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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사 연구 및 문화 재조명 관련 인물 및 활동
통일신라시대 해양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 위상을 높인 장보고
●확고한 신념, 투철한 정신 갖춘 장보고
한.중.일 동양 3국의 정사(正史)에 장보고만큼 두루 기록되면서도 논란.논쟁.쟁의의 갑.을.론과 의혹의 선상에 오른 인물은 없다. 우리 역사서에서 그는 반역(叛逆)의 인물 혹은 역사의 패자로 취급되었지만, 동시대의 최고 지식인들인 만당(晩唐)의 대 시인 ‘두목(杜牧)’ 과 일본 불교 산문파의 처음으로 시작하여 그 일파의 원조가 된 개종조(開宗祖)인 ‘앤닌’ 은 그를 천하일색 절세(絶世)의 영웅(英雄)과 신라 대명신(大明神)의 큰 신(神)으로 추앙(推仰)했다.
그런 맥락(脈絡), 즉 관계나 연관성에 있어서, 그는 끊임없이 패자부활전(敗者復活戰)을 거쳐 역사에 형상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 환생(幻生)한 ‘제3세력-Third Force의 히어로(Here, 영웅)’ 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질서(秩序)를 파괴하던 당나라 해적(海賊)을 소탕한데 이어 당시 남해무역(南海貿易)과 더불어 세계북해무역(世界北海貿易)을 지배했다. 그의 청해진은 세계 최초의 ‘해양벤처사업, 종합무역상사, 다국적기업, 당시 첨단제품인 신라 청자의 최고 브랜드메이커로서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를 완성했다. 역사 기록의 사각지대를 탐험(探險)하여 《21세기에 왜 장보고인가, 그 사상적 관점에서 신라와 청해진》그의 출신지와 함께 이 해답을 제시해봤다.
건덕암(乾德岩)의 비밀, 복덩이 탄생과 활 쏘는 법을 배우고 익혔던 훈련장, 이로 인하여 〈어질고 귀한 존재〉 로서의 신화창조(神話創造)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국두암(國頭岩)의 전설, 장보고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던, 그리고 〈청해진〉 을 설치해 신라를 방어(防禦)와 무역(貿易)으로 안정적으로 융성(隆盛)하게 했던 일...
이런 장보고에 관련 《장보고의 고장 영암》 으로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장보고는 그가 태어난 곳 전남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의 정기(精氣)를 받아 정신(精神)을 갖춰, 그가 당나라 서주의 군가전략(軍事戰略)과 무역(貿易) 등 각종 사업을 익혀, 완도 장좌리 청해진애서의 국토방어(國土防禦)와 질서유지(秩序維持),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의 중계무역(中繼貿易) 상술(商術)과 개척(開拓)을 한 ‘국보급(國寶級)’ 인물이다.
전술(戰術)이면 전술, 상술(商術)이면 상술, 정치술(政治術)이면 정치술, 협상(協商)이면 협상에 능(能)했던 장보고, 그의 이름 석 자는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있다.
장보고는 한.중.일 무역교류 및 협상, 한.동남아시아 및 한.중 수교, 대한민국 역사에 외교라는 게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중요한 고비마다 현장을 지킨 별이다. 혜성의 스타워즈라고 할까?
그는 천체를 넘나드는 것처럼 곳곳을 찾아다녔다. 대중 외교와 대일 외교, 대동남아 외교를 두루 다루며, 대한민국 외교의 중요한 분야를 모두 섭렵(涉獵)한 거목(巨木)이었다.
그의 대표 업적은 남해와 북해외교의 상업무역교역의 국제적인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가 태어난 선암마을에서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으로 활을 다루는 법과 군사적(軍事的) 지식을 쌓았으며, 그는 당나라 서주의 무령군에 복무하면서 군사전략을 꾀했다. 그런 후 조국인 신라(新羅)에 들어와 완도 장좌리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해 군사력을 통한 방어와 소탕, 무역과 시장 개척 등 국제법 원칙에 따라 개척과 교류했고, 이는 한.중.일.동남아시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그의 제안서가 국제외교의 단초(端初)가 됐다. 그는 특히 청해진 대사를 맡아 신라를 국제적으로 자리매김, 그 위상을 한층 드높였다.
무역에 관련 협상을 할 때 장보고가 “지역 쪽을 바라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라” 라는 협상가다운 상술을 꾀했다. 장보고는 신라국제자유무역을 처음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배짱 있는 협상가로서 그의 면모는 당나라를 통해 드러났다.
장보고는 〈장보고와 나〉 라는 글에서 장보고가 당나라에 가서 무역협상을 제안하며, 신라와 당과의 교류증진을 위한 국제자유무역항을 설치할 것을 고집했다. 당시 청해진 대사였던 장보고는 이 문제로 당나라를 설득하려고 오는 청해진 대사(大使) 장보고를 만났다. 당 측이 합의문 초안을 읽자, “당나라는 어떻게 팔을 비틀어서라도 신라(新羅)와 당(唐) 간 입장을 관철해야 하는가?” 오히려 호통을 쳤다. 면담은 무거운 분위기에 끝났지만, 이후 실무 협상에서 우리 측 입장을 반영한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 이 합의됐다.
만약 장보고 암살당하지 않고 더 생명을 유지, 대사로서 활동을 했다면, 그 대사직을 내려놓고 했다면 그는 아마 오히려 퇴임 뒤 더 활발한 활동으로 대한민국 외교에 기여했지 안했을까 한다. 장보고는 만약 그가 퇴임하면서 이임사에서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오는 인생을 쫓아야 함을 알았다” 고 한 심경을 표했을 것으로 본다.
장보고는 ‘항상 깨어있어라!’ 는 조언을 자주했다. 장보고는 아시아대륙 동북단의 반도에 속하는 우리 신라는 항상 우리보다 크고, 강대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정된 여건 하에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고민에 천착(穿鑿)해 왔는데, 장보고의 외교 노트, 강대국 사이에 낀 대사로서 죽는 것도 사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당나라. 일본. 동남아시아 등 주변의 강대국은 모두 상대해본 그가 한 말이기에 이 말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말도 자주한다. 역사가들은 “장보고는 대한민국 외교사의 지축(地軸)을 고수하며, 당나라 해적 사건으로 시작해 신라와 당 관계의 문을 열고 두 나라 관계 등에서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겼다” 며 “후손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던 ‘외교관(外交官)’ ” 이라고 돌아봤다. 학자들은 대한민국 외교의 가장 큰 별이 이슬처럼 사라져 안타까워했다.
영암 선암에서의 궁복, 당나라 서주에서의 직업군, 완도 청해진에서의 해상무역 놀라운 업적...
가장 존경받는 외교관, 큰 별이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라는 건 학자들로 인하여 학술지에 기술되고 있다.
장보고는 온갖 강대국을 다 상대한 협상가로서 근신(勤愼), 소탈(疏脫), 경청(傾聽), 공감(共感), 진솔(眞率)한 설득을 기반으로 소통했다. 장보고는 기분 나쁘게 이야기를 할 때 오히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표현은 더욱 정중하게 했다. 주변 모두를 편안하게 한 인품(人品)과 그 인품으로 인한 협상력(協商力)은 아무나 번잡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평가할 때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의 ‘군계일학(群鷄一鶴)’ 이라는 표현을 쓴다. 평범한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사람으로 봤다.
장보고는 협상 중에 의견이 잘 맞지 않거나 일이 장 성사 되지 않으면 천천히 일어나 침착하게 방을 나가버렸다. 장보고의 뒷모습이랄까, 나가는 모습에 들어있는 냉정함이랄까, 그러면서도 어딘가 타오르는 애국(愛國)의 불꽃은 숨긴 듯한 그 엄숙함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게 남는다는 청해진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戰略家)로서 협상가(協商家)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다. 지금도 장보고의 전술에 대해 군은 참고서로 탐독(耽讀)한다. 그리고 상업이라는 무역에 대해 기업은 참고서로 지혜(知慧)를 모은다.
●장보고는 월출산 큰바위얼굴
장보고라는 인물상(人物狀), 육척장신의 거구(巨軀)의 건장한 체격이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꽃향기처럼 은은하다. 그의 특유한 언어술(言語術)로 세상을 움직였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영암의 아들’ 이다. 영암 월출산에는 구정봉을 이룬 《큰바위얼굴》 이 의젓하고 근엄(謹嚴)하게 영험(靈驗)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영암과 세계를 지키고 있다. 큰바위얼굴이 ‘장보고’ 인지도 모른다. 큰바위얼굴을 품고 있는 월출산은 영험(靈驗)한 바위들을 한 쪽을 떼서 선암(船岩)마을로 보냈으리라 본다. 그 건덕암(乾德岩)과 국두암(國頭岩)은 선암(仙岩)으로서 신기(神氣)를 발휘한다. 이 신령(神靈)스러운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장보고가 태어났으니.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밖에...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은 ‘펼치다(張). 지키다(保). 나아가다(皐)’ 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고하다’ 라는 말이다. 장(張)은 계획이나 범위를 넓힘의 전개(展開)와 확장(擴張), 넓힘의 팽창(膨脹), 공표의 게시(揭示), 활을 쏘기 위해 당김의 활(弓)로서 장은 활을 당기는 모양으로 갈게 늘린, 즉 활을 크게 편 활을 활시위까지 쭉 당기는 모습이다.
그래서 장을 ‘펼치다. 넓히다. 베풀다’ 라는 뜻이 생겼다. 그렇듯이 장보고는 활을 쭉 당기며 지키고 있고, 그러면서 높을 곳을 향해 고(皐)한다. 이게 장보고의 이미지고 상징성이다. 이런 훌륭한 인물을 영암이 태어나게 했고, 당나라 서주가 키웠다. 그리고 완도 청해진이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탄생시켰다.
고(皐)라는 이름으로 외쳤던 장보고, 그는 해상왕으로 불러질 만큼 바다 제왕으로서 천하를 호령(號令)했다. 그 호령은 기운을 월출산 ‘큰바위얼굴’ 에서 나온 듯 하는 느낌이다. 그 기운으로 그는 당나라 서주 무령군 소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저들을 잡아 처단하라!” 소리 냈고, 그는 또 완도 청해진에서 ‘해상왕국(海上王國)’ 이라는 것에 큰 소리(Shout at)를 내며 질서를 잡았고, 평화로움을 유지하게 하면서 활발한 교역(交易)을 해됐다.
영암, 서주, 그리고 완도 청해진을 통한 신라에서 다시 한 번 세게 평화를 외쳐 됐다. GO! GO!가 아닌 ‘높은 곳을 향하여! 평화와 질서를 향하여! 부강한 신라를 위하여!’ 의 皐! 皐!였다. 활로 지키고 소리치는 ‘장보고(張保皐)’ 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장보고의 국덕진 건국해
장보고에 관련 국두암, 건덕암, 청해진 이 수식어 중 글자 한자씩 빼 조합하면 ‘국덕진’ 이라는 단어로 구성해진다. ‘나라에 큰 진영(鎭營)을 둔다’ 는 뜻이다. 진영을 둔 일은 ‘우두머리’ 를 둔다는 것으로, 청해진의 우두머리 장보고, 영암 선암마을이 장보고를 낳아 나라의 큰 우두머리로 모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건국해’ 라는 수식어를 도출해볼 수 있는데, 건국해는 ‘해상건설국가 신라’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국덕진이가 해상국가 신라를 창조했다’ 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선암마을 사람들은 이미 장보고가 성장해 청해진 대사라는 인물로 부상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을에 있는 바위 이름을 궁복을 얻게 해준 바위를 ‘건덕암(乾德岩)’ 으로, 궁복이 당나라로 배를 타고 가서 큰 장수가 됐다하여 ‘국두암(國頭岩)’ 으로, 청해진에서 큰 활동을 하며 나라에 큰 기여를 하여 큰 인물로 추앙받을 것이라는 예견(豫見)이라도 한 듯이 바위 이름들은 신기하게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배를 정박하거나 부두역할을 한 바위가 있어 ‘선암(船岩)’ 이라 하고. 궁복을 낳게 해준 영험한 비위가 있어, 이 바위들마다 신선(神仙)이 노닌다고 하여 ‘선암(仙岩)’ 으로 부르는 것, 이 바위의 전설은 ‘국덕진, 건국해’ 라는 장보고에 대한 얽힌 이야기로 들린다.
『덕(德)을 쌓으니, 재상(宰相)이 되고, 진(鎭)을 치는 구나』
적덕재상진압야(積德宰相鎭壓也)
덕을 실천하고 쌓을수록 결국 재상(宰相)처럼 국가를 다스리는 책임 있는 위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유화적인 통치사상과 전통적 덕행의 보상 개념을 함께 담는 표현이다. 덕을 닦는 인물이 후세에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건(建)함을 실천하니, 나라(國)가 융성하고, 바다(海)가 평온 하는 구나
건실행국융성해평야(建實踐國隆盛海平穩也)
‘건설로 국가와 시회가 발전하고 바다가 평온해진다’ 는 뜻으로, 건설+실천+국가발전의 연결, 즉 실사구시.이용후생.경세치용.법고창신을 실천의 척도로 제시하며, 현장리더를 실학형 인간으로 제시해 사회 변화를 촉진한다는 취지이다. 이는 국가발전을 위해 실천한 헌신과 노력이 국가를 융성하게 만든다는 취지라고 볼 수 있다.
건국해로 신라 새 건설수요 창출, 경제 성장 동력 지속성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며, 새로운 시장 흐름에 부합한 해양건설 수요를 만들어내는 변화의 원년, 핵심키워드로 삼았다.
장보고는 9세기는 해양시대다. 이제 신라가 나아가야 할 곳은 해양(海洋)으로, 해양에서 인류에게 필요한 자원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국가 간 해양영토 분쟁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예상했던 장보고, 주변에는 해양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판단, 그래서 세계 각국은 해영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해양업무를 관장하는 기구를 확대하는 추세에 있어 만든 청해진, 해양강국 만들려면 청해진부터 강력하게 세우고, 선경지명이 있었던 장보고의 ‘해양굴기(海洋屈起)’ 를 기치로 내건 이래 신흥 프로젝트 등 후속 조치를 신속히 추진했던 신라, 이럴 때 당나라도, 일본도 해양 정첵 본부를 두고, 해양영토를 관장하는 기구를 대폭 확대해 주변국은 보이지 않는 해양해전(海洋海戰)에 돌입했다. 장보고는 이럴수록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원 문제를 해결하고, 인접 국가들의 해양 정책에 적극 대응하고,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생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해양 분야의 경쟁력을 더욱 키워나갔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할 때 해적을 들을 소탕하기 위한 목적을 두었지만, 나아가 국제무역이라는 해양산업에도 손을 됐다. 청해진 정책은 바다를 통한 국가발전의 모든 수단으로 보고, 무엇보다도 해양 분야 국가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며, 전 세계적으로 해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신라도 바다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올바른 해양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런 생각은 당나라 문물을 배우고 온 장보고라는 한 인물에 의해 가능성을 열어뒀다.
청해진이라는 다방면 계획 및 구상과 다목적 비전과 방향을 세우고, 해양 관련 당면 과제를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해양 정보, 해양산업, 해양과학기술 개발 등 해결해야 할 사인들이 많다고 보고, 이러한 과제들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해양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해 보여 대부분 사람들이 해양 지향적 사고보다는 대륙(육지) 지향적인 사고를 하고 있어, 이러한 대륙 지향적인 사고는 청해진 해양 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므로, 해양에 대한 사고를 전환시킬 수 있는 중앙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며, 장보고는 중앙에 건의하고 왕의 특명을 받고 강력하게 해양(海洋) 개척에 추진했다.
“두려운 건 실패가 아닌 사람이다. 사람들이 바다를 두려하면, 바다는 더 높은 파고를 일으킨다” 라며, 바다를 잠재울 수 있는, 그럴수록 해상로를 개척할 전술을 펼쳐 해양 개척으로 ‘해양왕국 신라’ 로 만들어냈던 장보고다.
그래서 그는 운명처럼 〈국덕진 건국해〉 라는 특명 같은, 미션을 부여받아 척척 진행+추진, 완수+성공했다. 그는 이미 태어나자마자 ‘예언서(豫言書)’ 를 받아 손에 쥐었다. 그 예언서대로 그는 실행에 옮겼고, 그 실천은 말이 아닌 행동, ‘희망은 기다림이 아니라 실천이다’ 라고, 목표를 향한 의지와 방법을 찾는 방법으로서의 희망을 쫒았다.
‘인생은 기다림이 아니라 걸어감 속에서 길이 열린다’ 는 수동적 기다림보다 ‘적극적 움직임이 결과를 만든다’ 를 신념을 갖고 신라를 국제자유무역항구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국덕진 건국해를 간추려 ‘국진해’ , 국가 차원으로 진출한 바다라는 뜻이다. 국진해는 국가적 사업으로서의 규모적(規模的)이며, 확장적(擴張的)이다. 세계적(世界的)이며, 글로벌시대를 여는 열쇠이다. 장보고는 이 열쇠의 비밀번호를 쉽게 풀며, 신라문. 당문. 일문과 세계문을 언제든지 드나들었다. ‘열쇠의 비밀을 풀어라’ 는 미션보다 그 ‘열쇠에 비밀을 부여해라’ 라는 미션을 받고, 당나라와 일본, 동남아시아의 문을 개방하며 자유자제로 들락거렸다.
장보고의 예언서, 그가 태어난 곳인 영암 선암에서 그에게 그런 예언서를 쥐어주지 안했다면 당나라 무령군도, 완도 청해진도, 신라 경주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궁복.궁파’ 라는 이름에는 예언서의 내용들이 담겨있다. 궁복.궁파는 특명(特命)으로 기필코 완수하라는 임무(任務)를 부여받은 이름이다.
