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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장 사랑의 끝
정연언니의 결혼식은 사과나무 집에서 치뤄졌다. 라라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 그제 기훈과 침대에 누워있던 걸 들킨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라라할아버지도 민망하셨는지 얼른 고개를 돌리셨다. 그리곤 괜히 기훈만 무섭게 째려보셨다.
그때, 그날 라라 할아버지는 얼른 눈을 가리면서 밖으로 뛰어나가시고 라라에게 다시 들어가서 우리를 깨우라고 시키셨다. 라라 할아버지는 방에서 기훈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리곤 나를 부르셨다.
“라라선생님…”
“죄..송해요. 이사장님…”
“어허…일단은 기훈이는 내가 알아 듣게 얘기했으니까 내가 선생님한테는 한마디만 하겠소. 석훈이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인데 난 걔가 이번에는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아직 아가씨라 모르겠지만 결혼이란걸 하면 양가에서 잘해야지 안 그러면 사소한 일로 그게 불씨가 돼서 큰 문제가 생기기 쉬워요. 둘이 잘 살려면 양쪽 집안에서 서로가 거리를 두고 둘만이 잘살도록 그저 지켜봐주는 게 좋은 거에요. 지금 애들도 셋이나 있고 정정연 선생님도 쉬운 결혼하는 거 아닌데 서로가 분란이 될만한 일은 아예 안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석훈이 백년해로하고 잘 사는거 보고 죽는게 내 소원이요. 제 말 아시겠지요? 사돈처녀?”
“…네.”
그날 기훈이 운전해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라라 할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사돈 처녀 집까지 모셔드리도록 해.” 하고 기훈에게 말했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에서 기훈이 말했다.
“아버지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틀린 말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요.”
“신경 안 써?”
“네.”
“우회전이지?”
“아니요! 아, 직진인데…처음 가는 길도 아니면서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지난번에 우회전이었어.”
“아니요. 직진이었어요.”
“우회전이었어.”
“직진이었어요.”
“그만 하자.”
“뭘 그만해요? 직진이었어요.”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참 나…”
“참 나?”
“알았어를 세 번이나 한다는 건 정말 알아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냥 나보고 입 다물라고 짜증내는 거였죠?”
그가 차를 세웠고 나를 봤다.
“너 지금 나한테 화났지?”
“그래요. 내가 직진이라니까”
그가 내 말을 끊었다.
“직진이고 우회전이고 그거 때문에 화난 게 아니잖아?”
“…?’
“우리 아버지 말 때문에 신경쓰이고 아버지한테 내가 정식으로 우리 사이를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
“내가 ‘우리 헤어질 수 없다.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했어야 하는데 안 그래서 화난 거 아니야?”
“…’
“당장 아버지한테 이렇게 저렇게 말해봐야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형 결혼식도 내일모레고. 내 말 이해하지?”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직진이었어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도 잦은 말다툼이 예상됩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언니와 형부는 영국으로 아이들과 함께 신혼여행을 떠났다. 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길 고집했다. 라라가 손이 많이 간다고 아무리 내가 설득해도 언니의 대답은 같았다.
“이제부터 내 일이잖아.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몫이야. “
기훈과 공항에서 형부와 언니를 배웅했다. 시간이 좀 있어서 우린 커피를 마셨다. 영진과 서진이는 라라를 데리고 게임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기훈과 석훈 형부가 잠깐 다른 곳에 있는 틈을 타 언니에게 말했다.
“신혼여행에 애들 셋을 데리고 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오버야.’
“나 좀 오버하고 싶었어. 그러니 이해해 줘. 다행히 거기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잘 되있으니까…”
“제발 혼자 울면서 돌아와서 ‘나 이 결혼 후회해’ 그런 소리는 말아줘..”
“말도 안돼!”
형부와 기훈이 자리로 돌아왔다. 기훈이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게임기가 어른 여럿 살리는구나. 근데 게임기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있을 텐데…”
석훈 형부가 말했다.
