세에 큰 포부를 갖고 배를 타고 당나라 서주에 있는 당나라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하여 군 소장(少將)으로 있다가 다시 신라에 들어와 당나라 해적들에 대한 진실을 쫓으면서, 그들을 지키려는 당나라 군사들과 함께 신라에서 전쟁(戰爭)을 일으키려는 배후 세력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라가 된다는 첩보물(諜報物)이자, 정치몰(政治沒)이자 휴먼드라마다. 이 작품의 제작비가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조정과 장보고는 분명히 밝혔지만, 어쨌든 대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화려한 출연진(장보고 등)과 제작진(신라 조정)을 바탕으로 해적 침입, 국가 혼란 문제 등으로 신라에서 대 혼란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같은 설정이 내용 자체가 큰 스케일의 작품임을 깨닫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보다 만족의 비율이 더 컸다. 신라의 현실을 반영한 방대한 서사(敍事)도 좋았고, 정치인과 지도자의 자질, 무기 로비스트의 세계, 해상무역의 세계,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외교의 중요성, 음모 사건 조작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아픈 역사 등을 다룬 내용도 좋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만, 90%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고 본다. 단지 장보고의 세력에 견제하려는 귀족들이 있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고, 기득권, 진영의 정치에 어려움이 따랐다는 것이 역사에 뼈아픈 좌절(挫折)과 크나큰 아픔으로 남는다.
어떻게 보면 장보고라는 한 인물은 중차대한 세계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활동했다고 본다. 그는 청해진을 통해 연출이 규모에 있어서도, 완성도에 있어서도 압도했다고 평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평민 출신이 무령군 소장이 되고, 그는 청해진대사로 오른 건데, 실제 신라의 정치가 더 이상은 차선(次善)이 아닌 최선만을 고를 수 있는 상태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고, 마지막 회에서 “장보고가 한 그런 훌륭한 인물이었으면 좋겠어” , ‘많이 고통 받는 사람, 그 고통을 뚫고 나가는 힘이 있는 사람, 그래서 더 강해진 사람’ 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왕은 그런 인물을 청해진대사로 임명했지 않는가 한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국민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국민을 존중하며, 적극적인 소통 행보와 외교 무대에서의 당당하고 영리한 처신 등 지금까지의 발자취가 뿌듯할 따름이고, 끝까지 벅수 받는 장보고로 남기를 바랄뿐이다.
구해진은 찾아 얻는, 바라는,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기도로 부르짖으며, 필요한 것을 찾아준 장보고가 구하는 모든 것들이 신라 백성들에게, 당나라나 일본, 동남아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게 해주었다.
성해진은 장보가 추진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그만큼 신라는 경제적으로 탄탄해졌다. 신라는 성하게 일어났고, 기운(氣運).세력(勢力)의 증가를 불러들었다.
흥해진은 ‘이웃이 흥해야 내가 흥해집니다 라는 When my neighbors thrive, I thrive.’ 장보고가 흥해주셔서 우리가 흥해졌다. ‘흥해라 신라!’ 장보고의 외침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더해진은 리듬과 비트가 더해진 색다른 일상, 해상무역이 불러온 춤(파도) 열풍이다. 바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아울러 춤추는 바다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이게 다 신라, 중국, 일본, 동남아를 매료한 재능 넘치는 춤꾼(장보고 등)들 때문, 아니 덕분이다. 숨 막히고 답답한 기나긴 왕족들의 득세와 혼란의 야기로 인한 일상에 리듬과 무역을 더해준 〈장보고 파이터〉 열풍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흥분한다.
원해진은 행복을 원합니다. 물건을 원합니다. 평화를 원합니다. 안녕을 원합니다. 질서를 원합니다. 편안한 삶과 여유를 원합니다, 재물을 원합니다, 돈을 원해요 라는 무엇을 바라고자 하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해줬던 장보고였다.
전해진은 소식 등을 상대에게 알려준, 어떤 것을 상대에게 옮기어준, 남기며 물려준, 어떤 사실을 상대에게 알리는 일로써 특히 후대나 당대에 이어지거나 남겨지게 한 일이다.
이런 청해진으로 재물이 넉넉해진 ‘부유해진’ 신라가 됐고, 기운차게 일어나거나 세력이 대단히 커져서 널리 퍼지는 등 번영하는, 변화한.성대한.의기양양 하는 교역.문화.불교.사업 등이 융성한, 사람.문명.사업.국가 등 어떤 대상이 번성하고 발전해 활력을 얻는, 경제.문명, 도시.지역, 사업, 역사 등이 ‘융성해진’ 나라가 됐고, 장보고는 과거 역사에서 흥성(興盛)했던 시대를 다시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신라를 다시 흥(興)하게 한 ‘부흥해진’ 신라로 만들었고, 재물이면 재물, 문화면 문화 등으로 강대국가로 부상하게 만든 ‘부강해진’ 신라가 됐다.
가축들이 뛰고 날뛰는 모습을 보아하니 집안에 가족들이 번성함으로써 농민들이 흥해지고 있다는 여라독특(驪騾犢特) 해약초양(駭躍超驤)의 말처럼 장보고는 바다에서 날뛰었다. 뛰는 만큼 ‘번성해진’ 신라였다.
장보고는 ‘확장해진’ 의 영토 확장, 해양확장, 문화학장, 무역확장(확장)을 추진했다.
영토 확장(領土 擴張)은 신라 영토 확장 청해진이 제시한 로드맴을 통해 비전 및 전략적 임무를 토대로 현장 수요기반의 과학.기술.문화.경제 임무를 상호 연계하여 구체화한 것으로, ‘신라천년 번영신라’ 라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통일신라 영토 확장 로드맴의 비전은 인류 지식 확장과 신라를 세계로 세계가 신라로 라는 슬로건 아래 신라 정치.경제.문화 등으로 영토의 확장이다. 장보고는 신라의 미래에 관한 근본적 질문에 답하고, 과학적.기술적.문화적.경제적 통찰과 지식 확장을 이루기 위해 지구의 기원과 진화 탐구 및 과학.기술.문화 발전 혁신을 핵심 목표로 설정하였다. 또한 신라경제 영토 확장을 위하여 지속적인 탐사와 거주를 지원하기 위한 신라자원 활용, 해외거점 확보 및 안주, 그리고 신라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신산업 창출을 핵심 목표로 제시했다.
해양확장(海洋擴張)은 해영정보의 업무.기술.관리 범위가 확대되는 것을 말한 것으로써, 해양 분야에 확장현실 기반 교육과 스마트 항만 자동화 같은 첨단 기술 적용해 신라, S-차세대 첨단추진 선박 글로벌혁신특구로 지정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장보고는 S-차세대 첨단추진 선박 글로벌혁신특구 중대형 선박 신조(新造) 중심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노후 관공선 어선을 첨단추진 방식으로 개조하고 실증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토대로 제도 개선과 실증 기반을 구축해 차세대 해양기술 산업을 선도하는 핵심 거점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장보고는 신라 항만과 산업단지, 연구기관이 집적된 해양.산업 거점신라로, 첨단추진 선박 실증과 사업화까지 연계할 수 있는 치적의 여건을 갖췄다. 글로벌혁신특구 지정을 계기로 첨단추진 선박 산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기술 실증을 넘어 지역 산업 구조적 전환과 기업 투자 확산으로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성장 모델을 만들어갔다. 장보고는 해상에 벌어진 해적 소탕에만 집중하지 않고 해양의 영토를 확보하고, 무역이 원활하게 해주였고, 독점하다시피 했다.
문화확장(文化擴張)은 요즘 같은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을 의미한다. S-콘텐츠로 삶의 방식, 정서, 정체성으로 확장하거나, 기술.제도.교육.지역 예술 생태계로 문화 접근성과 생산.제작 환경을 넓혔다. 장보고는 신류(新流) S-문화의 확장 방향, 기술.제도로 확장, 지역.교육.공공 제도로 문화 접근성 확장을 추진했다.
‘신라문화, 문화 다음은 수련문화? 세계가 주목하는 S-문화 확장 이유’ 라는 제목으로 신라의 문화가 전 세계에서 사랑받으며, 신라가 오랜 시간 큰 호흡을 만들어왔다. 대중문화의 인기뿐만 아니라, 신라가 가진 깊은 내면적 문화와 수행 전통까지 주목받는 변화를 나타내게 해주었다.
세계가 신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단순한 여행과 콘텐츠 소비를 넘어, 삶의 균형과 정신적 안정을 찾는 방식으로 확장되게 했다. 신라를 여행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후 신라앓이를 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게 했다. S-수련문화, 새로운 신류로 나아가다. 신라에 여행 온 사람들이 왜 자기 나라에 가서 신라를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신라문화에 녹아 있는 근원에 대한 이끌림과 하늘을 향한 그리움이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지 않을까 한다. 신라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다름을 연결하고 조화시키는 감수성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방식, 공존을 강조하는 정서, 감정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표현방식 등이 세계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만들고 있게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라 콘텐츠뿐 아니라, 삶을 다루는 문화, 마음을 다스리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커지게 했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어도 신라의 혼, 신라적 감성과 정체성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이러한 특징이 찬란한 신라문화를 낳았고 번영하게 했다.
무역확장(貿易擴張)은 국가 간 물품.서비스.자본 등 교류를 늘려 경제성장.고용.공급망 안정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시장 다변화와 고부가치화로 대응하며 경재성장 촉진, 고용확대, 공급체인 다양화, 시장 다변화, 수풀 품목 시장 다변화, 무역금융.지원 강화, 국제무역 역할, 신라.당.일본.동남아 협력 확대 등으로 ‘무역확대가 신라 생존전략이다’ 기치를 내 걸고 무역확장(확대)으로 신라를 무역강대국(貿易强大國)으로 도약시켰다.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으로 교역을 확대했다.
서술한 것처럼 청해진은 단순한 해상에 둔, 국방.치안 담당, 조직.지휘 체계, 재정.시설 운영을 담당한 진영(鎭營)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자한다. 다목적성을 띤, 한 대상이 여러 용도나 가능을 동시에 갖추어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될 수 있게 한 청해진이었다. 다기능.다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저수지가 빗물.흐르는 물을 저장해 농업용수뿐 아니라 홍수조절, 식수, 공업용 등 여러 용도로 쓰일 수 있게 한 것처럼 한 가지 목적에만 두지 않고, ‘모든 일은 신라로 통한다’ 라는 ‘신라에서 세계로 세계는 신라로’ 신라확장정책(新羅擴張政策)을 통해 수량(數量)을 늘리거나 규모(規模) 세력이 커지거나 크게 발전하는 팽창(膨脹)을 위한 다방면에 손을 뻗쳤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을 이름을 빗대, 신라로 ‘장 보러가겠다 고’ 했다. 장은 ‘확장’ 이며, 보러간다는 것은 ‘국가 안보와 방위, 영토 보호와 보국, 국민 안정과 보장’ 이다. 확장과 보호를 위한 제왕으로서 신라를 더 ‘튼튼히 하겠는 펼치다’ 의 고를 외치며, 그는 당나라에서 10여년의 군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다시 들어와 진영(鎭營)을 쳐 해적 소탕으로 해양질서 회복, 해상로 개통 및 무역항 확보, 국제자유무역 강화 등을 하겠다는 장 보려가겠다 고한 것이다.
장보고가 장 보려 신라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추진한 뒤로, 신라는 국제적으로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찬란한 문화를 더 융성하게 꽃피울 수가 있었다. 장 보러 신라로 가겠다고 하는 그의 마음은 애국심(愛國心)이 아니면 무엇이겠든가? 장보고, 자신의 이름이 그 만큼 비밀이 담겨져 있고, 신비를 드러낼 정도로 위대함이며, 의미심장한 세 글자다. 실천가, 행동가, 전략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은 장보고였으며, 그는 어느 상류층 출신보다 평민 출신으로서의 위대한 장보고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그는 진정한 신라의 인물이자.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훌륭한 성웅(聖雄)이다.
장보고라는 이름 석 자에는 비밀의 열쇠는 장(張).보(保).고(皐)라는 한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알면 장보고의 인생관과 세계관, 미래관을 엿볼 수 있다. 장을 보러 가고, 어디로 가서, 어디에서 보는가를 우리는 여러 서술에서 알게 된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단순한 작명이 아니다.
장보고가 제일 좋아한 ‘장(張)’ , 장은 ‘확장(擴張)’ 이어서 사랑했다. 그는 또 좋아한 단어로 ‘보(保)’ 였다. ‘지킨다. 보호한다’ 라는 의미가 담겨 일 글자를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 그리고 부르다의 옛말인 ‘불리다’ 라는 ‘고(皐)’ 자를 마음에 두었다. 제왕이라는 뜻이 담긴 고여서, 그는 그런 고(해상왕)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장보고’ 를 자신의 브랜드네임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 그가 신라로 장 보러 가겠다고 말할 때, 당나라에서는 워낙 완강해 그를 말리지를 못했다. 그의 의지가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에 들어 와서도 그가 말해 됐던 ‘신라로 장 보러 가겠다고’ 한 약속을 왕에게 알현해, 그 뜻을 왕은 이해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이름값을 똑똑히 해 보거라.” “네 뜻대로 해준다면 신라는 위대해지고 평화로워지리라!” 하며 받아들었다. 신라를 위대하게 ‘확장+보호+해상국’ 의 장보고가 꿈꾸는 일에 신라는 위대해졌고 번영했다. 장보고 20년이 ‘신라 천년’ 을 만들었다 라고 한다.
●장보고 이름은 기업명이자 브랜드
장보고라는 이름 석 자에는 사상.철학.정신.비전.미래 등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있다. 해양 생태계 확장을 설계하기 위한, 해양질서 개편 및 해양 확보, 무역 확장, 영토 확장부터 신라가 나아갈 방향과 갖추어야할 자세, 그리고 제도적 문제 해결까지 총망라한 글로벌 네이밍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보고라는 이름은 항간에 나도는 것처럼 흔한 중국의 성씨 장씨(張氏)를 썼다니, 궁복의 복(福)을 보고로 했다는 등의 넌센스적인 풀이는 잘 못된 판단이다.
장보고의 장씨(張氏) 성은 참고를 했을 것 같기도 보이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장씨(張氏)의 성은 가문(家門)의 범위.규모.세력 등을 늘려서 넓혀 크게 하겠다는 마음에 확장(擴張), 즉 팽팽하게 오래도록 유지해 가겠다는 뜻에서 장(張)을 성으로 했다. 그런 의미가 담긴 장씨(張氏)이기에 궁복(弓福)은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는데 있어서 활 궁(弓)자가 들어간 장(張)을 선택했고, 여기에 나라를 지키겠다는 구국(救國)의 일념, 그리고 해양을 통해 제왕이 되겠다는 마음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장보고(張保皐)’ 라고 지었다.
장보고란 이름은 산둥반도에 신라인 촌락을 통괄하는 자치권을 갖는 ‘신라소(新羅所)’ 가 있었는데, 신라인 촌락 내 거주와 생활은 신라소의 압아(장)과 촌장의 권한 속하는 신라소의 신라인 촌락을 통할 때는 여행허가권을 현청(縣廳) 공첩(公貼, 공문서)과 교부해야 현(縣)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인보제(隣保制)’ 기반으로 한 보(保).촌보.판두 등 체계가 있었다. 인보제의 ‘보(保)’ 를 참고하여 장보고로 하였다.
인보제, 일정 호수를 단위로 인근 가구를 묶어 범죄.유리방지.치안 등 목적의 상호연대 책임을 부과한 제도로서의 호구조사와 출입 통제, 유리자(遊離者) 발생 시 관청(官廳)에 보고하는 가능을 수행한 것으로 인접한 가구를 묶어 10가구(호) 단위로 조직하고, 정장(呈狀)을 중심으로 인구를 기록하며 신라인의 출입을 파악하고 재난 시 구호(救護)를 돕는 역할을 했다. 신라소 차원의 안보조직으로 인보제의 가능이 반영된 제도다.
인보제는 원활한 신라방의 향촌 지배를 위해서는 지역의 근접, 생활형태 등의 근사성에 기반을 한 내적 단결의 기조가 산라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야한 했던 것.
이에 따라 신라소는 직위적으로 편제시킨 인보제에 통(統) 조직을 결합시켜 신라인에 대한 통제를 원활하게 하며, 상호연대에 의한 협조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특히 신라소 통제는 향촌자치(鄕村自治) 차원에서 실시한 전형적인 안보(安保) 조직이었다. 인보제는 신라인의 안전과 피의자의 방지(防止)와 절도 행위를 단속(團束)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인보제란 안보조직(安保組織)의 기능을 극대화 시켰다. 당나라시기 산둥반도의 신라소에 행하는 인보제는 BC 359년 중국 진(秦)나라 효공 때 상앙(商鞅)이 시행한 십오제(什伍制)에 그 원형이 있다.
인보제는 모든 신라인을 호패(號牌)에 등록시켜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하고, 거주자의 이동시 통리(統理)를 거쳐 관(官)의 허가를 받으며, 내력불명자(來歷不明者)를 고발하되 이를 태만하게 시행한 통리는 연좌제(緣坐制)을 받도록 했다. 불효.부재.반란.살인.폐속.도적.강도.절도.부도 등에 대한 고발을 의무사항으로 부과했다.
이런 인보제의 보(保)의 의미를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는데 참고하여, 자신의 생각했던 일이 지키고 돕는 ‘보(保)’ 여서, 보(保)자를 이름으로 차용(借用)했다.
이 고찰에서 장보고 이름에 대한 반복적 글을 다루고 있지만, 아직까지 장보고의 이름에 대한, 장보고의 마음에 대한 정확한 기술은 찾아볼 수 없어서다. 장보고에 대한 글을 다루려면, 제일 먼저 본명인 ‘궁복(弓福)’ , 예명인 ‘장보고(張保皐)’ 라는 이름부터 알고,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을 논해야 된다고 본다. 청해진, 해상무역, 신라 등 'Why! What!' 설치된 이유, 추진한 사업, 나라에 끼치는 영향은 장보고의 이름에서 답이 나오고, 그 길이 보인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나라, 일본, 동남아 등으로 지평을 넓히면서 시장 전망과 공급 전략, 양 사 간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대해 공유했다. 해양 질서, 상업 무역에 관련 협력과 첨단산업 강화, 신라문화 플렛폼에 공급하는 방안 등의 공급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급해온 핵심 파트너로 동반성장을 기했다. 시장개척 및 확보에 어려운 만큼. 장기 수급 안정화가 중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제품 공급과 투자 협력 방안 등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이런 행보는 자신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장보고라는 이름이 ‘기업명’ 이요, ‘브랜드’ 였다.
신라쳔년은 신라가 약 1천 년간 존속한 ‘쳔년왕국’ 이라는 별명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신라는 기원전 57년 6월 8일~서기 936년 1월 13일, 약 1천 년간 군주 56명을 거치며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존속한 나라로 〈천년왕국〉 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58세 일기로 사망한 장보고는 23년간 당나라의 생활을 접고 귀국해 18년간 청해진에 크게 활약하며, 신라 발전에 이바지했다. 신라의 수도는 금성(경주)으로, 천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 불리며, 신라의 도읍지이다. 신라가 그만한 유지할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영향도 없지나 않다. 그는 청해진을 통해 나라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신라의 위상을 드높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국가유산을 보관하는 ‘신라천년보고’ 가 있는데, 9세기 때 활동한 장보고에 관한 것들도 보존, 세계를 빛낸 신라의 인물로서 해상왕 장보고란 인물에 길이 전해지리라 본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로 확실하게 말한다. “우리 청해진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오직 국가와 국민의 안녕, 번영을 위해 헌신했고, 또 그러할 것” 이라며 “오직 국민의 심기(心氣)를 보좌하며, 청해진대사로서 나라 사랑의 길, 번영의 신라 길을 걸어갈 것” 이라고 했다.
●예고된 장보고 세상 출현
산위에 제왕지지(帝王之地) 명당(帝王之地 明堂)이 있다고 알려진 구정봉(큰바위얼굴)의 영암 월출산(月出山). 월출산의 바위 정기는 서남쪽으로 그 맥(脈)이 흘러내려와 주지봉(朱芝峰)에 맺혔는데, 월출산 정기는 주지봉의 문필봉(文筆峰)에 와서 결실을 이룬, 문필(文筆) 하니 결실을 맺는 ‘문필유결실지의(文筆有結實之意)’ 이다. 월출산의 좋은 명당으로 보아 벼슬을 할 인물이 출연할 것이다 라는, 좋은 기운이 솟아오르니 몸은 귀하게 되고 명성은 빛날 것이다. 해와 달이 언제나 밝고, 기운이 서져있어 주지봉 아래에 있는 구림마을에서 백제 왕인박사, 신라 말 도선국사, 고려 초 최지몽 태사가 태어나고 배출되었다.
기운이 서린 월출산은 문필봉에 이르러
아름답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구나
어려운 시기에 기쁘게 상서로움 만나네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나오니 경치가 새롭도다
숲이 우거진 곳에 인간은 따스한 기운을 만나
고을의 운기는 반드시 명성을 얻을 운기로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출세를 할 운수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운이 서린 곳은 ‘선암마을’ 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배출된 큰 인물은 통일신라 때 청해진대사로 큰 활약했던 바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다.
구림마을에서는 동쪽으로 월출산 주지봉이 보인다. 국암서원과 죽림정을 비롯한 마을의 주요 건물들은 남향이 아니라, 동쪽의 문필봉을 바라보기 위해 동향으로 지어졌다. 구림은 둥그렇게 소쿠리처럼 능으로 둘러싸여 바위산의 암기를 순화시킨다. 천황봉의 줄기가 바위산의 노기를 풀고, 문산재에서 순환해 언덕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동쪽의 사자봉(영암 용흥리)도 선암마을에서 바라다보면 대단한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다. 천황봉에서 찬황사 쪽 능선에는 뾰족이 솟은 ‘4개의 문필(文筆)’ 이 포진하고 있다. 운암리 선암마을 앞의 100만평의 넓은 들판은 ‘궁복뜰’ 이라고 부른다. 장보고 어머니가 기도했던 임금바위인 ‘건덕(乾德)바위’ 가 동네 뒤쪽에 있고, 동네 옆의 동백정은 장보고가 군사훈련을 했던 터였다고 전해진다. 동네 앞에 마당 바위처럼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나라의 우두머리의 ‘국두암(國頭岩)’ 이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옛날에 배가 들어오면 배의 밧줄을 매어 놓던 바위였다. 예전에는 운암리 송석정마을 앞까지 바다였다.
국두(國頭)는 ‘국가의 두령(頭領)’ 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우두머리’ 를 말한다. 국두는 ‘장보고(張保皐)’ 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는 9세기 한(신라).중(당).일(일본-야마토) 3국 바다를 지배했던 해상왕 장보고를 이 동네 사람들은 나라의 우두머리의 ‘국두’ 로 여겼다.
월출산은 고대부터 전라도 해상물류 세력의 이정표였다. 해안가 평지에서 솟아 오른 809m의 바위산은 먼 바다에서도 육안으로 보였다. 특히 영산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나주 쪽을 들락거릴 때 월출산 뒤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은 밤의 뱃길을 환히 비춰주는 등대(燈臺)의 역할을 하였다. 월출산 이름은 해상 세력이 배를 타고 가다가 붙인 명칭이었다. 이런 곳에서 국두(國頭, 나라의 우두머리)라는 ‘장보고’ 가 태어났다. 그는 활을 잘 쏘는 복덩이의 ‘궁복(弓福)으로 이미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시(豫示)를 했다.
선암마을에는 마을 형국이 배 모양과 같다하여 ‘선암(船岩)’ 이라고 하고, 건덕바위와 국두암과 같은 신령스런 바위가 있다하여 ‘선암(仙岩)’ 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왔다.
이런 전승(傳承)은 바로 건덕암에서 장보고 모친이 그 바위에서 7년간 기도를 하며 장보고를 낳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고, 국두암은 장보가 당나라에 건너갈 때 배를 탔다는 설화(說話)가 전해진다. 건덕암과 국두암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들 낳아달라고 기도함과 배를 타고 간 항구와 관련돼 있어서다.
장보고의 세계관(世界觀)이 완도 청해진에 있었다면, 인생관(人生觀)은 ‘영암 선암마을’ 에 있다. 인생의 목적.의의.가치 및 그 의미를 이해.해석.평가하는 전체적인 사고방법의 인생에 대한 관념 또는 사상적 태도가 장보가 태어난 선암마을에서 시작, 인생관을 바로 세우는 등의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명확히 정립하고, 그 방향에 따라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태도를 갖춘 채 꿈을 향해 진출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장차 무엇이 되어야 하며, 기여해야 되는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갔다. 가슴 뛰는 인생관으로 그는 선암을 떠나 당나라에서 세계관을 꿈꾸며 실현했다. 이상적 세계를 상상하고, 그 비전을 현실로 구현해냈다. 당나라에서 세계관에 눈을 떠, 그는 다시 신라에서 청해진을 통해 평화, 내적 혁명 등 인류가 바라는 이상적 상태를 세계관과 미래관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내적 변화의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번영신라를 꿈꾸며〉 유기적인 세계관이나 모자이크 민주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회구조 제안도, 다양한 가치와 주체가 조화를 이루며 실현하는 과정의 정치.사회.문화적 세계관과 미래관에 심취하며, 그가 꿈꾸는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갔다.
바다를 제패한 해상왕, 장보고 이야기
청해진을 세우고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한 전략가, 혁신가, 실력형 리더
●활을 잘 쏘는 복덩이(궁복), 국가 두령의 장보고
출생: 788대 후반 추정
출생지: 전남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사망: 문성왕 8년 846년(58세), 신라 무진주 새금현 완도 청해진(현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직책: 신라 상대등 제36대(839년~846년) 재임
성씨: 장(張)
이름: 장보고(張保皐)
별칭: 이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
자녀: 딸 정씨, 그 외 자녀들
종교: 불교
신장: 장신
직업: 군인, 무역가
직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
상대등(上大等)
이국: 805년 당나라, 17세, 당나라 23년간 생활
귀국: 828년, 청해진 설치, 40세
임무: 청해진 대사 18년간 재직
●머리말
9세기 초 신라 사회는 심각한 균열에 시달리고 있던 혼란기였다. 중앙 귀족의 전횡과 세력의 성장, 경제적 불평등은 나라를 흔들고 있었다. 정치.경제가 불안정했다.
이런 혼란을 피해 많은 백성이 해외로 진출하는 상황이 행해졌다. 중국의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류, 일본 규슈 등에는 이미 신라인 집단거주지. 즉 ‘신라방(新羅坊)’ 이 형성되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다.
이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장보고(張保皐)’ 다. 788년에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장보고는 젊은 시절. 그의 나이 17세에 한 살 아래인 정년(鄭年)과 함께 신라에서 벗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라 서주(쉬저우) 군사 일을 맡은 무관(武官)인 군관 벼슬인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 으로 올랐고, 그는 크게 성장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단순한 상인(商人)이 아닌, 군사(軍事) 조직과 전술(戰術) 운용, 해상교통(海上交通) 기술과 정치, 경제 등을 익히고 두루 아우른 인물이 바로 장보고였다.
이 경험은 훗날 ‘청해진 설치와 해상부역 운영의 핵심 기반’ 이 되었다. 그 당시 그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해상 통제권을 되찾고, 신라인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해적의 위협과 인신약탈.매매에 격노해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나라와 나라간 〈무역지대-Preferential Trade Zone〉 을 형성한 국제자유무역에 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장보고는 신라 중심의 무역지대를 위한 활발한 해상무역을 진행한 ‘동맹국 무역허브’ 를 목표로 사업을 튼튼한 안보(安保) 속에 이루어졌다. 그는 양국 간의 상품과 문화를 통해 외부 교란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핵심 물품 〈우대 무역구역〉 이라고 규정하며, 물품 단계별로 핵심 물품 기준가격을 설정해 현실 세계의 공정한 시장 가치를 반영한 가격 체계를 만들었다.
장보고는 무역관계를 맺은 나라에 “우리는 모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다” 며 “우리는 동맹국 및 파트너 국가 간에 무역 블록이 형성되길 원한다” 면서 무역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게 했다.
장보고는 “각국은 핵심 물품의 글로벌 생산 및 공급망의 안정성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건설적 역할을 할 책임이 있다” 고 이 같이 말하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국제무역 환경을 유지해 각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게 조성했다.
잠깐 여기서 《정년》 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다음 기술을 하고자 한다.
정년(鄭年, 889년~, 9세기)은 신라 말기의 무신(武臣)이며, 본관은 ‘경주 정씨(鄭氏)’ 이다.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활동했으며, 신라 귀국 후 쿠데타로 왕이 된 민애왕을 몰아내며 전투에서 선봉으로 지휘하여 신무왕(45대, 김우징) 즉위에 기여하였다.
정년
출생:789년
출생지: 전남 영암 운암리 덕진면 선암마을
관직: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대아찬(제5관등)
본관: 경주 정씨
복무: 당나라 군, 신라 군
근무: 당나라 수군, 신라 수군
805년(완화 12월 10일, 16세), 장보고(17세)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정년은 신라 화랑 연령대의 청소년 전투병 수준으로 초기 군사 경험을 쌓았다. 정년은 당나라 현종의 요청에 따라 순천군 장군 김웅원이 3만 병력을 원군으로 파견하여 토벌에 참여했다. 정년은 선봉과 기동부대를 지휘하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전투기술에서 신라 전역과 당나라 서주 지역을 통틀어 대적할 자가 없었다.
장보고는 당나라 군(軍)에서 활동하며 국제 정세와 해상 교통로를 익혔다. 나아가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같은 종교.문화적 거점을 후원하며, 신라인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이는 장차 그가 ‘동아시아 해상세계를 주도하는 기초’ 가 되었다. 한 개인의 해외 진출이 어떻게 국가적 차원의 영향력으로 확장(擴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는 것
장보고의 업적 가운 가장 핵심은 ‘청해진(淸海鎭)’ 의 설치다. 828년, 그는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興德王, 42대)에게 요청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청해진은 군사기지이자 나아가 ‘문화교류의 허브’ 였다.
장보고는 귀국 후 신라 왕실에 해상방어기지(海上防禦基地) 설치를 건의했고, 왕의 허락을 받아 청해진을 세운다. 청해진은 ▲군사요충지이자 ▲무역 중심지 ▲신라인 보호기지 ▲해적소탕 거점’ 이라는 네 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청해진이 설치되자 장보고는 1만 명의 병력을 조직해 황해 일대 해상에서 선박을 위협하거나 재물을 빼앗은 도둑의 ‘해적(海賊)’ 을 소탕했다. 1~2년 만에 해적이 자취를 감추며, 당나라.일본으로 오가던 무역선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했다. 바다에서의 질서를 회복시킨 인물이 바로 ‘장보고’ 다.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기지를 넘어 〈동아시아 무역의 허브〉 로 발전한다. 당나라(산둥, 양주)와 무역, 일본 큐수 지역과 교역, 발해.신라 내부와도 활발한 중계무역(中繼貿易, 외국에서 수입한 물자를 그대로 또는 약간의 가공해서 재수출한 무역)을 담당한다. 장보고는 중계무역을 통해 당나라 상품을 일본에 판매하거나, 일본 상품을 신라로 들어오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는 무역왕, 상업귀족, 경제 전략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청해진을 통해 물류허브 신라로서 국제무역교류(國際貿易交流)에 신경을 써, 해양로(海洋路) 개척으로 인하여 신라라는 기업이 제대로 평가 받게 해, 그만큼 백성 모두의 재산이 늘어나는 일로 진전.발전시키고, 나라를 부흥.부강하게 만들었다. 장보고의 국제무역교류, 중계무역은 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고, 신라에 해상무역이 〈국제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신라 경제에 끼치는 효과 및 이익〉 이라는 방향을 설정해줘 기본바탕이 되게 했다. 글로벌 신라라는 성장 발전한 나라, 공정한 세상, 안전하고 평화로운, 부강한 신라(서라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행복한 나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의 신라를 꿈꾸었다.
●해상무역과 해군력 이끈 신라의 전설적인 해상왕 장보고
통일신라 패망(936) 148년 전에 태어난(788)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 ‘확장과 지킴과 상위’ 라는 의미를 둔 〈장보고〉 로 개명하고 ‘남자는 자신만의 제국(帝國)을 건설해야 한다’ 라는 신념을 갖고, 그의 나이 17세(805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으로 근무하고, 23년 간 군 생활에서 그의 나이 40세(828년)에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로 있으면서 ‘해상무역과 해군력 강화’ 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開拓)’ 하고, 신라와 당나라, 일본을 잇는 해상실크로드의 글로벌네트워크라는 ‘국제무역망(國際貿易網)’ 을 형성하며 동아시아 ‘해상 패권(覇權)을 장악’ 했다. 또한 ‘해적(海賊)을 소탕’ 하고 ‘해상 치안(治安)’ 을 강화, 신라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해상무역의 기반을 마련, 그의 활동 덕분에 신라는 ‘동아시아 경제 중심지로 부상’ 한다. 해군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체계를 마련해 신라의 ‘해상방위를 해군력 강화’ 와 신라가 동아시아 무역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한 ‘국제적인 영향력 확대’ 등으로 신라를 국제적인 국가로 위상을 높였다. 그는 청해진 대사(828년)가 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副)와 권력(權力)’ 을 손에 넣는 등 ‘해상왕(海上王) 과 무역왕(貿易王)‘ 으로 등극했다. 청해진 의 역할은 막강했는데, 그 기능들은 보면...
첫째, ‘군사적(軍事的)’ 기능이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은 해상에서 선박을 위협하여 물건을 뺏는 해적(海賊)의 위협이 심각했다. 장보고는 훈련된 해상세력을 조직해 해적을 소탕하고, 항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는 단순히 치안이 아니라, ‘국제무역의 신뢰를 쌓는 기반’ 이 되었다. 해양과 무역의 안보(安保)였던 것이다.
둘째, ‘경제적(經濟的)’ 기능이다. 청해진은 한반도(신라), 중국(당), 일본(규슈)을 잇는 중간 기착지(寄着地)였다. 신라의 금, 인삼, 직물은 중국과 일본으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신라와 일본으로, 일본의 황금과 진주는 다시 신라와 중국으로 흘러가는 무역교류(貿易交流)가 활발했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동아시아 무역의 네트워크’ 를 사실상 독점했다.
셋째, ‘문화적(文化的)’ 기능이다. 청해진은 단순한 무역항이 아니라, 불교.학문.기술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었다. 장보고는 불교 사찰을 세우고 학승(學僧)과 장인(匠人)들을 보호했다. 이를 통해 해상 실크로드라 불릴만한 문명교류의 길을 열었다. 청해진은 오늘날로 치면 국제자유뮤역항(國際自由貿易港)이나 글로벌허브공항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신라의 영향력을 한반도 안에 가두지 않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장’ 했다.
그러나 장보고의 눈부신 활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신라 중앙권력의 견제를 받았고, 결국 846년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장보고의 몰락은 개혁적 인물이 기존 권력 구조와 충돌할 때 겪는 비극적 운명을 잘 보여준다.
징보고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839년 김우징(신무왕) 즉위 전쟁에 군사 지원, 왕이 된 김우징(신무왕)은 직위 1년(839) 만에 장보고에게 관직으로 그에게만 수여된 특수한 관호의 ‘감의군사(感義軍使)’ 라는 직책과 식읍 2천 호 하사하는 등 봉하고, 장보고는 사실상 군사 실권자이자 지방호족의 수장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의 딸을 왕비(王妃)로 들이려는 시도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중앙귀족들이 반발을 일으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장보고의 권력은 신라 중앙 귀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856년, 귀족의 사주를 닫은 자격 염장(閻長)이 청해진으로 잠입해 장보고를 암살한다. 그가 죽자 청해진은 빠르게 해체되었고, 그의 해상 제국도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지고 만다.
장보고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의 갈등이다. 장보고는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와 병력(兵力)을 거느렸다. 이는 중앙귀족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중앙권력은 장보고를 포용하기보다는 제거(除去)하는 길을 택했다. 이는 신라가 국제적 기회를 잃고, 쇠퇴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글로벌 리더십의 상징성인 장보고, 그는 출신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국제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민자 공동체를 조직하고, 무역과 문화를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창시자(創始者)였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 장보고의 ‘개방성과 도전정신’ 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방과 포용의 가치, 장보고는 신라인뿐만 아니라, 당나라 사람, 일본 사람, 다양한 집단을 아우르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는 다문화 사회와 글로벌 협력이 필수적인 오늘날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국가와 사회가 ‘폐쇄적일 때 쇠퇴하고, 개방적일 때 성장’ 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장보고의 죽음 이후 청해진은 빠르게 쇠락(衰落)했고, 신라는 국제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도전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민.무역.글로벌 네트워크 문제를 논의할 때, 장보고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교훈이다.
●1200년 전으로 들어가며...해상 주권을 실현한 인물
우리가 흔히 신라라고 하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 국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바다를 통해 신라의 세력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장시킨 인물이 있었다. 해상왕 《장보고, 張保皐》 다.
장보고(張保皐)에 대한 활약상과 출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장보고(張保皐)
장보고는 ▲해적이 들끓던 황해를 정리하고 ▲청해진을 세워 ▲국제 무역의 중심지를 만들었다고 축약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며 신라 역사상 가장 실질적인 《해상제왕》 으로 기억된다.
●과연 장보고는 누구였고, 어떤 인물로서의 역할을 띠며 공을 세웠을까?
본명: 궁복(弓福)
출신지: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특징: 활쏘기에 능해 '궁복' 이라 부름, 실력 하나로 신분 뛰어넘은 입지전적 인물
그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뛰어난 수영과 무예(武藝)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마을 앞이 ‘바다’ 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뛰어난 수영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모험심(冒險心)’ 이 많은 아이였다. 특히 마을 ‘동백정이나 오봉산’ , 인근 ‘활성산과 궁성산’ 등에서 활쏘기 등의 전쟁놀이를 즐겼다. 수영과 무예를 기른 장보고는 이때부터 바다를 동경(憧憬)했고, ‘의협심(義俠心)’ 을 키웠다. 1살 아래인 정년(鄭年)과 함께 활쏘기를 좋아했던 장보고는 ‘무협심(武俠心)’ 이 강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결국 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정년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에는 신라는 진출무대를 넓혀가려는 대망(大望)을 꿈꾼 시기였다.
당나라에서는 허심탐탐 신라를 노렸고, 일부 당나라 사람들은 서남해(완도 등)에 들어와 배를 뺏거나, 배를 탄 어부나 선장 등 신라 사람들을 잡아갔다. 노예로 삼기 위해서다. 물론 금, 농산물 등 각종 물건 등도 약탈(掠奪)했다. 이럴수록 신라는 안정을 헤치는 당나라 사람들로 인하여 혼란(昏亂)을 불렀고, 안보(安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하여, 왕권(王權)은 쉽게 흔들렸다.
장보고는 당나라를 로망 했기에 소년시절 큰 뜻을 품고 ‘선암’ 에서 신안 앞바다 섬을 거쳐 당나라(서주, 쉬저우)로 갔다. 최치원은 당나라를 가기 위해 영암 군서 구림마을에 있는 ‘상대포’ 에서 배를 타고 갔지만, 그는 고향 선암마을 앞 ‘국두암’ 에서 배를 탔다. 선암 국두암에서 배를 타고 신안 ‘우이도(牛耳島)’ 를 거쳐 ‘발해만(渤海灣)’ 해로로 북상하다가 향해도 ‘해주(海州)’ 에서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 로 입국했다. 그는 한동안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지금의 준장)으로 복무를 하다가 다시 신라로 들어왔다.
●장보고의 고향 ‘선암마을’ 은 어떤 곳인가?
운암리는 덕진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뒤에는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오봉산(五峰山)’ 이 있다. 이 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은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는...
배의 형국 오봉산은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다.
오봉산이 있는 곳에 ‘선암’ 마을이 있는데, 배 선(船), 바위 암(岩)자를 쓴 선암은 배를 닮은 형국(形局) 또는 바위에 얽힌 전설(傳說)이 있어 붙여졌다. 또한 신선(神仙)이 내려와 쉬었다는 영험(靈驗)한 바위로 여겨 신 선(仙)자를 붙여 ‘선암(仙岩)’ 이라고 했다. 마을에 ‘국두암(國頭岩)’ 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항구(港口) 역할을 했다. 배들이 이 바위 주변으로 정박하거나, 출향했다. 마을 앞에 정박해 있는 배 안의 갑판(甲板)아래에 있는 짐칸의 ‘선창(船倉)’ 이 있었다. 선암에 태어난 장보고가 당나라를 갈 때 배를 탔던 곳이며, 그는 선창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당나라에서 무령군(武寧軍) 장군(小將)으로 있었던 그였기에 선암마을 뒷산 오봉산 골짜기를 ‘무장골(武將洞)’ 이라고 했다. 무장골(무장동)은 장보고 탄생설화와 관련된 곳이다.
건덕암, 국두암의 이름은 장보고가 출세한 후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지명유래는 모두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다.