●큰 별이 지다. 신라가 사라지다
이런 훌륭한 인물이 원대한 꿈을 더 펼쳐보지 못하고, 신라를 중계무역 교류를 통한 해양을 제패한 해양도시 신라, 세계 최고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장보고가 자객 염장, 그를 시켜 잠입, 암삼을 자행한 일로 세계의 해양의 상징, 신라의 큰 별이 졌다. 별이 혜성처럼 사라졌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이 궁복.궁파인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장보고가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을 했다. 특히 교류증진에 앞장선 당과 일본 등은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울분(鬱憤)을 토했다.
“정말 슬픕니다.”
“애석합니다.”
“이 훌륭한 인물을 떠나보냄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기다니요.”
~하며 통곡하고 원통하고 분통하다며, 그를 추모(追慕)했다.
●해외어서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다
장보고의 죽음에 그를 싫어했던 경계했던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대신들이나 귀족층들은, 그의 죽음에 반가워했지만 백성들이나, 그와 무역을 했던 분들은 매우 슬퍼했다. 특히 교역 대상국인 당나라와 일본, 동남아 지역에서는 장보고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통곡했었다.
그들은 애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장보고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믿어지지 않는다며, 매우 애석(哀惜)해하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찌된 일입니까?”
“정말 훌륭한 분인데...”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들은 “장보고는 진정한 중계교역의 전략가였다. 그가 제안한 해양무역교류 사업은 나라에 큰 기여와 발전을 불러들었다. 무역으로 윤택했다. 서로 문물을 교류하여 생활이 한층 좋아졌다. 그것뿐만 아니라 무역으로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훨씬 돈독해졌고 발전 방향으로 진전됐다. 무역은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을 높여줬으며, 그 과정에서 외교.안보.지정학적 선택지도 함께 재편되게 했다. 또한 해양 접근성이 좋아 나라마다 국제무역 혜택을 더 크게 누릴 수 있어 해상로와 군사.경제력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상품.서비스 흐름을 촉진해 나라경제 부가가치와 세계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장보고가 생각하고 추진한 해양무역, 해양 접근성이 경제.군사력에 직결, 해양에 접근하기 위한 나라는 국제무역의 혜택을 훨씬 크게 누리게 해주었다. 그는 국경 없는 자유무역을 추진하려했던 선각자였다. 그런 훌륭한 일을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고 전했다.
이어 “장보고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해양자유주의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며 “남겨주신 귀한 무역이라는 경제적.상업적.문화적 유산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장보고 청해진대사의 불행한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들에게 신라왕과 백성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고 했다. 이어 “신라의 제상으로 신라 사회 각계의 존경을 받아오셨다” 며 “장 대사는 한동안 당나라를 군인으로 근무했고, 대사로서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신라와 당나라관계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고 말했다.
무역관계를 맺은 나라들은 장보고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소개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저는 장보고 대사와 여러 차례 만나 국가대 국가로서 무역 분야에 진지하게 논의하고 협상하며 증진시켰다. 또 나라와의 관계와 국제 및 지역 정세에 대해 심도 있게 의견을 교환한바가 있다” 며 “장보고 대사가 양국 우호를 높이 중시하고, 진정성 있게 헌신해 오신 데 대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고 회상했다.
이어 “현재 양국관계가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양측의 공통된 기대다. 앞으로도 양국 각계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고 강조하면서 그를 그리워했다.
장보고의 서거(逝去)에 애석하는 분들이 통곡을 하고 있는 반면에 일부 조정에서나 중앙귀족들은 장보고의 죽음에 반가는 듯 했으니, 장보고와 관계를 맺은 분들은 그에게 사랑을, 껄끄럽게 생각한 분들은 그에게 미움을 주는 안타까운 신라 사회로 양분화 돼, 이 또한 슬프고, 장보고의 슬픔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장보고의 운명은 예고된 것일까?
장보고가 당나라로 갔던 17세, 귀국했던 40세 이 나이를 합치면 ‘57’ 이 나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장보고는 58세에 사망했다. 사망 시기를 예고(豫告)한 17세에 나라를 떠남, 40세에 귀국함은 보이지 않는 슬픔의 비극(悲劇)을 암시(暗示)했다. 그는 또 청해진 대사 18년이라는 수(數)도 어쩜 그 임기도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사망 나이 58세인데, 그가 당나라 거주 및 군사 재직기간 23년과 청해진 대사 18년을 더하면 ‘41년’ 이다. 41년을 그가 당나라로 갔던 나이 17과 더하면 ‘58’ 이 나온다. 5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장보고는 이미 자신이 근무(당나라 무령군-23년, 완도 청해진-18년)한 기간과 당나라로 떠났던 나이(17년)에서 그의 운명(運命)은 결정된 것으로 해석 또는 유추해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해상무역의 막중한 책무 수행한 장보고
성군(星君)이 성군(聖君)이 된 장보고, 그는 세계 역사상 해상을 통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물건을 서로 팔고 사는 단순한 무역(貿易)을 넘어, 무역을 교두보(橋頭堡)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통신, 정보 등 모든 분야에서 상생 발전하려 했던, 기여를 한 일을 해왔다는 점이 그를 해상왕이니 무역왕이니 한다. 청해진 대사는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조직의 모든 분야를 모아 놓은, 직책을 부여한 것이다. 장보고는 그만큼 중대한 역할로서의 해상무역에 막중한 책무로 수행(遂行)했다.
장보고가 아니었다면, 과연 해양무역을 훌륭하게 진행했을까?
그는 어릴 적부터 이미 해양국(海洋國)을 꿈꾼 아이였다. 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당나라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난한 신라, 혼란스런 신라를 잠시 떠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큰 마음먹고 조국을 떠났다. 가서 훌륭한 장군, 무령군 소장이 돼서 적들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물리치는 일에만 종사하려고 갔던 것이 아니기에 그는 당나라의 정치.사회.문화.예슬 등 모둔 분야를 배우고 익히는데도 노력했다. 전술과 기술을 배워 다시 조국, 신라를 찾아 기여하겠노라고 자신과의 약속을 했다. 다짐한 그는 신라가 당나라의 해적들이 바다에서 온갖 약탈과 신라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판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이상 당나라 군사로 잇을 수만 없어, 그만 조국의 신라로 귀국해 즉시 경주로 가서 왕에서 알현했다.
“전하! 제가 해적들을 소탕하겠습니다.”
“나라의 안정과 해양 질서를 바로 잡겠습니다.”
“군사를 주십시오.”
“군사진영의 청해진을 설치하게 해주십시오.”
간곡히 부탁을 하자. 왕은 흔쾌히 수락했고, 왕과의 약속을 신속하게 실행했다.
청해진대사라는 직책으로 그는 우리가 일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들을 펼쳤다. 지금처럼 군용배도 아니고 상선도 아닌데도, 그는 지금보다 훨씬 못 미치는 목선(木船)을 제작해 해양을 누볐다. 국내 해안을 위한 것만이 아닌 황해, 동해, 동남아 지역까지 해로를 만들어 아주 많은 수의 군사와 군마로 진군만마(進軍만마)하며 출정하고, 기운이 만 길 만큼 뻗은 듯 자랑스러운 기세를 한 기고만장(氣高萬丈)하듯이, 기염만장(氣焰萬丈)하듯이 호기스러운 기세가 넘쳐,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의 끼드득거리며 뽐내는 기운이 온몸에 차서 겉모습에 가득 나타난 호기만발(豪氣滿發)하듯이, 도천지세(滔天之勢)의 큰물이 하늘까지 차서 넘치는 기세로, 세찬기세의 건령지세(建瓴之勢)에 의욕(意慾)에 차, 욱욱의 기세 좋게 일을 마구 밀고 나가는 기세.힘의 발로써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로 세계 바다와 항구(港口)를 내 앞바다인양 드나들었다. 기세 좋게 이기는 ‘승세(勝勢)’ 를 이루었다.
●제품 개발 판매, 기획.디자인.생산까지
장보고위 국제자유무역은 글로벌 무역업계에서는 신라 무역 파트너사들의 위상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해외 본사 제품을 들여와 파는 단순 유통 채널이나, 주문대로 상품을 만드는 생산기지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디자인과 상품 기획을 주도하는 공동기획자(Co-planer)로 위상이 격상됐다. 까다로운 신라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일명 K-스타일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상표권만 빌려 쓰는 라이선스 브랜드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해외 브랜드 정체성 유지를 금기시하던 디자인 전권을 신라 파트너사에 이양하는 사례가 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나라 도자기 회사와 상품제조사들의 협력 모델이다. 중국 도자기를 들어와 팔던 장보고는 이 도자기 제품을 직접 기획.생산해 지난해 국내에서만 반응이 뜨거울 정도로 인기리에 판매되는 등의 놀라운 매출 성장세로 달성하며, 당나라보다 신라가 더 알려지게 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해외 브랜드들이 각국 유통업체에 판권을 주면서도 브랜드 정체성을 이유로 디자인이나 상품 구성엔 손대지 못하게 했던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모델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 모델들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신라 진출 이듬해 매출 몇 백배 수익을 창출했다. 신라는 디자인한 제품을 들고 당나라와 일본 내 주요 상권에도 진출했다.
단순 수입판매 계약을 맺은 신라 기업들도 신라전용 상품을 역으로 제안해 글로벌 라인업에 포함시키고, 당나라와 일본 등지에서 신라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을 출시했다. 신라에서 유행하는 비즈니스 신모델 트렌드와 그 나라에도 취향을 만족시키거나, 생활에 유용하게 쓰도록 하기 위해 현실에 맞은 신라식 물품을 반영한 제품이다. 이 제품들은 신라에서 인기를 바탕으로 전 세계 매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으로 채택됐다.
해외 주문지가 원하는 디자인의 제품을 대신 생산해 주는 신라 도자기 ODM(제조자 개발 생산)을 원하는 업체들의 요구를 반영해 변신했다. 장보고의 해양무역 정책구상이 먹혀들자 신라는 디자인팀을 신설했다. 단순 생산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해외 바이어에서 생기는 간섭 등을 조정하는 역할이었던 신라 내 디자이너들이 늘어난 데 따른 변화다.
과거에는 실제 생산과정에서 생기는 간섭 등을 조정하는 역할이었던 신라 내 디자인이너 팀을 대폭 늘리고, 직접 각 브랜드의 콘셉트에 맞는 제품을 개발.디자인하는 것으로 역할을 확장했다. 당나라 등 대형 판매장의 PB(자체 브랜드) 제품들은 기획 단계부터 신라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보고의 상술은 재주와 기술의 마케팅 전략
장보고의 상술(商術)은 묘술(妙術)이 아닌 장사에서의 ‘재주.기술’ 의 마케팅 전략으로 접근하는 등의 착한 상술로 고객을 오래 붙잡는 장기적 전략을 세우며 진출했다.
그는 시장 소비자 경쟁.소비 등 변수를 종합해 목표를 세우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패턴을 분석하여 사회.경제.정치.기술.환경 요인인 구조적으로 점검해 방향을 정립했다.
이런 일에 조정과 청해진에서는 데이터 수집.분석.예측을 통해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강화시켰다.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면, 기업은 가치 있는 업무에 인력을 집중해 창의성과 혁신을 높였다.
실시간 상호작용과 맞춤형 콘텐츠로 고객 경험을 강화하는 방향이 강조되는 무역의 설계자 장보고의 마케팅은 즉각적 보상과 첨단 기반 개인화로 참여를 유도하는 전략으로 확장됐다.
해외진출을 위한 상품 기획 사례는 신라를 감동의 서사로 승화하고, 기술은 보조 역할에 머물며 브랜드 일관성과 멀티채널 확장을 설계했다.
신라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은 콘텐츠 마케팅의 성공 전략, 평범함의 함정을 넘어섰다.
9세기에 장보고는 이미 신라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열어야할 미래를 예측하고 〈산업혁명시대 왜 마케팅 전략이 중요한가〉 를 제시하며, 그 전략을 실제로 구체화시키는 ‘Into, 기술이 아닌 ’사람‘ 에 주목할 때’ 라며 《전술(戰術)-Tactics》 를 펼쳤다.
장보고는 미래신라까지 준비된 ‘기술의 밥상’ 앞에 놓인 우리는 이를 체하지 않고 모두 소화시킬 준바가 되어 있는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는 기술의 속도, 그로 인해 봇물처럼 쏟아지는 기술과 디자인, 그리고 취향 홍수 앞에 과연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모두가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에 주목하는 가운데, 소비성향이 날로 바뀌고 있을 때, “그 사회를 살아갈 인간의 모습이 걱정되는 것은 나만의 시선일까, 특별히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들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암담할 것이다” 라고 내다봤다. 기술과 디자인이 현실에 펼쳐낼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도통 체감할 수가 없다며, “모바일 신체처럼 작용할 미래는 과연 어떤 세상일까?” 하면서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은 답이 아닌 답을 찾아내는 ‘힘’ 에 있다고 강조했다.
마케팅 전략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내렸던 청해진대사 장보고, 그는 마케팅 전략이란 변화하는 시장과 소비자 경쟁과 취향 등 수많은 비즈니스 변수 속에서 지속적 변화의 탄력적으로 목표 좌표를 찍고 이를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향과 방법론을 의미한다고 봤다. 쉽게 과녁과 화살로 비유할 수 있는데, 비즈니스 마케팅의 목표를 과녁이라 한다면, 과녁을 조준하는 화살의 방향, 그것이 바로 전력이라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 화살을 당기는 사람의 힘과 화살을 쏘는 사람의 당일 컨디션과 심리적 요인 등 수많은 변수들 가운데, 목표를 향해 결정된, 그 방향을 전략으로 이해했다. 그 전략을 실제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전술이며, 아는 그 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에 해당한다는 것, 장보고는 누구인가? 궁복(弓福)이 아니던가? 활을 잘 쏘는 복덩이다.
기술과 인간이 빚는 마케팅 전략을 푼 장보고의 신라의 마케팅 환경은 새로운 기술과 소비자 행동 변화로 크게 진화했다. 기술사업화 수단으로서의 기술마케팅, 개념.전략.과정의 정립 및 시사점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소비자 눈높이, 고객이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키포인트라며, 첨단의 힘을 활용한 마케팅이 활발해,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돕는 굉장히 고도화된 ‘툴(tool, 도구)과 전략(戰略)’ 을 적극 사용, 즉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도구를 어떻게 배치하고, 그 배치가 전체 계획(전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선택기준과 전략적 활용에 따른 업무협업 등 분야별 목적에 맞는 조합을 설계하는 데, 기업들은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알리고 있어, “어떻게 알고 자기에게 이런 것을 보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정보 전달의 밀도를 높이고 있는 등의 그야말로 ‘고객중심’ 과 ‘고객경험’ 을 핵심으로 마케팅 기술이 고도화되고, 레벨업(level up, 지위나 품질.능력 따위를 높임)을 거듭하고 있어, 장보고는 이를 가볍게 보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보고, 관심을 두며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제품을 생산케 하여 수출에 나섰다. 중계무역에 집중했다.
●장보고의 군사기술과 교역기술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신라의 꿈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진급할 정도로 그는 상당한 군사기술이 뛰어났음을 확인해 주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로서의 국토방위와 소탕, 그리고 해양무역이라는 교역기술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그는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정벌하여 대국가 건설하려는 일본의 침략주의의 경향과는 달리, 그는 당나라 해적들을 소통하고 해양질서를 바로 잡고 무역이라는 바닷길을 개척하는 등의 신라 사회와 안보를 어지럽히는 세력들을 물리치고, 신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守護)했다는 것에 큰 업적(業績)과 공적(功績)으로 남았다.
그는 군사기술, 즉 전략에 있어서 당나라에서 익혔던 군사기술, 기술 혁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고, 기술 발전은 군사전략에 새로운 차원을 제공하며, 군사력과 전투 능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전략적 이점을 창출한다는 사고, 따라서 기술 혁신은 미래 군사전략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만큼, 당나라의 군사기술 및 전략을 활용하거나 더 혁신시켜 신라에서는 무기 시스템의 혁신으로 전투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시스템을 통해 인간의 참전자가 피해를 입히지 않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은 군사전략의 새로운 차원을 열고, 군대와 효율성과 생존력을 향상시켰다. 또 통신과 정보 기술로 군사 정보 수집과 전달에 큰 역할을 하게 했다. 실시간으로 전술적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통신 등 이이지 분석 기술의 발전은 위험 지역에서의 정보 수집과 정확한 목표 파악을 가능하게 했다. 아는 군사전략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정보 공간에서의 기술 혁신은 정보 전쟁과 정보 보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신라 방어에서 정보 공격은 국가와 허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군사 정보를 탈취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히게 했다. 정보보안 기술의 발전은 군사전략의 새로운 차원을 열며, 군대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게 했다.
장보고는 기술 혁신은 미래 군사전략에 있어서 절대적인 필요성을 지닌다고 보고, 새로운 기술 도입과 발전은 군사력의 향상과 전략적 이점을 창출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 혁신에 투자하고, 연구와 개발을 촉진하여 ‘군사전략적 우위(優位)’ 를 유지하게 했다. 장보고는 미래 전쟁은 기술의 경쟁이며, 그에 대비하는 군사전략은 ‘기술혁신(技術革新)’ 을 중심으로 구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보고 등장, 청해진 대사로서의 역할, 군사력과 무역력은 안전한 나라, 질서를 회복한 나라, 경제부흥을 일으키는 신라로 부상하며, 한반도와 바다, 세계를 호령(號令)했던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신라 창해진에서의 진영(鎭營)은 단순한 전투 집단이 아닌, ‘국가의 존명(存命)’ 을 책임지는 핵심 요소였다. 신라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었던 경제력, 지리적 이점, 그리고 문화 기술의 융합, 신라의 군사력은 무엇을 기반으로 했을까? 그들의 힘은 단순한 숫자에 있지 않았다. 강력한 무기, 숙련된 병사, 그리고 뛰어난 전략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력이 뒷받침 되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이라는 진영(鎭營)을 국제자유무역의 역할을 띠게 했다. 당나라와 일본, 동남아시아로 중계무역을 하게 하면서 자금(資金)을 마련했다. ‘군사력은 곧 경제와 안보를 튼튼하게 한다’ 라는 철학과 신념을 갖고, 〈군사력+경제력=신라발전〉 이라는 등식(等式)을 성립시켰다. 그러면서 신라를 〈튼튼한 나라, 발전한 신라〉 로서의 국제적으로 위상을 드높였다.
