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애월읍 구엄리 구엄초등학교
유형 ; 교육기관
시대 ; 일제강점기(1923년 4월~1939년 1월 31일)
일신학교는 1923년 4월에 설립된 제주도 최초의 4년제 사립 초등학교로서 현재 구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22년 6월 30일 제주 신엄리의 자산가 백창유(白昌由)가 5천 원을 쾌척하고 신엄리의 성여흥(成呂興)이 토지 3천 3백 평을 희사하여 제주도 최초의 사학재단을 설립하고 인가를 받아 1923년 4월에 제주도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로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김익수(金翊洙)가 취임하였다.
1939년 학생은 여자 2명을 포함하여 214명이었으며, 1939년 구엄리에 구엄공립국민학교(지금의 구엄초등학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가 개교하게 되자 일제의 1면 1교 정책에 따라 일신학교의 아동과 재산은 구엄공립국민학교로 인계되고 폐쇄되었다.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해 백창유는 1943년 충청남도 논산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찬흡)
중엄리 박창호(1922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예비검속 때는 450여 명 사람들이 ‘일신학교’에 한달 이상 수감 됐었다고 한다.(제주의소리 2007년 3월 30일) 즉, 사람들은 광복 후에도 구엄국민학교라고 부르기보다는 계속해서 일신학교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구엄초등학교에는 백창유와 성여흥에 대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日新學校設立者白昌由頌德碑》先生께서는 西紀1889년 이 고장에서 태어나 어린 時節부터 明晳한 頭腦와 굳은 意志로 學文을 닦고, 靑雲의 뜻을 품어 渡日하여 見聞을 넓히며 事業을 經營하다가 錦衣還鄕하여 當時 33세의 젊은 나이로 學校設立에 率先投身 千辛萬苦 끝에 蓄積한 全財産인 巨金 5천원을 憺出捐하고 篤志家 成呂興씨를 爲始한 地方有志들을 糾合하여, 서기 1922년 嚴莊里에 本道 唯一의 財團法人 日新學校를 設立하였다.
그 후 舊嚴公立國民學校가 設立됨에 따라 그 財團을 敎育機關에 獻納하였다. 先生께서는 오직 後進養成을 위한 敎育事業뿐만 아니라 光令地區水利事業의 開拓 等 平生을 地域社會 開發의 先驅者로 獻身하다가 서기1948년 忠南 論山에서 享年60歲를 一期로 永眠하셨다. 膝下에는 子 日炎이며 그이는 6․25와 越南戰에 參戰 많은 武勳을 세운 高級將校 出身이다.
우리들은 선생인 남기신 偉大한 業績을 顯彰하며 이를 後世에 永遠히 간직하고자 本碑를 세운다. 西紀1985년 10月 9日 新重舊嚴龍興里 住民 嚴興地域開發委員會 一同 建立
《訓長成公呂興頌德碑》公은 西紀1853년 癸丑 9월 28일 新嚴里에서 出生하여 西紀1932년 壬申 12월 15일 享年 80歲를 一期로 別世하다. 平素 溫和한 性品과 德望을 갖춘 어진 선비로서 地域發展과 後進養成에 心血을 기울여 念慮하던 次 西紀1922년 壬戌 6月 30日 本道에서는 唯一한 財團法人으로 私立日新學校가 嚴莊里에 設立케 되자 自己 所有土地 3천3백여 坪을 學校 敷地로 自進喜捨하여 學校設立에 至大한 貢獻을 세웠음. 其後 西紀1939년 乙卯6월 1日字로 舊嚴公立國民學校가 設立되자 그 經營이 引繼되었다. 이는 오직 平生을 通하여 이 地域 敎育事業과 新學文의 早期導入을 힘써온 公의 遺德이며 이를 後世에 永遠히 남기고저 本碑를 세우다. 公의 後孫으로는 子 昌圭 孫 乙生 曾孫 泓林 奉琳 泰林 등이며 長曾孫 泓林은 本地域開發委員會 顧問으로 本地域開發에 많은 獻身을 하다. 西紀1985년 乙丑 秋 吉日 新重舊嚴龍興里 住民 嚴興地域開發委員會 一同 建立
《작성 201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