●오봉산+선암+국두암+당나라
이 관계를 풀어보면, 『오직 나는 선암 사람으로서 국민을 생각하고, 나라(國)를 지키겠노라. 당차게 내 꿈을 펼쳐가리 더 나은 세계에서...』
장보고는 신라(서라벌)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하며, 조국을 위해 무언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나라 안정(安定)과 발전(發展)을 기해보겠다며, 신라보다 더 선진화된 중국, 당나라에 가서 ‘군사 조직, 전술 운용, 해상 통신 기술’ 도 배우고, ‘문물’ 도 터득하여 자신의 지혜와 역량을 키워 조국 신라에서 공헌(貢獻)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꿈과 욕망을 갖고, 훈 날 나라에 기여를 하고자 당나라로 떠났던 장보고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생각이 남달랐고, 기예(技藝) 등 능력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나는 언제가 필시 나라를 위해 ‘기여보비(寄與補裨)’ 로 이바지하여 돕고 부족함을 보태어 주고, ‘견마지로(犬馬之勞)’ 로 자신을 낮추어 충성스럽게 수고한 윗사람이나 국가.주인을 위해 힘을 다하겠다는 등의 ‘공헌(貢獻)’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장보고는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고, 기골(氣骨)이 장대한 등 기혈과 뼈대 또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기백(氣魄)과 골격을 갖추는 만큼 생각도 원대했다. 변방의 신라가 아니라, 《중심의 신라, 리드해가는 신라》 가 되어야한다며, 그의 꿈과 희망은 청해진에서 펼쳐졌고, ‘해상왕(海上王)’ , 무역왕(貿易王)‘ 이라는 위대한 사람으로 각인됐다.
●복덩이 궁복에서 제왕 장보고로
“군사기술 터득, 선진문물 도입에 역할을 해보겠노라!” 이렇게 마음먹고, 그는 선암에서 중국의 당나라로 나이 17세(805년)에 떠났다. 당나라에 가서 군에 입대해 군사 조직, 전술 운용, 해상 통신 등 기술을 두루 익혔다. 또한 무역(貿易)도 배웠다. 그런 그가 다시 신라로 들어와서 ‘청해진(淸海津)’ 이라는 훌륭한 방어(防禦)의 ‘군사진지(軍使陣地)와 무역(貿易)’ 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때부터 그는 복덩이 궁복에서 당나라에서 얻은 이름의 제왕 ’장보고’ 로 활동했다. 확장+지킴+제왕의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을 수행한 것이다.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타고난 리더십과 결단력으로 신라뿐 아니라 당나라, 일본과 동남아 등까지 영향력을 크게 끼친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즉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라는 정신을 갖고 살았다. 그는 중국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조조(曹操)’ 의 그의 충정한 말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듯이, 조조가 말한 ‘충심은 강한 성격의 시작이다’ 라는 말은 조조의 성품과 도덕성을 강조한 말로써 그의 인격을 잘 대변하는 표현처럼, 용맹하고 지혜로운 지도자 ‘관우(關羽)’ ,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해된 관우는 삼국시대를 빛낸 용맹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그의 용감한 행동과 지혜롭고 대담한 성격과 그 인물상을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열정과 헌신으로 사랑받은 인물 ‘손권(孫權)’ , 그가 ‘열정은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이 된다’ 라는 속담은 손권의 열정적인 성품과 끈기를 잘 보여주는 말로, 그의 인물상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 손권은 삼국시대의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많은 전적을 남기며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 인물들의 역사는 우리 역사 속에서 빛나는 부분 중 하나이듯이, 그들의 품격과 지혜를 전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전하면서도 그들의 품격과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너 나은 삶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그런 인물만큼 훌륭한 한 인물로 〈장보고〉 를 들 수 있다.
●당나라에서의 군 경력, 실력을 키운 해외 경험
장보고는 신라 골품제도(骨品制度)로 인한 신분차별로 17살에 1살 아래인 ‘정년’ 과 함께 당나라 서주 ‘무령군(武寧軍)’ 에 진출한다. 이곳에서 그는 군사 조직, 전술 운용, 해상 통신 기술 등을 익혔다. 무역(貿易)에도 눈을 떴다.
이 경험은 훗날 청해진(淸海鎭) 설치와 해상무역(海上貿易) 운영의 핵심 기반이 되었던 것.
그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인들이 노예(奴隸)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라사랑 국민사랑이 깊었던 그는, 그때부터 해상 통제권을 되찾고, 신라인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청해진 설치...바다 위에 세운 거대한 군사기지, 그리고 무역항구
◇ 청해진(淸海鎭)은 어디, 어느 곳에 있었을까?
위치: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설치시기: 828년, 흥덕왕 3년
구조: 외성·중성·내성 3중 방어 구조, 병력 약 1만 명
장보고는 그의 나이 17세인 805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810년 무령군 소장으로서 근무하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갖춘, 그리고 선진문명(先進文明)을 익힌 장보고는 23년 만에 귀국(828년) 후 신라 왕실에 해상 방어기지(防禦基地)인 군영(軍營) 설치를 건의했고,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 재위 826.10~836.2월)의 허락을 받아 828년 청해진을 세운다.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846년에 사망(58세)한 그는 청해진 대사로 18년 간 근무했다.
청해진은 ▲군사 요충지이자 무역 중심지 ▲신라인 보호기지 ▲해적소탕 거점이라는 이 세 가지가 흥덕왕의 적극적인 지지아래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해적 소탕과 해상권 장악
청해진이 설치되자 뛰어난 전략가(戰略家)인 장보고는 1만 명의 병력을 조직해 황해일대 해적(海賊)을 소탕했다. 짧은 시일에 평정(平定)한 것이다. 뛰어난 무예(武藝) 실력에다 기골이 장대했으니 무서울 만도...
일망타진, 1~2년 만에 해적이 자취를 감추며, 당나라와 일본으로 오가던 무역선(貿易船)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에서의 질서를 회복시킨 인물, 바로 천하제일 평정꾼, 국토수호자의 ‘장보고’ 이다.
●해상무역과 국제 경제력의 중심 청해진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기지를 넘어, 〈동아시아 무역의 허브〉 로 발전한다. 요즘 같으면 세계적인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글로벌 K-청해진’ 이다.
당나라(산둥, 양주)와 무역
일본 큐슈 지역과 교역
발해, 신라 내부와도 활발한 중계 무역
장보고는 중계무역(中繼貿易)을 통해 당나라 금.도자기.비단 등의 상품을 일본에 판매하거나, 일본 상품을 신라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름 하여 개성상인 같은 무역상(貿易商)이다.
그는 ▲무역 왕 ▲상업▲ 귀족 ▲경제 전략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정치권력까지 움켜쥔 실세
장보고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특히 정치면에서...
839년, 김우징(신무왕, 42대) 즉위 전쟁에 군사 지원
왕이 된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라는 직책과 2천 호 식읍(食邑)을 하사
장보고는 사실상 군사 실권자이자, 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으로서의 지방 호족(豪族)의 수장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는 시도까지 하지만, 이는 높은 벼슬을 한 ‘조정 귀신(貴臣)’ 과 고관대작은 ‘중앙 귀족(貴族)’ 들의 반발을 일으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비극적 최후...암살당한 해상 제왕
장보고의 권력은 신라 조정과 중앙 귀족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846년, 조정과 귀족의 사주를 받은 자객 ‘염장(閻長)’ 이 청해진으로 잠입해 장보고를 암살했다. 염장과 연회를 즐기는 도중, 술이 취한 장보고를 보고, 염장은 이 틈을 타 장보고의 칼을 뺏어 목을 베었다. 암살이다. 그의 나이 58세에...
그가 죽자 청해진은 빠르게 해체되었고, 그의 해상 제국도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지고 말았다. 장보고가 죽어서 슬프고 허망하고, 18년간 지속되어온 청해진이 해체되어 이 또한 애석(哀惜)했다.
“이 어찌 이런 일이” 다.
●장보고의 유산과 기념...남은 유적
청해진 유적지: 전남 완도 장도에 당시의 방어시설, 군사기지 흔적 보존
산둥 적산촌 법화원: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중심지로 장보고가 세움
●현대적 기념
드라마 <해신>의 실제 모델
해군의 장보고급 잠수함 명명
장보고 기념관: 완도군에서 운영 중
근데 정작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증 역사서에는 그에 대한 출생지 등 가족 관계는 전혀 다루는 것이 없으니...
“이게 무슨 연유이런고!”
●장보고 고향, 전남 영암
그가 태어난 선암(船岩)마을 주민들은 마을 뒤편에 있는 거북이를 닮은 ‘건덕암(乾德岩)’ 이 있는데, 장보고 부모는 이 바위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7년간 기도하여 궁복(弓福)을 얻는 등 장군감으로 태어나게 했다. 부모들은 세상 밖으로 나온 그가 보통 얘들하고는 커서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커서 뭔가 큰 인물로서 성장하고, 일을 해낼 것이라는 예감이 강했다. 조선시대 때에는 매년 역대 군수가 풍년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던 곳으로, 고중 14년에 이규대 군수가 ‘관풍정(觀風亭)’ 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시를 지어 현판(懸板)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선암을 지키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가슴에는 장보고의 혼(魂)이 서린 바위와 흔적들을 새기면서 그를 그리워한다. 관풍(觀風)은 시기나 풍속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인데, 마을 사람들은 관풍정(觀風亭)에 쉬면서 세상을 논(論)하고, 미래(未來)를 설계하면서 마을의 안녕(安寧)과 발전(發展)을 빌었을 것 같다. 선암마을이 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바다나 저 멀리 월출산을 조망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풍류(風流)를 즐길만한 장소였다. 궁복이 있을 때는 관풍정은 없었지만, 대신 국두암(國頭岩) 같은 그럴만한 장소가 있어, 이곳에서 주로 세계관(世界觀)과 미래관(未來觀), 그리고 마을의 안정(安定)과 번영(繁榮)을 기했다.
●건덕암 지명 유래 황제의 덕, 어진 바위
거북이 형상을 한 바위를 하늘 건(乾), 큰 덕(德), 바위 암(岩)자를 써 ‘건덕바우(乾德岩)’ 라고 했다. 건(乾)이라는 글자는 생명력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천(天)이 하늘의 형체를 그린 글자라면, 건(乾)은 하늘의 ‘성격과 본질적 기능’ 을 의미한다. 건(乾)은 건(建)으로써 ‘건장(健壯)하여 쉼 없다’ 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건(乾)은 ‘하늘.아버지.군주.임금.우두머리.등근 원’ 등을 상징한다. 건덕(乾德)은 ‘황제의 덕 또는 성덕(聖德)’ 이라는 뜻이다. 덕은 ‘어질다’ 라는 뜻으로 쓰였다. 건덕암은 장보고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덕암은 ‘거북바위 또는 칠성바위’ 로 불린다. 건덕암에서 기도를 드려 복덩이를 얻었으니, 그 애가 장차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서의 장수(將帥), 완도 청해진 대사로서의 해상왕으로 성장하게 한 영험(靈驗)한 바위로 여긴다. 그래서 하늘 건(乾), 큰 덕(德)의 의미를 지닌 바위(岩)로 장보고와 관련시켜 극진히 모시고 있다.
●국두암 지명 유래 나라의 우두머리 바위
국두암은 나라 국(國), 머리 두(頭), 바위 암(岩)자를 쓴 바위로서, 이 바위는 장보고 궁복이였을 때, 부두(埠頭)역할을 한 이 바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군사로 공을 세우고, 청해진에서 배척, 안보, 질서, 해로 개척, 무역교류 등에서 큰 일을 해, 크게 업적을 이룬 인물로 여겨 ‘국두암(國頭岩)’ 으로 칭했다. 두(頭)는 ‘꼭대기, 맨 앞, 시초, 우두머리, 첫째, 상위, 지혜, 재능’ 의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나라의 우두머리를 배출’ 했다고 해서 〈국두암〉 이라고 했다. 국두암은 ‘신라의 부두(埠頭)역할을 한 바위’ 라는 의미에서도 국두암이라고 부른다.
건덕암은 ‘탄생설화(誕生說話)’ , 국두암은 ‘성공신화(成功神話)’ 에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건덕암, 하늘이 점지해준 덕이 있는 바위
선암마을의 전설, 건덕암과 국두암은 영험한 ‘선(仙)바우’ 로 봤다. 특히 건덕임은 그 형체가 영락없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여길 정도로 영험(靈驗)한 기운이 있어 ‘선(仙)바우’ 라고 본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초가 되면 치성(致誠)을 드렸다. 그런 바위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려 궁복을 얻었으니, 궁복이 커 훗날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돼, 이 바위를 〈하늘에서 점지해준 덕이 있는 바위〉 라고 해서 하늘 건(乾), 큰 덕(德)자를 써 ‘건덕암(乾德岩)’ 이라고 일컬었다. 건덕암은 ‘거북바우’ 라고도 한다.
칠성버우, 선바우, 거북바우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렀던 건덕암은 오래 전부터 이 바위를 신성(神聖)시하며, 영험(靈驗)한 바위로 보고, 아들 낳아 달라고, ‘가족 건강, 풍년, 마을 안녕, 국태민안’ 등 민간신앙(民間信仰)으로서 모셨던 소중한 바위다. 무당(巫堂)들이 이곳에서 굿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건덕암은 기도처(祈禱處)였다.
마을 위쪽 높은 위치에 ‘거북처럼’ , 동물을 닮은 바위 하나가 있는데, 칠성바위(七星岩)로서 기도처로 삼고, ‘자식복.재물복.수명.가정운’ 을 관장하는 곳으로 여겼다. 마을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기도처다.
특히 선암마을의 주불(主佛)인 ‘건덕암’ 은 중생의 업장(業障, 일.사업.생업 등 막힘)을 밝은 빛으로 녹여 현실의 막힘을 풀어주는 신성암(神聖岩)으로 전해지며, 현실적인 소원 성취가 빠르다는 체험담이 많은 바위이기도 하다.
건덕암은 칠성바위로서 ‘북두칠성(北斗七星)’ 을 뜻한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북두칠성은 ‘사람의 수명, 자식 인연, 재물과 부덕, 집안의 흥망성쇠, 인연의 흐름’ 을 관장한다. 그래서 칠성바위 기도는 단순한 소원기도가 아니라, 〈인생 전체의 흐름을 바로잡는 기도〉 로 여긴다.
치성광바위(거북바위)는 밀교(密敎, 해석.설명 등을 할 수 없는 경전.주문.진언 등) 계통에서 전해지는 부처님으로 어두운 업장(業障)과 막힘을 빛으로 소멸시켜 병고(病故), 재물 막힘, 자식 인연의 장애를 빠르게 풀어줄, 특히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영험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예부터 아이가 안 생길 때, 사업.금전이 계속 막힐 때, 집안 일이 꼬일 때 칠성바위의 ‘건덕암’ 에서 기도를 올린다.
자식 인연은 단순한 원함이 아니라, 전생.현생의 인연과 업장이 얽혀 있다고 보고 있다. 칠성바위의 기도는 자식 인연을 막는 장애의 업장을 녹이고, 인연의 때를 앞당기며, 아이가 들어올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기도로 여긴다. 임신을 원하는 분, 자녀와의 관계가 힘든 분, 자녀의 건강.진로를 걱정하는 부모 등 모두에게 해당되는 기도처가 바로 선암마을에 있는 건덕암, 즉 〈칠성바위 혹은 거북바위〉 다.
재물 역시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애써도 계속 나가거나, 기회가 닿지 않는 경우는 재물운의 흐름이 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칠성바위 기도는 새는 재물을 막고 들어올 재물의 길을 트며, 감당 가능한 만큼의 복을 받게 하는 기도로 전해진다. 특히 사업.장사.투자를 하는 분들이 칠성바위 기도 후 흐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장보고 모친은 칠성바위에 정화수(井華水) 떠놓고 기도를 했는데, “나무 치성어광바우” 라고 발원문으로 칠성기도를 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치성광바우(熾盛光岩)님께 귀의합니다. 저의 업장과 막힌 인연을 밝은 빛으로 녹여 주시고, 자식 인연과 재물 인연이 바른 때에 바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욕심이 아닌 복덕(福德)으로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칠성바위인 건덕암 기도는 무조건 소원을 들어주는 기도라기보다는 〈내 인생이 받아야 할 복의 길을 바로 여는 기도〉 이다.
기도를 올리면 아들 낳고 장수한다는 소문이 일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칠성바위인 거북바위(건덕암), 전남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오봉산 기슭에 영험하게 보이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주민들은 기도 정성을 모은다.
거북바위에서 주민들은 “후일에 위대한 사업을 이뤄서 명전백세(名傳百世)하게 해주옵소서!” 라며 천지신명께 간절히 빌기를 계속했다.
장보고 모친은 옆 골짜기에 흐르는 물웅덩이를 퍼서 맑힌 후 정갈한 그릇에 떠 거북바위 앞에 진설(陳設)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경건(敬虔)했고, 범상(凡常)함을 넘어서 천상(天上)에서 내려온 동자(童子)가 수도하는 모습 같았다.
장보고 모친은 “결혼하여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칠성바위(거북바위)에 헌신 봉공(捧供)하여, 그 은혜가 천하 만민에게 골고루 미쳐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갓 구구한 가정생활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는 것이었다.
칠성바위 혹은 거북바위인 건덕암은 1000전부터 주민들의 기도터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거북바위에서 나오는 기(氣)를 몸소 느낄 수 있었으며, 거북바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거북바위의 신묘(神妙)를 이야기하고, 거북바위에서 흐르는 기가 강함을 말하고 한다. 예로부터 거북바위는 신령스런 동물로 거북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설화는 장수(長壽)의 상징이자,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져 신성하게 여겼다.
우리 선조들은 거북을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사령(四靈)으로 일컬었으며, 재복(再覆)을 가져다주거나 신령스러운 일을 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일들이 거북을 통해 일어난다고 믿어왔다. 거북이에 대한 설화는 우리나라 곳곳에 전해진다. 이는 장수(長壽)를 뜻하는 동물 중의 하나로 알려진 ‘거북’ 이가 재복(財福)을 가져다주거나 신성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이야기이며, 영웅(英雄)의 탄생을 알리는 태몽에도 등장한다.
이처럼 거북은 장수(長壽)와 재물(財物)을 가져다주거나, 자식과 인연(因緣)을 맺어주는 등의 상서로운 동물이다. 거북바위.칠성바위의 건덕암이 있는 산을 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으로 실제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들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선암마을 거북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니라, 예로보터 선조(先祖)들의 정성이 깃든 신령스러운 바위이다. 이 거북바위는 칠성바위로서, 동양 전통에서 변함없고 지속되는 영원성(永遠性)과 우주적(宇宙的) 질서(秩序)를 상징성으로 보는 등 바위는 시간이 흘러도 형태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무궁한 존재감과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문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선암마을의 건덕암은 거북이처럼 생겨 이 바위를 북두칠성의 ‘칠성바위(七星岩)’ 로도 여긴 채 건덕암을 ‘우주(宇宙)와 자연.사람의 길’ 이 담겨있다고 성스럽게 모셨다.
주민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올라와 바위에 빌며 기도하고, 가정에 무탈함을 기원했다. 그러다가 마을에 아들 못 낳는 궁복(장보고) 모친이 와서 기도를 올리자 아이가 들어서 낳았는데, 해상제국을 세운 훌륭한 인물, 장보고 전해진다.
●월출산→태백산→우주 북극성까지 연결
자연에서 달(月)은 음(陰)이고, 해(太陽)는 양(陽)이다. 음양론에서는 음속에 양이 있고, 양속에 음이 있다. 영암 월출산 봉우리는 양의 형태(凸)이지만, 달을 띄우고 있다.
우리 민족의 기저심리에 칠성신앙(七星神仰)이 자리 잡고 있다. 칠성은 생명신앙(生命信仰)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삼칠일(21)일 동안 금줄을 쳐서 악귀와 침범을 막고, 죽어서 원래자리로 돌아갈 때도 관속의 칠성판(七星板)에 누워서 간다.
죽어서 저승에 갈 때도 살아생전 업보(業報)에 따라 내생(來生, 죽은 뒤의 생애)이 정해진다. 49재인 민간신앙도 칠성신앙이다. 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별자리다. 풍수지리 구성학(九星學)은 북두칠성을 기반으로 추길피흉(趨吉避凶)하는 학문이다.
이런 학문이 적용되는 바위가 바로 〈건덕암〉 이다. 건덕암은 거북바위지만 칠성바위로도 보는 이유가 우주관(宇宙觀)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선암마을 건덕암에서 월출산 천황봉을 연결하는 선(線)은 지구 자전축과 일치하는 한반도 끝까지 연장하면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이 나오고 다시 선을 우주로 무한 연장하면 북국성(北極星)에 닿는다. 이런 우주론에서 볼 때 건덕암은 의미가 있는 바위로서의 귀중하고 신성(神聖) 하다.
무릇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 월출산 큰바위얼굴이 세 번에 걸쳐 세상에 대면하였으니, 이제 한 번 더 남았다. 왕인박사로 하여금 문화 창달(暢達)을 과업을 이루었고, 장보고는 해상무역이라는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을 개척이라는 과업을 이루었다. 도선국사는 새로운 왕조(王祖)를 탄생시켰고, 풍수지리로 세상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니, 마지막 한 번 더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의 출현이 남았다. 영적 메시아나 남북통일, 우주개척을 완수하는 지도자가 나타날 것을 염원한다.
건덕암, 진짜 귀한 놈이 태어났다. 바로 ‘금복덩이 금복’ 이다.
선암, 진짜 무서운 놈이 나타났다. 바로 ‘궁복’ 이다.
큰바위얼굴, 진짜 매운 놈이 왔다. 바로 ‘해상왕 장보고’ 다.
청해진, 진짜 대단한 놈이 왔다. 바로 ‘무역왕 장보고’ 다.
●금동이 얻었네, 금쪽같은 복덩이 금복→궁복
7년만의 기도 끝에 얻은 아들을 귀하게 얻었다하여 금(金)쪽같은 복(福)덩이로서 ‘금동(金童)이’ 또는 ‘금복(金福)’ 이라고 불렀다. 금복은 아들이 큰 인물로서의‘ 어진 사람’ 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근 산의 활성산과 궁성산의 의미를 두어 쇠 금(金)을 ‘활 궁(弓)’ 으로 해 금복을 ‘궁복(弓福)’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보고 부모는 7년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라, 태어나자마자 5분도 안 돼서 아주 가녀린 응애응애 울음소리로 자신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아들을 “금동이 얻었네요.” 하며, “우리 금동이 우리 금동이” 라고 기뻐했다. 점점 우렁차지는 울음소리에 심장이 멋을 뻔했다. 장보고 부모는 “태어나 내 인생에서 이렇게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고, 백옥 같은 피부, 우량아로 태어난 금동이, 분명 태어남과 동시에 내 가슴팍에 올려 젓도 물렸는데, 너무 정신없고 흥분한 상태에서 봐서 그런가, 기억을 잘 하지 못하고, 나중에 보니 금동이가 보통 얘들과는 다른 체구와 생김새를 하고 있어 놀랐다.
장보고 부모는 금동이가 우는 모습도 사랑 그 자체라며, 자궁 속 양수(羊水)에서 둥둥 떠 놀다가 세상에 나와 중력(重力)의 힘을 받기 시작한 건지 시시각각 얼굴이 변해갔다. 장보고 부모는 “더 귀여워졌네 울 금동이” 라고 좋아해 “내가 바로 엄마아빠의 심장을 녹이려 세상에 나온 금동이올시다.” 라고 해맑은 웃을 지어보였다.
거북바위, 칠성님 기도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신에게 무명 장수(長壽)와 자손(子孫)을 비는 의례로 칠성고사.칠성기도.칠성불공 등으로 불리며, 사찰과 가정, 마을 부근에서 행해진다. 가정에서는 장독대.안방.샘물.돌탑.바위 등을 제의(祭儀) 대상으로 삼는다.
칠성기도는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채식(菜食)으로 정갈히 하며 말과 몸가짐을 삼가 한다. 정화수 한 그릇과 진실한 마음으로 집안 정독대.창가.샘 어디든 정성을 올린다.
선암마을 오봉산 기슭에 거북이를 닮은 바위는 영험한 기운을 느끼게 하여 이 바위를 신성시하며 소원을 빌었다.
건덕암은 장보고를 낳게 만든 치성(熾盛)바위로서 장보고 부모는, 이 바위를 매일 찾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애가 쉽게 배지 않았던 장보고 모친은...
“왜 애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뭘 잘 못한 건가?”
별이 별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안 되겠다. 거북바우에 가서 기도를 드리자.”
~라고 매일 이 바위를 찾아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칠성님! 대(代)를 이을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게 해주십시오.”
“정성껏 다해 신주님께 비나이다.”
“자식을 얻어 우리 가정의 평화와 번창, 마을의 생기를, 나라의 번영을 위해 귀한 자식 하나 갖게 해주십시오.”
“간절히 비나이다.”
7년간의 기도 끝에 얻은 궁복=장보고
영험한 바위의 ‘건덕암’ 이다.
장보고 부모는 궁복이 장차 큰 인물이 되어달라고 기도는 계속 이어갔고, 장보고가 당나라에 있을 때도 아들이 건강 속에 큰 인물로 출세하기를 빌었다.
●선암마을 건덕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
영암 선암마을 오봉산 기슭에 있는 거북바위는 약간의 목을 빼고 커다란 눈을 한 무뚝뚝한 표정으로 움츠리는 모습이다. 알을 낳으려는 자세다. 거북등처럼 둥그렇게 한 모양새는 아니지만, 이 바위를 ‘거북바우(龜岩.龜岩))’ 라고 불렀다.
●선암마을 바다거북 거북돌부처로 변신하다
전설에 따르면 선암마을 앞 바다에서 주로 사는 거북이가, 어느 날 마을을 거쳐 산으로 올라오게 됐는데, 이걸 본 마을 사람들은 다시 거북이를 바다에 놓아주었다. 그런데도 또 마을로 올라오고 해서 또 다시 보내면서 바다에서 “용왕님과 함께 잘 지내” 바다로 보냈다. 그런데도 마을로 자꾸 올라와 마을 사람들은 “거북이가 무슨 사연이라도 갖고 온 건가?” “왜 그러지?” “통 알 수가 없네!” 하며 답답해했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 일이 번번하게 생기자 마을 사람들은 모여 “거북이가 마을로 올라오는데, 왜 그럴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요?” 별의별 걱정을 하며, 무슨 재앙(災殃)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과 마을에 필시 상서(祥瑞)로운 좋은 일이 것이라는 의견들이 팽팽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거북이가 가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나뒀다.
그런데 거북이는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마을 뒤 오봉산 기슭으로 올라갔는데, 언덕에 자리하며 지낸 것이다. 그 언덕은 마을과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그런 곳에서 알(卵)을 낳겠다는 태도를 취한 거북이는 마을을 지키면서 마을 사람들의 장수(長壽)와 안녕(安寧), 번영(繁榮)을 위해 영원한 거북부처(龜佛)로서의 〈거북바위-귀암〉 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북이는 마을 앞의 풍경이 어찌나 좋은지 한동안 이곳에서 머물게 됐다. 저 멀리 보이는 월출산(月出山)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멋진 그림이었고, 바다에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언덕위에서 보이는 들과 바다는 또 다른 세계로 받아들었다. 거북이는 이 좋은 풍경을 느끼게 해줘, 이 마을(선암)에 뭔가를 좋은 기운을 불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아예 자신의 본 모습을 생물이 아닌 돌(석상)로 변신해 마을을 지키듯이, 안녕과 번영과 출세를 바라듯이 거북부처(龜佛)로 자리했다.
●거북은 장수.안정.번영.출세 상징
풍수사상(風水思想)에서 거북이 형국은 ‘장수.안정.번영’ , 그리고 ‘출세’ 를 상징한다. 거북이 형상은 지기(地氣)가 흩어지는 것을 막는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란 것을 채움)’ 장치로 쓰이는데, 선암마을에 있는 거북바위가 마을 뒤편에서 마을을 바라보고 있어, 기운(氣運)을 마을 안으로 모은다. 집안에 거북이를 두면 좋은 ‘기운을 끌어들인다’ 고 한데. 마을에 거북바위가 있으니 좋은 기운이 넘쳐날 만도...
거북이는 ‘장수와 안정, 부귀.번영.자손 번창, 보호.재앙 차단’ 역할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거북은 동양 철학과 풍수지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장수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부귀(富貴)와 번영(繁榮), 자손 번창(繁昌)’ 을 상징한다. 특히 거북이 알을 품는 형국은 ‘집안.기업의 지속적인 번영’ 과 ‘자손의 번성’ 을 뜻하며, 살기(殺氣)를 차단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북이 형국이나 형상을 가까이하면 좋은 운으로 일이 잘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 의미를 지닌 거북임을 알고, 기대감이 부풀어졌고, 그런 희망적인 바람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면서 삶을 이어갔다.
선암마을의 거북바위는 ‘알을 낳으려는 형국(形局)’ 이다. 부귀와 재물, 자손과 성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에서 기도를 드리면 이뤄진다는 속설로 치성을 드린다.
전설에 따르면 거북바위의 건덕암에서 기도를 드리면 자손(子孫)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래서 장보고 모친을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7년간이라 드렸다. 장차 궁복이 장보고로서 크게 성공을 했다. 다른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거북바위에서 기도를 드려 사법시험 등 국가고시에서 합격자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역대적인 설명도 한다.
알을 낳으려는 형국, 바다를 바라보는 형국을 한 영암 선암마을 거북바위는, 자신의 고향 바다를 동경(憧憬_하는 모습이다. 바다에 대한 꿈, 그리고 희망이 풍겨난다. 선암마을 거북이는 산에서 내려온 것이 아닌, 바다에서 올라온 거북이여서 더욱 바다를 잊지 못한다. 용왕(龍王)님을 그리워한다고 할까? 이 바위에서 기도를 드리면 필시 태어난 아이가 장차 끈기 있고 성실하며, 사회적으로 큰 성취(成就)를 이룰 인물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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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거북이의 딱딱한 등껍질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는 ‘방어(防禦)와 안전(安全)’ 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바위의 영험함으로 거북바위의 기운을 타고 난 귀한 자식 궁복은 자신이 꿈꾸는 것이나 하고자하는 일에 조력자(助力者)를 만나거나,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잡게 될 징조로 해석돼, 그는 결국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이라는 장수(將帥)로서의 높은 직책과 청해진 대사(大使)라는 권력으로 해상왕에 오르는 등 조력자를 만나 성공한다.
장보고의 출세(出世), 거북바위의 등을 타고 바다를 건너지 않았는가 볼 정도로, 그는 귀인을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합격, 임명, 승진, 진출 등 명예를 얻는 일들이 그에게 펼쳐졌다.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장보고 모친은 어느 날 밤, 푸르고 맑은 바닷가에서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자신의 품으로 기어 올라오는 꿈을 꾸었다. 예사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마을 뒤에 있는 거북바위를 찾아 기도를 드렸다. 이 바위가 꿈에 나타난 바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북바위는 아주 순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고, 장보고 모친이 쓰다듬자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태어난 아이는 ‘해상왕 장보고’ 라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거북이 꿈은 아이의 성향이 침착하고 두뇌가 명성하며, 리더십과 내실을 기하는 ‘현자(賢者)’ 스타일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궁복은 어진 사람이 되라고 해서 ‘궁(弓)과 복(福)’ 을 이름으로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장보고 모친은 꿈에서 태몽(胎夢)으로 거북이가 나타났으니, 그 당시 꿈속에서의 기분은 최고였을 것이다. 거북이를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거나, 행복했던 그것은 분명 장보고 모친 인생에 찾아온 커다란 ‘축복(祝福)’ 의 전조(前兆)였다.
거북이의 꿈, 거북바위의 기도로 얻은 궁복=장보고, 거북이가 전하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 거북이 꿈은 우리에게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준다. 당장 눈앞의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거북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 커다란 보상(報償)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장보고였기에, 그는 부모가 꿈을 꾸거나 거북바위에서 기도를 드렸기에 그런 거북이를 통해 미래의 희망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거북바위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성시하며...
그래 이 작고 가난한 마을에 기운을 북돋아주고, 또 큰 인물이 나오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거북이를 봤으니, 큰 걱정 없이 (運)이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는 신호이다. 큰 거북이를 봤으니, 재물 운을 몰론 승진(昇進).상승(上昇)할 운이다. 거북이가 마을로 들어왔으니, 경사(慶事)스러운 운이 강하게 들어온다. 거북이가 알을 낳고 있으니. 새로운 사업이나 프로젝트, 아이디아가 싹트게 된다. 거북이 등에 올라탔으니, 자위 상승, 출세,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다. 거북이가 높은 곳으로 올라있으니. 자리.평판.성과가 함께 올라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그를 얻게 만든 ‘거북바위(건덕암)’ 와 관련돼있음을 유추(類推)해볼 수 있다. 확장(張)과 지킴(保)과 언덕(皐)이라는 한자를 쓴 그의 이름은, 장보고는 이 이름을 지을 때 ‘확장하고, 지키고, 높은 곳에 오르고’ 라는 의미에서 장보고라고 했지만, 또 다른 영향은 그가 태어난 곳, 부모가 거북바위(건덕암)에서 기도를 드린 것을 떠올렸다.
마을 뒤 오봉산 기슭에 있는 거북바위가 마을을 ‘보호(保護)’ 하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거북바위는 마을 뒤 ‘언덕(皐)’ 에 위치하고 있어서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키고 높은 위치에 올라 확장(擴張)하겠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본이름인 궁복에서 ‘장보고’ 로 개명하는데, 건덕암인 ‘거북바위’ 가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국두암, 나라의 우루머리 황제 제왕
또 마을 앞에 ‘너럭바우’ 가 있었는데, 이 바위는 장보고가 이 바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출세했고, 차후 청해진 대사로서 해상왕, 무역왕이라는 큰 인물이 됐다고 하여 나라 국(國), 머리 두(頭)자를 써 〈나라의 우두머리, 황제, 제왕〉 라는 ‘국두암(國頭岩)’ 이라고 불렀다.
건덕암, 국두암은 ‘영험(靈驗)’ 함이 서린 바위다. 이 바위가 있는 선암은 신비(神秘)스러움을 드러내는 ‘상서(祥瑞)로운 마을’ 로 여긴다.
한편 장보가 태어났다고 보는 완도 ‘장도(長島)’ 는 섬이 일자형으로 길게 뻗어 있다하여 일컫는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의 거점이 된 곳이다. 장도를 장보고의 탄생지라고 보는 것은 난센스적인 아이러니하다. 장도와 장좌리, 대야리 섬은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있을 때 이곳에서 주로 보내게 돼서 관련된 것이다. 완도 ‘장좌리’ 는 통일신라시기에 ‘청해진’ 이 설치 된 곳으로 인하여 장보고 유적지로 언급된다. 장도는 장좌리.대야리 일대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암튼 출생지가 ‘장도’ 라는 것은 근거 없고, 터무니없는 낭설(浪說)이다. 장보고 아버지가 뱃사람으로 장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데,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고 기술한,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으로 두고 구성한 ‘허구적(虛構的)’ 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散文體)의 문학 양식의 ‘소설(小說)’ 에 불과하다.
장보고가 궁복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등에서 잘 중요하게 거론 되지 않은 이유가, 장보고가 평민(平民) 출신이라는 이유뿐이다. 당나라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 복무하면서 큰 공을 세운 것에 더 부각돼, 궁복이라는 이름은 다를만한 가치를 못 느꼈던 것이다. 궁복이라는 이름을 다루기는 했지만, 그의 본명에 미천 사람으로 낙인(烙印) 된 인식을 갖고 있어, 궁복이라는 이름보다 당나라에서 썼던 장보고, 청해진 대사 때도 그 이름으로 자신을 빛낸 장보고라는 이름을 더 불러줬다.
궁복이라는 이름은 천민(賤民) 집안에서 쓴 이름으로 취급해버렸고, 역시 장보고도 그런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좀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자신의 격(格), 시대상황에 맞지 않은 신라의 귀족층의 신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명예스럽지가 않아 결국 ‘장보고’ 라는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고, 궁복보다는 장보고를 더 내세우게 된다. 장보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장보고처럼, 신분상 본 이름을 쓰지 못하고, 예명(藝名)이나 개명(改名)해 써야했던 시절이었다. 궁복의 성은 무엇일까? 맞추지 못한 수수깨끼로 남게 정도로 비밀(秘密)에 쌓여있다.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유는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뜻이 담겼다.
●장보고 행적, 영암 선암→당나라 서주→완도 장좌리
다시 말하건 데, 궁복, 궁파에서 장보고로 이름을 바꾼 장보고는, 그 이름에서 이미 출생지를 엿볼 수 있으며, 그의 행적은 〈영암 선암→당나라 서주→완도 장좌리〉 임을 정확히 밝히고자 한다.
장보고,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닌 ▲해양 전략가 ▲경제 경영자 ▲정치 외교가 ▲무역상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따라 붙은 ▲해상 왕 장보고 ▲무역 왕 장보고라는 칭호는 어색하지도, 지나침도 없다.
“왜!”
그는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자신의 세계관과 미래관의 인생의 목표, 사상 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강조하고 싶은 ‘장(張)’ 이라는 성(姓)은 그저 장씨(張氏) 가문의 성을 쓰는 것이 아닌 범위.규모.세력 따위를 늘려서 넓힌다는 ‘확장(擴張)’ , 수량이 늘거나 규모.세력이 커지거나 크게 늘어난 ‘팽창(膨脹)’ , 모양이나 규모 따위를 더 크게 하는 ‘확대(擴大)’ , 늘려서 넓혀 충실하게 하는 확충(擴充), 영토 따위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분야를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개척(開拓)’ 정신을 담은 성(姓)을 쓰고 있어서다.
●장보고는 왜 중요한가? 왜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가?
정치: 왕권 개입, 실력기반 권력 확보
경제: 국제 무역망 운영, 중계무역 주도
문화: 신라인 보호, 볍화원 건립 등 해외 거주자 배려
군사: 해적 소탕, 해상방위 구축
이런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한, 그는 정치.경제.외교.군사를 모두 아우르는 〈통합형 리더〉 였다. 다시 읽는 명저, 장보고의 지속적인 혁신이 신라 사회주의 발전의 원천이 되게 한 세상을 뒤바꿀 ‘혁신가-Innovator’ 이였다. 신라 변혁의 프로젝트 참여의 창업가 장보고, 글로벌 문제 해결 위한 혁신가로 돌아왔다. 장보고는 변화에 대한 갈망과 실행력으로 혁신(革新)을 시작하고, 사람과 조직을 움직이는 주체였다. 관찰과 공감에서 출발해 실행과 지속 가능한 조직.가치.창출로 이어지게 했던 장보고, 그는 거대한 대륙 당나라에서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신라에서 꽃을 피웠던 인물로서의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진정한 ‘혁신가(革新家)-Innovator 또는 개척자(開拓者)-Pioneer’ 이요. ‘기업가(企業家)-Entrepreneur’ 라 할 수 있다.
그는 ‘제도.운영.진화’ 의 3가지 관점에서 실행과 현업과 연결시킨 비전.목표가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경영자가 통찰력(洞察力)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설정으로 청해진을 설치한 이유요, 성공한 선례다. 장보고는 다양한 직무 경험과 네트워크, 책임감을 바탕으로 혁신을 주도한 사례로 제시된다. ‘해상무역이 사람에 이롭도록 신라가 혁신을 이끌어야 된다’ 는 정신과 사고개념으로 임했던 장보고였다.
그는 작은 불편을 그냥 넘기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려는 집요함, 장보고의 그 반복이 결국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진정한 혁신은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실패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하지 않고 도전정신을 키웠던, 실패를 감당할 수 용기를 갖고 실행했기에 그는 해상무역의 판도를 바꿨다. 생각은 많을수록 무거워지고, 행동은 할수록 추진력(推進力)을 얻었던 장보고, 신라를 바꾸는 혁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
●청해진=청사진
장보고는 “성공의 과거 공식에 매몰된다면,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들 것” 이라며 성장전략(成長戰略) 대전환을 강조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당나라에서 신라에 들어와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은 신라 정치적 안정 속에, 튼튼한 안복 속에서 무역 등으로 경제 성장에 드라이브를 걸고 그 온기가 사회 곳곳에 퍼지도록 하겠다는 〈청해진=청사진〉 이다. 기회(機會)와 과실(果實)을 고루 나누는 모두의 성장,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와 지방, 안전, 평화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장보고는 성장의 온기가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지역에 쏠리는 〈K자형 양극화〉 를 극복하고 모두의 성장을 이끌 주역으로 해상무역교류를 지목하면서 이를 실행하기 위해 신라의 고질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처해진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국내에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해상무역(海上貿易)에 손을 된 장보고, 물품을 서로 사고파는 교역(交易)으로 ‘전 국민이 누려야한다’ 는 원칙을 세우고, 청해진 주도 성장으로 전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장보고는 취업중심에서 ‘창업중심(創業中心)’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창업정신을 길러줬다. 장보고란 이름은 ‘창업, 혁신’ 의 의미가 담겨있다. 성장의 변함없는 중심 기업은 〈청해진〉 이라고 봤다.
장보고는 “국제무역항 청해진은 신라와 동아시아의 매래성장을 여는 성장엔진” 이라며 “청해진 사업을 출발점으로 해상무역이 백성의 일상에 안착하고, 부강한 신라로 도약하겠다” 는 의지로 충실했다.
●교육적으로 장보고를 바라보면?
중학교 역사: 통일 신라 후기 인물
고등학교 한국사: 지방 호족의 성장, 중앙 권력과의 갈등 사례
현대적 교훈: 해양 주권 의식, 경제 자립, 실력주의 리더십 모델
●장보고 관련 위대한 업적, 훌륭한 발자취 최적화 태그 30선
#장보고 #궁복 #해상왕 #감의군사 #청해진 #청해진 유적 #장보고기념관 #장보고급 잠수함 #장보고위인전 #장보고 리더십 #해상주권 #해적소탕 #해상무역 #해양경제사 #해상교류 #동아시아해상권 #국제무역왕 #중계무역 #해상로망 #통일신라 #한국사속 인물 #중학교역사 #고등학교한국사 #한국사교육 자료 #우리역사 바로알기 #귀족권력 갈등 #실력기반 권력 #완도역사 및 영암역사 #산동적산촌 #법화원 이밖에도 #을 붙일 만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마무리하며...
