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세력은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이다.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리에 결성한 하나회(일명 一心會)는 제5공화국 창출의 모태가 됨으로써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 오성회
하나회의 뿌리는 전두환이 육사생도 시절에 결성한 오성회(五星會)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성회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복동(金復東),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의 다섯 사람이 장래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만든 20세 청년들의 친목써클이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써클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전두환(대구공고), 노태우.김복동(경북고), 박모씨(박병하: 인용자 주), 그리고 경남고를 나온 저는 같은 경상도 출신이고 해서 쉽게 어울려 친하게 되었죠(박씨는 사정상 나중에 12기로 임관해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외출해 같이 술 마시며 토론도 하고 방학 때면 대구, 김해 등 서로의 집에 놀러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면서 형제처럼 지냈어요. 스무살 팔팔할 때라 장군을 꿈꾸며 오성회라는 써클을 만들었죠. 각자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 용성(勇星, 전두환).관성(冠星, 노태우).여성(黎星, 김복동).혜성(慧星, 최성택) 등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했어요. 3학년 때 합류한 백운택씨는 웅성(雄星)이라고 불렀죠. 하나회는 나중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들었지만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모임이었어요. '조국을 위해 일을 하려면 끊을 수 없는 유대를 가져야 한다'는 20세 청년들의 우정써클이었죠."
1955년 오성회의 다섯 사람은 소위(少尉) 계급장을 달고 전방 소대장으로 흩어졌지만 서로의 유대는 변하지 않았다. 그 후 오성회는 회원이 늘어나 칠성회(七星會)로 확대되었고, 이후 이른바 육사 11기 텐 멤버(ten member)로 발전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대단히 강했고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는데, 이것이 하나회를 결성한 동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육사 10기 이전의 선배 장교들이 단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군사교육만 받고 군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들은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사적체현상으로 인해 진급이 더디어지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 매우 많았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당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규 4년제인 육사 1기를 뽑는다고 해 놓고선 막상 졸업할 때는 11기 딱지를 붙여 내놓는 거예요. 2.3.4기도 마찬가지로 12.13.14기가 돼 버린 거죠. 그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6개월짜리 교육밖에 받지 않은 선배들이 우리를 시기하고 못살게 구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전방생활을 하는데 선배들의 질시와 견제가 참 심했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뭉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정규 육사 동창회인 '북극성회'가 있긴 했지만 해가 바뀔수록 숫자는 늘어 덩치만 컸을 뿐 통솔이 잘 안되고 조직력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육사시절부터 축구, 럭비, 송구 등 운동부원들의 신망을 받던 축구부 주장 전(全)씨를 중심으로 소수정예조직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나왔지요."
이와 같이 하나회가 결성된 동기에는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정규 육사생들끼리 단합함으로써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었다. 물론 군과 같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선배 장교들에게 대항하는 조직이 생겨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회의 배후에 박정희(朴正熙)라는 막강한 후견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군부 내에서 육사 8기생들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육사 11기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을 적극 비호, 육성하였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보직과 진급에서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으며, 그 대가로 전두환 그룹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바쳤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유대관계는 1961년 5.16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5월 18일 약 1,000여명의 육사생도들을 모아 광화문과 시청 등지에서 5.16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얼마전 공개된 이낙선(李洛善) 메모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 신분이었던 전두환은 이 날 아침 쿠데타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몇 시간만인 오전 8시에 육사 동창회 서울지부장을 맡고 있던 이동남(李東南) 대위와 함께 육군본부로 찾아가 쿠데타 주체세력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발력을 보였다. 이 날 밤 전두환은 수집된 정보를 취합한 결과 주체세력이 예전부터 손영길(孫永吉) 대위를 통해 잘 알고 있던 박정희 장군임을 알게 되자 적극 지지하기로 하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육사동창회 간부장교들과 함께 독신장교 숙소에 모인 자리에서 "5.16 지지 데모를 벌임으로써 사실상 이번 거사가 거군적(擧軍的)으로 성공했음을 보이자"고 주장하고, 이상훈(李相薰) 대위가 준비한 시가행진 코스, 시간, 구호, 결의문 등을 채택하였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강영훈(姜英勳)은 육사생도들의 시위를 반대하다가, 5월 17일 밤 혁명위 본부에서 박정희, 장도영(張都暎) 등이 입회한 가운데 전두환과 대질신문을 벌이는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로 몰려 즉각 체포되었다. 5월 18일 오전 9시경 약 800명의 육사생도와 200명의 육사졸업생들이 모여 "동대문-광화문-남대문-동화백화점-반도호텔-시청앞" 코스를 따라 시가행진을 벌임으로써,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거군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데 대한 보답으로 전두환은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이 때부터 전두환은 박정희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며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특별한 배려를 받는 호혜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때 형성된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3년 7월 6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육사 11기 그룹은 김종필(金鍾泌)을 포함한 공화당 요인 40여명을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정치기반을 굳히려는 친위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그룹과 박정희의 유대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5.16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전두환 그룹을 특별히 아끼고 배려하였다. 