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75
10월11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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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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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4Xvms5u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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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뀝니다. 곱고 하얀 손도 예쁘지만, 거칠고 험한 손도 그에 못지않게 예뻐 보입니다. 잘 차려입고 잔뜩 꾸민 드라마 주인공도 멋지지만, 낙지며 바지락을 캐고 갯벌에서 나오시는 진흙투성이의 할머니들도 멋집니다.
청정지역 소나무들을 위협하는 병충해에 맞서 힘든 벌목 작업에 열중이신, 온몸이 땀과 톱밥으로 뒤범벅된 어르신들의 모습도 정말 멋집니다. 고생하시는 어르신들에게 수고 많으시다며, 간식이라도 가져다드리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세상 환한 미소도 더없이 멋집니다.
잠시나마 그늘에 앉으신 어르신들은 손 씻을 틈도 없습니다. 적당히 쓱쓱 닦으시고는 맛있게 간식을 드십니다. 손 씻는 일의 대가들인 바리사이들이 봤으면 큰일 날 일입니다.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루카복음 11장 38절)
핵심과 내용은 뒷전인 채 오로지 형식과 절차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바리사이를 향한 예수님의 충고가 날카롭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너희의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자상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너희의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보십시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자선이 얼마나 위대한 행위인지에 대한 언급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토빗 12장 9절)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서 29장 12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재물을 희사하는 것만이 자선이 아닙니다. 자선은 참으로 다양하니 저희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져주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길 잃고 헤매는 이에게 바른 길을 일러 주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조언해 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도와주는 것도 자선입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도 훌륭한 자선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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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오랜 세월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자,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이 있는데,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마자 한눈에 ‘오시기로 약속되어있는 분’, 메시아이심을 ‘딱’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길’을 아무런 미련 없이 그분께 내어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랜 세월 애써 꾸며온 구세사의 무대에서 조금의 망설임 없이 퇴장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도록 무대 뒤로 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잘 교육시켜온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떠나보냅니다. 떠나보내면서도 그의 손가락은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뵙고 지체 없이 그분임을 알아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대 피정, 오랜 침묵 수행, 열렬한 기도생활을 통해 깨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는 정 반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몰라 뵙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메시아 도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영적생활에 매진하지 않고 세상일에만 몰두했기에, 내면을 갈고 닦지 않고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였기에, 영적인 소경 상태로 살았기에 그토록 확연한 모습으로 다가오신 메시아를 알아 뵙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메시아를 박해하고, 그분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밀어뜨리려하였습니다. 결국 하느님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느님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더욱 불행한 일 한가 지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따라다니던 무지몽매한 백성들입니다. 불쌍하게도 인도자를 잘못 만나 그들과 함께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또 다른 눈 먼 사람을 인도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과오로 인해 자신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백성들마저도 하느님 나라로 입국하는 것을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강경한 질타가 혹시라도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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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1Y08lhJg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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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깨끗해지면 육체도 깨끗해질까?>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 실린 사례입니다. 각종 부품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세일정밀의 정태섭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세일정밀은 최근 몇 달간 극심한 자금난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 사장은 고민 끝에 자식 같은 사업 부문 하나를 넘겨서라도 운영자금을 마련해 세일정밀을 살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여러 차례 협상한 끝에 5억 원에 자동차 부품 제조 부문을 넘기기로 하는 사업양수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 사장은 이 일로 인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고소인은 세일정밀의 주주인 배중렬 씨였습니다.
배 씨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자동차 부품 제조 부문은 세일정밀의 중요한 사업 부문 중 하나이므로 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면 상법상 주주총회의 특별결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 사장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업 부문을 넘겨버렸으므로 상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이사가 주주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알토란 같은 사업 부문을 팔아버린 행위는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합니다.
정 사장은 당황했습니다. 사업 부문을 넘길 때 계약서만 잘 쓰면 되는 줄 알았지, 주주총회를 열어야 하는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더욱이 매각대금 5억 원은 전액 회사 운영에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상법상의 절차를 어겼다고는 하지만 회사에 손해를 입히기는커녕 오히려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했는데 업무상 배임이라니! 정 사장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늘 결국 재판받게 되었습니다.
고소인 배 씨는 정 사장과 사회에서 알게 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로 세일정밀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5년 전에 2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세일정밀이 기대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자 마음이 바뀌어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정 사장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정 사장이 배 씨에게 투자금을 반환할 의무가 없습니다. 투자에 따른 손실은 어디까지나 투자자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정 사장은 도의적으로 미안한 마음에 빚을 내서라도 배 씨에게 투자금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의찮았습니다.
