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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한 사랑
주 요 한
사랑하는 이여 !
써놓고 보니 어색하옵니다. 쓰는 나보다도 받아 보실 당신이 더 어색함을 느끼겠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라고 쓸 수 있는 지금 나의 행복감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 한마디는 나로서는 당신에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처음 겸 마지막 겸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을 쓰고 있는 내 손이 왜 이렇게 떨릴까요? 때는 무더운 여름날 재밤중인데.
당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실는지 모르오나 내 기구스런 일생의 하소연을 이 한 통 편지에나 털어놓고 나서 내가 택한 내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아무런 원망도 미련도 없이 오직 내 진심을 당신에게 마침내 고백할 수 있는 용기에 내 마음은 감격으로 차 있습니다.
그날 오후의 당신의 행동은, 그 동기는 여하간에, 사회의 여론이 어디로 흐르건 불관하고, 살인 행위였습니다. 당신이 분명한 청년을 사살한 이상 당신은 살인자인 것입니다. 파란 많은 해외 망명 혁명가 노릇을 해온 당신이라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과거 몇몇 사람들의 목숨을 상해하셨는지는 내가 알 바도 아니고 비난할 바도 아니지만. 그리고 그 사건이 생긴 이튿날 숱한 신문지상에 대서특필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 저격 사건은 이 가련하고 의지할 데 없는 나에게는 치명상을 준 사건입니다.
당신은 정당방위 행동을 했다고 세상이 다 인정하고 있고 거기 대해 나도 일체의 의혹도 품을 수 없고 원망할 근거도 없기는 하지만ㅡ그러나, 아 ! 당신이 쏴 죽여 시체가 되어 연기로 변하여 화장터 높은 굴뚝을 기어올라 창공에 퍼져 버린 그 청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손에 죽은 그, 그 청년은, 청년은 나에게 둘도 없는, 또 그리고 당신의…… 아, 뭐라고 써야 하오리까?
내가 이때까지 당신에게 글월을 올린 일이 한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 글월을 받아 읽으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으니, 혹시 어떤 실성한 여인의 헛소리라고 오해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 편지를 당신에게 올릴 권리가 있는 몸입니다. 지금 내 아들의 피가 내 혼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글월을 쓰고 있는 손은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고 있는 손이 아니라 당신이 쏜 총알을 맞고 죽은 내 아들, 이십 년간이나 고이 길러 온 내 아들의 손이 내 손을 이끌어 이 편지를 쓰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과연 누구간디 감히 이런 무례한 편지를 나한테 보냈을까?"고 당신은 노하시겠지만, 나는 당신을 첨 뵈온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내가 극진히 사랑해온 당신이, 내가 또 극진히 사랑해 왔던 아들을 총살했으니 이 어인 운명의 희롱입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야속하기만한 운명입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흰 줄을 둘러친 중학교 교모를 쓰고 새까만 교복을 입은 당신이 평양 만수대 아래 있는 『계월향(桂月香) 턱』을 뛰어내려오곤 하던 모습, 지금도 내 눈에 서언합니다. 퇴락된 계월향 사당 건너편에는 수양버들이 머리 풀고 깃들인 조그만 연못이 있었었지요. 얼마 뒤 그 연못을 메운 왜놈들이 현대식 건물을 세웠지요.
돌봐 주는 이 없는 계윌향 사당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 폐허가 돼 버린 데다 바로 그 앞에 보기 흉한 여자 감옥소 건물이 서게 된 뒤부터 열녀 명기 계월향의 순국 정신을 기념하는 사당이 그 감옥소 뒤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만큼 임진왜란 때 소세비라는 왜장을 죽이고 순국한 기생 계월향의 혼을 모시는 사당이 재건되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그 사당이 아직 서 있었을 시절, 단청한 전각 앞 돌 깔린 뜰 돌틈을 뚫고 기어나오는 잡초를 뜯으며 놀고 있었던 코홀리개 소녀를 본 기억이 당신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요일만 빼놓고는 매일 오후 가파른 언덕을 성큼성큼 뛰어내려오곤 했던 중학재학 시절 기억은 당신에게도 남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꺽다리』가 그 당시 당신의 별명이었지요. 중학생인 당신의 키가 너무―컸기 때문에 우리 몇 철없는 계집애들이 그런 별명으로 당신을 호칭 했던 것이었습니다.
매일 오후 하학하고 나자 당신네 중학생들이 메를 지어 『계월향』을 껑충껑충 뛰어내려올 때마다 계집애들이 당신네를 놀려주곤 했었던 일을 혹 기억하고 계신지요? 어느 날 오후 나와 몇 어린동무들이 여느 날 마찬가지로 사당 뜰에서 풀을 뽑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 어린이가 "저기 꺽다리 혼자 온다." 라고 소리치는 것을 나는 들었습니다. 머리를 들어 쳐다보던 나는 무슨 혼에 씌었던지 손에 들고 있던 흙 달린 풀포기를 당신께로 홱 던졌지요.
기억나십니까?
기억하시는지 못하시는지 알 도리가 영 없는 나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풀포기에 얼굴을 얻어맞고 날 쏴보시던 당신의 눈 ! 한순간의 웅시 ! 그러고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그냥 뛰어가고 만 당신의 모습. 무안하고 수줍던 내 마음.
그 다음날부터 당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다른 애들처럼 『꺽다리 지나가신다.』고 놀리지를 못하고 멍하니 바라다만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또 당신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너무 조숙한 계집애였다고 욕하실지 모르나 외동딸로 자라난 나는 큰 오빠를 그리는 그런 감정으로 당신을 그리워했
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계월향 턱』에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자 몇 달 못 가 나는 당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해 세월이 흘러 1918년 봄 서울로 유학온 나는 여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치맛자락 밑에 흰 줄을 선친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길거리에서 네모꼴 모자를 쓴 전문학교 학생인, 『꺽다리』와 딱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은 무척 울렁거렸어요. 당신의 모습만 보고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큰 죄를 범하는 것같이 느껴진 나는 그 다음날부터는 겁이 나서 딴 길을 택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당신을 또다시 보게 된 것은 서울운동장에서였습니다.
"하, 하, 그 숱한 팬들 중 하나가 되었었단 말이군."
하고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수천 수만 명의 관중. 선수가 볼 때에는 구름처럼 둘러 있는 평범한 팬들이 평범 이상으로 보였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한 축구 팀의 선수로 출장한 것을 확인하는 순간 평범한 도를 넘어선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이름도 처음 알게 되었지요. ― 신문에 보도된 팀! 멤버들 명단을 읽어서. 당신의 슛이 골인되면 다른 선수가 골을 쟁취한 것보다 더 기쁘고 당신 사진이 신문에 나면 그걸 나는 남 몰래 가위로 오려 내어 열다섯 살 처녀만이 기획하고 유지할 수 있는 비밀 장소에 고이 모셔두기두 했어요.
이것이 일종의 영웅 승배에 가까운 감정일는지도 모르지만 내 가슴 속에서는 영웅 승배의 도를 넘어 그리움, 연모의 정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창경원 동물원에서 본 바 있는 기린의 가죽처럼 얼룩덜룩한 유니폼을 입은 당신이 그 큰 키, 그 긴 다리, 그 굳센 발로 공을 몰며 돌진할 적마다 내 근육마저 당신의 긴장한 근육에 끌려가는 듯 긴장과 흥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몰고 가다가 패스, 껑충뛰며 다시 받는 패스, 슛! 슛! 골인 ! 열광하는 관중이 소리지르며 일어서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서는 나는 "우리 꺽다리 잘한다,!"고 소리 질렀어요. 내 옆에서 구경하던 학우들도 그날부터는 당신을 『꺽다리 선수』 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잊혀지지 아니하는 1919년 2월 28일 ! 당신은 그 날이 당신팀 우승한 날쯤으로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나로서는 그날 밤 잠 한 숨 못 자면서 가슴 떨리는 기대와 공상과 희망으로 한밤 꼬박 세웠습니다. 왜냐구요?