“무인도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정연씨 생각해서 참았다. 이번 참에 애들이랑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게임기도 도착하면 압수고 내 발바닥 곰 발바닥이나 삼육구 게임이라도 같이 해 볼 생각이야.”
언니가 말했다.
“그게 제 아이디어였잖아요.”
“네. 정연씨. 고마워요.”
석훈형부가 그렇게 말하면서 정연언니의 볼을 꼬집었다. 난 석훈과 언니의 택도 없는 애교질에 아이들이 반응을 살폈다. 생각보다 반응들이 나쁘지 않았다. 서진이는 칫하고 고개를 돌리고 영진이는 우웩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가만 보니 정말 서진이는 나만 싫어했었나 보다. 흑흑… 내가 둘의 애교질에 너무 심한 반응을 보였는지 기훈이 말했다.
“부러워? 그럼.”
그리곤 기훈은 내 볼을 꼬집었다. 미쳤느냐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기훈이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들이 이번에는 삼촌이 하는 짓(?)을 보지 못했지만 석훈형부와 언니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석훈이 불쑥 말했다.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언니가 말했다.
“난 정말 몰랐어.”
석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진도는 너무 빠르던데..둘이…”
석훈은 아이들이 저쪽으로 가서 노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둘이 기훈이 방에서 자다가 아버지한테 들켰다구요?”
언니가 입을 떡 벌렸다.
“정말?”
“아…그런 거 아니에요. 우린 진짜 낮잠을 …기훈씨?”
기훈은 당황한 나를 보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형제간에 무슨 얘기를 나눈 게 분명했다. 난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
언니가 말했다.
“난 좋아. 난 절대 찬성이다. 파이팅!! 알지?”
기훈이 씩 웃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말했다.
“사장님은…”
석훈이 말했다.
“형부라고 부르면 좋을텐데…”
“형부.. 괜찮아요?”
“모든 인간에겐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네요. 기훈이가 한 말이에요. “
공항에서 오는 길에 기훈이 말했다.
“나 내일 일본 가.”
“일찍도 말하시네요.”
“넌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건데?”
“그럼 말 놓지 뭐. 언제 와?”
기훈이 인상을 썼다.
“그냥 하던대로 해라. 이상하다.”
“치, 언제 오시는 대요? 기훈씨이?”
그가 웃었다.
“아마 형 신혼여행 갔다 오는 날 나도 오게 되지 싶어. 일주일 후에.”
난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볍게 농담처럼 물었다.
“일본에 태미씨 있는데..”
기훈이 웃었다.
“거기서 전시회가 있어.”
“그래도 태미가 전시회장으로 찾아오면 볼 거죠? 잠은 어디서 자요? 어디 호텔에서 묵어요?”
“와아,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날 못 믿어서 의심하는 거야? 어느 쪽이야?”
“나 지금 타투도 없고 불안한 건 사실이죠. 워낙 태미가 ..적극적인 성격이라.”
“걱정 마, 전화 자주 할게. 그럼 우리 오늘 어디 갈까?”
기훈과 난 하루종일 거리를 걸어 다녔다. 재미로 점도 보았다. 우린 전생에 남매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빠인 그가 날 돌보면서 살았다는 소리에 난 그런 실없는 소리 믿기냐고 기훈을 핀잔하면서도 마음이 애잔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돌보아 주고 싶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와 거리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들을 먹으며 무작정 쏘다녔다. 밤이 되자 그는 날 우면동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우린 헤어지기 싫어서 동네 골목을 다시 걸어 다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내게 키스를 했다. 이렇게 키스만 하면 서로가 달아올라 멈추기가 힘들어 진다. 그가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일 일본 가기 싫다. 가지 말까?”
“겨우 일주일인데요 뭐…”
“겨우 일주일? 겨우? 너 이렇게 나올거야?”
“자기가 좋아서 가는 거면서 괜히.”
“어떡하냐? 나 이렇게 매일 너랑 헤어지기 싫은데. 너랑 일분도 떨어져 있기 싫은데.”