장보고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실력과 전략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인물이었다.
그가 보여준 ▲실용주의 리더십 ▲해양 네트워크 구축 ▲정치 협상 능력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해양 주권의 중요성 ▲국제 교류의 의미, 그리고 ▲한 사람의 비전과 결단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길 수 있는 것 같다.
●장보고에 대해 더 생생하게 기술해보니
장보고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다. 한국 고유로 읽으면 ‘활복’ 이 된다. 복은 ‘어린아이(복덩이)’ 를 일컫는 옛말로 삼국유사 사복불언조(蛇福不言調)에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궁복을 풀어보면 ‘활을 잘 쏘거나 다루는 아이’ 라는 뜻이 된다. 활을 잘 다루어서 ‘복덩이’ 로 본 것이다.
기록에서도 나온 『기골(氣骨)이 장대한 장보고는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武人) 기질을 나타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복(福)을 보고(保皐)라고 한 것은 복을 두 글자로 보고 복을 ‘보고’ 로 풀어 중국식 세 글자(장보고)를 쓰게 된 것이라는 설(說)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사상과 정신과 세계관.미래관이라는 측면에서 보고, 장보고라는 한자 이름의 의미에서 찾으면 답이 나온다.
장보고는 태어날 때부터 우람한 아이였다. 7년간 영험함이 있는 건덕이라는 바위에서 치성을 들어 얻은 아이라 그럴 만도... 장보고는 풍채가 매우 큰 기골이 장대했다. 기골은 살가죽 기(肌), 뼈 골(骨)로 살과 뼈를 아우르는 말로써 ‘타고난 기골(肌骨)이 단단하다는 기골(肌骨)이 훌륭하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기골(奇骨)이 좋다, 즉 남다른 기품이 있어 보이는 골격’ 이라고 보는데, ‘장대(壯大)하다’ 는 뜻이다.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고, 꿈이 많은 튼튼한 장보고였다.
체격이 장대한, 몸집이 크고 기품(氣品)이 있는 장보고였다. 청해진에 기품을 갖춘 장대한 몸집을 한 장보고가 지키고 있어 당나라 사람들이 쉽게 남의 영토나 권리.재산.신분 따위를 침노해서 범하거나 해를 끼지는 침범(侵犯)할 수 없었다. 그가 나타나면 기절초풍했을 정도였다. 장보가 나타나면, 해적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보존하려 했다고 하니, 해적들은 장보고의 그림자만 봐도 기겁을 한 모양이다.
건장한 체구를 갖춘 장보고는 마치 초한지에 등장한 중국 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때 서초(西楚)를 건국한 군주인 ‘항우(項羽)’ , 그리고 삼국지에 등장한 후한 말 유비 휘하의 무장인 ‘관우(關羽)’ 나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인 ‘장비(張飛)’ 와 같은 인물처럼 장대(壯大)했다. 뛰어난 우두머리의 괴안(魁岸)한 장보고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가 셌다. 남달리 기풍(氣風)이 있어 보이는 골격을 갖췄다. 기혈과 골격,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체격이다.
7년간 기도로 얻은 그가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해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부모들은 장보고에 대해 이름을 활을 잘 다루는 복덩이라는 ‘궁복’ 이라 지어주고, 아들에 대해 관심과 기대가 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와 슬기가 출중했다. 장보고가 화살을 쏘는 훈련장(동백정, 활성산, 궁성산)에 가서 자주 노는 것을 보면, “이 애가 커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화살 쏘는 일을 너무 좋아해 이름은 ‘궁복(弓福)’ 이라고 지어주면서 뛰어난 기예(技藝)와 총명(聰明)함을 칭찬했다. 궁복이라는 이름 말고도 ‘궁파(弓巴)’ 라 부르기도 했다.
궁파는 활 궁(弓), 땅 파(巴)인데 파는 ‘파조(巴調)’ 의 약칭으로써 품격을 높고 깨끗하게 가지려는 행동의 ‘궁사수로서 격조’ 를 갖추라는 뜻에서 궁파라 불렀다. 궁파의 파는 길고 큰 뱀의 대사(大蛇) 말고도, 천문에서는 28수는 별자리 단위로 쓰이며, 성명(星名)은 28수의 하나를 가리키는 별자리 이름을 뜻한다. 궁복과 궁파의 비밀은 ‘별자리’ 다.
궁복과 궁파라는 이름을 가진 장보고는
“아버지, 어머니 저는 커서 장수가 되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인물이 되고자 합니다.”
“제 꿈은 당나라에 가서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선진 문명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라에서 바다도 지키고 무역에 종사하는 게 제 꿈이자 희망사항입니다.”
장보고는 기골이 장대한 만큼 생각도 깊었다. 모든 면에서 내일을 내다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두서너 번 만에 익히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의 총기(聰氣)와 예술적 재주에 신동(神童)이라고 불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노래와 춤으로써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고, 극락왕생한 이들을 기쁘게 해주는 보살의 가무보살(歌舞菩薩))의 시현(示現)이라 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보고는 자신을 낳게 해준 건덕암에서나 배를 정박한 국두암에서, 집 근처의 동백정과 인근 금정면의 훈련장이 있는 ‘활성산과 궁성산’ 에 자주 올라 활 쏘는 전쟁놀이를 즐겼고, 연습을 했다. 새벽부터 해가질 때까지 훈련장에서 지내며 수백 번 반복하며 학습하였다. 활 쏘는 연습을 시키는 궁사(弓士)들한테 틈나는 대로 기술을 익혔고, 그 당시 훈련장 궁사.사격사는 큰 가르침을 주었는데, 활 다루는 법과 말을 타는 법을 알아야하고 활 쏘는 자세, 민첩성 등을 분별하는 이른바 기예(技藝)를 완전하게 구사하며, 명사수가 되게 해주었다.
장보고는 그런 가르침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재주를 궁사수(弓射手)에 맞게 익히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다. 또한 궁 사수들의 군법(軍法)을 터득 또는 창작하고 집대성하여 큰 업적을 남긴다. 장보고는 이렇듯 노력과 공력을 쌓아 활 기술을 배운지 10년 만에 명사수에 대성하였고, 많은 권력가 민초의 사랑을 받는 명사수로서 장수(將帥)의 기질을 갖춘다. 그런 그는 국내를 떠나 당나라에 군사로서 종사하며 국토방위에 활약을 한다.
장보고는 많은 전설(傳說)과 신화(神話)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무슨 재주든 헛되이 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날아가는 새, 부른 바람, 흐르는 물, 달리는 짐승의 소리나 행동까지 귀를 기우리거나 시선을 집중해 연구와 고민, 그리고 연습을 반복했다. 즉, 모든 만물이 자신의 기개(氣槪)를 키우는 평생 연구 대상이었다. 훗날 신라 42대 흥덕왕의 총애(寵愛)를 받았던 신하들도 장보고를 ‘신예(新銳)’ 라 떠받고, 스스로 몰러간 것만 보더라도 장보고의 재주와 격조(格調)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장보고는 분명 신라시대 때 ‘상대등 제36대’ 를 역임했다는 삼국사기 등에 기록이 있음에도, 그의 출생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장보고가 5두품 이하로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한 한미(寒微)했던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로 추측한다. 그래서 그가 정말 관직에 오를만한 인물이 맞는가에 의문을 두기도 한다. 출생지가 명확하지 않지만, 장보고의 동료 〈정년〉 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아들이려 할 때 대신(臺臣)들이 장보고가 ‘해도인(海島人, 섬사람)’ 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도 장보고가 바닷가 사람임을 확인된다.
장보고가 태어난 곳은 바다와 인접한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해도인이라고 한데, 이 사실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가 태어났다고 본 완도 ‘장도’ 인가 아니면 영암 ‘선암’ 인가?
일부에서는 섬에 소나 말을 놓아기르는 설비를 갖춘 ‘목장(牧場)’ 이 있어 섬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목동(牧童)’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목동 출신은 아니다. 단지 그럴듯한 추측을 해볼 뿐이다. 근거 없는 신라귀족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청해진이 있었던 지금의 완도군 장도(長島)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6기의 무덤이 있고, 목 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장보고의 양친과 선대의 것이라는 민간전승이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사망했으니, 시신은 완도에 매장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장보고는 빈농빈어(貧農貧漁)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완도의 장도 바깥쪽 바다에서 고기잡이, 노 젓기와 수영을 배우고 활(弓)과 창(槍)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이 전설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영암 선암의 전설과는 상반(相反) 때문이다.
장보고는 같은 동향인으로서 동료이자 의형제인 1살 아래인 《정년》 과 함께 신라에서 당나라 서주로 와서 그곳의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해 ‘군소장(軍小將)’ 이 되었다. 정년은 1살 위인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이걸 두고 친구라고 기록할 정도로 매우 친한 사이였다. 장보고가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 사람들은 전해 듣기를 장보고는 정년을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둘이는 매일 붙어 다닐 정도로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둘 다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잘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그들을 대적(大敵)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을 정도로 수영에도 능했다고 할 정도로 물귀신이었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장보고는 지혜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지지 않았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방(新羅房)’ 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 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나라는 번장(番將)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꽤 개방적인 국가였다.
당나라에서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 장보고와 정년은 활을 잘 쏘고, 창(槍)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며, 그는 둘 다 서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이라는 하급 장교의 지위까지 오르는 등으로 출세하기까지 한다. 무령군은 산둥반도에 할거(割據) 하며, 당나라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 를 정벌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정번진’ 진압에 참전했다.
그러나 모종의 일을 계기로 군을 그만두고, 신라로 귀국(828년)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는 흥덕왕(興德王 3년)을 만나 신라인이 당나라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奴婢)로 매매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 말을 들은 장보고는 신라인이 당나라로 노비로 팔려 가는데, 차마 혼자 호의호식(好衣好食)할 수 없어서 그만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 이유다.
당나라에 함께 갔던 정년은 당나라에 남았는데, 훗날 정년이 당나라의 군비를 축소하는 군축(軍縮) 조치(措置)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 후에도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 이런 정년에 의해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의 무관(武官)을 그만 둔 것으로 판단한다.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 둔 이유는 정년과도 연관이 있지만,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에 침입해 사람을 잡아 노비로 팔거나 식량을 약탈해 가서, 또는 장보고가 신라에서 중국으로 무역(貿易)을 하기 위해, 이 세 가지 이유로 고민 끝에 무령군 소장이라는 훌륭한 직책임에도 그는 미련 없이 ‘무관’ 을 그만 둔 걸로 판단된다.
장보고는 신라방에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에 종사했고, 당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당시 해안 지역은 이사도와 같은 변진(邊鎭, 변방을 지키는 군영)들의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함부로 날 뛰는 발호(跋扈)로 당나라 조정에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비(奴婢)로 팔아먹는 해상에서 선박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은 도둑의 ‘해적(海賊)’ 이 들끓고 있었다.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돼 장사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런 상황을 접한 장보고는 결국 귀국했는데, 그의 나이 17세가 된 해인 805년에 당나라로 건너갔던 그는 828년에 조국 신라를 다시 찾았다. 23년 만이다. 그의 나이 40세에...
23년 만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서라벌(신라 경주)로 가서 당시 임금이었던〈흥덕왕, 42대〉 에게 당나라 해적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 명을 주면 제가 당나라의 해적들을 막겠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전하! 당나라 해적들을 제가 막겠습니다.”
“그러니 군사 1만 명을 저에게 주시길 바랍니다.”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내려 주었다.
“그자가 그렇게 하겠다면 기꺼이 군사를 보내겠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 섬 장도에 청해진(淸海陣)을 세우고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 및 무역권을 장악한다.
장보고의 청해진 대사직은 요즘 같으면, 재정경재부 정관, 외교부 장관, 산업통산부 장관, 통상교섭본부장, 문화관광부 장관과 신라 조정 경제성장수석, 안보실장 등 역할을 띤 격이다.
장보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플랜A.B.C.D로 나눠 진행했다. 플랜A는 ‘해적 소탕을 통한 해양질서 및 안정 및 안보 강화’ , 플랜B는 ‘해양로 개척 및 국제무역 확대’ , 플랜C는 ‘신라 발전과 번영’ , 플랜D는 ‘안정과 평화’ 를 주요 정책사업으로 삼았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영향으로 10,000명의 병사들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
해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원래의 취지였던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린 결과 삼국시기에선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奴隸)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무역집단(海上貿易集團)으로까지 발전해 동아시아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장보고는 중국 산둥반도에 신라인의 결집장소가 되었던 ‘적산 법화원(法話院)’ 이라는 절을 건립했고, 이 곳에서 신라, 일본, 당, 발해,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승려(僧侶)들이 머물렀다.
장보고는 신라에서 사자(使者, 명령이나 부탁을 받고 심부름 하는 사람)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王)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고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 라고 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정년 동생, 지금 신라가 혼란상태니 동생이 이 혼란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네.”
“군사를 보내줄 테니 어서 가서 반란자들을 제다 잡아 처형하게나.”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는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경험이 쌓인 정예 병력과 막대한 재력을 다시 군사력에 투자하며, 힘을 기르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며, 더 이상 중앙조정에서도 무시하기 힘든 독립 군벌(軍閥)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 김우징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군사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장보고의 도움을 얻은 김우징을 도와 왕위쟁탈전을 벌이다
개성(開城, 당 문종 때의 연호로 836년 1월~840년 12월에 사용함) ) 2년(837) 8월에 이르러 전 시중(時中, 신라 집사성의 장관직) 김우징(金祐徵)이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청해진(淸海鎭,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즉청리와 장좌리일대에 있던 신라의 군진)에 들어가 청해진 대사(大使) 장보고와 결탁하여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김양이 그 소식을 듣고 꾀를 써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의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여, 개성 3년(838) 2월에 김양이 바다에 있는 섬에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서 더불어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킬 거사(擧事)할 것을 모의하였다.
개성 3년(838) 3월에 강한 군사 5,000명으로 무주(武州)를 습격하였는데, 성 아래에 이르자 무주 사람들이 모두 항복(降伏)하였다. 그 다음 남원(南原)으로 진격하여 신라군을 만나 더불어 싸워 승전을 이루었다.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워 피곤하다고 여겨,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쉬게 하였다. 개성 3년(838) 겨울에 혜성(彗星)이 서방에 나타났는데, 광채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켰다. 여러 사람이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의 칭호를 얻어, 12월에 다시 출진하였다.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州) 군사를 데리고 왔고, 김우징은 또한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드 여섯 장군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군대의 위용(威容)이 아주 성대했는데,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북천(北川)에 이르렀다. 신라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지휘하여 맞서 싸웠고,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000기로 적진에 돌격해 들어가 적군을 거의 대부분 살상(殺傷)하였다.
김우징이 청해진을 찾은 이유 하나가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흥덕왕 사후에 전개된 왕위계승분쟁에서 김명(金明, 민애왕)의 도움을 받은 김제륭(金悌隆, 희강왕)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김우징이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찾았다.
민애왕 원년 838년 2월에 김양(金陽)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났다. 아찬(阿湌) 김우징은 청해진에 대사(大使) 장보고에게 일러 말하기를 김명은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고, 이홍(利弘)도 마음대로 군부(君父, 임금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 건데 장군의 병사에 의지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장보고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의(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勇)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용렬(勇烈)한 사람이지만,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사 5,000명을 나누어 친구인 정년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라면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긴박함을 알리면 간곡히 부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1년)은 타도하고, 839년 김우징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민애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38~839년이다. 왕의 계승을 두고 분쟁(分爭)이 치열했던 시기의 왕이다.
●장보고와 김우징의 약속
김균정은 먼저 적판궁(積板宮, 별도의 궁궐)에 들어갔으나, 김재륭 세력의 궁중 기습을 받아 김균정은 살해당하고, 자신과 태종 무열왕방계인 김주원의 중손 김양은 겨우 도망쳐 청해진 장보고에 의탁했는데, 김명 등에 복수하기 위해 장보고에게 군대를 빌리려 했고, 그 와중에 사돈(査頓) 약속을 했다.
원수를 갖고자 장보고를 찾았던 김우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했던 828년 당시의 시중이 김우징이었다. 시중은 신라 정계의 실세였던 만큼, 장보가 건의 했던 청해진 설치에 대한 정책이 결정되기 힘들었지만, 장보고와 김우징의 관계는 이미 친밀한 사이였다. 그래서 장보고의 건의사항이 쉽게 관철됐다.
이후 희강왕 김제륭이 일단 왕위에 올랐다가, 김명이 또다시 희강왕을 1년 만에 시해(弑害)하고 왕위에 오르니 민애왕이다. 김우징은 청해진 소속 군대와 김주원계인 김양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켰고, 수도 서라벌로 진격해 달벌대전 등 전투에서 정부군을 대파하고 결국 839년 1월 23일에 수도 경주에 입성해 민애왕을 시해하고 제45대 신무왕으로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종기로 승하(昇遐)하는 비운을 맞았다.
김우징은 아버지 복수도 이루었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복수를 위해 인간을 관두고 복수에 몰두하는 존재의 인생이니, 권력에 대한 욕망에 비해 왕답게 살아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간 인물이다. 김우징은 사돈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그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장보고와의 사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장보고의 수명도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흥덕왕 사후에 전개된 왕위계승분쟁에서 김명(金明, 민애왕)의 도움을 받은 김제륭(金悌隆, 희강왕)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아버지의 원수, 민애왕을 기필코 처단하겠다면서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를 찾아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장보고는 알았다면서 민애왕(44대, 838~839년)을 시해하려는 모의를 했다.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장보고 딸과 김우징의 아들(김경응)과 혼인(婚姻하기로 약속하여 문성왕(재위기간 839~857)이 장보고의 딸을 맞아들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微賤)하다 하여 반대하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조정 신료의 미움과 귀족들의 시기에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841년 3월에 일길찬 홍필, 847년(문성왕 9) 5월에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849년(문성왕 11) 9월에 이찬 대식과 대흔 등이 발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장보고는 김우징과의 약속을 했는데, 김우징이 말하기를
“제가 하고자 하는 일과 생각이 있는데, 이 제의를 들어준다면 그 은혜를 반드시 갖겠소!”
“좋습니다.”
“원하는 데로 해주겠습니다.”
“그 일에 앞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 여식(女息)을 댁의 자식과 혼인하게 해주십시오.”
김우징은 이런 제안에
“알겠소!”
“제 자식과 결혼시키겠습니다.”
장보고와 김우징은 사돈관계로서 발전하게 된다. 김우징(신무왕)으로 오른 뒤 1년 만에 승하자, 이어 문성왕이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었다.
국도(國都, 한나라의 수도)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생(宰相)으로 삼고, 군사담당은 정년에게 맡겼다. 정년은 5개월이 지난 838년 12월에 다시 출격해 달벌(대구)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 명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서도 대승을 거둬 병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키는 등 귀염을 토했다.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44대)을 추격해 시해(弑害)하고는 김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개성사년(829)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들었는데, 장보고가 신라 왕자와 협심해서 신라국(新羅國)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고 했다.
하지만 옹립한 신무왕(김우징)이 1년도 안 돼 승하하면서 이후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食邑, 국가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장보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지키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 본인의 딸과 혼인하겠다는, 사돈이 되겠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했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신무왕으로서는 장보고와 사돈관계가 되어 연결을 단단히 함으로써 장보고라는 거대 세력의 힘을 앞세워 왕권을 높일 수 있었고, 장보고 또한 왕가 일원이 되고, 왕가를 우군으로 삼아 청해진을 중심으로 친청해진(親淸海振) 정책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윈-원 역속이었다. 그러나 장보고가 기대와는 무색하게 그 신무왕이 약속을 지키기 전에 금방 승하하여,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후임인 문성왕에게 앞서 신무왕과 했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신무왕이 왕에 올라 궁복(궁파)와의 약속대로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리려 했지만, 1년 만에 서거해,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이 궁복의 딸을 차비(次妃)로 삼으려 했으나, 이마저도 이루지 못했다. 신하들이나 귀족들이 극구 반대하고 나서서다.
“궁파는 미천한 사람입니다.”
“그 딸로 바를 삼으시겠다니 안 될 일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신하들의 반대로 왕은 대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진(陣)을 치고 있었다.
원래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단념하고 말았다.
장보고는 846년(문성왕 8년)에 염장한테 암살당했다.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습니다” 라고 했다. 장보고는 “너희들 때문에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百官, 벼슬아치)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은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잔뜩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해있던 그의 목을 베어 암살하였다. 귀족들이 장보고를 시기하고 없애고 싶어 하자, 염장은 “장보고를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귀족들의 부탁을 받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단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805년)에 당나라로 건너갔던 그는 40세 때 당나라에서 귀국(828)해 청해진 대사로 근무하다 대사직 18년이 되는 해인 11월, 그의 나이 58세 일기로 사망하는, 신라의 큰 별이 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에 모두가 놀랐고, 신라는 일시에 슬픔에 잠겼다.
장보고와 염장의 대면을 재구성해보면...
장보고 휘하의 무장으로 838년 장보고가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하여 청해진에 피신해 있던 김우징(45대 신무왕)을 도와 반격군을 판결할 때 이순행.정년 등과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나주)에서 중앙군을 격파하고, 다시 달구벌(達句伐, 지금의 대구)에서 김흔(金昕)이 지휘하는 민애왕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도에 입성해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담한 무주별가를 역임한 장수 염장(閻長)이 어느 날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를 찾았다.
염장은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의 차비(次妃)로 세우려고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자 중앙정부에 가담했다. 그런 그가 지령을 받고 완도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와 대면했다.
장보고는 한 때는 자신과 함께 했던 사람이, 어느 날 변심하며 중앙정부(조정) 쪽으로 기울고 하여 배신감을 가질 정도로 염장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다.
“저 놈이 나를 배신하다니”
“간신배 같은 놈!”
“너는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고야 말겠다.”
보기도 싫으니 어서 꺼져라 이놈!“
~라고 염장에 대한 안 좋은 인식과 이미지가 컸다.
그런 자가 염치불구하고 뻔뻔스럽게도 찾아왔으니 반가움보다는 미움이 앞섰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염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장보고 앞에서
“장군! 저 염장이옵니다.”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뵙게 돼
반가울 따름입니다.“
“행어 저 염장을 좀이라도 미움을 가졌거나,
노여움이 있었다면 넓은 아량을 포용해주십시오.“
~라고 하자 장보고는
“넌 아주 나쁜 놈이다.”
“네가 무슨 염치로 나를 찾다니”
“꼴도 보기 싫으니 가거라! 어서”
그러자 염장은
“장군! 너무하십니다.”
“멀리서 찾아온 저를 그렇게 대하십니까?”
“서운 섭섭합니다.”
“장군! 그건 오해입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전 그때 조정 간신들이 그랬을 뿐이지 전 아닙니다.“
“오해를 푸십시고 진정하십시오.”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렇게 사정하다시피 말한 염장에 마음이 깊은 장보고는 염장의 해명에 사실로 믿고, 염장을 안으로 모신다.
주안상을 건하게 마련하여, 염장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한다.
“이게 얼마만인가?”
“반갑구려!”
“멀리서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구려!”
“오늘 길 불편하지 않았는가?”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큰 맘 먹고 찾아줘 감사하오.”
“자네를 만나니 예전 생각이 문득 들구려!”
“이순행.정년이랑 군사를 무주로 데리고 가서
큰 공을 세운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네.“
“자 한 잔하세!”
둘이는 밤새껏 술을 마셨다.
변장술을 하고 온 염장은 장보고에게 온갖 것 이부와 아량을 떨면서 둘이서 술을 맞짱떴다.
“장군님이 청해진에서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듣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매우 훌륭한 장군으로 보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신라의 큰 인물이라며 장군님을 으뜸으로 봅니다.”
“왕께서도 아주 훌륭한 신하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듣기 좋은 말로 비유를 맞추니 장보고는 술이 술술 넘어갔다. 그는 기분 좋다면서 오로지 염장의 말에 빠져들었다.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잇다는 생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달콤한 애기로 칭찬일색이니 염장의 권모술수(權謀術數)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장군! 많이 취하셨습니다.”
“저를 만나니 매우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저도 장군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리움이 많았습니다.”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뵈니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장군! 제가 술을 따라드리겠습니다.”
한 잔 두 잔, 염장이 따라 준대로 마셔됐다.
염장은 일부로 술을 마시게 하고자 마음먹고 자꾸 술을 권해됐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염장이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런 줄 알고, 주는 대로 마셔됐으니, 취할 수밖에...
몸을 못 가룰 정도로 장보고는 술에 떡이 됐다.
그런 장보고를 본 염장은 본 마음을 드러내는 데, 술을 마시면서도 시선을 장보고의 칼에 두었던 염장은 상대를 잘 못 알아볼 정도로 술에 취한 장보고를 향해, 그 칼을 들고 단번에 장보고의 목을 쳤다.
염장과 나눈 술은 ‘변장술’ 이었다.
염장의 꾀에 넘어간 장보고, 그를 죽이겠다고 찾았던 염장은 장보고 사살작전, 미션에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경주로 달려갔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가기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전하! 염장이옵니다.”
“전하께 긴급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간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왕은 “그래 말해 보거라”
“장보고가 불충한 일을 일으키려 합니다.”
“제가 가서 그를 제거하고 오겠습니다.”
왕의 간청에 기꺼이 허락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자 청해진에 온 것이다.
왕의 뜻을 받들고 청해진에 들어온 염장, 갔다. 인도자를 통해 장보고에게 알렸다.
“내가 임금에게 한 원망이 있어
장군에게 신명을 보전코자 하오!”
장보고가 전해 듣고 크게 성을 냈다.
“너희들이 임금에게 충동질하여 내 딸을 폐해 놓고
어째서 나를 찾는 건가?”
그러자 염장은 다시 알렸다.
“그것은 다른 중신들이 간한 것이지
저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소이다.”
“저를 의심치 마십시오!‘
장보고는 말을 듣고 그제야 염장을 청사로 인도해 들이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는 웬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답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바가 있어,
그대의 막하(幕下)에 몸을 던져
앞으로의 화를 면하려 하오!”
장보고는 염장의 말에 잘 되었다면서 술자리를 벌이고 무척 기뻐했다. 주안상에 마련된 술, 그 술이 염장의 변장술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염장은 장보고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장검을 집어 그를 베어버린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던 것,
이러자 청해진은 일시에 긴장감이 커졌다. 생각지 못한 끔직한 일이 벌여졌기 때문이다. 장보고 휘하의 군사들은 놀라고 질려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궁궐에 이르러 복명했다.
“전하! 염장이옵니다.”
“분부대로 해치고 왔습니다.”
“장보고의 목을 베었습니다.”
왕은 염장의 성공을 기뻐하며, 그에게 상을 주고 ‘아간(阿干)’ 의 벼슬을 내렸다. 아간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등 관계의 제6위였다.
특히 상당히 불안을 느끼며 장보고를 좋게 안 봤던 대신들이나 귀족들은 그의 사망 소식에 반겼다. 그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위기의식을 느꼈던 사람들은...
“드디어 헤쳤구나!”
“걸렸던 음식이 내려간 듯하여라!”
신라는 온통 기쁨의 탄성이 터졌다. 특히 귀족들에게서
“저 원수 같은 장보고를 죽이다니”
“정말 잘 했어!”
“저놈을 나뒀으면 우리는 힘들고 편치가 안했을 텐데...”
“우리가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을 거야!”
“천만다행이네!”
“귀족인 우리의 삶보다 그 놈의 삶이 더 밝아졌을 건데...”
“천민한 놈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
“천하의 장보고라도 나는 싫어”
“그자를 그만 두면 절대 안 돼!”
“우리 신라의 망신이고 부끄러움이야!”
장보고의 세력에 상당히 신경 쓰였던 분들은 드디어 그가 처참(處斬)하게 당했다는 것에 반기는 현실, 신라의 한 단면은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고, 시사점을 주고 있어 ‘역사는 진실로 말하고, 정도로 걸어야 만이 그 역사는 빛난다’ 라는 것을 배우게 한다. 또 ‘이로움보다는 의로움으로 대했을 때 나라는 평온해진다’ 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상류층(上流層)이 득세를 하고 있고, 부유층(富裕層)과 상류층도면 출세를 하게 된다는 의식이 강하고, 이것을 우린 보수층(保守層)이라고 하기도 한데, 그들만의 세상, 자기만의 독불장군과 호의호식하고 군림하려고 한 것을 보여주거나, 잘 난놈, 못 난놈으로 구분하는 것 같아 슬프다. “나보다 못한 놈이 감히 어디를 넘봐!” 라는 불신주의, 이게 대한민국의 역사요, 현실이다.
만약 장보고가 귀족(貴族) 출신이었었다면, 장보고의 생애는 알려진 것보다 더 위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딸도 왕비가 되어, 신라의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불러들었고, 역사를 새롭게 썼을 것 같다.
장보고의 출세가도, 결국 암살(暗殺)이라는 비극의 역사로 기록되고 말았다.
장보고라는 한 인물의 출현은 왕가나 대신, 귀족들에게는 그리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보고가 아무리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위상을 높였다고 해도, 그들은 장보고가 커가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위기의식을 가졌다.
“장보고가 신경 쓰여 정말!”
“그자가 득세하면 우리는 다 죽어!”
“우리의 삶이 위태로워져!”
골품제도 사회의 신라에서는 평면출신이 득세하는 것은 용납을 못했다. 오로지 귀족들만 왕이 되고 중책을 맡아야한다는 개념이 강했다. 평민출신의 등장은 출신성분으로부터 충돌이다.
아무리 국가 위상을 떨쳤어도, 왕가나 귀족들은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장보고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만약 그가 정권을 잡고 왕권마저 장악하게 된다면, 골품제도는 사라질 것이며, 자신들의 가문은 박살나고, 목숨마저 보전치 못할 것이라는 귀족들은 장보고를 두려운 상대로 여겼다.
이로 인해 신라사회는 혼란만 가중됐고, 왕권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수록 신라는 발전과 번영보다는 쇠퇴와 나락의 길로 빠져드는, 문제를 야기하는 귀족사회의 단면을 보여줬다. 장보고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해양무역(海洋貿易)이라는 국제적인 교역과 국가 안보에 이바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안, 즉 갈등을 야기하고, 권력다툼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낳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견제 세력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자꾸 장보고에 견제구를 날린 사람들의 득세, 태클을 거는 분들의 강인함에 그만 완전한 사업구도를 그려내지 못했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18년간의 위대한 업적(業績)과 공(功)을 세웠는데.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더 자신의 꿈을 펼쳤더라면, 아마 신라는 천년의 역사를 더 이어갔으리라 본다. 왕위계승쟁탈전, 골품제도 등을 개혁하거나, 신라를 국제자유무역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장보고에 의해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처럼 70%는 진행했다고 본다, 확장정책+보호정책+제왕정책
하지만, 그는 배고팠다. 채울 것들이 많았는데, 이 어찌 조정에서 보낸 염장이라는 자에게 암살당하다니, 이것은 장보고의 운명이 아닌 신라의 운명을 말한 것이다. 장보고 사망 후 89년 뒤에 신라는 태조 왕건에 의해 패망(935년)했다. 통일 후 268년 만이다. 신라는 935(BC 57~AD 935)년간 존속했다.
장보고는 궁복(弓福)에서 장보고(張保皐)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분명했다. 나라에 이바지하는 일인데, ‘신라중심, 국민중심’ 사상이었다. 이런 일을 하려고 우선 해양에 꿈을 두었던 것,
그는 당나라에 가서 군인정신을 길렀다. 그런 후 고국으로 돌아와 “서라벌(신라의 옛 이름)의 나의 조국이자 미래이다” 라며, 그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청해진(淸海鎭)이라는 ‘군사기지(軍事基地)와 무역기지(貿易基地)’ 다.
그가 생각한 대로 일들이 착착 진행됐었다. 해양 질서를 바로 잡았고, 해양로를 개척했고, 국제자유무역항으로서의 활발하게 물품을 교환했다. 당연 나라에 크게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그런 훌륭한 일을 해냈으면서도, 장보고는 만족감을 그리 갖지를 못했던 것,
그가 바랐던 것은 지역 사회와 같이 Win-Win 하는 것,
그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
장보고는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희로애락이 없을 수야 없지만, 그래도 나로부터 인한 것이 아니라면, 외부로부터 나를 경계하는 아픔은 없어야하겠지? 하며 나는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내가 맘먹기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면서 그는 평민이라는 모습보다는 귀족층 그 이상의 이상을 갖고 품위를 유지했다.
그는 절대 굴하지 않고 나는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고, 나을 수 있다며, 힘들고 어렵고 어찌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가야만 기회가 닿으면 그동안까지 힘써온 그 근력이 바탕이 되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장보고는 흩뿌리는 비와 먹구름을 보니 이제 장마철이 시작되나 보다. 그래 비록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계속 내린다 한들 그래도 저 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고, 계속되는 장마철에도 먹구름 위로 태양은 계속 뜬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나보다 일찍 떠나 슬픔도 생겼지만, 빈자리가 생겼지만, 그리움도 커지겠지만, 이젠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그 위대한 것들을 본받고 간직하면서 두런두런 옛 이야기꽃을 피우리라. 그래 그렇게 건강하게 살다가 환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장보가 말한 내일은 내(장보고) 일(신라 부흥)이 아닐까 한다. 오늘 비록 부족한 면, 못 이룬 일로 마음이 상하지만, 내알은 내일의 태양이 뜨기에 오늘 어둠이 있었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하리라는 것은 아니기에 오늘 태양을 가린 구름에 원망하지를 않았다. 항상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신라의 빛,
황금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 신라인들의 ‘마음의 빛’ 에 빛난다. 생명의 빛, 삶의 빛, 축복의 빛이 반짝인다. 온 세상이 찬란하게 다가온다. 흐뭇하게 바라본다. 마음에 이는 물결이 온 세상에 출렁인다. 오직 내 마음하나를 책임지기에 온 세상은 그렇게 나를 비추고 있는 은혜이다.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여 그 아픔과 고통이여, 내가 나를 찌른 피 흘리는 위대한 나는 부활의 기쁨을 맛본다. 현실의 신앙처 그 신라품으로 백성품으로...
그 나의 세상 속으로...
나를 위한 최고의 환경, 최고의 세상 신라
“나를 받아주고 길러준 은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신라이기에 먹구름이 있어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며 항상 밝은 마음으로 지냈다.
“내가 그 앞에 기쁨이 되겠습니다.”
“행복이 되겠습니다.”
“빛을 돌려 그 효를 다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큰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마음의 난, 복잡다단한 일과 고통이 참으로 고맙다.”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신라의 빛, 역시 찬란하다.”
“내 마음의 빛이 더해...”
신라의 빛은 장보고의 빛이 더해 찬란하다. 그의 착한 행동에 감동한 태양이 장보고에게 선물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라 빛이다. 장보고가 가져온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바로 〈희망〉 이라는 씨앗이다. 산라인들에게 태양에 의해 빛난 ‘별빛 사탕’ 을 나누어주며, 미움을 씻어주는 장보고의 모습은 한 인간의 선한 영향력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장보고가 반짝거렸던 것은 황금의상을 입어서가 아니라 〈희망 옷〉 을 입어서다. 희망 옷은 태양 빛을 받은 별빛, 은하수를 수놓은 듯 은은하게 빛났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별들이 보석처럼 쏟아졌다. 장보고의 머리 위에는 하늘이 준 은빛 왕관이 씌워졌고, 손에는 어두운 곳을 안제나 밝혀줄 황금 지팡이가 들렸다. 이것은 단순히 멋진 의상이 아니라, 장보고가 활동 중에 보여준 ‘나눔과 희생’ 이 만들어낸 기적의 선물이었다. 장보고는 한동안 당나라에서 머물다가 신라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희망(希望)-Hope〉 를 전할 준비를 마쳤다.
장보고가 희망이라는 지팡이를 흔들자 신라 사람들의 거칠어진 손바닥 위에 작은 별빛 사탕(사랑과 희생)이 하나씩 떨어졌다. 그 사탕을 먹은 사람들은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심의 ‘미움과 시기’ 가 사라지고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날 이후 장보고의 따뜻한 사랑과 희망으로 전하는 온정(평온함, 활기참, 부강함)의 손길이 이어져 신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환한 나라가 되었다. 장보고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밤하늘의 달님.별님과 인사를 나누며, 매일 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꿈을 꾸곤 했다. 장보고의 이야기는 은빛, 금빛 길을 따라 지금도 우리 곁을 비춰주고 있다. 신라의 빛, 희망의 빛으로...
장보고의 나라사랑, 국민사랑, 그리고 희생은 욕심이라면 욕심(慾心)이다. 야욕이 컸다면 아주 큰 야욕(野慾)이다. 야망(野望)을 불태웠던 그다. 장보고라는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노력했고, 오로지 나라를 위해 헌신(獻身)하겠다는 마음에 그는 잠을 설치기를 밥 먹듯이 해됐다.
그의 나이 불혹(40세), 지천명(50세), 장년(50~64세)에 들어서도 그는 식욕이 왕성했고, 활동력이 뛰어났다. “그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가?” 라고 감탄할 정도로 그는 팔팔했다. 장보고의 ‘의기충천(意氣衝天)’ 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나 기개(氣槪)가 뛰어났다. 장보고의 꿈 실현에, 그는 뜻한 바를 이루어 만족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모양을 하는 등 ‘의기양양(意氣揚揚)’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난 아직 배고프다” 라고 해됐다. I'm still hungry.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떠오르며, 몇 번이고 부르면서 “나 장보고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라고 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생각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라’ 는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난 아직 배고다’ 라고 해됐다.
장보고는 ‘난 아직 배고프다’ 라고 했던 것은 단순히 하루하루를 그냥 현상유지를 바라거나,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살지 않으며, 또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는 것보다 현재보다 나은 ‘개선태도(改善態度)와 문제의식(問題意識)’ 을 갖고 생활해갈 것을 요구하는 의미로써의 그런 말을 해된 것이다.
배고픈 자 장보고, 그는 음식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픈 게 아니다. 음식은 충분했지만, 진짜 배고픔을 느끼게 했던 것은 ‘지식적(知識的)이고 정신적(精神的)’ 으로 배가 고팠던 것이다.
장보고는 그랬다. “내가 모든 것에 만족해서 배고픈 줄을 모른다면, 나는 다 끝나는 것이다. 더 바랄게 없는 꿈도 희망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다.”
난 배부르면 안 된다.
끊임없이 배고파야 한다.
그래야 무언가를 구하게 된다.
장보고는 절대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배고파했다. 그리고 끝까지 어리석은 사람이 되자고 했다.
장보고는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진리나 법칙 등을 파고들어 깊이 연구한 ‘탐구(探究)’ 하고,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갈구(渴求)’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어떻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아갔다. 그래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라고 한 것이다.
무척 배고픔을 가졌던 장보고는 그가 꿈꾸는 신라,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졌더라면, 신라 천년이 아니라 〈신라 2천년〉 이 됐을지도...
5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장보고, 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통곡하오이다.”
“마냥 슬프도다.”
“당신이 그립도다.”
“당신이 떠난 뒤 신라도 89년 뒤 사라졌습니다.”
“당신이 10년만 더 신라에 머물렀다면,
아마 신라의 역사.문화.경제.정치는 달라졌을 겁니다.“
“안정된 신라, 평화로운 신라, 부강한 신라로
영원했을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한 인간의 좌절, 끝난 것이 아닌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가슴에 장보고라는 한 인물을 새기고 있다면...
진정한 ‘노벨 평화상감’ 은 해상왕 장보고가 아닌가 한다.
장보고의 승승장구는 18년 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는 〈넘어서-Go Beyond〉 라는 말을 새기고 ‘신분(身分)을 넘어서, 평민(平民)을 넘어서, 세력(勢力)을 넘어서, 권력(權力)을 넘어서, 경계(境界)를 넘어서, 장벽(障壁)을 넘어서, 지역(地域)을 넘어서, 문턱을 넘어서, 사상(思想)을 넘어서, 제도(制度)를 넘어서, 시대(時代)를 넘어서 그리고 신라(新羅)를 넘어서’ 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관철하려 했고, 나라를 국제무대로 한 단계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귀족층처럼, 왕가들처럼 군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45대 흥덕왕(김우징)이 1년 만에 서거해 그의 진출가도는 멈춤 했고, 결국 조정과 귀족들에 의해 그만 암살(暗殺)이라는 죽음의 비극(悲劇)을 맞아 ‘넘어서’ 라는 글씨 가슴에 새김, 생을 넘어 죽음으로의 넘어서가 돼버려 꿈도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장보고의 역사를 넘어서 신라의 역사로가, 신라의 빛을 넘어서 어둠을 찾는 여정이 된 듯하다.
'초월(超越)-Transcend' 하려 했던 것도 한계에 부딪혔다. 천하의 장보고였지만, 그 천하는 청해진에서 머물렀고, 더 이상 엑세스(excess)의 입장(入場).접근(接近).초과(超過), 즉 물리적.심리적 등의 접근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조직력.지지율과 전략적.수적 열세로 힘이 부쳤다.