●청해진의 지리적 이점과 군사적, 해양무역 활용
섬인 완도, 청해진은 드넓은 대양과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해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방어(防禦)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기습 공격에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섬을 활용한 방어 전략은 외부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무기는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된 기술력을 보여줘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무기가 개발되었다. 칼,창.활과 화살.갑옷 등은 신라 군사력의 핵심을 이루었다.
신라 군대는 체계적인 조직과 엄격한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유지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와 각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 조직이 있었다. 병사들은 활쏘기, 말 타기, 검술 등 다양한 훈련을 받으며 실력을 향상시켰다.
신라는 다양한 군사전략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한 활의 과시가 아닌, 지형과 상황을 고려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신라의 전략은 현대의 군사전략에도 시사를 한바가 크다.
신라는 바다를 활용한 방여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섬은 적의 침입을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병사들은 섬 안에서 안전하게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특히 해안에 위치한 섬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 역할을 했다.
신라는 기마병을 활용한 기습 전략에도 능했다. 기마병은 빠른 속도와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공격했다. 특히 넓은 바다에서 병사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신라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교력(外交力)’ 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변 국가와의 우호적(友好的)인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적인 협상(協商)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외교력 우위를 확보하기도 했다.
신라의 군사력은 고대 한반도와 당나라, 일본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군사력은 주변 국가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으며, 신라의 문화와 기술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신라의 군사전략은 후대의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대한민국 군사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신라의 군사력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그들의 지혜로운 전략과 강력한 정신력은 현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신라의 군사력을 재해석하여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 해결에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섬과 바다를 활용한 방어 전략은 현대도시 방어 시스템 구축에 영감을 줄 수 있으며, 기마병이나 해군병을 활용한 기습 전략은 현대 특수부대의 전술 개발에 참고할 수 있다.
장보고의 청해진, 신라의 군사력은 강력한 무기, 숙련된 병사, 그리고 뛰어난 전력의 조화였다. 여기에 해양무역이라는 것까지 포함하면 그들의 군사전략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하거나, 해양로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군사비를 마련한 무역, 무역을 위한 청해진
군사력은 경제와 안보를 함께 강화하는 청해진, 경제안보 관점에서 이해할 때 가장 효과적이기에 군사비는 기술.산엽.공급망을 통해 경제에 파급효과를 주지만, 동시에 재정 부담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고안한 게 청해진이라는 진영을 위한 해양무역까지 손을 댔다. 군사력은 무역을 도왔고, 무역은 군사력을 키운 상부상조의 Win-Win이었다.
군사력을 위한 군사비는 인건비.무기.R&D.인프라,동맹 활동비로 구성되며, 방산 산업과 제조업 공급망, 고용까지 연결된다. 특히 군사 R&D는 GPS.통신 등 민간 기술로 전환되는 사례가 많아 기술 혁신의 촉진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군사비 확대는 재정부담. 사회복지 축소, 부채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많이 쓰면 강해진다는 단순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다.
경제는 군사력의 하드파워 기반을 만들며, 경제안보는 경제적 문제가 국가의 존망(存亡)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으로 확산된 개념이다. 에너지.식량.자원.첨단기술.공급망 등 경제 전반이 안보의 핵심 축이 되며, 공급망 재편과 기술 보호가 안보정책과 연결된다.
군사비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수작인 지출이지만, 동시에 국가 경제의 구조, 성장률, 산업구성, 재정 안정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국가에게 군사비 확대는 가술 혁신과 일자리 창출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국가에게는 재정 부담, 사회복지 축소, 국가 부채 증가로 이어지는 양날의 검이다. 즉, 군사비는 단순히 많이 쓰면 강해진다는 식의 직선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가의 경제적 체력과 산업 구조에 따라 지출은 경제 성장의 기제(基劑)가 될 수 있다. 기술혁신의 촉진과 국제무기 거래를 통한 수출 증가를 불러들이지만, 국가 재정 부담과 부채 중가를 낳는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군사진영인 청해진의 역할을 방어(防禦)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청해진을 통한 무역에도 역할을 띠는 청해진으로 활용하게 했다. 청해진을 운영하거나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거기에 들어간 예산지출이 늘어나 나라 재정 고갈에 영행을 끼쳐 나라 살림에 어려움이 따르게 됨으로, 고안한 것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키우는 방법으로 ‘군사와 무역’ 이라는 사업을 함께 펼치게 된 것이다. 만약 청해진이 군사에만 치중했다면, 치중한 만큼 늘어나고 지출된 군사비로 나라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안 장보고였기에 그는 군사력도 키우면서 동시에 경제력도 키울 수 있는, 경제도 키우면서 군사도 키울 방법에는 〈군사+무역=윈윈〉 이라는 등식(等式)과 함수관계(函數關係)를 성립시켰다.
장보고는 군사력을 키우려면 ‘경제력’ 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 경제력은 ‘국제무역’ 으로 해상로를 확보.개척 내지 장악.독점해야 한다는 집념을 가졌다. 청해진이 무역을 하지 않았다면, 장보고가 방어에만 그쳤다면, 과연 그는 또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남게 됐을까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장보고의 보는 지키려는 보(保)다. 그는 그 보가 보물의 보배의 ‘보(寶)’ 로 기억되게 했다. 군사력(진영)과 경제력(무역) 함께 펼쳤기에 그는 보고(保皐)이면서 보배(寶배)다. 그는 보(保)로 부르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보(寶)’ 를 불러들이는 일이 됐다.
●영암 선암 사나이 장보고
만약 장보고가 바다가 있는 영암 선암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해상무역왕(海上貿易王) 장보고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완도 앞바다 섬, 장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데, 장보고는 ‘궁복.궁파’ 라는 이름으로 ‘영암 선암 바다’ 의 물소리를 듣고 태어나, 바다의 바람을 쐬며 자랐다. 그는 선암에서 바라보이는 저 멀리 우뚝 선 ‘월출산’ 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신당청(신라.당나라.청해진)이라는 청사진을 그려내며, 그 청사진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차근차근 꿈을 향해 나아갔다. 당나라 서주 군사력 강화에 이어 ‘완도 청해진 안정질서 강화, 신라 국제자유무역항 설치 및 해양도시 건설, 신라 국운융성 실현’ 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내며, 지휘(指揮)했다.
장보고는 그가 태어난 곳 마을 주변의 산이 삼한시대부터 군사를 훈련시키며, 방어진지(防禦陣地)로 삼았다. 마을 뒤로는 군사시설이 있었고, 마을 앞에는 바다가 해로를 열어주며 대륙에서 해양으로 진출무대로서의 역할을 띠었다. 선암마을 인근 산인 활성산.궁성산은 성(城)과 함께 ‘궁사수(弓射手)’ 들의 훈련장이 있었다. 장보고는 이런 지역적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집 앞으로 보이는 월출산의 위풍당당함을 보고 기개(氣槪)를 키웠지 않는가 한다.
월출산은 ‘큰바위얼굴’ 이 있는데, 그 거대한 사람 얼굴바위는 선암을 굽어보면서 세상을 향한 평화(平和)와 번영(繁榮)을 갈구하고 있지 않는가 싶다. 장보고는 선암에서 월출산을 올랐고, 올라 너머 완도 등 서남해로 시선을 주시했다. 당나라까지도 그 시선을 보냈고, 일본에도 시야를 넓혔다. 선암마을에서의 월출산은 섬처럼 바다 위에 떠있는 그림이다.
노아는 유명한 항해를 마치고 산에서 안전한 정박지를 찾았다. 구약학자들은 에덴이 큰 강의 발원지였기에 산이었을 것으로 추장하기도 한다. 거룩한 동산인 에덴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에서 그곳으로 모여들고, 그 땅에서 직접 좋은 음식을 먹으며 쉬었다.
푸른 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꿈은 ‘개인의 내면의 생동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전망’ 을 상징한다. 그런 꿈을 꾸었던 장보고, 산은 대개 인생의 도전과 여정을 상징하기에 산을 정복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 시기를 나타내며, 그 정상에 서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한다. 반면 바다는 감정과 무의식의 상징으로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 을 의미한다.
산의 의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성장’ 을 상징하고, 바다의 의미는 감정적인 안정, ‘새로운 기회’ 및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나타낸다.
●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꿈
목표의 달성의 기쁨, 감정적 전망, 새로운 기회의 발견을 암시한다. 장보고는 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의미함으로 생각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하며 성장해 나갔다. 장보고는 이런 꿈을 꾼 뒤 그는 당나라 이민, 청해진대사 등 새로운 기회를 탐색했다. 자신의 목표를 재정립하고, 감정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귀 기울였다.
산은 주로 인생의 도전과 개인적 성장, 목표를 향한 노력의 상징으로 여겼다.
넓고 깊은 꿈의 바다.
바다는 넓은 세상, 깊은 심성의 상징이다. 꿈과 희망을 뜻한다.
넓은 세상, 바다를 알려 주어라. 유대인의 교육관 가운데 많은 공감을 얻으며,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자녀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얼려줘야 한다 라는 단순한 결과물을 넘겨주는 것보다 원리를 알려주고, 자립심을 키워 어린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있도록 해야 한다는 충고다. 시대가 흘러 이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바다를 알려줘야 한다 라고 바다를 알려주고 있다.
산과 바다, 산의 상징성은 ‘자연의 위엄, 신성, 장수, 창조의 힘’ 이다.
바다는 ‘넓고 깊은 세상과 자유.변화’ 를 상징한다. 넓은 세상과 깊은 심성, 꿈과 희망을 뜻하는 바다는 광활한 넓이와 깊이로 자유를 상징하고, 끝없는 가능성과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무한한 가능성과 미지(未知)의 세계, 삶의 변화와 큰 전환점을 상징한다.
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꿈’ 은 새로운 단계로의 ‘이동과 도전’ 을 의미한다. 바다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익히고, 넓은 세상을 알게 하는 상징으로 제시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지리적 환경 때문에 바다에 대한 논의가 많은 편이다. 바다는 ‘크고, 넓고, 깊다’ 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인식은 〈끝이 없다〉 는 말로 극한 되어 버리기 쉬웠다. 그런 바다는 감히 넘나볼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다는 이상적인 공간, 혹은 현실에 대한 도피처가 되었다. 바다는 더 이상 미지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고, 바다를 경험한 이들은 바다의 변화무쌍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바다를 보기를 희망의 공간으로 봤다.
바다는 감정과 무의식의 상징으로, 이는 새로운 시작이나 잠재적인 기회를 나타내기에 장보고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겼다.
산과 바다는 고도의 높이와 확장성.무한함의 넓이를 함께 상징하며, 문화.에술.지명.관광에서 대비.조화의 이미지로 자주 활용된다. 또한 자연의 풍요와 생계의 기반을 제공하는 〈생산적. 자원〉 으로도 해석된다.
인산인해(人山人海), ‘한 곳에 사람이 매우 많이 모여 산과 바다처럼 북적인다’ 는 뜻이다. 인파(人波)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움직일 때 바다 물결처럼 보인다’ 는 뜻이다.
예술의 낭만주의 풍경에서는 산과 바다를 대비적으로 그려, ‘숭고함’ 과 인간의 ‘존재’ 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언급된다.
아마 신라는 ‘in산in해’ , 라는 관광 브랜드로 ‘아름다운 자연의 도시 신라를 찾는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이룰 정도로 많이 모이길 바르는 희망을 담았다. 신라는 장보고라는 한 인물을 내세워 신라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모두 반영된 〈in산in해〉을 활용해 신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이룰 정도로 많이 찾기를 바랐다.
선암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월출산보다, 월출산바다의 산과 바다는 인산인해로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든 모습’ 이다. 사람이 한곳에 많이 모였을 때 마치 그 모습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는 비유의 표현, 인산인해가 바로 월출산 서해바다였다. 장보고가 월출산과 바다의 관계를 신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관광 브랜드 의미처럼 인산인해를 이루게 될 것으로 믿고 그는 선암에서 당나라로, 당나라에서 다시 신라로 바다를 통해 왔다 갔다 했다.
장보고는 ‘월출산을 보다’ 를 ‘월출산을 바라보다’ 라고 했다. 영암바다의 저 편에 우뚝 선 월출산이라고 여기며, 꿈을 꾸었다. 바다의 꿈을... 그 꿈은 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꿈으로, 장보고는 당나라에서의 장수(將帥)를 이뤘고, 완도 청해진에서 대사로 임하면서 ‘해상왕(海上王)’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이미 예견된 일로 그가 태어난 고장, 영암 선암마을에서의 바라보이는 월출산을 쳐다보는 일이 잦아, 그런 꿈은 꿀 수밖에 없었다. 월출산 구정봉의 〈큰바위얼굴〉 이 바로 ‘장보고’ 를 상징하는 〈이미지메이킹〉 이 아니던가? 큰바위얼굴은 장보고에 대한 얼굴로서 장보고의 외모.태도.행동 등을 의도적으로 설게.관리해 긍정적인 인상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내외적 이미지를 조화롭게 다듬는 포괄적 활동을 나태내주고 있다.
●장보고의 신당청
신당청은 영암 선암에서 시작해, 당나라 서주에서 자신을 가꾸고, 완도 청해진에서 완성품을 만들어낸 ‘신(新).당(唐).청(淸)’ 이다. 그런 훌륭한 인물이 성군(聖君)에서 불빛을 더 이상 밝히지 못했으니, 애석(哀惜)함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진정 사라져야 할 사람은 장보고가 아닌, 자신의 힘과 권력, 지배력을 과시하며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태도로 기세등등(氣勢騰騰) 군림한 ‘대신(大臣)과 귀족(貴族)’ 들이다. 장보고를 평민(平民) 출신이라고 업신여겼던 분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라는 발전하지도 못했고, 크게 번영(繁榮)하지도 않았다. 후진성(後進性)을 면하지 못했으며, 정치.사회는 타락(墮落)했다. 상류층들이 판치는, 끼리끼리 해먹는, 자기 혈통들로 이루면서 좌지우지한 그런 세력들이 ‘영원한 신라’ 로 만들지 못했다. 신라의 패망(敗亡)을 하게 된 것은 왕족과 결탁하며 군림한 그들이었다. 대신과 귀족... 진골(眞骨,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왕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 사람).성골(聖骨. 부모가 다 왕계인 사람) 혈통(血統)에 따라 구분한 신분제도의 ‘골품제도(骨品制度)’ 가 결국 신라를 망쳤다.
●신라의 존재, 장보고 때문이다
장보고는 나 때문에 신라는 존재한다.
귀족들은 우리 때문에 신라가 존재한다.
서로 자신들이 신라의 존재성(存在性)을 자신에 의해 그런 거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둘 다 맞다. 하지만 진정 신라를 더 존재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장보고〉 가 아니었는가 한다. 평가는 역사가들이 하겠지만, 모든 면을 살펴봤을 때 분명 신라 존재는 ‘장보고’ 가 큰 일조를 했다고 본다. 그가 왕족계(王族契)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점을 던져본다. 또 귀족들이 견제(牽制)가 있었을까 하는 반문도 해본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세력들에 의해 더 이상 꿈도, 삶도 허망하게 되어버렸다. 사라진 별이 되어버렸다.
존재,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을 위한 신라 존재성을 외쳤던 분들이고, 유지하려 했고, 신라 존재가 자신들 때문이라고 착각(錯覺)에 빠졌다. 장보고는 자신보다 ‘우리, 나라와 백성’ 을 위한 존재성을 키우며, ‘영원한 신라로서의 존재’ 하기를 바랐다.
장보고의 존재, ‘영암 선암과 당나라 서주와 완도 청해진’ 이 존재(存在)한다. 어떤 능력을 지닌, 독특성이나 가치(價値).능력(能力)을 갖고 있음으로써의 자립이 인정되는 일의 ‘위대한 존재’ 로 남고, 기억(記憶)된다.
●제로신라 지속 가능성을 개선한 장보고
장보고는 제로신라에서 중장기적인 확장(擴張) 정책은 신라 정치.경제.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라가 청해진대사를 통해 그런 빙식으로 지속적 왕족은 물론 귀족, 그리고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위축(萎縮)과 추락(墜落)이라는 디플레를 멈출 수 있었다.
이렇듯 선진국에서 확장정책과 재정적자에 대한 관용은 점점 커지는 분위기에서 장보고는 재정적자를 나쁘게만 보지 않고, 장래의 성장과 복지의 증진으로 이어지는 적자(赤字)는 좋은 빚이라 할 수 있다며, 좌파(평민)는 확장정책 및 재정, 우파(상류층)는 재정 건전성을 선호한다고 보는 것도 고정관념으로 봤다. 좌파도 등 떠밀려 긴축하고, 우파도 기꺼이 재정을 풀어 제쳐 추진하는 일에 균형추로 장보고 나름의 정책으로 사업박차를 가했다. 그런 장보고의 확장정책 및 재정정책에 반기를 둔 사람들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고, 그로인해 장보고의 확장정책 드라이브는 멈추고 말았으며, 결국 그는 ‘나라로부터 제거(除去)’ 라는 비참(悲慘)한 생을 마치게 된다.
사실, 신라가 망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불황에 견디려고 저축. 재물을 늘린 귀족들과 투자처를 못 찾아 움츠린 신라의 자기방어가 민간부문의 과잉 유동성을 불러온 덕이 컸다. 디플레가 재정적자의 원인이 됐다. 그런데도 자신의 문제를 제다 장보고 탓으로 돌리고, 왕에게 아뢰어 장보고를 제거했다. 장보고가 해양무역으로 부(副)를 축적(蓄積)하고 있고, 세력(勢力)을 키우며 신라에 좋지 않은 영향과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하면서...