배 씨는 사업양수도 대금 5억 원 중 일부를 자신의 투자금을 돌려주는 데 쓰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정 사장이 양수도 금액 전액을 회사를 살리는 데 사용하자 앙심을 품고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고소인의 의도는 불순했습니다.
형사재판 제1차 공판 당일 조 변호사와 정 사장은 재판 시간인 11시보다 30분 앞서 법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방청석에 앉아 먼저 진행되는 사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한 사건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피고인은 23살 남자로, 유흥주점 아르바이트생인데 현재 구속 상태였습니다. 유흥주점에서 서빙하고 있었는데 손님들끼리 시비가 붙었습니다. 피고인은 싸움을 말리려다가 남자를 밀치게 되었는데 넘어진 손님이 이가 두 개 부러지고 찰과상을 입어 전치 6주 진단받았습니다.
유흥주점 사장은 나 몰라라 발뺌했고 피고인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합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피고인은 2년 전에도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벌금 전과를 받은 적이 있어 이번에 합의를 하지 않으면 실형이 나올 상황이었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보다가 국선변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건 합의 안 됩니까? 피해자가 요구하는 합의금이 얼마입니까?” “천만 원입니다.” “이때 한 어머니가 다리를 절뚝이며 판사 앞으로 걸어 나와 “판사님 제가 저 아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오래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혼자 아이를 키웠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전혀 없습니다. 저 애를 풀어만 주시면 저와 같이 열심히 일해서 어떻게든 합의금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아주머니는 눈물만 흘렸고 판사는 미련이 남는 듯 국선변호사를 쳐다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검사는 징역 1년을 구형했고 선고일은 2주 후로 전해졌습니다.
그때 정 사장은 변호사의 손을 붙잡고 “변호사님, 제가 돈을 준비할 테니 저 친구에게 도움이 되도록 힘을 좀 써주십시오.” 재판기록에 나와 있는 정 사장의 이력을 보니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변호사는 정 사장에서 합의금을 받아 국선변호사에게 주었고 피해자와 합의하였습니다. 2주 후 아르바이트생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한 달 후 정 사장의 공판 기일이 돌아왔습니다. 주신문과 반대신문이 끝나고 나면 재판장인 판사의 간단한 보충 심문이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재판장의 보충신문은 무려 한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재판장은 고소인이 자금을 돌려달라고 계속 요구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정 사장을 업무상 배임죄로 고소하고 수사기관에 여러 차례 진정서를 제출해 정 사장을 곤경에 빠뜨린 부분을 집요하게 추궁했습니다.
재판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정 사장은 무죄로 선고받았습니다. 며칠 뒤 변호사는 아르바이트생을 변호했던 국선변호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조 변호사님, 변호하신 사건 무죄판결을 받으셨던데 축하드립니다. 정 사장님이 제 의뢰인 합의금을 대신 내준 일을 판사님께 말씀드렸었는데….”
그러고 보니 조 변호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재판과정에서 판사가 정 사장을 바라보는 눈빛이 일반 피고인을 보는 것과는 약간 달라 보였습니다. 결국 정 사장의 선행이 돌고 돌아 정 사장 본인을 살린 셈입니다.
정 사장의 광폭 오지랖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도와준 아르바이트생을 자신의 운전기사로 채용했고 그의 어머니를 단골식당의 보조직원으로 채용되도록 알선해 주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지금도 정 사장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각별하게 모신다고 합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말합니다. “주역 공부를 오래 하신 어느 분의 말씀입니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는 확실한 방법의 하나는 주위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말을 걸어주는 것이죠.
그분 말씀을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할 뿐 세상 만물은 서로 얽혀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실감하고 있습니다. 복을 짓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복을 자신이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언젠가 그 악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통장에 몇 푼을 더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의 마일리지를 쌓는 것입니다. 때론 마법처럼 그 선의 기운이 인생을 바꿀지로 모를 일입니다.”
몸이 깨끗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몸을 깨끗이 닦기만 하면 될까요? 그래봐야 속이 더럽혀지고 썩는다면 피부가 안 좋아져 결국 아무리 닦아도 더러운 몸이 됩니다. 반면 숙변을 제거하고 피를 맑게 하려고 노폐물을 빼내면 어떻게 될까요? 피부가 좋아져 온몸이 깨끗해집니다.