●장보고 손에 쥔 카드들
장보고는 17세에 당나라로 갔는데. 메이저 타로카드 〈17번 스타 카드〉 를 선택한 것이다. 이 카드는 ‘어두운 밤하늘에 큰 별이 반짝’ 이고 있다. 크게 반짝이는 별은 강한 긍정의 에너지를 의미한다. 스타 카드는 해결되지 않았던 일이 해결된다. 스타 카드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스타 카드는 악의가 적으며 순수하다.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고 성향이 밝으며, 본인 자체로도 긍정적인 사람이다. 걱정, 불안함과 거리가 멀며,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려고 노력한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타인에게 인기가 많다. 스타 카드의 강물은 해외를 뜻한다. 실제로 해외에 나갈 일이 생길 수 있다.
어둠 속에 빛나는 희망의 신호가 바로 17번 스타 카드다. 어둡고 불안정한 밤하늘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별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밤하늘의 큰 별, 어둠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희망과 에너지가 크고 밝은 미래의 상징인데 장보고는 17세 나이에 꿈을 펼치기 위해 희망의 당나라로 떠났다. 그는 별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취한, 희망을 직ㅈ버 손에 쥔 상태의 꿈과 비전을 향한 준비 완료했다. 이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를 맞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좋은 결과를 낳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방향성을 찾아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시작을 암시했다.
별 카드의 긍정적 해석으로 희망적 미래, 내면의 빛 발견, 영감과 직감 강화, 스타성 획득, 인정받는 시기, 자신이 이룬 것을 세상에 드러낼 준비 완료를 해냈다. ‘어둠 속에서 별은 반드시 빛난다’ 라는 17번 스타 카드다. 17세 나이에 당나라로 떠남, 장보고는 17번 스타 카드를 쥐고 당나라에서 내밀었다.
장보고는 1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40세까지 23년간 머물렀다. 마이너 아르카드 〈23번 완드〉 는 지팡이의 여왕으로 매력, 안정, 정열과 신념, 강한 자신감, 순응성, 관대함, 온화함, 배려심, 존경, 동정심, 이해력, 긍정적인 에너지와 축하의 시간을 상징한다. 타로의 완드 슈트는 일반적으로 창의력, 열정, 의지력과 관련이 있으며, 불의 원소와 연결되어있다.
내 개의 지팡이(완드)는 견고하게 서 있어 안정과 기초를 의미한다. 내 개의 완드가 만드는 구조는 집이나 성문을 연상시켜 안전하고 보호받는 환경을 나나낸다. 공동체를 의미한다. 카드의 상단에 걸린 꽃과 과일의 화환은 풍요로움과 자연의 선물을 나나내며, 기쁨과 만족의 시기를 암시한다. 화환 아래 춤추는 두 인물은 조화와 기쁨을 나누는 관계를 상징하며,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를 기념하는 것을 나타낸다.
배경의 성과 집들은 공동체와 가정을 상징하며, 이 카드가 나타내는 안정감과 기쁨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공동체적 영역에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이 카드는 성취, 안정, 사회적 인정, 그리고 즐거운 사건이나 모임을 예고한다. 생활의 안정과 확고함을 의미한 23번 완드 4 카드, 화합과 지지의 분위기를 낳는, 완드 4 카드 노란색이 태양을 연상시키며, 긍정성, 활기, 기쁨,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노란색은 또한 창의력과 개방성을 상징하며 완드 4 카드에서는 이러한 긍정성 에너지가 사회적 기쁨과 공동의 성공으로 이어짐을 나타낸다.
이런 23번 완드 4 카드를 쥐어 당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을 누렸다. 완드 3 카드마저 잡았으니 리더십과 파트너십, 협력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상황을 그려내며, 자신의 삶에서 활발한 확장의 시기를 겪었으며, 새로운 경험을 향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과 비전을 바탕으로 더 넓은 세계로 눈을 돌려 장보고라는 한 인간을 세계인 장보고로 부각시켰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23년 동안 머물다가 그의 나이 40에 신라로 들어와 전남 완도에서 청해진을 설치하며 18년간을 보냈다. 마이너 아르카나 〈40번 뇌수해 카드〉 는 ‘문제 해결과 해방’ 을 상징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해결의 길은 존재함을 일깨운다. 긴장과 억눌림에서 벗어나 흐름이 풀리고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전환점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얽힌 매듭을 풀며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든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안고 있으니,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마주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라는 말한 것으로, 곧 해방과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암시이다.
장보가 나이 40에 청해진 대사를 맡아 군사기지와 무역기지라는 큰 사업을 펼쳤으니 해적 소탕으로 질서를 유지했고. 튼튼한 안보 속에서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했었다. 이게 ‘40번 뇌수해 카드’ 를 잡았던 덕택이 아닌가 한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18년간 활동 중에 암살을 당했는데, 타로카드 〈18번 달 카드〉 를 드는 모습이다. 달 카드의 상징과 메시지, 달 카드가 달빛 아래 파도가 치는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사람 또는 동물의 그림이 그러져있듯이 이 카드가 나오면 많은 분들이 불안해하고 걱정을 한다. 마치 장보고가 18번 달 카드를 쥐는 모양새다. 이 카드는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 혼란스러움 등을 상징한다. 카드 그림에는 초승달이 떠 있는 어두운 밤에 개가 짓고, 두 개의 탑 사이에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이 그러져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나타낸다. 이런 18번 달 카드가 장보고에게 쥐어지게 한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손에 ‘18번 달 카드’ 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재적 위험이나 불안 요소가 있음을 경고했고, 예상치 못한 변화나 불확실성이 나타날 수 있음을 암시했다. 현재 상황이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냈다. 갈등이나 대립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정말 몰랐을까? 자신에게 18번 달 카드가 뽑힐 것이라는 걸, 18번 달 카드가 나왔을 때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데, 안타깝게도 전혀 눈치체지 못했던 그였다. 18번 달 카드 같은 안 좋은 카드를 뽑지 않으려면, 마음을 집중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방심해 결국 자객 염장이 노렸던 18번 달 카드를 뽑았으니...
그렇게. 그렇게, 어둠을 넘어서 빛을 찾는 여정은 멈추고 말았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재직하면서 18년 근무로 58세에 운명(殞命)했다. 타로카드 58은 ‘마이너 아르카나(검/소드) 5번째 카드’ 로 ‘불안.압박감이나 기쁨’ 을 나누는 메시지 등으로 해석된다.
주역타로 보면 ‘58번은 택택태’ 로 ‘기쁨을 나누면 더 커진다’ 는 메시지 강조한다. 마이너 아르카나(검/소드) 5번째 카드로 보면 ‘자존심의 상처.힘 부족.실패 가능성’ 을 상징한다. 라이더 웨이트(검) 9번째 카드로 보면 ‘불안.걱정.죄책감’ 을 상징한다.
소드 9는 ‘불안.걱정.죄책감.압박감.심리적 긴장.밤에 드는 생각’ 들을 상징하는데, 실제 상황보다 머릿속에 문제가 커지는 시기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에 갇히기 쉬운 상태를 보여준다. 현실의 문제보다 심리적 압박이 더 크게 작용하며, 미음의 휴식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임을 알려주는 카드다. 걱정이 많아지고 생각이 꼬이며 마음이 쉽게 지치는 상태이다.
소드 9+마법사→생각이 많아 행동이 늦어짐. 소드 9+여교황→혼자만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소드 9+황제, 책임감에서 오는 압박 증가, 소드 9+교황→기준과 규범에 대한 부담, 소드 9+연인→관계 선택에 대한 후회와 고민, 소드 9+전차→블안을 안고도 밀어붙이는 상황, 소드 9+정의→스스로를 지나치게 평가함, 소드 9+절제→감정 조절이 필요한 시기, 소드 9+악마→불안에 집착하는 패턴, 소드 9+탑→충격적인 생각과 불안 폭발, 소드 9+달→불안과 상상이 증폭됨 이런 소드 9 카드를 잡았다. 만약 소드 9+태양 카드를 들었다면 걱정이 해소 되고, 또 소드 9+ 별 카드를 들었다면 걱정 속에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비쳤거나, 소드 9+죽음 카드를 손에 쥐었다면 불안 끝 심리적 정리가 됐을 것이다.
사실 장보고는 〈58 중택태 카드〉 를 잡았다. 중택태(重澤兌)는 주역에서 기쁨.즐거움.소통을 상징한다. 이 카드는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재능이나 끼를 발산하고, 그를 응원하는 힘이 되어주는 모습이다. 중택태 카드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자신만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면서 리더, 즉 주도권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주위로부터 환호를 받게 된다.
나이 58세에 들어 기쁨으로써 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는 ‘58번 증택태 카드’ 를 들었던 장보고, 그는 청해진을 통해 해양무대 위에서 자신의 끼와 재능을 마음껏 표현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기 때문에 너무 자만하지도 즉흥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그는 방심했다. 그리고 말의 파급력이 있다 보니 허황된 말이나 가볍게 내뱉는 말을 조심하고 자중해야 화를 면하는 데, 그는 순간 실수를 저질렀다. 염장을 믿고 쉽게 말을 건넸던 것이다.
중택태의 태(兌), 태는 형(亨)하니 이정(利貞) 아니라. 태는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말이 많아지고, 소리 내어 웃으며 기뻐하는 데, 모든 것이 입(口)과 관련이 있다. 중택태 카드의 태괘(☱)는 위에 있는 음(陰) 하나가 아래 두 양(陽)을 기쁘게 해 주므로 형통(亨通)한 것이다. 하지만 기쁘고 형통한 것도 남에게 피해나 고통을 주면서 느끼는 기쁨과 형통이라면 이롭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기쁨이란 나만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여민락(與民樂)’ 의 마음이다. 그런데 장보고와 염장의 만남에서 누리는 기쁨은 괘가 서로 다름이었다. 한 음이 두 양의 위로 나아가니 기쁨이 외면에 나타나는 것인데, 두 분들은 그런 태괘(兌卦, ☱)를 들지 않았다. 그 장보고는 태괘(兌掛). 염장은 23번 산지박(山地剝-䷖)을 카드를 내밀었다. 대홍살(大薨殺)이다. “너는 더 이상 안 돼 멈춰! 죽어야해!” 라는 경고성이자 위협이었다. 주역 64괘 중 23번째 괘로, 겉껍질이 벗겨지고 쇠퇴가 시작되는 위기의 때를 나타내는 산지박, 상괘는 산, 하괘는 땅으로, 산이 땅 위에 붙어 있지만 아래가 꺾어 무너지는 모습이다. 박(剝)은 깎다. 벗겨내다. 떨어뜨리다. 두드리다. 박탈하다. 두 분들은 그런 태괘(兌卦, ☱)를 들지 않았다. 그 장보고는 태괘(兌掛). 염장은 23번 산지박(山地剝-䷖)을 카드를 내밀었다. 대홍살(大薨殺)이다. “너는 더 이상 안 돼 멈춰! 죽어야해!” 라는 경고성이자 위협이었다. 주역 64괘 중 23번째 괘로, 겉껍질이 벗겨지고 쇠퇴가 시작되는 위기의 때를 나타내는 산지박, 상괘는 산, 하괘는 땅으로, 산이 땅 위에 붙어 있지만 아래가 꺾어 무너지는 모습이다.
박(剝)은 ‘깎다. 벗겨내다. 떨어뜨리다. 두드리다. 빼앗다. 약탈하다.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다. 박탈하다. 상처를 입히다. 헤치다. 쫒다. 쪼개다. 논박하다. 줄다’ 로 해부한
다는 의미다. 그래서 산지박은 산천초목이 황량한 가을을 의미한다.
산지박은 곤하간상(坤下艮上)으로 곤은 땅, 간은 산이다. 모두 토(土)에 속에 그 질은 같지만 형체는 평지이고 높은 산이다. 상을 보면 평지 위에 산이 높이 있는 것으로, 초효부터 5효까지의 음(陰)은 흙이 쌓여있는 것이고, 상효의 1양(陽)은 산꼭대기의 정상이다. 산꼭대기는 끊임없는 자연의 풍화작용을 받아 낮아져 수평으로 나아가니 이러한 상을 취해 이괘를 박(剝)이라 했다. 산지박의 박(剝)괘는 6양의 건위천의 초효에 1음이 출현한 천풍구(天風姤)고 점차 음의 세력이 증가해서 천산둔(天山遯), 천비부(天地否), 풍지관(風地觀)이 돼 드디어 상효 1양 하나가 무너지기 일보직전 단계가 산지박(山地剝)이다.
음이 자라 양을 깎아내려 쇠퇴와 붕괴의 극단적 상황을 나타낸다. 박상이부(剝床以腐) 흉(凶), 즉 침상은 무너졌고, 이제 살갗에까지 손해가 미친다. 상(床)이 깨어져 부서진다는 것은 ‘눈앞에 재양(災殃)이 닦친다’ 는 뜻으로, 상은 사람이 인식하는 곳인데, 상이 부서지게 되면, 사람의 몸에 미치고 만다는, 매우 흉하다라는 뜻이다. 즉각 피해 통제 모로 국면을 전환하고 확산을 막는 데 집중하라는 신호인데, 장보고는 몰랐던 것, 그런 카드를 내밀 줄을 몰랐던 장보고, 그는 결국 저주(詛呪)와 악마(惡魔)의 손길을 뻗친 염장에 의해 그만 비참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불길한 카드였던 것, 장보고 쥔 카드와 염장이 내민 커드가 서로 맞지 않는 괘(掛)의 카드였다. 그러니 마음에도 없는 기쁨이요, 웃음이었다.
약유박상지재(若有剝床之災)
목전지환(目前之患)
즉하필국어례사(則何局於例事)
이구위시불급지거재(而苟爲是不急之擧裁)
『만약 박상의 재앙과 목전의 환란이 있다면, 어찌 꼭 예사에 국한되어 구차스럽게 이런 급하지 않은 거사를 해야만 하리오』
중택태 카드처럼 상(象)은 못(澤)이 되니 만물을 기쁘게 하는 모습을 취하여, 감수(坎水)가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은 상을 취해 강건함이 기뻐하고 형통하며, 유순함에 이로운 정(貞)되어야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염장이 표현한 반가운 표정, 좋은 말은 다 가식적(假飾的)이 것들 이었다. 장보고는 중택태 카드를 들어 너무 기분이 좋아 술에 도취해 혀가 꼬인 ‘언어술’ 은 치밀하게 준비한 염장의 ‘변장술’ 에는 이기지 못했다. 변장술은 영원히 잠들어버린 ‘최면술’ 이 되어버렸다.
장보고가 타로카드 총 78장으로 메이저 아르카나 22장과 마이너 아르카나 56장 중 ‘메이저 아르카나 17번 별 카드, 마이너 아르카드 23번 완드 카드, 마이너 아르카나 40번 뇌수해 카드, 메이저 아르카나 18번 달 카드, 마이너 아르카나 58번 검.소니와 주역 중택태 카드’ 를 고른 듯이 선택했다. 이게 자신에게 행운(幸運)이기도 하면서 불운(不運)을 안겨줬다.
이런 타로카드가 그때도 성행했다면, 아마 장보고는 이 카드를 피했을 것 같다.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가 선택한 카드 중에 ‘18번 달 카드’ 는 자신의 운(運)과 명(命)을 결정한 것이기에 ‘58번 중택태 카드’ 에 그만 기쁨과 동시 슬픔의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장보고에 부여된 수, ‘17+23+40+18+58’ 의 숫자가 행운(幸運)과 불운(不運)이라는 두 요소가 공존해 ‘카오스(혼돈)’ 를 낳는, 장보고의 인생이 안정 속 번영도 있었지만, 안정과 번영 속 불안과 위기도 있었다. 그의 인생 앞날이 예측할 수 없는 예감(豫感)이 안 좋은 듯 해보인 불길함을 예고한 수(數)자가 아니었는가 한다. 행운보다는 ‘불운’ 을 더 결정해준 불길한 숫자가 강한 기운을 나타냈다고 본다. 자신의 운명(運命)이 예고 된 수이다.
장보고의 유능함과 당당함, 진정함 덧셈 정치.경제.문화를 통한 정책은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는 각자의 선 곳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향해 더하고 곱하는 것이라고 단합 속에 힘, 그리고 신라의 미래를 함께 여는 일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듯, 그는 자신의 하는 일이나 자신을 향해 보내는 시선들이 프리즘에 나오는 스펙트럼처럼 여러 각도와 빛으로 비출 것이라고 봤었다. 그 하나의 빛이 왜곡되어 마치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 비출 것이라고, 자신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장보고를 향한 한 줄기의 빛, 그 잘못된 굴절은 왕위계승쟁탈전에 가담한 신무왕인 김우징과의 관계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문성왕 왕비로 두려고 했던 것에서, 민애왕을 끌어내렸던 것에서 조정과 왕가와 갈등을 야기해 〈신라프리즘 스펙트럼〉 은 여러 빛에서 한줄기의 빛이 장보고로 향했다. 아주 불길한 빛이다. 일명 최면술의 용어인〈레드 썬-Red Sun〉 이다. 신라프리즘 파장에 따라 굴절된 빨.주.노.초.파.남.보 색(무지개)의 빛이 아닌 또 다른 색의 빛과 모양새도 다르게 비친 것이다. 염장이 장보고를 향해 〈레드 썬〉 하며 최면술을 걸었다. 장보고는 염장의 ‘최면술’ 에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염장은 장보고와 술 대작(對酌)을 하면서
“이 술은 너를 취하게 하는 술로
너를 영원히 잠들게 한 마귀의 술이다.“
“최면에 빠질 준비가 됐는가?”
“나의 최면술 마셔라! 부셔라!”
“들고 또 들고 마셔라! 쭈욱~”
“레드 썬!”
“이제 당신의 삶은 마감되리오.”
술(酒), 최면(催眠) 이를 활용하여 ‘최면술’ 로 장보고를 반의식 상태로 유도한 후 ‘변장술’ 로 장보고를 홀리게 하며, 목전(目前)에서 강한 암시를 했다. 죽음이다. ‘언어술+변장술+최면술=사망(死亡)’ 이 되어버린 이런 등식과 공식은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싶다. 사망보다 절망‘(絶望)’ 이였다면 좋으련만, 웃고 우는 ‘존망(存亡)’ 이 되어버렸으니, “이 어찌 슬픈 운명이련가?”
“애석(哀惜)하도이다.”
“레드 썬!~”
“장보고와 염장의 술 대작, 그 대작은 마취 같은 술 이였던가?”
“술로 최면을 걸었구나!”
“장보고에 거는 최면, 죽음으로 잠들게 한 최면술을 마셨네!”
장보고를 죽인 염장, 그의 레드 썬이 범인 잡은 과학, 래드 썬만 외치면 끝? 최면 수법은 뇌파 활용한 이롭게 한 과학이 됐으면 좋으련만...
그 활용은 사람을 해치는 과학으로 써 먹었으니, 원망할 수밖에 없으리오.
장보고를 향한 레드 썬. 붉게 빛나는 태양의 최면인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태양의 빛’ 으로 남길 바랄 뿐이다. 전남 영암 선암에서, 완도 청해진에서, 그리고 신라, 대한민국, 이 세상에서...
영암의 선암이라는 ‘영’ 과 ‘선’ 의 이니셜로 ‘영광의 선두주자로, 영예의 선도주자로, 영도의 선승주자로, 영화의 선행주자’ 로서, 또 완도의 청해진이라는 ‘완’ 과 ‘청’ 의 이니셜로 완성된 청해진, 완벽한 청해진, 완고한 청해진, 완비된 청해진으로 17세부터 58세까지 41년간 당나라(23년)와 신라(18년)에서 열정을 쏟았던 그가 영원한 썬 스타(태양의 별)로 밤하늘을 비추고 있다. 별은 사라지다가 아닌 ‘별은 다시 떠오르다’ 로 우리의 가슴에 비춘다.
●궁복인 장보고, 궁수자리로 다시 활을 들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이다. 성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궁복이라는 이름을 한 장보고는 저 하늘 〈궁수자리〉 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다시 활(弓)을 들고 있다.
우리는 장보고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그의 이름에 대한 의미, 그 비밀에 대해 궁복(弓福),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는 ‘신비(神秘)스런’ 이름이다. 단순한 이름이 아닌, 그의 이름에서 이미 세상을 열었고, 시대를 만들었고, 역사를 썼다. 새벽의 여신(女神)이라고 할까? 하늘의 광대무변함에서 오는 위엄.권위와 청명함으로 인한 공명정대함을 바탕으로 형성돼, 무궁히 포용하는 조화와 해.달의 품으로 간직되는 신비함의 천신(天神) 신비(神秘), 즉 ‘일월성신(日月星辰)’ 이 선암에서, 바다에서, 별자리에서 드러냈으며, 비밀의 선암을 당나라에서, 청해진에서, 해상로로 밝혔다.
신비스러운 전설이 깃든 곳, 선암이 필시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끌어들일 것으로 본다.
장보고에 관련된 건덕암과 국두암이 어떤 바위이고, 선암이 어떤 마을인지 가봤다. 바위들을 품고 있는 마을은 정겹기만 하다. 시골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광활한 녹차 밭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저 멀리 월출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마을 뒤편과 옆은 ‘오봉산과 활성상.궁성산과 국사봉’ 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선암마을에 보이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는데, 그 원인은 바로 건덕암과 국도암이었다. 장보고가 귀한 존재의 복덩이의 궁복으로 태어난 곳이어서 그렇다는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인즉 그 이야기들은 떠돌며 전해온 이야기 아닌 사실에 가까운 전설로 받아들었다. 장보고 부모님이 7년간 기도를 들어 아들을 낳았다는 마을 뒤의 건덕암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칠성바위로 보였다.
지금은 선암마을은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는 없지만, 1200년 전 그 때를 상상해보니 드넓은 벌판으로 보이지 않고 바닷물이 출렁거린 듯했다.
장보고가 “이 바다는 나의 가슴이요, 출렁이는 물결은 나의 심장이며, 떠가는 배는 나의 피며 정신” 이라고 하며 “이 바다를 통해 나도 배를 타고 꿈을 향해 나아가리라” 고 했던 장보고에 꿈과 희망을 안겨준 ‘선암바다’ 로 상상이 되었다.
그런 그가 정말 슬프게도, 장보고의 승승장구하고 세력에 불만이 많았던 염장은 장보고를 칠 기회를 노리고 왕에게 간신(奸臣), 결국 기회를 포착하여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장보고는 이렇게 염장에 의해 단순에 목을 달아나는 처참(處斬), 너무나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그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분명 그는 아직도 어디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뿐,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봤다. 선암마을에서...
궁복, 궁파, 장보고 이 세 이름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쓰였다. 궁복은 자신이 태어난 곳인 선암마을에서 불렀다. 궁파는 청해진에 있을 때 부르게 된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가 있을 때 불러줬던 이름이다.
이름마다 사연이 있는데, 이름에 담긴 의미는 한자에서 엿볼 수 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복덩이여서 ‘궁복(弓福)’ 라고 했고, 활을 잘 쏘는 장수(將帥)의 기질을 갖춘 제왕(帝王)이라고 헤서 ‘궁파(弓巴)’ 라 했으며, 나라를 지킬 큰 인물로 여겨 ‘장보고(張保皐)’ 라고 했다. 장보고의 보는 지킬 보(保)로서 업보(業報)가 아닌가 한다.
장보고가 살았던 당시 신라에서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장보고가 궁복이나 궁파로 불렸다는 것은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을 뜻한다. 궁복이나 궁파는 우리말로 활보, 즉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궁복 또는 궁파라고 불리던 신라 소년이 큰 뜻을 품고 당나라에 건너간 이후 중국식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궁(弓)은 중국의 다수 성인 장(張)으로 바꾸고, 복(福) 또는 파(巴)는 글자의 중국식 발음을 빌려 보고(保皐)로 표기한 것이라는 해석을 한다. 그런 해석은 그럴듯하게 풀어낸 추측성 보도, 소설 같은 이야기로 보여 진다.
●금동이에서 금복으로, 금복에서 궁복.궁파로, 궁복에서 징보고로
사실 장보고의 이름 변천을 보면 이렇다. 장보고의 본명인 궁복은 ‘금동이’ 또는 ‘금복’ 에서 연유(緣由)됐다. 장보고 부모는 자식이 생기지 않자 7년간 마을 뒤편 오봉산에 있는 ‘건덕임(乾德岩)’ 이라고 불리는 〈거북바위 혹은 칠성바위〉 에서 기도를 드려 귀한 자식을 얻었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아들을 보고 〈금동이, 금복이〉 라고 불렀다. “우리 금동이” , “우리 금복이” 라고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예뻐해 했다.
그런 금동이는 ‘금쪽같은 복덩이’ 라고 해서 ‘금복(金福)’ 으로 불렀고, 금복은 다시 ‘어진사람’ 이 되라는 뜻에서 ‘궁복(弓福)’ 이라고 했다. 그런 궁복은 다시 ‘궁파(弓巴)’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지역의 ‘제왕’ 으로서 큰 인물이 되라는 마음에서다. 그런 궁복과 궁파는 다시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있으면서 ‘장보고(張保皐)’ 로 개명(改名)을 했다. 확장하고. 지키고, 높은 위치에 서서 세상을 다스리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지은, 자신의 꿈과 포부를 담은 ‘사상과 철학의 정신관, 목적과 방향의 인생관, 원칙과 대안의 현실관, 사업과 비전의 미래관(未來觀). 민족성과 전통의 세계관(世界觀), 안정과 질서의 평화관(平和觀)’ 등 희망을 갖고 욕망을 달성하려는 것으로, 정직한 사람으로서의 참인물의 ‘애민애족(愛民愛族)’ 으로서 자신을 가꾸려는, 품격(品格)을 갖춘 사람다운 사람, 이미지메이킹을 보여준 이름이다.
건덕암의 건은 ‘하늘 건(乾)’ 이다. 건은 건괘(乾卦), 건방(乾方), 건시(乾時)의 준말로써 건괘는 ‘하늘(天)’ 을 상징하며, 이것은 곧 ‘임금(王)’ 을 뜻한다. 덕(德)을 갖춘 훌륭한 인물을 말한 것으로 선암마을에 있는 거북이 형상을 한 바위가 ‘칠성바위’ 로서 영험함을 넘어 세상이 나타난 위대하고 큰 인물을 만들어내는 신통하고 묘한 ‘신묘(神妙)’ 함을 지닌 ‘건덕암(乾德岩)’ 으로서의 의미를 달리한다. 거북바위는 칠성바위로, 그 바위는 건덕암으로서의 지역과 사람들에게 기운과 힘, 꿈과 희망, 발전과 번영, 건강과 평온, 안정과 평화를 불러들인다.
“귀한 아들을 얻었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금쪽같은 내 새끼로다.”
“금동이야! 금복덩이 내 아들!”
금(金) 같은 귀한 존재의 복덩이의 ‘금복(金福)’ 으로 태어난 아들은 ‘궁복(弓福)’ 이라는 이름으로써 세상에 빛나고 세계를 호령한다. 영원성(永遠性)의 금(金, Gold)이듯이 궁복=장보고는 영원한 우리의 천주(天主) 같은 벗이요. 가슴 속에 존재하며 기억에 남게 하고 그를 기리게 한다. 그는 전남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에서, 건덕암에서〉 그 금빛이 찬란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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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신라의 품격이자 대한민국의 국보다
신라 상대등(上大等) 36대에 오른 장보고, 상대등은 신라시대 귀족 권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을 맡았던 장보고, 오늘 날에 치면 국회의장 격이었단 장보고, 화백회의 참석자 중 총 우두머리였던 장보고, 귀족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시중과 겹치거나 동등한 위치로 국왕을 보좌하며 행정을 맡았던 장보고
청해진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으로 많은 팔고 사거나, 문물을 교환하는 등으로 신라를 크게 부흥하게 하면서 군사력도 강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던 장보고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하버드대학교 랴이야워(Edwin O. Reischaier) 교수가 ‘해양산업 제국의 무역왕’ 으로 썼을 정도로 극찬 받으며 국제적으로 주목되었다. 그가 살았던 9세기 신라는 경주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이 사회 변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중앙은 권력 다툼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고, 농민층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민중들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나갔던 역동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신리시대 해양을 지배했던 장보고의 활약상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위대함으로 기억된다. 반역자에서 ‘해신(海神)으로 다시 부활한 장보고는 오늘날 해상국(海上國)으로 뻗어가는 한국인의 멘토가 되었다. 장보고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와 동 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이 남긴 ’장보고 정연 전‘ 때문이다.
그 기록은 그대로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 나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에 남겨졌고, 오늘 우리들에게 귀중한 역상의 원형으로 남았다. 그 역사 원형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줄 것이고, 새로운 장보고를 만들어갈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전설이 된 인물이 많다. 그중 한 분이 신라 말 청해진 대사가 돼 중국과 서역, 일본을 연결하는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다. 그는 최근 바다를 다스리는 신 해신(海神)으로 부활,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 그가 출신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딸을 왕비로 삼도록 노력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도대체 그는 어느 곳, 어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기(史記)에는 그가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어느 집안이라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가 바닷가 출신이라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완도에 있는 섬에서 태어났다는 설로 알려진다. 과연 그럴까?
장보고와 정년의 관계, 그 인연에서 그의 출생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장보고 태어난 곳 완도가 아닌 ‘영암’ 이라는 사실
장보고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船岩)마을’ 에서 태어났다.
신라시대 때는 영암군은 ‘월나군(月那郡)’ 이었으며 장보고가 태어난 곳은 ‘무장동(武將洞)’ 이었다. 무장동은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을 한 훌륭한 장보고가 태어난 곳이라고 해서 이 지역을 그렇게 칭했다.
그는 정연이라는 친구와 함께 한 시대를 군림했다. 당나라에서, 신라에서...
정년은 장보고와 같은 동향(同鄕)이다. 정년은 장보고보다 더 기예(技藝)가 뛰어났고, 수영도 잘했던, 나이는 장보고보다 1살 아래였다. 어릴 적엔 한동네에서 형, 동생하며 사이좋게 지내면서도, 둘이는 경쟁심이 심해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다투는 일도 많았다. 월등(越等)함을 나타내며 우수성(優秀性)을 보이려는 일에서는... 장보고는 1살 아래인 정년을 무척 아꼈다.
그럼에도 서로 라이벌로 생각한 한 것이다. 선의의 라이벌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두 사람이 경쟁(競爭)과 협력(協力)을 통해 ‘미래 성장(成長)과 사회를 함께 선도(先導)’ 하는 경쟁심이었다. 정년은 당나라에 무령군 소장으로서 군축(軍縮) 경영으로 따른 더 이상 출세를 못했지만, 신라에서는 어느 정도 활약성을 보였지만, 해상무역으로 해상로를 개척한 장보고보다는 큰 인물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장보고는 신라에서 해상왕으로 부를 만큼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떨쳤다. 다만 정년은 1살 위인 형인 장보고의 그늘에 가려졌을 뿐이다.
장보고와 정년은 한 마을에서 살면서
“정년아! 우리 활 쏘는 놀이하려갈까?”
“네 형!”
둘은 만나 마을 뒤 건덕암이나 인근 마을 동백정과 근처 금정에 있는 활성산과 궁성산까지 가서 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활을 쏘는 법을 익혔고, 군사기술도 배웠다.
“정년아! 우리 내기할까?”
“누가 더 과녁에 잘 맞춘 지 내기하자!”
“지는 사람이 나무(땔감)를 해주는 걸로”
그러자 정년은
“형 알았어!”
“해봐요!”
~하면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런데 장보고는 중앙에서 좀 벗어난 위치에 꽂혔고, 정년은 거의 중앙에 화살이 꽂아졌다. 정년의 실력이 드러난 것이다. 사실 정년은 궁복 형도 나름대로의 연습을 많이 했지만, 정년도 꾸준히 연마(硏磨)했다. 군사훈련에 가까운 단련(鍛鍊)을 한 것이다. 그러니 형 궁복보다 잘 할 수밖에...
정년의 실력을 얕잡아 봤던 궁복은 놀라운 표정으로 정년을 바라봤다.
“너 너무 잘하는데”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는 거야!”
궁복은 동생의 어께를 툭툭 치며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정년이 넌 활을 잘 쏘네”
“정말 잘해 멋져 보여!”
그러자 정년은
“형도 잘 해”
“형에 비하면 난 아직 멀었어!”
“난 형을 못 따라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년은 궁복 형한테 절대 지지를 않으려 했다.
궁복은 1살 아래인 정년을 많이 예뻐하면서, 항상 놀이를 할 때나, 나무를 하려갈 때나, 어디를 갈 때나, 바다로 나갈 때나 집에서도 등 늘 함께 하는 사이좋은 형과 동생으로, 친구로서 지냈다.
기록에서는 둘은 잘 다투었다고 나오는데. 진정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는 경쟁(競爭)도 필요한데 그럴 때 약간의 다툼을 보이기도 한다. 그건 싸움이 아닌 생존(生存)이다. 갈등을 이기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상황을 유지.회피.대화로 관리하는 생존전력 차원에서의 선의경쟁으로써 둘과의 다툼은 비용이 크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미시적(微視的).비언어적(非言語的).미세공격(微細攻擊)’ 같은 다툼이었다.
대들 듯이 “야! 네가 뭔데” 이런 말을 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린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에서는 지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에 있어서 토론장을 벌렸는데,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다보니,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궁복과 정년은 간혹 다투면서도 금방 풀어졌고, 늘 형제처럼 지내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이기에 성장해서도 일관계로 의견일치를 못 볼 때도 있었고, 그런 문제로 다툼도 생겼다.
싸움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할 때도 내 안의 자기와의 싸움(내적 갈등)을 먼저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 궁복과 정년은 갈등을 내면에서 먼저 극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궁복과 정년의 다툼은 궁복과 정년의 생존, ‘질서와 평화의 싸움’ 이었다.
●장보고가 태어난 곳은 영암 선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해상왕(海上王)이니 무역왕(貿易王)이니 하는 이런 칭호가 1000년하고도 2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에 대한 기억은 늘 새롭다.
안타까운 것은 훌륭한 인물이, 도대체 어디 어느 곳에서 태어난 것인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완도 어느 섬에서 태어난 분이라고 하는데, 영암사람들은, 특히 운암리 선암마을사람들은 “역사에 장보고라는 기록을 상세하고 기록하고 있지가 않아서 궁금한 점이 많고, 어떤 연유로 장보고가 완도 태생이라고 그 근거로 말 한지는 모르겠다” 면서 “역사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며 “장보고는 완도 출신이 아닌 〈영암 출신〉” 이라고 목소리 높인다. 또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로 갔던, 거기서 무령군 소장을 함께 있었던, 그리고 민애왕을 물러나게 만든 일에도 동참했던 정년도 이 지역 〈선암 사람〉 이라고 주장한다.
궁복, 장보고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에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확신한다. 건덕암.국두암과 정년과의 관계 등 지역의 장보고에 관련한 것들을 증거로 대며...
장보고가 화살 써는 놀이를 했던 〈동백정.활성산.궁성산〉 과 바위에서 올라 바닷물로 다이빙을 하거나 배를 탔던 곳의 〈국두암〉 은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또한 건장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거북바위인 〈건덕암〉 도 궁복=장보고를 그리워한다.
바다를 보며 세상을 꿈꾸게 했던 선암마을
금복덩이를 낳게 만든 건덕암
큰 인물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출세의 길을 걷게 해준,
기개를 펼치게 해준 국두암
장보고의 역사의 산실이다.
●건덕암+복덩이 탄생+활 쏘는 훈련장=궁복, 장보고
장보고 이름에 대해 여러 설(設)이 나돈다. 성씨가 본 이름이 ‘궁복(弓福)’ 이여서 궁씨(弓氏) 성이 아닌가본다. 후고구려 건국자인 ‘궁예(弓裔)’ 가 장보고의 후손이 궁예와 연결되어. 궁예가 장보고 계통의 정통성을 계승하려했다는 해석도 있고, 심지어 광산김씨(光山金氏)의 후손으로 보기도 한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장(張氏)’ 성(姓)을 얻었지 않는가 보고 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성을 선택했는데, 자신의 이름 활 궁(弓)이 들어간 베풀 장(張)을 선택했고, 복(福)은 ‘보고’ 로 풀었다는 가설(假說)이 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군 소장으로 재직하려면 격(格)이 있는 성과 이름이 필요했다. 거기에 걸맞은 이름이 있을 필요성을 느껴 중국의 성씨 중에 높은 집안의 성씨 중에 ‘장씨(張氏)’ 를 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점은 가시지 않는다.
궁복에서 장보고, 장보고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장보고가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을 재직하면서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지방 군벌의 속성과 군대 강성법(剛性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장보고라는 이름을 개명(改名)하였던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당나라에서 자리 잡기 위해 당시 가장 흔했던 장씨(張氏) 성을 선택한 것이라는 설로 ‘장보고’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것인데, 그는 당나라로 간지 5년 만에 출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장보고는 궁복을 개명해 장보고로서 당나라에서 삶을 새로 시작한다. 장보고와 정년이 무령군의 일원으로 이사도 토벌의 선봉에 선 것이다. 장보고는 이 전쟁에서 맹활약을 벌였는데, 삼국사기에는 ‘말을 타고 창(槍)을 쓰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많은 성씨 중에 왜 ‘장씨(張氏)’ 를 택했을까하는 의문점이 드는데, 사실 그는 집안에서 궁복(弓福)이라고 한 이름에는, ‘궁(弓)’ 자가 들어간 한문 중에 ‘장(張)’ 이 있는데, 장(張)자는 ‘넓히다. 크게 하다’ 라는 뜻이 있어, 확장(擴張)이란 의미를 가진 장을 자신의 성(姓)으로 삼았고, 복(福)을 ‘보고(保皐)’ 라고 바꾸었는데, 보고의 보(保)는 ‘지키다. 돕다’ 라는 뜻을 담고 있고, 고(皐)는 ‘강가의 높은 언덕’ , ‘높은 고지, 크다, 부르다. 우르렁거리다. 울부짓다. 고상하다, 귀한 존재, 어진 신하’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고는 주로 ‘높고 고상한 의미’ 를 담아 ‘지명이나 인명’ , 또는 ‘전설적 인물’ 과 관련된 한자로 쓰이고 있다. 중국 고전에서는 고(皐)가 ‘전설적 제왕의 후예나 성씨와 연결된 전설적 계보’ 에 등장한다. 고가 들어간 지명이나 인명은 ‘다문화적 배경’ 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는 단순한 언덕이라는 뜻 외에도 ‘지명.성씨.전설’ 등에서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다. 특히 고대사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에서 고(皐)가 들어간 경우 ‘풍수의 의미, 다문화적 배경’ , 또는 ‘전설적 계보’ 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장씨(張氏) 성에 ‘나라를 지키는 제왕이 되다’ 의 뜻을 내포한 ‘보고(保皐)’ 를 이름으로 했다. 장보고, 나라를 세우고(창업) 지키는(수성) 군주, 즉 강력한 리더십과 통치력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위대한 군주가 되라는 의미에서 궁복의 궁은 활궁이 들어간 ‘장(長)’ 으로, 복은 ‘돕다’ 라는 의미를 살려 그런 일로 ‘어진 사람’ 이 되고자 한 마음에서 ‘보고(保皐)’ 로 하였다. 장보고 이름에 대해서 여려 번 그의 활약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장보고, 나라를 지킨 군주가 되라는 뜻
장보고라는 이름은 ‘제왕의 리더십과 창업.수성’ 의 의미, 즉 혼란한 세상을 통일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 세운 나라를 지키고 안정시키는, 교만(驕慢)과 부패(腐敗)에 빠지지 않고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등 강한 통치력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나라를 지킨 군주〉 가 되라는 의미에서 장보고라고 지었다.
장보고 이름을 두고 여러 설이 나도는데. 그는 ‘궁복’ 이라는 이름은 맞다. 다만 그의 성씨는 기록되지 않는다. 이유는 그가 천민(賤民) 집안에서 태어난 ‘평민(平民)’ 이어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서는 그에 대한 본 성씨는, 가문이 좋거나 신분 따위가 높아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가진 계층의 ‘귀족(貴族)’ 사회에서는 천민(賤民)과 평민(平民)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함부로 내세우거나 쓰이지 못하게 되어 있어, 다루지 않거나 빼버렸다. ~0궁복이라고 만 알려진다.
장보고는 어쩜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가 부끄러웠고, 사회 현상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민.평민들은 출세를 해도 양반이나 선비, 관직을 한 분들처럼 이름 석 자를 함부로 올리지 못했다. 사서(삼국유사, 삼국사기 등)를 기록한 분들은 규율(規律)이 그러니 쉽게 다루지를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룰 수도 있었지만 역사 편찬자에 의해서 누락이 될 수도 없지나 않다. 마을과 집안에서는 그럴 수 있어도, 귀족 등 신분사회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저 궁복이라고만... 그가 출세를 하고 나서 개명을 한 ‘장보고’ 라는 이름으로 널리 밝힐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본명,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의 작명은 지역 환경에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선암마을 오봉산과 인접한 ‘활성산(498m)’ 이 있다. 활성산은 영암 금정면 연소리와 영암읍 농덕리.한대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광주 무등산에서 ‘국사봉(國師峰)’ 으로 이어지는 호남 정맥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월출산으로 뻗어가는 능선에 위치한다. 이 산의 정상부가 넓은 분지이며, 정상 부위에 활성산성(活城山城)이라는 토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훈련장 등 군사지역이어서 ‘활성산(弓城山)’ 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또 활성산의 새 갈래 능선은 북동쪽은 국사봉을 거쳐 금정면 세류에 ‘궁성산(弓城山, 484.2m))’ 으로 이어지는데, 산 정상부위에 산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사와 말을 훈련시키고, 화살을 쏘는 연습장으로 활용되어 활터로 추정한다. 궁성산은 광주 무등산과 봉미산과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등 활성산처럼 호남 정맥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월출산으로 뻗어가는 능선에 위치한다.