귀족들은 장보고의 해상무역을 평가 절하(切下)했다. 아니 그리 못마땅했다.
●장보고의 사업에 못 마땅한 귀족들
왜!-Why, 무엇-What 때문에, 이유-Reason가 뭐야! 왜 그럴까? What's wrong with you라고 의문을 제시하며 궁금하게 생각한데, 장보가 추진하고 있는 청해진에 ‘국제자유무역항(國際自由貿易港)’ 을 두어 펼치는 해상무역(海上貿易) 사업은 나라의 물건을 해외로 파는 일이었지만, 장보고 자신의 이익(利益)의 잇속만 챙기기 위한 것이라며, 왜곡(歪曲)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왕가(王家)에 안 좋게 나돌게 했다. 나쁜 장보고로 인식되도록 안 좋은 소문들만 퍼뜨렸다. 조정(朝廷)에서나 중앙귀족(中央貴族) 사회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사실로 받아들었다. 소문은 확대됐고, 그 소문은 분노(忿怒)를 자아내게 했다. 결국 해상왕국을 꿈꾼 해상왕, 무역왕 장보고를 불신하며,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더욱이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려한다는 말도 있어 기분이 나빴고 경계를 했는데, 자신만을 위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기 위해, 세력(勢力)을 키우려고 무역으로 부(副)를 축적한다는 말에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꼭 견제세력(牽制勢力)이 있는 법, 역시 신라사회에서도 경계를 한 시기와 질투, 견제와 억압(抑壓)이 심했다. 그들의 자행으로 장보고는 미운 상대로 낙인(烙印) 됐다. 그 견제는 정면으로 측면으로 다방면에서 그를 쳐 됐다.
“장보고는 우리의 적(敵)이다.”
“장보고는 나라의 해(害)를 끼친다.”
이런 해괴망측한 말들로 장보고를 공략했다.
천하의 장보고여도 귀족세력과 맞서는 일은 힘이 부쳤다.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로지 신라 골품제도(骨品制度) 개선 또는 타파를 위해서와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해양무역이 순탄하게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며, 자신의 파워를 키운 일이었다. 딸의 배경을 믿고...
●장보고는 이로움만 보고 의로움을 잊지 안했다
장보고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의 ‘이로움을 보고 의로움을 잊는다’ 라는 말은 잊어본 적이 없다. 항상 깊이 새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보면, 옳은 것에 대한 의로움을 잊어버리고, 그 사익만을 쫓게 되는 일은 절대 하질 안했다. 그는 이익에 앞에서는 상식적이지 못할 정도의 뻔뻔함을 가지는,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고, 체면을 차리거나 창피함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장보고가 아니다.
그는 ‘견득사의(見得思義)’ , 어떤 이익을 접하면 제일 먼저 의로움을 생각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언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접하면,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오래 전 약속을 평생토록 잊지 말아야 한다』 라는 뜻인데, 공자가 한 말을 제자들이 논어에 적어둔 글로써 이 말을 장보고는 깊이 새기면서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잊는다’ 라는 〈견리망의〉 의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해상무역 사업을 벌었다.
장보고는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자신을 희생하고 앞으로 이끌기 보다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만을 더욱 더 생각하면서, 국가의 백년대개를 생각해야 하는 ‘의로움’ 보다는 눈앞에 있는 이익만을 생각해서 일을 보는 경향이 많은데 반면에 오로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장보고로, 장보고를 위한 것이 아닌 신라를, 가족을 위한 것에 아닌 백성을 더 생각하면서 이로움을 봐 의로움을 잊는 일을 하질 안했다.
●장보고의 선과 악
장보고는 자신에게 이익 되는 것이 선(善)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이익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쟁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불안의 원인은 온갖 편법과 부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의 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도덕이 위기에 처해있었다. 자신의 결정이 도덕적이라고 호소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호소는 타협적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그들의 표현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자의적인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쓰여 지는 일종의 도덕적 수사학이 되어 버렸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극히 폐단(弊端)이라고 본 장보고였고, 그는 그런 일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조정과 중앙귀족들을 향한 개혁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다.
장보고는 자신에게 이익 되는 것이 ‘악(惡)’ 라고 봤다.
신라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 이라는 〈심미적 주관주의〉 로, 사회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관료적 합리주의〉 로 양극화되어 사회는 정체성이 모호한 인간을 양산한다고 비판했다.
인간의 탐욕은 역사에서 진실을 배우고, 교훈을 얻기 보다는 역사의 단죄를 피해가는 교활(狡猾)함을 배우기 때문에 정당한 사익(私益)의 추구가 아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익이 만연한 시회가 되고 있다. 근데 장보고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던 것
정의(正義)는 개인적인 유익함보다 ’사회적 유익함‘ 을 지향한다고 했거늘...
인간의 내적 도덕심이 사회적 이익 추구와 겹쳐질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고, 사회적 이익은 뒷전이다. 그러나 사회적 이익은 인간이 항상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적 이익을 실현하는 정의가 개인에게도 이익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의 국가정책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어 사회적 편익이 개인 이익으로 고르게 배분되어야만, 도덕적 선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장보고는 정의가 가치관의 최상위에 위치해야 하며, 정의를 깨닫는 지혜를 구하고,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면서 정의구현에 앞장섰다.
이익과 유익, “이익(利益)은 자신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요. 유익(有益)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이다.” 장보고가 남긴 한마디에 고개가 숙여진다.
●유익공동체 정신을 가진 장보고
웅덩이에 붕어 두 마리가 같이 살았다. 한번은 A라는 붕어가 생각하기를 “B가 없어지면 나 혼자서 이 웅덩이에서 자유롭게 살고, 또 먹이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을 거야” 라는 욕심이 생기자, 상대인 B붕어를 물어 죽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죽은 붕어는 썩기 시작해, 결국 썩은 물을 먹다가 A붕어도 죽고 말았다. 공멸(攻滅)한 것이다. 그런 진리를 안 장보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려하질 안했다. 남을 생각하며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榮位)하려는 ‘유익공동체-Gemeinschaft’ 를 실천하는 그였다.
진정 사익을 가진 사람은 같은 혈통을 한 그분들인데, 그들은 ‘이익공동체-Gesellschaft’ 인데, 유익공동체를 추구한 장보고를 처단했다니...
“신라의 정의는 사라졌구나!” 라고 통탄했을 장보고의 눈물이 강물을 넘치게 했지 않나 한다.
정말 화(禍)가 치민다.
역사 앞에서 통곡(痛哭)하고 싶다.
해상무역 사업, 정의에 입각해 추진한 선(善)의 사업이다. 그럼에도 그를 신뢰하지 않고, 자꾸 그의 사업에 방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방해공작은 결국 비참한 장면으로 연출됐고, 그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연출된 모습들은 신라의 단면을 보여준 일로써 가슴 아픈 일이었다.
‘큰 별이 지다.’
1막 1장에서 2막 3장에서 그만,
신라는 붕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인간 장보고는 사라졌지만, 그가 태어난 영암 선암, 그가 군 생활을 했던 당나라 서주, 그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완도 청해진은 역사에 묻혀 진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요, 그의 혼(魂)과 흔적(痕迹)은 지금도 세상에 위대한 인물로 조명(照明), 빛을 발하며 우리의 가슴에 더 깊이 파고든다.
장보고, 그는 우리 곁에 떠났지만, ‘궁수자리(弓手자리)’ 로서 언제나 밤하늘에 반짝인다.
●선암궁복 신라장보고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선암궁복 신라장보고’ 라는 신조어가 뜬다.
선암궁복은 배(船) 바위(岩)에서 활(弓)을 잘 다루는 복(福)덩이(인물)가 당나라로 떠난 것을 말한다.
신라장보고는 신라(新羅) 확장(擴張)정책을 펴면서 나라(國)를 지키(保)라고 부르지는 소리(皐)를 냈다는 것을 말한다. 장(張)은 범위.규모.세력을 넓힌다는 ‘확장(擴張)’ 이요, 보(保)는 위험이나 곤란 따위가 미치지 않도록 보살펴 돌본다는 ‘보호(保護)’ 요. 고(皐)는 풍요로움과 넉넉함의 밝은 달을 불러들인다는 5월 음력을 의미한 ‘고월(皐月)’ , 또는 일이나 기세 따위가 크게 일어나 잘되어 가라고 높은 곳으로 향하여 외친다는 ‘고창(皐昌)’ 이다.
지금 영암 선암마을에는 궁복을 낳고, 장보고를 키운 마을에 대해, 마을에서는 그를 영웅(英雄) 또는 제왕(帝王)으로 모시고 추모한다. 완도 청해진에서는 그를 기리는 동상, 전시관 등 문화시설들로 우리의 기억에 더 오래 남게 한다.
장보고와 청해진, 〈보해진미〉 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장보고의 ‘보’ 와 청해진의 ‘해’ , 청해진의 ‘진’ 에 ‘미’ 를 조합한 ‘보해진미(寶海珍味)’ 다. 보해진미란 ‘보배로운 바다, 진귀한 음식의 맛’ 이라는 뜻이다. 장보고로서는 바다가 보배롭게 여길 수밖에 없으며, 그 바다를 통해 얻은 맛은 진귀하고 고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보배진미를 즐겼던 장보고는 그가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에서부터 그 보해진미에 매력을 느꼈고 또 누릴 것이라는 예상(豫想)을 했다.
또 ‘장고청진’ 이라는 사자성어를 낳는다. 장성하고 청청해진이라는 뜻의 글자 한자씩을 딴 글이다. 장성의 ‘장’ 과 장성하고의 ‘고’ , 청청의 ‘청’ 과 해진의 ‘진’ 을 딴 것이다. 장고청진은 한문으로 장고청진(長高淸振)이다. ‘기운이 씩씩하고 힘차다’ 라는 뜻의 장성(長成)이며. 형상이 맑고 깨끗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청직(淸直)으로서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게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청진(淸振)이다.
보해진미, 장고청진이라는 장보고에 대한 수식어는 푸른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며 그 산과 바다의 의미를 담아 드러낸,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친 ‘장보고’ 임을 강조한다.
●바다의 神 장보고, 파도 되어 춤춘다
안타깝게도 장보고가 살았던 그 시절에는, 그가 태어난 선암에는 바닷물이 출렁거렸을 텐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의 혼을 느끼게 한 바위와 배를 정박했다는 말뚝이 그의 활동을 더듬어보게 하면서 그를 잊지 않게 한다. 다행인 건 아직도 그가 활동했던 완도 등 바다는 넘실넘실 출렁인다. 춤을 추듯이 파도친다.
장보고의 혼(魂)이 물결이 되어...
장보고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처럼....
장보고가 그립다는 마음하며...
출렁이는 바다는 이릴 적부터 장보고의 몸을 적신 물이다.
그 바닷물은 서해, 동해, 남해, 황해, 대서양, 태평양 등으로 순환한다.
그 물들은 어디 선가에서는 잠시 물거품을 내면서, 잔잔한 평온 상태를 보이면서, 때론 여울지기도 하면서, 파도로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며 장보고의 혼이 담긴 성수(聖水)로 또 다른 흔적을 남긴다.
‘파도여 춤을 추어라’ 파도는 몸부림을 치면서 머리를 헤친다.
가수 김추자의 노래 ‘파도여 춤을 추어라’
파도여 슬퍼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마라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이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장보고의 파도소리가 노래가사처럼 서러워하지 않는,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는, 침묵을 비추는, 드높아라 파도여 하는 외침이다.
장보고와 함께 춤을 추는 파도들,
파도들이 춤을 추네요
한 마음으로 흔들리며
바다의 품에 안기어서
장보고와 함께 추네요
파도의 춤은 아름답다. 푸른 바다를 물들이며, 사랑의 감성을 품어서 하나가 된 마음을 느낀다. 함께 춤추는 파도들,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으로, 더 깊은 사랑의 바다를 향한다. 장보고소리와 함께 춤추는 파도가 멋지다.
바다를 동경하는 나,
바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물결이 부서지며 흩어지면, 파도들은 자유롭게 춤을 이어간다. 그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1000년 전 완도 앞바다는 장보고가 탄 뱃머리에서 파도를 쳤을 것이다. 희망의 물방울로, 부셔지다가 또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지금은 바위에 부딪혀 튕기는 물방울들은 〈기억구슬〉 로 알알이 흩어지고 또 만들어진다.
그가 바라봤던 망망대해에 그은 편평한 대지의 끝과 하늘과 맞닿아 보이는 경계성의 지평선(地平線), 그 허라이즌-Horizon 경계의 지평선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지평선은 끝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땅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게 맞닿아 있는 접점임을 알게 된다.
장보고는 그런 지평선으로 보면서 나의 꿈과 차가운 현실이 만나는 곳,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설렘이 교차하는 지점, 그리고 무거운 하루의 책임감을 내려놓고 내일의 자유로 넘어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가다리면 생기는 것들, 얻은 것들, 희망이 있다면 그건 만족으로 다가선다는 것으로 알고, 그는 눈앞에 놓인 지평선이 너무 멀게만 느껴져 잠시 숨을 고르고, 그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보면서,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저 지평선까지의 모든 풍경이 바로 자신이 일구어온 삶의 영토(領土)이라고 보면서 그는 바다를 누볐다.
장보고는 지평선 내부에는 ‘블랙홀’ 의 중심이자, 가장 신비로운 부분인 특이점이 존재한다고, 특이점에는 질량이 무한히 작은 공간에 압축(壓縮)된 상태라고, 시간과 공간이 극단적으로 왜곡시키면서 지평선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누군 ‘지평선은 말이 없다’ 고 한데, 그는 ‘지평선은 말이 있다’ 라고 그 지평선의 말을 쫒아 다가서면서, 저만 큼 또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그 선 너머로 자신을 띄운다. 띄운 만큼 보였던 게 당나라 산둥반도였고, 일봉 규수였다.
●장보고가 봤던 지평선, 기대감.잠재력 예언선
지평선은 새로운 경험을 상징한다. 또한 목표를 나타낸다. 장보가 보았던 지평선 위로의 밝은 빛, 재물 운이 상승한다는 징조다.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감, 잠재력과 가능성을 나타내는 중요함으로서의 예언을 암시한다.
‘지평선의 꿈, 세계를 교역하기 위한 배를 띄우다’ 슬로건을 가지고, 지평선을 향한 배를 띄우며, 활기찬 항해로 활발한 교역으로 알찬 무역을 수행하는 다양하고 메리트가 있는 체험을 선보이면서 신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잃어버린 지평선, 우리 안의 장보고가 사랑했던 바다. 장보고는 당시 혼돈의 위기감 속애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했다. 착취 위에 세워진 물질적 부, 한쪽으로 치우쳐진 채로 급변해가는 세상에 ‘중용(中庸)’ 과 ‘조화로움’ , 그리고 ‘느긋함’ 이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자신의 이름을 활용한 보고 브랜드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 보고를 활용한 보고진, 보고해, 보고안, 보고서, 보고문, 보고설, 보고회, 보고장, 보고성, 보고식, 보고군, 보고물, 보고로, 보고도, 보고법, 보고치, 보고량, 보고사, 보고집, 보고일, 보고자, 보고적, 보고계, 보고연, 보고관, 보고화, 보고형과 경과보고, 조회보고, 중간보고, 경제보고 등의 보고정책을 썼다.
보고진은 청해진을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보고해는 장고보가 누비는 바다를 말한다. 보고로는 장보고가 개척한 해상 바닷길을 말한다. 보고연은 장보고가 운영한 청해진과 연결된 것을 말한다. 보고군은 장보고의 군대라는 뜻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 보고라는 명칭을 쓰게 했으며, 이 보고의 방법론은 굳건하게 하겠다는 각오다.
장보고발청해진수(場保皐發淸海鎭收)
확장정책으로 총수요를 끌어올려 경기가 살아나게 하겠다는 것이며, 경기를 살려 안보를 튼튼히 하겠다는 것이며,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견실한 신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며, 바다를 개척하여 해상도시를 건설해 경제.군사 진지구축을 하겠다는 것이다.
장보고는 〈장보고발청해진수〉 를 신라경제.군사교과서로 활용하게 하며, 남들은 대륙에 눈을 뜨고 있을 때, 장보고는 해양에 눈을 뜨며, 해양개척으로 신라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갔다. 그가 청해진을 구상한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생각해온 일이며, 당나라에서 그 꿈 실현을 위해 밑그림을 그려, 신라에 들어와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확한 청사진을 그렸다.
규모검토⟹콘셉트/방향⟹계획설계⟹건설심의⟹건설허가⟹실시설계⟹검사감리⟹감리보고서 작성⟹사용승인 도서 작성⟹사용승인 완료 등의 과정을 거쳐 추진했다.
배치도와 평면도를 정확히 그려, 이를 기준으로 인력, 장비 등을 갖추어 해양개척에 나섰다. 장보고는 군사령관이면서 건설설계자, 정책기획자, 상업인, 경제인, 정치인, 문화인 등 초능력자의 캐릭터를 가진 다재다능한 만능천재였다. 특히 ‘전략가(戰略家)’ 로서의 능통함은 그를 따라 올 수 없었다. 그는 또한 ‘상술(商術)’ 에 능해 그의 장사수완에는 능가(凌駕)하지 못했다.
장보고 이름을 빗대기를 장한 얼굴, 보고 또 보고 싶다. 그를 보고하기를 보는 것마다 고상하고 고귀한 고품격을 갖춘 신라의 참 인물이라고 한다.