“내일 공항 안 나갈 거에요. 나도 유치원 면접이 있거든요.”
“와아, 지금 나랑 밀고 당기기 하는 거야?”
내가 그의 볼에 뽀뽀했다.
다음날 공항에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진심으로 나와 일주일간 못 본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없는 하루가 시작돼자 나도 마음이 우울했다. 일주일을 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주중에 유치원에 출근을 시작해서 그나마 시간이 빨리 갔다. 그에게선 매일 전화가 왔다. 밤마다 그가 하루종일 뭐했는지 얼마나 내가 보고 싶은지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언니와 석훈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형부와 언니가 우면동에 찾아왔다. 큰 형부까지 모여서 술잔이 오갔다. 밤이 깊자 정연언니과 석훈형부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해. 집에서 이제 안 자고 다른 데로 가야 된다는 게.”
언니의 말에 석훈형부가 말했다.
“오늘은 집에서 자고 와. 오랜만에 처형이랑 처제랑 수다도 떨고.”
엄마와 아빠는 안된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큰일 날 소리. 이제 너 집은 여기가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김서방따라 일어서.”
아빠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이란 그런 거구나 싶었다. 함부로 자기 집에서 잘 수도 없는…
큰언니와 큰 형부 그리고 난 근처 닭집에서 2차를 했다. 나도 모르게 술이 술술 들어갔다. 형부가 말했다.
“근데 어떻게 다들 남자들보다 술이 세지? 장모님 닮았나 봐.”
“아..정말 오늘 술 잘 받는다.”
내가 술잔을 드는데 누군가 술잔을 빼앗았다. 고개를 들자 기훈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집에 가니까 여기들 있다고 알려주셔서 왔습니다.”
형부와 언니가 입을 떡 벌리고 그를 쳐다봤다. 형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앉아요. 저기.. 사돈총각.”
언니가 물었다.
“근데 어쩐일로….”
형부가 웃으며 기훈을 앉혔다.
“일단 앉아요.”
기훈이 넋 살 좋게 말했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죠?”
형부와 언니가 합창을 했다.
“아니요!”
내가 멍해져서 물었다.
“어제는 내일 온다고 했잖아요?”
“그냥 내일 껀은 땡땡이 쳤어. 왜? 나 안 반가워?”
술잔이 서로 한번 오가자마자 언니가 형부를 끌고 일어났다.
“우린 수철이 때문에 먼저 일어나야겠다.”
기훈이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니에요. 애 잘 시간이 지나서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형부와 언니가 가고 안주만 먹고 있던 내게 기훈이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어디 아파? 얼굴이 부었어.”
“이 키로 쪘어요.”
“일주일 동안?”
“네.”
“나 안 반가워?”
“반가워요.”
“근데…왜 내 눈엔 너가 화난 거처럼 보이지?”
“화 안 났어요.”
그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날 일으켰다.
그는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 가요?”
“참 일찍도 물어보십니다?”
“어디 가냐구요?”
“몰라.”
“참 나.”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자 난 포기하고 음악을 들었다. 기훈이 몇번 말을 걸었지만 내가 단답형 대답만 하자 기훈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서운했다. 그저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청평 어디쯤 비포장도로가 깔린 길 끝에 있는 한 전원주택 앞이었다.
“내려.”
“이건 납치에요.”
“납치 좋아하잖아.”
“안 내릴 거란 것도 알죠?”
“내려.”
“안 내려요.”
“아버지 별장이야. 내려.”
“안 내려요.”
“호텔보다 좋아. 내려.”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미쳤어요?”
“나 정말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내려.”
우린 집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단 둘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에 있자 어색함이 흘렀다. 그가 창문을 열었다. 집 바로 아래로 흐르는 계곡소리가 들렸다.
“어릴 때 저기서 수영하고 놀았어. 지금은 잘 안 보이지만 아침에 보면 좋을 거야.”
“그럼 아침에 오지 그랬어요?”
그가 내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검사결과는 뭐래?”
“네?”
