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김씨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예학의 대가로 영남학파에 대립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다. 율곡의 수제자이고 인조반정후 서인(西人)의 영수이었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주로 시골로 내려와 송시열등 후학을 양성하였다. 사실 예학이란 것이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을 논하는 것으로 학문반열에 끼일 수 없는 것이고 부국강병을 저해하여 임란과 호란에서 많은 피해를 입힌 원흉이다. 9남2녀를 두었는데 3남 김집(1574~1656)이 학문과 가계를 이었다.
* 김장생의 7대조모 양천허씨(1377~1455)는 서울 정릉동에서 남편 김문과 살았는데 17세에 남편과 사별했다. 친정에서 개가를 권하자 유복자 김철산(김장생 6代祖)을 업고 논산에 있는 시가로 내려와 아들을 엄히 키웠다. 김철산은 사헌부감찰, 그의 아들 김록광은 좌의정을 역임했고 김장생과 김집이 대학자가 되는등 후손에서 대제학 7명이 배출되면서 광산김씨는 연안이씨, 달성서씨와 함께 조선3대 명문가가 되었다.
2. 김장생 묘역
* 논산 고정리 산7-4에 있다. 왼쪽 와(窩)로 된 곳에 김장생, 그 아래에 양천허씨 묘가 있고 오른쪽 장유로 된 앝은 산등에 김선생(金善生 충좌위부사과, 사계의 동생), 김철산(사헌부감찰사)의 처(妻)안동김씨, 김철산, 김공휘(金善生의 父 파주목사)의 순으로 쓰여있다.
* 김장생이 1631 사망하자 진잠현(지금의 대전)성북리에 안장하였는데 10년뒤 묘지가 나쁘다는 이유로 7대 조모 뒤에 艮向으로 이장한 것이다. 묘역에는 당시 이미 다른 묘는 쓰여 있는데 풍수를 보고 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어느 묘가 진혈인가? 양천 허씨 묘, 김철산 묘, 김장생 묘가 거론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당국(堂局)은 중상급인데 김장생과 허씨 할머니는 생기는 있으되 국(局)의 일부를 차지하였을 뿐이고 당국의 중심으로서 전체를 차지하는 곳은 장유등(長乳嶝)이지만 당판이 뚜렷하지 않고 래룡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4기 중 세 번째 김철산(허씨의 아들이고 김장생의 6대조) 묘가 좋다. 세 곳 모두 중등초급 명당이다.
* 사계묘역의 안산---사계와 허씨 묘는 전제 국(局)에서 볼 때 청룡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 장유에 쓴 묘---
* 사계묘역 전체 모습---
* 장유에 쓴 묘의 좌향---
3. 발복처
* 다수는 허씨의 정절과 후덕한 음덕으로 발복하였고 허씨 묘와 김장생 묘를 발복처로 본다. 그러나 이 묘역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3개의 중등초급 음택이 있는데 그 정도의 음덕으로 명문가가 될 수 없다. 사계는 퇴직후 1602년 계룡 두마면 두계리96대2800평방미터 지상에 주택(은농재)을 건립하였고(고정리178 사계종택은 재실이다) 그 집이 사계고택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00년동안 보존되고 있는 집이라면 일단 명당이다. 그 집은 사계의 8자 두계공의 종손이 거주한다고 하므로 가장 융성한 김집계열과는 방계가 된다. 고정리13-1에 있는 사계의 부친 김계휘 묘도 연화부수형의 좋은 음택이고 고정리29사계의 조부 김호가 있는 집장지도 괜찮은 묘가 있을 것 같다.
* 광산김씨는 신라왕자 김흥광을 시조로하고 2천년 계통을 이어온 성씨로 인구92만명(2015년 8위)의 대성(大姓)이다. 고려때부터 고위직 벼슬을 역임한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조초(初) 김약채는 충청관찰사를 지내고 연산(현재 논산)고정리에 터전을 잡아 입향조가 되었고 아들 김문이 요절하고 유복자 김철산은 허씨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라서 충청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철산의 아들 김국광과 김겸광은 세조등극에 공을 세워 후손들이 출세할 수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김장생 가계는 머리좋고 출세할 수 있는 인맥이 있었으니 환경이 좋았다. 작은 음덕으로도 큰 힘을 발휘하였을 것이다.(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