저는 몸에 비누칠을 안 하고 샴푸도 쓰지 않고 스킨로션도 거의 바르지 않지만 더럽다는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먼저 속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시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며 속으로 비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알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이 아닌 영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노폐물은 ‘탐욕’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탐욕이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탐욕을 빼내면 외적으로도 죄 없는 사람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닦는 것은 깨끗함의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깨끗해지면 어쩌면 피부병도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과 육은 하나로 이어져 있고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먼저 영적으로 깨끗한 우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몸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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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사제들에게 힘든 것이 있다면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가 하는 강론의 내용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청하였던 것처럼 의인이 50명이 아니라 10명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제가하는 강론 내용의 50%가 아니라 10%만 온전히 삶으로 실천하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영적으로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예언자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위안과 용기를 얻는 것은 오늘 입당송의 말씀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한동안 국회의원들의 문자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의 사적인 문자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사적인 문자에는 당리와 당략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는 품위에 맞지 않는 내용을 검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어서 한동안 소란이 있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는 국가의 품위와 품격에 맞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품위와 품격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었고, 제가 있는 미국에서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 그리고 공직자들은 늘 언행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신독(愼獨)’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홀로 있을 때라도, 남이 보지 않을 때라도 늘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게도 혼자 있을 때 조심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입니다. 친구가 학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학원에서 친구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학원 청소를 하였고, 교재도 정리하였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지내는 학원에서 같이 잠을 잤습니다. 주일 아침인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는 잠이 덜 깬 상태이기도 했고, 장난기도 있었기에 품위와 품격에 맞지 않는 응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는 학원과 전화를 공유하는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친구는 저 때문에 학원 원장님께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 대신에 꾸중을 들어야 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저의 실수를 대신 짊어진 친구가 고맙기도 했습니다. ‘없는 데서는 나랏님도 욕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뒷담화가 부적절함이나 신중함의 부재로 인해 친교를 파괴하는지요! 더 확실히 말하자면 뒷담화는 사람을 죽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 사도가 자신의 서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뒷담화하는 남자나 여자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혀가 칼처럼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을 죽이는 것입대비되 여러분들은 조심하십시오! 뒷담화하는 남자나 여자는 자신들의 혀를 사용하여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지지만, 그들이 던진 폭탄은 다른 이의 명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들은 테러범입니다. 뒷담화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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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겉과 속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겉이 깨끗해지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순결해야 하는데, 이 내용물은 바로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예수께서는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토빗 12,9)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베풀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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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뷔페에 가서 접시를 집으려고 하는데, 여러분 앞에 단 두 개의 접시만 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는 접시 안쪽은 깨끗한데 바깥쪽이 더럽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은 깨끗한데 안쪽이 더럽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음식을 담아야 하니 안쪽이 깨끗한 접시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겉보다 속이 깨끗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내면을 가꾸기보다 남들 눈에 쉽게 띄는 겉모습에 더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대비되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청렴한 척해도, 속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축적하며 끝없이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루카 복음에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였을 때 눈에 띄게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23,26)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내면의 정결함을 직접 주문합니다. 반면에 루카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11,41)라는 명령으로 이를 대체합니다.
갑자기 자선을 베풀라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탐욕이 가득한 인간의 속내를 비판하셨다면, 이 비판은 그런 탐욕으로 축적해 놓은 재산을 그냥 움켜쥐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부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산을 지나치게 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움켜쥐고만 있으면 잔 속의 얼룩은 더 심해지고 뿌옇게 됩니다. 가진 것을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하여 뿌옇게 얼룩진 잔 속을 깨끗이 닦아 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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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손씻기 또는 사랑하기>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자신의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손을 씻으라고 말하듯이 그것은 위생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을 하나의 율법의 한 규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아이들 건강을 위해 손을 씻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할 자격, 더 나아가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정결례에 관한 율법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바리사이들의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지켜야 할 정결례에 관한 법만을 생각하지 가난한 이들의 삶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말합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루가 11,41) 이것은 “올바르게 자선을 베푸는 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긋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식탁(식사, 먹을 것, 생명)”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실천해야지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에 대해 오늘 제 1 독서에서 이렇게 단적으로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 5,6) 다시 말해 사랑으로 표현되고 사랑에 따라 행동하는 마음이 있을 때,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루카 11,41)입니다.