이런 산의 지명에서 활성산과 궁성산의 ‘활(弓)’ 과 행복과 번영의 뜻을 지닌 ‘복(福)’ 과 함께 〈어진 사람으로서의 인간의 힘을 초월한〉 , 그런 의미에서 관련되어 ‘궁복’ 이라고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궁복은 사실 금동이, 금쪽같은 복덩이에서 연유됐고, 금복을 어진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궁복(弓福)’ 으로 했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두고자 한다.
앞서 다뤘지만 장보고는 처음 그가 태어나자 부모들은 아들을 보고 ‘금동이 또는 금복’ 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을 금복은 화살 쏘는 것에 관심이 많아 ‘궁복’ 으로 했고, 궁복.궁파는 ‘장보고’ 로 개명됐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장보고를 얻게 해준 거북바위의 ‘건덕암’ 이 영향을 줬다는 것도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한다.
●궁복에서 장보고로 부른 이름
◇궁복
궁(弓)-어진 사람, 천지창조 복희와 여와
복(福)-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인간의 힘을 초월한 귀한 존재
◇궁파
궁(弓)-어진 사람
파(巴)-번식, 진화 등 생명과 성장의 상징, 황제의 덕(성덕)
◇장보고
장(張)-늘어남, 팽팽함, 바깥으로 힘이 걸린 상태
예: 확장(擴張)-규모.세력 따위를 늘려서 넓힘, 팽장(膨張)-규모나 세력이 커지거나 크게 발전함
✱장은 개척, 팽창, 확대, 확충, 촉진, 신장, 향상, 성장, 발전, 발달, 진보, 융성, 증폭, 증대, 증진, 증가, 상승, 호전 등의 의미를 지님
보(保)-보전, 지킴, 보호, 유지, 책임, 돌봄, 보살핌, 지킴, 양육
고(皐)-높고 고상함, 어진 신하, 전설적 제왕, 도덕적 이상과 현명한 통치 상징
《궁복은 ‘어진 사람으로서 초월한 경지에 이른 존귀한 사람’ 이 되라는 뜻에서, 궁파는 ‘어진 황제’ 가 되라는 뜻에서, 장보고는 ‘나라와 지역을 지키며 현명한 통치자로서 개척하고, 발전시키고, 팽창하는 현명한 통치자’ 가 되라는 뜻》 에서 지었다.
궁복(弓福)에서 ‘장보고(張保皐)’ 로 이름을 작명(作名)한 것은 장보고가 지신이 해야 할 일, 나아갈 길, 열어갈 미래 등 철학과 신념, 그리고 비전을 담은 이름이 필요했다. 이름 하나를 잘 지어 자신 이미지와 브랜드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개명에 나섰다.
그는 장씨(張氏) 성으로 한 것은, 중국 장씨 인구 통계 및 분포 분석 2025년, 중국 본토 인구의 6.83%(약 9600만 명)이 존재, 장씨 성으로 조사될 정도로 예전부터 장씨 성이 많다.
중국의 주요 성씨 순위에서 장씨가 높은 이유는 역사적 번성, 고대 황제의 직계 후손에게 하사된 성씨로 활(弓) 제조자라는 전통이 대를 이어 전해져 왔다. 또 지리적 확산, 한 대(한대) 아래 화남.화중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이후 동부.남부 해안까지 넓게 퍼졌다. 또 사회적 네트워크, 관료와 학자, 상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장씨 인물들이 가문 내 결혼.친족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영향력을 키워왔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성 장씨(張氏)의 역사적 유래와 의미 장(張)은 ‘활’ 을 뜻하는 궁(弓)과 ‘길다’ 를 뜻하는 장(長)이 합쳐진 글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황제 헌원(軒轅)의 손자 청양(靑陽)이 휘(暉)를 낳았고, 휘가 천궁성의 영감, 호성(弧星)의 아홉 개의 별을 보고서 활을 제작하고, 호성을 주관하여 제사하고 성을 궁정(弓正) 직책과 함께 장(張)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활을 당긴다〉 는 의미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장씨 성은 중국 남방 해안가 집성촌 비율이 높아 중국 전통 가문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장씨는 장씨는 장(張)씨, 장(章)씨, 장(莊)씨, 장(蔣)씨가 있다. 중국에서 온 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씨는 〈장보고〉 로 알려진다. 장씨 유래를 보면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황제 헌원(軒轅)의 손자 휘(暉)가 아홉 개의 별을 보고 활(弓)과 화살(矢)을 제작하여 제사를 주관하고 성을 장(張)으로 하였다.
안동장씨 시조는 정정필(張貞弼)이다. 장보고(張保皐)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 장씨의 역사 유래와 의미를 보면, ‘활을 펼친다’ 는 의미와 형성자, 황제 아들 휘(暉)에게 하사된 전설적 기원에서 비롯된다.
장보고는 자신의 성을 장씨로 한 것은 황제의 아들 청양이 휘를 낳아, 휘가 아홉 개의 별을 보고서 활과 화살을 제작해 아홉 개의 별(弧星)을 주관하여 제사하고, 성을 장(張)씨라 하였다는 것과 장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 진나라 재상인 ‘장의(張儀)’ , 조(趙)나라의 개국공신 ‘장맹담(張孟談)’ , 한(漢)나라 무제 때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張騫)’ . 촉한(蜀漢)의 무장인 ‘장비(張飛)’ , 5호 16국 때 전량의 군주인 ‘장궤(張軌)’ 의 영향을 받아 장(張)씨로 개성(改姓)했다.
장보고의 보(保)는 신라소(新羅所) 지치권인 신라인 촌락을 통할 때는 ‘인보제(隣保制)’ 기반을 한 보(保).촌보.판두 등 체계를 갖춘, 신라소는 근본적으로 당나라 지방관아의 통(統)할 아래 놓이며, 여행허가권을 현청(縣廳) 공문서의 공첩(公貼)과 교부해야 현(縣)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제도의 인보제의 ‘보(保)’ 를 따 장보고라 하였다. 보는 ‘지키다. 돕다’ 라는 뜻이다.
장보고의 고(皐)는 당나라 순임금 때 법관(法官)이자 우(禹) 임금의 정치고문으로 형법(刑法)과 교칙(敎則)을 제정해 사회 질서를 다스렸다는 ‘고요(皐陶)’ 이다. 고요는 소호 금천씨(小昊 金天氏)의 후손이다. 순임금이 우에게 치수를 맡길 떼 우가 거절하고, 후직(后稷)과 설, 고요를 추천하였으나, 순임금은 우에게 치수를 맡기고, 고요는 사(士)를 밭게 되어 순임금 때 법관이 되었다.
고요는 부임 후 형법과 교칙을 제정하여 오형, 오교를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사회가 화합하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사회 질서, 화합을 시킨 것을 몸소 실천한 고요(皐陶), 고요의 이름 ‘고(皐)’ 를 따 장보고로 하였다.
장보고는 이러한 심오한 뜻을 담아, 그런 의미와 인물, 역할을 한 것처럼 장차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서 성장해 이바지하겠다는 자신의 이름 새로 지었다. 궁복은 영암 선암의 대표적인 브랜드명이였다면, 장보고는 신라의 대표적인 〈국보급 브랜드 네이밍〉 이다.
●궁복의 복은 복덩이
궁복의 복(福)은 7년 간 치성(致誠)을 드려 아들을 얻게 되자. 우람하게 태어난 아들을 어진 사람의 활 궁(弓), 귀한 존재의 복 복(福)를 써 〈궁복〉 이라고 불렀다. 복은 ‘복덩이’ 로 영어로는 ‘lump of luck 또는 a lucky charm-행운의 부적’ , 즉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 을 뜻한다.
“우리 아기는 진짜 복덩이야, 태어나자마자 출세도 했어!”
“넌 내 복덩이인가 봐! 제왕이 됐어!”
“우리 아들은 정말 복덩이야, 매일 우리 삶을 환하게 해줘”
“그 아이는 동네 사람 모두에게 복덩이야!”
“내 아들은 진짜 복덩이야! 웃음이 전염돼”
“아기가 생기고 나소 인생이 달라졌어, 그 아이는 우리 복덩이야!”
“넌 내 인생의 복덩이야! 햇살 같은 존재야!”
“넌 마을을 환하게 밝혀, 정말 복덩이야!”
“어려운 때에도 그 애는 늘 밝아, 진짜 복덩이지”
“우리 아기는 복덩이야, 정말 감사한 존재야!”
Our baby is a blessing We'rs so grateful for her.
넌 내 인생에 나타난 복덩이야!
You came into my life like a godsend.
장보고를 매우 귀중한 사람의 ‘복덩이(福덩이)’ 로 보고 ‘궁복(弓福)’ 이라고 부른 것이다.
궁복(弓福)과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 한자(漢字)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의 인물상(人物像)을 그대로 보여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장보고 모습이나 꿈, 희망, 생각, 행동 등을 보고, 그에 걸맞은 한자를 선택했으며, 의미가 담긴 한자로 작명(作名)했다고 보여 진다.
궁복이나, 궁파나, 장보고 이름대로 그는 꿈이 아닌 현실, 허위가 아닌 사실, 성적 아닌 열정, 재능 아닌 노력, 발견 아닌 창조, 안주 아닌 혁신, 대체기술 아닌 새로운 생산기술, 정치 아닌 문화.과학, 결과 아닌 끈기, 포기 아닌 도전, 개인적 지배욕 아닌 사회적 변화와 개혁, 권력욕 아닌 개혁 야망, 불안정.불확실성 아닌 안정성, 행정(行政).성과(成果)를 넘어 지속 가능성 경쟁력, 저력으로 대전환의 기회로, 강한 의지를 담은 체계적이고 속도감을 선택 아닌 필수로 여기고, 강한 지도력을 갖춘 채 신라의 조직의 실세이자 해상왕.무역왕으로 분신. 숨길 수 없는 욕망과 서늘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완벽한 변신을 선보였다.
그의 첫 등장부터 신라왕들과 만남으로 극의 공기를 바꿔놓은 장보고는 절제된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수준급의 기획력, 추진력, 지도력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특히 서늘한 눈빛과 비주얼로 왕과 국민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장보고의 장(張)이 활 궁(弓)자가 들어가 있어, 개명했을 때 성(姓)을 ‘장(張)’ 자로 한 것인데, 센스도 있어 보이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智慧)도 깊어 보인다.
장보고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동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803~852)이 남긴 ‘번천문집’ 의 장보고와 정연 전이 큰 도움이 된다. 이 문집은 ‘신당서’ 나 ‘삼국사기’ 장보고 기록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정연 등과의 대립은 물론, 귀족들 앞에서 감정적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까지 떨리는 호흡과 섬세한 눈빛, 목소리로 추진 내공을 실감케 했다. ‘세상을 꿈꾸며’ 에서 첫 진출의 설렘부터 밀도 높은 감정 테크닉까지 폭넓은 끼 스펙트럼을 보여준 장보고는 신라 세계무대 진출에서 상반된 매력을 보여주며, 믿고 보는 장보고로서의 가능성을 탁월한 실력으로 유감없이 보여줬다. 〈메이드 인 신라〉 라는 “의미 있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역할에 도전해볼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라고 혼신을 다해 공헌했던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훌륭한 분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했다” 고, ‘메이드 인 신라, 세상을 꿈꾸며’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장보고, 그는 대한민국 발전과 번영,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가 미치는 ‘영향력, 경제력, 외교력과 문화의 힘’ 등으로 국가의 위상과 경쟁력을 키워내는 등의 놀라운 성과를 이룬 입지적인 인물로 평가되기에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서 추앙(推仰)된다.
궁복(궁파)가 어린 나이부터 손에 잡았던 궁(弓)은 ‘궁주(弓奏)하다’ 이다. 현악기를 활로 켜서 연주하는 것 같은 활 쏘는 모습이 리듬을 탄다. ‘궁마지재(弓馬之才)’ , 활 쏘고 말을 타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든 활은 경궁(勁弓, 탄력이 강한 활)으로서 아주 강한 활의 ‘막막강궁(莫莫强弓)’ 이었다. 그런 궁복이 당나라에서 연마(硏磨)하여, 결국 청해진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양궁거시(楊弓擧矢)’ , 즉 활과 화살을 높이 들어 겨루어 이기는 등 명궁수(名弓手) 로서 이름을 떨친다. 장보고는 어릴 적부터 무예를 익히어 그 방면에 종사한 인물로 성장했다. 이름 하여 ‘궁전지사(弓箭之士)’ 였다.
●궁복은 궁수자리
궁복은 궁수자리(弓手자리)다. 염소자리와 전갈자리 사이에 있는 별자리, 황도 십이궁의 아홉 번째 별자리로, 9월 상순 저녁에 자오선을 지난다. 별자리의 모양이 궁수(弓手, 활 쏘는 군사)가 활을 쏘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중앙의 국자 모양으로 늘어선 여섯별을 중국에서는 ‘남두육성(南斗六星)’ 이라 부른다. 남쪽의 여섯별이라는 뜻인데, 이별이 바로 궁수인 ‘궁복’ 을 상징한다.
국궁(國弓, 활 쏘는 기술)으로 여겼던 장보고, 바이올린 따위의 현악기에서 활대의 나무 부분으로 현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궁간주(弓杆奏)’ , 바이올린 따위의 현악기를 연주할 때, 손목을 움직여 활을 튀게 함으로써 음을 가늘고 짧게 끊는 ’도궁주(跳弓奏)‘ 법으로 활을 다루었던 그다.
마을 뒤 황제의 덕의 뜻이 담긴 ‘건덕(乾德)바위’ 에서 7년간의 치성 끝에 임신하여 궁복이 태어나는 날. 예언(豫言)의 무언가 암시(暗示)하는 천궁(天弓, 무지개)이 나타났다. 하늘 가운데에 활(弓)처럼 둥글게 구부려져 있는, 궁형(弓形)의 무지개가 떴다. 활을 잘 쏘는 ‘신궁(神弓)’ 이 태어난 것이다. 그는 장차 ▲활을 쏘는 기술을 닦는 일 ▲활 쏘는 데 지켜야 할 도리 ▲활을 쏘는 무술의 ‘궁도(弓道)’ 를 갖춰, 활을 쏘는 일을 맡아 하던 군사의 ‘궁척(弓尺)’ 으로 종사하며, 겨루어서 이기는 ‘양궁거시(楊弓擧矢)’ 했다. 궁복이 궁파로 성장하고, 장보고로 명성을 떨친, 하늘이 내려준 신의 존재로서 그를 태어나게 한 곳, 선암마을은 〈궁수자리〉 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궁수자리, 탄생을 결정하는 별
궁수자리는 주전자 모양의 손잡이와 뚜껑을 이루는 별들인데, 전체모양이 북두칠성의 모양과 대단히 비슷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북두칠성과 대비되는 ‘남두육성’ 이라고 부른다. 남두육성에 대한 이야기로 중국 점성술(占星術)에서는 북두칠성을 ‘죽음을 결정하는 별’ 이라고 해서 불길하게 여겼던 것에 반해, 남두육성은 ‘탄생(誕生)을 결정하는 별‘ 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면, 북두의 신선(神仙)과 남두의 신선이 상담을 해서 그 사람의 수명(壽命)을 정한다는 전설이 있다.
궁수자리는 말(馬)의 하반신과 사람(人)의 상반신을 지닌 반인반마(半人半馬) ‘캔타우로스(kentauros)’ 의 모습이다. 활을 힘차게 당긴 상태의 별 배열이 특징인데, 이는 정의롭고 지혜로운 스승 ‘케이론(Cheiron)’ 을 상징한다. 이 궁수자리는 여름밤하늘에서 별빛을 향해 당겨진 활을 상상해보면 정말 멋진 장면이 연출된다. 케이론은 아주 지혜롭고 따뜻한 켄타우로스로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들의 스승이다. 그러던 중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실수로 맞고 말았다. 불사의 몸이었기에 그는 죽지도 못하고,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결국 케이론은 히드라의 맹독이 온몸에 퍼지는 고통에 제우스에게 죽음을 간청한다. 그 숭고한 선택을 기린 신들은 그를 밤하늘 위로 올려 ‘궁수자리’ 로 만들어 주었다.
궁수자리 은하수는 가장 밝고, 밀도 높은 영역에 위치해 있다. 그 별 배열이 너무 특이해서 찻주전자 모양으로 불렀다.
궁수자리는 단순한 별의 모양이 아니다. 그 속에는 ‘사랑’ 이 담겨 있다.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 이를 위한 선택을 한 케이론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다.
한 여름 밤 맑은 밤하늘 아래에서 궁수자리와 함께 케이론의 이야기와 따뜻한 마음을 떠올려보듯이, 별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빛나게 되듯이 ‘궁복’ 이라는 아이로 태어난 장보고를 생각하면서 궁수자리를 쳐다본, ‘별을 헤는 밤’ 이라는 별 소년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전남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에서...
궁수자리는 ▲새로운 도전과 방향 설정 ▲수확과 결실의 기쁨 ▲가장과 인간관계의 중요성 ▲건강관리와 활력 유지 ▲재정 관리와 신중한 소비를 관장한다, 궁수자리를 보면 기회와 성과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팔월령, 궁수자리의 지혜가 우리의 앞날을 밝고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리라 본다.
영웅들의 스승이자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남두육성, 궁수자리는 궁복, 궁파, 장보고하는 신화적(神話的)인 인물을 배출했다.
케이론의 슬픈 이야기가 담긴 궁수자리, 어쩜 그 별에 얽힌 이야기가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케이론이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을 받고 결국 하늘나라로 갔듯이, 장보고가 염장한테 목숨을 잃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것 같은 유사점이 있어 보인다. 장보고의 궁복이라는 이름과 케이론의 궁수자리의 이야기랑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든다. 궁수(弓手)로 태어난 아이, 장보고가 케이론처럼 슬픈 전설, 신화적인 역사를 남긴 게... 저별은 나의 별이 아닌 〈장보고의 별〉 이라고 해야겠다.
●국가 위상 최고 경지에 이르게 한 인물
장보고가 태어난 선암, 선암이라는 이름은 ‘선-선구자적, 암-암적인 존재’ 가 아니었는가 한다. 그런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일이나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선구자(先驅者)’ , 남달리 앞서 깨달은 ‘선각자(先覺者)’ , 먼저 내다보는 ‘선지자(先知者)’ , 문제를 처음보고 난이도와 유형을 거려내는 능력의 ‘선구안(選球眼)’ 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가 태어난 ‘선암’ 의 영험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선암이 없었다면, 장보고는 그런 인물로 탄생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과 인생이 달리진다고 한다. 선암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장보고의 인생이 결정됐고, 방향이 설정됐다.
장보고는 선암이 전하는 그 뜻을 잘 새기고 선구자적 인생관을 가졌고,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인생의 의미.가치.목적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를 갖고, 그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인간중심주의, 가족.공동체 중심, 학문.예술의 가치, 자비로운 접근 등으로 선구자적인 암적인 존재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면서 자긍심.꿈.관계를 넓히고, ‘여러 사람을 위해 살겠다’ 는 착한 마음을 가졌다.
만약 장보고가 선암이 아닌 완도에서 태어났다면, ‘완-완전한, 도- 도인(道人)’ 이 됐을 것이라는 우스게 소리를 한다. 도인이 된 장보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가 도인으로 태어날만한 그런 환경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없다. 선구자적 암(바위의 영험함)적인 존재로서의 영향을 끼치고 성장하기를 완도에서 자리는 마련해줬지만, 그런 그를 만든 곳은 ‘영암 선암’ 이다. 영암은 ‘신령 영(靈)’ 자를 쓴다. 도인이 될 영이 아닌 영험(靈驗)함을 발휘하는 영(靈)이디. 그런 영암에 ‘선암(船岩. 仙岩)’ 이라는 마을이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완도 장도는 선구자적 암적인 존재로 기운을 받고 태어나게 만든 일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며, 환경조건이 열약하다. 있다면 그가 선암의 영험함의 기운으로 완도 장좌리에 청해진을 두어 선암의 덕택으로 완도가 장보고라는 한 인물로 덕(德)을 입었을 뿐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크게 활동을 했던 완도는 ‘완성도(完成度)-Level of Completion’ 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우두머리를 낳은 영암은 영출암(令出岩)-Rock that Gave Birth to The Leader라고 볼 수 있다. 영암 선암이 궁복=장보고 같은 우두머리를 낳아, 그가 완도에서 군사기지.무역기지의 ‘청해진’ 이라는 완성도로 신라 최고 걸 작품을 만든 신라 국보적인 인물로 남게 했다.
●청해진은 선암자 완도시로 추진
확장정책, 보호정책, 인물정책의 의미를 한 장보고를 선암이 선구자적(先驅者的)으로 나서게 해줘, 완도는 완벽한 도시의 해양도시 신라를 건국하는 일, 선암사람(장보고)의 힘을 얻어 나라(신라)는 완성된 도시로서의 완도에 해양도시를 구상, 〈선암자 완도시〉프로젝트로 추진했다.
이런 프로젝트는 ‘안정 속에 지평을 넓혀 선점하다’ 주제로 진행됐다. 경제.외교, 학술.문학, 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의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장보고는 이러한 주제로 신라를 넘어 영역 끈질기게 탐색, 무역의 동시대적 지평을 넓혀갔다. 그는 ‘사고를 확장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라’ 정신을 바로 세우고, ‘외교지평 넓혀 안보 강화, 경제성장 이끌 것’ 이라는 강한 신념과 의지로 똑 부러지게 해냈다.
시행자: 신라 조정
설계자: 장보고
시공자: 청해진
이런 참여로 해양도시는 건설됐다. 국제자유무역의 창구 중심지로 역할을 띤 해양도시는 신라+선암+장좌리의 합작품이다. 장보고의 꿈의 실현은 선암이 그 길을 터졌으며, 당나라에서 기술을 배워, 완도에서 꿈은 현실적 완성품(完成品)으로 탄생됐다. 이런 일은 천지창조의 영험함을 가진 한 인간, 신화창조적(神話創造的)인 장보고라는 한 인물에 의해 한 시대를 새롭게 열어줬다.
장보고시대, 그 시기는 8시기 말 9세기 초다.
장보고는 이 시기에 질서(秩序)를 잃은 아주 불안하고 혼란한 바다를 정복(征服), 평화로운 바다로 잔잔하게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조정에서는 왕권(王權) 다툼으로 ‘어지러울 난(亂), 나라 국(國)’ 이었다. 난국(亂國)을 평정(平定)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원망(願望)보다는 ‘원망(怨望)’ 이 더 가게 되고, 그런 일을 하지 못했던 게, 또한 원망(遠望)으로 남는다. 앞날의 희망으로 남겨뒀던 게, 이 또한 ‘절망(切望)’ 이다.
장보고의 가슴에 새겨진 ‘망(望)’ , 바라는 그 망이 네트워크의 망(網)이 됐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이루지지 못하고, 했다면 무역(貿易)이라는 해양에서의 진행했을 뿐, 왕족들과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그 다툼이 그칠 줄 모르는 조정과는 자신의 망(望)을 원활하게 확실히 연결하지 못했다. 장보고 개인에 있어서는 한(恨)으로 가슴을 쳤고,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장보고는 해양 질서는 바로 잡았지만, 조정 질서는 그러지 못했다. 평화로운 바다는 희망의 춤을 추고 있지만, 조정의 바다는 ‘절망(絶望)의 춤’ 을 추었다.
●궁복이라는 이름, 궁예와 연관성은 난센스
바다를 지배했던, 해상부역과 해군력을 이끈 신라의 전설적인 해상왕 장보고로서 신라왕국의 완성, 국가 위상 최고 경지에 이르게 한 인물로 기억될 만한하다. 궁복, 장보고 그 이름 속에 감추어진 그 신비를 드러낸, 장보고는 글로벌 중추국가로서의 위상을 다지는 등 어진 사람, 힘의 초월 〈궁복〉 과 확장-張, 보호-保, 제왕-皐의 〈장보고〉 에 대한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아이러니(irony) 한 것은 후고구려 건국자 궁예(弓裔)와 관련된 속설(俗說)이다. 장보고의 딸이 바로 궁예의 어머니라는 설(說)이 있는데, 이유는 궁복(弓福)과 관련시켜 본 ‘궁예(弓裔)’ 라는 이름에서 연관성을 찾은 것이다. 잘도 엮어낸 그럴듯한 장보고와 궁예와의 야사(野史)이다. 신라말기 45대 신무왕(김우징)의 셋째 아들이자 49대 헌강왕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한 광산김씨(光山金氏) 후손이라는 설도 나도니, 과연 장보고가 정말 그런 관계라는 것인지, 역사는 사실적인 것도 있고, 가설적(假說的)인 것도 있는 역사이야기는 지어내거나 꾸며낸 소설 같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이런 말이나 행동이 실제 의미와 정반대가 되거나,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아이러니도 Situational-상황적 즉, 인물의 역할이나 기대와 다른 실제가 일어나는 경우다. 상황적 아이러니는 ‘극적’ 아이러니로 독자는 알지만, 등장인물은 모르는 정보가 존재해 긴장을 만들고, 또 구조적 아이러니로 전체 서사가 기대와 반대되는 모습으로 전개됨이다.
장보고에 대한 아이러니, 사실이 아닌 사실로 전해지는 일은 모순된 점이 있다. 아이러니는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 같은, 아무 의미가 없는 뜻인데, 난센스(nonsense) 같은 느낌도 든다.
장보고에 대한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실제와 반대되는 뜻으로 말하는 것 같다. 신라에서 시작된 장보고 아이러니, 그리고 중국 당나라에서 보여준 아이러니, 그 모순된 점들이 의외로 장보고라는 인물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부각시키며, 극적 긴장감과 캐릭터의 매력을 동시에 높이는 것 같다. 장보고란 인물의 독특한 면모나 반전(反轉) 매력을 강조한다. 그의 숭고함이 오히려 개인의 희생과 인간적 고뇌로 드러나는 아이러니가 인물의 진정성을 부각하고, 인물의 진정성과 개성(個性)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바다를 지배(支配)한 해상왕(海上王), 장사(掌事) 수단이 뛰어난 무역왕(貿易王) 장보고의 아이러니는 인물의 행동이나 선택이 예상과 달라지는 데, 국민의 몰입을 높이고, 인물의 입체적 모습을 드러낸다.
장보고가 어느 집안 출신이던, 이름이 뭐든, 누구와 관련됐던 간에 그의 아이러니는 안 어울리는 것, 둘이 만나서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은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장보고, 그 이름의 의미 있는 심오하고 위대하다. ‘나라를 지키는 제왕’ , 즉 ‘국토왕(國土王)’ 의 장보고가 되라고 지은 이름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통해 이름값을 톡톡히 했는데,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모두 극복한 위대한 군주(君主)로, 1200년이 지난 현대 사회에서도 통치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推仰)받고 있다.
역사에 기록 장보고가 ‘궁씨(弓氏)’ 다. ‘공씨(孔氏)’ 다 여러 성씨가 있거나, 장보고의 딸이 낳은 아들이 ‘궁예(弓裔)’ 다. 장보고는 ‘완도(莞島)’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등의 장보고에 대한 미스터리는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있어, 장보고에 대한 미스터리는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으며, 그 신비(神秘)로움이 더욱 증폭(增幅)되고 있다.
장보고의 계보는 장백익→장보고→장우→장첨→장원→장정필로 장씨(張氏) 족보(族譜)로서 알려진다. 이 계보(系譜)는 장보고가 해신(海神)으로 알려진 이후 원래 성씨를 빼고 장씨(張氏) 성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추측해보건 데, 장보고는 정년(鄭年)과 같은 성씨, ‘정씨(鄭氏)’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봄이다. 정년과 같은 집안으로 보인다.
●정년은 장보고와 같은 마을 태생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서 활동했단 정년(鄭年)에 대해서도, 그의 출생지는 알 수 없다고 밝히지만, 사실 정년은 장보고와 같은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정년은 장보고의 고향인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출신이다. 신라 신분사회에서는, 그것도 귀족사회에서 천민, 평민들은 이름조차 밝힐 수 없는 제도라 장보고와 정년은 역사 기록에서는 찾아보질 없을 수밖에... 장보고는 수영도 잘하고, 무예에도 뛰어난 정년과 경쟁심을 키우며 자랐고, 성장해 해상왕, 무역왕이라는 칭호로 훌륭한 인물로 남았다. 마을 분들은 장보고가 정년을 참 예뻐했고, 아꼈고, 잘 보살폈다고 전한다. 우애가 매우 깊었다고 둘과의 관계를 좋게 본다. 선암의 인물, 보배라고 여긴다.
장보고와 정년, 어릴 적부터 형, 동생하며 지냈던 일과 당나라에 간 장면이 그려진다.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앞바다에서 놀았던 시절, 국두암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던 일을 상상해보는 마음, 그가 한 시대를 군림했다기보다는 신라는 물론 여러 나라와 무역으로 평화(平和)와 질서(秩序)를 유지하게 했고, 번영(繁榮)을 기했다는 점이 글로벌산업역군, 〈세계적인 제왕이로소이다-King who is very powerful〉 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장보고의 이름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그의 활약상은 훌륭했고 위대했다. 지략가(智略家), 전략가(戰略家), 정치가(政治家), 경제인(經濟人), 상업인(商業人) 등 다방면에서 능력과 끼를 보여줬다. 그는 지장(智將), 덕장(德將), 용장(勇將)을 갖춘 고차 방정식으로 일들을 펼쳤고, 추진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낸 그다. 정치는 정치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장사는 장사꾼대로 배울 점이 많은 장보고다.
남다른 기품(氣品)이 있어 보이는 골격(骨格)을 갖춘 기골(奇骨)과, 건장한 체격을 갖춘 기골(氣骨)의 장대한 그를 상상해보면서...
바다 위에서 호령하는 그를 생각하면서...
궁복의 복은, ‘귀(貴)의 복(福)’ 으로써 장보고는 귀한 사람이 될 생김새나 체격을 갖춘 귀골(貴骨)다운 장군감이라고 여겼다. 귀격(貴格)으로 생겼다. 귀태(貴態)가 있다는 말로 그를 인식한다. 귀댁(貴宅).귀문(貴門)의 집안은 아니지만, ‘귀공(貴公).귀관(貴館).귀재(貴在)’ 의 장보고로 본다. 통일신라라는 귀국(貴國).귀방(貴邦)에서 ‘무릇 높은 것, 높여야 하는 것, 드문 것, 흔하지 않은 것, 공경 받는 것, 공경해야 하는 것’ 이 귀이다. 또한 ‘고귀한 것, 희귀한 것, 존귀한 것’ 이 귀(貴) 이다.
이처럼 보편적.개방적인 가치개념에서의 귀(貴)가 한국인 ‘복(福)’ 의 표상에 있어서는 ‘높은 지위, 높은 벼슬, 곧 관직(官職)’ 으로 이해되고 있다.
●획기적인 공을 세운, 해신이 된 장보고
신라 남해안의 섬 완도 청해진을 거점으로 삼아, 당나라로 건너가 무역과 군사 활동을 펼친 인물 장보고, 최초의 자유무역인 장보고는 완도 앞바다 섬 장좌도.장군도 등에 청해진을 건설해 해상무역과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신라 남해안의 여러 섬을 연결하는 해상로를 통해 당나라 산둥반도 등지로 이동했다. 당나라 산둥반도 등 신라인 집단거주지인 ‘신라방’ 으로 건너가 무역, 군사, 불교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완도 청해진을 거점으로 당, 발해,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개척해 신라 해상권을 확립했다. 당나라에서 신라방과 불교사찰인 ‘법화원’ 을 세워 신라와 동아시아 행상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장보고는 섬과 바다를 기반으로 당나라까지 진출해 ‘신라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인물’ 이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700년대 후반~80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우연찮게도 같은 시기에 중국 당나라도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중국과 한반도의 바다에는 해적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해적들은 바다의 길목을 차지하고 지나가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받거나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배를 습격해 타고 있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했다. 바다를 오가는 신라 사람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 이런 상황 속에 장보가 태어났다. 그는 백성들이 해적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는 청년이 되자 가난한 신라를 벗어나 당나라로 갔다. 신라 41대 헌덕왕 8년, 굶주린 신라 백성 170여 명은 구걸을 위해 당나라 절강으로 배를 타고 떠났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부터 녹읍(祿邑)이 부활되면서 귀족들의 세력이 커진다. 녹읍제도의 부활로 지역민 조세, 노동력 수탈이 가능해서 귀족세력이 강화되는 등의 귀족이 대토지 전장을 소유해 불법 면세 혜택이 증가하고, 반면 귀족 대신 세금을 내느라 빚더미에 백성들은 떠 앉게 된다. 살길을 찾아 당나라나 다른 나라로 백성들은 떠난다. 청년 장보고도 당나라를 떠났다. 당시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8세~9세기 중반 귀족들의 왕위찬탈이 치열했고, 혼란기에 있었다. 그만큼 중앙정치가 혼란했던 것이다. 신라는 고위층으로 진급하려면, 진곡귀족 외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신라 수도 경주 거주민 왕경인과 지방민이 차별받았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신라를 떠나기로 친구인 정년(연)과 함께... 그렇기도 했지만, 사실 당나라가 지원자에게 봉급을 주고 병무에 복무하게 한 외국인 〈용병정책〉 은 유명했다.
장보고가 이 소문을 듣고 당나라로 갔을 거라는 추정도 한다. 당나라는 평민들도 성씨를 갖고 있었다. 무령군에 소속되어서 이름을 궁복.궁파에서 ‘장보고’ 로 개명했다. 당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씨가 장씨(張氏)였던 것, 성을 장씨로 한 것 이유가 정말 그랬을까? 그곳 서주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세력 아래에 군인으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우며 출세했다. 그곳에서도 신라 백성들이 붙잡혀와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9세기 당나라는 최대 강국이었다. 이곳에서 장보고는 서주의 외국인 용병부대 무령군에 입대해 따라올 수 없는 출중한 무예 실력을 인정받았던 장보고, 지방 반란군 토벌 임무를 맡았던 장보고, 당나라를 위해 싸우는 외국인 용병이 되었던 장보고는 828년에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신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남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동포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당나라로 건너 온지 23년(805년 출국, 828년 귀국) 만이었다. 애국심에 불탔던 장보고는 귀국해 곧바로 흥덕왕에게 “병사 1만 명만 주시면 해적들을 소탕하고 바닷길을 되살려 놓겠습니다.” 라고 알현, 흥덕왕이 병사를 주며 청해진에 진을 세우게 하고, 그에게 청해진대사라는 관직을 내려 획기적인 공을 세운, 해신이 된 장보고...
장보고는 서둘러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흥덕왕 3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해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하옵니다.”
“제가 그 일을 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바다에 군사기지의 쳥해진을 설치해 외적 침입을 막고, 해양 질서를 바로 잡아야 됩니다.”
“군사기지는 물론 신라가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무역을 해야 합니다.”
“무역은 부강한 신라를 만드는 일입니다.”
“무역으로 신라 문물을 해외로 알리고, 해외 문물을 도입해 그로인한 신라의 정치.경제.문화.사회가 더욱 발전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청해진은 국가안보의 군사기지이면서 영토확장과 국제자우무역의 창구역할을 띠게 될 다목적인 진지입니다.”
“국제적인 군사.무역을 갖춘 것이 원대한 저의 꿈을 펼치게 해주시옵나이다.”
장보고의 애국심에 감동을 받은 흥덕왕은 오늘날의 완도인 청해진에 진영(陣營)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통솔해 관리하는 대사(大使) 역할을 맡게 해주었다. 완도에 성(城)을 쌓아 항만시설을 갖춘 다음 선박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는 병사들을 지휘해 해적(海賊)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海上權)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창과 활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지만, 그는 그의 출신 성분 때문에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혀 있어,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으로 관직에 오르며, 안정된 생활을 하던 장보고는 신라가 해적출몰.인신매매 성행의 충격을 받고 결국 고민 끝에 다시 고국 신라로 들어와 청해진이라는 곳에서 큰 업적을 세운 인물로 남는다.
장보고는 당나라.신라.일본 잇는 삼각무역으로 해상왕국 건설을 이룬다. 징보고는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해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나아가 그는 신라중심 청해진, 청해진 중심으로 신라인 사회로 하여 당과 일복 등으로 연결하는 무역망도 구축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다. 이렇듯 장보고는 바다 위를 아우르는 중계무역(中繼貿易)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해상왕 장보고’ 라는 명성을 떨치게 된다. 해상왕, 보고(保皐)가 보고(寶庫)가 됐고, 보고는 보배(寶陪)가 되었다.
장보고는 신라인이라는 단어를 바다 건너까지 확장시킨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신라인의 이름으로 국제무대를 움직이었다. 장보고는 바다 위 상인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인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너무 커졌고, 경제력+병력+외교 능력까지 갖춘 그는 신라 중앙정부와도 긴장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딸을 왕족에게 시집보내, 왕실 내부에도 영향력을 넓히려 한다.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찌됐던 장보고의 야심은 대단했다.
●장보고의 균형정책, 그리고 동반성장
확장정책+보호정책+인물정책의 뜻을 품고 이름을 장보고라 했다. 자신의 이름의 신조(信條)이며,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통일신라 대전환’ 이라는 거창한 구호로 세계 속에 진리라는 ‘해상무역개척’ 으로 신라번영을 구상했다. 그리고 ‘통일신라는 합니다’ 라고 해됐다.
장보고의 18년간의 청해진 대사직 임무수행은 〈국제자유해상무역〉 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 해양 질서를 잡음과 동시에 바로 해양로를 개척하고 무역(貿易)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자유무역주의와 신보호무역주의’ 를 병행했다. 시장 개방과 관세 철폐를 하면서도 경제 안보와 자국 산업 보호에도 함께 진행하는 등의 〈자유무역+신보호 무역주의〉 패러다임으로 무역을 추진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엄격하고 세분화된 통관 규정을 도입, 변화하는 무역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역량은 신라만의 글로벌 비즈니스의 필수 요소로 저리 잡게 했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대전환을 〈무역〉 에서 찾았다. ‘나라의 부강은 무역에서 찾아야 한다’ 라는 정의를 내리고, 〈동아시아의 거대한 장벽, 무역 보호주의 강화가 글로벌 세계에 미치는 파장〉 이라는 전제를 달고, ‘무역이 신라를 바꾼다. 신라 무역이 세계를 움직인다’ 라는 긍정적인 비전전략을 세우고, 해외 진출은 신라에게 분명 힘겨운 도전이지만, 치밀한 전략과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현명하게 대웅하고 추진한다면, 세계 공급망의 핵심 주역으로 동 도약하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 희망으로 변화하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신라 경제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면서 통일신라, 국제자유무역의 황금기는 시작됐다면서 장보고가 주축이 되어 추진하는 신라의 국제자유무역이 세계 무역의 판도가 변화를 불러들이는, 그것도 자유무역주의자들이 바라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장보고가 추진한 경제적 개방성이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무역은 권위주의 정권을 더 평화적인 행위자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국가들이 함께 합의한 무역 규칙에 대한 약속을 기반으로 한 다자주의가 시작됐다고 봤다.
국제자유무역의 황금기는 기대에 기대를 낳는 등의 전략적 동맹, 다변화 공급망, 목표가 명확한 무역협장들이 앞으로의 세계 상업 질서를 형성할 것이다 라며 낙관적인 사고로, 다자주의 정책으로 신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환을 더 불안정한 세계에 대응하기 위한 필연적 조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렇게 할 때, 신라는 회복력과 안보를 우선시하는 무역정책을 설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경제 안정성과 국가 이익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정책 마인드로 신라국제자유무역을 추진한다면, 신라는 훨씬 부강한 나라로, 부유한 삶으로 진전되고 균형적 발전을 기할 것으로 봤으며, 이게 ‘동반성장’ 이라고 했다.
장보고는 신라의 미래는 〈국제교류〉 에 달려져있다고 봤다. 국제적인 교류만큼 훌륭한 정책은 없다고 보며, 그는 해외무역에 손을 댔다. 중계무역으로 신라의 물품들을 세계로 진출시켰다. 그리고 좋은 물품들을 받아들여 신라와 경쟁력을 도모해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도록 했다. ‘문화가 문화를 낳고, 경제가 경제를 진전시킨다’ 고 하면서 그 바탕에는 ‘무역’ 이라고 강조했다.
1000년 전 이미 대한민국은 장보고의 정책마인드에 세계의 눈을 떴다. ‘세계로 눈을 돌려라’ 라고 기치를 내걸고 “그것만이 신라가 사는 길이요. 부강한 신라로 나아가는 길이다” 라고 주장했다.
통일신라 대전환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무역을 통한 신라번영, 통일신라는 합니다” 라고 자신감을 키웠고, 의지를 다졌다.
●해적을 막고, 사람을 살린 큰바위얼굴
그 시대 해적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국가 간 무역과 문화교류를 해방하는 재앙이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해적을 소탕했고, 당나라에서 고통 받던 신라인 유민들을 보호하고 구조했다. 이익보다 ‘질서’ 를 먼저 생각한 장보고는 무역을 하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이런 장보고의 깊은 뜻을 보니 월출산 〈큰바위얼굴〉 이 떠오른다. 영암에서 세계적인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예시를 한 구정봉의 큰바위얼굴이... 큰바위얼굴은 바로 ‘장보고’ 로 보고 싶다.