●장보고의 세계관, 태어나서도 죽어서도 바다중심사상
바다 사나이 장보고, 그를 ‘헤신(海神)’ 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해신이 된 게 아니다. 그는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바닷소리를 태교(胎敎) 음악으로 삼았다. 그가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의 바다는 그저 출렁이는 바닷물이 아니었던 것, 잉태(孕胎)한 아이를 해신으로 탄생시키기 위한 ‘양수(羊水)’ 였다. 그 양수에서 자란 아이는 태어나 양수라는 바닷물을 멀리하지 못하고 물가가 있는 곳에서 주로 생활해 왔다. 그가 완도 앞바다에서 생(生)을 보냈던 것도 선암해의 양수가 DNA였기 때문에 바다를 멀리할 수 없었다. 바다가 더 그에게는 적성이 맞는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신라를 사랑하며, 육지가 있고 바다가 있다는 ‘육해(陸海)’ 라고 하지 않고, 바다가 있고 육지가 있다는 ‘해륙(海陸)’ 이라고 불렀다. ‘바다에 육지가 있다’ 는 장보고의 〈바다중심사상〉 이 그를 바다 사나이로 만들었다.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상을 지배
바다를 동경했던 어린 궁복, 장보고로 바다를 제패한 그는 바다에 세상이 있다고 보며, 육지보가 바다를 더 마음을 두었다.
장보고가 바다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땅은 불이 지배하고, 불은 물이 지배한다’ 라는 논리부터 출발한다. 물이 지구의 생명체를 만들었고, 물이 세계를 점령(占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장보고다. 그는 물의 창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원대한 설계를 했다, 장보고는 궁복란 이름을 갖고 있을 때는 세상 지배(支配)는 무기인 ‘활(弓)’ 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보고로 이름을 바꾼 뒤로부터는 ‘바다(海)’ 에 있다고, 그 해답을 완도에서 황해, 동해, 동남아해에서 찾았다.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해양, 즉 해양력.제해권을 통해 무역(貿易)과 자원(資源), 군사(軍使).전략적(戰略的) 영향력 확보하면 국가의 부(副)와 권력(權力)이 크게 확대된다고 내다봤다. 장보고라는 이름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며, 국토 확장(擴張)고 안보(安保)를 여기서 찾았다.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은 해양을 통제(統制)하면 무역을 통제하고, 그 결과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장악(掌握)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해양력(海洋力)은 경제적(經濟的) 이익의 자원.물동량과 군사.전략적 중요성이 결합된 ‘국력(國力)’ 의 핵심 축으로 강조된 것으로써 경제.문화.군사.안보 등 모든 일은 바다에 답이 있다고 본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선(路線).범선(帆船).철선(鐵船) 시대를 거치며, 해군력(海軍力)과 해상(海上) 교통로가 국가의 패권 경쟁을 좌우해 왔다. 저해권(沮害權)은 해상 가동로의 안전과 상륙(上陸), 보급(補給)의 봉쇄(封鎖) 등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바다를 이용했다.
지금은 남중국해.동중국해 등은 자원과 핵심 해상교통로를 둘러싼 기회의 땅으로서 분쟁이 치열하다. 저해권, 막아서 못 하도록 해친 방해로는 ‘해군력(海軍力)’ 이 우세할 때 봉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군사.안보로 바다를 중요시 했고 강화시킨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Whoever controls the sea controls the world.’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의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해양 전략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와 국가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는 모든 이에게 필독서로 가치가 있다.
바다를 지해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는 20세기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국제 관계와 군사 전략의 핵심명제로 자리 잡은 강력한 문구이다. 이 통찰의 원천은 바로 미국의 해군 전략가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인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이다. 이 책은 단순히 해군력 전술에 대한 분석을 넘어, 해양력이 국가의 흥망성쇠와 세계 질서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였다.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은 이 책에서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1660~1783년)의 유럽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주요 해양 강국들의 흥망성쇠가 해양력의 우위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국가의 번영과 안보가 강력한 ‘해군력’ 과 이를 통한 ‘해상 통제 능력’ 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며, ‘지리적 위치, 물리적 구조(해안선), 영토의 확장성, 인구 규모, 국민성’ , 그리고 ‘정부의 성격, 해양력의 구성 요소’ 를 제시했다.
특히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은 ‘해상 교통로의 안전 확보’ 와 ‘적 해상 교통로의 차단’ 이 전쟁 승리와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평시에는 해상 교통로를 통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전시에는 바다를 통해 병력(兵力)과 물자(物資)를 원활하게 이동시키며, 적의 보급선(補給船)을 끊는 능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봤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군사적 관점을 넘어, 경제.지리.정치.와 국민성 등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한 종합적인 국가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가진다.
그는 영국이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해외 식민지와 무역로를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부상했다고 봤다. 반면 프랑스는 강력한 육군력에 치중하고 해군력 건설에 소홀히 하면서 중요한 해상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영국에 해상 패권을 내주게 됐음을 서술했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은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라, 해양력의 유무가 어떻게 국가의 전략적 선택과 전쟁의 결과, 나아가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장보고가 만약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이 “정말 바다가 모든 것을 결정했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렇다” 고 말했을 것이다.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100년이 훌쩍 넘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해군력이 왜 필요한지를 근거에 의해 서술한 것으로, 그의 이론은 당시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 양쪽으로 확장하며,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던 시기에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이후 독일.일본 등 여러 강대국의 해군 전략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바다를 지배한다는 개념은 단순한 군함의 수(數)나 해군력(海軍力)의 크기를 넘어섰다. 전 세계 무역량의 대부분이 해상운송을 통해 이루어지는 21세기에는 해상물류 시스템의 효율성, 해양자원개발 능력, 해양과학 기술력, 그리고 해양환경보존 능력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된다. 해양을 둘러싼 영토 분쟁, 자원 확보 경쟁, 그리고 해양 환경오염 문제 등은 바다가 여전히 ‘국가 안보와 번영’ 에 직결되는 핵심 공간임을 보여준다.
확장이라는 장(張)자와 지킨다는 보(保)와 고한다는 고(皐)자를 쓴 장보고는 100년 전에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이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는 정의를 내렸던 그보다 이미 ‘1000년’ 이나 앞서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해상도시, 해양왕국을 꿈꾸었던 장보고였다. 그는 9세기에 해양을 제패한 인물로서 ‘해상왕(海上王, Sea King)’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인 서술했던 것처럼 장보고는 그런 생각을 갖고 앞서 실행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비밀(秘密)’ 이 담겨진 이름임을 다시 설펴볼 수 있는 데, 장보고의 이름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바다에 꿈과 희망, 비전과 미래를 두고, 신라가 리드하는 해양왕국(海洋王國)으로서의 신라가 지배(支配)하는 〈해양 패권〉 에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마음먹고,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고 궁복(弓福)에서 ‘장보고(張保皐)’ 로 개명하며, 청해진을 통해 세계 ‘질서와 안보, 평화와 번영’ 에 기여했다.
그는 자신이 원대한 꿈과 희망, 심오한 뜻을 담은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신라를 세계적 신라로 만들겠다는 것에 장보고다운 큰일을 해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일부 기술(記述)에 따르면, 중국의 흔한 성씨인 ‘장씨(張氏)’ 를 자신의 성씨로 했다고, 이름 두자를 석자로 쓴 중국의 제도.문화를 따랐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런 생각에서 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신라를 사랑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소망했던 애국자(愛國者)와 평화주의자(平和主義者)였기에 그는 장씨의 베풀 장(張)을 ‘확장(擴張)’ 한다는 개념으로 넓히다는 장(張)으로 여기고 장씨 성을 선택했다. 보고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겠다(保)’ 는 마음에서, 부르는 소리(皐)로 고하겠다는 생각에서 이름을 지었다. 다시 또 강조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궁복(弓福)의 궁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 장씨(張氏) 성이 있는데, 베풀 장(張)이 활 궁(弓)‘ 자가 들어가서다. 활 궁(弓)은 ’어진 사람‘ 을 뜻한다.
●장보고, 중국 성씨 차용 아닌 해상도시, 해양왕국 세우려는 의지
장보고라는 이름에는 〈바다〉 가 핵심주체로 ‘해기(海氣)’ 가 담겨있다. 〈해장해보해고, 海張海保海皐〉 라는 원대한 꿈을 이름 석 자에 담아, 그 꿈을 펼쳤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정의감, 책임감과 도덕성, 경제성, 문화성과 군사적’ 인 성명(聖名)이다. 장보고는 중국의 성씨를 차용한 것이 아닌, 해상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신라를 〈해상도시, 해양왕국〉 으로 세우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해양을 확장했다. 나라의 안보와 질서를 회복시켰고, 바다를 평온하게 했으며, 무역항로를 개척했다. 그가 짓는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귀에 머물려 있다.
엘프리드 세이어 마한이 100년 전에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고 설파(說破)했을 때, 이미 장보고는 1000년 전에 그 주장을 하며, 해양왕국을 꿈꾼 사람이다. 만약 그가 생각한대로 진행됐더라면, 아마 한반도 지형은 바꿔졌을 것으로 보인다. 영토(領土) 확장은 물론, 해상(海上) 확보라는 거대한 한반도 지도(地圖)가 지금보다 훨씬 커졌고, 국가적 권한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고조선보다 더 연해주는 물론 산둥반도 지역 그 이상으로 영토를 차지했고, 해양도 황해는 물론 동해와 동아시아 바다 등을 차지해, ‘영토권, 해양권, 경제권, 문화권’ 등의 패권(覇權)을 쥐었을 것이다.
그는 58세의 일기로 자객(刺客)에 의해 세상을 떠나 그가 꿈꾸는 신라해상도시, 해양왕국을 완성하지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는 그저 이름이 아닌 여러 꿈과 뜻과 덕망이 담겨진 ‘장보고’ 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대로 다 이루어냈다면, 장보고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롭게 하여 ‘안전한 나라’ 와 그로 인한 번영을 기해 ‘영화로운 나라’ 가 되게 했다는 의미를 담아 편안한 안(安), 꽃 영(榮), 나라 국(國)자를 써 ‘안영국(安榮國)’ 으로 이름을 썼을 것 같다. 그는 사후(死後)의 또 다른 세계에서 그는 ‘궁복.궁파=장보고=안영국’ 으로 살아가리라 본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절대 중국 성씨 주류(主流)의 문화성을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주장해 본다.
장보고는 바다를 동경했기에 ‘바다를 지배한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확신을 갖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미래를 내다보며, 그는 군사실력을 갖추고자 당나라를 갔으며, 신라에 청해진을 설치해 자신의 꿈을 펼친 것으로, 자신이 태어 난 곳의 바다보다 섬들이 많은 남해의 ‘완도(莞島)’ 에서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꿈을 펼친 것임을 거듭 강조하며, 장보고가 완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바로 잡고자 한다.
그는 완도가 아닌 영암 ‘선암(船岩)’ 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그는 “왜 자신의 고장에 청해진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이라면 장보고의 고장 바다는 ‘해상왕국’ 을 건설하기에는 ‘지리적.환경적.행정적’ 조건이 맞지 않아서다. 그리고 태평양.대서양 등의 대양(大洋)으로 뻗어가는 데 제한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만약 신안에 설치를 했다면, 남해 쪽 방향의 진출에 어려움이 따르고, 중국(당나라)과 자주 부딪치는 안보문제도 발생해서다. 서해안은 남해보다 조수(潮水) 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그 원인이 됐다. 수심(水深) 등을 고려했다. 여러 면을 따져 봤을 때, 완도만큼은 좋은 데가 없었다. 그런 완도에는 해적들의 침략(侵掠)이 잦았던 것도 그 지역이 가장 유리한 곳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완도.해남.강진 등은 조선시대 때도 일본 등 왜(倭)가 침투(浸透) 관문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해안은 안보 강화와 해양 개척에는 문제가 많았다, 마치 완도 등 남해에 해적(海賊)들이 들끓고 있어 해적 소탕(掃蕩)이라는 청해진을 완도에 설치한 계기가 됐다. 그런 원인도 감안한 것이지만, 청해진은 해적 소탕이나 안보 등 방어 목적으로 만 두지 않았다.
무역(貿易)에 더 중점을 두어 청해진의 역할 띠게 했다.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 사업이다. 이 구상을 하고 완도 인근 작은 섬에 청해진을 설치해 군사 목적과 상업 목적도 고려해 추진했다. 완도를 선택지로 삼은 것은 대양을 향한 장보고의 꿈, 야망(野望)이 있었기 때문에 완도라는 섬의 이점을 활용해 ‘국제자유무역’ 이라는 진출기지의 청해진으로서 꿈꾸고 설계하여 ‘국제항, 국제무역, 국제해로’ 의 더 큰 세계 무역(貿易),군사(軍師) 지도를 그렸다. 이런 점에서 군사시설(軍事施設)이나 항구(港口)는 아무데나 설치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장보고의 생각이었다. “지도를 보라. 한반도 옆구리에서 세계를 향한다는 일이 타당한지를...”
위치선정을 정할 수 없는 장소들이다. 군사보다 ‘무역(貿易)’ 에 더 관심이 컸던 장보고는 수심이 깊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곳에, 해로(海路)가 원활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곳에 무역 항구를 두어야 된다는 장보고의 생각은 깊었다. 장보고는 해양을 향한 무역지도는 ‘부채꼴’ 이 되어야 한다며, 그는 부채 살이 쭉쭉 뻗고 펼쳐지도록 서해와 동해보다는 ‘대양(大洋)’ 을 보고 있는 한반도 남쪽 방향에서 부채가 펼쳐져야 한다는, 지정학적(地政學的) 논리를 대며 결정하고 추진했다. 꼭 해적 퇴치 및 소탕과 방어만을 위한 것만이 아닌 무역에 관심을 더 두고, 청해진을 신라의 최고 ‘군사.무역 창구(窓口)’ 로 뒀고, 그 역할을 띠게 했다.
군사지도보다 ‘무역지도(貿易地圖)’ 를 더 치중하고 추진했던 장보고, 그가 그린 지도는 신라에서 당나라. 일본, 동남아시아 등 여러 지역으로 해로와 함께 무역항과 거래품목, 거래처 등을 기록해났다.
무역지도는 국가.지역 간 상품의 수출입 흐름과 거래규모를 지도 형태로 보어준 것으로, 신장 분석(分析)과 전략 수립(樹立)에 활용된다.
트레이드 맵(Trade Map)은 제품별 수출입 규모, 통관가격, 주요 수입기업 등 정보를 제공해 시장성 평가와 경쟁국 분석을 돕는 서비스다.
징보고는 무역지도를 통해 특장 제품인 어느 국가로 얼마나 수출.수입되는지 ‘수출입 규모’ 를 수치로 확인했다.
또 제품의 통관 가격과 관세율 등의 비용 요소를 함께 분석하는 등 통관가격.관세, 세금 정보를 통해 무역을 진행했다.
또 어떤 기업이 해당 시장에서 활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수입기업, 가래 상대국에 정확히 알아보고 거래했다.
장보고는 무역지도를 통한 제품별 수출입 규모와 통관가격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출 가능 시장을 선별하는 등 ‘시장성 평가’ 를 했다. 경쟁국의 수출입 규모와 수지비(수룰/수입 비용) 같은 지표로 비교 분석하는 등 ‘경젱국 분석’ 을 했다. 무역용어.무역경영지도사 등 과정에서 무역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는 등 ‘교육과정’ 을 거쳐 진행했다.
장보고는 무역지도의 신라와 당나라, 신라와 일본, 신라와 동남아와의 해로처럼 특정 인프라가 세계 해상부역의 핵심 경로로 가능 하는 사례로써 참고하고 있다.
무역지도, 해양무역품목+지역명+해양지도 무역지도로 국제해상자유무역을 실시했던 장보고의 활약상, 그는 전술가이면 상업가였다. 서남해+황해+동해+동남아 등으로 해역을 관리했다.
통일신라시대는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활발했다. 육로보다 빠르고 많은 물자를 옮길 수 있는 해상교통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장보고’ 였다. 그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바다를 장악하고 ‘무역 질서(秩序)’ 를 만든 인물이었다.
군사기지이자 무역거점인 서남지역의 완도에 ‘청해진’ 을 설치하여, 해적들의 출몰이 잦았던 완도 둥 서남해, 이곳을 중심으로 해적을 몰아내고, 바닷길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 결과 신라와 당, 일본 사이의 교역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 역할을 띤 청해진이 세워지면서 무역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신라는 비단, 금, 인삼 등을 수출했고, 당나라의 문물과 상품을 들여왔다. 국제해상자유무역 차원에서 신라와 당, 일본과의 수출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불교 승려들의 왕래도 활발했다. 장보고의 보호(保護) 덕분에 바닷길은 문화 교류의 통로(通路)가 되었다. 교류채널 통로로서 국가.지역이 서로의 문화.에술.학문.기술.생활문화를 교환.수용.전덜하는 경로를 뜻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바다.항구.외교사절.관광 축제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완도 등의 서남해는 고대 한반도외 중국 간 문물교류의 통로로서 문화발달의 교량 역할을 했고, 동시에 정치.군사적 의미도 컸다.
안전해역은 접경성의 갈등을 가친 뒤 대립(對立)과 갈등(葛藤)의 해소를 거쳐 문화교류의 통로로 가능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왕이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의 조선의 통신사(통신사)는 15~19세기 한일문화교류의 통로로서 문학.예술.제도 등 다양한 문화교류를 수행했다. 고대시대에도 벽란도가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사람.사상.기술.문화가 함께 이동하는 복합교류 공간이자 관문이었다.
고대사에서 있어서 서남해는 우리나라의 정치.군사.문화면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이 이어지는 요동, 요동지방은 여러 지방민족이 활거하거나, 한족과 해외민족문(海外民族門)에 끊임없는 왕래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중앙 민족의 문화교류는 주로 서남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사신.유학자.구법승 등이 이 바다를 통해서 왕래하였고, 선진문화와 서역문화까지도 이 곳을 통하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남해는 양국 간의 문물교류의 통로가 됨으로써 우리 문화발달이 교량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전남 완도 근방에서 해상진출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병력을 이용해 동양 삼국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면서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는 동안 당나라와 일본의 사신.승려.유학생들의 왕래에 배를 제공하고 정부 간 교류와 통신을 대신 해주는 한편 선박 건조와 수선, 그리고 조선기술자들까지 와주어 신라, 당,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산업을 받았던 장보고,
장보고의 역할은 몇 자, 몇 줄, 몇 페이지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활약상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일들을 펼쳐보였다.