그날 오후 우승 팀의 스타 플레이어인 당신이 선수들의 옹위로 공중으로 치켜올려질 때 관중 전체가 흥분되었고, 나와 한반 학우인 순애 역시 흥분을 가누지 못해 그녀 옆에 있는 당신 사촌누이를 조여 이튿날 당신을 방문하여 축하드리자고 제의하는 것을 우리 모두 박수로 환영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달콤한 꿈에 사로잡힌 나는 혼자서 수줍어하고 기뻐했습니다.—―나는 당신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신에게는 일면식도 없는 내가 당신의 사촌누이와 함께 불쑥 당신이 묵고 있는 하숙으로 찾아갈 때 당신은 나를 지독한 말괄량이라고 멸시 하지나 아니 할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얼룩덜룩한 유니폼을 업은 당신이 공을 몰고 있었습니다. 골을 향하여 공을 모는 것이 아니라 관람석을 향하여 몰고 오던 당신이 나를 향해 슛하더군요. 나는 마치 골 키퍼가 된 양 그 공을 냉큼 받아 가슴에 안았습니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던 내가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이십여 년이 지나간 어젯밤에도 당신이 내게로 공을 슛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한 달 전에 당신을 만났을 때―놀라십니까? 한 달 전에 당신이 날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던 일이 있었지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이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당신의 체구를 비대하게 만들었고,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주름살이 깔렸고, 젊음의 야성이 스러져 없어지고 그 대신 세련되고 미끈한 노장 신사가 되신 당신을 지척에 두고 마주앉는 영광을 나는 맛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젯밤 꿈에 본 당신은 젊은 축구 선수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
사람 한 개인의 운명은 용솟음치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는 섬약한 부평초 같은 미미한 존재인가 봅니다. 한 소녀의 첫사랑의 꿈이 세계 사조에 휩쓸리는 거대한 민족적 파도 앞에 머리도 못들어 보고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것을 하루 전, 아니 한 시간 전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나의 운명 이었습니다.
3월 초하룻날 오후에 생긴 일입니다.
한 축구단 주장에게 우승 축하를 드리려고 서울 거리를 기쁘게 걸어가고 있었었던 다섯 명 처녀들의 발걸음이 중도에서 방향이 바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만세를 부르며 거리거리를 누비는 군중 홍수 속으로 다섯 처녀들이 휩쓸려 들어갔는데 그들 중에 나도 끼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독립 만세』는 그날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내 일생의 커다란 전환기의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민족적인 큰 일에 나 같은 하나의 미미한 여성이 아무렇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사오리까마는, 희생당하는 개개인에게는 진실로 쓰라린 일입니다.
이날 『독립 만세』 가두 데모 선두에 나서셨던 우리 아버님이 왜놈 헌병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학교를 더 못 다니게 되었고 과부가 되신 어머님과 어린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는 직장을 구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새삼 이런 하소연을 당신에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나로서는 십 년 전에 지하에 묻히신 어머님에 대한 원한을 지금에도 풀 도리가 없습니다. 어머님은 생활 방도의 도구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나를 혹사하셨습니다.
또 그리고 일반 사회에 대한 내 원망도 여태 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레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애국자의 유가족에 대해 그 당시 조선 사회는 너무나 쌀쌀했습니다.
독립 만세 부르다가 순국한 열사의 딸이 기생으로 전락되다니! 믿을 수 없는 말 같지만 나는 기생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기는 계월향의 영향이 나를 기생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계월향 사당 그늘에서 자라났습니다. 비천한 기생이면서도 국난에 임하자 왜장을 죽이고 자기도 죽은 순국혼이 된 월향이 얘기가 몸에 밴 나였는지라 나 자신이 비록 기생이 되더라도 정신만 바로 차리고 살면 겨레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아니할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나를 기생이 되게 부채질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생각하니 내가 기생이 되었길래 당신을 단 몇 차례나마 직접 모실 수 있는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믿어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
혹시 기억나십니까? 그 옛날, 아득한 옛날, 당신도 젊고 나도 젊었었던 어느 여름날 당신이 나를 직접 만났었던 것을.
기억을 더듬어 보시옵소서, 내 사랑이여.
1925년 여름. 이십여 년 전 일을 현재까지 어떻게 잘 기억하고 있었느냐고 물으실지 모르지만 그날이 나에 게는 죽는 날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값있는 날이었습니다.
무대는 정릉 물 골짜기를 타고 앉아 있는 청수장 요리집 별관.
주연 배우는 당신과 나.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 결코 아니었고, 청년인 당신이 갓 스무 살 나는 나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줄로 동여매 주신 날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날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날 오후 등에 땀이 촉촉히 밴 나는 개울 징검다리 위에 구부리고 서서 손수건에 찬물을 적셔 등덜미를 닦고 있었습니다.
기생으로의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오늘은 또 어떻게나 생긴 놈팡이들에게 시달리게 되나 하고 생각하면서 누바위를 쳐다보는 순간……
아, 그 순간! 축복받은 그 순간? 발을 헛짚은 나는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습니다.
누각에 계시는 여러 남자 손님들의 눈, 눈, 눈이 모두 다 우리들 기생 일행의 거동에 못을 박고들 있었는데 당신 하나만은 굽이굽이 도는 산골짜기를 멍 하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내 눈은 당신의 그 옆얼굴에 못박혔습니다.
"그이다, 분명 그이다 !" 라고 나는 거듭 다짐했습니다.
별안간 무한히 수줍어진 나는 고개를 폭 숙이고 징검다리 돌들을 조심조심 골라 짚으면서 결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벌써 삼사 년이나 겪어 온 기생 생활에 익숙해져 제법 노련한 기생으로 자처하고 있었건만 그날 놀이에서만은 당신 앞에서 어떻게나 수줍고 가슴 두근거렸는지.
『술 취하면 재롱 잘 피우는 명기』라는 평을 들어왔었던 그날 저녁에는 꾸어 온 보릿자루처럼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당신도 벽창호인 양 기생들과 희롱하는 일은 통 없이, 권하는 대로 사양 않고 술만 얼마든지 마시면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가까운 숲속에 혹시 형사라도 숨어서 당신 말을 엿듣고 있다면 당신은 체포당해 갈 것이 분명하여 조바심으로 가슴을 죄는 나는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말씀이 청산유수 같고, 목소리도 우렁차서 당신이 한참 내리섬길 때에는 몇 해 전 학생 시절에 서울 그라운드에서 풋볼을 몰며 달리시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름 밤의 꿈』 아니 꿈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손님들과 기생들은 다 자동차 타고 시내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되어서 당신과 나만이 그 요리집 본관 으슥한 방에 단둘이 남아 있게 되었는지를 그때 생각해 보셨던가요?
단 하릇밤만이라도 당신을 독점해 보고 싶은 내가 몇 년간 쌓아올린 기생의 수련을 총동원하여 계획을 꾸며 우리 단둘이 남아 있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르도록 담뿍 취했던 당신이 겨우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실 때 당신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한참 동안 옆에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셨습니다. 당신의 침착한 태도 !
보통 사내 같으면 벌떡 일어나며 "여기가 어디야?" 라고 소릴 지를 것이었는데 당신만은 당신이 마땅히 누워 있는 곳에 누워있는 것 같은 태연한 태도로 천천히 방을 휘둘러보고는 고요히 일어나 앉으면서 "날이 샜나 보군."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고는 이어 "참 좋군, 산골짜기 물 흐르는 소리 졸졸 들려 오고, 내 옆에는 절세미인이 지키고 앉아 있고. 우리 산보나 나가 볼까."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이 내 손목을 지그시 잡고 끌었지요.
놀란 토끼처럼 뛰노는 내 가슴. 숱한 사나이들이 내 손목을 잡았었지만 당신의 손에 잡힐 때처럼 짜릿짜릿한 감각을 느낀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보얀 안개 속에 손과 손을 꼭 붙잡고 오불고불 꼬부랑 산골짜기 길을 나란히 서서 걸었지요. 가끔 나뭇가지에 얼굴을 할퀴면서 언덕길을 올라갔었던 기억이 당신에게는 남아 있지 아니합니까.
