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스위스에는 26개의 주가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25개의 조그만 나라들이 조약을 하고 합쳐서 스위스 연방을 만들었고, 각각 주가 되었으며, 그 중 아펜쩰 주는 종교때문에 두 개의 주로 쪼개져서, 현재의 26개 주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주들은 외교와 국방 문제를 제외하고는 법이 제각각이다. 문화도 조금씩 다르다. 공휴일도 다르고, 교육 시스템도 다르고, 심지어 국적법도 다르다. 나같이 무쉭한 외국인에게는 좀 희한하게 보이는 일이 많지만 그냥 넘어가자...
취리히. 하나의 주(칸톤)면서 도시(슈타트)로 독불장군 격의 행투로 다른 주의 미움을 많이 받는 곳. 이 지역의 독특한 어린이 행사로 뢰아벨리에흐틀리... 라는 것이 있다. (다른 주에서도 이 행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불어권과 이태리어권에서는 안 한다고 들었다.)
뢰아벨리에흐틀리... Raebeliechtli 일단 발음이 무지 어렵다. 지난 3년간 이 행사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건만도, 그리고 내가 언어감각이 그렇게 무딘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정말로 발음이 제대로 안 된다. 그리고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이므로 (이 지역의 독특한 방언을 그냥 발음나는대로 글자로 표기한 것일뿐...) 찾아보실 필요도 없다.
행사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보라빛의 껍질을 가진 동그란 순무 (Raeben)의 속을 파내어, 거기다 촛불을 넣고, 아이들이 손에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다가 숲에 가서 일종의 비밀스런 식같은 걸 하는 거다. 상당히 중세 삘이 난다... -_-
그러면 거기에 엄마가 하는 일이 뭐냐... 우선 순무 속 파내고 장식하기. 무가 얼마나 단단한 채소인가 말이다. 얄팍한 조각도 같은 걸 들고 겉껍질이 다치지 않게 속을 말끔히 파 내는 것... 장난 아니다. 손에 힘을 주고 용을 쓰면서도 동시에 무척 섬세해야 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엄마들끼리 모여앉아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은근히 일종의 경쟁의식같은 것도 생겨서, 자기 새끼 손에 이쁜 램프 들게 하고 싶은 욕심에 손이 부르트도록 애쓴다.
그리고 음식하기. 매년 11월 초에 이 행사를 할 때 보면 (날짜는 동네마다 유치원마다 선생님마다 조금씩 다름...) 일종의 동네잔치 비스무리하게 되고, 부모들이 손에 아이들 올망졸망 달고 행진을 따라가기 때문에, 끝나고 각자 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여기에도 경쟁의식이 작용하고, 더구나 한국사람 없는 동네서 살다보니 <저 동양인 엄마는 어떤 걸 해 왔나>하고 쳐다보는 시선들 때문에 은근히 신경써서 준비한다.
그리고 깜깜하고 춥고 비 오는 밤에 하는 행진. 해원이 유치원 입학때부터 지난 3년 간 이 행사 때 한번도 빼놓지 않고 비가 왔다. 11월의 쌀쌀한 밤에 비 맞으며 아이들이 촛불이 든 순무를 달랑거리며 행진한다고 생각해보라... (손에 든 순무 램프 때문에 우산을 들 수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촛불이 자주 꺼진다. 부모들은 아예 포켓 속에 라이터를 두어개씩 넣고, 그 불이 꺼질 때마다 새로 불 붙여가며 아이들 행렬을 따라간다. 행렬을 놓칠까봐 급한 마음에 가끔 손을 데기도 하고... -_-;; 비에 젖은 숲 속길은 진창이 되어 발이 푹푹 빠지고, 사투리로 되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조차도 없는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은 걸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선생님이 아이들만 데리고 비밀 장소로 가서 뭔가를 하고 (대개는 노래 몇 곡 부르고, 옛날 이야기같은 걸 들려준다) 그동안 부모들은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숲속에서 20-30 분 정도의 시간을 아이들이 올때까지 춥고 비에 젖어서 덜덜 떨며 기다린다.
그게 끝나고 나면 음식을 나누는데, 솔직히 음식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다른 학부형들과 외교적인 웃음을 얼굴에 그려놓고 환담을 나눈다.
드디어 행사가 끝나고 집에 오면, 피곤에 지친 아이들과 내가 아무렇게나 신발 벗어 던지고 (신발과 옷에 듬뿍 묻혀 온 진흙의 뒤처리는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서둘러 양치질하고, 이부자리에 들면 당분간 일년은 잊고 살아도 되겠지... 하며 안도의 한숨을...
이 상황에서 정말 얄미운 것은, 남편이 그동안 직장 핑계로 이 행사를 요리조리 잘도 빠졌었다는 것. 기껏 와도 느지막이 음식 먹을 때 등장하는 정도였었다.
그래서 올해는 일찌감치 선언했다. "네가 애들 델구 가라!" 그리고 참가자 명단에 남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나의 단호한 기세에 남편은 마지못해 동의를 했고, 드디어 올해는 조금 편하게 지나갈 것 같다. 행사가 예정된 금요일의 일기예보를 보니, 큼직한 검정구름에 빗방울 그림. 거러췌...
남편의 찌푸린 얼굴에 한마디 던져줬다. 작년엔 소시지 구워서 주드라. 자기, 소시지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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