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박용숙
입추 말복 지나
집마다 고양이 눈 닮아가고 있다
한때는 장단에 맞춰
밤낮없이 좌우, 위아래로
엉덩이 씰룩거리며 요염하게 춤도 추었다
안방에 들어앉아 사랑 독차지하며
명성 굳건하게 지켜냈다
언제부턴가 조강지처 자리
신음조차 없는 밤 고양이 발바닥처럼
앙큼한 무풍년에게 내어주고
뒷방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다시 찾아줄 날 기다리며
간간이 불어오는 대숲 바람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오랜 기다림에 심장 멎고 목뼈 주저앉은 나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깟 노잣돈 몇천 원이 아까워
CCTV 깜빡 조는 분리수거장 뒤편에
슬그머니 내다 버렸다
달빛마저 애써 외면하는 밤이었다.
인간 100세 시대, 아니, 인간 장수 시대를 맞이하여 ‘고려장高麗葬’이란 말은 매우 아름답고 유용한 말이며, 그 풍습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장’이란 우리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장례풍습을 말하며, 이것은 수많은 민족들의 신화와도 그 맥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왕(아버지)이 늙거나 병이 들었어도 좀처럼 죽지 않으면 왕을 죽여버리는 것이 ‘제의적 왕살해’인데, ‘고려장’은 이 ‘제의적 왕살해’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듯이, 새로운 시대는 젊은이들의 시대이며, 우리 늙은이들이 ‘이래라, 저래라’라고 간섭할 시대는 아니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 역사는 새로운 젊은이들이 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치를 매우 못마땅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인간 장수 시대의 고려장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늙은이들에게는 과거의 영광만이 있고, 이 과거의 영광만을 강요하며 온갖 불평과 불만으로 생떼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1회용 소모품이며, 1회용 소모품이라는 ‘시한부의 생’을 살다가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듯이, ‘영생불사에의 꿈’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고 어리석은 백치들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박용숙 시인의 [고려장]은 아직은 그래도 쓸만 하지만, 너무나도 때 이르게 폐기처분된 선풍기를 인간화시켜 이 세상의 조강지처의 애환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조강지처들은 모두가 다같이 “한때는 장단에 맞춰/ 밤낮없이 좌우, 위아래로/ 엉덩이 씰룩거리며 요염하게 춤”을 추었고, “안방에 들어앉아”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며” 그 “명성”들을 굳건하게 지켜왔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언제부턴가 조강지처 자리/ 신음조차 없는 밤 고양이 발바닥처럼/ 앙큼한 무풍년에게 내어주고/ 뒷방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다시 찾아줄 날 기다리며/ 간간이 불어오는 대숲 바람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것이다.
그 어떤 조강지처-현모양처도 세월을 붙잡아 맬 수는 없고, 제아무리 지옥의 강물을 길어다가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 옛날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되찾을 수는 없다. 조강지처-현모양처도 1회용 소모품이고, 늙고 병들면 추하고 그 존재의 근거가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지극정성으로 “대숲 바람 차곡차곡 모아” 두며, 성모의 위엄을 가다듬었어도 늙고 낡은 조강지처가 젊고 아름다운 애첩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늙고 병 들면 끝장이고, 한번 권력을 잃고 뒷방으로 밀려나면 우리들의 조강지처와 현모양처의 인생도 끝장이 나게 된다. 요컨대 젊고 아름다운 신제품을 두고 늙고 병든 중고품을 다시 사용할 리가 없는 것이다.
신제품은 애첩이 되고, 중고품은 조강지처가 된다. 애첩은 사랑의 대상이고, 조강지처는 폐기처분의 대상이 된다. 한때는 엉덩이 씰룩거리며 더없이 요염하게 성적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달도 차면 기울듯이 그 아름다움의 권위는 “신음조차 없는 밤 고양이 발바닥처럼/ 앙큼한 무풍년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뒷방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온몸과 온마음으로 “대숲 바람 차곡차곡 모아” 두었지만,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오랜 기다림에 심장 멎고 목뼈 주저앉은 나를” “그깟 노잣돈몇천 원이 아까워/ CCTV 깜빡 조는 분리수거장 뒤편에/ 슬그머니 내다”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박용숙 시인의 [고려장]은 달빛마저 애써 외면하는 밤이고, 암흑천지이고, 우리들의 ‘시한부의 인생’이 이 세상의 삶을 완성하는 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용숙 시인의 [고려장]은 선풍기의 신제품과 구제품을 인간화시키고, 조강지처와 애첩을 사물화시켜 그 애환을 노래한 시이며, 제일급의 명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박용숙 시인은 천재이고, 그의 언어로 우주와 무대와 무대장치와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 등, 그 모든 것들을 다 창출해낸다.
고려장은 우주이고, 우리 인간들의 삶이 완성되는 무대이다. 그의 언어에는 역사 철학과 심리학과 사회학과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와 염세주의 등이 깊이 있게 배어 있고, ‘고려장의 운명’을 면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아아, 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면 고려장을 전인류의 축제로 미화하고 성화시킬 수가 있겠는가? 인간 장수 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비책묘계는 고려장, 즉, 존엄사 제도의 도입이고, 그 실천일 수밖에 없다.
고려장은 존엄사 제도이고, 우리 인간들의 가장 아름답고 성숙한 장례문화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