걸어가면서 당신이 얼마만한 차기 본위 옹고집이라는 것을 나는 곧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혼잣말에 너무나 열중하는 당신은 나에게는 입을 벙긋할 기회를 영 주지 않으셨지요. 그러나 동행하는 젊은 기생이 무식하고 천한 여성이라는 관념을 조금도 품지 않으신 듯 당신의 포부와 야망을 활활 다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산마루턱까지 다 올라가서 숨을 돌릴 때에야 당신은 깨달은 듯이 "아, 이거, 나 혼자만 너무 떠들어대 미안하게 됐구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끊고 우두커니 서서 물 흐르는 소리는 들려도 보이지는 않는 계곡에 눈을 주고 계셨습니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쉬고 난 당신은,
"아,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 !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 동양 천지 어디 또 있을까? 없지, 없어. 그런데 우리 삼천만은 이렇듯이 잘났는데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는 왜 이다지도 못나고 쓸개가 빠졌을까. 아, 아! 얼마 전 우리 글로 씌어진 어떤 소설을 읽다가 이런 귀절이 감명이 깊었소. 그 귀절을 원문대로 다외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강 이랬소.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나 혼자만이 왜 깨어 있으면서 거리거리를 왜 헤매며 외롭고 슬픈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가라고. 이 귀절에 공감을 느끼는 나는 비분강개한 마음 걷잡을 수가 없었소. 몇 해 동안 해외로 떠돌아다니다가 잠시 고향에 내가 들러 봤는데 그 목적은 외국 국내 통틀어 혼자 깨 있으면서 외롭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조선 청년들이 몇몇이며 어디어디 있는지를 찾아보고 싶은 거요. 이들 먼저 깨서 노래 부르는 청년들이 모여 뭉치면 그것은 저절로 커단 합창대가 되어 외롭고 슬픈 노래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우렁차고 기쁘고 희망이 가득 찬 노래가 될 것이오, 따라서 잠자는 대중을 깨어 일으킬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소. 아 ! 센치한 넋두리는 그만하고…… 그, 어, 당신 이름이 무어지?"
"설송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흠, 눈 설자, 소나무 송자로구먼. 누가 그 이름을 지어 주었지? 이몸이 죽고 죽어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눈 속에 혼자 서서 절개를 지키는 솔 ! 허지만 그건 너무 소극적이야…… 내가 다른 이름 하나 지어 주어도 괜찮을까?"
"불감청이오나 고소원이로소이다."
"야, 이것 봐! 상당히 유식하구먼…… 우리 같은 무식쟁이 섣불리 굴다가는 망신패 차겠는걸…… 허, 허, 가만 있자…… 눈이라, 설은 당신 살결에 어울리니 그대로 두어야겠고, 솔보다는 매화가 더 좋을 것 같군. 설중매가 어떨까?"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설중매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렇지, 그래. 나약해 보이는 섬세한 매화가 눈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 꽃을 피우는 그 강직성…… 그게 좋아."
사랑하는 이여! 내 이름을 고쳐 주신 당신. 인제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채릴 수 있으십니까? 아니, 아시리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 뒤에도 한두 차례 더 만나 뵈올 때 나는 첫눈에 당신을 알아봤지만 당신은 날 몰라 보던걸요.
그날 밤 당신은 날이 샌 줄 알고 있었지만 차차 도로 어두워오기 시작했습니다. 달빛 남아 있어 훤했던 것이 달이 져버리고 해 뜰 시각은 아직 안 되어 도로 어두워진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언덕길을 내려오며 한참 묵묵하시던 당신은 갑자기 "설중매, 무엇 한 곡조 부르며 걸어가지. 너무 조용하니까 범 나올까봐 무섭구먼." 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는 이어 "언제 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인상에 남게 특별난 노래를 하나 불러요." 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내 허리를 꼭 껴안으셨지요.
나는 노래를 불렀지요. "사랑인들 님마다 하매, 이별인들 다 서러우냐? 평생에 처음이요, 다시 못 볼 님이로다. 이후에 다시 만나면 연분인가……."라고. 그때 그 노래는 내 혼백의 애끊는 진정한 호소였습니다.
인제는 기억나십니까?
그 노랫가락을 다 끝맺지 못한 내가 눈물 홀리는 것을 눈치채신 당신은 나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서서 뜨거운 키스를 오래오래 해주셨지요.
어둠 속을 더듬어 방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은 밖보다 더 어두웠습니다.
그 새벽. 그 어두운 방에서의 꿈 아닌 꿈. 그렇습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날 저녁 새벽 꿈을 꾼 것이 아니었던가고 문득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산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는 말입 니다!
술 냄새 가신 당신의 체취, 팽팽하게 바람 넣은 풋불처럼 탄력 있는 당신의 포옹, 불같이 뜨거운 당신의 입김.
그때 내가 순결한 육체의 소유자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 정신만은 순결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 당신과의 교섭에서 나는 처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녀간의 참된 사랑은 육체 따로 정신 따로, 따로 따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서로 융합되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나는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새벽 그 요리 집 한방에서 당신이 내 육체를 소유하기 시작하시기 일 초 전까지도 나는 성 행위는 어디까지나 추잡하다고 느꼈었습니다. 나는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하여 그런 추잡한 행동을 피동적으로 응했었던 것이었습니다.
돈 벌기 위해 내가 그리 좋아하지도 아니하는 남자에게 내 정조를 처음 제공할 때 느꼈었던 그 수치심과 고통과 자포자기하는 심정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몇 차례 겪은 뒤부터는 이미 정조를 더럽힌 추잡한 년이라는 열등감을 느끼기는 하면서도 순간적인 육체적 쾌미는 감각하게 되어진 것이 무서워서 나 자신을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새벽 내가 돈을 바라고 당신의 품에 안긴 것은 절대 아니었고 단지 정말 사랑하는 이, 그것이 짝사랑이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고 싶은 본능적인 행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만족감과 황홀감은 내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는 기분으로 즐겁게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당신에게 제공했습니다. 평생 처음 맛보는 극도의 흥분과 황홀과 만족을 얻은 나는 곧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깨 눈을 떴을 때 나는 놀랐습니다. 해가 이미 떠 방이 환한데 당신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잠시나마 빠졌더랬습니다.
새벽 어둠 속에 나를 찾아왔던 행복의 신이 날이 밝자 그림자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표적도 남겨 놓지 않고ㅡ아니, 표적이 있었습니다. 내 눈이 그때 머리맡에 놓여 있는 봉투에 머물렀던 것이었습니다.
꽤 두툼한 봉투.
왜놈 헌병과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시는 갈 길 바쁜 당신이라는 걸 이미 눈치챈 나는 그 부피 큰 봉투 속에는 당신이 쓴 다정한 긴 편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뛰놀기 시작했었습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을 봉투 속에 넣어 본 나는 실망했습니다. 아니 통분했습니다.
두둑한 지폐 뭉치.
그 돈을 나는 팽개쳤습니다. 평생 처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내 혼과 몸을 정성껏 당신에게 바쳤는데 그런 내 심정을 몰라주는 당신은 내 몸값만 던져 놓고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
기억을 더듬어 봐 주십시오. 내 얼굴은 물론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어느 때 정릉 산골짜기에서 어떤 기생에게 설중매라는 이름을 지어주시고 하룻밤 정답게 놀아본 일이 있었거니, 그리고 또 아무 때 아무 데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 못하는 양장한 댄스 걸과 더불어 재미있게 놀아 본 일이 있었거니 하는 기억만이라도 당신 머리에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습니다.
당신이 설중매라고 이름 지어 준 그 기생이 양장한 댄스 걸이 되어 가지고 당신을 두번째 만나 하룻밤 즐겼었던 얘기를 여기서 되풀이하여 당신의 무딘 기억을 긁어 드릴까 하옵니다.
때는 1938년. 그러니까 설중매가 당신에게 몸과 혼백을 몽땅 바친 후 십사 년의 세월이 지나간 뒤였습니다. 서울 장안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생 설중매가 그 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열세 살 나는 더벅머리 총각 하나를 데리고 중국 상해에 나타난 조선 여성.
머리 쪽지고 긴 치마 입고 외씨 버선을 신었었던 기생티를 홀랑 벗어 버린 나는 퍼머넌트 새둥지 머리에 새빨간 연지칠한 입술, 새까맣게 물들인 눈썹과 눈두덩, 열 손가락 손톱에 사철 봉사를 들이고 역시 빨간칠을 한 엄지발가락이 뾰죽 내다뵈는 샌들을 신고, 코티분 냄새와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국제 도시 상해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 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당신이 설중매인 줄 알아보시지 못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를 손꼽아 세어 보셔도 좋습니다. 서른네 살이었지요. 그러니까 기생 사회에서는 이미 환갑을 지난 늙은 기생이었어요. 하지만 상해로 가서는 맥스펙터라는 미국인 요술사와 코티라는 프랑스 마술사 덕분에 나는 십 년은 더 젊 게 보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데리고 다니는 소년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애가 내 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남동생일 거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사내들 앞에서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구태여 그 애가 내 아들이라는 걸 깨우쳐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상해 인터내셔널 카바레에서 어떤 날 밤 생겼었던 일! 십 사 년 동안이나 자나깨나 내가 그리워해 왔던 당신과 마주치는 순간! 이 순간을 인연지어 준 장본인은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원수인 일본 군인이었습니다. 군율보다도 더 강한 욕정에 사로잡힌 한 일본 졸병이었습니다.
