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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火. 맑음
포항 도심都心 걷기, 선빈아 현빈아 잘 다녀오렴!
입영入營 전야.
‘2011년 03월07일 입영자 : 14:00까지 해병대 1사단(서문)’
이라고 입영통지서에도 적혀있지만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도 나에게 같은 내용의 문자를 이미 보내주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발을 하려면 하고는 다른 날에 비해 일찍 잠자리에 눕는다. 저녁 11시경이면 사실 내게는 초저녁이나 다름이 없지만 내일 아침 포항까지 운전을 하고 가려면 잠을 좀 자두어야 하기 때문인데 잠이 잘 와줄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선빈禪彬아, 7일 포항 해병훈련소에 입소할 때 엄마 아빠가 데려다주랴? 네가 개별로 가고 싶다면 미리 고속버스표를 예매해야할 것 같구나. 그런데 네가 요즘 회사일 마무리에다 친구와 선배들 만나느라고 새벽에 집에 들어와 아침에 일찍 나가버리니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포항 가는 차편을 아빠가 한 번 확인을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 어떻겠니?”
“네, 좋아요.”
“응, 좋다니?”
“네, 아빠께서 시간이 되시면 데려다 주세요.”
“그럼, 시간이 되고말고.”
눈을 반짝 뜬다. 그리고 누운 채로 천정 쪽의 어두운 공간을 그저 쳐다본다. 정신이 점차 맑아지고 몸에 생기가 돌아오면 눈이 어둠 속에서도 보고 싶은 것들을 재빨리 보아낸다. 새벽 두시가 지나고 있는 중이다. 2층에 올라가 의뢰받은 파일을 미국으로 전송을 하고나서 새벽1시경에 일층으로 내려와 선빈이가 제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깜빡 잠에 들었다 지금 눈을 떴으니 한 시간 가량 눈을 붙인 셈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분명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에 대한 애착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지만 잠자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각이 많아져서 누워서 잠을 자야할 시간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느라 잠을 덜 자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것 같다. 잠자리에 누워 부시럭거리다 괜히 아내까지 깰까봐 몸을 조금씩 뒤척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한 시간 가량 흘렀을까 할 무렵 아내가 내 쪽으로 돌아눕더니 손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자장자장을 해준다. 아내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쓸듯이 자장자장을 해주는 천연天然스러운 이 느낌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 언제더라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나는 마구 먼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의 경계지점에 해당하는 그 기억들이 나를 홀리듯 온통 사로잡아버린다.
기억記憶, 그 안쪽의 기억記憶과 또 그 속에 잠겨있는 기억記憶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61년 삼월에 있었던 국민학교 입학식 날을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입학식 전날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입구에 있던 다이아몬드 이발소에 가서 상고머리로 단정하게 이발까지 하고 참석했던 입학식은 긴장도 되었지만 참 재미도 있었다. 1학년 11반, 우리 반의 깃발은 분홍깃발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심양례 선생님이셨다. 우리가 긴장을 한 채 눈을 반짝이며 줄을 서있는데 오늘 처음 본 낯선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다.
“누구 앞에 나와 우리 반 분홍깃발을 들 어린이?”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가 그 깃발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운동장 수업이 있을 때면 항상 내가 우리 반 분홍깃발을 들고 돌아다녔다. 담임선생님은 그날 처음 만났지만 내 평생 동안 수많았던 선생님들 중 최초最初의 선생님이면서 최고最高의 선생님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한 눈높이 교육이란 용어가 생겨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눈높이 교육을 몸으로 실천을 하고 계셨던 선생님이자 그 많은 질문을 한 번도 짜증내지 않고 다 받아주신 선생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란 즐거운 곳이고, 공부는 더 재미있는 것이고, 글쓰기는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께 딱 한 학기를 배우고 1학년 2학기에는 아빠를 따라 광양으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5학년 때 다시 이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다섯 군데의 국민학교에 전학을 다녔다. 덕분에 광양, 나주, 진도, 장흥, 보성 등 시골 생활을 두루두루 할 수가 있어서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알친구를 사귈 기회는 없어져버렸다.
