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915]大山李象靖선생시-知非吟[지비음]
知非吟[지비음] - 大山李象靖
今我行年未五十 금아행년미오십
已知四十六年非 이지사십육년비
風埃顚倒身名誤 풍애전도신명오
世故侵尋學力微 세고침심학력미
知處乍明旋復暗 지처사명선부암
行時纔順便多違 행시재순편다위
古人心事今猶炯 고인심사금유형
省克深工竊自希 성극심공절자희
今我금아=지금의 나.
行年행년= 그해까지 먹은 나이. 또는 현재의 나이.
未五十미오십= 오십 세가 아직 되지 않았지만
已=이미 이.
風埃 풍애=먼지 바람, 埃=티끌애.
顚倒 전도= 위치나 차례가 거꾸로 뒤바뀜.
身名誤신명오=몸과 이름 그르쳐.
世故세고=세상사.속세의 일.
侵尋침심=점점 앞으로 나아감
學力微학력미= 학문의 힘 미미하다.
乍明사명=잠깐 밝았다.
纔=겨우 재. ② 밤색 삼.③ 조금 ④ 한 번 물들인 명주(明紬)
順便순편=1.거침새가 없고 편하다 2.돌아가거나 돌아오는 인편
多違다위=많이 어긋나다.
猶炯 유형=아직 분명하니 . 炯=빛날 형.
省克성극=능히 살피고,
深工심공=깊이 공부하다.
竊=가만이 절
自希자희=스스로 바란다.
원문=대산집 제2권 / 시(詩)
大山集 卷二 / 詩
知非吟지비음
-잘못을 알게 됨을 노래하다-
伏次晦齋先生韻
先生年四十六,作是吟。不佞犬馬之齒,恰滿是數,
而追思曩時所爲,疵吝山積,蓋不知所以措躬也。
忘僭續和,以替工誦箴戒之意云。
今我行年未五十 금아행년미오십
已知四十六年非 이지사십육년비
風埃顚倒身名誤 풍애전도신명오
世故侵尋學力微 세고침심학력미
知處乍明旋復暗 지처사명선부암
行時纔順便多違 행시재순편다위
古人心事今猶炯 고인심사금유형
省克深工竊自希 성극심공절자희
지비음. 삼가 회재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知非吟伏次晦齋先生韻〕
선생이 46세에 이 시를 지었는데,
내 나이가 이제 꼭 선생의 그때 나이가 되었다.
지난날의 일들을 돌이켜 떠올리자니
허물이 산적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주제넘게도 선생의 시를 이어
차운하여 대신 경계하는 뜻을 읊노라.
지금 내 나이 아직 오십 안 됐지만 / 今我行年未五十
이미 사십육 년의 잘못을 알겠어라 / 已知四十六年非
풍진에 전도되어 몸과 이름 그르쳤고 / 風埃顚倒身名誤
세상일에 찌들어 학문의 힘 미미하며 / 世故侵尋學力微
앎은 잠깐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 知處乍明旋復暗
행동 잠시 맞았다가 대개 어긋났다네 / 行時纔順便多違
옛사람의 마음이 지금 아직 분명하니 / 古人心事今猶炯
깊이 자신 돌아보며 가만히 바라노라 / 省克深工竊自希
[주-D001] 지비음(知非吟) :
이전의 잘못을 알게 됨을 노래한다는 뜻이다.
50세에 49년의 잘못을 깨달아 반성했다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인 거백옥(蘧伯玉)의 고사를 들어
자신의 이전 잘못을 반성해 본다는 것이다. 《論語集註 憲問》
[주-D002] 회재 선생의 시 :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회재집(晦齋集)》 권2에
〈지비음(知非吟)〉이란 시가 실려 있으며,
그의 연보에 46세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시는 “지금 내 나이 아직 오십 안 됐지만,
이미 사십오 년의 잘못을 알겠어라.
〔今我行年未五十 已知四十五年非〕”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晦齋集 卷二 / 律詩、絶句
知非吟
今我行年未五十,已知四十五年非。
存心却累閑思慮,體道安能貫顯微。
爲義爲仁不用極,處人處己又多違。
從今發憤忘身老,寡過唯思先哲希。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원 (역) | 2015
大山李象靖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며
이재(李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 직첩의 별칭)을 박탈당하였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상정은 외할아버지 이재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기호학파의 태도를 거부하였다.
한편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하고,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상정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이상정은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