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울 때야
사람은 웃고 싶은 때도 있지만 울고 싶은 때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울보인지 모를 정도로 많이 울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도 울고, 연속극을 보다가도 울고, 신문을 보다가도 웁니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울기도 하고, 묵상을 쓰다가도 울기를 자주 합니다. 그렇게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마를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재주가 좋아서 내게서 눈물을 뽑아내니 말입니다. 제 서러움에 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우는 데에도 당연히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피정을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할 때도 슬픔에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거나 당황하여 어떻게 할지 모르거나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을 때에도 눈물이 솟구쳐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그렇게 잘 울다가도 환자를 문병할 때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눈물을 보이면 환우가 마음이 약해질까 봐서 웃기는 얘기를 많이 하고 나도 많이 웃습니다.
우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곡(哭)이 있고, 통곡(慟哭, 痛哭)이 있습니다. 또한 읍(泣)이 있고, 체읍(涕泣)이 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이 네 가지 울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곡(哭)은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눈물 없이 소리만 내는 울음이기 때문에 곡(哭)은 노래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상갓집에 가면 상주들이 “어이, 어이”하고 울고 여자들은 “애고, 애고”하고 눈물 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예절이라고 해서 나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울라고 사람들의 주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통곡(慟哭, 痛哭)은 가슴을 치며 가슴 아파하며 소리 내어 슬피 우는 것입니다. 상갓집에 가면 딸들이 부모님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며 소리 내서 우는 것을 자주 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치를 떨면서 통곡할 것이다.’라고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울음입니다. 읍(泣)은 근심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그 심정을 아는 사람만 알 것이고 하느님께서만 아실 것이기 때문에 읍소(泣訴)하는 사람들이 슬프게 호소하는 모습입니다. 체읍(涕泣)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운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회개하면서 슬피 우는 사람들은 체읍하며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가나 성시에는 체읍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습니다. 아마 통곡을 하고 있었거나 체읍하면서 어찌할 줄 몰라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은 마리아가 우는 이유를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 당연한 것을 울고 있으니 안타까워서 물으시는 그런 물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를 찾는지도 물으십니다. 마리아가 당신을 찾고 있음을 이미 알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울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고뇌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고뇌와 아픔을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고,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곡하고 있으면 주님께서도 통곡하고 계시고, 우리가 체읍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도 체읍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거짓 울음이 아닌 한 그 이유를 주님은 확실히 아실 것이고 그 울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고, 죄를 뉘우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응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우는 뉘우침과 자신의 잘못을 슬퍼함입니다. 곡을 할 것이 아니라 통곡하고, 체읍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진심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만큼 우리의 진심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울 때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