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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의 대표적인 향토지인 예성춘추(蘂城春秋) 서문과 저자 친필 싸인, 그리고 책 마지막 판권지(版權紙)를 소개합니다.
예성춘추는 십 여년전 청주 고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오래전 출판된 책이라 현재 고가에 거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주 사람들에게 소중한 책이지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소중한 책은 아닙니다.
著者 金相顯씨는 《丹陽八景, 1956년》이란 책도 출판했는데 분량이 작은 책으로 오자(誤字) 투성이입니다. 그리 중요한 책이 아닙니다.
어느 교수님은 서지학적으로 큰 가치가 없다고 하셨는데,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오자(誤字), 탈자(脫字), 결자(缺字)도 수두룩하고. 아무런 비판없이 인용하면 오류(誤謬)를 답습(踏襲)합니다. <충주시 탄금대 육각정(六角亭) 이건기(移建記) --- 예성춘추에서>에서 천운정을 건립했다는 金錫奎의 祖父를 검증한 바 있습니다. 근거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저자 싸인이 무슨 값어치 있겠습니까? 당시 리승만대통령에게 증정한 것도 아니고. 이 책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실력있는 분들에 의해서 올바로 번역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봐야 합니다. 한문이 많은 책인데, 30년전에 교정본과 번역문이 나왔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여러가지 여건도 좋아졌고 수많은 연구업적도 쌓였고 얼마든지 좋은 역사자료를 얻을 수 있으니 가능할 것입니다.
<판권지(版權紙)>는 출생증명서와 같은 것으로 간혹 서문만 보고 1958년 출간된 것으로 보는데 1959년이 맞습니다.
예성공원 앞 예전 교현ㆍ안림동사무소 앞에 《文鄕校峴同心 교현동 마을유래》를 보면 교현국민학교 역사를 쓰면서 관보 작성일을 기준으로 써놓았습니다. 관보는 발행일부터 법적 효력을 갖습니다. 중요한 건 발행일입니다. 날짜 며칠 올려잡는다고 역사가 더 빛나는 것은 아니지요.
최근에 충남 공주의 유학자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 충주군편,1934년(昭和 9년)>을 살펴보니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 옵니다.
石塔: 在可金面塔坪里俗云朝鮮地之中央故設八層石塔表之地名謂之漢半川 (뒷부분 생략).
중앙탑이라 부르는《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설명하는데, 풀어보면
『 석탑: 가금면 탑평리에 있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이곳이 조선땅의 중앙이므로 8층 석탑을 세워 그 위치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지명을 <한반천(漢半川, 현 안반내)>라 부른다. 』 입니다.
우선, 八層石塔이라 했는데 塔身의 屋蓋石의 숫자만 세어야 했는데 기단부를 포함해서 1層을 더해 八層이라 했습니다. 중앙탑은 칠층석탑이 맞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 수많은 읍지류(邑誌類)에서 속운(俗云), 속전(俗傳)은 세속(世俗)에서 말한다는 뜻이고, 전설이나 민담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위 기사는 100년도 전에 충주인들이 중앙탑을 이렇게 인식했다는 걸 말해주는데, 달리 말하면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과 다를바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사실(史實)을 잊은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걸 좋아하고 철썩같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인 가나야 마사키(金谷雅城)가 쓴 《충주발전지, 大正5년 1916년》를 보니 중앙탑(원문에 中史塔이라 썼는데 中央塔이 맞다.)을 설명하길.
『 邑内を距る二里、可金面塔坪里にあり、新羅朝元聖 二十年の建立に成る、其の由来詳かならずと雖も朝鮮の歴史標示せるものゝ如し、高さ數十仭、漢江の水に映じ、宏壯偉觀を極む。
읍내에서 2리(일본에서 쓴 거리단위 1里는 3,927m이므로 7,854m가 된다. 관아공원에서 중앙탑까지 직선거리가 약 8km 되니 맞는 말이다.) 떨어진 가금면 탑평리에 있으며, 신라 원성왕 20년(721년, 원성왕은 재위 14년, 798년에 서거했으므로 오류라고 한다. 804년은 애장왕(哀莊王) 5년이 된다.)에 건립되었다. 그 유래가 자세하지는 않으나 조선의 역사를 표시하는 듯하다. 높이는 수십 길에 달하며, 한강 물에 비쳐 웅장하고 아름다운 장관의 극치를 이룬다. 』 라고 써 있습니다.