●청해진, 바다 위의 도시국가
828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허락을 받아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다.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기지가 아닌, 해적 소탕.무역.물류.정보 거점이 모두 어우러진 ‘해상복합기지’ 였다. 그곳을 기반으로 그는 당나라, 일본, 신라를 잇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실제로 바다 위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 〈장보가 만든 국경 없는 나라-It's a borderless county that Jangbogo〉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고, 변방의 위협을 직접 겪으며, 해상방어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당나라에서의 경력은 그를 귀화 장수가 아닌 〈해상 전략가〉 로 성장시켰다. 이후 그는 귀국하면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바다를 이용한 〈글로벌 설계자〉 가 되기 위한 시작을 준비한 장보고로 기억되게 한다.
그는 칼보다 배를 탔고, 권력보다 바다를 먼저 움직이었다. 장보고는 장군이라기엔 너무 많은 돈을 벌었고, 상인이라기엔 너무 큰 바다를 지배했다. 무역과 해적의 소탕, 정치와 군사로서 명성을 떨친 장보고, 그는 단순한 위인이 아니라, 신라인으로서 가장 글로벌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가 잘 몰랐던,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특히 그의 탄생설화는 이미 점쳤다. 그가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것임을...
●파란만장한 장보고
전남 영암 출생(덕진면 운암리 선암)→궁복 또는 궁파로 성장→당나라로 감→서주에서 군사로 활동→나라걱정 귀국→서해출몰 해적 퇴치→바닷길 차지→해상교역 주도→사업번창→당나라 오가는 머물 공간 법화원 설치→신라인 숙소 호텔체인 신라방 건설 등으로 장보고 세력 커짐으로 왕실 반란 휘청→김우징 청해진 피신→왕 즉위 약속→장보고 딸 왕비 약속→김우징과 장보고의 반란 성공→신무왕 즉위→신무왕 1년 만에 서거→신무왕 아들 문성왕 즉위→장보고 딸 왕비 약속 거절→배신당한 장보고→왕실 장보고의 반란 예상→귀족의 부탁 염장한테 암살→해상왕 장보고 최후 비참→청해진 해체→신라 위기→신라 패망
이런 장보고의 생애를 추적해볼 수 있다.
장보고는 한국의 삼국사기, 중국의 신당서, 일본의 속일본후기 등 동아시아 3국의 정사(正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신라 42대 흥덕왕 때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1,200년 동안 동아시아는 물론, 동남아, 페르시아까지 전 방위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무역 왕이요. 당시 잡다한 해적들을 소탕한 해상 왕이다. 국권의 일부를 행사한 청해진대사 등 갖가지 수식어가 붙는 인물이다.
●장보고의 청해진 구상
오늘날 전라남도 남쪽 완도에 위치한 청해진은 물길이 복잡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다도해를 낀 바다이기 때문에 이곳은 물길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해를 하기가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완도의 물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이곳은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해,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장보고는 여기에서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에 안전보호 장치까지 설치해 놓고, 청해진을 최고의 국제무역항으로 만든 것이다.
국제무역항은 세계 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고, 막강했다.
●최초의 자유무역인 장보고
828년, 청해진의 시설을 보고 놀란 신라의 42대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청해진 대사’ 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1만 명의 병사를 주어 당나라의 해적과 일본 왜구를 그때부터 장보고의 본격적 무역활동이 진행되었다. 그가 해상권을 제패함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해적활동을 하던 무리들을 깨끗이 소탕하였다. 장보고의 무예나 전략도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풍채와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만 보고 듣고도 기겁을 했다. 그는 당나라의 물건을 일본에 파는 중계무역을 시행하였다. 이름 하여 무역상인 오파상이다. 또한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9세기에는 장보고만이 일본과 교역을 계속하였든 것이다. 그만큼 장보고에 대한 신뢰와 교역사상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열게 했던 것, 9세기에는 바야흐로 동서양 교역의 초창기였기에 실크로드를 따라온 이슬람, 페르시아 물건들은 장보고를 거쳐 신라와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장보고의 무역교역술이 뛰어남을 증명한 일이다.
●중계무역에서 가공무역으로
장보고는 국가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 무역선단이었다. 그는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신용거래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아가 장보고는 유통무역의 한계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신라와 당나라, 신라와 일본과의 거래에 그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고민 끝에 이슬람까지 탐을 냈다. 당나라의 독점 수출품목 사기그릇인 ‘월주요’ 의 수여가 늘자, 이를 제작까지 하여 동아시아 3국에 공급하였다. 이는 당시에 파산되었던 상선의 발굴에서 오늘날까지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9세기경에 현대와도 비슷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던 장보고 무역산단(貿易産團)의 힘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장보고는 물품이 운송되는 물류창고이자 정보의 집결지인 운하를 최대한으로 활용을 해서 정보기지를 구축하였던 것
●국제무역을 가능케 한 힘
8세기 말부터 많은 신라의 서민들이 가난과 골품제도를 피해 당나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자치조직인 ‘신라방’을 거점으로 결집하기 시작하여 특산물 생산과 항구가 있는 해변을 장악하고, 9세기에는 당나라의 물류를 석권하였다. 장보고는 당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던 제당 신라인을 하나로 통합함으로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가 무역을 크게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 나서서는 지속 할 수 없습니다.”
“장보고를 중심으로 하여 무역을 국제무역으로 키워나갑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미천한 바닷가 사람 장보고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미천한 섬사람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섬이 아닌 월출산이 있는 육지의 영암이라는 ‘선암마을’ 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서남해안 어느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과 신분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당나라로 건너 갓을 것이다. 장보고는 그의 본명인 궁복에서 이미 그때부터 해외진출무대를 꿈꾸었을지도...
장보고는 태어날 때 그를 보고 장치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봤다. 활을 잘 쏘는 아이, 복덩이여서 귀한 존재의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가 성장해 반드시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그를 당나라는 뛰어난 무예(武藝)를 갖춘 궁복에서 장보고로 개명한 그를 무령군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후에 그는 신라인 노예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끌려오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실질적인 신라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법화원을 세웠다. 신라인을 보호하고나 숙소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때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당과 신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이 장보고를 우두머리로 하여 보다 강화되고 대규모화 되었든 것,
장보고는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장보고는 태아니기 전부터 예시적 인물
장보고, 그는 태어나기 전 부터 예견(豫見)된 인물이었다.
과언 어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했다는 것인가?
그는 출생하기도 전에 이미 계획(計劃), 선지자(先知者)를 세우고, 그를 세운다고 봤다.
누구를 세웠단 말인가?
그를 잉태한 부모는 아이가 생기도 전에 건덕암의 부름, 그 기운을 받고 감지(感知)하기를 “애를 낳아, 그 아이가 세상의 밝게 할 것이요. 세계를 호령할 것이로다” 라는 계시(啓示)를 받는 꿈을 꾸었다. 마을 뒤 거북바우라는 건덕암이 꿈에 나타나면서...
바위신은 그를 낳기도 전에 이미 모태에서부터 궁복(징보고)를 불렀고, 이름을 생각해 두었고 이름을 기억했다. 이 구절은 태어나기 전부터가 출생 이전에 이미 선택.계획이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있는데, 건덕암의 신화에서의 세상은 먼저 존재 개념에 있어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먼저 존재했다는 전제를 전제로 세상을 만든 이야기로 전개한다. 다시 말하면 궁복은 세상이 먼저 존재했듯이 특출한 인물, 즉 신.거인 등으로 더 부상됐다는 것이다.
궁복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런 주기도문(主祈禱文)이 있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신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평안은 외부의 조건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신으로부터 완전히 평안이
이미 내 안에 주어졌음을 알고,
선택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계획이 있고 이루어 갑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멸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구원이고 희망입니다.“
“믿으십니까?”
“내 안에 완전히 평안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이 말씀들을 신뢰한다면,
저와 백성들의 삶,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아니 달라져야만 합니다.”
궁복의 부모들은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리질 것으로 믿고, 천일기도 그 이상의 기도를 하며, 달라질 삶을 기대하고, 그런 삶을 준 신을 찬양하는 성도(成道)가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정성껏 기도를 드리자, 결국 하늘에서 빛이 반짝이고, 세상에 귀한 사람을 안겨주시니, 이 놀라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감동의 순간을 맛보아...
“이게 무슨 은덕입니까?”
“세상에나! 이런 선물이...”
간밤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너는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을 받았느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덕행을 베풀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필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런 꿈속에서 들은 말을 잊지 않고 7년간 기도 끝에 가진 아들, 궁복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궁복아!”
“너는 세상에 귀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세상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무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하여라.”
선교(宣敎)는 무엇입니까?
꿈에서 신이 나타나 말씀을 하는 것도 하나의 선교이다.
신선의 복음(기쁜 소식), 명령하신 모든 것을 전해 그를 따르는 제자로 삼고, 제자들이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는 일이다. 이게 궁복이 장보고로서 실천했던 일이었다. 그는 해상에서의 모든 나라와 항구를 두루 다니면서 무역.교역에 관한 방법과 해상 질서, 그리고 에티켓 등을 지역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해상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면서 온갖 무역.외교에 관한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 신은 궁복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택(擇)하고 부르셨다.
궁복이 세상에 나오자 “너는 예언자가 될 것이다” 라고 하자 그는 “자신은 예언자가 되기에 어리다” 고 말했다. 자신은 말을 잘할 줄 모른다고 했다. 신이 말씀한 그런 일을 자신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자 “신은 어떻게 말했는가?”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신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신께서 손을 내밀어 궁복의 입에 대고 궁복에게 말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신이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는 말에 궁복은 신의 말을 잊지 않고, 신이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기겠다고 했기에 믿고, 용기를 내어 세상 사람들한테 언어술로 세상을 움직였다.
신이 궁복이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고 예언자로 부른 것처럼, 신은 오늘날 장보고를 이 땅 예언자로 불렀다. 이 땅에 신의 나라, 신의 의(義)를 이루어가는 성도, 장보고가 되었다.
궁복.궁파.장보고라는 이름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서 이름이 지어졌고, 그 이름에서 담긴 의미대로 실천하기를 바랐다.
장보고가 태어난 마을 선암, 마을에 있는 거북바위가 훗날 ‘건덕암(乾德岩)’ 으로 불리게 됐는데, 임금(乾)이 될 만한 덕(德) 있는 큰 인물이 나올 것을 예시하는 바위가 될 줄을, 이 바위는 궁복, 장보고라는 덕장(德將).용장(勇將).지장(智將)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는 영험을 보였고, 또 마을 앞에 있는 궁복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너럭바위인 국두암(國頭岩)은 궁복이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서, 청해진 대사로서의 해상왕(海上王)이 된 나라(國)의 우두머리(頭)가 됐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됐는데,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시(豫示)된 일이라고 하니, 영암 선암마을은 신(神)의 계시를 받은 신령스러운 고을이라고 볼 수 있다.
●장보고에 탄생설화는 영암 선암에서 전해진다
장보고가 그의 나이 40세 이르러 완도 청해진에서 18년 동안 큰 활약을 해서, 그 곳에 장보고와 관련된 유적지와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만, 그에 대한 관련설은 전라남도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에도 궁복에 관한 유적지들이 있다. 자식 낳아달라고 치성을 드린 건덕암과 배를 탔던 국두암과 인근 활을 쏘는 훈련장이다. 역사에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출생지를 일리는 기록은 없지만, 궁복.장보고는 그런 관련설을 따라, 그 바위들을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파악해 〈영암 선암〉 에서 태어났음을 밝히고자 한다.
마을사람들은 왜 구전(口傳)에 구전으로만 전할까?
이제는 떳떳하게 확실히 그의 탄생지는 이곳 〈영암 선암〉 이라고 해야 된다. 그리고 장보고를 훌륭한 인물로 만든 ‘건덕암과 국두암’ 을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전해야 한다. 장보고의 본명 ‘궁복’ 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 살펴보면서 말이다. 궁복(弓福)은 ‘어진 복덩이’ 라는 뜻이다. 그리고 궁복의 궁(弓)은 인근 마을 활을 쏜 군사훈련장과 성이 있는 ‘활성산과 궁성산’ 에서 연유(緣由)됐다는 것을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보고장’ 으로서 지키는 ‘제왕’ 으로서 ‘확장(擴張)’ 시켜 가겠다는 의지, 자신의 야심이 담긴 이름이다.
●선암의 船은 꿈을 향한 희망선
장보고가 태어난 선암마을은, 선암은 배를 닮은 바위라고 해서 ‘배 선(船)’ 자를 써 ‘선암(船岩)’ 이라고 하기도 하고. 신선이 머물렀다고 해서 신선 선(仙)자를 써 ‘선암(仙岩)’ 이러고 불린다. 배선 선(船)자는 여덟 가족이 구원 받은 네모난 모양의 배 ‘방주(方舟)’ 를 뜻한다고 풀이한다. 배 선(選)의 왼쪽 글자는 방주(舟), 오른쪽 글자의 여덟 팔(八)은 배에 들어간 사람의 숫자, 그리고 입 구(口)는 대홍수에 대하여 계시해주는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글자라고 해석되고 있다.
배 선(船)자는 옛날 공고와 화적이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노를 만들어 통하지 못하던 곳을 건너게 하였다.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노를 만들어서 배와 노의 이로움은 통하지 않는 곳을 건너게 해주고, 멀리 이르러 천하를 이롭게 하는데 있다고 하여 대홍수에서 살아남아서 온 천하의 인류를 번성케 했다는 것이다.
또한 배 선(船)자는 금문과 소전에서 배 주(舟)와 산속 늪 연(㕣)을 그렸다. 해서에서 배 선(船)을 그렸다. 배 주(舟)와 산속 늪 연(㕣)의 합자인 배 선(船)자는 갑골문과 금문에서 조그만 통나무배를 그렸다. 소전에서 배와 노를 그렸다. 배 주(舟)의 뜻은 ‘한두 명이 탈 수 있고,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 라는 뜻이다.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고, 나무를 쪼개어 노를 만들어 갈 수 없는 곳을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다. 배 주(舟)는 ‘위에서 본 배의 모양’ 이다. 산속 늪 연(㕣) 여덟 팔(팔)과 입 구(口)의 합자로써 여덟 팔(八)은 ‘시냇물에 접한 깎아지른 듯한 벼랑’ 을 뜻한다. 임 구(口)는 ‘산골짜기 입구’ 를 뜻한다.
배 선(船)의 뜻은 ‘물길을 따라 가는 배’ 를 말한다. 파생되는 뜻은 ‘배 선, 선박 선, 술잔 선, 실어 나를 선, 옷깃 선’ 이다.
배 주(舟)는 내(川), 고을(州), 나라(周)에서 비롯되고 있다. 내 천(川)은 강물의 흐름을 보아서 만들었으며, 고을 (州)는 천(川)에 가로로 一자를 올려놓은 것인데, 이는 배를 물가에서 떼거나, 물가로 델 때, 또는 물이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밀어 갈 때 쓰는 긴 막대의 ‘삿대’ 를 상징한다. 舟, 州, 周의 발음이 모두 주인 것은 이들이 모두 천(川)에서 비롯된 형제 관계임을 시사한다. 중국의 배(舟)는 ‘내륙 하천’ 에서 기원되었다. 배는 애초에 바다에서 태어난 해선(海船)아니라,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강 유역 등지에서 문화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배는 강을 오르내리는 나룻배 형태에서 기원하였으며, 이들이 차츰 해양(海洋)으로 진출하면서 돛을 달고 노를 젓는 도구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목포 쪽에서 바닷물이 유입됐던 영암 선암마을의 문화이동 뱃길도 배의 이동수단을 빌리게 된다.
요즘처럼 포구가 발달되지 않는 시대에 자연포구를 이용하기 마련이다. 배 형상을 한 너럭바위였던 ‘국두암’ 이 그렇다.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강 유역이기에 원시생활이라 할지라도 바다나 강을 끼고 살게 되면, 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필수적 이동수단은 ‘배(船)’ 일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는 그 당시만 해도 부족 간의 ‘물자교류나 고기잡이, 사냥’ 등의 수단으로도 이용했다.
주(舟)자가 발전된 ‘선(船)’ 자는 배 주(舟)변에 여덟 팔(八)자와 입 구(口)자가 조합된 글자이다. 입 구(口)는 ‘승무원’ , 여덟 팔(八)은 ‘강(江)의 양 기슭’ 이다. 주(舟)자는 ‘정방형의 뗏목’ 이다. 선(船)의 구(口)자는 승무원의 ‘양쪽 팔에 각각 삿대(긴 막대)’ 를 팔(八)자로 잡은 형상으로 보기도 한다.
선암의 배 선(船)자도 그런 연유에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대홍수, 즉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아남도록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노를 만들어 어디든지 교통.왕래할 수 있도록, 고기잡이를 나갈 수 있도록 하여 마을을 번성.번영하게 했다고 해서 마치 배 모양을 한 바위도 있기도 한데다가 마을의 자연환경을 보아 선형국임야(船形局岩也)라는 뜻에서 ‘선암(船岩)’ 이라는 이름이 붙어진 것이다. 이것은 이 마을에서 태어난 궁복이가 성인이 돼서 당년 17세 때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도 ‘선암(船岩)’ 이라는 마을 덕분이다.
궁복이 당나라에 가서 장보고로서 성장했던 것도 자신이 태어난 마을 이름 ‘선암(船岩)’ 이라는 것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정신을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선암의 희망, 선암이 장보고를 꿈꾸게 해줬던 것이다.
배와 노를 만들었다는 것은 ‘항해(航海)’ 를 뜻하는 것으로,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추진한 이유도 ‘배 선(船)’ 자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항해(航海)의 선(船)은 무역(貿易)의 선(船)이었던 것, 무역의 선(選)은 해상로(海上路)라는 ‘교량선(橋梁船)-Bridge Ship’ 이며, 새로운 분야를 처음 열어 나가는 ‘개척선(開拓船)-Pioneer Ship’ 과 범위.규모.세력 들을 늘려서 넓히는 ‘확장선(擴張船)-Extension Ship’ 이었다. 이는 또한 다른 나라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를 맺은 ‘외교선(外交船)-Diplomacy Ship’ ,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문화선(文化船)-Culture Ship’ 의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발판을 삼은 ‘교두보선(橋頭堡船)-Bridgehead Ship’ 이었고, 서로 왕래하거나 물자를 주고받는 ‘교류선(交流船)-Exchange Ship 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서로 물품을 사고팔고 하는 ’무역선(貿易船)-Trade Ship(Merchant Vessel)‘’ 이었고, 사람.집단.사물 등을 자기 의사대로 복종시켜 부린 ‘지배선(支配船)-Rule Ship’ 이었고, 군대.군비 등에 관한 일의 ‘군사선(軍事船)-Military Ship’ 이었다. 이것은 〈선암+청해진+무역+교통+외교+장보고〉 라는 등식(等式)이 성립됨이다. 영암 선암 건덕암의 영험함과 국도암의 번성함,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아이로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러한 배의 의미로 항해(航海)가 시작됐다. 선암(船岩)에서부터...
장보고가 된 궁복은 ‘선복(船福)’ 되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는 등의 당나라와 일본, 동남아를 상대로 하여 해양을 무대로 ‘국제교류, 무역.방어.항해’ 를 수행하며 국가의 역사를 이끈 인물.직업 행사로 크게 활약했다. 배를 총지휘하며 운영하는 ‘선장(船長)-Caption Ship’ , 배로 지키는 ‘보선(保船)-Guard Ship’ , 배로 해상왕이 된 ‘선고(船皐)-Sea King Ship’ 다. 해상왕 장보고는 ‘무역의 왕자-Korean Merchant Prince’ 이다.
선암은 직역하면 배와 노로 바다를 항해케 하는 바위가 있다는 것인데, 그 배 바위를 누가 탔던가, 바로 완도 청해진에서 배로서 바다를 항해하며 해상 정복.제패를 한 장보고다.
선암은 배 선(船), 신선 선(仙)자를 쓰기도 하지만, 장보고라는 이름을 보면
보고 船, 船-선두(先頭), 船-선점(先占)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배를 통한 영토, 무역 등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불탔다. 이런 의미를 두고 볼 때, 선암마을은 상당한 기운이 서린 곳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장보고가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선암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장보고의 3대7 법칙
장보고는 신화적(神話的)인 천지창조(天地創造)를 일으켜서 오늘 날 지상 자연이 조물 되게 된 〈3.7〉 법칙을 적용했다. 그는 대자연 천상에는 지상 자연이 조물 되었던 천지창조 이전에 물질을 운용하는 천신(天神)들이 있었다며, 30%의 ‘탁한 세포’ 와 70% ‘양질의 세포’ 가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운용되고 있다면서 70%는 ‘노력’, 30%는 ‘하늘 자연이 도와주어 성취’ 하도록 해준다고, 천하의 장보고라도 70% 수준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다른 데에서 30%를 채워야 완전히 지식을 가지게 된다고 정의를 내리고, 자신이 70%까지 성장한 상태가 되어 나머지 30%를 잘 운용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서로를 위하는 도움이 되는 30% 삶을 살아야 만이 빛나는 마지막 일생을 살고 가게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3대7의 함수 구조가 자연의 이치로써 이 지상의 형성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에서 적용과 판단의 기준 원리가 되어 곳곳에서 함께하고 있다고, 장보고는 창해진에서의 모든 정책은 ‘3.7법칙’ 을 적용했다. ‘청해진100 성과를 이루다’ 슬로건 아래 70%는 장보고의 노력, 30%는 자연의 운으로 봤으며, 이런 법칙에 의해 해상을 창조했다. 9세기에 해상창조시기 새 역사를 썼던 장보고다.
3과 7을 더하면 10인데.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소탕.방어 등 군사, 무역.교류 등 상업적의 ‘10진법(陣法)’ 을 썼는데, 5위(衛).5소(所) 구조를 바탕으로 인원 단위를 ‘오(5)→소대(10)→중대(50)→대대(100)’ 등 5위와 ‘전.후.중.좌.우 등 5소로 확장해 청해진을 전투 및 무역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이런 진법을 활용, 운영 중 대열을 유지(維持), 기동(起動)했다.
3은 자신이 당나라 무령군에서 근무기간 23년의 3과, 당나라로 갔던 나이 17세의 7을 딴 것이기도 하며, 23에 17을 더하면 40이다. 40은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다시 들어올 때의 나이다. 그는 나이 40,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불혹(不惑)’ 에 제2의 꿈을 펼쳤다. 나이 50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 하늘이 뜻을 헤아려 알게 됐다. 그런데 장보고의 인생 파도가 가장 많이 일렁이는 때였다는 것, 그는 중년(40~49세)에서 장년(50~64세)에 이르러 파고는 더 높았다. 지천명이 되면서 잔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 파고는 큰 물보라를 쳤고, 물보라는 바위를 삼키는 장면들이 연출됐다. 58세의 이르자, 강풍을 만난 파도로 더 무섭게 닥쳤고, 결국 그는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됐고, 원하지 않는 사건이 벌여졌고,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다. 암살(暗殺)이다. 하루 전까지도 그리 파도는 성낼 정도는 아니었는데, 왠지 파고(波高)가 심해 날씨가 안 좋다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자신이 자객(刺客)한테 처참하게 당할 줄은 예상을 못했다.
저놈의 파도가 바위를 치네
소리가 원성 내는 듯하구나
그런 날에 조정에 손님이 찾아왔으니,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찾아온 이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파도가 바위를 엄습하며 치듯이, 염장이라는 놈이 갑자기 돌변해 칼로 장보고를 쳤다.
장보고는 지천명에 이르자, 파고는 높아졌고 잔잔하지가 않은 나날들이었다. 민애왕을 처단한 일,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려다 실패한 일, 그리고 견제구를 날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등 편안한 삶은 아니었다. 평화로울 날이 없었던 그는 불혹의 나이 40세에 신라에 들어 외 청해진을 설치했던, 자신의 사망 나이 58, 그 58을 5X8=40이다. 이 수치의 함수관계는 묘한 관계로 그저 놀라울 뿐이다. 17(당나라 갔던 나이), 23(당나라 정착 및 무령군 군무기간), 40(귀국시기 및 청해진 설치), 18(청해진 대사 근무기간), 58(사망 나이) 이 수치들의 상관관계가 어쩌면 이렇게 연관성이 있는지, 신비할 따름이다. 만약 17이 아니고 20, 40이 아니고 43이였다면 58이라는 숫자가 나왔을까하는, 운명(運命) 앞에 묻고 싶어진다. 그 수치가 아니었다면, 장보고의 수명은 더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등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과욕이 부른 죽음
이 훌륭한 인물은 결국 비참한 생을 마친다.
846년 문성왕 7년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는데, 자신의 딸을 46대 문성왕의 왕비로 삼으려 했던 일이 조정 대신과 진골귀족(眞骨貴族)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 조정에 대한 원망과 울분을 날을 지새웠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구나!”
장보고는 한탄을 하면서 속상하는 마음을 술로 달랬다.
“이 어찌 할꼬!”
“정말 애석하고 안타깝구나!”
“내기 미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이렇게 나를 업신여기다니!”
“이 설움을 누가 알아 주련가?”
“이 슬픔 누가 달래줄까?”
“이 원망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소냐!”
“이 가슴 터질듯한데, 내 마음 알아주지 않으니”
“눈물만 앞을 가리도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에게 물으면서
“난 서라벌사람이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나라를 위해 저는 당나라에서 조국을 다시 찾아 목숨을 바치면서 희생을 하고 있는 궁복, 궁파의 장보고입니다.”
“제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나를 업신여기고, 심지어 제 처자식마저도 천대(賤待)하니 죽을 맛입니다.”
“이 심정 누가 알아 주리요,”
“답답하오. 답답하오.”
가슴을 쥐어짜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痛哭)했다.
그는 궁복다운, 궁파다운, 장보고다운 이름에 빛나는 모든 영화(榮華)를 다 누렸지만, 신분상의 열등의식에 빠져 있었기에 왕가(王家)와 인연을 맺기를 염원(念願)하고 있었다. 얼마 후 조정의 밀명(密命)을 받고 거짓 투항해 온 옛 부하 ‘염장’ 을 위해 주안상(酒案床)을 차려 크게 환대(歡待)하였는데, 술에 취한 자리에서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뺏어 술에 취한 그를 단칼에 목을 치는 참수(斬首)를 당했다. 58년이라는 생애는 그때 당시에는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길다. 58은 고통의 58년이 아닌가 한다. 58년의 슬픔을 하루에 다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죽을 때는 846년 가을이었다.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지듯이 장보고의 혼은 흩날리고 말았다. 그 후 청해진마저 폐지되었다, 귀족들이 장보고의 흔적에 대해 사거리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라진 모습은 ‘이슬’ 이라고 할까? 이슬처럼 사라진 장보고, 그의 딸은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아버지처럼 이슬로 사라져서 한 방울의 물이 모여 고여서 셈을 이뤄, 샘은 넘쳐 시내를 이루고, 시내는 강을 이루고, 강은 바다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바다는 오늘도 출렁인다. 그가 혼(魂)을 쏟고 열정(熱情)을 불태웠던 청해진이 있는 완도바다, 그리고 그가 진출했던 당나라, 일본 등의 바다에서...
●육지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궁예와 아무 관련 없는 관계
장보고의 딸이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의 어머니’ 라고 한데, 정말 그랬다면 다행이다.
장보고가 태어난 곳은 섬이 아닌 육지의 〈선암〉 이다.
이런 사실을 역사의 기록에 잘 못된 서술로 다뤘다. 오보이며 가짜뉴스이다. 지금도 글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완도로 보고 있다. 이 잘 못된 장보고에 대한 태어난 고향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말 하건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그동안 여기저기서 나온 이야기들을 모아 서술한 것일 뿐이다. 일연이나 김부식은 직접 보고 느끼며 쓴 기록은 아니다. 전해 듣거나 단지 글로 전하는 것들을 모아 다시 정리해 집대성했을 뿐이다. 아무리 증거에 의해 서술했다고 하지만, 직접 보지 않는 이상, 판단과 전해온 이야기와 기록서 만으로는 100% 신뢰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조정의 지원 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의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官撰) 역사서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후기의 승려 보각국사 일연이 고려시대까지 전승되던 삼국시대의 여러 역사와 설화를 담아 1281~1283년 무렵에 저술한 역사책이다.
궁복, 궁파, 장보고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것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고, 이 이름들을 파악해보면, 장보고는 분명 완도가 아닌 영암, 그가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원인을 알게 될 것이다. 궁(弓)이라는 한자는 단순한 활을 의미한 게 아니며, 복(福)이라는 한자도 그렇다. 또한 파(巴)라는 한자도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 그리고 장보고라는 이름도 역시 비밀이 담겨져 있고, 그 비밀은 그의 활동에서 드러냈으며, 역사에서 증명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선암마을의 영혼(靈魂)이 깃든 ‘건덕암이나 국두암’ , 그리고 그가 활 쏘는 연습을 했던 ‘동백정, 활성산, 궁성산’ 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그를 증명한다.
왜 장보고라고 했는지, 궁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또는 궁파라고 불렀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기술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 같다.
장보고는 확장하다. 지키다. 부르다 라는 수식어를 좋아했고, 자신의 정신 지주로 삼았다. 영토확장, 무역확장 등 확장(擴張)하겠다는 마음으로 성을 ‘장(張)’ 을 선택했고, 나라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마음에서 ‘보(保)’ 을 자신의 이름에 의미를 뒀다. 부르겠다는 마음으로 언덕 ‘고(皐)’ 를 자신의 이름으로 구성했다.
고(皐)는 으르렁거리다. 울부짓다. 부르다(號) 라는 의미가 담긴 한자다. 대형 맹수(猛獸)가 콧소리를 내며 울부짓는 것을 뜻한다. 이 글자의 원뜻은 언덕, 못, 물가의 뜻보다는 ‘부르다. 울부짓다’ 는 뜻이 원래의 출발이라고 본다.
부르다는 고언(古言)은 ‘불리다’ 다. 불리다는 말이나 행동 따위에 주의가 끌리거나 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 이름이나 명단이 소리 내어 읽히며 대상이 확대된다는 뜻이다. 불리다는 분량이나 수효를 많아지게 하다 라는 뜻과 몸이나 마음을 굳세게 하다 라는 뜻이 내포하고 있다. 기관이나 세력 따위를 키운 몸집을 불리다. 많은 재물 따위로 욕심을 채운, 재물이나 이득을 많이 차지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배를 불리다(채우다). 이런 의미가 담긴 부르다의 고(皐)다. 부르다 옛말은 ‘펼치다’ 이기도 하다.
장보고의 이름은 몇 번이고 다루었듯이 의미심장하고 심오한 뜻이 담긴 이름이며, 장보고의 ‘내면의 세계, 세계관과 미래관’ , 그리고 ‘포부와 의지’ 를 엿볼 수 있다. 장보고란 이름이 여러 곳에서 기술하는 글처럼 그런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본다.
궁궐에서 북과 종을 치면, 소리는 밖까지 들린다. 학이 깊은 물가(皐)에서 울면,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 (鼓鐘于宮 聲聞于外 鶴鳴九皐 聲聞于天), 이 말은 당신들보다 내가 훨씬 멀리 보고, 사물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다. 학명구고 성문우천은 ‘현명한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 는 의미다. 학명구고라는 말은 시공간을 건너뛰어 사마천의 사기 골계열전에서 다시 등장한다. 제왕의 시대요. 유기적 치세와 엄격한 법치의 한 문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로운 지성의 활동은 여전했으니, 학궁(學宮)에 모인 박사들과 골계(滑稽家)들이 그들이었다.
그렇듯 장보고도 자신의 이름에 ‘고(皐)’ 자를 썼던 것도, 그런 이유나 다름없다. 영토확장, 해상확장을 하면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바로 ‘현명한 사람으로서의 세상에 드러나게 하겠다’ 는 마음이었다.
장보고는 임금을 모시고, 제대로 못한 대신이나 귀족들을 비판했다. 그는 날카로운 현실 감각으로 대신이나 귀족들의 언행을 거론하며, 비판과 조언을 병행했다. 내용은 따로 무거웠지만, 형식은 가볍고 날렵하여 해상제왕으로 불렀다. 그러나 대신이나 귀족들은 장보고를 비난했다.
왕을 섬긴 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벼슬도 겨우 시랑(侍郞)급 정도이고, 직위는 대사(大使)에 지나지 않았다. 왕을 위해 제대로 한일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대신과 귀족들은 장보고의 역할과 행동에 평가절하고, 업신여긴 것이다. 하지만 장보고는 ‘청해진(淸海鎭)’ 이라는 군사와 무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흥덕왕을 만나 자신의 포부를 설명할 수 있게 됐으며, 해상왕으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인물로서 1200년이 넘도록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 그를 다시 그리워하는 사모함, 1200년이 지난 후의 이 시대에서 사무불망(思慕不忘), 그리워하며 잊지 않는 마음으로, 그저 마음속의 간직하는 정적 그리움으로, 지속적이고 마음속의 간직으로 그를 생각한다. “장보고, 아니 궁복 아직도 그대를 그리워하는 중입니다.” 선암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한 그리움, 채워지지 않는 어떤 그리움에...
『달빛이 떴다고 문자를 주시다니요. 달빛으로 전해진 그리움의 순간, 이 밤이 너무 근사하고 멋지네요. 네 마음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휘영청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과 바우가 그려집니다. 간절한 그리움들을 사무처 오는 이 연정과 사랑을 그 사람 궁복, 그리고 장보고의 모습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호수에 달빛이 곱다고, 문자를 주시다니요. 잔잔한 호수는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아마 궁복의 발자국 소리인양, 설렌 가슴하며 기다려봅니다.』
~라고 궁복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해상무역 왕 장보고, 진정 그에 대한 상징성은 방어(防禦)와 무역(貿易)으로 해상무대를 장식한 ‘청해진과 완도’ 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다시 말하건 데, 완도가 아닌 신령한 바위가 있는 《영암》 이다. 우리는 장보고가 완도로만 알고만 있는데, 아주 잘 못된 것이고 잘 못 알려진 일이다. 사실이 아닌 진짜. 진짜보다 가짜가 더 시살적인 것에, 그런 왜곡된 역사와 기록으로 구전(口傳) 됨을 비판하고 싶다. 우리는 바로 잡아야하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가 태어난 곳은 신령(神靈)의 기운이 서려져있으며, 그는 그런 곳에서 태어났기에 청해진도 생겼고, 신라도 안정과 평화, 발전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고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가 있었다.
영암 선암→당나라 서주→완도 청해진, 장보고의 일생, 행적은 속일 수도 없고, 역사를 부정할 수도, 왜곡해서도 안 된다.
그는 영암 선암에서 태어나서 중국 당나라(서주)에서 군사가술을 익히고, 완도 청해진에서 인생의 종점을 찍었다. 장보고의 생애를 ‘선당도 생의극(船唐島 生意極)’ 라고 축약한다. 선암에서 출생하여 당나라에서 뜻을 펼쳐, 완도에서 극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또 ‘영암선암궁복(靈岩船岩弓福) 당국서주장보고(唐國西周張保皐) 완도청해진해신(莞島淸海鎭海神)’ 이라고 한다. 영암 선암에는 ‘궁복(弓福)’ 이요. 당나라 서주에는 ‘장보고(張保皐)’ 요. 완도 청해진에는 ‘해신(海神)’ 이다 라는 뜻이다. 그만큼 장보고는 선당도 생의극에 이른 ‘도달할 수 최고의 경지’ 에 올랐다는 것이다.
궁복(弓福).궁파(弓巴)라는 이름은 그저 얻은 이름이 아니다. 심오한 뜻이 담긴 ‘신명(神名)’ 이요. ‘천명(天名)’ 이다. 궁복.궁파라는 작명(作名)은 그가 태어난 환경과 자라난 삶을 담았다. 그리고 그의 ‘꿈과 희망, 미래관’ 을 표현했다. 이런 이름으로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로 이민(移民)을 갔다. 그 이민은 벼슬아치의 ‘이민(吏民)’ 이다. 그런 그가 더 원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거대한 구상으로 다시 신라에 들어와 당나라에서 배운 기술을 완도 청해진에서 펼쳤다. 그래서 〈장보고 作 청해진 展〉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거듭 강조한데, 장보고는 영암 선암마을 ‘건덕암’ 의 영험함으로 태어났다. 거북바위인 건덕암이라는 이름은 금덩이, 금쪽같은 복덩이로 태어났다하여 금복이라고 불렀고, 이름을 어진 큰 인물로 성장하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궁복(弓福)’ 이라고 이름을 지워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커서 당나라 장수와 신라 청해진대서로서의 해상왕이 되는 훌륭한 인물로 공을 세우고,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하여 칠성바위인 거북바위를 장보고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건덕암’ 으로 부르고 있다.
정리하면 장보고는
〈張-확장정책, 保-보호정책, 皐-인물정책〉 의 의미를 지닌 장보고임을 거듭 강조한다.
●영암 선암이 없었다면 장보고도 없었다
만약 장보고는 영암 선암이 있어 큰 인물로 클 수 있었다. 당나라를 갔었기에 성장했다. 완도 청해진 있었기에 장보고는 꿈을 마음껏 펼쳤다. 영암은 만물(萬物)을 생성하는 원기가 서린 정기(精氣)의 ‘월출산(月出山)’ 이 있다. 영험(靈驗)한 산이다. 궁복이 태어난 선암은 월출을 바라보고 있다. 선암(船岩)을 선암(仙岩)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쩜 월출산의 영험함이 서린 곳, ‘건덕암과 국두암’ 이 있어 마을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분출하지 않는가 한다.
당나라의 영향으로 완도 청해진이 완성되지만, 그 바탕에는 영암 선암이 있었다. 영암 선암으로 기운을 입어, 당나라 서주로 힘을 길렀고, 완도 청해진으로 미래를 그렸다.
역대급 실적 선암이 띄우고, 군사 변신 서주가 밀었고, 청해진이 해상국을 꽃피웠다. 해양시대, 교역의 경쟁력 향상과 신라의 적극적인 부양책이 박스피를 깼다. 세계적인 유동성 확대도 해상무역 상승의 연료가 됐다. 영암 선암마을은 어마어마한 인물을 탄생시켰고, 당나라 서주는 큰 별을 달아줬다. 그리고 신라는 완도 청해진으로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실제로 궁복인 장보고가 해상왕, 무역왕으로 성공하는 데는 ‘신라와 청해진’ 투톱 영향이 컸다. 해외진출 열풍으로 물품이 부족해지자 두 지역 이익이 급격히 늘었다. 해외진출을 확대하는 만큼 물품도 필요했고, 그에 따른 수익도 늘어났다. 물론 청해진의 세력도 커졌고, 위세(威勢)를 떨쳤다.
세계적으로 풍부해진 유동성은 신라에서도 ‘경제력(經濟力)’ 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경제력은 ‘문화력(文化力)’ 을 낳았고. 문화의 힘은 ‘정치와 사회’ 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관신라(金冠新羅)’ 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신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기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나라로 여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국제무역을 가장 활발히 한 나라는 신라뿐이다. 장보고가 개척한 바다실크로드는 〈글로벌네트워크망〉 을 형성한 일로 신라는 부강한 나라로서 경제강국, 문회강국으로 위상을 떨쳤다. 지금 같으면 ‘글로벌 K’ 로 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다.
만약 영암 선암이 없었더라면 장보고라는 인물은 세상에 나타나지 안했을 것이다. 영험한 산, 월출산의 기운을 입은 궁복, 장보고를 태생시켰기에, 그런 인물이 해상도시 ‘청해진’ 을 설치해 신라는 부흥했고 완도는 빛났다.
장보고가 완도에다 청해진을 세운 것은 그가 태어난 고장이라고 해서가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다를 접하고 살아, 바다에 대한 꿈과 희망, 로망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그는 중국 당나라 서주에 가서 군복무를 하면서 해양의 꿈을 키웠다. 조국에 돌아가면 필시 해양도시, 해상로를 개척해 무역교역에 진출 교두보(橋頭堡)를 만들어 활발한 거래를 이루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마치 완도 등 서남해에 당나라 해적들이 판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또한 이곳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적합한 무대가 될 수 있는 전진기지(前進基地)로 보았다. 그래서 물색 중 가장 합당한 곳이 전남 〈완도〉 임을 알고,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그가 완도 청해진에서 그 꿈을 펼치면서 신라를 〈세계 속 신라〉, 〈세계 중심 완도〉 로 조성했다. 그런 그에게 출생지를 섬으로 보는 역사서의 기록(記錄)이나, 전해오는 구전(口傳)들이 있어 한편으로는 그럴만한 것으로 이해도 되지만, 그 곳에서 큰 활동을 했다고 해서 그 지역과 연관시켜, 그 사람이 그 지역의 출신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을 오류(誤謬).오판(誤判)라고 본다.