동생을 업은 엄마의 손을 잡고 길 가로 화사한 꽃들이 피어있는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화창한 어느 봄날 오후에 먼 길을 걸어갔다. 엄마는 다른 손에는 하얀 보퉁이를 들고 계셨다. 처음에는 신나고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배도 고프고 점차 다리가 아파왔다. 한참을 그러고 난 뒤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지붕이 고래등 같았던 커다란 집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기우는 햇살에 지붕 그림자가 옆에 있던 건물 벽과 넓은 마당에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 화창한 봄날의 꽃길이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다 가끔 꿈속에서도 내가 그 길을 걸어가는 때가 있었다. 그래서 청년이 된 후에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내가 네 살이고, 동생이 두 살이었던 때 봄날 겹 벚꽃길이 아름다운 하동 쌍계사에 놀러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느냐고 내게 반문하셨다. 우리는 쌍계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돌아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다른 손에 들고 계셨던 하얀 보퉁이에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가 들어 있었다고 하셨다. 물론 내가 쌍계사에서 하룻밤을 나며 잠을 잤던 기억은 없다. 석양夕陽의 기우는 햇살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건물 벽과 뜰에 넓게 드리우면서 밝고 어두운 사이사이에 신비한 세상들이 굼실거리는 그 풍경에서 내 기억은 멈춰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부뚜막에 있는 검은 가마솥 뚜껑을 열어놓고 푸짐한 김이 뭉클뭉클 올라오는 사이로 나무주걱을 저어가며 밥을 푸고 있는 모습을 내가 부엌으로 통하는 방문을 열어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솥에서는 국 끓는 냄새가 풍겨 나와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아마 된장을 푼 시래기 국이었겠지. 부뚜막 아궁이에서 솔가지 타는 냄새가 아릿하게 피어오르며 구수한 밥 냄새와 국 냄새가 정지의 어둑한 공간에 가득 차올랐다. 어느 아침나절의 밥 푸는 광경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흑백黑白의 장면인데 언제 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여쭤보았지만 솔가지 때서 밥을 하고, 검은 가마솥에서 밥을 펐던 일은 연탄을 사용하기 전까지 몇십 년 동안 해왔던 일인데 그때가 언제인줄 어찌 알겠느냐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들여다보았던 정지와 내다보았던 방문의 구조 등을 상세히 설명해드리자 한참동안을 생각하시더니 아마도 순천이나 곡성이 아닐까 싶다는 말씀을 어슴푸레 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세 살 때쯤일 것인데 어찌 그때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며 하하 웃으셨다. 하지만 그때가 몇 살이고, 또 어느 곳이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장면들인 이른 아침 밥 푸는 모습과 벚꽃 길 따라 끝없이 걸어가던 모습은 평생 동안 내 상상의 근원根源이 되어주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포항浦項 가는 길.
언제 다시 잠이 들었는지 잠결에 자명종自鳴鐘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났다. 다섯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먼저 씻고 나서 식구들을 깨워주고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난 뒤 할머니와 작은 아빠께 선빈이가 인사를 드리고 나서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와 함께 올랐다. 아침6시30분이었다. 벌써 춘분을 이주가량 남겨둔 시기라 그런지 주변은 이미 밝아져오고 있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수원에서 오산까지 구간별로 약간 정체가 있기는 했지만 별 무리 없이 차는 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려갔다. 천안 휴게소에서 잠시 멈춰 요즘 시세로는 저렴한 가격인 L당 1898원에 7만4000원어치 주유注油를 해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는 또 부지런히 경부고속국도를 달려 내려갔다. 선빈이는 뒷좌석에 누워 잠을 자다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통화를 하고 통화를 마치면 또 잠을 잤다. 가끔은 국제전화가 들어와 미국이나 영국,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선빈이가 집에서 영어를 사용할 때면 내가 또박또박 말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기 때문에 대충은 일아 들을 수 있었는데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통화를 하는 말은 너무 빨라 대충이라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바시시 웃음이 떠올랐다. 선빈이가 여섯 살 때 한글을 깨치고 나서 알파벳 읽기와 쓰기를 처음으로 가르쳤고, P와 F, L과 R, G와 Z 발음의 차이와 느낌에 대해서 시범을 보여 가며 가르쳤던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회덕 분기점을 지나고 추풍령을 지나 칠곡 휴게소에서 한 번 더 쉬었다. 점심식사는 포항에서 하기로 하고 미리 준비해간 빵과 요구르트, 우유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아내가 운전교대를 하자고 했지만 내가 컨디션이 무척 좋으니 괜찮다고 했다. 대구를 지나 도동 분기점에서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로 진입을 해서 40여 분 달려가니 포항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전 11시였다. 정확하게 4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포항 시내에 들어가서 먼저 이발소부터 찾았다. 한길 가에 있는 미용실을 찾아내어 아내와 선빈이는 제대로 된 해병머리를 하러 미용실로 들어갔고, 나는 포항 시내를 슬슬 걸어 다녔다. 월요일 오전이지만 차도車道는 한가했고, 인도人道는 더욱 한가했다. 음식점, 사무실, 상점, 그리고 목 좋은 사거리께에는 전자제품 대리점이나 편의점이나 핸드폰 대리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끔 은행도 보였다. 근방을 한 바퀴 돌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더니 미용실에서 아내와 선빈이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 옆에 서 있는 선빈이는 이제 영락없는 귀신 잡는 해병海兵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바로 저 모습이라니까!