“건강검진결과 말야.”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괜찮대요.”
“다?”
“네. 다”
“뭐가 다 괜찮아? 위염이라던데.”
“어떻게 알았어요?”
“아는 분이 거기 병원 계셔.”
“참 나.”
“참 나가 아니라 약은 먹어?”
“먹어요.”
“잘 챙겨 먹어. 위염 가만두면 궤양되고 그러면 암도 될수 있고 그런거야.”
“알았어요. 그거 말하려고 이렇게 멀리 달려왔어요?”
“아니.”
순식간에 그가 내 입술을 덮쳤다. 그가 날 너무나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내 셔츠 안으로 들어오자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안 되잖아요?”
“왜?”
그가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의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 봤다.
"사랑해. 다라야."
그가 다시 내게 키스했다. 그가 나로 인해 이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흥분시켰다. 처음 그를 본 날이 떠올랐다. 냉정하고 완벽해 보이는 이 김기훈이라는 남자가 지금 내 앞에서 자제심을 잃고 오직 나만을 원한다는 사실에 온 몸이 짜릿해졌다. 그가 날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내가 그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만족감마저 들었다.
새소리와 물소리에 잠이 깨는 건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나를 꼭 안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안도감과 행복감이었다. 당장 지진이 나서 세상이 멸망한다해도 이 순간만큼은 허겁지겁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이 침대를 뛰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억짜리 미소가 온전히 나만을 향해 있었다. 그가 물었다.
“잘 잤어?”
“네.”
그가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 눈썹, 눈꺼풀, 콧등, 그리고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다.
“너하고 40년 후에 사진한 장 같이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둘이 머리가 하얗게 세서 주름이 가득 찬 얼굴로 손을 함께 잡고 있는 그런 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거야. 죽는 순간에 내 인생 참 행복했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40년을 못 살 수도 있잖아요. 세상에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은데.”
그의 로맨틱한 상상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원래의 내 모습도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오늘 당장 사진 한 장 찍자. 그래야 우리가 오늘 죽게 되면 ‘아, 참 행복했네’ 이런 생각하면서 죽을 수 있는 거잖아.”
그의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안았다.
우린 그리고도 한참 후에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부엌 선반에서 날짜가 지난 라면 두개를 끓이는데 기훈이 나를 막았다.
“죽 먹어야 돼. 속도 안 좋으면서.”
그가 끓여준 흰 쌀 죽을 먹고 우린 계곡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여기 너무 좋아요.”
“그럼 여기서 살까?”
“그 정돈 아니고…헤헤.”
“우리 낚시 갈까? 이 근처에 호수 있어.”
항상 궁금해왔던 걸 물었다.
“기훈씨…그때 왜 그랬어요? 영국에서?”
“음?”
“나 처음 보자마자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 거요. 그때 왜 그랬어요? 원래 기훈씨 그렇게 연애하는 스타일이었나?”
“그러는 넌?”
“난 어디 한번 막나가 보자 그런 심정으로..빨리 기훈씨 얘기나 해봐요.”
기훈이 갑자기 어색하게 웃었다.
“나 정말 그때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기훈씨가? 떨렸다구요?”
“진짜로 너가 내 방까지 따라 들어 올 줄은 몰랐거든. 너랑 사귀고 싶고 너를 알고 싶었지만 그런 식은 아니었어. 그냥 너가 너무 슬퍼보여서 나도 모르게 질렀던 건데 너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거야.”
“…”
“사실 너 욕실에 있을 때 친구한테 전화했었다. 5분 있다 방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네?”
그러고 보니 그가 내가 키스를 할 때 전화벨이 울렸었다. 그래서 난 자연스럽게 그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기훈은 내가 막상 욕실에 들어가자 떨리고 긴장이 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급한 전화가 온 것처럼 일을 꾸민 것이었다. 난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되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덩달아 빙그레 웃었다.