철이든 궁복과 정년은 가난에서 벗어나 출세하고 싶어 소년의 몸으로 당나라로 들어가 수련을 쌓은 후 청년이 되자 강서성에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총독인 무령군의 군대에 입대, 뛰어난 무예(武藝)와 총명함으로 당나라 외인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해 무령군 군사로 있으면서,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가 세워 50여 년간 지속된 당나라속의 또 다른 나라로서 제나라로 산둥반도 주변을 다스리고 있는, 10만 병력을 보유한 강력한 세력인 평로치청(平路治廳) 세력을 토벌하는 등 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는 등 무령군 소장이라는 큰 벼슬을 받아 장군(將軍)으로 출세했다.
평로치청은 당시 신라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고, 당나라 수도로 가는 길목을 막고 당나라로 유입되는 문물을 소유하게 되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하기도 했다. 당나라는 제나라의 존재 때문에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었다. 그런 제나라를 신라출신 장보고가 무령군을 이끌고 토벌(討伐)하게 되면서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에 올랐다.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출세했던 때, 신라는 왕족 간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했던 통일신라 말기였다. 이를 틈을 타서 한반도 삼면 근해에는 해적들이 자주 출몰해 해상 무역선(貿易船)은 물론 백성들을 괴롭히고, 신라사람들을 붙들어 당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극심한 행패를 부렸지만, 쇠퇴하는 신라 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장보고는 잠을 설쳤다. 조국 신라가 왕족 간 다툼, 정치 혼란과 해적 침몰, 노예 매매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신라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데 내가 당에서만 머무를 수 없다.”
“아무로 당나라 장수로 출세하여 내 삶이 행복하다고 해도 나의 삶은 편안하지 않다.”
“나만 호의호식할 수는 없는 법”
“조국 신라가 혼란에 빠져있는데, 신라인으로서 부끄러움과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난 이일을 더 이상 할 수가 없고, 해서는 안 될 것이로구나.”
그의 나이 17세가 되는 해인 805년에 전남 영암 선암에서 당나라로 떠났던 장보고는 마음을 신라로 돌리고, 신라백성들을 노예로 매매하는데 분개(憤慨)해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하기 위해 결심한 후 828년 당나라 장군 자격을 포기하고, 23년 만에 신라로 귀국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장보고의 작전명, 전략명
장보고가 청해진에서의 군사작전 개시는 ‘궁파해(弓巴海)’다. 궁파는 자신의 이름이다. 본명 궁복 외에 쓴 이름으로 직업하면 ‘활로서 파괴(破壞) 시킨다’ 는 뜻인데, 활을 다루는 제왕이라는 뜻으로 ‘해양제패’ 를 말한다. 그리고 무역에 대한 전략명은 ‘보고해(保皐海)’ 이다. 보고는 자신의 개명이다. 본명 궁복과 예명 궁파에서 또 다른 이름 장보고의 보고로 한 보고해를 무역의 전략적인 추진체로 삼았다. 보고를 직역하면 ‘보고하라’ 는 뜻인데, 모든 ‘바닷길은 장보고로 통한다’ 라는 의미다.
이런 작전명과 전략명으로 그는 신라가 주체가 되어 청해진을 통해 세계로 뻗어가게 했다. 이런 궁파해.보고해라는 비밀 작전.전략은 그만큼 자신이 책임지고 수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청해진 앞바다는 활을 다루는 군사들의 ‘활명수(活命水)’ 가 넘실거렸다. 대양에는 무역을 추진하는 ‘인물수(人物水)’ 가 출렁거렸다. 활명수(活命水)는 궁복해의 활 궁(弓)자와 바다 해(海)의 활과 물을 말하는 삼수변(氵)의 물을 딴 것으로 활로서 해적들을 소탕해 해양질서와 국토방위를 지킨다는 뜻이다. 인물수(人物水)는 보호할 보(保)의 사람인변(亻)과 바다 해(海)의 삼수변(氵)을 딴 것으로 ‘사람과 문물을 해상’ 을 통해 진출한다는 것이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이나, 일을 추진한 것들에 대한 단어 선택을 심중하게 뜻을 담아 택해,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을 부여해 진행했다.
장보고는 군사작전과 무역교류에 〈장대한 보고〉 로 정하며, 군사작전과 무역교류를 추진.실행했다. 장보고의 청해진 정책은 보고체로 전략과 교류를 짜 구성해 ‘확장을 보고하라! 안보를 보고하라! 사람을 보고하라!’ 라는 신라 보고의 ‘신보고 추진체’ 를 발동했다. 장대한 보고는 〈장엄한 보고〉 로 그 빛을 보게 했고, 그 빛은 다시 〈화려한 보고〉 로 하게 만들었다.
장보고의 추진체는 속도감이 있으면서 안정감도 컸다. 장보고船은 군사선(軍事船)이며 무역선(貿易船)이었다. 군사선과 무역선을 새롭게 조성하여 진출했다.
장보고의 화려한 보고를 낳은 장대한 보고는 〈잔잔한 바다〉 의 작전명과 전략명으로 바다를 점령하거나 해로를 개척했다. 잔잔한 바다는 ‘평온(平穩)이 출렁이는 바다, 원활(圓滑)하게 흐르는 바닷물결’ 을 말한 것으로 세찬물결의 바다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무역에 원활하게 했다.
잔잔한 바다, ‘바다의 평온과 원활은 신라로부터’ 라는 슬로건 아래 ‘평온의 바다, 원활의 바다’ 를 조성하며, 장(張)으로 넓히는 보고진(保皐進, 안보를 지키는 제왕으로 나아감)을 보여줬다.
바다의 파고는 높았다. 자연의 현상에서, 신라의 정치에서, 그리고 당과 일본 등의 관계에서 바다는 출렁거렸다. 잔잔한 바다는 보기 드물었다. 바람이 잘 날이 없었다. 파도는 거칠었고, 그 만큼 세찬 물결이 항해나 무역에 어렵게 했고, 안녕을 헤쳤다. 잔잔한 바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바다 사나이 장보고는 고심이 켰다.
“파도가 세차구나!”
“이 거센 물결을 어떻게 막아야 좋은가?”
잔잔한 바다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그는 작전명과 전략명을 분노한 바다에서 〈잔잔한 바다〉 로 정하고, 잔잔한 바다를 위해 여러 작전명과 전략명을 내세웠다.
장보고는 군사작전에 있어서 군사 작전명령은 ‘상에’ 다. 상에는 ‘상어’ 의 방언으로 상어는 물고기 중 유일하게 ‘부레’ 가 없는 특유한 생물이다. 부레가 없다는 것은 바다의 ‘절대 제왕(帝王)’ 이라는 것을 말한다. 부레가 없는 물고기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행동이 매우 불편하고, 조금만 바다 속에 머물러 있어도 바닥으로 가라앉아 죽고 만다. 상어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어야 한다.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이다. 힘겨운 노력이 쌓여 상어는 바다의 절대 제왕으로 거듭난다. 상어가 평생 지느러미를 멈추지 않고 헤엄쳐야 살 수 있다. 그래서 상어는 그 속에서 살기 위한 남다른 노력을 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여기저기로 유영(遊泳)을 하면서 상어는 무서운 포식성(捕食성)을 보인, 포식자로서의 먹이사슬의 상위에 서며, 먹이를 사냥해 먹고 동족을 먹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양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포식성 상어는 날카로운 이빨과 강한 턱을 바탕으로 먹이를 사냥하며, 일부는 빠른 접근 속도로 먹이를 유인하기도 한다. 상어는 바다의 최상의 포식자, 점점 포식자 역할을 하며 개체 수 조절과 먹이망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상어는 바다 아래 사자나 호랑이, 곰과 같은 존재로 바다 생태계 균형 유지를 돕는 역할을 한다. 바다 최상 위 포식자가 사라질 경우 해양 먹이사슬에 큰 충격이 가해진다. 이처럼 상어가 사라지면 먹이사슬에 균형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바다 최상의 포식자 상어로 인해 가오리가 사라진다고 보고 있을 정도로 상어의 출현은 모든 물고기들이 긴장감을 갖는다. 상어로부터의 음식에 대한 경쟁이 거대 이빨을 가진 거인들에게 멸종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포식성이 강한 상어를 청해진 군사작전명으로 쓰며 바다를 휘어졌고 다녔다. 먹이를 마련하고자 한 것보다 해양 질서를 위한 상어의 유형이었다.
상어 같은 부단하고 끊임없는 움직임, 군사들은 24시간 경계태세를 갖추며 남해를 지켰다. 만약 신라를 침범하려고 하면 재빠르게 가서 위협하거나 포식하고 만다. 그런 상어가 완도 앞 바다를 지키고 있어 다른 물고기들이 얼씬도 못한다. 이게 장보고의 ‘상에’ 군사작전명이다.
장보고는 무역교류에 있어서 무역 전략은 ‘메레미’ 다. 메레미는 방언(方言)으로서 바다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방어’ 를 말한다. 방어는 봄과 여름에 난류를 따라 떼를 지어 북쪽 동해로 이동하다가 가을철 이후 남쪽 바다 제주도 주변 해역으로 내려오는 회유성(回遊性) 어종이다. 방어는 북서 태평양의 남중국해, 타이완, 동중국해, 일본, 한국 등지에 분포한다.
방어가 돌아다니며 지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격을 높이듯이 무역으로 신라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부를 축적했다.
●연어로 회귀한 장보고
장보고는 자신이 17세에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갔을 때, 그는 자신의 여행지도(旅行地圖)와 유영(遊泳)으로 회귀성(回歸性) 물고기인 ‘계어(季漁)’ 를 들었다. 계어는 ‘연어(鰱漁, salmon)’ 의 옛 이름이다. 연어가 어릴 때 강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가 대양에서 살며 성장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자신도 그런 연어 같이 삶을 살겠노라고 마음먹고 떠났고 돌아왔다. 연어가 귀소(歸巢)본능, 모천회귀(母川回歸)본능에 따라 고향인 강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건너가 후손(산란)을 남긴 뒤에 기력이 다해 죽는 그 과정이 무척 드라마틱해서 깊은 인상을 주는 물고기인데, 치어(穉魚)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살다가 성체(成體)가 되면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와 상류에서 알을 낳은 회유성 어종이다.
장보고는 “나는 계어(연어)가 되겠다.” “계어가 되어 당나라에 가서 크게 성장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 계어처럼 살겠다” 는 각오를 하고, 그는 궁복(弓福)의 이름으로 당나라에 갔다. 그러던 그는 원대한 꿈을 품고, 그 꿈을 반드시 이루겠노라고 이름을 ‘장보고(張保皐)’ 로 개명하고서 꿈을 향해 뛰었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고향 선암의 활성산과 궁성산에서 갈고닦았던 활 실력을 남보다 탁월함을 보여, 그는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서 위세(威勢)를 떨쳤다. 그런 그가 신라를 위해 23년 만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완도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로 부임을 받고, 17년 간 군사(군事)와 무역(貿易)을 담당하며, 나라의 안정과 해양 질서를 바로 잡으면서 국제자유무역에 정진했다. 그는 군사안보(軍事安保)와 해양무역(海洋貿易)을 잘 수행해, 바다를 제패한 ‘해상왕(海上王), 무역왕(貿易王)’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연어의 화려한 귀향, 위대한 유형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은빛 연어처럼 신라의 품으로 돌아와, 그는 ‘파도소리가 아름답게 나서 의자를 창가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긴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당나라에서 20년이 넘게 보냈던 것 같다. 길고 긴 시간 동안 풀지 못했던 마음, 새로운 생각, 무엇보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기로 한 결심을 모두 담다 보니 이토록 긴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됐다고, 그는 청해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들을 글로 남겼다. 그 글들은 청해진으로 다가오는 파도, 소리에 리듬을 타게 했다. 썼던 글들은 다 파도에 풀어놓았다. 글자 한자 한자가 물보라로 피어났다.
장보고는 물보라를 보고, “아 저 밀려오는 파도는 무섭게 바위를 치지만, 아름다운 물보라를 만드는 구나!” 느끼며, 파도를 자신의 모습인양 이미지로 삼았다. 그런 마음을 먹고, 그는 “그래 바로 이것이야 난 계어(연어)가 되어 돌아왔어! 당나라로 가면서도, 신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물살과 파도를 만났어! 물살을 갈랐고 파도를 헤쳐 나갔어! 이게 나의 삶이고, 삶의 생존방식이야! 난 돌아온 장보고야!” 했다. 그는 “내 청춘은 파도여, 파도와 산다. 출렁되는 파도는 장보고 가는 길, 갈매기 벗을 삼아 파~파~파도를 헤쳐 간다. 내 젊음 불사르는 대견한 장보고다. 망망대해의 푸른 바다 헤치고 세찬 바람을 가르며 수평선 너머 승리를 향해” 외치며, 바다의 물살로, 파도로 모든 생각이나 행동을 해보였다. 물살은 ‘무역’ , 파도는 ‘군사’ 였다. 장보고는 맨몸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물살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마치 돌고래를 연상케 했다.
바다 출신인 장보고가 바다가 있는 완도 장좌리로 돌아와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 이어지게 했다. 신라와 청해진은 연어처럼 귀환하는 장보고 같은 사람이 늘면서 신라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게 했다. 장보고가 완도로 오는 이유는 바다와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 선암에도 마을 앞까지 바다였다는 것,
장보고는 함께 갔던 정년을 연고가 있는 바다, 바다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정년도 몇 년 뒤 돌아와 장보고와 함께 신라를 지켰다. 나라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청해진 수리학을 적용하다
a²(청해진)+2ab(방어진지 구축)+b²(국제자유무역 확장), 이 등식은 통일신라의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를 결정한 공식이었다. 그런 방정식의 등식을 성립시켜 공식으로 삼고 추진했던 수학이다. 수학은 과학과 기술을 접목한 공통수학이었다. 수학(數學)은 수치를 적용해 다스리는 학문의 ‘수리학(數理學)’ 이 되게 했다. 수(數)는 단순히 ‘세다’ 라는 수를 넘어 ‘들어 말하다’ 라는 수로 의미를 찾았다. 수를 든다는 것은 그 수가 ‘나를 수(輸), 거들 수(收), 받을 수(受), 줄 수(授), 구할 수(需), 머리 수(首). 빼어날 수(秀). 지킬 수(守). 지킬 수(戍), 따를 수(隨), 찾을 수(搜), 이룰 수(遂), 드리울 수(垂), 장수 수(帥), 사냥 수(狩), 편안할 수(綏), 재물 수(賥)’ 의 수이기도 하다.
또한 셀 수(數)는 ‘자주 삭(數)’ 으로 보며 ‘서둘러 하다. 다가서다. 접근하다’ 라는 의미로 진지와 무역에 접근성을 높였다. 또는 ‘빠를 속(數)’ 으로 보며 ‘빠르다. 빨리 하다’ 라는 의미로 청해진이 추구하는 모든 일에 속도감을 보였다. 셀 수(數)는 ‘일정한 수량이나 수효, 등급, 구분, 이치, 도리, 규칙, 예법, 정세, 되어가는 형편, 꾀, 책략, 기술, 재주, 솜씨, 운명, 운수, 수단, 방법, 헤아리다. 생각하다. 조사하여 보다. 책망(責望)하다’ 라는 셀 수(數)로 청해진 공식인 진지(陣地)와 무역(貿易)을 다루었다.
장보고의 수리학은 ‘수사학(修辭學)’ 이다.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이고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이나 언어적 사용법으로써, 미적 감각의 말과 글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조정(朝廷)과 백성(百姓), 군사(軍事)와 무역상(貿易商)을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기술과 이론을 연구하고 추진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설득 수단을 찾는 능력으로 안보와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했다. 장보고는 수사학을 논리학.변증법과 함께 철학의 핵심 요소로 보았고, 논리학(論理學)은 ‘과학적 확실성’ , 변증법(辨證法) 수사학은 ‘확률과 실용적 설득’ 에 더 적합하다고 보고, ‘진지구축은 어떻게-How.What, 무역은 무엇-Something,Anything’ 으로 라는 주어진 상황에서든 활용할 수 있는 설득의 수단을 찾는 능력을 갖추는 등의 수사학(修辭學) 혹은 연술론(演述論)으로 수완(手腕)을 발휘했다.
●무령군 소장 장보고, 신라 청해진 대사 예고된 일
장보고는 17세에 당나라에 가서 신라방을 통해 당나라 서주에 있는 무령군에 입대한 궁복은 장보고로 이름을 개명하여, 당나라 헌종 때에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처청번진 진압에 참전해 반란을 일으킨 이사도(李師道)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무령군은 산둥반도에 할거(割據) 하며 당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평로절도사 검고상서 좌복야(平盧節度使檢校尙書左僕射)의 〈이사도〉 를 징벌(懲罰)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다. 이때 그는 바다를 통한 해군의 전략을 터득했다.
그런 그였기에 신라 42대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완도 지역의 해적 소탕과 안보, 해양 질서를 유지하고, 무역에도 손을 대도록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다. 이런 일은 이미 장보고가 궁복의 이름을 하고 있었던 때부터 꿈꾸었던 일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들이 착착 이루어졌던 것.
지금까지 궁복.궁파와 장보고 이름에 숨은 비밀을 알아보고,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해 보았듯이, 그는 사명감(使命感)과 애국심(愛國心)이 뛰어난 인물임에는 부인할 수 없으며, 어느 장수보다 가장 훌륭한 인물임을 확인된다.