해병대 교육훈련단 입소식.
형산강 포스코 대교를 건너 우회전을 받아 곧장 가면 오천읍이 나오는데 곧바로 들어가면 해병대1사단이 있는 서문이고, 오른편 상가를 끼고 돌아가는 길을 따라가면 해병대 교육훈련단이 있는 정문이 나온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는 큰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고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해병대 입소 장병은 서문으로 직진 ↑, 현빈 팬 미팅장소는 정문 쪽으로 →’
자 이쯤해서 현빈이가 점심을 굶든 말든 우리는 선빈禪彬이를 데리고 점심식사를 해야 한다. 서문으로 들어가는 길 좌우로 식당이 줄을 서 있다. 그중 청진동 해장국이라는 익숙한 상호를 고른다.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 청진동 해장국을 세 그릇 시켜 땀을 흘려가며 맛나게 먹고 밖으로 나오니 형산강 따라 흔들흔들 지나가는 봄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이제 12시30분을 겨우 지나고 있지만 달리 할 일도 없는 터라 부대로 들어가기로 한다. 줄지어선 차량들 사이에 끼어 서문을 통과해 해병대1사단 쪽으로 향한다. 서문 주위에는 야전군 복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자동소총을 든 해병들이 경계를 서면서 검문을 하고 있다. 역시 해병이 해병답게 느껴질 때는 상륙 구명보트를 머리에 이고 바닷물을 첨벙거리며 달려갈 때와 완전군장에 경계를 서고 있을 때가 제 분위기인 듯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교육훈련단 본부 연병장 관람석에 가족끼리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연병장 가운데 임시 설치해놓은 대형화면에서 해병에 관한 영상물을 보여 주기도 하고 포항 홍보물을 띄우기도 한다. 바람 끝이 쌀쌀하게 느껴져서 양복저고리를 벗어 아내에게 입혀주니 춥지 않다며 그냥 입고 계시라고 사양하지만 그래도 입혀주니 따뜻하고 좋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이 칼칼한 게 살짝 감기기운이 있었지만 아내에게 감기기운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 몰래 약이 될 만한 것을 혼자 열심히 찾아 먹고서야 체면을 구기지 않고 위기를 넘겼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참모장이 나와서 부대 및 훈련과정을 소개해주고, 연대장이 환영사를 해준 뒤에 해병 의장대가 연병장에 나타나 시범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오늘 입소한 장병들은 자기 짐을 챙겨들고 연병장으로 모두 나오라고 말을 한다. 자, 이제 짧지만 이별의 시간이다. 선빈이는 엄마와 손을 잡더니 아빠와 악수를 한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후다닥 스탠드를 뛰어 내려가 연병장 가운데 맨 앞줄에 가서 선다. 대학 티인 붉은 상의를 입고 있어서 맨 앞줄에 서 있는 선빈이는 눈에 잘 띄어 보인다. 입영행사를 하는 동안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빈이가 기자와 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타나서 연병장 가운데 선빈이가 서 있는 부근으로 가서 나란히 선다. 입소 장병들은 모두 부모님께 큰절을 하라고 하니 선빈이가 엄마 아빠가 서 있는 11시 방향으로 몸을 틀어 큰절을 한다. 이때만큼은 오늘 모인 700여명의 입소 장병들 중에서 오직 선빈이만 내 눈에 가득할 뿐이다. 그러자 온몸에서 갑자기 피가 들끓어 오른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과 같이 해병대에 입소를 해서 함께 7주간 훈련을 받고 싶구나. 너희들 못지않게 잘 뛰고, 잘 견디고, 잘 쏠 수 있는데...