하나의 사례로 1963년 민정이양 당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할 때, 나보고 국회의원 나가라고 하는 것 안 나갔어요. 장도영 사건도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보고 '전(全)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하겠나'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박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끝까지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참신한 육사 출신으로 본 것 같애."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직을 맡았으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도 근무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인사관련부서는 요직 중에서도 요직에 속한다. 전두환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인사자료들을 확보함으로써 하나회 결성에 참여할 후배 장교들을 엄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 등의 공통된 요구가 있었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배려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절 하나회의 결성과 확대
(1) 하나회의 결성
1963년 하나회 결성작업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인선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고 13, 14기 후배들이 뒷받침했다. 선발기준은 한수(漢水) 이남 출신으로서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각 기당 10명 내지 12명으로 정했다. 조직의 명칭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에서 '하나회'(일명 一心會)라고 정했다. 하나회는 초기에 김태환회(金泰煥會)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김복동, 노태우, 전두환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나회의 회장은 전두환이 맡았다. 김복동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다가 패하여 이후 하나회에서 멀어졌다. 조직의 결성방식은 육사 11기 텐 멤버를 본따 각 기별로 텐 멤버를 조직하고 이를 종적으로 통합하여 총100여명을 망라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육사 8기생들의 힘을 견제하고 박정희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출신을 70-80%나 선발한 반면 이북 출신은 배제하였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보안을 강조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입회시에는 반드시 엄격한 자격심사와 복잡한 가입절차를 거쳐야 했다. 육사 11기에서 먼저 각 기별로 최초의 회원 한 명을 선정해서 만장일치로 가입결정을 내리면, 다음부터는 이 한 명을 중심으로 동기생들끼리 텐 멤버를 구성했는데, 이 경우 신입회원은 11기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기들로부터도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입될 수 있었고, 만약 한 명이라도 반대자가 있으면 가입될 수 없었다. 가입대상자로 일단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 가족관계, 교우관계, 졸업성적, 건강상태, 사생활 등에 관해 철저한 뒷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가입권유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입권유를 받은 사람은 이를 '최대의 영예'로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입회식에서는 목숨을 걸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입회식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11기 선배의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마루나 다다미방 같은 곳에서 일렬로 앉아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회장(전두환)이 앉아 있지요. 반드시 혼자 가서 무릎을 꿇고는 '국가와 조직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합니다. 선서가 끝나면 11기 중의 한 명이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줍니다. 두 손으로 그 잔을 받아 마시면 그걸로 하나회 회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비밀리에 조직원을 모집하여 <표 3-1>과 같이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총120여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인맥은 군부와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했다. 하나회 인맥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군부의 상층과 요직을 하나회 인맥으로 채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대상으로 하나회의 후신인 '만나회'와 '알자회' 등을 조직하고 후원하는 것이었다.
하나회 인맥의 이른바 '자리 물리기' 관행은 제5공화국에 들어와 최고조에 달했다. <표 4-6>과 같이 역대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1983년 하나회 출신 중 처음으로 정호용이 이 자리를 맡은 이후 박희도(朴熙道), 이종구(李鍾九), 이진삼(李鎭三), 김진영(金振永) 등 하나회 출신 장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하였다.
[ 표 4-6 ] 역대 육군참모총장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 사 하나회 25 정호용 83년 12월-85년 12월 11기 ○ 26 박희도 85년 12월-88년 6월 12기 ○ 27 이종구 88년 6월-90년 6월 14기 ○ 28 이진삼 90년 6월-91년 11월 15기 ○ 29 김진영 91년 11월-93년 3월 17기 ○
이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핵심요직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표 4-7>과 같이 1980년 이후 역대 보안사령관 9명 중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윤석양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기무사령관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徐完秀)가 임명되었다. <표 4-8>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관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100%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임명되었다. 1979년 12.12사건 때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연행, 해임하고 노태우가 그 자리를 맡았으며, 80년부터 81년까지는 육사 12기의 박세직(朴世直)이 맡았다. 81년부터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최세창(崔世昌), 이종구(李鍾九), 고명승(高明昇), 권병식(權丙植), 김진영(金振永), 구창회(具昌會), 김진선(金鎭渲), 안병호(安秉浩) 등 8명의 수방사령관 전원이 하나회 출신이었다.