충주 남산성을 <漢美城>이라 쓴 걸 고지도에서 볼 수 있는데 <할미성, 마고성>을 의미하고 가까운 문경(聞慶) 지방에도 마고성이 있고 전국에 많습니다. 마고할미가 城을 쌓았다고 하는데 일반 백성들이 우리가 쌓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돌려 말하는 겁니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조용조(租庸調) 즉 田稅인 租, 軍役인 庸, 貢納인 調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 부역(賦役)이 있었는데 城을 쌓거나 官衙를 수리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원 백성들은 임금이 승하(昇遐)하면 능침(陵寢)을 조성하는데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군사들과 인근 백성들이 부역(賦役)에 동원되어 노동력으로 쌓은 것이 城입니다.
<안반내>라는 지명을 유의할 것이 韓半島라는 말인데, 일제시대에는 조선반도(朝鮮半島)라는 말을 썼고 이를 바꿔 한반도(韓半島)라는 말을 널리 쓴 것은 6.25이후 한참 후가 됩니다. 半島라는 말은 다분히 일본중심의 용어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뒷부분은 인근에 있는 《안반내》지명을 풀이한 것입니다. <조선환여승람, 1934년>의 漢半川의 漢은 漢江일텐데,《안반내》지명을 잘못 풀이한 것입니다.
《안반내》와 관련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안반내>라고 짤막하게 쓴 글이 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예가 《蘂城春秋》에는 많이 있습니다. 철저히 고증해야 할 책입니다.
埃是万分 (애시만분)
地人樂事 (지인낙사)
雲鶴應題 (운학응제)
티끌 같은 세상 일들은 만 가지나 되고
땅 위 사람의 즐거운 일 또한 많다
구름 속 학(雲鶴)이 시제(題)에 응하여 읊조리도다
저자 김상현 씨의 친필 싸인인데 영감(令監)이란 말이 눈에 띄인다. 최하열씨가 당시 檢事였던 모양이다.
《堤川檢察府 崔河悅令監惠鑑 金相顯 謹呈》
监은 監의 이체자(簡體字).
당시는 청주지방검찰청 제천지청이었다고 한다.
(1947년 10월 20일 청주지방검찰청 제천지청으로 개칭)
精神文明이 疎遠하여져가는 今日 내고장의 成長過程과 文化를 紹介하는 鄕土誌 《蘂城春秋》를 엮어내어 世間에 펴놓게됨은 實로 그 意義가 크다할것이다.
文化保存이란 元來 半萬年의 悠久한 歷史를 자랑하고있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爲政者의 重大한 施策의 하나여야 할것이다. 子孫萬代의 龜鑑이될 忠臣 烈士의 墓碑가 頹落하여 가고 先人의 結晶으로 이루어진 優秀無比한 文化財를 放置함으로써 그 面貌를 찾을길 없게만들고 고장의 歷史를 記錄하여 傳하는 文獻 하나없이 내려가서 마침내는 그 所由來를 알아볼길 없다는것 等等은 그얼마나 文化民族으로서 羞恥스러운 일이며 寒心스러운 일이아니랴.
이런點에 비추어 本道의 要樞 中原郡에서는 그 歷代郡守가 鄕土誌를 發刊하려고 努力해오던중 現郡守 金相顯公은 赴任卽時로 鄕土文化의 紹介篇으로서 「蘂城春秋」 發刊에 着想하고 奮然 그 資料 蒐集에 注力한 보람있어 이제 그 冊子를 널리 펴게된것은 그분의 治績을 다시금 높이 讚嘆케 하는바이다.
大抵 中原郡으로 말할진대 本道 東北部에 位置하여 北으로는 首都 서울에 連하는 길목이오 南으로는 歷史的으로 유명한 鳥嶺關門을 넘어 嶺南을 거쳐 南海岸으로 통하는 길목이오 東으로는 江原道를 橫斷하여 東海岸으로 西로는 清州를 거쳐 忠南을 橫斷하여 西海岸으로 通하는 四通五達의 要衝이라 自古로 忠州는 肥沃하고 廣闊한 土地에 産物이 넉넉하고 人心은 純朴하고 알맞은 山川을 가지고있는 살기좋은 고장이 아니였던가 歷史的으로 보드라도 三國亂立時代以來 現今에 이르느 동안 一國의 政治的 軍事的 要地로서 中樞的인 地帶이며 現在에 있어서는 刮目할만한 發展을 이루어 一部가 市로 昇格되고 國家基幹產業의 一翼으로서 肥料工場建設 水力發電所建立등을 보아 飛躍發展하는 고장이 된것이다.
本誌를 通讀컨대 沿革 產業 經濟 文化 交通등 細密히 紹介되어 斯道 要覽의 重要한 文獻으로서 江湖讀賢에게 薦擧하여 부끄럽지않을 良書라하겠다.