중화민국 하북성 북평시 교외 십리 허에 자리잡은 노구교 대리석 다리. 당신도 아시다시피 먼 옛날 마르코폴로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원나라 때 중국에 와서 벼슬도 살며 구경 다니다가 이 대리석 다리에 그만 홀딱 홀려 버려 그가 쓴 기행문에 이 다리를 너무도 칭찬했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이 다리를 『마르코폴로 브리지』 라고 부른다더군요.
이 노구교 근처에서 야간 기동연습을 실시하던 천진 주재 일본군 한 중대 소속 졸병 하나의 실종 사건.
지금까지 폭로하지 못하고 쉬쉬해 왔었던 비밀 역사를 지금 마음 턱 놓고 공개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 공로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에게 있는 것이올시다마는.
하여튼 그 1937년 7월 7일 무더운 밤중에, 남의 나라 영토 내에서 건방지게 야간 기동연습을 하고 있었던 일본군 병사 하나가 갑자기 강 건너 중국인 창녀촌에 정들여 둔 중국 꾸냥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기동연습이건 뭐건, 나중에는 삼수갑산으로 도망치게 되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형을 받게 되건말건 간에 그는 꾸냥이 그리워 어둠을 타 슬그머니 빠져 나가 강을 건너갔던 것입니다.
하룻밤 오십 전만 가지면 몸을 살 수 있는 중국 갈보를 끼고 누워 씩씩거린 그 일본 병사의 일이 그 이튿날 커단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제일이라는 신문들이 호외를 찍어 돌렸습니다. 급보 제목에 왈 〈야간 기동연습중 황군(皇軍) 한 명이 포악한 지나 폭도들에게 납치 당하다.〉였습니다. 이런 허망한 뉴스를 에누리 없이 믿는 왜놈들은 격분해 떠들어대고, 일본 군대는 선전포고도 하지 아니하고 중국 대륙 침략전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일본 사병을 홀린 중국 시골뜨기 창녀가 그날 밤 주홍빛 긴 잠옷을 입고 모란꽃 수놓은 비단신을 신고 밤에만 향기를 뿜는 야래향꽃 한 송이를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꽂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 별 틀림이 없겠으나, 어쨌든 계집이 가진 매력으로 인하여 터진 소위 대동아 전쟁의 영향으로 우리 조선 화류계 여자들이 세계적 무대, 특히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방방곡곡으로 갑작스레 크게 진출하게 되었던 것 이었습니다.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 입고 땋아 내린 긴 머리채 꽁지에 자주빛 댕기를 매고, 물동이 머리에 이고 맨발로 새벽 이슬을 밟으면서 다니던 조선 농촌 처녀들이 열 명 아니 백 명 천 명씩 갑자기 일본식 『히사시가미』를 틀고 몸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울긋불긋하고 소매가 긴 『기모노』로 몸을 두르고는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생기고 헌데가 나서 아프고 쓰라린 것을 참으며 쪽발이 『다비』 위에 『조리』를 끌며 소위 『황군 위안대』라는 괴상한 명목을 대고 일본군 점령하에 있는 아시아 대륙에 편만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반도 도회지 화류계 여자들 대다수가 한국 옷을 벗어 던지고 일본 옷 아니면 양장, 심지어 중국 꾸냥의 옷을 입고 만주로 하얼빈으로, 천진과 북평으로, 상해로, 청도로 대거 돌진해갔습니다.
미나리 타령을 하던 시골 처녀들의 입에서 『오륙고부시』가 흘러나오게 되었고, 공명가를 부르던 기생들의 입에서는 『사께와나미라까』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두 바꾸어 은주는 『요시꼬』가 되고, 옥선이는 『데루꼬』, 홍난이는 『마리아』가 되는 바람에 설중매도 덩달아서 『에레나』가 되었지요.
이렇듯이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한국 여인들이 무엇으로 밥벌이를 했느냐고요. 『황군 위안대』 여자들은 주로 전투지구 제1선으로 가서 일본 사병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지요. 『하루조』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서분네는 매일 밤낮 평균 삼십 명의 군인 손님들을 치러 불과 반 년에 수천 원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발도 날개도 없이, 그녀의 고향 동리에 파다하게 퍼져 그 동네 우물에 모이는 여인들간에 가장 흥미 있는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처럼 댄서로 돌변한 기생들은, 아편 중독자가 되지 아니하는 한, 백만장자의 귀동딸 못지않은 차림새를 하고 기고만장 중국의 대도시 거리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습니다. 겨울철 날씨가 기껏 내려갔대사 영하 이삼 도 정도밖에 더 안 되는 상태에서 댄서들은 흰 여우털 외투를 입고, 손가락에서는 세 캐럿 금강석 반지와 대추알만한 비취가락지가 광채 자랑내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택시 댄서들이 중국인 난봉꾼들을 녹여서 그 많은 돈을 벌었을까요? 아닙 니다, 천만에요.
장소는 중국 대륙 대도시였지만 이들 한국인 택시 댄서들을 호강시키는 봉들은 전쟁 경기에 벼락부자가 된 한국인들과 일본인 남자들이 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일본 헌병대 급사 노릇을 이십 년이나 해온 박서방이 별안간 『니시무라상』 이 되어가지고 일본어를 잘하는 덕분으로 일본군의 통역이 되어 중국 전선으로 갔습니다. 점령군 통역이라는 요직을 이용하여 중국인 양민들을 토색질하여 큰돈을 단시일에 쉽게 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시골 면서기 노릇 십 년이나 했던 홍서방은『나까하라상』 이 되어 내륙으로 가, 아편 소매 밀매업자가 되어 큰 돈을 많이 벌었지요. 중국인이 아편 밀매하다가 일본군 점령지대 내 중국인이 경찰에 발각 체포되면 즉결 처분을 받아 저승으로 직행하는데 반해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일본 국민으로 치외법권 보호를 받는 조선인들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더라도 곧 일본 경찰에 신원을 넘 겨줘야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반도 조그만 마을에서 조그만 잡화상을 수십 년간 해온 강서방은 『가네자와상』이 되어 일본군 점령하의 화북지구로 가서 중국 돈 대양 은전 몇백 개씩을 허리에 차고는 만주국 국경지대인 산해관까지 기차 타고 가서는 그 은전을 일본군 구매처에 삼십 퍼센트 프리미엄을 붙여 팔아넘겨 폭리를 봤습니다.
한반도 여러 도시에 포목상을 경영하던 김 ·최·이·장·하·박―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나까무라상』이 되어 일본인 인조견 밀수출자와 결탁하여 일본군 점령하 아시아 지역 땅 방곡곡을 편답하면서 일본제 인조견을 중국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폭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듯이 쉽고 빠르게 번 돈으로 그 남자들은 우리들 댄서들에게 털외투, 다이아몬드 반지, 기타 패물 등속을 마구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릉에서 당신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헤어진 지 수년 후 어머님이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나는 혼자몸이 됐습니다. 아니, 혼자몸이 아니었습니다. ——돌 지난 아들을 데리고 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아버지 얼굴은 한번도 못 보고, 과부처럼 사는 쓸쓸한 어머니 아래 모락모락 자라나는 정호가 딸리고 보니 기생 노릇하기가 무척 어렵게 되고 싫증도 나고 해서 첩살림을 차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정이란 손톱만큼도 없이 단순히 돈에 팔린 가정생활이라 얼마 못 가 파탄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돈 많은 색마들도 내 육체만 정복하고는 얼마 안 가 딴 계집 궁둥이를 따르더군요.
첩살림하다가 도로 기생이 되었다가 다시 첩살림, 또다시 기생―나는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소위 대동아전쟁이 질질 끌게 되자 서울에서의 생활은 물질면에서나 정신면에서나 질식해버릴 만큼 궁하게 되었습니다.