[ 표 4-7 ] 역대 보안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 사 하나회 기무 전두환 79년 2월-80년 8월 11기 ○ 기무 노태우 80년 8월-81년 7월 11기 ○ 기무 박준병 81년 7월-84년 7월 12기 ○ 기무 안필준 84년 7월-85년 6월 12기 ○ 기무 이종구 85년 6월-86년 7월 14기 ○ 기무 고명승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기무 최평욱 87년 12월-88년 12월 16기 ○ 기무 조남풍 88년 12월-90년 10월 18기 ○ 기무 구창회 90년 10월-91년 12월 18기 ○ 기무 서완수 91년 12월-93년 3월 19기 ○
[ 표 4-8 ] 역대 수도방위사령관
대 성 명 재 임 기 간 육 사 하나회 수경 노태우 79년 월-80년 8월 11기 ○ 수경 박세직 80년 8월-81년 8월 12기 ○ 1 최세창 81년 8월-83년 6월 13기 ○ 2 이종구 83년 6월-85년 5월 14기 ○ 3 고명승 85년 5월-86년 7월 15기 ○ 4 권병식 86년 7월-87년 12월 15기 ○ 5 김진영 87년 12월-89년 4월 17기 ○ 6 구창회 89년 4월-90년 10월 18기 ○ 7 김진선 90년 10월-91년 12월 19기 ○ 8 안병호 91년 12월-93년 4월 20기 ○
하나회 인맥은 군부 내에서 '만나회'와 '알자회'를 조직함으로써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나회는 육사 21기에서 33기까지 각 기수별로 12명씩 선발하여 비밀리에 조직된 사조직이며, 알자회는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된 사조직이다. 이 두 조직은 구성방식에서 각 기수별로 10-12명씩 선발한다는 점, 운영방식에서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끼리 각종 보직을 주고받는 등 자리 물리기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하나회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강창성은 이 두 조직이 하나회의 후신으로서, 이름만 달리 한 조직이라고 보았다.
육 사 성 명 직 책 계 급 출신지 21기 최승우 육본 인사참모부 소장 충남 표순배 3군사관학교장 소장 충북 강창남 대통령 경호실 (중령) 홍순룡 아랍에미리트 대사 (대령) 서울 이충석 합참 작전부장 소장 서울 여명현 2군 참모장 소장 전북 전영진 국방부 인사국장 소장 강원 22기 유효일 25사단장 소장 서울 박범무 정보본부 해외정보부 차장 준장 충북 최기홍 56사단장 소장 경북 유회국 21사단장 소장 서울 신양호 국방부 지휘통제실장 소장 서울 권기대 부대 관리관 (준장) 오형근 작전참모부 차장 소장 강원 23기 손수태 30사단장 소장 경북 정정택 수도기계화사단장 소장 경북 길영철 사단장 소장 충남 박영일 사단장 소장 서울 오주의 사단장 소장 경북 24기 민병국 육군 본부사령 준장 충북 홍한수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경묵 권중원 국방부장관 보좌관 준장 경묵 윤영정 1군 작전처장 준장 전북 강영욱 육본 작전참모부 처장 준장 전북 유보선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준장 채문기 육군 범죄수사단장 준장 25기 황진하 국방무 정책기획실 차장 준장 충남 진병국 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이상선 군수본부 근무 준장 강창회 국회의원 중령 이상세 욱본PX복지단장 준장 장세영 기무사 권경석 준장 박석조 9공수여단장 준장 유수재 기갑여단장 준장 26기 임문택 군 사령부 참모 준장 이상학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준장 김익성 준장 이기영 육본 대령 최홍규 국방부 시설국 대령
(괄호 속의 계급은 예편자, 나머지는 1992년 기준 계급)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군 내 사조직이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고 장교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1981년 경호실장을 통해 하나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나회는 해체되지 않았다. 6공화국 때도 노태우 대통령은 세 번이나 하나회를 해체하도록 지시했으나,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나회 인맥은 한편으로 군 상층부와 요직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만나회, 알자회 등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1980년대 한국 군부를 장악하였다 1) 10.26과 합동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7년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정세가 조성되었다. 전두환(全斗煥)과 하나회는 그 어느 정치세력들보다도 신속히 이 사건에 대처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국면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2인자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권력다툼은 2인자들끼리 서로 견제시키고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던 박정희식 용인술(用人術)의 결과였다. 2인자들 중에서도 특히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세력이 강했는데,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3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차례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모든 정보채널은 차지철에 의해 사전에 파악되고 차단되었다.