●장보고는 선암에서 태어나 완도 청해진에서 성장가도
장보고는 완도에서 크게 성장하는 출세가도를 걷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탄생지가 완도로 둔갑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장보고의 본명 ‘ 궁복(弓福)’또는 ‘ 궁파(弓巴)’ , 이름을 지을 때 부모들은 지역성과 환경, 아들의 성격과 취향, 그리고 관상(觀相)과 사주(四柱)를 고려해 어진 사람으로서 귀한 존재로써 큰 인물이 되라고 작명(作名)했다.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영암 선암마을은 영험(靈驗)한 기운이 서린 곳이라 혀여 선암(船岩)이라는 지명 말고도 신선 선(仙)자를 써 ‘선암(仙岩)’ 이라고 불린다. 이 마을에는 신선의 기운이 서린 바위(국두암, 건덕암)들이 있어 그렇게 칭한다. 또 주변에는 활 쏘는 훈련장인 활터(弓터)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어진 복덩이의 ‘궁복(弓福)’ 을 얻었다. 그는 장차 ‘장보고(張保皐)’ 로 개명하여, 큰 인물로 성장한다. 해상왕, 무역왕의 장보고를 만들어준 곳은 영암 ‘선암’ 이 길렀고, 당나라 ‘서주’ 가 키웠고, 완도 ‘청해진’ 이 큰 인물로 만들어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그건 올바른 사람, 학자나 역사가는 아니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있으면서 자신을 낳아준 영암 선암에 계신 부모님을 완도 장좌도로 이거하게 해 극진히 모셨다. 아버지는 군함.상선의 목선(木船)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목수로서 ‘조선장이(造船장이)’ 로 일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 장보고가 군사와 무역으로 쓰일 배를 만들거나 수리에 나서주는 등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장보고 아버지는 고기를 가득 실어오는 어민들의 어업, 배 목수의 업과 어민의 삶,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목선 업에 종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런 생애였는데, 항간에서는 장보고 아버지도 완도 장도, 그곳에서 태어났고, 장보고를 낳았다는 연관성으로 확대됐다. 완도에서는 그렇게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시실에 입각한 근거에 의해 장보고에 대해 말해야 되는데, 소문에 의하면 하는 식으로 장보고 태생지를 잘 못 판단하거나 알리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본다. 어떤 근거로, 어떠한 사유로 그럴게 본단 것인지, 그런 예단은 온당치 않으며,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다. 만약 장보고가 나쁜 사람으로 그려졌다면, 완도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훌륭한 인물이 되니까. 아예 내 지역 사람으로 둔갑, 여겨버린 듯하다.
영암.서주.완도, 〈영주도〉 다. 영주도는 영암과 서주, 완도가 주도(主導)해 신라를 빛내줬다는 것이며, 이는 서주와 완도가 선암마을에서 태어난 궁복-장보고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궁복의 부모는 궁복(장보고)이 당나라에서 군인(軍人)으로 출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기뻐했다.
“여보시오들.”
“우리 아들이 당나라 가서 군대 소장이 됐다 네요.”
“애가 커서 뭐가 되려나, 예사스럽지 않게 생각했는데...”
“장수가 됐다니 놀라울 일인 것 갑소”
“활을 잘 쏘더니만, 장수가 됐네요.”
“복덩이가 진짜 복덩이가 됐네요,”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됐다.
마을 사람들은 궁복이 출세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마을이 축제 분위기로 뜨거웠다. 이 일을 두고 궁복이 큰일을 해낸 훌륭한 인물이 됐으니, 부모가 7년간 치성을 드려 얻게 해준 거북바위.칠성바위를 크게 출세한 것을 ‘황제(乾)의 덕(德)’ 을 입었다고 하여 ‘건덕(乾德)바우’ 로 불려줬다. 또한 배를 타고 갔던 바위를 ‘나라(國)에 우두머리(頭)’ 가 됐다고 해서 ‘국두(國頭)바우’ 라고 했다. 두 바위를 영험하게 보며, 마을 사람들은 신성(神聖)시했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바위에 신선(神仙)이 놀다 간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신선 선(仙)자를 써 ‘선암(仙岩)’ 이라고 했다. 후에 왕한테 ‘청해진 대사’ 로 임명받았으니, 마을은 온통 들뜬 분위기로 웃음꽃이 피웠고, 마을의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는 천하의 명당으로 ‘발복(發福)’ 한다고 봤다. 운이 튀어 좋은 운수의 ‘복(福)’ 이 들어 닥친다고 여겼다. 그랬으니 어진 복덩이 같은 존재의 ‘궁복(弓福)’ 이라고 부를 수밖에...
장보고는 당나라에 궁복이라는 이름을 장보고로 개명하면서...
직업-장군이 될지어다.
인물-보배가 되려한다.
품위-고품격 갖추련다.
~라고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나라를 사랑하고, 기여하는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고 직업군으로서의 보배스러운 인물, 품위와 품격이 높은 장보고로 변신하고, 보여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의 철학과 신념, 의지와 정신, 그리고 공적(功績)과 업적(業績)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 정말 그는 장군이 되었고, 보배 같은 인물이 됐고, 품격을 갖췄다.
궁복으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은 그를 보기를 장군감으로 봤었고, 보배스러운 인물로 성장해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봤으며, 품격 있는 품위를 갖춘 사람으로 기대했다.
얼마나 귀하고 우량해 ‘금 복덩이’ 라고 불렀을까?
●청해진 청사진, 장보고 해양 展 공동작품
청해진이라는 거대한 작업, 청사진은 영암이 ‘종이’ 를 마련했고, 서주가 ‘필’ 을 쥐어줬다. 완도가 그 청사진을 그리도록 ‘자리’ 를 내줬다. 청해진을 작업공간으로 하여 완도 잎 바다와 황해(중국), 동해(일본) 등의 바다를 거대한 ‘상업.무역.교역지도’ 의 해양로가 담겨진 청사진으로 프린팅했다. 또한 해적들의 침입 경로의 ‘군사지도’ 도 함께 청사진에 그려냈다.
청해진과 청사진, 이 구상은 신라의 국보급 산물(産物)이다. 청해진과 청사진은 불과분한 함수관계로써 청해진이 있기에 청사진이 나왔고, 청사진이 있었기에 ‘청해진’ 이 진행됐다. 이 작업을 ‘해사전(海寫展)’ 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해사전은 ‘장보고 해양 展’ 이다. 완도 청해진에 장보고 해양 展의 준비 작업은 완도와 영암, 서주가 참여한 해양 展이다. 완도 단독 작품전이 될 수 없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선보이는 ‘공동작품 전시(展示)’ 라는 것이다.
청해진이라는 청사진을 그려내게 한 영암.서주.완도, 영암의 기운(氣運)으로, 서주의 역량(力量)으로, 완도의 기량(器量)으로 뛰어난 공동작품의 〈해양도시〉 라는 멋진 환경을 구축했다. 그런 궁복이 안 태어났다면, 장보고가 없었더라면 ‘청해진’ 이라는 청사진은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장보고를 낳은 영암 선암의 ‘덕분(德分)’ 이요. 장보고를 키워준 서주의 ‘덕택(德澤)’ 이요. 장보고를 만들어준 완도의 ‘은혜(恩惠)’ 이다. 그리고 장보고를 뒷받침해준 통일신라의 ‘혜택(惠澤), 덕윤(德潤)’ 이다.
장보고의 탄생설화는 기이(奇異)함과 신비(神秘)스러움이 많다. 그가 크게 활동을 한 무대인 청해진이 있는 장도,장좌도가 아닌 ‘큰바위얼굴’ 이 있는 월출산 자락의 영암 선암이 그렇다. 그런 곳에서 태어난 궁복, 장보고다. 지명.인물 등에서 주로 쓰이는 파(巴)는 〈큰바위얼굴파〉 로서 궁파(弓巴)다.
●장보고, 제1의 고향 영암, 제2의 고향 서주, 제3의 고향 완도
성웅 이순신이 크게 활약했던 지역이 더 부각이 되듯이, 장보고가 활동했던 완도를 더 부상이 되고 있어, 장보가 태어난 영암은 흐릿하고, 아련한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어 안타깝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전설적으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해신(海神) 장보고’ 로 다시 부활하듯이 진정한 부활의 장소는 완도보다 〈영암〉 을 더 장보고의 혼(魂)이 담긴 고장으로 띄워야 된다. 《영암이 낳은 장보고》 로 말이다. 장보고 삶은 제1의 고향은 영암, 제2의 고향은 서주 제3의 고향은 완도다.
삼국사기에서 왜 장보고가 활동하는 일에 대한 거론되기만 하고, 장보고 출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조정의 지원 하에 1145년에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의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청에서 펴낸 역사서이다. 이런 역사서는 없는 사실을 써 넣거나, 있던 사실을 다루지 않거나, 그릇된 일은 그러지 않는 것처럼 또는 잘 못된 일을 잘 못된 것처럼 상황에 따라, 부탁에 의해 기술을 했기도 했다. 아마 장보고가 워낙 완도 지역에서 활동을 크게 해, 영암 선암은 묻혀버리고, 그 출신은 완도로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랬을 것 같다. 장보고가 영암 등 국내에서 무언가 큰일을 하고 나서 당나라로 갔다면, 출생 신분이 드러났을 텐데, 장보가 워낙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가서 군복무를 하고서 국내에 들어와서, 그 출생신분을 알아내거나, 미처 기록하지를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장보고가 출세해 그 변변치 못한 선암마을에 대한 출생지를 밝히기가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됐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역사서는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책에서 아니면 구전에서 밝혀지는 것들, 또는 추측으로 이야기들을 모아 집대성 한 책이다. 다행인 것은 장보고가 궁복으로 태어나고 자랐던 곳, 영암 선암마을에는 아직도 그에 대한 출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영암 선암 태생 장보고 이야기-That's a true story
궁복의 선암, 장보고의 서주와 청해진 이 구전이나 기록은 설화(說話)가 아니다. 신화.전설 등을 줄거리로 사실처럼 꾸민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으로 있었던 이야기-That's a true story’ 또는 ‘진짜로 그런 사실이 있는 이야기-That's a true story’ 다. 물리적으로 존재하거나 사실인 것‘Real’ , 정보.말.진술의 진실성을 말한 것 ‘True’ 의 장보고 스토리다. 그런 사실여부, 진실성 있는 ‘장보고, a true story’ 라고 강조하고 싶다. 장보가 영암 선암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기이하고 묘한, 신기하고 이상한 기묘(奇妙)한 이야기로만 그칠 수 없는, 뉘앙스가 풍기기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 가 선명하고 생동감 있게 떠오르는 느낌을 주는 ‘생생한 이야기-Vivid Story’ 로 보여 진다.
선암마을 앞이 바다(海)였던 것이 농토(農土)라는 땅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듯이, 장보고의 탄생설화가 담긴 선암마을은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서거나, 묻혀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 바다였던 그 시기는 운암리 선암마을 등 지역은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 때, 해양군사기지로서의 요충지였다. 인근 금정면 활성산(活城山).궁성산(弓城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영암에는 국제무역항으로 신라와 고려 때 활발했던 군서 ‘상대포(上臺浦)’ 기 있고, 마한시대 때 번성했던 ‘남해포(南海浦)’ 가 있다. 국제적인 큰 포구가 두 개나 있었던 영암이다. 그런 고장에 ‘덕진포(德津浦), 도포(都浦), 해창포(海倉浦)’ 도 있었다. 선암에는 작은 포구지만, 일명 ‘선암포(船岩浦)’ 가 형성되었다. 이 포구를 위주로 바다를 생활 터로 삼았다. 궁복은 어린 시절에 이 포구에서 주로 놀기를 좋아했다. 배(船)바우라고 한 너럭바우인 국두바우에서 다이빙도 하며 놀았다. 바다로 나아가 고기도 잡고,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아이가 바다를 사랑했고, 넓은 바다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희망을 찾아 가겠노라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됐다. 궁복의 어린 시절은 워낙 가난에 쩌 들었던 시기, 혼란의 시기의 불안정한 신라였다. 고향에서 바랄 게 별로 없었고, 기대할만한 일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세상에서 좀 더 좋은 생활을 누려보겠노라고, 생각을 키웠다. “그래 내 꿈을 펼칠 곳은 당나라야!” “힘들겠지만 큰 맘 먹고 가보자” 고 단단히 결실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장보고는 부모님한테 아뢴다.
“당나라 가서 큰 사람이 되어 오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사정하자, 부모는 자식을 국내도 아니고, 타국으로 떠나보낸다니 쉽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 심정이 오직할까? 눈물이 앞섰다. 애걸하며 가겠다는 자식한테, 안 된다고만 거절할 수도 없고, 부모는 그만 자식의 간청에 “그래 진정 너의 생각이 그렇다면, 큰 사람으로 성장하려 무나” , “가서도 부모와 집을 생각하고, 고향도, 나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니라!” 라고 아픈 가슴 달래며 떠나보냈다.
“나는 커서 이 나라의 훌륭한 덕장, 용장, 지장이 되겠노라” 고 했던 궁복,
그는 17세에 꿈을 품고 당나라로 집을 떠났다.
궁복에서 징보고로 이미지를 바꿔, 의젓한 성년으로 자란다.
당나라가 실시한 용병(傭兵)에 지원해, 그는 ‘무령군 소장’ 이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부여받고 출세가도를 걷었다.
그는 고향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의 ‘청사진(靑寫眞)’ 을 그렸다. 그런 그가 그 청사진을 갖고 당나라로 갔던 것, 당나라라는 땅덩어리가 신라 몇 십 배 더 컸고 넓어 고향에서 그린 청사진은 부족함이 많았음을 느꼈다. 전혀 다른 세상여서 자신이 생각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맞지 않은, 전혀 다른 환경을 접해, 그는 다시 청사진을 수정하가나 다시 그려야했다. 원대한 마음으로 거대한 건설에 몰두했다. 일단 군복무를 하려고 왔기 때문에 우선 군 생활에 집중하고, 그러면서 군사기술이나 정치.경제.문화 등을 익히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새롭게 청사진을 그려냈다. 그런 청사진을 갖고 그는 다시 신라로 들어와 흥덕왕에게 알현(謁見)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추진하려고 힘썼다. 그 결과 ‘청해진(淸海鎭)’ 이라는 바다가 있는 섬에 군사진영을 설치한다. 청사진이 ‘청해진’ 으로 설계가 되고, 그 설계대로 건설되어 신라는 안보와 경제가 혁신적으로 나아지게 되고, 질서와 번영 속에 평화로운 나라, 안정된 가정을 이루게 된다.
아무리 당나라에서 성공을 하며 누리고 있다고 해도, 조국 신라를 잊어버리거나 저버릴 수는 없는 법, 부모 생각, 친구 생각, 형제 생각과 나라 생각이 지울 수가 없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는 말처럼, 참고 참았던 타향살이는 가슴을 저밀게 했다. 나이 40세에 들자, 결심을 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당나라가 아니라 신라다” 라고 23 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올랐다. 항상 가슴에 애국심은 가득했기에,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해적들의 난입, 왕권과 중앙귀족들의 득세와 혼란 등 모른 척하고 지켜만 볼 수 없어, 환란 상태인 신라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겠노라고, 소탕.방어.안전,보호,질서, 발전과 혁신의 정신을 가다듬고, 당나라에 머물렀던 생활을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신라에 당도해,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당나라에서 실직 당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정년도 불러들여 함께 나섰다. 그러면서 가난한 신라,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국토방위와 해상무역이라는 군사력에 경제력까지 추진해보려는 각오를 세우고, 신라중심의 〈장보고사상, 장보고주의〉 를 실현했다.
청해진을 통해 그려낸 청사진, 그 청사진에는 ‘국제자유해상무역(國際自由海上貿易)’ 이라는 중계무역의 거대하고 원대한 네트워크의 〈무역지도〉 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이라고 보다는 〈청사진-Blueprint〉 로 보고 일을 기획했고 추진했다. 당나라, 신라, 일본을 잇는 교역을 통해 ‘세계 최고의 교역 명작(名作)’ 이라는 상징적인 비전을 본격적으로 실현할 계획을 세운, 혁신적인 청사진으로서 일명 〈글로벌 K-청사진〉 이었다. 청사진은 ‘신라만의 독보적 가치를 담는다’ 라는 전사적 역량 집중, 최고 수준의 청해진 명작을 선보이겠다는 마음으로 추진했다. 혁신적인 청사진을 공유한다는 방침으로 신라 브랜드와 사업 지역에 걸 맞는 독보적 가치와 품격을 보여드릴 야심작을 선보였다. 신라를 넘어 세계가 사랑하는 ‘청해진’ 으로, 세계 최고 종합물류 ‘신라’ 로 도약하겠다는 장보고의 야심은 불탔다.
〈신라를 다시 보다. 그리고 신라가 모델이 되다〉 라는 장보고의 청사진은 ‘청해진을 품격 있게, 신라를 품위 있게’ 했다. 위대한 신라로 ‘글로벌라운지’ 격이 다른 문화라이프라는 청사진이 본궤도에 오르는 전환점이 됐다.
●장보고의 야심, 그리고 신라의 미래
장보고는 왜 딸을 왕비로 두려했을까?
그는 어떤 의도로 왕권에 욕심을 부렸을까?
이 문제는 사실 이렇다. 그는 그가 태어난 선암마을에서 얻은 이름, ‘궁복(弓福)’ 이라는 이름이 ‘귀한 존재로서의 황제 같은 어진 사람’ 이 되라고 하여 지어준 이름의 의미에 걸맞게,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개인의 야욕보다는 무엇을 이루어 보려고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의 ‘야심(野心)’ 을 품었다.
자신의 꿈을 향해, 그는 다각도로 세계관과 미래관을 그렸다. 장차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의지를 품었다. 그는 목표나 꿈을 마음에 담아 결실하고, 그 실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려는 자세를 갖췄다. 장보고의 행동으로 옮기려는 결심과 실천의 힘, 자기 주도적 학습.성장과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밀어내는 태도를 갖추며 ‘Will, 미칠 수 있는 꿈의 의지를 품어라’ 처럼 의지와 꿈이 결합된 의지를 품은자로서의 각오를 세웠다.
장보고는 ‘변화와 혁신, 성장과 발전’ 의 의지를 품고, 실천하는 진정한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야심(野心)을 품고 당나라로 떠났다. 그는 『사나이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나는 나라 지키고 번영하는 영광에 살았다. 굳세게 살면서 일하면서 배워 영광된 조국에 새 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길이길이 물러주자』 라고, 나의 조국 신라 완전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평화 위하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군사력, 이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당나라 군사로 지원해 복무했다. 신라 방어(防禦)와 당의 억제(抑制)라는 국방전략에 야심을 드러내며 무령군(武寧軍)에서 군사 기술을 배웠다. 그는 신라에서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해상교역 운영에 대해 ‘군사적.상업적’ 접근을 확보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당나라와 갈등을 촉발한 해상을 신라의 영향력 아래 놓인 ‘해상로(海上路)’ 로 규정하면서 이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을 장보고가 언급한 해상에 대한 전면적 접근권과 맥이 닿는다. 장보고가 해상권을 확보를 추구하면서 그 주된 이유로 〈신라 차세대 해상권 신라주도〉 구상은 신라 방어를 실행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해상 내 도적들의 대응, 해상전략 특화 조치를 통한 신라 해상 방어 등을 신라 방어 실행 요소로 꼽는 한편, 〈해상전략 현대화〉 방침으로 청해진을 설치했던 것.
“난 내 지신을 희생, 나라에 몸을 바쳐 이바지하자.”
“신라를 개혁하고 변화시켜 더 융성하게 하자.”
결심하고 그는 청해진에서 꿈을 향해 노력한다.
장보고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청해진을 통해 해상무역(海上貿易)이라는 상업에 성공을 이루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지만, 한계성이 드러나는 데, 바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극복(克服)하거나 타파(打破)하지 못했다. 단지 완도라는 호족(豪族) 세력으로 그칠 뿐이었다. 신라의 ‘신분제도, 골품제도’ 등 귀족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장보고였다. 장보고가 하는 일에 견제(牽制)에 나선 중앙 귀족들이 장보고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거, 장보고 세력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앙 귀족은 장보고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자신의 딸을 문성왕 왕비로 삼게 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결국 꿈은 좌절됐고, 마음이 많이 상해있는데, 신하나 중앙 귀족들은 장보고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고, 결국 자객 염장을 시켜 청해진에 잠입하여, 그의 손(칼)에 피를 흘리고 만다.
장보고는 과연 왕권에 욕심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건데, 장보고는 국가 전체 전략과 국방 전략-Defence Strategy에 부합하는 강력하고 안전하며, 효과적인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 당나라 군사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억제와 확산 관리에 중점을 두고 이에 맞게 신라의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새 환경에 적응시키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 군사력의 바탕으로 그는 무역에도 손을 대 군사력(軍事力)과 상업권(商業權)으로 신라를 국제적 강국으로 올려놓으려는 희망을 키운 것이다.
당나라에 대해선 대결이 아닌 힘을 통해 황해.동해에서 당나라를 억제했다. 그러면서 ‘황.동의 괜찮은 평화-Decent Peace’ 를 기술했다. 당나라에서 다소 소수세력이라는 평가를 낳았던 신라 장보고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청해진, 이는 압도적 힘에 의해 대당나라 억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 ‘거부에 의한 억제-Deterrence by Denial’ 을 통해 유리한 군사적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당나라와의 무력충돌을 피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 가운데 상업권을 쥐는 힘도 길으면서 신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그런 구상과 실행에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랐는데. 중앙귀족의 견제. 신분의 차별 등으로 원대한 꿈을 이루는데, 일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장보고는 이 문제에 고심을 하고, 마음먹기를...
“그래 내 딸을 왕권에 두자.”
“왕비를 삼게 하여 내 꿈을 펼치자.”
이러면서 그는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나선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 했던 것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던 일,
장보고는 왕비가 되면, 자신의 생각들로 신라를 개혁하고,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꿈에 젖는다. 장보고는 신라의 고질적인 문제에 불만을 가졌고, 그 문제는 반드시 누군가가 나서야 된다며, 그 해결에 지신을 ‘개혁가(改革家)’ 로 내세웠다. ‘정치가(政治家)와 경제가(經濟家)’ 로서의 의지를 불태운다.
“신라는 내가 바꾸겠다.”
모조리 그것도 확실히 뜯어 고치겠다는 의지를 갖고,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나선다. 하지만 그가 걷고자 한 도로는 그리 순탄치가 않았던 것,
왜 그럴까?
다시 말하지만 ‘신하와 중앙귀족’ 들의 득세(得勢)와 방해(妨害)다.
“전하! 장보고의 야욕이 지나칩니다.”
“그는 신라를 지신이 장악하여 자기가 왕으로 군림하고자 합니다.”
“장보고는 나라보다 자신을 더 키우려는 야욕에 불탄 경계해야 할 인물입니다.”
장보고 때문에 열 받았다. 두렵다는 등 장보고의 진심을 몰라보고 위협적인 장보고만 봤다.
장보고의 야심, 그리고 꿈은 오로지 나를 위한, 백성을 위해 당나라 군인으로, 청해진 대사로 열정을 불태웠을 뿐, 지신만을 위한 자기 잇속만 채우려는 더러운 욕심의 야욕(野慾)을 품지 안했다.
장보고의 야욕이 아닌 ‘신하나 귀족들의 야욕’ 이 있었을 뿐, 장보고는 오로지 지신을 나라에 받쳤고, 그 희생정신은 해양무역으로 신라를 ‘국제자유무역항’ 으로, ‘안보강국’ 으로 만들어냈다.
청해진을 통해 〈부강한 나라, 평화로운 신라〉 를 위한 ‘질서유지, 평화유지, 경제상승, 문화부흥과 정치개혁, 신분타파’ 로 인한 반듯한 선진 신라로 거듭나도록 나섰다. 장보고는 ‘중앙귀족들이 득세하는 신라는 번영할 수 없고 미래도 없다’ 는 판단과 정의를 내리고, 개혁에 심혈을 기했다. 딸을 왕비로 만들려는 야심은, 그저 자신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서나 정권야욕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가 아닌 ‘우리’ , 이로움이 아닌 ‘의로움’ 으로 〈세계 속의 신라, 신라의 중심〉 으로 만들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이름, ‘궁복.궁파.장보고’ 를 떠오르며 새기면서 그는 〈신라의 꿈을 향하여〉 라는 정의감(正義感)에 불탔다.
지금의 정치도 경제도 무언가에 의해서 더디게 만드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고 보며, 그들만의 군림(君臨)에 도취(陶醉)하고 있고 압도(壓倒)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세계의 경제 질서가 일부세력에 의해 흔들리거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보인다. ’정치(政治)는 여야가 있어도, 경제(經濟)와 문화(文化)는 여야가 따로 없다‘ 는 말, 장보고는 〈신라중심경제〉 라는 일념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그 지평(地平)을 활짝 열었고 무한히 넓혔다.
“제 딸을 왕비로 두고자 하는 일은 절대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경제.문화강국 살기 좋은 신라,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방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라 신라, 세계인의 신라로 만들어내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는 귀한 존재의 어진 사람이 되라는 궁복(弓福)이라는 아이로 태어났고, 신라의 성군(聖君)으로 성장하여 나라를 부강(富强) 시키려는 궁파(弓巴)로 자라, 나라를 지키라는 훌륭한 인물로 역할을 띠라는 장보고(張保雇)로 살아왔습니다.”
“이게 저의 철학이요, 정신이요. 신념이요. 의리요, 길이이요, 삶이요. 정도(正道)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 그리고 선암(船岩)은 나의 정신지주(精神支柱)입니다.”
“나의 꿈을 실현시켜준 당나라, 그리고 무령군은 나의 꿈과 희망(希望)을 안겨준 곳이었습니다.”
“나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내다보게 한 완도와 청해진은 세계의 큰 인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해상도시를 구축해 신라를 국제자유무역항구로 자리매김하게 하도록 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조국 신라에 이 한 몸을 바쳤던 장보고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어진 인물로서의 귀한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랐듯이, 내가 나라를 지키는 위대한 성군으로 그 입지를 다지겠다며 지은 장보고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세상의 문을 열어, 세계의 희망 빛으로 밝히겠습니다.”
“저 장보고는 세상에 태어나기를 지혜(智慧)의 신으로, 정의(正義)의 신으로, 그리고 행복(幸福)의 여신으로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신라를, 백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모두가 안정 속에 행복한 삶을 보냈으면 바람입니다.”
이런 정의감에 불탄 장보고는 그 아침 신선한 공기에 맺힌 이슬처럼 햇살에 영롱한 빛을 내며 한동안 맺히다가, 어느 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떨어지고 만다. 지금 어딘가에는, 그 떨어진 이술방울이 고여 샘(泉)을 이루고 있을 것이고, 그 샘물을 마시기 위해 새와 짐승들은 모여들 것 같다. 그리고 그 샘은 넘쳐흘러 어디론가 유유히 흐를 것을...
흐르는 강물처럼 장보고는 1000년이 지난 요즘에도, 그는 물소리를 내며 여울지리라 본다. 우리의 가슴에서도...
자객의 염장, 그를 암살(暗殺)이라는 지령(指令)을 내리고 장보고를 내리쳤던 비극의 역사, 신하와 중앙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안위(安危)를 위한, 권력(權力)을 독차지 하려는 야욕에 그만 그는 이술처럼 사라졌다. 장보고의 야욕이 아닌 그들의 야욕에 의해서...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고 싶은 생각은 절대 장보고나 딸만을 위한 일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진행하려 했던 것이다. 신라를 개혁하여 부강한 신라로, 상하구조의 사회가 아닌 ‘수평구조(水平構造)’ 로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의(仁義)의 정치사상과 균형(均衡)의 사회사상’ 을 가졌던 장보고다.
장보고를 두고 반란을 일으킨 자로 보기도 한데, 그는 김우징(45대 신무왕)의 왕위쟁탈전에 참여했는데, 장보고의 개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보다는 신라의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선의의 거래였을 뿐이다. 44대 왕인 민애왕(閔哀王, 재위기간 830~839) 때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민애왕을 시해에 가담한 그는 청해진으로 찾아온 김우징과의 약속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딸을 김우징의 아들과 혼인시키는, 사돈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이걸 두고 해상왕 장보고, 인생 걸고 김우징과 손잡은 진짜 이유가 신라 왕실과 외척(外戚)이 되려는 승부수였다고 본다. 과연 그럴까?
민애왕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는 쿠데타를 일으켜 가면서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려고, 그 욕심 때문에 거사(擧事)를 했던 것인지, 이건 하나는 맞다. 김우징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위험해지자 인연이 있는 장보고를 찾아가 사정을 알렸다. 마침 장보고도 그런 좋지 않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이게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찰나, 때마침 김우징이 찾아왔으니 그 부탁을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장보고도 왕위계승 쟁탈전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김우징과 궤(軌)를 같이했다. 입장.경향이 같아 방식이
나 방향을 취해 김우징과 같은 길을 갔다.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려한 이유는 자신의 ‘신분상승, 골품제도 개선 및 타파’ 를 위한 생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장보고가문도 왕족 계층에 진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장보고의 운(運), 민애왕을 시해하고 김우징 왕 등극, 그리고 1년 만에 사망, 운이 안 따른 운명은 불운(不運)을 낳았다.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는 꿈은 무산되고, 사돈 관계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역사는 반란자로 낙인이 찍혀지고 있다. 해상왕이라는 명예스러운 칭호 뒤에는 ‘쿠데타’ 를 일으킨 인물로도 각인되고 있다. 심지어 해상무역을 개척하는 일을 두고 장보를 해적(海賊)으로 보기도 한다. 요즘도 진실적인 것보다는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를 퍼트려 나쁜 사람으로 부각시키는 일이 다분한데, 왜곡된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처럼, 나쁜 것임에도 좋은 것 인양 포장하는 그런 일은 여전하며, 참되지 못한 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요즘 유튜브가 그런 온상이 되지 않는가 한다. 나라마다 여야가 있어 여(與)의 일을 야(野)는 안 좋게 말한다. 평가 절하하고, 분란을 부추긴다. 나라의 혼란과 질서 파괴, 국민의 안정과 평화의 저해가 진행 중이다.
●장보고의 이름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장보고의 이름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려는 염원이 담긴 이름이다. 기질(器質)이 든 타고난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꿈을 펼쳤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 성씨(姓氏)를 ‘장씨(張氏)’ 로 한 것은 지금까지 여기저기에서 기술한 것을 보면, 중국에서 장씨 성이 흔하게 쓰여 그랬다는 설이다. 사실 장(張)이라는 한자가 ‘베풀다. 넓히다. 크게 하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어 이 성씨를 선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장은 자신의 본명이 궁복(弓福),궁파(弓巴)이여서 활 궁(弓)자 들어간 성으로 장씨(張氏)가 있어서 장씨 성을 썼을 것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신빙성(信憑性)이 있다고 보여 진다. 하나 더 풀어본다면, 장(張)은 정(鄭)과 유사성이 있어 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 정(鄭)’ 은 큰 나라 이름에서 온 성으로 ‘정통, 근본, 신뢰’ 를 상징한다, 장은 갑골문에서 ‘정(正) 의 정(正)’ 이 결합된 형태로, 정의 정에서 유래한 조자(造字)로 설명된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이며, 그 이름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을까?
정감록(鄭鑑錄)의 정이 정씨(鄭氏)를 뜻하는 성씨가 아니라 공의(公義)로움을 깨우친 자가 역사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같은 맥락에서 척(擲, 던지다)과 정(鄭)의 의미를 연관성.일치성을 갖는 조자라는 관점이 제시된다. 고로 정(鄭)은 활에 시위를 걸어 놓은 모습의 ‘장(張)’ 과의 유사성과 의미를 같이 한다. 이러한 견해를 볼 때, 정궁복(鄭弓福)을 정(鄭)자 대신 활 궁(弓)자가 들어간 ‘장(張)’ 으로 바꾸어 ‘장보고(張保皐)’ 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는 풀이도 한다.
●장보고 이름, 성명학과 사주에 의해 짓다
이름대로 산다라는 말을 한다. 태어난 해.달.날.시 내 육십갑자의 혼인이나 운수를 점치는 ‘사주(四柱)’ 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판단한 ‘관상(觀相)’ , 거기에 사주에 기반으로 한 학문으로 이름의 운명적 영향을 연구하고, 사주의 약점을 보완해 후 천운을 개선하고 성공을 돕는 자기 이름(한자 이름)의 획수를 다 더한 걸로 알아보는 사주의 ‘성명학(姓名學)’ 으로 길흉(吉凶)을 거론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주, 관상, 성명학 중에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개선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명학은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종교적.형이상학적, 그리고 신비주의적 근거에 따라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러난 성명학 이론의 핵심은 좋은 말을 반복하여 불러주고 들으며, 공적인 서류에도 쓰면 좋은 영향이 온다는 다소 심리학적.사회학적인 환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로 자신이 이름의 뜻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일종의 규범으로써 인식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간의 심리에 작용할 수 있다.
이름이 지닌 사회적 이미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실제 외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성명학이다. 사람의 이름이 얼굴 모양을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기의 외모에 따라 이름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개인의 얼굴 모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에는 사회적 기대가 담겨있어, 얼굴도 그에 맞게 변화한다.
부모가 지어준 ‘궁복(弓福).궁파(弓巴)’ 이라는 이름은 ‘어진 사람’ 으로 성장하라는 뜻에서 지었으며, 후에 자신이 개명한 ‘장보고(張保皐)’ 라는 이름은 ‘확장하고 지킨 훌륭한 제왕으로 군림’ 하라는 뜻에서 지었다.
장보고라는 이름 가진 사람들은 성격.성향이나 얼굴 생김새도 비슷하다고 한다. 이름이 부여하는 사회적 구조화는 매우 강력해 사람의 얼굴 모습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된다.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얼굴 모습은 이름과 관련된 사회적 고정관념에 맞춰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구조화는 너무 강해서 사람의 외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름이라는 요인이 성별이나 민족보다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어떤 사람이 될지 형성하는 정도를 암시할 수 있다. 이름이 실제로 신체적 특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구성의 일치는 잠재적으로 개인이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특성에 호감을 갖게 하여 직업 선택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을 볼 때 장보고라는 이름은 자신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뜻을 펼쳐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확장(擴張)이라는 ‘넓히다’ 는 뜻이 담긴 ‘장(張)’ , ‘지키다. 돕다라’ 는 뜻이 담긴 ‘보(保)’ , ‘높은 지위의 제왕’ 의 뜻이 담긴 ‘고(皐)’ 의 한자를 쓴 장보고다.
장보고(張保皐)의 이름 한자의 획(張 11+保 9+皐 11을 합치면 총 ‘31획’ 이다. 31횟수는 성명학(數理 姓名學)에서 길(吉)한 수로 자주 분류되며, 융창격(隆昌格)과 연결해 ‘대성공, 리더십, 명예, 재물’ 을 상징한다. 31획수는 융창격인 31획은 ‘대성운, 흥가운’ 으로써 ‘명성(名聲)과 부(富)’ 를 동시에 얻는 운이다. 31획을 ‘강한 운, 탁월한 리더십, 강력한 추진력’ 의 상징으로 설명한다.
장보고의 이름 31획, 성공운을 타고난 숫자이다. 성명학에서는 이름의 획수 조합을 통해 그 사람의 성향, 운세, 흐름을 살펴보는 수리오행(數理五行) 이론을 중시하는 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특별하게 여겨지는 숫자들이 있는데, 31획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의 수로 꼽힌다.
31획이 가진 상징성, 31획은 수리 성명학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강운(强運), 큰 뜻을 이루는 ‘융통성과 리더십의 상징, 포용력과 추진력’ 을 동시에 갖춘 운으로 풀이된다.
이 숫자는 작은 목표보다 큰 그림, 조직의 중심,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는 대업(大業)과 연결되며, 특히 성실하게 한 길을 걷는 이에게 힘이 된다.
31획을 한 이름에는 청해진 대사로서 해양 질서를 회복시킨, 해양로 개척으로 무역에 성공한, 통일신라를 국제적으로 크게 위상을 높인, 해상왕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장보고(張保皐), 그 이름은 31획 수를 하고 있다.
張 11획, 保 9획, 皐 11획 이 이름의 총 획수는 ‘31획’ 으로 성공운(成功運)의 정수(定數)에 해당된다. 실제 역사 속의 장보고는 신라인으로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군사력과 외교력, 경제력, 문화력까지 갖춘 국제적 인물로 활약했다.
이런 삶의 업적을 생각하면, 그의 이름이 지닌 대업이 끼치는 기운(氣運), 주체적인 리더십, 그리고 너그럽게 감싸는 포용(包容)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끼친 권위(權威)가 공존하는 흐름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이름은 운을 담는 그릇이다. 이름 하나로 모든 운명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이름은 그 사람의 기운이 흐트러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밑그림이 된다. 31획은 그런 의미에서 큰 흐름 속에 나를 오래 머물게 해주는 숫자이라고 볼 수 있다.
성공을 뜻하는 건, 단지 부나 명예만은 아니다. 자시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31획이 상징하는 성공의 정수이다.
위와 같이 살펴본 데에서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고, 항간에서 나도는 장보고라는 이름이 중국의 흔한 ‘장씨(張氏)’ 성을 썼다느니, 복을 ‘보고’ 라고 했다는 추측성의 논리와 난센스적인 풀이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궁복은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라고 다시 지었을 때는 분명 그는 작명에 있어서 사주.관상을 기준한 성격.성향, 그리고 뜻과 의지를 담는 수리성명학(數理姓名學)을 따랐다고 본다. 확장(張)+보호(保)+인물(皐) 이런 자신의 철학과 신념, 목표와 의지를 담은 장보고이다. 자신이 이름에 그런 한자를 선택한 것도 81수리 성명학에 따른 것으로, 특히 31획의 ‘성공운’ 을 고려해 장(張)과 보(保)와 고(皐)를 선택했고, 장보고로 지었다.
어떤 이름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運命)이 결정된다.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180도 바꾸지는 않겠지만, 평생 동안 아니 죽은 후에까지도 자신의 이미지로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는 자신을 재정리하고 긍정적인 자아상(自我象) 형성의 ‘자아 정체성의 변화’ , 대인관계 유리와 소통의 ‘사회적 인상’ , 개인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스트레스가 줄어둔 ‘심리적 안정감’ , 개인의 기회와 성공 가능성의 높아지게 한 ‘운명과 기회’ ,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 , 협업과 리더십 유리하게 작용한 ‘직업적 성공’ ,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동기부여가 된 ‘개인적 성장’ 등을 불러온다, 이처럼 장보고라는 개명은 개인의 삶에 다양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보고는 작명(作名)과 사주(四柱)는 삶의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고, 자신이 꿈꾸고 희망하는 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는 궁복의 이름을 개명하기로 마음먹고 가감하게 이름을 바꾸었다. 장보고는 이름 한 글자의 변화가 인생을 바꾼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이룬다는 점을 알고서, 사주와 조화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더욱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작명의 힘을 믿고, 새로운 시작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장보고로 내 인생이 변화할 수 있다.”
영토확장.해양확장.무역확장+나라 안보 강화.해양질서 회복+큰 인물로 성장하여 해상왕이 되겠다는 마음에서 장보고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성명학 31획 수리로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존중 받는 위치에 올랐고, 지혜와 성공을 거두게 되는 수로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기질을 타고나게 하였으며, 온갖 역경(逆境)에 부딪힌다 하여도 두려움 모르고 물리치게 되며, 이름을 널리 사해(四海)에 떨쳤다.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과업(課業)을 밀고 나갔다. 놀라운 추진력 속에 인덕(人德)과 부부 운 또한 좋아 부귀(富貴)를 누렸다. 그는 재상운이 좋아 재물(財物)을 모음에 있어 적은 노력으로 수많은 재물을 얻게 됐다.
궁복(弓福)의 획수는 弓 3, 福 14다. 총 획수는 ‘17획’ 이다. 17획은 ‘힘.권력, 강한 의지와 결단력, 의지력, 목표와 달성의 추진력과 리더십과 성공 에너지’ 를 상징한다. 17획은 '건창(建暢)' 의 길(吉)한 수로 분류된다. 도적적인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성향이 있다. 리더십이 강하며, 타인을 이끌고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다. 주로 리더십을 발휘할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경영, 정치, 법률, 군사 등 권력과 책임이 요구되는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이들은 목표 지향적인 성향 덕분에 큰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안정된 재정적 성공도 기대할 수 있다.
17획은 강한 의지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을 잘 활용하면 삶에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이런 궁복의 ‘17획’ 수리 성명학이다. 그런데도 그는 궁복이라는 뜻이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것에 자신이 큰 인물로 성장하는 데는,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일에서는 그 이름은 좀 약하다는 걸 파악하고,
“아니야!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난 내 뜻이 있으니 궁복이라는 이름보다
더 나은 이름이 필요해!“
“나의 꿈은 장차 내 자신이 제왕이 되는 일이야!”
“신라를 확장하고, 지키는 군주가 되는 것이야!”
“나의 희망은 신라를 크게 부흥시켜 국제적인 신라로 만든 것이야!”
“난 분명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살아갈 거야!”
이런 마음에서 궁복보다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성공운의 ‘31획’ 수를 한 장보고(張保皐)를 택했다. 그는 장보고라는 ‘이름대로 된다’ 라는 말에 생각대로 펼쳐졌고 진행됐으며, 부끄러움이 없었다. 국제적인 위대한 신라를 만든 훌륭한 일을 해냈고, 역사에 남을 이름으로 빛난다.
●장보고의 고향 선암마을 건덕암.국두암 수리 성명학
장보고(궁복)와 관련 설(說)이 있는 건덕암(乾德岩), 건덕의 하늘 건(乾) 획수는 ‘11획’ 이다. 큰 덕(德) 획수는 ‘15획’ 으로 총 ‘26획’ 수리이다.
26획 수리(數理)는 성명학(姓名學)에서 ‘영웅적(英雄的)’ 으로 분류되며, 대업(大業)을 이루는 기질이 있으나, ‘인관관계.좌절.풍파’ 가 동반될 수 있어 초년.청장년.중년에 유리하다.
81수리 성명학 26획은 영웅의 수리로 ‘위대한 발전과 대업’ 을 암시하지만, 성공이 일시적이거나 ‘시비.풍파’ 가 많을 수 있다. 일평생 분주하고 ‘조난.피살’ 등 역경이 동반할 수 있다.