상해 방면으르 먼저 간 친구들한테서 편지가 자꾸 왔습니다. 경기가 좋을 뿐 아니라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스런 생활을 즐길 수 있으니 곧 오라는 사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열 살나는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낯선 외국땅으로 전전할 용기가 얼른 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혹시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당신을 중국 땅에서는 만날 수가 있지나 아니할까 하는 기대가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기대기는 했지만.
일본군 점령지대에 당신이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지만 그러나,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경계망을 옳고 십여 년 전에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었던 당신이었던만큼 일본군 점령지대라도 뚫고 들어와 활약하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호를 데리고 상해로 간 것이었습니다.
국제적 대도시인 상해. 날로날로 더 번창해 가는 댄스 홀들. 일본 여자나 중국 여자로 행세하는 한국 여인 댄서들, 진짜 일본인 댄서들, 진짜 중국인 댄서들, 그리고 공산 치하에서 망명해 온 백계 러시아 여자 댄서들도 많았습니다.
어둑신한 홀, 매끈매끈하는 마루 위로 남녀 쌍쌍이 포옹하고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천장에 달린 오색 채광등도 뱅글뱅글 돌고 억센 남자의 다리들과 날씬한 다리들도 빙빙 돌며, 탁자에는 샴페인이 흐르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마시자. 춤추자. 시외에서는 치열한 게릴라전이 전개되고, 점령하 중국 농민들이 굶어죽건말건 아랑곳없이 댄스 홀에는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마시고 춤추고 광란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뜨겁고 분내 향수내가 풍기는 홍도 같은 여자의 뺨에 꺼칠꺼칠한 남자의 뺨이 밀착되어 있고…… 수군수군, 소곤소곤, 고개가 까딱까딱, 끄떡끄떡, 흥흥거리는 음흉한 웃음소리와 자지러들게 호호호 하는 선정적인 웃음소리. 이글이글 타는 눈짓…… 아, 돌자, 돌자. 다리도 돌고 머리도 돌고, 달도 돌고,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돌고, 정신도 돌고, 돈도 돌고 도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택시 댄서들이 호강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몇 해인가 나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성하는 정호가 철이 좀 들자 제 어미의 방종한 생활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홀에서 만나던 그날 밤.아들과 첫 대판 언쟁을 하고 만 나는 여느 때보다 술을 과히 마셔 상당히 취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내 앞으로 와 허리를 조금 굽히는 당신이 춤추자고 청했습니다.
금시 당신이라고 알아보지 못한 나는 기계적으로 일어서서 내 손을 당신의 어깨에 사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뒤 당신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나비처럼 가볍게 잘 추는구먼." 이라고 속삭이신 것처럼 당신 리드에 잘 맞추어 돌았습니다.
홀 중앙에 샹들리에 바로 밑에 이르렀을 때 밝음 속에서 당신 얼굴을 똑똑히 인식하게 될 때 나는 놀라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가슴이 뛰는 나는 미칠 듯한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수백 수천의 남자들 품에 안겨 춤을 추어 온 나였지만 그날 밤 당신과 춤춘 서너 시간만큼 즐거운 적은 없었습니다.
내가 설중매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당신은 그날 밤 나에게 한번 더 매혹당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춤이 끝나자 당신은 나를 당신 테이블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 댄스 홀에서 내가 당신의 유일한 파트너가 되게 된 것은 참으로 천만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나에게 춤을 청할 때 당신은 중국말을 했지만 샹들리에 아래서 당신이 누군가를 곧 알아차린 나는 비밀 사명을 띠고 일본군 점령지대로 잠입해 온 당신이 중국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불안과 호기심에 나는 사로잡혔습니다. 그 시절 상해의 댄스 홀들은 한결같이 국제 스파이들의 소굴이었습니다. 댄서들 대부분도 이중 스파이들이었구요. 댄서 직업만으로도 돈은 얼마든지 벌면서 그 위험한 스파이 노릇을 왜 했을까? 고 반문하실지 모르나 그 짓을 부득불 하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애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애정 관계에 있어서 여자란 얼마든지 강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사랑을 받는다 하고 폭 빠진 뒤에는 애인이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 한달지라도 달게 복종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또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로 옮아가는 듯한 기미가 엿보일 때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서는 물불 헤아리지 아니하고 세상 아무런 짓도 감행하는 것입니다.
또 더러는 자기 일신상 어떤 비밀을 숨길 필요가 있는 여자가 못된 사나이의 협박에 눌려 마음에 없는 간첩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파이라는 구렁텅이에 한번 빠지면 다시 기어나올 도리는 절대 없습니다. 도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간첩 생활은 로맨틱하기도 하고 스릴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구고 진짜 스파이는 절망에 빠진 노예입니다.
그날 밤 처음부터 당신이 나에게 반하여 나를 독점하신 일을 나 한 개인의 행복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의 안위,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 국운을 위하여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독점했었기 때문에 당신이 일본군에게 체포당해 끌려가지 아니하고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고 중경으로 돌아가셨다가 해방된 오늘 환국하셔서 건국의 주춧돌이 되게 된 사실을 생각할 때 그날 밤 상해에서의 일은 단순한 우연이었다고 보이기보다는 국운을 축복하는 하나의 천지신명의 보호였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당신처럼 자아 과대망상에 치우친 사람들은 대개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아니하여 실수할 때가 있고, 그 실수가 간첩에게 간취되는 때 일신상 파멸은 말도 말고 기획하던 중에 사업의 파멸까지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그 댄스 홀에서의 당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품에 안겨 춤추기 시작하자마자 당신 몸에는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걸 발견하는 내가 놀라웁고 또 가슴이 떨렸던 것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스파이 댄서와 춤을 추셨던들 !
이 글월을 읽으시면서 당신은 상해에서의 그날 밤 일을 회상하시리라고 믿어집니다.
지금의 이 미군 군정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진실로 독립국가가 되어 축하 잔치가 벌어질 때, 이 몸은 당신의 위대한 마음을 보지 못하고 땅속에서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제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 상해의 댄스 홀 택시 댄서 에레나의 공이 컸었다는 것을 당신 혼자 속으로나마 기억해 주신다면 나는 무덤 속에서나마 행복하게 감읍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
술에 취하신 당신은 그때 그 춤에만 혹하셨던 것이 아니라 내 몸까지 탐하셨지요.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쓰면서! 택시 댄서인 나를 유혹하시던 당신의 달콤한 말 !
홀에서 나의 인력거에 올라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인력거 한 채에 당신을 먼저 태우고, 당신 무릎 위에 나는 올라탔습니다.
당신을 모시고 간 곳은 백계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서양식 호텔이었지요. 부끄러운 고백이올시다만 지금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택시 댄서 노릇 몇 해 동안에 이 러시아인 경영 호텔로 봉들을 끌어들인 일은 상당히 많았었습니다. 돈 벌기 위한 것이 주 동기였고, 때로는 내키는 기분 때
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날 새벽녘에 당신을 모시고 그 호텔 충층대를 올라 갈 때처럼 흥분했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취하신 당신을 침대 위에 눕히고 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주무시는 당신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정릉 요리집 뒷방에서 삼십 미만인 당신을 내가 독점했었던 일이 새삼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그 이십 년 뒤 중년신사가 되신 당신을 다만 몇 시간이나마 내가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내 몸과 정신이 아플 만큼 황홀감과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약간 떨리는 손으로 나는 당신의 옷을 가만가만 조용조용히 벗겼습니다. 그렇지요. 정릉에서 제가 처음 당신에게 몸을 바칠 때에는 당신이 내 옷을 벗겨 주셨지요. 돈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순간적 기분도 아닌 나는 당신의 아내 자격으로 혼과 몸을 몽땅 당신에게 드렸습니다.