3월의 따스한 햇살과 쌀쌀한 봄바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애를 하듯 흔들거리며 연병장에 가득 물결쳐 오른다. 오늘은 봄 하늘의 푸른 기운과 해병의 빨간 명찰이 참 잘 어울리는 날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1년 3월7일 입소한 제 1137기 해병海兵들아, 선빈禪彬아 현빈아 잘 다녀오렴!
(- 포항 도심都心 걷기, 선빈아 현빈아 잘 다녀오렴! -)
첫댓글 마음이 짠하셨겠네요^^ 저는 막상 헤어질때는 담담하더니 집에오니 마음이 그렇게 헛헛할수가 없더라구요^^
ㅎㅎ 현빈이 보러 포항갈까했더만 갔으면 뵐뻔했네요^^ㅎㅎ 휴가쓰고 갈껄그랬나~~선빈이 현빈이 형제같아요^^
작가는 어떤 소재도 어떤 주제로 엮어 내는 재주가 월등한 사람류이다.
그 중 으뜸인 긴울림의 글은 단순한 소재도 깊이 있는 주제로 감동을 준다.
그러나 긴울림의 숱한 소재와 주제 중에서 내게 가장 감동을 주며 귀감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가족이야기]다.
이 글 한 편이 주는 따스함, 뭉클함이 당분간 나의 마음을 데워주며 느슨한 엄마노릇에 불침을 놓을 것이다.
역시 긴울림님은 보통의 아빠와 다르십니다.
"이때만큼은 오늘 모인 700여명의 입소 장병들 중에서 오직 선빈이만 내 눈에 가득할 뿐이다. 그러자 온몸에서 갑자기 피가 들끓어 오른다."
까지 읽고 저는 내 아들이 벌써 저렇게 컸을까... 등 父性의 감성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희들 못지않게 잘 뛰고, 잘 견디고, 잘 쏠 수 있는데... "
아빠의 입장이 아니라, 남자의 입장이 되었더라구요. ㅋㅋ
제가 남자의 심리를 잘 몰라서 그런가요?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 근사한 말입니다. 해병대 표어입니까?
글의 대화에서 아들한테 강요하거나 지시 명령조의 아빠 말은 없다.
항상 아들이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암시]를 해 준다.
"~~~~~~ 어떻겠니?"
내게는 익숙하지 않는 말인데..... 내 아들이 선빈이처럼만 자랄 수 있다면......
어떻겠니? 어떻겠니? 어떻겠니? .... *^^* 성질급한 엄마인데... 잘 할 수 있을까 ㅋ
현빈보다 더 멋진 빨간잠바(?)입은 선빈이!!!
잘~다녀 올겁니다 ^^*
금방이더라구요~~~아이들에게 이런 말하면 한 소리하겠지만...ㅎㅎ
나라 지키러 간 선빈이, 현빈이 땜시 저는 편안하게 잠 잘 자겠습니다..^^*
즐거운 저녁되시며 행복한 자리 되세요~~~~~~~~~~~~~~~~~~~~~~~~~~~~~~~~
이름도 선빈 현빈 뭔가 인연이 있을 듯 해요. 잔잔한 글 속에서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지금도 젊은이 못지 않은 생각과 체력을 갖고 계신 긴울림님의 아드님이시니 군 생활도 열정적으로 잘하리라 생각됩니다.
묵직하면서도 따듯한 가족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가족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나라 지키러 간 긴울림님 꼭 닮았을 아드님 선빈이, 현빈이 덕에 저는 편안하게 잠 잘 자겠습니다..^^(2) 전 아들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아들 군에보낸 아빠마음이 엄마마음하고는 또 다른 게 ...그런 게 있다면서요.... 남편 대학동기모임에 갔더니 아들 군대보낸 얘기하는 남편친구들..... 그 가슴 아린 수다가....장난아니더군요 ㅎ ㅎ ㅎ 씩씩한 대한해병으로 군생활 잘 하고오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