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1220. 죽음과 웃음이 함께 있는 그림 (241114)
요세비
죽음에 대해 자주 묵상하게 되는 11월이다.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죽음은 늘 남의 죽음이었다. 언젠가는 나의 부고가 될 죽음들이 사건의 사진 한 장처럼 지나가지만 누구도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할 뿐, 지금은 아니라는 믿음이 확신을 가지고 일상을 산다. 그러나 마음 어느 구석에서는 불안의 싹이 솟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수많은 종류의 죽음을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독재타도를 위해 팔을 휘두르다가, 억울하게 남의 잘못으로 수장된 어린 죽음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사람들의 죽음도 기억되지만 대부분 늙고 병들어 육체가 약해지다가 정신줄도 놓게 된다.
죽음을 세부적으로 간접 경험하게 하는 요즘의 매체에서는 죽음을 각성하는데 방해적 요소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죽음에 대해 우물쭈물하게 하다가 준비되지 못한 날(조지 버나드 쇼의 비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죽음을 준비하는데 많은 날들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의미한다.
죽음이 흔하게 인식 될수록 죽음에 대항하며 죽음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키워야 한다.*
죽음을 맞이하려면 먼저 성찰이 요구된다. 시인들은 죽음을 다루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선(善)을 환기시키려 한다. 그러면서 죽음은 한 공간에서 웃음과 병치하여 진실하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외친다.
강물은 스스로 정화하려 애 쓰지만 수많은 업보들을 씻어낸 죄의 무게가 더 많아져 정화는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강의 길이가 더 길어져야 하지만 나머지 몫은 바다가 담당해야 한다. 절대로 정화되지 못하는 것들이 허공과 바다 속에 숙제로 남는데 그 역시 착한 사람들의 몫이다.
교회도 더럽다. 수많은 죄인들에게 세례(洗禮)를 베풀어 그들의 죄를 벗겨낸 가라앉지 않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교회는 더러워야 한다. 걸레가 더러워야 방이 깨끗 해지 듯.
웃음은 죽음이 해소되거나 피해가거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존재는 한 공간에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생기겠지만 죽음은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피동적 선택이기에 자유를 알아야 죽음을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웃음을 알아야 슬픔도 알게 되는 것처럼 죽음과 웃음은 늘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담담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원으로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라는 확신은 흔들린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 아담과 하와로 인해 다시 창조된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기에 신의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이유는 없겠지만 자유를 잘 못 사용한 조상의 원죄(原罪)의 보속(補贖)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살아서 그 보속을 다 치르고 맞이할 때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매 순간을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의지를 불태우며 살아야 하겠다.
*평론가 이송희의 <지금 여기에 깃든 죽음과 웃음>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