정릉에서 첫번 우리가 결합되었을 때 당신은 내 몸을 돈 주고 산 줄로만 착각하시고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몸값을 봉투에 넣어 내 머리맡에 놔두고 슬그머니 가셨드랬지요. 그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불유쾌하고 불만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그 앙갚음을 할 양으로 내가 먼저 일어나서 아래 충으로 내려가 우리 둘의 숙박료를 호텔 주인에게 물어 주고 살그머니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슬픈 일이었습니다. 잠드신 남편을 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 한 방에 혼자 버려두고, 아내인 내가 내 남편인 당신이 혹시 깨일까봐 겁이 나서 구두도 신지 아니하고 양말 바람으로 방안에 깔린 융단과 층충대에 깔린 융단을 조심조심 밟을 때 내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 뒤 당신을 마지막으로 옆에 모셨던 것이 바로 한 달 전. 자기 아내의 집인 줄도 모르는 당신이었지만 내집 안방에까지 당신은 들어오셨지요. ― 겨우 반 시간 가량 앉으셨다가 불쾌한 기분으로 휙 나가 버리셨지요.
인제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날 오후 모처럼 아내의 집을 찾아오셨다가 분연히 후닥닥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리는 당신을 볼 때 나는 달려들어 당신을 붙들고 모든 걸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나는 그 충동을 참았습니다. 당신이 작별 인사도 안 주시고 나가 버리신 뒤 나는 방안에 쓰러져 몸부림치며 실컷 울었습니다. 울긴 왜 울었느냐고 당신은 반문하시겠지요.
이 펜을 던지기 전에 모든 것을 반드시 고백하여 당신이 품으신 의혹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저 자신의 기구한 평생 사정을 좀더 자세히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아무리 지루하시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세요. ― 내가 처음 겸 마지막 겸 당신에게 보내는 단 한 통의 편지인 동시에 제 유서인 사실을 알아주세요.
1945년 8월 15일 !
우리 겨레의 해방의 날 !
이날은 우리 전민족의 환희와 감사와 희망의 날이거니와 나 개인으로는 삼중으로 감격 깊은 날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립고 그립던 당신이 개선 장군으로 귀국하실 길을 터준 날, 둘째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이 개죽음을 면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날, 그리고 셋째로는 독립 운동 하시다가 왜놈 총칼에 세상을 하직하신 아버님 혼백이 지하에서 나마 마침내 행복을 느끼실 날이었습니다. 그렇거늘 ! 아, 아, 그렇거늘 ! 지금 이 애타는 나의 가슴, 애통하는 마음 ― 이 어찐 모순당착입니까?
해방되던 날부터 매일 초조하게 기다리는 내 마음. 일 년 전에 소위 『학병』이라고 이름하는 강제 징집에 끌려나가게 된 제 아들의 무사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훈련 끝내고 전선으로 가는 날 어딘지 장소도 밝히지 못하고 그냥 전선으로 나가노라는 간단한 엽서 한 장이 그 애로부터 온 뒤 소식이 묘연했던 내 아들 언제나 돌아오려나?
아무개네 둘째 아들은 일본 큐슈 비행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무사히 돌아왔대. 아무개네 조카는 중국 어느 최전선에까지 끌려나갔다가 어제 돌아왔대. 또 아무개의 외아들은 전사했다는 통고를 받았고 얼마 뒤 해골까지 일본국 당국에 가서 찾아와 죽은 것으로 체념하고 있었는데 그저께 팔 하나만 잃어버린 채 불쑥 돌아왔다느니.
열흘을 걸어왔다느니, 한 달을 걸어왔다느니.
사람 서넛만 모여도 이런 소리뿐인데 내 아들놈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 비행기 타고 환국하실 당신조차 오신다는 소식이 없어 매일매일 종이 반 장맹이로 나오는 수십 가지 신문들을 모조리 사다가 눈이 빨개 들여다보던 그 조바심.
그러다가 내 아들과 당신이 거의 동시에 돌아올 때 기쁘고 반갑고 ― 그랬었던 것이 한 달이 못 돼 거품처럼 꺼져 버렸으니 ― 이 어떤 몹쓸 도깨비의 장난입니까 !
남편인 당신이 내 아들인 동시에 또 당신의…… 아, 아, 지금 와서 이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습니까?…… 그럼 말씀드려야지요.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권총으로 쏴 죽인 것입니다.
그놈이 죽을 혼이 씌워 당신을, 자기 아버지인 줄 모르고, 쏴 죽이려다가 도리어 당신의 총에 맞아 죽었으니 누구를 탓하리까마는 하필 왜 그놈이 당신을 암살하려고 했으며 왜 하필 당신의 총이 우리들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했단 말입니까 !
내가 그것을 낳아 놓고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겠습니까 ! 삼칠일이다, 백날이다, 몸을 뒨다, 돌이다, 긴다, 걸음마를 뗀다, 짝짜궁 도리도리 하고, 엄마엄마엄마 부르기도 하고 (아빠 소리는 영 못 배우고) 하며 자라난 아이입니다.
밤놀이에 불려 요리집으로 가 밤 늦도록 취객들에게 시달리다가 이차 회, 삼차 회 등은 슬쩍 피해 집으로 돌아와도 그 어린 것은 어미젖을 못 빨아 배고파 울고 울다 기진맥진해 잠이 들어 있곤 했습니다. 젖 한 모금 빨려 주려고 잠을 깨워 젖꼭지를 물려 줄 때 그 어린것은 배고픈 것보다도 밤 늦도록 자기를 버려 둔 어미의 행동에 야속한지 비쭉거리며 젖을 잘 안빨 때 내 속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세상에 못할 짓은 기생 노릇 ― 특히 젖먹이 애기가 딸렸을 때에는. 내일부터는 놀이에 안 나가고 애기와 종일 함께 있겠다고 결심 하고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기 몇몇 차례. 화류계에 처음부터 몸을 던질 게 아니라 고되기는 하겠지만 빨래나 바느질 등 품팔이를 시작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도 해보고, 기생 학교에 강제로 나를 보낸 어머니 (지하에 계시기는 하지만)를 원망도 해보았습니다.
같은 기생들끼리 모여 앉은 자리에서 서로 신세한탄을 나누면서 헤어나갈 수 있는 길을 궁리도 해봤지만, 냉정하고 억센 사회구조의 울타리를 끊고 뛰쳐나간다는 일은 우리 기생들의 연약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단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한 생만 살고는 죽는 인생 ! 불교에서는 전생, 이승, 저승이 있다고 하고 예수교에서도 죽은 뒤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말들 하지만 내가 친히 경험한 바 없는 전생 또는 지나보지 못한 저승이 이승의 현재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무어니무어니해도 당장 감각할 수 있는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이승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남들처럼 면사포 쓰고 결혼식도 해 보고 싶은 때가 때때로 있었고, 남편이 밤늦게 돌아올 때 바가지도 긁어 보고 남편의 생일이 오면 앞치마 허리에 두르고 부엌으로 오르내리며 수선도 피워 보고 싶고…… 아, 이런 부질없는 넋두리를 지금 내가 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신이 혼미해진 탓일까요?
그렇지만 면사포 쓰고 결혼식 올리고 깨가 쏟아지는 신혼살림을 해오던 여성들 중 더러가 결혼생활이 시들해지고 남편의 애정이 식어 버려 감꼭지 물러나듯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어 항상 그리워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이 변치 않는 도리어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곤 했었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결과가 우리 겨레에게는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주었지만 나 개인에게 미친 영향은 이상야릇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웠었던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이 거의 동시에, 따로따로이기는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날 때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이때까지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한 번도 대면해 본 일이 없는 아버지와 아들을 내 안방에 한자리에 모아놓고 처음 부자 대면을 시키고 싶은 욕심은 거의 억누를 수없을 만큼 컸습니다.
건국의 주춧돌이 될 아버지와 건국의 기둥이 될 아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나까지 끼여 일가 단란할 꿈을 꾸고 또 꾸었던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이요 당신의 아들인 정호가 강제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전투지대까지는 나가기는 했었으나, 한 해 이상 전투 최전선에서 단련을 쌓은 몸과 마음으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서는 정호가 제 나라 건설을 위하여서는 목숨을 바치려고 결심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결사 헌신할 수 있는 일과 장소를 찾아다니노라고 집에 붙어 있는 날은 거의 없이 부지런히 돌아다녔 습니다.