이 冊子를 엮음을 契機로 하루 速히 南北統一이 成就되어 文字그대로 中原郡이 統一된 圈域의 中原이 되기를 衷心으로 祈願하는바이다.
戊戌(1958년) 正月 上黨一隅에서
金 鶴 應 識
※참고로 김학응(金鶴應) 씨는 《예성춘추(蘂城春秋)》가 집필되던 당시 충청북도지사였다. 김학응 지사 재임 기간: 1955년 9월 2일 ~ 1958년 7월 29일 (제6대 충청북도지사)
序
蘂城은 古都다.
千年歲華의 新羅文化가 깃드린곳이 이곳이요 또는 李朝五百歲의 歷史의 變遷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곳이 亦是 이곳 蘂城이다.
蘂城은 그때그때의 國力의 盛衰 文化의 浮沈에 따라 여러가지로 그 이름도 바뀌었으니 한때는 國原京 또는 中原이라고해서 新羅五京中의 하나 이였고 또는 國泰民安해서 나라안에는 戰爭이 없고 百姓은 康衢煙月을 謳歌하던 때는 거리마다 音樂소리가 끊이지않았고 城壁에 蓮花를 彫刻했다고하니 蘂城이라함은 바로 這間의 泰平盛代를 象徵하는 古號이며 雅稱이기도하다.
---> 이 부분은 앞으로 철저히 고증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佛敎는 盛했다. 불교하면 고려시대를 연상하는 것은 단편적인 생각이다. 물론 고려시대에 불교가 성하고 조선시대에 유교가 國敎로 대우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연화문을 성벽에 조각했다는 건 무리가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 초기 《최근지충주, 1915년 》등 일본인이 쓴 책에 충주의 別號이자 古號인 蘂城의 기원에 관해 쓴 기록이 있지만 조금만 찾아봐도 관련 논문도 있고 훌륭한 책이 시중에 나와 있다.
조병로 목사가 충주읍성을 1869년에 개축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 20대인 사람이 일제시대 초기 1915년경이면 60대 중반이 된다. 충주읍성 개축과정을 눈으로 본 사람의 증언이 일제시대 초기 일본인이 쓴 책에 실렸고 나중에 구전(口傳)으로 《예성춘추, 1959년》에 실렸다고 봐야 한다. 물론 蘂城이라는 충주의 別號는 그 이전부터 써왔다.
훗날의 역사적 사실이 前代의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고 이는 개인의 生活史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기억이 과거를 왜곡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가 과거를 규정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1869년 고종6년 충주읍성을 개축하였는데, 이 역사적 사실이 충주의 別號인 蘂城의 유래에 끼워들었다는 것이다. )
歷史는 산것이다. 한나라의 人民이 盛運이 있었을때 그나라 그民族의 歷史는 산것이요. 그 反面 한나라의 人民이 衰運이였을때 그나라 그民族의 歷史는 死滅인것이다. 그러나 어찌 數千百世의 歷史에 있어 이것을 이어받을 겨레의 努力과 運命이 時代마다 恒久如一하기란 그리 쉬운일에 屬할까부냐
이름하여 《蘂城春秋》가 史錄 傳說 地誌 出土品等을 考證삼아 空前한努力으로 集大成했다는것은 一大壯圖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古都 蘂城의 모습이기도 한 同時에 이나라의 無窮한 發展과 아울러 다음날의 雄圖 蘂城을 象徵하는 좋은 設計이며 指針이기도 한것이다.
特히 本書는 內容의 該博과 文致의 美麗함이 可謂 點睛의 妙를 加하였다고 할 것이다. 또한 現代 敎育思潮의 強調하는面으로보아 地域社會와 學校敎育과 는 密接히 關連되어야하며 學校敎育은 文化向上의 創造者가되고 地域社會에서는 重要한 敎育의 산資料를 제공함으로써 地域社會가 學校의 資源을 利用하고 學校도 또한 地域社會를 利用할 수 있게될것이다. 오늘날의 敎育思潮가 過去의 敎育과같이 實際生活이라는 요소에 뿌리박지 못한 그릇된데에서 벗어나 生活中心의 敎育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信念을 가져왔다면 이 貴重한 책을 通하여 어떠한 示唆를 얻고 各自 敎育事業에 토움되는 敎育研究의 必須資料임을 또 生覺하지않으면 안될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本中原敎育委員會 議長이신 中原郡守 金相顯氏가 公的激務의 餘暇를 버림없이 鄕土文化 啓發을 爲하여 그勞苦의 結晶을 上梓함에 際하여 이고장의 敎育再建에 끼칠바 자못 많을것임을 굳게 믿으며 敢排 一言으로써 序文에 代코자하는바이다.