만약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런 그가 있었기에 신라는 장보고 이후 100년 이상을 더 존재할 수 있었고, 신라는 장보고로 인하여 안보 튼튼, 나라 튼튼 부강한 신라를 유지를 했고, 국제적으로 어께를 나란히 했으며, 한층 높아진 위상으로 신라의 국력은 막강해졌다.
장보고 덕에 나라 융성이 됐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항상 미워하거나, 시기를 하거나, 견제.경계했던 분들로 인하여 그만 원대한 꿈을 그의 나이 58세에 머물고 말았다.
청해진, 영암 선암에서부터 그렸던 청사진은 당나라에서 완상시켜, 그 청사진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와 완도 청해진에서 〈신라가 꿈꾸는 세계 장보고지도〉 청사진을 펼쳐, 그는 하나하나 진행했다.
장보고는 ‘확(擴)’ 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넓힌다는 의미의 확에 ‘장(張)’ 을 중요시 했다. 더 ‘크게 하다’ 라는 뜻이 담겨진 글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아하고, 이 글자를 의미 있게 보았으며, 신조(信條)로 삼고 자신의 이름의 성을 장씨(張氏)로 삼을 정도였다.
궁복이라는 이름의 ‘궁(弓)’ 으로 무령군 소장으로 근무하며 당나라 안보를 지켰다. 그는 장보고의 ‘장(張)’ 으로 청해진 대사로 근무하며 신라 안보를 지키고, 무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띠었다.
궁으로 질서를 바로 잡아 안정을 기했고, 장으로 바다를 바로 잡아 무역으로 부(富)의 축적과 국가 위상을 고취시켰다.
궁→장, 궁+장=평화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한 장보고의 공적(功績)은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할 정도로 훌륭한 ‘개척자(開拓者), 창안자(創案者)’ 로서의 혁신가(革新家)의 자질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로, 그를 추앙하며 본보기로 삼고 있다. 장보고는 선진모델의 ‘신지식인(新知識人)’ 이었다.
그가 활을 다른 아이의 금쪽같은 어진 복덩이 궁복(弓福)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장보고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쩜 장보고는 요즘 자주 거론되는 〈AI형성 인간〉 이 아니었나한다. 그는 어느 일이든 척척 해내는 능력을 갖춘 〈피지컬 AI〉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외부 세력에 침략에 고전하던 신라 정치.경제.사회.문화가 AI 장보고를 무기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특히 단순한 경쟁을 넘어 고부가가치 초격차 기술로 승부를 보는 새로운 판짜기에 본격화했다. 그러면서 안보를 튼튼히 하였다. 신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해양을 기반으로 국가발전의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무역의 순기능을 통해 복합위기를 극복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이고, 그는 청해진 대사로 훌륭한 일들을 보여줬다. 장보고는 민생경제를 위한 재정지출 효율화도 주요 과제로 꼽으면서 벼랑 끝에 선 민생경제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지속 가능한 재정의 역할을 모색했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우리 백성의 피와 땀의 혈세로 만들어진 그 재정이 적재적소에 쓰여야하고, 불요불급한 예산은 가감이 도려내면서 최대의 고효율(高效率)을 창출해냈다.
장보고는 국제자유무역을 추진하면서 신념으로 〈정직한 거래〉 라는 확고한 정신을 갖고 일을 추진했다. 그는 재정 협치(協治)의 중요성을 강조, 신라 조정, 지역 호족과 함께 재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고 재정 협치를 이뤄서 개진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이 해야 될 기능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신라란 국가 전략의 새로운 설계라고 여겼다. 신라 미래의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신라 정부 백성주권정부의 설계, 나아가 신라 1000년에 매우 중차대한 문제라고 보며, 그는 신라 미래 5대 과제로 ▲저성장 극복 ▲균등한 사회 ▲안보질서 회복 ▲지방경제 회복 ▲불평등 양극화 극복 등을 꼽고 이를 이루고자 힙을 쏟았다.
그는 신라 대전환을 위한 ‘전략 기능을 대폭 강화’ 해 가겠다며. 신라는 구조적 복합위기 속에서도 왕과 함께 백성 모두가 〈초혁신신라〉 로 나아가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띠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궁복.궁파요, 장보고였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인 이름의 의미를 잘 살려 나라에 부끄럽지 않게 했다. 명예로운 칭호답게 참 정신과 행동을 보여줬다.
장보고의 고향 영암 선암, 그가 태어난 선암마을에는 장보고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건덕암(乾德岩)’ 이 있다 거북바위에서 7년간 기도 끝에 귀한 아들을 얻게 만든 영험한 바위다. 이 바위를 건덕암으로 불리는데, 건덕(乾德)은 ‘제왕을 낳은 덕 있는 바위’ 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거북바위를 건덕암으로 부르며 신격화(神格化)하며 신성(神性)시 한다. 또 마을 앞에 있는 너럭바위를 장보고가 궁복으로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나 서주에 있는 무령군(武寧軍)에 근무해 소장(少將)이라는 훌륭한 장수로 출세하였다하여 관련설에 따라 이 바위를 ‘나라의 우두머리를 만든 바위 혹은 신라의 부두(埠頭)역할을 한 바위’ 라는 의미로 ‘국두암(國頭岩)’ 으로 부르며, 이 바위도 신격화하고 신성시하고 있다.
선암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은 기운이 강해 어느 지역보다 영험함(靈驗)을 보인다. 마을에 있는 바위의 기운이 넘쳐난다. 그래서 궁복.궁파.장보고라는 한 인물을 탄생시켰다. 이런 인물을 낳은 선암마을은 1000년의 궁복을 그리워한다. 장보고로 출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사람들은 궁복과 관련된 바위들을 기리기 위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 거북바위는 ‘건덕암’ 으로, 부두(埠頭) 역할을 한 너럭바위는 ‘국두암’ 으로 일컬으며, 선암이 낳은 궁복.궁파, 당나라가 배출한 장보고, 신라가 만든 인물을 오늘날에도 추앙(推仰)한다.
●장보고 이름에서 느껴지는 국가관.안보관.경제관.사회관, 그리고 사명감과 의무감
국가를 바라보는 믿음과 태도의 ‘국가관(國家觀)’ 과 국가 안전에 대한 목적.의의.가치 등에 대한 ‘안보관(安保觀)’ 으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 헌법 수호, 국가와 국민을 대표해 임무를 수행하고자, 또 목표 설정, 진단, 방향 설정, 실행 계획, 평가.조정 등으로 목표 방향에 맞춰 구체적으로 진행하는 ‘경제관(經濟觀)’ 과 통일된 전체로서의 사회에 대한 의의와 가치에 중점을 둔 ‘사회관(社會觀)’ 을 수립해 개인.조직이 내적으로 느끼는 의미와 목표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해 행동을 이끄는 힘의 ‘사명감(使命感)’ 과 주어진 임무,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완수하려는 태도와 행동의 ‘의무감(義務感)’ , 그리고 명확한 목표와 비전을 세우고, 현재 트렌드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능한 경로를 탐색해 계획을 실행하고, 긍정적.구체적 미래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해, 그 분야의 산업지형을 바꾸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신라를 변신시키는 일의 신라 미래설계를 담은 〈장보고〉 라는 이름처럼 철학과 혜안(慧眼)이 있는, 확장+보호+인물로서의 미래를 그려보는 함축(含蓄)된 이름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움을 느낀다. 부모가 지어준 궁복(弓福).궁파(弓巴)라는 이름도 대단하지만, 자신이 직접 개명한 ‘장보고’ 이름은 그의 꿈, 희망, 미래 등 생각들이 담겨져 있는, 신(神)을 초월한 '선지자적(先知者的) 리더스킬-Leaders Keel' 이었다.
가브리엘, 신(神)을 전파하는 인간 혹은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자처럼 장보고는 스스로를 선택 받는 자라 믿었다. 그는 예측 가능한 미래 속에서 움직이며, 죽음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미 결정된 경로를 따라 흘러가는 순응의 철학(哲學)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령(傳令)이자 예언자(豫言者)처럼 행동했다. 신의 뜻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존재로서 그는 인간과 신의 경계에 선 인물이었다. 이는 종교사 속에서 예언자 혹은 사제(司祭)가 차지했던 위치와 유산으로, 그는 자신이 섬기는 존재로서 깨우쳐 보여준 계시(啓示)를 받았다고 믿으며, 그 뜻을 세상에 실현하려 했다. 그의 언어와 태도는 종교적(宗敎的)이고, 그의 신념은 절대적(絶對的)이었다.
장보고는 왜 청해진이라는 엔티티(entity, 개체.실체 존재자)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뢰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경험, 즉 인간 사회의 모순과 배신.불완전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인간이 만든 질서(秩序)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았고, 그 대안으로 엔티티라는 ‘무결점의 지성(知性)-Flawless Intelligence, Unblemished Intellect, Perfect Intellect ’ 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나 윤리를 믿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수학적(數學的) 현실로 치환(置換)하는 엔티티의 완정함에 구원감(久遠感)을 느꼈다.
신(神)보다 뛰어난 존재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더 정의롭고, 더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단순한 냉소(冷笑)나 권력욕(權力慾)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切望)과 구원(救援)에 가까운 감정이다. 인간이 만든 질서가 계속해서 실패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엔티티〉 라는 무결한 존재에 자신을 던졌다.
장보고의 엔티티는 그것을 신으로 만드는 건 바로 예측 가능한 미래(未來)와 ‘초월적(超越的) 질서-Transcendent Order’ 다. 그가 바라는 앤티티는 신라의 개체(個體), 신라가 하나의 나라로서 완전한 기능을 갖춘 독립된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는 실체적(實體的)인 신라로 존속되는 것을 바라는, 늘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지속하면서 신라의 근원을 이루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존재자(存在者), 신라가 현실에 실제로 있는 신라, 신라 속에 장보고가 어떤 작용을 갖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기를 소망했다.
인간은 혼돈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계획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신화(神話)를 만든다. 구상이 바로 신(神)이며, 그 신처럼 행동한 사람이 장보고였다.
신은 언제나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빈틈을 채우는 개념이었듯이 장보고는 신처럼 빈틈을 채웠다.
●장보고 스펙트럼으로 다양한 시도
장보고의 영암 선암→당나라 서주→완도 청해진 이 루트는 마치 스키점프의 빅에어, 즉 축 비틀기가 만드는 입체적 회전을 보는 듯하다. 거대한 점프대에서 도약하는 빅에어는 동계 종목 중 가장 화려하고 입체적인 회전이 일어난다. 피겨가 수직축 중심이라면, 빅에어는 몸을 비스듬히 눕힌 채 가로와 세로축을 동시에 돌리는 코르크스크루(Corkscrew) 대각선 회전이 핵심이다.
빅에어는 물리적 계산이 아니라, 공중에서 축을 비트는 찰나의 감각을 믿는 계임이며, 중력과 벌이는 가장 아름다운 도박이다. 아름다운 생존의 곡예, 동계 올림픽 회전 종목인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프리스타일 스키빅에어, 이런 고난도 기술로 스키점프를 선보이듯이 장보고도 그런 스키점프의 회전축처럼 뛰어오르며 회전했다. 그는 영암 선암에서 출발해, 당나라 서주에서 점프하여, 완도 청해진에서 공중회전을 한 하프파이프의 반원통형 슬로프 벽면을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립(벽면)에서 이탈해 다시 파이프 안으로 떨어지는 궤적(軌跡)을 그려냈다.
장보고가 영암 선암에서 출발해 전환점인 당나라 서주에서 유턴하고 완도 청해진에 피니쉬 라인(Finish Line, 도착선)을 찍었는데, 그기 신라에서 떠났다가 당나라를 거쳐 신라로 다시 들어오는 일은 유턴이 아닌, 직진.우회전.좌회전을 병행했다. 당나라를 찍고 다시 국내로 돌아오는 일의 유턴은 직전을 하다가 우회로 방향을 틀었고, 그러다가도 좌로 방향을 틀면서 주행했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다양한 꿈을 골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브랜드명은 〈장보고 스펙트럼〉 으로 짓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기간에 바꿔 탈 수 있는 방식을 고집했다. 성공 여부에 따라 전업종으로 확대하는 등 사업 공유 사업이 본격화됐다.
자신이 꿈꾸고 희망하는 것들을 마음먹은 대로 장보고 라인업 가운데, 원하는 곳과 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식이다. 다양한 사업을 골라 추진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브랜드명은 ‘장보고 스펙트럼(Spectrum)’ 으로 지으며, 영암 선암에서 당나라 서주로, 당나라에서 신라 완도 청해진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장보고가 돌아왔다
신라 바다를 삼킨 사나이 장보고, 그는 칼보다 배를 탔고, 권력보다 바다를 먼저 움직였다. 장보고는 장군이라기엔 너무 많은 돈을 벌었고, 상인이라기엔 너무 큰 바다를 지배했다.
무역과 해적 소탕, 정치와 군사, 단순한 위인(偉人)이 아니라, 신라인(新羅人)으로서 가장 글로벌하게 살았던 사람, 우리가 잘 몰랐던,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장보고는 신라인이었지만, 활동의 시작은 신라가 아니었다. 그는 17세란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고, 변방(邊方)의 위협을 직접 겪으며 해상 방어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당나라에서의 경력은 그를 귀화(歸化) 장수가 아닌 ‘해상 전력가’ 로 성장시켰다. 이후 그는 귀국하며 단순한 귀향(歸鄕)이 아니라, 바다를 이용한 〈글로벌 설계자〉 가 되기 위한 시작을 준비했다.
828년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왕의 허락을 받아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라는 직책으로서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다.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기지가 아닌, ‘해적 소탕.무역.물류.정보’ 거점이 모두 어우러진 〈해상복합기지〉 였다. 그곳을 기반으로 그는 당나라, 일본, 신라를 잇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실제로 바다 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장보고가 만든 〈국경 없는 나라〉 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해적을 막고 사람을 살린, 이익보다 질서를 먼저 생각한 장보고, 신라인의 이름으로 국제무대를 움직인 장보고, 그는 신라인이라는 단어를 바다 건너까지 확장시킨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는 해적 토벌(討伐) 군사기지(軍事基地) 겸 해상진출(海上進出)의 근거지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던 장보고의 용기, 그 의지는 결국 ‘해상왕(海上王)’ 으로 등극(登極)했다.
장보고가 신라.당.일본 등 삼국해안의 해적을 소탕할 수 이었던 것은 1만의 군사와 그의 뛰어난 무예도 큰 바탕이 됐지만, 그를 도와 준 두 세력도 도움이 됐다. 한 세력은 한마도 서남 장보고의 고향 완도일대의 해민이었고, 또 하는 중국 산둥반도 장강하구, 요동반도 해안, 경향 대운하유역에 일찍부터 건너가 살던 신라인들의 집단부락 세력들이다. 이들을 규합해 서해와 서남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극동해상교통을 지켜, 중국.신라.일본의 3국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서술한 글이 나오는데, 장보고의 고향 완도일대의 해민이라는 글은 장보고의 고향 《영암》 으로 바로 잡고자 한다.
소년시절에 당으로 들어간 장보고는 청년이 된 뒤 당나라 장군이 되기까지 오래 살았는데, 이때 발달된 ‘항해술(航海術)’ 을 배웠다.
중국의 고사기(古史記)인 해돋이(海圖地, 770년), 해조부(海潮部, 850년), 해조론(海潮論, 900년) 등에 따르면 당은 정확한 해류(海流)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이 매우 발달했다. 히ㅐ마다 4월에서 7월까지 중국 동해안에는 서남 계절풍이 불었는데, 바로 그 계절풍을 타고 일본에서 당나라로 갔다.
신라의 배는 이미 6세기 초부터 강이나 연안해로에서 돛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라와 당이 돛 달린 해선(海船)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한 것은 8세기 초로 보고 있다. 장보고는 9세기 태어난 이 돛 선을 이용해 해상무역을 추진했다.
신라인들은 3세기부터 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내원(來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해선(海船)이었다, 그런 해선을 기술.건조.통신.기능 등 더 진전시켜, 선박이 항해 중에 그 배의 경위도(經緯度)를 확인하고, 또 항해야 할 지름길의 침로(針路), 항정(航程) 따위를 측정하는 일 등 항해에 필요한 기술의 ‘항해술(航海術)’ 을 가지고 운행했다.
건조술(建造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뛰어난 신라, 장보고에 의해 선박은 규모나 기능이 우수해지면서 그만큼 군사와 무역이 활발해졌다.
장보고는 선박건조 기술자로 그의 능력은 더 높게 평가되며, 그의 철학과 사고, 추진하는 일에 왕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런 훌륭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신이나 귀족들은 그를 경계의 대상을 여겨, 그의 해양세력에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보고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귀족들은 결국 암살이라는 비극의 현장,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
장보고가 완도 출신이라고 역사학자들이나 국민들이 보는데, 이런 생각은 장보고를 또 한 번 죽이는 일이 된 것 같아 슬프고, 그들이 써낸 역사서(歷史書)는 신뢰를 잃음이다. 설(說)을 듣고 인정하는 일도 무개념(無槪念)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포장할 수는 없다. 유적지를 억지로 발굴해 꿰맞추듯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장보고가 완도에서 활동을 해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나 청해진 대사로서 해양무역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하는데, 태생(胎生)이 완도라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그의 태생지를 완도에서 찾아보려한데, 나온 건 그릇이나 그가 살았던 집과 그가 일을 봤던 건물 등의 흔적들이다. 관련이 있다면 장보고 부모나 가족들, 그리고 그의 인척이나 부하들이 살았던 흔적들일 것이다.
장보고는 무예(武藝) 실력도 뛰어났고, 장사(掌事)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었다. 신라를 중심으로 뱃길을 이용해서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무역을 했고, 큰 부를 축적했던 장보고, 한중일 역사서에 모두 기록이 된 인물이다. 당시 청해진은 지금으로 치면 부산항과 같은 역할을 했다. 주변은 상당히 번화했으며, 장보고와 청해진으로 인해서 신라 또한 국익(國益)이 있었으며, 위상 또한 좋아졌다.
