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몽룡 陆梦龙 (?~1634) 昨厚扰帖
출처:서령인사 소스:이페어케이
도록 번호: 965
평가 RMB: 80,000-120,000
호가 RMB: 460,000(포함)커미션
965
육몽룡 (?~1634) 어제 방해물
종이책 렌즈(편지 1쪽, 발 2쪽)
식문:어제 폐를 끼쳤습니다.감사합니다만, 납매첨부입니다.오직 심고 건조한 곳만이 논밭의 진흙과 같다중불가야. 가요는 이미 지나쳤어. 어찌 선요를 보고 웃겠는가.명춘에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심을 줄 알았더니, 병마름으로 여러 알을 거두리라간절히. 무림을 지나면 다행스럽게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내 뜻은 군정 네 글자는 천만이요모사하여 부치니, 어찌 이와 같으랴.제룡돈수가 재배하다.수사 인형천고. 도서는 왜 온 사람에게 주지 않는가.
도장을 찍다:몽룡
제발: 육몽룡, 자는 군계, 산음인은.만력으로 38 년을 진사하고 형부를 제거하다.주사. 역원외랑, 중출 광서제학첨사, 강서참의후광부사, 구이저우가 참정하고 광동성은 조사대로 하남삼을 투항시켰다.정·산동 부사(副使)를 전근하여 산서(陝西)를 정치에 참여시키고, 강원도·숭정계(崇政啓)를 분수하였다.유전사. 몽룡성은 매우 엄정하다.고문부에 있을 때, 장차가 사건을 잘 처리하고, 관리가 되어도 감히 엄한 심문을 할 수 없었다.몽룡충격사건은 형구, 차시공, 방남, 유남편이 나더러 도련님을 치라고 명령했다.노부인 내시통에서는 도련님, 벼슬자리에서는 황태자라 부른다.수 일 동안 13사 회신을 명하였는데, 역모 및 방보, 류성명을 잘못 진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많은 사람들이 우물거리고, 주필자는 방황하며 감히 내리지 못하고, 몽룡이 말하기를, 육원 밖에서는 감추려 하지 않으니, 누가 감히 감추겠는가.비로소 감옥에 가서 조정에 글을 올리다.광동성에 파견되었을 때, 상관은 위충현사를 짓고, 용 이름을 열몽하여 급히 태웠다.몽룡은 군인의 도적질도 스스로 망하게 하려고 군사를 말하기를 강개하였다.귀주가 참정하여 군대에 참여하였을 때 적인 안방언은 군사를 거느리고 삼천 명의 안개를 뚫고, 직전의 박적에게 대패하였다.삼산묘는 주를 배반하고, 밤에 중군을 보내 도둑 소굴에 들어가 불태웠다.산동 부사 때 조·복간을 훔쳐 괴물을 토벌하고 여중들은 항복하였다.고원을 지키고, 시도는 융덕에 빠져, 정녕주를 포위하였다.유격하기훈, 도사석숭덕어지.도둑이 처음에는 천 명도 안 되었는데, 지금은 많이 도착했다.몽룡이 있는 곳에는 삼백여 명이 없고, 겹겹이 둘러싸인 채 돌이 비 오듯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없다.두 장군이 꿈을 안고 용이 울자, 몽룡이 휘두른 말이 어찌 이 부녀자의 모습을 하겠는가.큰 소리로 분격하여 손을 수 명이나 귀를 기울였고, 둘째 장수와 함께 전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태복경에게 시호를 하였습니다.기묘계(1879년) 겨울, 진방서(陳邦瑞)가 헐벗었다.도장을 찍다:천방서인(백)
감장인: 순방 컬렉션(백)
설명: 동규존구장.진방서가 발문을 쓰다.
LU MENGLONG LETTER
Ink on paper , mounted ( one page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
Note : Inscribed by Chen Bangrui .
Provenance :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
화심:28×21cm 제발:35×20.5cm×2
RMB : 80 , 000-120 , 000
저자소개:육몽룡(?~1634),임금의 계언으로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만력 38년(1610)에 진사하여, 형부 산동사에게 처음으로 주사를 서임하였다.형부 산동사원 외랑에 들어가 형부랑에 올라갑니다.후진강서승선정사우참의. 천계 4년(1624년), 개귀주 우참정. 숭정 3년(1630년)호광부사는 부임도 하지 않은 채 모친을 여의고 복관 후 하남으로 옮겨 좌정하였다.호광우참정, 합서고강도, 하남좌참의를 역임하였다.5년(1632)에 고관은 호광부사(湖廣副使)를 맡았고, 순동연도(巡東兖道), 산동부사(山東副使)를 겸하였다.사후에 태복사경을 증정하다. 전사하고 관직에 투신하여 충렬을 추서하다.
