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국사를 조금이라고 공부해 봤다면 642년에 윤충이 병 1만으로 대야성을 함락시킨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조에 관련 기록이 있다.) 뭐 부장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배신한거는 사실인 것으로 확인했고, 나중에 김춘추가 잡아다 죽였다.
그런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있는 648년 2월의 대야성 탈환이 있고 사로잡은 백제장수와 품석의 시신을 교환했다고 한다.
혹자는 당군 20만을 빌려서 탈환했다고 하고 혹자는 김유신이 병 8천을 이끌고 탈환했다고 한다.
둘다 인터넷에 떠도는 낭설이기 떄문에 어떤게 정설인지는 알 도리가 없고...........
각설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는 이 사실이 단 한글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원문 확인해 봤다.) 오로지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황도 나와 있지 않고 병력수 전공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상세한 기록은 백제장수 8명과 시신의 교환정도다.
여기서 과연 김유신열전의 대야성 탈환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선 그 의문의 첫번째로
대야성을 빼앗기고 나서 그 대안으로 압독부(현 경산)을 설치하고 김유신을 압독부 도독으로 임명하여 국경수비를 전담시킨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압독부는 분명 대야성의 대리기능으로 설치된 것이다. 허나 648년 2월의 대야성 탈환 뒤에도 압독부는 그대로 경산에 주둔했고 661년에야 대야성으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이것이 뜻하는게 무엇일까? 신라가 대야성에 압독부의 기능을 이관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두번째로 아까 지적한 대로 기록의 비상세성을 들 수 있겟고 대야성보다 훨씬 덜 중요한 요충지의 기록도 이것보단 훨씬 상세한 점을 들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로 신라에 있어서 목줄이나 다름없는 대야성의 탈환 기록을 왜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 전혀 기록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김유신 열전의 후대윤색을 주장하기도 하며,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사실중에서 사실은 백제장수와 시신을 교환한것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자장이나 기타 훌들의 리플을 바란다.
첫댓글 김유신 열전의 바탕이 된게 김유신의 5대손인 김장청이 쓴 '김유신행록'이야. 원래 행록이라는 자체가 족보에 금칠하는거랑 다를바 없으므로 그걸 바탕으로 써진 김유신열전도 허구나 과장된 내용이 많지. 삼국사기에 있는 김유신 열전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망해도 여러번 망했다.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이 직접 죽인 백제군만 해도 잘은 몰라도 10만이 넘어갈듯. 김유신 열전은 후손의 족보금칠+김부식의 신라빠적인 성향이 종합된 결과물 ㅇㅇ
삼국사기 표현을 보니 의외로 객관성이 많이 결여되어 있더구만 ㅋㅋㅋ
김부식이 경주출신인데다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것때문에 사대주의자로 취급받고 이리저리 많이 까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 자체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쓰인거라고 믿고 싶어.
상대적으로 자주적인 입장이지 김부식도 사대주의자다. 그때 귀족수준은 매국노고. 특히 조선초의 권근 이 씨발년은 아예 명나라로 이민가지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