청해진을 세계적인 국제자유무역항으로 만든 장보고,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이 뛰어난 장보고 같은 인물이, 그 당시 신라 귀족층(貴族層)에도 몇 명만 있었다면, 신라의 상황이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신라의 역사를 새롭게 썼을 것 같다.
과거도 그렇지만, 지금도 인재(人才)는 어디서는 나타날 수 있다. 인재를 찾고 활용하는 게, 나라와 국민의 국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보고가 위대한 인물로 받들게 되고, 그가 그리워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에서의 확장정책, 그리고 진출
장보고를 두고 신라 청해진을 세계적인 국제자유무역항으로 만든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 사람으로 왜 그럴까?
1200년 전, 서기 830년대 신라 청해진에는 천하의 한 인물로 인하여 세계가 흔들린다. 이유인즉, 장보고라는 인물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갖 물건과 외국 사람들이 몰려들곤 하게 서다다. 그는 해적을 소탕하고 바다 질서와 안정을 이루면서 해양로를 개척, 이른바 해상 패권을 장악한 뒤, 무서운 파워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이라는 군사에서 무역으로도 손을 뻗친다. 그는 오늘 날에도 그러듯이 군사력이 막강해야 무역도 막강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해상무역에 열을 올렸다.
과연 어떤 것을 했을까?
당나라에서 수입된 비단, 두루마기, 금띠, 채색비단, 흰 앵무새, 금은세공, 그릇, 공작 꼬리, 에메랄드, 물소뿔, 거북껍질, 영모 제품, 페르시아 직물, 지단 목재, 당나라 카펫, 상아로 만든 아홀(牙笏) 등 수입품(輸入品)들이 배를 통해 선착장에 무더기로 풀어졌다.
창고에 짐을 부리고 나면, 이번에는 당나라로 향하는 물품들을 무더기로 배에 실어 수출을 하는데, 과하마라는 작은 말, 약재인 우황, 인삼, 바다표범 가죽, 금, 은, 사냥매인 해동청, 개, 대화어아금.소화어아금.조하금.조하주.어아주.누응령 등의 고급 직물, 베, 머리털 등등이...
일본으로 향해하는 배에도 짐이 실린다. 칼, 금, 은, 새발짜리 솥, 비단, 명주, 베, 가죽, 말, 개, 노새, 말안장, 버선 등 신라 특산품과 함께 당나라에서 수입한 향료와 약품, 낙타 등이 배에 실어 수출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봉에서 들여온 명주, 명주의 원료인 면 등이 부려지는 수출입(輸出入)과 중계무역(中繼貿易)이 활발했다.
신라가 낳은 최고의 벤처정신을 가진 장보고의 활약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신라의 청해진은 세계적인 국제자유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고 있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며칠마다 당나라와 일본의 배가 몰려와 무역품(貿易品)을 산더미처럼 부리는가 하면, 신라의 특산품들이 무더기로 실려 당나라와 일본으로 떠나갔다.
서쪽으로 나가는 선단(船團)은 당나라의 산둥반도 덩저우를 시작으로 창장강 지역의 양저우, 중국 강남의 향저우, 광저우까지 사실상의 정기 항로를 운항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 등지로 진출해나갔다. 한마디로 신라인이 세계 무역 항구를 제 집들 듯이 한 것이다.
이란 장보고에 대한, 그 이름도 찬란한 장보고(張保皐), 그 이름에서 풍겨 나오는 원대한 꿈과 포부를 엿보게 만든 장보고라는 이름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정사에 각각 뚜렷하게 가록돼 있다. 그럴 정도로 장보고의 활약상에 훌륭한 인물로 보였고, 인식되었고 입증되었기에 기록을 아니 할 수 없는, 〈세계인의 인물 해상무역 개척자 장보고〉 로 특종으로 다루게 됐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 그는 ‘장보고열전(張保皐列傳)’ 살려 있고, 에도 기록돼 있다.
안타깝게도 신라 왕권세력은 그를 반역자(反逆者)로 몰아 죽였지만, 삼국유사 편저 김부식은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사서가 어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했다』 는 특필의 표현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또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이 저서 쌍천문집(雙千文集)에서 그를 가장 먼저 평가하고 나섰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서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두목의 저서를 바탕으로 중국의 정사도에 그를 ‘동이전 신라조(東夷傳 新羅調)’ 에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 일본에서도 정사인에 모두 실려 있다. 일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장보고 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은 기행분인 ‘입당구법예행기(入唐求法禮行記)’ 에서 전채의 약 3분의 1을 할애해 장보고와 청해진 네트워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런 훌륭한 인물인데, 신라 왕조와 귀족, 그라고 사회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해 줄커녕, 그의 성장가도와 역할에 대해 못 마땅하게 여기고 그에게 적개심만 키웠고, 결국에는 그를 죽이기까지 한, 참으로 애석하고, 아까운 인물이 사라져, ‘신라의 큰 별이 지다’ 라는 추모(追慕)와 함께 슬픔에 아니 젖을 수가 없다.
●장보고는 사라진 이슬 아닌 영원한 진주
신라의 신분제도에 회의감을 가졌던 장보고, 신라를 사랑했던 장보고, 그는 마음을 굳히기를 조국 신라는 나를 낳아주었지만, 키워주는 일에는 기대만큼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부모님한테 눈물의 작별의 인사를 올리고, 태를 묻은 전남 영암 선암마을을 마을 앞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다. 물결친 바다는 가슴처럼 출렁거렸고, 튕기는 물방울은 눈물처럼 적시었다.
당나라는 신분제도(身分制度)가 엄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통해 관직에 인재를 임용(任用)하는 등 신라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신라사회에서는 귀족층 말고는 평민층 등에서는 이름 석 자는 함부로 쓸 수 없는데다가, 출세는 불가능했던 것, 장보고는 그런 신라에서 벗어나 당나라로 가 그곳에서 무술과(武術)과 상업(商業)을 배운 그는 30살 무렵 당나라 서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 임관됐다. 입대한지 5년 만이다. 그의 나이 21세에...
평생을 도전하는 벤처정신을 보여준 장보고, 그는 과감하게 개인의 창발성(創發成)을 발휘할 수 있는 넓은 대륙 당나라로 건너갔던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군사는 물론 무역 등 상업에도 기술을 터득했다. 그곳에서 무령군의 소장으로서 성공을 이룬 그는 노예무역(奴隸貿易)으로 고통 받는 동포를 구하는 〈민족 프로젝트〉 를 스스로 기획하고 창업(創業)했다. 그 누구보다 도전(挑戰)에 도전을 거듭하는 삶을 산 것이다. 진정한 혁신가(革新家)의 이노베이션(Innovation) 장보고, 확실한 개척자(開拓者)의 파이오니어(Pioneer) 장보고였다.
다시 해적 소통에 성공한 뒤에는 1만 명의 군사력과 총체적 역량을 모아 청해진 무역산단(貿易産團)으로 전환한다. 나중에 왕족 김우징을 도와 왕성 공격에서 나선 것도 그의 도전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처럼 매 상황마다 도전정신으로 헤쳐나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고 본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를 이룬 장보고, 민족주의지도 국제주의의 시야와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 가르쳐줬고, 국제주의도 민족주의와 만나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교훈도 깨우쳐줬다.
지역학(地境學)의 대가 장보고, 그는 청해진이 바다를 낀 섬이라고 해서 그곳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 삼국무역의 중심지역이기 때문에 그곳을 거점으로 해적 소탕이라든가, 삼국무역도 가장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봤기에 완도 장좌리 섬을 청해진 기지로 삼았다. 이곳이 신라 중앙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비정치적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용인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그는 지리와 경제를 잘 읽은 탁월한 지도자였다.
외부확장형 인물 장보고, 그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새롭게 기획해서 선점하는 식으로 성공을 거두는 유형이다. 당나라로 도항(渡航), 해적 소탕 기지로서의 청해진 기획, 해적 소탕 뒤 청해진의 무역산단으로의 재빠른 변신 등이 다 그렇다. 그런데 그가 신라의 전통적인 중앙권력으로 진출 방향을 돌린 것은 이런 자신의 장점을 망각한 선택이었다. 새로운 땅이 아니라, 기성 진입자가 수백 년 동안 득시글거리며 피를 빨아먹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러던 단한번의 좌절이 그의 죽음으로 직결된다.
패배하지 않아본 자의 방심 장보고, 그는 늘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다. 그 결과 평민 출신으로 감의군사, 진해장군이라는 지위까지 오른다. 신라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신분 파괴적 계급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늘 성공만을 구가한 결과 그는 쉽게 사람을 믿는 단점이 있었던 것,
결국 믿든 사람한테 죽고 만다. 그가 죽자 청해진이 무너지고, 해양왕국의 꿈이 꺾인 것이 슬프고 슬플 뿐이다. 한국 역사에서 바다는 그렇게 막혀버렸다.
장보고는 사라졌지만, 신라는 어찌됐을까요?
영원한 신라 천년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울어’ 라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습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기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장보고, 이술처럼 사라진 장보고의 사무침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만 내립니다.
●장보고의 원대한 꿈은 좌절.실패의 무력감이나 끝이 아닌 반응과 학습의 기회
결핍(缺乏)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좌절(挫折)을 겪되, 그 과정 자체가 성취와 성장을 이끈다고 한다. 실패.좌절은 끝이 아니라, 회복탄력성과 성장의 발판으로 볼 수 있다. 장보고의 떠남은 무너지는 사건이 아니라, 반응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고 기회를 여는 기술로 재해석된다.
장보고의 좌절, 원대한 꿈은 한 자객에 의해 멈추고 말았다. 그의 좌절은 끝이 아니라 학습.성장의 과정으로 재해석 하며, 무력감보다는 도전(挑戰) 의지가 유지되고 있다.
‘결핍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다’ 라는 말처럼 장보고는 자신의 행위로 그 결핍을 보충하기 위한 과정을 통해 성취를 이루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다 그 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결핍의 존재란 좌절도 겪지만, 성과도 이루면서 조금씩 채워가기도 한다.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결핍임을 안 장보고는 결핍에 대해 절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장보고는 “결핍이 희망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고 하면서 그는 희망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그것은 지상의 길과도 같아, 길은 본래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그 길을 가다보면, 길은 스스로 내게 돼있다면서 그래서 ‘결핍은 희망이다’ 라고 봤다.
장보고의 결핍, 그는 ‘고난은 좌절이 아닌 희망의 보루’ 라고 했다. 그는 “어떻게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신라 조정과 백성들을 향해 던졌다. 이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것이 그를 청해진에 있게 했고, 안보와 경제를 추구한 배경이 됐다.
장보고는 이념 갈등 등 세계 곳곳에서 고난이 지배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만큼, 자신조차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여간 힘든 게 사실로 받아들였다.
장보고는 신이 이 땅에 와 승리를 완성할 그날까지 우리는 중간시간 속에서 여전히 탄식하며 살지라도 ‘고난이 희망의 보루’ 임을 확신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세에 당나라로 출국, 23년간 당나라에 거주, 18년간 청해진 근무 경력이 있는 ‘고난이 희망의 보루’ 라고 했던 장보고, 암살(暗殺)이라는 좌절이 아닌 도약의 기회로, 그의 원대한 꿈을 마음껏 오래도록 펼쳤다면, 백제와 신라로 되어있던 한반도를 평정해 통일신라로 다시 부활했던 위대함, 그 위대한 신라가 자신의 힘으로 발해를 품고, 고구려가 품었던 곳까지 진출하여 점령했더라면, 심지어 중국의 산둥반도를 비롯해 동남아까지 장악했다면, 신라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강국으로 자리매김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나의 활은 피하지 못하겠지” 좌절이 아닌 상대 나라를 넘기 위한 장보고의 성장법은 ‘인해전술적(人海戰術的)’ 인 성장법으로 그가 하는 행동마다 상대를 놀라게 했다. 그런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더 생명을 유지한 채, 그가 꿈꾸는 것을 수행했더라면, 아마도 신라는 반도국에서 드넓은 거대한 땅을 소유한 거대 국으로 천하를 호령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소국(小國)을 취급당하지 않는 거국(擧國)의 강한 〈당당한 대한민국〉 으로서의 세계와 어께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첨단산업을 일으킨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에 있어서는 세계의 으뜸이다. 나라가 좀 더 크고 자력을 갖춘 국가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보다는 더 아름답고 위대한 부강한 대한민국으로 성장가도를 걷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라가 크다고 다 부강하고 국력이 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구려가 중국의 땅까지 차지하며 한 시대를 군림하며, 당당한 한민족의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줬듯이 오늘날에도 그런 영토확장 속에 진행한 일의 첨단산업은 더욱 발전되고, 규모가 커졌으리라 본다. 우리의 영원한 숙제로 남은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으로 갈라진, 이 슬픔을 우리는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선진대열에 섰지만, 아직도 한편에는 불안감이 크고 부족함이 많다. 안보는 늘 우려가 되고 있는 상황이고, 평화는 영원하지가 않아 보인다. 언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평화로운 대한민국으로 안정을 유지한 채 경제부흥을 누릴지는 장담하지를 못한다.
청해진 방어진지 구축, 해상무역로를 개척.확장한 장보고가 그립다.
그는 해양질서를 바로 잡고, 무역을 원활하게 추진하게 했던, 아름다운 물보라-Spindrift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지금도 바닷가에는 배들에서는 파도에 의해 물보라(비말)를 만들지만, 과연 장보고가 만든 물보라보다 더 아름다울까 싶다.
물보라처럼 예축할 수 없이 튀어 오르는 슬픔과 고통, 그리움의 파편들이 여기저기로 튄다.
장보고는 “나는 말한다. 물보라와 물보라 사이에서, 그리고 이렇게 적는다. 파도, 너는 아름다운 물보라였다고...”
도대체 물보라가 무엇인가?
물보라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시적인 메시지에 관해 묻는 것은 무용한 일이지만, 장보고의 집요하면서도 파격적인 언어적 연출이 보여주는 것은 익명적 언어의 반복적 중얼거림, 찬란하게 부셔져 가는 장보고의 말과 행동의 파편들,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의미의 흔적들이, 순서가 없는 물보라, 합쳐질 수도, 나눠질 수도 없는 물보라는 오직 물보라만 반복하는 물보라를 지시할 뿐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세상 물정이 그러해 장보고의 물보라 실험으로부터 상징주의 사상가들의 이상주의적 흔적과 이상에 대한 노스텔지어적 오마주가 엿보이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는가 한다. 사회적 근본주의자 미학적 스타일리스트로서 장보고는 의미 너머의 세계를, 말과 행동이 일종의 독자적 사물처럼 자동사적인 야생성(野生性)을 구가하는 눈부시고도 매혹적인 감성적 풍경을 펼쳐내었다. 장보고는 끊임없이 읊조렸다. 멈춤 없이 움직였다. 다만 “물보라를 보라!” 물보라는 의미의 자기 함락(陷落) 속에서 태동(胎動)하는 장보고만의 감성적 언어와 행동의 ‘급진적(急進的) 자기 선언’ 이었다.
물보라를 일으킨 장보고는 ‘신라의 지평(地平)을 열다’ 라는 강력한 구호를 내세우며 ‘강한 나라, 부강한 신라’ 를 위해 청해진을 지진(地震) 냈다. 그 진동은 당나라, 일본, 동남아까지 흔들렸다. 그런 장보고가 더 신라를 위해 뛰었다면, 신라는 세계 최고의 국가로서 성장했을 것이다. 아마 신라를 패망(敗亡)하게 한 고려가 등장하지 안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왕과 제대로 된 조정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 놓으려 했던 장보고의 생각, 그 꿈이 신라몽(新羅夢)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만, 그가 생각한대로 됐더라면 신라의 융성(隆盛)으로 인하여, 막강한 국력으로 인해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안했을 것이며, 일본한테 당한 나라를 잃은 치욕(恥辱)의 역사로 기록되지도 안했다.
장보고 사후 100년 뒤의 고려 등장, 이미 신라는 장보고가 죽은 날부터 신라는 얼마 안가 패망할 것이라는 예시(豫示)가 됐다. 그리고 신라 없는 나라는 항상 불안한 나라로서의 나라 안보가 위태롭고, 미래가 불확실할 것으로 내다봤다. 신라 패망 후 1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불안정한 상태다. 언제 또 다른 한반도지도를 그려낼지 장담은 못한다. 미국의 손안에서 노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자주국가, 대한민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의 의해 대한민국은 존속(存續)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연명(延命)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나라로서의 세계 평화를 구현하라고 했던, 장보고의 사상과 꿈은 변함없다.
●장보고의 나이 수에 건 그의 꿈
장보고는 나이 17세에 이르러 꿈꾸는 꿈둥이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신에 대한 한 인물을 파악해보면서 “나는 궁복이다” 라고 활 궁(弓)자를 쓴 자신의 이름에 대한 깊이 생각해 봤다. 활은 무기지만, ‘어진 일’ 을 한다는 뜻임을 깨닫고, 그는 궁자에 대한, 그 의미를 제대로 펼쳐보겠다고 꿈둥이에서 ‘희망둥이’ 로서의 꿈과 희망을 안고 “아자!” 했다. 희망둥이로서의 밝은 빛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빛을 바리기만 해’ 라는 자신만의 다짐을 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앞으로 남기자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당나라로 가기 전 출범식을 갖고 꿈의 의욕과 함께 희망동이가 등장해 〈희망17궁복몽전개〉 의 시작을 알렸다. 〈希望17弓福夢〉 은 “배움 등으로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고,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신라의 백성들에게 기쁨, 환희, 축복, 희망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웃음과 위로, 공감 속 틈새의 빛으로 더 단단해진 신라 백성을 보게 될 꿈을 꾸었다. 〈드디어 빛을 찾아 떠나다〉 궁복 활동 기다리고 또 기다린 시간 꿈둥이라고 다 꿈둥이가 아닌 궁복의 꿈은 정말 특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