손 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까이는 그 식탁에서 나누어지는 사랑의 표현들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담긴 마음이 당신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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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노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악을 하는 제 친구는 음악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성악과 관련된 것에 무척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 가수들의 노랫소리 등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관심을 두고 듣습니다. ‘음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이는 바리사이가 낀 색안경과 예수님께서 끼신 색안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리하여 식사 자리에서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끼셨습니다. 식탁에 그릇과 음식이 놓일 때 그분께서는 그 음식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십니다. 마치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자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우리는 어떤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올려진 성체와 성혈을 사랑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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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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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밥>
루카 11,37-41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람과 밥>
밥을
먹을 줄만
아는 사람은
겉만 깨끗하게
씻습니다
밥으로
먹힐 줄도
아는 사람은
속도 깨끗하게
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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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도전>
오늘 주님께서는 정결례 법을 거스름으로 자기를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의 심기를 거스릅니다.
우리 생각에, 초대를 받은 손님은 가능하면 집주인이 원하는 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것이 예의인데, 오늘 주님께서 그것을 따르지 않은 것은 예의가 없고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굴 집에 초대한 것은 사랑을 보인 것인데 그 사랑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게는 그런 주님의 행위가 의도적인 도전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싫어할 줄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정관념 또는 관습의 타파입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그래서 행동하시는 데 거침이 없으신 분으로서의 행동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이 매이지 않음과 거침없으심을
기존 질서를 거부한 히피들의 저항 정도로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은 그저 개인의 저항이 아니라 제가 볼 때 위대한 사랑 혁명 또는 사랑 운동입니다.
본질을 생각하고, 본질로 돌아가자! 뭐 이런 위대한 혁명입니다.
무엇을 하든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낡은 관습과 고정관념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 혁명을 정결례의 낡은 관념과 관습으로 가두려고 하면 그 정결례라는 관습과 관념의 부대는 터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부대 안에는 사랑을 담아야 하고 사랑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실 우리 속에 사랑이 담겨있으면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례 관습에 얽매여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고 사랑 실천에 매진할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 사랑이 담겨있고 그래서 사랑으로 가득하면 우리의 손은 더러워도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느라 손이 깨끗할 겨를이 없을 겁니다.
사랑으로 아이의 코를 닦아주느라, 사랑으로 걸레를 빨고 걸레질하느라, 손은 더러워지지만, 오늘 말씀대로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청소하려고 우리의 손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속은 사랑으로 깨끗하고 따듯한 우리가 되라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도전하십니다.
그 도전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랑 혁명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새 술을 담는 새 부대가 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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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예물 준비를 하면서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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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토마토는 과일일까요? 채소일까요? 아마 많은 분이 토마토를 채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과일일까요? 채소일까요?
“딸기, 수박, 참외, 바나나, 아보카도, 올리브.”
정답을 말하면, 아보카도와 올리브는 과일로 보는 것이 맞고 다른 것은 채소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일의 정의가 나무에서 나는 단맛이 포함된 식용 가능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풀에서 수확하는 열매를 채소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농학적 관점입니다. 이에 반해 식물학적으로는 과즙이 풍부하고 단맛이 나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를 과일로 분류합니다. 그래서 과채류라는 개념을 만들어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일과 채소의 구분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진리라는 것 역시 틀린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숯과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무엇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까요? 당연히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러나 숯과 다이아몬드는 같은 탄소 동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온도와 압력의 차이를 통해서 나눠진 것뿐입니다.
진리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살릴 수 있으며,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나를 배신해서 큰 어려움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늘 열린 마음, 그리고 겸손한 자세가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닫힌 완고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된 것만 눈에 보이나 봅니다.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았다면서 난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더 깨끗하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사람 마음속의 더러움을 무시하고 겉만 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마치 그릇을 씻으면서 겉만 씻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사람들에게 깨끗한 척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바오로 사도 역시도 겉으로만 보이는 허례허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속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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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 하느님 중심의 삶 -
그날 강론 제목은 그날 삶의 메시지이자 주제가 됩니다. 여전한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그동안 출간했던 제 세 권의 책 내용도 그 연관성이 재미있습니다. 2007년에 출간했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이어, ‘둥근 마음, 둥근 삶’, 그리고 2011년에 출간한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인데,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후의 두 권의 책같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나니 아득한 느낌입니다. 다 팔고 있는 것도 다 나눴기에 현재는 한권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물으면 지체없는 제 대답입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려 노력합니다. ‘자유의 여정’이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저에게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 쓰는 새벽 시간은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체험하는 자유로운 복된 시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참 자유의 삶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의 여정입니까?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유와 행복은 함께 갑니다. 나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한다면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예전 ‘수도회사’를 가르칠 때 교재로 사용했던 ‘더 큰 자유와 더불어(With Greater Liberty)’ 책 제목도 잊지 못합니다. 결국 수도여정도 더 큰 내적 자유를 향한 여정입니다.