소장자소개: 동규존 (1831~1908 전) 본명은 회문어 순배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눈썹은 적다.인성초무교(지금의 닝보하이수구) 사람.동괴오자. 광서원년(1875) 거인, 고서중헌대부의 4품 관호부 복건사 주사.가부는 수집하고, 서화는 정감별하다.골동품. 득명인풍도생초서축, 추모오랫동안 초서에 일하면서 전서와 해서에 능하였다.광서 16년(1890)에 《鄮山書院碑記( 。山書院碑記)》를 쓴 적이 있다.
발자소개:진방서(약1840년 이후~1908전), 요포호자계(自溪, 지금의 자성) 사람은 닝보샤오문(寧波孝聞) 거리의 지금의 발목마차에서 북쪽 끝에 있다.광서 2년(1876년)에 진사하여, 관내각에 책·태상경서. 서예에 능하고, 해서와 법각체로 단정하고, 행서가 능숙하며, 수일하다.아유.
陆梦龙(?~1634) 昨厚扰帖
图录号: 965
估价RMB: 80,000-120,000
成交价RMB: 460,000(含佣金)
965
陆梦龙(?~1634) 昨厚扰帖
纸本 镜片(信一页,跋二页)
识文:昨厚扰,谢不可言,腊梅附上,唯种之高燥处,若田泥中不可也。嘉窑已为过望,安敢望宣窑哉,一笑。明春当寻一荷花,本来过一枝存种,倂欲烦收数子,至恳。倘过武林,便道幸过一谈。吾意君庭四字千万一描付,何如何如。弟龙顿首再拜上。水师仁兄千古。图书缘何不付来人。
钤印:梦龙(白)
题跋:陆梦龙,字君启,山阴人。万历三十八年进士,除刑部主事。历员外郎,中出为广西提学佥事,转江西参议,湖广副使,贵州参政,广东按察使,降补河南参政,转山东副使,调陕西以参政,分守固原道,崇祯癸酉战死。梦龙性极严正。任刑部时,会张差挺击案,起问官,皆不敢严鞫。梦龙击案大呼刑具,差始供,庞老公、刘老公命我打少爷。老公者内侍通称少爷者,官宦以称皇太子者也。越数日,命十三司会讯,差供逆谋及庞保、刘成名,一无所隐。众咸嗫嚅,主笔者彷徨不敢下,梦龙咈然曰,陆员外不肯匿,谁敢匿。乃尽入狱,词上于朝。任广东按察时,上官建魏忠贤祠,列梦龙名,亟遣使铲去之。梦龙又慷慨好谈兵,以廓清群盗自负。任贵州参政监军,时贼安邦彦犯普定,率兵三千,晓行大雾中,直前薄贼,大败之。三山苗叛思州,夜遣中军进捣贼巢,大焚毁之。为山东副使时,盗起曹、濮间,讨斩其魁,余众悉降。守固原,时盗陷隆德,围静宁州。率游击贺奇勋、都司石崇德御之。贼初不满千,已而大至。梦龙所将止三百余人,被围数重,矢石如雨,突围不能出。二将抱梦龙泣。梦龙挥之曰,何作此妇孺态。大呼奋击,手馘数人,与二将俱殁于阵,事闻,赠太仆卿,谥忠烈。己卯季(1879年)冬,陈邦瑞呵冻书。钤印:陈邦瑞印(白)
鉴藏印:莼舫收藏(白)
说明:童揆尊旧藏。陈邦瑞题跋。
LU MENGLONG LETTER
Ink on paper, mounted (one page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Note: Inscribed by Chen Bangrui.
Provenance: Previously collected by Tong Kuizun.
画心:28×21cm 题跋:35×20.5cm×2
RMB: 80,000-120,000
作者简介:陆梦龙(?~1634),字君启,会稽人。万历三十八年(1610年)进士,初授刑部山东司主事,进刑部山东司员外郎,再升刑部郎中。后擢江西承宣布政使司右参议。天启四年(1624年),改贵州右参政。崇祯三年(1630年),湖广副使未赴任,后以丁内艰去职,复官后改河南左参政。历任湖广右参政、巡陜西固原道、河南左参议。五年(1632年),起故官任湖广副使,兼分巡东兖道、山东副使。后赠太仆寺卿。战死,卒于官,追谥忠烈。
鉴藏者简介: 童揆尊(1831~1908前),原名会,字莼舫,号少眉。鄞城醋务桥(今宁波海曙区)人。为童槐五子。光绪元年(1875)举人,诰授中宪大夫四品衔户部福建司主事。家富收藏,精鉴别书画古玩。得明人丰道生草书轴,追摹日久,遂工于草书,又善篆、楷。光绪十六年(1890)曾书《鄮山书院碑记》。
跋者简介:陈邦瑞(约1840后~1908前),号瑶圃,慈溪(今慈城)人,后居宁波孝闻街今伏跗室北首。光绪二年(1876年)进士,官内阁中书、太常寺卿。能书法,楷法阁体,端庄清正,行书流熟,秀逸雅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