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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보서 2:5-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대림절에 기다림초를 밝히고, 카드를 쓰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일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성탄을 맞아 아이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더 큰 선물이 오심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카드를 교환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편지를 보내실 것을 예고하는 일이다. 성탄은 그런 상징과 징조가 구체화하는 날이다.
성탄 문화는 등불, 별, 구유상, 천사처럼 아련하고 따듯하다. 색동교회에 천정에 건 별 장식은 ‘헤른 후터의 별’이다. 헤른 후터(Herrn Huter)는 주님의 모자, 곧 ‘주님의 보호하심’이란 뜻으로, 보헤미안 난민을 맞아준 진첸도르프 공동체의 이름이다.
진첸도르프 공동체는 박해를 피해 찾아온 난민들을 환대하였다. 그래서 ‘헤른 후터의 별’은 구체적인 희망처럼, 은총을 찾아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잡이별을 상징하고 있다.
프랑스의 젊은이 공동체 떼제를 시작한 로제 수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자력처럼 사람을 끌어줍니다.”
1)
빌립보서 2장은 ‘그리스도 찬가’로 유명하다. 모두 여섯 절로 요약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
이 말씀은 가장 빛나는 ‘고백 중의 고백’으로 초대교회 예배 중에 찬송으로 불려졌다. 전반부(6-8절)는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후반부(9-11절)는 하늘로 올려 지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그리스도교에는 두 가지 핵심교리(Credo)가 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다’와 ‘삼위일체 신앙’이다. 교리가 완성되기 이전부터 고백한 것이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이다. 사도신경보다 앞서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에 대하여 명백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찬가’는 누구나 줄줄이 암송하던 신조였다. 귀하게 부르던 찬송이었다.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라.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친다. 예수님을 당연하게 천상의 분으로만 이해한 까닭에 언감생심 내 삶에 적용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단호하게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초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세세히 주석을 달았다. <준주성범>(遵主聖範)이라고도 불린다. ‘쫓을 준(遵)’자를 사용하여 ‘주님의 거룩함 모범을 쫓아’란 뜻이다. 이렇게 말한다.
“겸손하고 화평해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헌신적이 되고, 말을 삼가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함께 거하실 것이다... 친구를 많이 사귀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라. 하지만 예수님을 더욱 특별히 사랑해야 한다”(‘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중에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존 웨슬리의 성화(聖化)에 첫번째로 영향을 끼친 책으로 손꼽힌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섬김을 배우는 동안, 스스로 종이 되신 큰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평소 자주 예수님을 입에 올린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일용할 삶에서 등불과 같은 생생한 기도이다. 또 주일마다 습관처럼 사도신경을 외운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지난 2천 년 동안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과 맞바꾼 소중한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와 고백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과연 중독증 때문일까 아니면 무심증 때문일까?
2)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에서 ‘이 마음’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허영과 다툼을 버리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당부를 하면서 좋은 모범을 예로 든 것이다.
먼저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신 분이다. 주님은 자신의 길을 원치 않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순종하셨다. 높임을 받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원래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그 지위를 포기하고 사람들처럼 되셨다. 뭇 사람 중에서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만큼 자신을 비우고, 낮추셨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위대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일이다.
바울이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러한 겸손, 자기 비움, 헌신과 순종이다.
정용철 시인의 ‘나 때문에’란 시가 있다.
“나를 따듯하게 하기위해 당신은 추웠습니다. 나를 웃게 하기 위해 당신은 울었습니다. 나를 높이기 위해 당신은 낮아졌습니다.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당신은 매였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 시는 어머니를 노래한 것이다. 그 사모곡은 마치 복음서의 한 대목처럼 느껴진다.
위대한 시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방식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자기 비움, 내려놓음, 낮아짐이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순종을 ‘케노시스’라고 표현하였다. ‘케눈’은 그릇에 담긴 것을 다 쏟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자기 비움이다. 이 노래의 이름을 그냥 ‘케노시스’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본문은 겸손, 겸비, 겸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근본 하나님의 본체”에서 ‘본체’에 대한 두 가지 낱말이 있다. ‘모르훼’와 ‘스케마’이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모르훼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다. 그러나 스케마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한다. 모르훼로서 인간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지만, 스케마로서 인간은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로 외면적 변화가 가능하다.