정호가 학병으로 끌려가기 직전까지 제 어미인 내 직업에 대하여 멸시감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미와는 이승에 있어서의 마지막 대면이라는 비장한 마음을 먹은 정호가 훈련소로 가기 직전에 나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강철같이 억센 그의 손아귀로 내 두 손을 깍지낀 그는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로 "어머니, 저는 깨달은 바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왜놈의 강제에 못 이겨 끌려가는 것이라고는 생각치 마세요. 왜놈에게 대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깨달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와 다시 뵈올 길 없는 것같아 말씀드리오니 제 유언으로 알고 들어주셔요……." 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못 맺고 내 무릎에 쓰러졌습니다. 몸과 혼이 한꺼번에 으스러져 버리는 것 같은 감을 나는 느꼈습니다. 얼마나 오래 우리 모자가 끌어안고 울었는지 시간은 염두에 오르지 아니했지만 그 애 마음과 내 마음은 한데 뭉쳐 융화되어 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정호가 철이 들면서부터 제 어미의 직업에 대한 반감과 멸시와 절망감이 연민의 정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내가 상해에서 택시 댄서 노릇하고 있을 때 정호가 나 몰래 일본 동경으로 도망쳐 버린 것도 어미인 내 꼴이 보기 싫어서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핏줄이 진해 동경 가서 나에게 무사하고 고학해 가며 공부한다는 편지를 보내 왔어요.
내가 학비를 우송했더니 정호는 그것을 도로 나한테로 우송하면서 〈어머니, 절 공부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계속 몸을 판다면, 그런 돈은 한 푼도 제가 받아 쓸 수 없습니다. 이 불효자는 어머니와 절연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 혼자서 제 힘으로 깨끗한 돈을 벌어 제 앞길을 개척해 나가렵니다.〉라는 편지를
동봉해 보냈어요.
그러나 정호가 훈련소로 갈 때 나와 작별하던 날 나는 "정호야, 내 장한 아들아, 나는 곧 과거를 일체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올 펼쳐 나갈 테니 염려 말아라."라고 말했어요.
정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쟁터에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하오나 해방이 되어 남편인 당신과 우리의 아들인 정호 둘이가 다 이 서울 시내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 상봉을 못시켜 주는 내 가슴 속 고통과 번뇌는 필설로는 다 묘사할 수 없습니다.
청년의 불타는 정열로 새나라 건설에 이바지해 보겠노라고 침식을 잊고 동분서주하는 정호의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진정 한 애국 애족자를 어디 가야 발견할 수 있지? 참된 지도자가 나서야 할 텐데, 속상해 죽겠어." 라고 정호가 중얼거리는 것을 나는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생각했어요.
어서 속히 제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어 "참된 지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네 아버지시다."라고 알려 주기만 한다면 그 애는 새로운 감격과 희망과 정열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얻은 나는 당신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문 지키는 사람의 제지로 대문 안에는 발도 들여놔 보지 못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심천만 집으로 와 곰곰 생각해 보자 내 의도가 얼마나 무모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설혹 당신을 대면할 수 있었다손치더라도 "나는 당신의 아들을 낳은 여인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당신은 나를 미친년으로 다투어 쫓아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랬었는데, 아, 그랬었는데 참말 지도자이신 자기 아버지를 힐끔 본 정호가 당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정호가, 화가 나서 방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민족의 복리보다도 독재권을 노리는 위선자의 꾐에 빠진 정호가 자기 아버지를 민족 반역자로 알고 암살하려고 권총을 뺐던 것이었습니다. 그랬다가 도리어 제 아버지가 쏜 총알에 맞아 젊은 목숨이 희생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 원통한 사실을 당신 외 어느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
그날 당신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정호는 당신과 나 단둘이 안방에 마주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휙 돌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자기 아버지인 줄 알 턱이 없는 정호인지라 당신이 내 몸뚱이를 탐내 찾아온 색마인 줄로 오해하고 골이 나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또 당신은 당신대로 웬 젊은 놈이 제 집처럼 들어오다가 당신에게 눈을 흘기고는 문을 쾅 닫고 가버리는데 기분이 잡쳐 잠시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아무 말 없이 불쾌하신 표정으로 가버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따라나가 당신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사실대로 고백하지 못한 것이 나의 천추의 한이옵니다. 어쩐 일이었는지 그 순간 나는 벙어리가 된 양 당신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뒤 정호는 영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당신에게 향하여 그 놈이 총을 겨누기 전날 밤에 나한테 편지 한 장이 왔습니다. 편지를 여기 동봉해 보내오니 아들의 얼굴은 기억 못하시더라도 그의 필적이나마 눈여겨 봐 주십시오.
〈어머님 전 상사리.
어머니에 대한 한번 더의 환멸을 느끼고 집을 뛰쳐나온 소자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이 글월을 올립니다. 평생 불우하게 자라난 소자는 해방된 조국에 멸사봉공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와 행복을 살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회가 왔습니다. 지금 소자는 역적 한 놈을 죽이고 불여의한 경우에는 자살해 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지금 한 새로운 광명에 접하여 소자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저는 청사에 영원히 빛날 영예의 기록을 남기게 될 것이고, 불여의하여 실패해 제가 죽더라도 어머니는 조금도 슬퍼 마시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시옵소서. 반역 분자를 숙청하고 깨끗하고 굳센 새나라를 세우는 성스러운 터를 제가 닦는 것이니까요.
제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은 진정한 애국자여서 제가 믿고 존경하고 복종하는 지도자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제발 과거 생활은 청산하시고 건전하게 오래오래 사시옵소서. 소자가 먼저 죽더라도 어머니만은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을 누리게 되는 날까지 부디 오래 사시옵소서.
죄많은 소자 올림 〉
사랑하는 이여 !
어떤 히틀러 같은 놈이 지금 서울에도 숨어 있어 순진한 애국청년들을 최면술에 걸어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몸서리 쳐집니다.
우리 나라 장래가 적이 우려되옵니다.
그러나 그 놈의 어리석은 짓이 하나의 귀감이 되어 다른 청년들은 독재 꿈꾸는 진짜 민족 반역자들의 음모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된다면 정호의 죽음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만큼 아뢰었으니 내가 누구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내 머리가 지금 무척 혼란하여 두서가 없는 말을 횡설수설 사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글월이 당신의 수중에 들어갈 때 내 입은 영원히 봉해져서 그때 당신이 혹 의심나는 것이 있어 나에게 물어 보더라도 대답해 드릴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어서 내가 한 달 전에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시도록 한 것인지를 말씀드리고 나서 이 펜을 영원히 영원히 놔 버릴까 하오니 끝까지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일본군에 끌려 정호가 입대한 다음날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재생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 말을 아마 곧이듣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어찌 되어서 그 어떤 날 밤 너는 아무개씨 댁 사랑방 놀이에 나와 늙은 기생들 틈에 섞여 있었느냐?"고 반문하실 테니까, 그 사정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뒤부터 제 아무리 친숙한 늙은 기생들이나 퇴기들이 찾아와서 요리 집이 아닌 여염 집 사랑방 놀이에 같이 나가자고 권해도 나는 번번이 거절하고 나가지 아니했더랬습니다.
놀이에 안 나가도 생계엔 지장이 없게 되었으니까요.
중국 상해에서의 택시 댄서 노릇 몇 해 하는 동안 번 거액의 돈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시골에 논뙈기나 좋이 사서 타작만으로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환국하셨다는 신문 보도를 읽은 아침 ! 설레는 내 가슴! 어떻게 하면 당신을 만나 볼 수 있을까? 며칠 두고 아무리 연구해 봐도 뾰족한 궁리가 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요. 나는 당신의 아내요, 당신의 아들의 어머니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세상에 나 혼자뿐이었고 중명세울 아무 건덕지도 없었거든요. 내가 나서서 나는 당신의 아내라고 주장해 보았댔자 당신부터 인정하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미친년으로 돌리고 말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과연 미친년일까요? 혹시 내 평생이 하나의 환상이었거나 꿈이 었는지도 모르지요.
당진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 뵐 도리가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 있는 참에, 그것이 우연이었는지 혹은 운명의 작희였는지 모르지만, 근 일 년간이나 발길 안해 오던 옛날 친구 선옥 언니가 예고도 없이 불쑥 우리 집 대문 안에 들어섰어요.
선옥 언니가 나더러 사랑방 놀이에 함께 나가자고 권할 때 처음 나는 화를 내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선 잘 떨기로 유명한 선옥 언니가 자기가 가진 재주를 다 부려 나를 설득하려 드는 것이었습니다.
