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짤강대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면 아이들은 빈병이나 고철 등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어떤 아이는 멀쩡한 고무신을 엿과 바꿔 먹어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각종 과자가 보편화되기 전만 해도 최고의 주전부리감은 단연 엿이었다. 엿은 사탕에 밀려 찬밥 신세이나, 효능 면에서 사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탕수수에서 뽑아낸 설탕으로 만든 사탕과 달리 곡류를 삭히고 고아 만든 엿은 소화를 돕고 천식을 해소하는 등 몸에 이로운 전통식품이다.
엿만큼 속설 많은 전통식품도 드물다. 예부터 민간에서는 ‘혼례 때 엿을 보내면 시집살이가 덜하다’는 얘기가 전해져오는데, 이는 시집 식구들이 엿을 물고 있는 동안에는 새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것은 끈적거리는 엿처럼 철썩 들러붙으라는 의미로, 오늘날 입시철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엿치기도 재미있는 놀이 중 하나였다. 엿을 잡아 늘여 켠 흰엿의 경우 엿가락 속에 크고 작은 공기구멍이 생기는데, 엿치기는 이 엿가락을 부러뜨려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구멍이 작은 사람은 엿값을 다 물어야 했다. 엿치기의 고수들은 요령이 생겨 엿가락을 자를 때 재빨리 ‘훅’ 하고 세게 불어 구멍을 크게 만들기도 했다.
고려 중기 때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엿은 고려 초기 이전부터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며 젤리·캐러멜 등 각종 사탕류가 엿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엿은 단순히 당분만 제공하는 사탕류와는 차원이 다른 식품이다.
쌀·옥수수 등의 곡물을 엿기름으로 삭혀 우려낸 후 그 물이 찐득찐득해질 때까지 조린 엿은 예로부터 영양식 및 에너지원으로 애용해왔다. 원행에 나선 선비들은 에너지 보충에 좋으면서도 휴대가 간편한 엿을 비상식량으로 챙겼으며, 임산부나 몸이 허약한 환자가 있는 집에서는 수시로 엿을 고아 원기 보강용으로 썼다.
전통엿의 산업화를 추진해온 이병영 한국농업대학 산학협력단 교수는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것은 합격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며 “당분은 심신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뇌의 활동을 활발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엿은 맥아당이 풍부해 소화를 도울 뿐 아니라 무즙에 타서 먹으면 기침·가래·천식을 다스리는 데도 좋다. 〈동의보감〉에는 ‘검은엿은 허약한 기력을 보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가래와 기침을 멎게 한다’고 기록돼 있으며, 〈향약집성방〉에는 ‘갈증을 없애고 어혈을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
제조방법에 따라 엿은 크게 2종류로 나뉘는데, 켜지 않고 그대로 굳혀 만드는 ‘갱엿’(검은엿)과 갱엿이 따뜻할 때 여러번 켜서 흰빛이 돌게 만든 ‘흰엿’이 있다. 갱엿은 주로 강원도 지방에서 만들었고, 흰엿은 그외 지방에서 즐겼다. 한편 제주도 특산품인 ‘꿩엿’은 딱딱하게 굳히지 않고 조청 상태로 단지에 보관하며 먹는 게 특징이다.
엿을 만드는 재료는 간단하다. 쌀·옥수수 등의 곡류와 엿기름이 주재료이며, 여기에 맛과 약효를 더하기 위해 땅콩·깨·생강·인진쑥 등의 부재료를 첨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엿만큼 손이 많이 가고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음식도 드물다. 쌀·옥수수 등 곡류를 불려 끓인 후 엿기름을 넣어 삭히고, 반나절 후 다시 끓여 여과한 다음 센불에서 8시간 이상 조리는 과정이 꼬박 하루는 걸린다. 흰엿의 경우 이 상태에서 다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늘이고 합하기를 100회 이상 반복해야 했으니, 엿이란 게 보통 공력이 들어가는 음식이 아닌 것이다.
한편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울릉도 호박엿은 원래 ‘후박엿’이었다고 한다. 19세기 초 울릉도 개척 당시 이주민들은 섬에 자생하는 후박나무 열매를 맷돌로 갈아 엿을 만들 때 넣어 먹었는데, 이것이 근래 들어 울릉도에 호박이 도입되며 호박으로 엿을 만들기 시작해 이름이 호박엿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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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제 퇴근하면서 엿이 먹고싶어서 한봉다리 사갔는데...갑자기 냉장고에 모셔둔 엿생각에 침이 넘어가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