檀紀 四二九一(1958)年 二月 日
中原敎育區敎育監 金 雄 起
自 序
自故로 人間이 今之事에 通曉치못하면 如面墻而立이라 하였는데 赴任後 管內事情을 把握하여 行政運營에 參考코자 하였으나 確實한 記錄이 없어 往事가 昏迷하니 답답한 心懷를 禁할수없다.
古聖 帝王들이 天下國事를 다스름에 廣大光明之體와 聖神功化之妙가 없이는 聖治를 이룰수없고 내려와 守令 方伯에 있어서도 學識과 德望을 具備하고 琴張之絃의 直心과 明鏡之淸의 廉潔만이 善政을 이룰수있을것이다.
聖人之治와 名官之政을 받드러 一境無憂와 安堵樂業을 期하랴면 古來史蹟에 精通하고 管內現實을 直視하여 世態를 正確히 捕捉함에 있을것으로 思惟하는 바이다. 特히 忠州로말하면 馬韓의 領域이든것이 高句麗 百濟가 相爭 分據하다가 後에 全域이 新羅에 倂合되여 敬順王以後 高麗成宗 十四年까지에 全國을 十道로 分割함에 있어 中原道가 되였고 睿宗元年에는 關內道에 合쳐서 楊廣忠淸州道라 하였으며 明宗元年에는 楊廣道 忠淸州道로 分割하였다가 忠肅王元年에 다시 合道하여 楊廣道라고 하다가 恭愍王五年에 忠淸道라고 改稱하였다.
李朝定宗元年에 寧越郡을 江原道로 移屬하고 永春郡을 忠淸道로 來屬케 하였으며 太宗十三年에 驪興 安城 陰竹 陽智 陽城 五個郡을 京畿道에 移屬하는 同時에 慶尙道로부터 沃川 黃澗 永同 報恩 靑山 五個郡을 來屬케 하여오다가 高宗元年에 忠淸北道로 改稱하였는데 檀紀四二四一年(一九○八) 까지 道廳所在地로서 忠淸北道의 行政의 首府이였든 忠州史蹟이 分明치 못해서야 遺憾之事가 아닐수없다 本册는 天下文章 任强首와 天下名筆 金生과 天下名將 林慶業 및 敵愾名士 金允侯의 出生地로 또는 伽倻琴의 發源地인 于勒先生의 彈琴之處로 有名할뿐만 아니라 其他에도 名人 達士 偉人들이 많이 輩出하였는데 近世에와서 이렇다할 著名人士가 稀少함은 寒心之事라고 아니 할수 없으니 이 모-든것이 地方史實 究明에 等閑하여 先輩諸賢들의 足蹟을 이어받는다는 靑壯年들의 努力이 不足한 所致로 生覺할때 하루 速히 忠州誌를 發刊하여 後生들의 覺醒을 促求하랴는 意慾이 湧出하였든것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執筆에 着手하였으나 元來가 菲才淺識이요 資料蒐集이 如意치못하여 當初에 計劃한대로 明瞭하고도 滋味있는 記錄을 이루지못하고 春風秋雨 흘러내려온 槪略을 拙劣하게 記述하였을뿐이니 未及한 點을 寬容하시고 多幸히 藥城硏究에 參考가 된다면 無限의 光榮으로 生覺하면서 敢히 江湖諸賢의 叱責과 矯正을 바라마지 않는바이다.
끝으로 本誌發刊에 있어 敎育資料로 使用키 爲하여 中原敎育區 敎育監 金雄起先生의 많은 資料의 提共은 勿論이요 特히 發行費의 大部分을 擔當하여 주신데 對하여 深深한 謝意를 表하는바이다.
檀紀 四二九一年(1958년) 一月
著者 金 相 顯 識
책 마지막 판권지(版權紙)
※ 우리의 맹세 ※
우리는 대한 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檀紀 四二九二年 二月 五日 印刷 (단기 4292년 2월 5일 인쇄)
檀紀四二九二年 二月 十日 發行 (단기 4292년 2월 10일 발행)
蘂 城 春 秋 (예성춘추)
著者 (저자): 金 相 顯 (김상현)
監修 (감수): 李 鍾 岱 (이종대)
印刷人 (인쇄인): 鄭 泰 龍 (정태룡)
印刷所 (인쇄소): 三一印刷株式會社 (삼일인쇄주식회사)
發行 (발행): 忠淸北道 中原郡廳 (충청북도 중원군청)
---> 三一印刷株式會社는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출판한 회사로 당시 주소는 서울시 화동 129번지로 확인된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