예수님은 본래 신성이란 본체(모르훼)를 지니셨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낮아지심은 본체의 본질적 변화인가? 아니면 외면적 변화인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는데, 그 낮아지심은 단지 겉모습의 변화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 자체의 변화, 즉 모르훼의 변화였다고 분명히 증언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워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외면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자기 비움’에 대하여 분명히 기록하였다. 즉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셨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 복종과 헌신은 본래적인 자기 것을 버림으로써만 가능하였다.
예수님은 부요한 분이셨으나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 그 이유는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행동하셨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시고, 참 인간이 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바울의 주장은 단순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비움으로써만 가능해진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되어가며 부요하다.
3)
신약성경은 성탄을 성육신으로 이해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복음이 성육신에 대한 증언이라면, 빌립보서는 성육신에 대한 찬미이다. 두 가지 말씀은 서로 보완하면서 더욱 구체적이고 확신에 찬 고백을 들려준다. 모두 참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되신 사건, 곧 성육신의 신비를 들려준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일은 잠시 배역을 맡아, 연기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셨다. 존엄과 권위와 특권을 포기하셨다. 자기의 영광을 기쁨으로 버리시고, 심지어 종의 삶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참 하나님, 참 사람’이란 신앙고백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 찬가’를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가 정반대의 내용을 노래한다. 나를 비울 때 하나님은 채워주신다. 나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높여 주신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더욱 큰 영광을 가져왔다.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채우시고, 높이시고, 올리신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천하고 욕되며 고통스럽게 죽으신 예수님을 높여주신다.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늘과 땅, 사람들이 그 분께 무릎을 꿇고, 주님이라고 부르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나아간 그 겸손한 “종의 형체” 위에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9)은 바로 ‘큐리어스’란 이름이다. 우리 식으로 ‘주님’이라고 번역한다. 이 뜻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주가 되심을 뜻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 우리나라 새 번역 성경이나, 영어 NIV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이름 ‘여호와’를 ‘주님’과 ‘Lord’로 번역한다. 주님은 특별한 이름이다. 주님은 예배언어가 되었다. 우리가 억눌린 복종으로 예배하지 않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예배 드린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 먼저 낮아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성탄을 연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구유이다. 아기가 출생할 때 눕힐 수 있는 가장 비천한 보금자리의 모습이다. 색동교회의 강단에 구유를 둔 이유는 예수님의 본체를 바르게 기억하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구유부터 십자가까지’이다. 우리가 구유라는 상징을 잃어버린다면 신앙고백은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상실한 까닭에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는 문자주의로 가득하다. 그런 까닭에 높고 화려하고 부유함을 찬미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난하고 외롭고 낮은 자리를 돌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되었다.
그런 성탄이 가능한 일인가? 아기 예수의 연민을 잃어버린 교회가 더 이상 세상의 아픔, 두려움, 고달픔, 위험함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된 셈이다.
천사는 하늘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초라한 아기 곁에서 평화를 노래하고, 친절히 보살피며, 선하고, 용기있게,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겨드랑이에 움트는 날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림절은 춥고, 어둡고, 을씨년한 계절이지만, 온통 따듯한 사랑의 상징으로 채워 나가는 그런 절기이다.
이렇듯 성탄은 예수님을 맨발로 찾아오신 분으로 기록한다. 주님은 허물 많은 삶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만져 주신다. 우리들의 지칠 대로 지친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다.
대림절이면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 신앙고백을 돌아보게 한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대림절과 성탄절 그리고 주현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절기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는 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 이것을 내 삶의 본보기로 삼는 절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지배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라. 그 온유하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운 큰 사랑 안에 나를 포함시켜라.
하나님께서 내게 그리스도를 본받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값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