"네 기분 내가 모르는 바 아니야.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다르단 말야. 네가 젊었을 시절에 서울 장안의 명기로 날릴 때가 있었지만, 기껏해야 왜놈 나으리들이나 녹여내서 그놈들 노리개 노릇하는 것이 고작이었지 않니. 그런데 말야. 오늘 밤 손님들이 누군지 알아? 우리 독립 대한을 맡으시려고 중경서 들어오신 대감님들이야. 그래 너 그분들에게 술 권할 생각 도시 없단 말이니?"
그녀의 이 말에 나는 감전되는 것처럼 온몸이 짜르르했습니다.
"언니, 그게 정말요? 참말?"
"내가 너한테 실없는 소리 하러 찾아오겠니, 내 원!"
당신도 중경으로부터 들어오싣 『대감님』 중 한 분이신데, 혹시나, 혹시나, 당신도 그 자리에 참석하시는지? 참석하신다면…….
"언니, 그분들 중에 혹시……."
하다가 나는 말을 중단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나오다가 목이 걸리고 만 것 이었습니다.
선옥 언니를 보내고 곧 화장대 앞에 앉은 내 가슴 속에는 방망이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 그날 밤, 분명히 그 놀이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장난꾸러기 운명이 선옥 언니를 사절로 나에게 보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당신의 무릎에 바싹 붙어 앉게 된 나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생각에…… 아,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날 밤 그 술자리에서 동료 노기들뿐 아니라 처음 대하는 손님들까지도 내가 첫눈에 당신에게 반했다고 놀리면서 내 손목과 당신 손목을 끌어다가 맞잡게 해주며 폭소를 터뜨렸지요.
술이 취하자 선옥 언니 주례로 당신과 내가 엉터리 결혼식까지 올렸지요.
그것이 장난이 아니고 진정한 결혼식이었으면 나는 얼마나 행복을 느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취중이기는 했지만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주셨지요. 그러나 그때까지도 당신이 평생 단 두 번 내 몸에 인을 쳐주셨고, 그 첫번째 교섭에서 당신의 씨를 내 자궁에 뿌려 주어 열매까지 맺었다는 사실은 당신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당신이 제 집으로 오셨을 적에도, 내 정체를 확실히 모르는 당신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리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짖궂은 운명이 부자 상봉을 훼방 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이 자기 아버지인 것을 모르는 정호가 당신을 암살하려고 권총을 빼들었고 명사수격인 당신이 선수를 쳐 당신 아들을 사살했지요…… 자객이 당신의 아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신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정호가 저지르려던 행동의 동기는 불순한 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순진한 청년들의 애국심을 악이용하는 놈들의 제물이 된 정호였지요.
왜정 36년간 한결같이 해외에서 투쟁을 계속해 오신 분들이나 국내에서 만난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절개를 지켜 오신 분들이 이 기쁜 시각에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손잡고 도와 새나라 건설에 일심협력해야만 성사도 되고 대중의 신뢰를 받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소소한 의견 충돌이나 오해를 청산하지 못하고 중상 모략, 심지어는 폭력 행사와 살상까지 감행하여, 삼천만 겨레가 갈망하는 독립국가 건설을 도리어 방해하고들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한심한 일이옵니다.
비겁하고 비루한 민족 반역자들의 횡포를 묵인하는 미국 군정이 한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죽어도 합작하기는 싫고 한쪽을 죽이고 나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그들 소위 거물급들이 믿고 있다면 그들 자기네끼리 사생결단을 할 것이지, 비겁하게도 뒤에 숨어 순진한 애국 청년들을 그릇 인도하는 꼴은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다 분노할 극악이 아니옵니까. 누가 우리 아들을 그런 무서운 함정 안에 몰아넣었을까요?
누구가, 누구가, 예 누구가?
정호를 잉태하던 순간이 지금 새삼 회상되옵니다. 내가 오래 오래 짝사랑해 왔었던 당신을 그 여름밤에 정릉에서 독차지하게 될 때 내 가슴을 떨리고 정신은 황홀했습니다. 당신과의 처음 육체적 접촉. 흥분한 당신의 몸냄새. 억센 포옹. 가쁜 숨소리. 클라이맥스.
그것은 한 쌍의 수컷과 암컷이 동물적 만족을 느끼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조물주적인 위대한 조화였던 것이었습니다. 생명 창조의 신성성과 희열은 어떤 동물에게나 암컷만이 느낄 수 있는 특전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었습니다.
엄지와 새끼. 어미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심은 맹목적이고, 한이 없고, 이유가 없고, 이론이 없는 절대적인 본능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게도 귀애하고 정성들여 기른 자식들에게 총을 배워 마구 쏴 죽여야만 되게 마련된 이 인류는 과연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엄지의 운명 ! 그것은 나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전체 생물계가 가진 공통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내 운명에 순종해 버리리라고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 호소는 전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기천만 아니 기억만 어머니들의 공통된 호소가 아니겠습니까.
누구의 손에 의해 누구가 죽었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왜? 왜? 왜?
천만 번 되풀이해 물어 봤댔자 시원한 대답이 불가능합니다. 영원히 해결지을 수 없는 수수께끼인 듯싶습니다. 그렇지만 나 하나의 슬픔이 인류 전체 만대에 긍한 커단 슬픔과 비교해 볼 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죽음을 당하거나, 병들어 앓다가 죽거나, 횡사하거나, 늙어 죽거나, 또 지금 내가 취하려고 하는 자살이거나 한번 죽으면 그만인 것을. 살아 있으니까 바락바락 애도 쓰고, 기막힌다, 슬프다, 괴롭다, 원통하다 등이 있는 것이지, 한번 죽어 버리면 그 뒤에는 아무런 감정이나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같은 미미한 존재가 이 고해 사바에 이 이상 더 남아있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아니, 소용이 없다기보다도 살아 있는 그 나날이 고통과 슬픔과 원망의 누적이 될 따름입니다.
내가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이상 죽는 방법을 시험해 볼 필요가 없고, 또 죽음이 무섭게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날이 새는 모양입니다.
내가 죽어 버린 뒤 나에게는 새벽도, 대낮도, 해도, 달도, 별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산뜻한 세수물의 신선한 감촉도, 소배춧국의 구수한 냄새도, 혀끝에 감치는 따끈하고 매끈한 밥의 감촉도, 새소리, 바람 소리, 우뢰 소리, 사람의 목소리까지…… 아무것도 감촉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개미도 두더지도 살아 있을 것이고, 여우나 뱀이 내 무덤에 구멍을 뚫어도 나는 속수무책이겠지요. 그래도 만일 내 시체가 무덤에 묻힐 수 있다면 무덤을 덮은 잔디는 봄마다 새싹을 내미게 될 것이라지만 내 몸은 썩어 물이 되고 흙이 되어 버리겠지요…… 차라리 화장되어 연기가 되어 공중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좋겠지요.
아버님도 연기가 되셨고, 어머님도 연기가 되었으며, 아들까지 연기가 되어 사라져 없어진 오늘 나는 연기로 변하여 부모와 아들의 연기들과 하늘에서 합치는 것이 내게는 더 행복하겠습니다.
어느 절에서 치는지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옵니다. 일백 번 하고 여덟 번을 계속 친다는 그 종소리가 지금 새벽 안개 속으로 퍼져나오고 있습니다.
온 사방 세계 속속들이 빈틈없이 그 종소리가 스며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활에는 일백여덟 가지 번뇌가 있다고들 하고, 그 번뇌를 좀 덜게 해달라고 인생은 몇천 년간 내리 종을 울려왔습니다만 그 번뇌들 중 한 가지도 줄어들기는커녕 정도가 더 깊어가기만 하옵니다.
어제에도, 오늘에도, 내일에도, 모레에도…… 영원토록, 영원히 종은 울겠지만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으리라 나는 믿습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인생은 대대손손 끝이 없을 것이로되 이 일백여덟 가지 번뇌는 계속 인생을 괴롭힐 것이 분명하오니, 그 모든 번뇌를 다 벗어 버리고 나는 가려는 것입니다…… 가려는 것입니다…… 무감각의 저승으로.
〈1948〉
2016년 11월 24일 읽음
★ 감동 깊게 읽었다. 주인공에 대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편, 안타까운 대한민국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숭고하게 지켜야 하는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삼대 세습의 폭압정치를 하는 북한을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옹호하는 무리들(김대중, 노무현 등과 그 무리들, 문재 인……, 안타깝다.)
21세기에 민족주의는 버려야 대한민국이 산다.
대신 국민생존을 위한 국민주의가 우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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