26획 수리는 태어난 때부터 지혜롭고 똑똑한 성품을 가졌다. 또한 용감하고 약자를 돕는 정의감이 강하다. 하지만 삶에는 끊임없이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풍파가 몰아쳐 온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어코 이를 극복하고, 큰 공적(功績)을 이루기도 한다.
다만, 의지가 부족하면 세상을 온갖 고난에 이리저리 휩쓸리게 된다. 결국 잦은 좌절을 경험하고, 재산을 크게 잃으며, 심지어 가문(家門)이 몰락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에 남을 만한 특별한 인물의 뛰어난 '사업가.예술가.수포츠선수.군인.위인' 등 오히려 이러한 수리를 가진 이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장보고 보모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던 건덕암의 건덕이 28획 수리를 하고 있어 훗날 궁복이 커서 장보고로 큰 인물이 되는 경우다.
근데 건덕이나 국도의 단어의 한자 획수가 건덕은 26획이고, 국도는 27획인데, 81수리성명학에서는 둘 다 묘하게도 피살(被殺)을 암시한 수이다. 둘 다 한편으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동반된 길흉(吉凶)의 수로 여긴다.
장보고를 낳게 기운을 불어준 건덕암의 건덕은 27획수로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기개와 풍모가 있는 사람의 ‘영웅호걸격(英雄豪傑격)’ 이다. 장보고가 해양무역으로 권력과 부를 얻었을 만큼 전체적으로 그릇은 크지만, 잘나가다가 중도에 실패하게 되는 불운도 상반된다.
장보고가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다는 국두암(國頭岩)의 국두는 나라 국(國) 11획, 머리 두(頭) 16획으로 총 획수가 ‘27획’ 수이다.
27획은 수리 성명학에서 ‘비난격(非難格).중단격’ 과 ‘대인격(大人格)’ 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나쁨(흉수)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다재다능,팔방미인’ 처럼 긍정적(길수)으로 보기고 한다.
27획을 중단격(中斷格)으로 보고, 뜻밖의 ‘재난.좌절.실패’ 가 반복되는 운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27획은 ‘비방(誹謗)’ 을 많이 받거나 ‘부부 이별(離別).사별(死別),피살(被殺).단명(短命)’ 의 비운을 맞은 수로 본다.
장보고의 업적과 공을 봐서 배를 탔던 바위를 ‘국두암’ 으로 불리게 됐는데. 국두라는 단어는 수리 성명학에서는 대체적으로 ‘안 좋은 수’ 로 풀이된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우두머리’ 로서 좋았다가, 다른 한편으로 나쁜 운의 ‘암살’ 로 5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건데, 장보고의 운명을 애석(哀惜)하게 생각하고, 수리 성명학에 따라 ‘국두암’ 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궁복.장보고에 의해 지어진 바위이름이다. 궁복과 장보고에 얽힌 전설이 담긴 바위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바위가 궁복.장보고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좋은 의미의 이름인데. 두 이름의; 수리성명학에서 보면 길(吉)과 흉(凶)이라는 양면성이 있는 길흉이 동반한 수리이다.
하늘 건(乾)과 큰 덕(德), 나라 국(國)과 머리 두(頭) 이 한자를 쓴 것은 참 좋은데, 81수리 성명학으로 풀어보면 좋았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묘한 수이기에 장보고가 암살로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애석(哀惜)한 일이 생기는, 선암마을을 지키고 있었던 건덕암과 국두암이 장보고가 출세한 후 두 바위를 그렇게 부른 것인데. 마을사람들은 알고 그렇게 지은 건지 모르겠으나. 건덕과 국두가 수리 성명학에서는 영웅(英雄)과 풍파(風波)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그 정도까지는 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세를 암시하면서 불운을 암시한 웃고, 울고 하는 건덕암과 국두암이다.
이유야 어찌 됐던, 선암마을 기도처였던 거북바위인 칠성바위는 건덕암으로, 배가 드나들어 포구 역할을 한 너럭바위는 국두암으로서 둘 다 장보고에 관련된 전설(傳說)로 전해진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장보고가 이곳 선암 사람이라는 것임을 증명된다.
장보고에서 풍기는 용모와 됨됨이 즉, 사람의 생김새.인물.행실이 보통을 넘는 상태인지, 또는 실력이 특출한지를 평가하거나, 장차 어떤 인물로 성장.출세를 했는지와 사상과 정신이 어떤지, 그리고 기여한 공적(功績)을 고려해 장보고와 관련된 선암마을의 거북바위인 칠성바위는 임금 같은 훌륭한 인물로서의 높은 지위를 얻은 ‘건덕암(乾德岩)’ 으로, 나라의 우두머리로 역할을 띠었다고 해서 ‘국두암(國頭岩)’ 으로 불리게 됐다. 건덕암의 건덕. 국두암의 국두는 그냥 지은 바위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바위임을 살펴볼 때 분명 선암마을은 장보고의 탄생과 생애에 관련성이 있고, 궁복.장보고와 연유(緣由)됐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아닌가 한다.
궁복이 장보고로 출세하였다 하여, 선암마을 사람들은 이 두 바위를 신성시하고 소중하게 모셨다. 기념비 같은 존재감, 제단 같은 신성함, 영물 같은 영험한 바위로 오래전부터 궁복과 장보고의 수리 성명학이나 업적을 보고, 그렇게 불리며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요즘 훌륭한 업적으로 공을 세운 분들을 위해 흉상, 동상 또는 기리는 공적비(功績碑)를 세워둔 것처럼, 바위를 그렇게 보고 기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지방지정문화재’ 인 셈이다.
인물과 관련된 바위는 특정 인물 또는 인물의 사간, 행동과 연결된 이름과 설화가 바위에 붙는 형태의 전승로, 지역 공동체의 역사(歷史).신앙(信仰) 경험을 바위에 의탁해 후대에 전하는 문화적 유산이다.
선암마을 건덕암은 궁복(장보고)이라는 아들을 낳아주는 바위로, 국두암은 장보고가 당나라 가서 출세한 바위로서 알려진다. 특히 건덕암의 거북바위는 거북 모양 바위가 장수(長壽).재복(財福)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영웅(英雄)의 탄생과 연결된다.
인물이 바위에 붙는 이유는 바위는 불변(不變)의 전승물(傳承物)로서 인간의 기대와 희망을 바위에 의탁해 마을의 경계(境界).결속(結束)과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다. 바위의 명칭은 생김새, 자연물, 일화, 신앙 대상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지역의 역사와 생활을 이해하는 교재(敎材)가 되기도 한다. 선암마을 건덕암과 국두암은 신앙의 대상물이 아닌 장보고라는 인물, 그에 대한 일화(逸話)를 밝히는 바위라고 볼 수 있다.
이 바위 유래담(由來談)을 답사 코스, 펫말, 교육 프로그램으로 연결해 지역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거북바위, 거북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설화는 ‘장수(長壽)’ 의 상징이자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진 거북을 신성하게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예로부터 거북은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사령(四靈)’ 으로 알려졌으며, 재복을 가져다주거나 신령스러운 일을 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일들이 거북을 통해 일어난다고 믿었다.
선암마을의 건덕암과 국두암은 장보고와 관련된 바위로서 군대를 거느린 우두머리 장령(將領)의 ‘장수(將帥)’ 바위인 셈이다. 선암마을 바위는 장수가 살거나 움직였던 흔적이 남아있는, 장수가 움직였던 바위, 장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바위, 장수가 공깃돌로 들고 놀던 바위, 장수의 칼이나 갑옷이 숨겨져 있는 바위, 장수가 사라지면서 들어간 바위 등에 얽힌 이야기로 전승되는 데, 이들 바위는 연행(連行) 및 전승 집단 내에서 신성(神聖)한 힘이 흐르는 장소, 혹은 주술적(呪術的) 의례나 종교적(宗敎的) 기원과 연관이 있는 장소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선암마을의 건덕암, 국두암은 장수(將帥)가 된 장보고와 관련된 바위로서 궁복(장보고) 탄생(誕生) 설화가 담긴 건덕암, 장보고 출세(出世) 설화가 담긴 국두암으로서의 얽힌 설화(說話)다. 선암마을 사람들은 장수를 배출한 영험한 바위로 여겨 이들 바위를 그렇게 부르며, 이 바위들을 영험하게 여겨 건덕암, 국두암으로 염원(念願)을 담고 있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단순한 한 인물에 얽힌 바위로만 취급해버릴 일이 아닌, 장보고가 이 바위로 인하여 장차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둬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운암리 선암마을 건덕암과 국두암은 특정 시대를 대표하기보다는 여러 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遺蹟)이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마을의 안녕(安寧)과 평화(平和), 발전(發展)과 번영(繁榮)을 불러들이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으로서, 이 두 바위는 신령스런 월출산과 마주하고 있어 함께 염원성(念願姓)을 띠고 있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건덕암과 마을 앞 국두암, 이 바위의 이름인 ‘건덕(乾德)’ 과 ‘국두(國頭)’ 라는 글자의 수리성명학에서 볼 때 영험(靈驗)함이 깃든 바위임을 살펴볼 수 있다.
●장보고 좋은 수리 성명학에 청해진 수리성명학에 더하다
청해진(淸海鎭) 수리성명학은 맑은 청(淸) 획수는 11획 수이며, 바가 해(海) 획수는 10획 수이며, 진압할 진(鎭)은 18획수로 총 ‘39획’ 수이리다.
수리오행 81에서 39획은 장성격(將星格)으로 분류되며, 의욕적이고 진취적이며, 지덕(知德)과 문무(文武)를 갖추어서 대지 대업(大業)을 이루고 타고난 지도력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고, 부기겸전(富貴兼全)하여 부부화합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이룬다. 39획은 귀하고 영웅적인 의미가 있는 수리(數理)이다.
장보고는 이러 청해진의 명칭에서 오는 81수리 성명학에 따른 기운을 입고 군사.무역에 있어서 하고자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나 욕망을 크게 가지는 등의 의욕적(意慾的)이었다. 그는 그런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루는 등의 진취적(進取的)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는 지식(智識)과 덕성(德性)을 갖추는 등의 지덕(智德)으로 청해진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두루 갖춘 문무(文武) 감각도 뛰어나 그가 이루고자 하는 대업(大業)이 성공리에 마쳤다. 이런 타고난 지도력(指導力)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됐다. 이런 결과는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진 부귀(富貴)하고 여러 가지를 완전히 갖춘 겸전(兼全)하여 부부사이가 돈독해 가정의 평화를 불러들었다. 나라에 충실해 부강한 신라로 만들어냈다.
장보고가 큰 인물로 부각이 된 것은, 청해진이 국제해양무역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청해진이라는 수리성명학에서 그 운길이 열린 것이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크게 성공하고자 청해진 작전명, 전략적 미션을〈청해진 39〉 으로 부여했다. 그는 또 〈장보고 31〉 이라는 작전명도 부여하며 확장과 보호와 명성을 떨치는데, 자신의 이름을 미션으로 수행하게 했다. 31획의 수리(數理)를 한 장보고는 융통성과 리더십, 포용력과 추진력으로 청해진 대사로서 탁월한 성과를 낳았다.
대한민국은 장보고함이라는 군사선으로 건조해 바다에 띄웠다. 아이러니하다.
●선암(船岩)을 선암(仙암)으로 불러야 길(吉)하다
궁복.장보고가 태어난 선암(船岩)의 배 선(船) 획수는 11획이며, 바위 암(岩) 8획의 수로 총 ‘19획’ 수이다.
19획은 81수리 성명학에서는 나쁨으로 보는 ‘흉(凶)’ 으로 여긴다. 이 획은 ‘고난(고난).병역(病疫)’ 등 불리한 운을 뜻한다.
능력과 열정을 있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리이다. 뛰어난 재능과 적극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애써도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타고난 능력과 유능함에도 불국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아, 어떤 일을 하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재정적안 어려움이 계속되어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건강까지 약화된다.
겨우 유지하던 재산마저 잃게 되어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19획은 비운격(悲運格)의 수로 부모덕이 없고,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있으나 뒷받침을 못해 비관하는 경우가 있다. 나쁜 수에 해당되는 19획의 수리이다.
선암(仙岩)은 수리 성명학에서는 신선 선(仙)은 5획이며, 바위 암(岩)은 8획 수로, 총 ‘13획’ 수이다.
수리 성명학에서는 13획은 ‘입신격(立身格)/통달묘미(通達妙味格)’ 으로 분류되며, 이 수는 ‘총명적(聰明的)/지달운(知達運)’ 으로 길(吉) 수로 해석된다. 지혜와 문예운을 뜻한다. 귀인 운과 행운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81수리 성명학에서는 13획이 ‘매우 좋음’ 으로 본다.
학문과 예술적 재능이 풍부하고, 지혜와 뛰어난 전략을 지닌 수리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새롭게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이 내려준 황금 같은 복을 듬뿍 누렸으며, 이는 분명 하늘이 내린 축복임을 의미한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진행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하늘에는 언제나 좋은 일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는 구름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래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하게 한다. 항상 온화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며, 점차 큰 ‘부(富)와 명예(名譽)’ 를 손에 넣는다.
선암(船岩)과 선암(仙岩)의 한자 표기는 81수리 성명학 관점에서 볼 때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선암마을은 현재 선암을 배 선(船)자와 바위 암(岩)자를 쓰고 있는데, 선암마을이 배와 관련돼 그런 한자로 표기한 것은 이해가 되나. 81수리 성명학에서는 19획 수리가 ‘나쁨’ 으로 해석한다. 좋지 않는 운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길하지 않는 흉(凶)한 수로 본편이다.
그래서 선암(船岩)을 선암(仙岩)으로 한자(漢字)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보며, 배(船)와 밀접한 고장이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배, 장보고가 배를 통해 당나라로 가서 장수를 했고, 신라로 들어와 청해진 대사로서 해상왕이 됐다는 것에 의미를 둔 것이지만, 그런 의미를 낳게 한 바위를 이왕이면 장보고라는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게 만든 영험한 바위를 좀 더 격을 높여 신성시 하도록 한자 표기를 선암(船岩)으로 한 게 더 좋을 듯싶다. 81수리 성명학 관점에서 볼 때도...
선암(船岩) 19획 수리로 나쁨, 선암(仙岩) 13획 수리는 좋은 운의 수이다.
선암마을이 궁복.궁파.장보고라는 아름다운 이름, 의미 있는 이름, 훌륭한 이름으로 선암이 빛나. 카메라의 피사체(被寫體. subject), 사진이나 영상에서 카메라에 찍히는 대상이 된, 세계인들의 눈에 맞추는 ‘건덕암과 국두암이 중심 피사체’ 로 주목됐으면 하며, 중심 피사체가 없어 시선이 분산되는 경우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눈 카메라 피사체로 선암마을의 건덕암과 국두암이 멋지게 화면(눈)에 들어오도록 〈궁복.장보고를 보다〉 주제로 피사체를 맞추어보자.
셔터 버튼을 반쯤 눌려 초점을 맞춘 뒤, 다시 구도를 잡고 완전히 눌러 촬영하면 초점이 해당 피사체에 고정되듯이 말이다. 현장에서 1200년 전 그때의 궁복.장보고를 떠올리면서 선명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궁복.장보고 기리는 역사.문화공원 필요
영암은 왕인박사를 기리는 왕인에 대한 유적지 조성을 해났다. 왕인박사에 대한 피사체를 맞춘 포커스다. 왕인은 사실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전혀 기록에 남은 게 없다. 일본 역사서에는 왕인에 대한 거론이 되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에서는 바다를 건너와서 문물을 전파했다는 정도다.
그런 왕인박사인데도 영암은 왕인이 군서 성기동에 태어나, 일본 아스카시대 때 구림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도래했다고, 일부 사람들의 주장으로 사실로 보고 발굴과 함께 공원을 조성해났다.
궁복(弓福)은 통일신라시대 때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이곳에 장보고(張保皐)로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으로 출세를 할 만큼, 그는 신라인의 참 모습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신라로 들어와 해적 소탕, 안보의 군사(軍事)와 문물을 수출입하는 ‘중계무역(中繼貿易)’ 을 담당하는 완도에 설치된 ‘청해진(淸海鎭)’ 이라는 대사(大使) 직을 맡아 신라를 튼튼하게 해주며 번영과 함께 위상을 높였다. 해상왕(海上王)으로 이름을 떨쳤다.
왕인박사는 실존적(實存的)인 인물인가에 의문점이 있는 인물이지만, 영암은 그를 실제로 존재한 인물로 보고 그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장보고는 실제 영암 선암마을에서 태어난 실존적인 인물임에도 그에 대한 예우(禮遇)는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에서만 장보고에 대한 역할과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관.문화관과 공원’ 을 통해 그를 기리고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고장 영암은 없고, 장보고가 활동한 완도는 있는 게 아쉬운 대목이다.
●건덕암과 국두암 의미를 더한 사자성어
건덕암(乾德岩)의 ‘하늘 건(乾)’ 은 이런 사자성어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선건전곤(旋乾轉坤), 천지를 뒤집어 나라의 난을 평정하거나, 나쁜 풍습을 고침
-건곤일척(乾坤一擲), 운명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
-별유건곤(別有乾坤), 좀처럼 볼 수 없는 아주 좋은 세상
-확휘건단(廓揮乾斷). 과단성 있게 다스림
이런 건(乾)이 담긴 〈건덕암〉 으로서 소중한 가치와 의미가 있음이다.
국두암(國頭岩)의 ‘나라 국(國)’ 은 이런 사자성어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부국안민(富國安民),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나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안정시킨
-경국자재(經國之才), 나라의 일을 맡아 다스릴 만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
-결사보국(決死報國),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
-태평천국(太平天國),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편안한 이상국
-이국편민(利國便民),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애국애족(愛國愛族),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함
-구국간성(救國干城),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
-막강지국(莫强之國), 더할 수 없이 강한 나라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함
-경국대업(經國大業),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일
-진충보국(盡忠報國), 충성을 다하여서 나라의 은혜를 갚음
-애국지성(愛國之誠),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
-우국지사(憂國之士),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
-치국안민(治國安民),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
-충군애국(忠君愛國)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함
-위국충절(爲國忠節),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
-명만일국(名滿一國), 이름이 한 나라에 널리 퍼짐
-적심보국(赤心報國),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함
-부국강병(富國强兵),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한다는 뜻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든
-경국지사(經國之士), 나라의 일을 맡아 다스릴 만한 사람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경국제세(經國濟世), 나라를 잘 다스려 세상을 구제함
-갈충보국(竭忠報國), 충성을 다하여서 나라의 은혜를 갚음
-향국지성(向國之誠), 나를 생각하는 정성
-건국지기(幹國之器), 국가를 다스릴 기량이 있음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
이런 국(國)의 인물을 배출한 바위라는 것에서 〈국두암〉 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암마을에 있는 〈건덕암과 국두암〉 은 장보고에 관련 단순한 의미를 담은 바위 명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두 바위가 그런 의미에서 명칭을 부여했다. 장보고에 대한 삶과 생애와 꿈과 희망은 물론, 그의 뜻과 의지를 담아낸 무언(無言)의 표시이며, ‘존경(尊敬)의 상징성’ 이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궁복.궁파.장보고에 대한 생애와 뜻, 업적 등의 모든 것을 유추해볼 수 있도록 한 바위다. 그런 바위를 우리는 ‘영험하다. 신비하다. 의미 있다. 성스럽다. 귀물(貴物)이다’ 라고 바라본다. 청해진으로 해상왕이 된 장보고의 한 개인에 대한 건덕암.국두암이라고 일컫는 바위다. 그 바위는 선암마을의 상징성 바위를 넘어 〈The Korea Great Stone〉 으로서의 최고, 대단한, 거대한, 엄청난, 위대함과 웅장함, 숭고함, 광대함이 깃든 바위-Grandeur이다.
●건덕암.국두암 선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울려 퍼지다
장엄함의 건덕암.국두암으로서 마치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안 탄생 100주년 기념, EMI 박스테트의 CD 63-65번 3장을 음감(音感)해 보듯이 CD 63번에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과 39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이한 건 교향곡 39번 1~2악장 리허설 연주 음원(音源)이 포함돼, 카라안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듯, 모차르트 교향곡 38번과 39번 원전은 1971년에 EMI 레이블에서 LP로 발매되어 녹음은 1970년 9월에 베를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이루어졌듯이 궁복.장보고에 대한 연주가 전남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 에서 펼쳐진 듯하다.
장보고의 연주곡은 특이하게 1악장(樂章)이 없이 2.3악장(당나라, 완도)만 존재한다. 곡은 관악기(바다에서 내는 소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색채감(정책)이 매우 풍부하며, 음향(정신력.의지력.기획력.추진력)이 두텁고 극적으로 전개된다.
2악장(당나라)도 겉보기엔 부드럽고 우아함 느낌이지만, 지속적인 그림자와 내면적 불안감이 흐르고 있다. 3악장(청해진) 역시 상대적으로는 밝지만, 거칠고 무거운 느낌이다. 그런 3악장은 결국 폭발적인 긴장으로 보여주며, 4악장 비극(암살)적인 질주로 마무리한다.
궁복이라는 장보고는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가 태어난 마을에서는 지금도 그를 사모하며 사무친다. 그를 그리워하는 궁복 작사, 궁파 작곡, 장보고 지휘로 선암마을에서는 건덕암과 국두암을 무대로 장보고 콘서트, 오보에는 마을사람들, 호른은 청년회, 클라리넷은 부녀회, 바순은 새마을회가 연주하고, 이장의 지휘로 〈선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가 협연된다.
곡은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악기 음색의 매력을 잘 드러내주는 곡이다 보니, 2악장(당나라 서주)부터 듣기가 참 좋다. 악장은 3악장에서 절정(絶頂)을 이루는데, 오보에는 귀족 우아함을 드러내고, 호른 따뜻한 느낌을, 클라리넷은 부드러운 서정성을 담당하며, 바순은 안정감을 주는 음색을 표현한다. 비록 진위 논쟁은 있지만, 이 곳은 고전주의 협주곡 양식을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오늘날 연주회에서 많은 인기를 받고 있다.
선암마을 건덕암과 국두암에서 펼쳐지는 궁복.장보고에 대한 연주는 단순한 독주 중심의 기교(技巧) 과시용 작품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이 동등한 위치에서 긴밀하게 대화(對話)하는 교향곡적 협주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보고는 한 살 아래인 평생 동지였던 정년(鄭年)에게 이 작품을 헌정(獻呈)하였으며, 실제 작곡 과정에서도 요아(要牙) 힘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선암마을의 궁복.장보고 바이올린 협주곡은 위인(偉人)들 이후 협주곡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교향곡적 깊이를 제시할 걸작(傑作)이다. 연주자에게는 뛰어난 기교와 더불어 높은 음악적 통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며, 청중에게는 장엄함과 서정(抒情), 그리고 생명력의 조화(造化)를 선사한다. 2026년 올해로 장보고 탄생 1,238주년을 카라안의 100주년에 빗되어 표현해봄이다.
●역사성 가치 있는 건덕암.국두암
지금 선암마을 뒤에는 마을을 굽어보며 지키고 있는 거북바위(건덕암)가 애처로워 보인다. 어떤 바위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누구하나 이 바위를 귀함을 알고 역사적인 평가와 가치성을 느끼는, 소중한 바위로 모시는 일은 찾아볼 수 없다고 볼 정도로, 그 바위는 그냥 자연 속에 하나의 피조물로 방치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마을 앞 국두암도 마을의 환경을 대변하고 있고, 이 바위가 어떤 바위였는지를 알면서도 이 또한 방치한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산에 들에 흔히 놓인 그런 바위가 아니다. 이 바위들은 역사와 문화, 장보고의 생애를 알고 있는 연관된 바위들이다. 역사적인 가치성이 뛰어남에도 우리는 이 바위를 그저 돌이려니 취급한다.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장보고는 왜 고향을 찾지 않았을까?
궁복.궁파로서의 이름대로 신라의 인물로 성장했던 그는 다시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더 위대한 인물로 부각이 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을 찾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 ? ?
물음표(?)를 몇 번이고 써 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궁금해지고,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잊었을까?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을까?
그 이유, 단서를 잡을 만한 증거는 없다.
도대체 그는 왜 고향 영암 선암을 찾았다는 기록이 없을까?
안간 건가? 갔는데도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인지?
그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들어와 잠시 선암마을 다시 찾았다는 얘기는 전하지 않는다.
궁복이 장보고로 출세하여 고향을 찾았다는 단서는 티끌도 없다. 하지만 추측성이라는 단어에서 판단해 보면...
그는 그가 17세 때 고향을 떠났을 때는 고향을 떠나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은 잊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그는 당나라로 떠났다. 그는 다시 신라로 들어와 편지(書信)를 전달하는 역참(驛站)을 통해 선암마을에 계신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장보고는 부모님께 안무를 묻고, 부모에게 나라를 위해 완도에서 청해진을 설치해 나라의 안보와 질서, 해상로를 개척해 무역에 정열을 쏟으며 이바지 하겠다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밝히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부모님을 찾아뵈는 게 도리인데, 나라 상황이 그러니 이해해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자 부모들은 장보고에게
“궁복아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괜찮으니 나라에 충성을 다 하여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는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서 전념한다. 청해진 일이 워낙 복잡하고 중대한 일이어서 선암마을을 찾은 짬이 그리 나지가 않았던 것, 신라는 여러 면에서 한마디로 ‘어지러울 난(難)’ 상태였다. 나라 안 밖으로 복잡하게 돌아갔다. 바다에서는 해적(海賊)들이 판을 치고 있고, 나라 안에서는 왕권다툼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등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왕권이면 왕권, 조정이면 조정, 귀족이면 귀족 등으로 혼돈(混沌) 상태가 이어졌다. 그런데다가 중계무역이라는 것에 해상로 개척이나 무역항 개척 및 국제적인 무역교류 등에 신경을 써야할 일이 항다반사였다.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간 시기였다. 특히 심각해진 해적 소탕에 당장 나서야 될 정도로 심각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었던 것.
이런 상황이 매일 펼쳐지고 있는데, 그는 당나라에서 국내로 들어오기 전부터 신라에 가면 당장 해적 소탕에 나서겠다는, 긴급 상황으로 듣고 들어왔기 때문에, 한가롭게 고향을 찾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안하지만, 고향보다 완도 청해진에, 그리고 나라에 집중하기로 하고, 그런 일로 인하여 자주 찾아뵙지 못하니 아예 고향에 계신 부모들을 완도로 모신다. 효심이 깊은 장보고는 영암에서 완도로 ‘이거(移居)’ 하게 한 것이다. 부모들은 완도 장도로 이주(移住)하여 궁복과 같이 살게 된다. 장보고 부모는 간신히 농사와 어업의 생업으로 간신히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을 안 장보고는 부모님 걱정을 아니 할 수 없었다. 23년 동안 당나라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부모를 향한 걱정과 그리움이 컸다. 그런 그가 신라로 다시 들어왔지만, 제일 먼저 부모를 찾아뵙지 않고, 그는 국내 현안에 더 걱정을 하며, 바로 임금이 계산 조정(朝廷)을 찾았다. 신라 42대 흥덕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왕에게 알현해 해적 소탕 등 신라가 처한 제반사항에 논의한 뒤 바로 완도로 달려가 청해진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했다. 고향 선암을 찾아볼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은 더 더욱 멀어졌고,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고향이 그만한 군사와 무역으로 관심지역이었다면, 한 번쯤을 답사(踏査)형식으로도 찾아봤을 텐데, 그런 환경이 못돼서 안중(眼中)에도 없어진 것이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있으면서 국내는 물론, 당과 일본, 동남아 등지로 뛰어다니랴, 정신이 없었다. 정치.경제.문화.사회.종교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바쁜 일상이어서 리더로서의 작은 일에는 생각할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치안.안보.질서와 국제무역 등 굵직한 현안이 항상 그의 눈앞에 놓아져 있어, 그는 이 큰 현안들을 해결하려고 불철주야로 뛰었다. 분주한 삶이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그는 국내 일만 보는 사람이 아니기에 외교.통상업무 등 국제적인 일에도 일을 봐야하는 입장이어서 군사면 군사, 무역이면 무역, 정치면 정치, 사회면 사회 이런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만 했다.
장보고는 ‘치추지지(置錐之地)’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란 뜻으로, 매우 좁아 조금도 여유도 없음을 이른 것처럼, 그는 각종 일로 정신이 없었다. 정책사업 외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어떤 일에 파묻혀 조금도 틈이 없는 ‘골몰무가(汨沒無暇)’ 였다.
장보고는 언젠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방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중한 업무(業務) 때문에 고향방문은 쉽지가 않았다. 군사적인 일로만으로 벅차지만, 군사를 넘어 무역.외교 등에도 해결해야 될 일들이 많고 범위가 커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조정과의 소통과 관계설정, 협의 등을 해야 될 부차적인 일도 늘어나 리더자로서의 책임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장수(將帥)에 머물지 않았다. 군사(軍事)는 물론, 무역.정치 등 여러 일에 관여를 했다. 그는 누구보다 ‘국제적(國際的)인 감각’ 을 익힌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보다 막중한 임무, 역할을 담당했다.
장보고는 ‘발분망식(發憤忘食)’ , 끼니까지도 잊을 정도로 일에 열중하여 분발했다. ‘야이망침(夜而忘寢)’ , 밤이 되어도 잠자는 것을 잊었을 정도로, 일에 집중했다. 각종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의 ‘망아지경(忘我之境)’ 이었다.
장보고는 사방이 바다인 장좌리 섬에서 고향의 월출산을 향해 『선암 떠난 날에 청해진에 들어/눈물을 씻고서 사방을 돌아보니/창파만리(滄波萬里) 구나/하늘의 뜻이 도와 순풍을 보내주면(天心順助)/사반고향(使返故鄕)하리라.』 하며 그는 꿈에도 그리운, 돌아가고(使返) 싶은 고향을 향해 그리움 달래면서 이런 저런 잡념을 잊고자 일에만 몰두했다. 그래도 고향생각은 났고, 그리운 고향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생각지 못한 죽음이라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신라 중앙에서 보낸 염장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일로 그는 고향 영암 선암은 살아서는 가보지를 못하고 죽어서 영혼(靈魂)으로 찾았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기리고자, 그의 영혼을 달래주고자. 궁복을 낳게 만들어준 거북바위를 ‘건덕암(乾德岩)’ 으로, 궁복이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던 너럭바위를 ‘국두암(國頭岩)’ 으로 불러줬다. 하늘에서 내려준 어진 사람이 됐다고 해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됐다고 해서다.
자연물인 바위를 그렇게 불리게 함은 마을의 안녕(安寧)과 수호신(守護神)격의 ‘서낭당(城隍堂)’ 이 된 셈이다.
서낭당의 성격을 띤 건덕암과 국두암은 궁복.궁파.장보고라는 한 인물에 대한 기림이며,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라는 생각으로 장보고가 꿈꾸고 희망하며 이루어낸 것들을 이어 빛내며, 그가 꿈꾼 세상을 위해 함께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마을사람들은 건덕암과 국두암에서 궁복인 장보고를 위한 기림의 추념(追念)을 표한다.
장보고가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되새기며, 진실을 기억하고자, 그가 이룬 훌륭한 일들을 기리고자 자유와 평화, 발전과 번영을 향한 더 밝은 내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선암마을사람들은 건덕암.국두암에 대해 “우리 마을은 건덕암과 국두암이라는 이 두 바위는 우리 마을의 자랑이자, 위대한 상징석” 이라며 “이 의미가 새겨진 건덕암과 국두암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장보고라는 훌륭한 인물을 알린 장보고의 용기.투지.결단.추진, 그리고 헌신과 공적을 알리는 추념석(追念石)으로, 기념석(紀念石)으로 기억하는 신의 피조물이 존재하는 성스러운 장소다” 라고 〈기억 속 궁복, 추념 속 장보고, 기념 속 선암〉 으로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궁복.장보고의 외침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끝까지 기억하겠다” 고 다짐했다. 궁복.장보고의 그 울림에 귀 기울이고 함께 외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큼 꼭 전드리고 싶다고 했다. 선암마을사람들은...
장보고라는 인물, 연민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가는 건덕암.국두암이 되길 애써 말한다.
●장보고는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아이콘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서 활동을, 완도 청해진에서 해적 소탕과 해양질서, 국제무역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국제적 아이콘이었다. 장보고 3D 스텐딩 넥스트 투 유-Jangbogo, 3D, Standing Next to You 라는 추진력을 보여 큰 사랑을 받았다. 장수(將帥) 활동을 넘어 선진자(先進者)로서 강력한 팬덤과 파워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찬사를 받는 해상제패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봤다. 장보고의 사업수단, 그 헌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건덕암.국두암 & 신라, 그에 대한 기림의 공연은 장보고의 정체성과 그리움, 깊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룬,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천년의 장보고 다시 오다〉 주제로 행사가 영암 선암에서 시작해, 중국 서주에서 긴장을 조성하여 완도 청해진에서 고조를 시켜 피날레를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거래 기술, 무한한 기쁨을 누리다
신라는 세계 각국의 중계무역상과 거래처, 상업가들을 맞이하여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신라가 추진하는 모든 일에 특유의 규모감각과 활력을 불어넣으며, 나라와 나라 간에 중계무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라를 비롯해 당, 일본, 동남아 등의 대표단이 한자리에 모여, 개척자들은 선진제도를 제품과 서비스를 선보였다.
무역항 곳곳에 수백 명의 무역 관련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미래를 상상하는 모습은 신라무역을 넘어 국제무역으로 성장하는 일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민주적인 중계무역으로 만들었다. 장보고는 이를 신라의 발전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했다. 무역교류 혁신과 도입을 위한 거대한 움직임이 진정으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인류사의 문명의 경로를 바꾼 수많은 기술적 변곡점을 목격했다. 중계무역은 신개발로 인한 문물 등장과 함께 어께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걸렸던 변화가 국제자유무역 시대에서는 단 몇 주 만에 전 지구적 영향을 전개되었다.
장보고의 무역정책은 신라를 한 순간에 도약하게 만든, 무역 모델을 제시한,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 있어서 높이 평가될 만한 일로써, 중계무역은 지능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역할은 인간의 의지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점에 있었다. 그래서 장보고는 기계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 으로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해진에서 ‘우리는 모두의 복지와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라는 원칙 아래 인류의 안녕을 글로벌 무역의 담론의 핵심을 두었다.
이런 면들을 살펴볼 때 건덕암.국두암이라는 명칭은 노벨상처럼 인류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국제적 상’ , 지역 단체가 수여하는 지역적 ‘명예시민.시민대상’ , 그리고 개인이 직접 만든 ‘위대한 상장’ 같은 상징성이 있다고 보며, 명예로운 지정석이 아닌가 한다.
궁복.장보고 도전신라인상, ‘당신의 위대한 도전을 응원합니다’ 라고 건덕암.국도암에 경의(敬意)를 표한다.
장보고의 존재는 위대한 전제, 증명할 대상이 아니다.
영암 선암마을에 있는 건덕암과 국두암은 궁복.장보고에 대한 기림과 동시 그의 군사와 무역부문에서 탁월한 공헌(貢獻)을 하여 수여되는 〈신라의 노벨상〉 이다.
기림의 미학, 결정체는 숭고함의 그 자체였다. 구성은 알찼고, 형식은 멋졌고, 상징은 훌륭했다. 기림의 미학은 ‘궁복.장보고의 열정과 기억, 예술로 승화하다’ 라는 주제로 설정하리만큼, 〈궁복.장보고 천년의 나타남, 별빛 위로 잊혀 진 이름을 부르다 展〉
궁북.장보고 기림 날 맞아 기획
영암 선암마을사람들 모두 참여
섬세한 조형언어로 울림을 선사
일 년 내내 행사 프로그램 다채
‘애국.평화의 가치, 희망의 날개 짓으로’ 주제로 애국.평화의 메시지를 미래세대가 이어받아 희망의 날개 짓으로 힘차게 날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궁복.장보고 천년의 나타남, 별빛 위로 잊혀 진 이름을 부르다 展〉 을 펼친 일이다.
선암마을 건덕암과 국두암은 마을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이 바위를 선암의 명예의 전당에 올리는 등의 ‘명예석(名譽石)’ 으로 지정하고, 천년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어 잔잔한 울림과 감동을 준다.
한편, 선암마을에서는 앞으로 온 국민이 기림의 날을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그리고 마을 등이 함께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해 전국적인 기념식 분위기를 이어가려 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1000년 전의 그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마을사람들은 궁복.장보고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생각나는 사람, 그리운 사람 궁복.장보고라고 한다. 선암마을사람들은 “영웅의 후예를 잊지 않겠습니다.” “궁복.장보고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며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국가를 위한 숭고한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건덕암과 국두암’ 으로 명칭을 부여했다.
●영암 선암에 장보고가 돌아왔다
영암 선암마을의 건덕암은 ‘거북바위’ 로서 민간신앙을 낳았다. 칠성(칠성신.칠성바위로)으로 모셨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壽命)과 길흉(吉凶)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마을 밖의 일곱 개 바위를 신체(身體)로 삼아 칠성고사(七星告祀)를 지낸다. 바위를 신격화(神格化)한다. 선암마을 〈거북바위〉 를 신격화했다. 그리고 국두암도 역시 신(神)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여기고, 신앙(信仰)의 대상으로써 신격화했다.
선암마을의 거북바위인 건덕암은 칠성바위로서, 칠성(七星)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神)인데. 거석(巨石)을 칠성바위로 삼아 치성(致誠)을 드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평지에 집을 지을 때 큰 바위를 의지하여 짓고 하였는데, 큰 바위를 대개 〈장군 할배, 장군바위, 장군 농바위〉 등이라 칭하였다. 추석이나 설 전날 밤 칠상바위 앞에 촛불을 밝히고, 장만한 명절 음식으로 간단히 상을 차린 뒤에 안주인이 그 앞에서 비손(비는 손)을 하였다. 이때 상을 따로 차리지 않고 깨끗이 간추린 짚을 얇게 깔아 놓고 그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도 하였다.
선암마을의 거북바위는 자연에 대한 ‘민간신앙(民間信仰)’ 으로서 건덕암이자, 사람에 대한 ‘우상숭배(偶像崇拜)’ 로서의 건덕암이다.
거북바위를 칠성바위로 모시는 것은 ‘토테미즘(Totemism)’ 사상에서 비롯된다. 특정 인간 집단이나 개인이 어떤 동식물.무생물 등과 특수한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신앙(信仰)으로 결부한 현상이다. 토템은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게 종교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야생 동물이나 식물 등을 상징한데, 선암마을 거북바위를 ‘궁복.장보고’ 라는 인물로 여겨 신앙으로 모신 것이다.
하늘의 덕이 있는 바위로 여겨 ‘건덕암(乾德岩)’ 이라고 칭하고 토테미즘이 원시공동사회에서 보여 지는 종교의 한 형태로, ‘혈연적(血緣的).지연적(地緣的)’ 집단이 특정한 동식물이나 자연물과 공통의 기원(祈願)을 갖는다고 믿거나, 결합관계(結合關係)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숭배(崇拜)하는 것이 특징인데. 선암마을 거북바위는 토템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宗敎的).주술적(呪術的).사회적(社會的)’ 인 관념 등으로 볼 수 있다.
선암마을은 건덕암과 국두암이라는 토템을 매개로 하여 하나의 ‘사회집단(社會集團)-Social Group’ 이 형성되고, 그에 대한 의례(儀禮)를 통하여 사회집단과 그 사회의 토템이 결속하게 했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장보고의 한 개인의 ‘우상암(偶像岩)-Idol Rock’ 이면서 마을 공동체의 사회집단을 형성하게 한 ‘토템’ 으로서 씨족의 선조인 토템 동물을 씨족의 ‘명칭(名稱) 혹은 문장(紋章)’ 으로 삼고, 일정한 시기에 성지(聖地)에서 토템 동물과 씨족의 신을 맞이하여 ‘씨족의식(氏族儀式)’ 을 거행했다.
건덕암인 거북바위는 토테미즘 신앙에서 바라보고 있으면서 ‘궁복.장보고’ 라는 한 인물을 상징하며 우상(偶像)으로서 신격화한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씨족으로서의 〈사회집단 형성, 친족관계 형성〉 을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서주와 청해진이 있는 완도에서만 주로 다뤄지며, 그에 대한 역사관이나 문화관과 공원조성 등으로 알린다. 장보고가 궁복으로 태어난 곳인 영암 선암마을에는 그저 ‘건덕암과 국두암’ 이라는 정도로 장보고에 대한 예우(禮遇)를 갖추고 있다.
선암마을의 바위 명칭을 건덕암.국두암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궁복이 장보고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는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Take Me Home Country Roads〉 라는 존 덴버의 노래처럼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 시골길아’ 해됐다. 그는 846년(문성왕 8년)에 58세의 일기로 완도에서 세상을 떠나, 그는 고향인 영암 선암을 그리워한다.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를 위해 마을에서는 그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탄생설화가 있는 바위를 ‘건덕암(乾德岩)’ 으로, 출세설화가 있는 바위를 ‘국도암(國頭岩)’ 으로 칭하고, 그의 업적(業績)을 기리면서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17세에 고향을 떠난 그는 살아생전에 고향을 찾아보지 못하고, 영혼(靈魂)으로 고향에 머물고 있다. 건덕암과 국두암의 이름이나 직위를 써서 책상 앞에 놓인 명패(名牌)나, 주소.성명 따위를 적어 문 옆에 다는 문패(門牌)로... 씨족.집안.단체 따위의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시의 문장(紋章)으로...
선암마을 장보고(張保皐) 집안의 궁복가(弓福家) 명패.문패.문장은 〈건덕암.국두암〉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