며칠전 들은 이야기와 지난 밤 미국 사촌 누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충격이었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아버지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한 수도형제의 건강했던 부친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치매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삶의 여정은 참으로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건강하던, 수도원도 기쁘게 방문했던 사촌 누님인데 위독하다는 새벽 카톡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신부님, 루시아 정숙 언니가 사경을 헤매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들 마지막 인사하고, 이젠 면회도 안된다 합니다. 이국땅에서 기적만 바라고 있습니다.”
어제 친지의 조촐한 축하모임에서 만났던 한결같이 정답고 자유로워보이던 조카 딸 부부와 여동생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흡사 우정관계의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참 좋은 우정관계의 친구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부부라면 참 아름답고 자유로운 성인들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런 일상의 평범한 성인들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새벽 읽고 있는 회고록 마지막 대목도 나눕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아직 걱정스러운 바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을 해 온 것 같아요. 이제 DJ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낍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발전한다’, 살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살다보면 목표대로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되요. 실패가 아니어요.”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발전합니다. 자유로운 삶이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날로 아름다운 자유의 인생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카찬스키스의 희랍어로 쓰여진 묘비명도 강렬한 느낌입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에게 참자유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어제에 이어 다시 반복되는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늘 들어도 새롭고 좋으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율법의 종살이, 율법의 저주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멜 때 참자유인의 삶입니다. “굳건히 서라”는 것은 종살이의 멍에로 이끌려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단호하고 확고하게 자유 안에 버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자유, 율법과 종살이중 그리스도와 자유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자유, 역시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후반부 말씀이 그대로 참 자유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율법주의적 사고와 삶을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의로워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이뤄지는 이 복된 시간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자선으로 나누는 삶이 참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부단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신망애의 삶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는 주님의 통쾌한 말씀이 참자유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놀라는 본말전도의, 위선적인 바리사이의 치부를 폭로합니다. 바로 안과 밖이 다른 이중성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안이 깨끗하면 밖은 저절로 깨끗해 집니다. 화장과 성형이 불필요합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내고 성령으로, 신망애 향주삼덕으로 가득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자선입니다. 끊임없이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며 나눠 비울 때 저절로 탐욕도 사악도 사라지고, 마음도 몸도 깨끗해집니다.
너무 많은 갖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에게는 가면이 없어 안팎이 같아 진실하고 겸손합니다. 허영이나 교만이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중에 마음 속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내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자선을 베풀며 살아갈 때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가면은 날로 저절로 사라져가면서 안팎이 같은 삶, 이제 가면이 더 필요없는 진실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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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행동으로 믿자!>
오늘 복음(루카11,37-41)을 보면,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입으로 떠들어대는 신자가 아니라, 조용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행동으로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형식에 집중하지 말고, 믿음의 본질인 사랑을 조용히 겸손하게 드러내려고 애쓰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독서(갈라5,1-6)에서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 교회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5,1)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5,6)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율법이라는 규정 자체에 얽매여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매우 중요했지만, 율법의 규정과 함께 율법의 본질을 강조하셨던 예수님께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미사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기도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본질이 아니라, 세례와 미사와 기도라는 형식과 함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믿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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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Tj47KCFF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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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예수님께서는
삶을 깨끗이 하는
정화의 방향을
가르쳐주십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내면에서 적나라한
우리 모습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마음이 마비되었기에
나눔도 생활도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찬
우리 내면을 정화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누는 자선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됩니다.
마음은 자선으로
다시 깨끗해집니다.
하느님께 받은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할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나누고 베풀지 않고서는
깨끗해질 수 없는
우리들 삶임을 기억합시다.
하느님의 자비와
자선에 비친
부끄러운
우리 내면을
나눔으로 정화합시다.
정화의 방향은
우리의 내면에서
나눔으로 정화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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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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