10월말 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등 박정희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다툼이 극도에 달해 자칫 대통령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사실은 10월 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 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어. 김재규, 차지철, 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보안사에서도 진종채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박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에 들어가서 최광수 의전수석을 보고 10월 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대통령 비서실 등 주요 권력기관에서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몰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계통에서는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은 10.26사건을 마치 예견이나 한듯이 신속한 대응을 취하였다. 그는 밤 11시경 국방부 보안사 부대장실에서 김재규 체포 및 호송 작전에 참여하였고, 새벽 2시경 33헌병대를 보안사 직속부대로 배속받아 궁정동 안가로 진입, 경비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27일 오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약칭 합수본부)를 설치하고 그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권력의 공백기에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군부와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수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 그는 보안사 회의실에 각 수사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통고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수집된 모든 정보를 합수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13시간만에 취해진 조치들로서, 너무나 완벽한 대응이었다.
10.26 직후의 합수본부는 단순한 수사전담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림 4-1>과 같이 합수본부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검찰, 헌병 등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장악하고, 3실 3처 1단의 조직구성에 약 5백명의 요원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출신 기관별로 살펴 보면 <표 4-1>과 같이 보안사 출신이 379명으로서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합수본부는 보안사가 다른 수사정보기관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경찰, 행정관료, 정치인, 기업인, 군 장성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합수본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자석에 빨려들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미국측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정보기관에서는 한국의 차기 정권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의 세 사람을 꼽고, 최규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정승화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전두환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이 각각 맡아 빈번히 접촉하였다.
미국측이 평가하기에 최규하가 헌법상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기 편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정승화는 계엄령하에서 3권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반면 전두환은 보안사,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수사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하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함께 합수본부라는 공조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10.26 이후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 표 4-2 ] 10.26 이후 주요 사건 일지
79-80년 주 요 사 건 10. 26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12. 12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12. 21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겸임 발령 4. 21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 15 전국 대학생 연일 대규모 시위 5. 17 비상계엄 전국으로 확대 5. 18 광주민주화운동 5. 27 계엄군 광주시위 유혈진압 (사망자 174명 발표)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상임위원장 전두환) 6. 1 중앙정보부 요원 300명 숙정 6. 24 김종필 모든 공직 사퇴 7. 10 고급 공무원 243명 숙정 7. 15 일반 공무원 4,760명 숙정 7. 19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 연행 7. 31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8. 13 김영삼 정계은퇴 9. 1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 17 김대중 사형선고 10. 22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 10. 27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 11. 12 정치활동규제자 811명 발표 11. 14 언론기관 통폐합 12. 1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12. 2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대회 12. 6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
(2) 12.12와 군부의 세대교체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간부문과 군부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계속 맡아 수행하는 경우이며, 세째는 군부의 강경파가 무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
향후 정치진로와 관련하여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군부와 민간부문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소장군부는 군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심각한 단계에 이른 12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민간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군부정권 연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2.12사건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장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출신 소장군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 상급 장교들을 체포, 연행하고 군의 주도권을 잡은 하극상(下剋上) 사건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군부 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관해 주한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과 선배 육사 출신 사이에는 단층선(fault line)이 있다고 보았다. 군부에 이런 단층선이 있을 때 외부적 환경이 조성되면 변란이 생길 수 있는데 (1961년의: 인용자 주) 5.16쿠데타가 그런 경우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단층선 위에 있는 비정규육사 출신의 상층부만 통제할 뿐, 단층선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장교단이라는 중추부를 컨트롤(control)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전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군의 세대교체작업은 정승화와 김재규 인맥을 제거하고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인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김윤호 장군으로 구성된 '6인 군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업으로 12월 19일 구세대에 속하는 약 40여명의 장성들이 강제 퇴역당했다. 반면 12.12에 적극 참여했던 유학성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으로, 황영시 1군단장은 참모차장으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노태우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김윤호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백운택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정호용 향토사단장은 특전사령관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12.12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은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부 내에 단층선이 형성되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회와 같이 군의 공식적 지휘계통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결사조직이 없었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에 따르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측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 미 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통된 요구에 기반하여 1963년 결성된 하나회는, 16년이 지난 1979년 마찬가지 이유에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