“사과나무 집에서 그날 기억나요? 내가 술 취해서 당신이 내 첫사랑 지훈이랑 닮았다고 말한 날. 상상도 못했죠? 그 김지훈이 기훈씨 친구인 그 지훈이일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확실치는 않았지만 의심은 들었어.”
뭐라고? 그렇다면...
"...?"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 우리의 운명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전에 지훈이한테 첫사랑 얘길 들은 적이 있었어. …뭔가 예감이 무서웠지. 그래서 그 날 작정을 하고 지훈이를 집으로 부른 거야. 소중하게 감추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보물을 공개하는 …그런 심정이었어. 하늘에 운명을 맡긴 거지.”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듣지 못하는 곳에서 그는 날 그렇게 깊숙하게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별거 아니네요.”
“..?”
“행복이란 거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앉아 있어도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보면 행복이 참 쉬운 거다 싶어요.”
“나랑 있어서 그런 거란 생각은 안 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요.”
“왜?”
“이 사람이랑 있어서 좋고 저 사람이랑 있어서 싫고 행복을 사람한테 의존하면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이 사람이 떠나면 불행해지고 저 사람이 가면 행복해지고 그렇게 되는 거는 너무 힘들어요.”
“…그런 말 알아? 사랑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래. 사랑은 잘 익어서 방금 따먹기 좋은 열매가 아니라 심어서 물 주고 태양빛 받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가꾸어서 열매를 성공적으로 열리게 해야 하는 씨앗이래.”
“…씨앗. 그럼 그 열매는? 사랑이 씨앗이면 그 씨앗이 자라서 맺은 열매는 뭐죠?”
“웃지 마.”
“왜요? 뭔데요?”
“그게 ..자식이란다. 그 열매들이 자식이래.”
풋 웃음이 나왔다.
“누가 그래요?”
“형이.”
“맞는 말일까요?”
“글쎄. 우린 자식을 안 낳아봐서 이해를 못 하는 지도 모르지.”
“맞아요. 우린 아직 몰라요.”
“근데 내가 아는 건 나도 그 씨앗을 키워보고 싶다는 거야.”
지금 기훈이 무슨 말을…기훈이 계속했다.
“나도 물주고 가꾸고 기다리면서 씨앗이 싹 트고 잘 자라는 걸 보고 싶어.”
“…그거 생각보다 힘들 텐데요. 엄청 책임이 따르는 일이잖아요. 꽃피면 예쁘지만 벌레도 잡아줘야 하고 썩거나 마르지 않도록 물 조절도 잘해야 하고 너무 힘들 거에요.”
“그래도 해보고 싶지 않아? 그냥 귀찮다고 안 하기엔 너무 소중한 씨앗이잖아.”
“…”
“같이 해볼래?”
“…”
“지금 너한테 청혼하는 거야. 정다라. 결혼하자 다라. 나랑 결혼해줘. 다라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날 쳐다봤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며 너무나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또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겁이 났으니까. 내가 과연 그 씨앗을 죽이지 않고 잘 키워낼지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시간이란 게 있었다. 당장 하루 이틀 안에 씨앗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 피부로 느낄 순 없어도 세월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느끼는 행복감이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인 거다.
“하긴…우리 닮은 아가가 참 궁금하긴 해.”
내 대답에 마침내 그가 숨을 내쉬고 빙그레 웃었다. 그가 내게 키스를 했다.
끝.
첫댓글 따뜻해서 좋아요..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 기대할께요..
와아아아.. 이렇게 끝나군요. 뭐랄까요. 작가님의 인생관을 엿볼수 있다고나 할까나요.(이렇게 말했다가 돌맞는 거 아닌지요ㅠㅠ) 무튼 작가님 여태까지 오시느라 무척 수고하셨구요!! 또 다른 소설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아아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두구두구 끝났군요 ㅜㅜㅜㅜ 하앍 정말 잘 읽었어요 훈훈하게 끝났네요 !
오늘 일하는 시간이랑 밥먹는 시간 빼고 종일 작가님의 소설을읽었습니다 너무나도잼나게읽었어요 덕분에오늘하루가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