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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주일설교 시편63:1-11
본문: 시편63:1-11
제목: 은혜의 기억을 묵상하라!
오늘은 시편63:1-11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기억을 묵상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기억을 묵상하라!”
나이를 먹으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지만
일반적으로 기억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종종 어제 뭘 먹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심할 때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갔는데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가만히 서 있다가 생각이 나서
그 일을 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뇌 부활 약이라는 것을 먹는다고 해서
나도 따라서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사 먹는 것이 비싸서
병원에 가서 조제를 해서 먹으려고 했더니
제 담당의사가 검증된 것이 없으니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실패했던 기억 잘못했던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비참함과 슬픔과 고통의 자리로 가게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받았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행복해했던 기억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기억은
어떤 사건을 깊이 되새기는 중에
과거의 사건 속에서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한 기억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듭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두뇌 작용이 아니라
온몸으로 다시 체험하는 것이며 힘과 능력이 됩니다.
그것은 쓸쓸한 회고나 빛바랜 추억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완악해지고 죄에
물들 때마다 광야로 다시 나아가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 어렵고 힘들었을 때 만났던 하나님
그때 경험했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때 베푸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지금 어려운 시간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시편 63편의 개인 신뢰시로
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기도자의 갈망(1절-3절)
시라고 하는 것은 경험한 것을 쓰거나
느낀 것을 쓰거나 본 것을 쓰거나
바라는 것을 쓰기도 합니다.
시인은 1절에서 현재 한여름의 열기나
장기간의 기근으로 인해 완전히 메말라 버려
생명력이 소진된 죽의 땅과 같은 상태입니다.
요즘 참으로 뜨거운 여름날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 푸르고 힘이 있어 보이던 풀들이
힘을 잃고 맥없이 축 처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날이 오래되어 기근이 오면 그들의 생명력은
다 바닥이 나고 죽어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지금 시인이 현재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에게 쫓기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 때를 기억하며 시를 쓰고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시란 회복기의 삶을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결핍이나 고통이나 슬픔을 겪을 때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
회복될 때 시를 쓰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라고 하는 것은 정제된 언어로 쓰여집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렇게 고난의 때는 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를 지나고 나오면
그동안 고난 속에서 올라왔던 생각과 정제된 언어들이
시가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그는 광야에서 던져져서 아무도 찾는이도
돕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다른 도움을 청할 수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 밖에는 도움을 청할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시 시인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2절입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광야에 성소가 있습니까?
보이는 성소는 광야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쫓기는 신세로 광야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성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곳이 광야일지라도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임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는데
도울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장소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러한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여 외롭고 두렵고 불안하였지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야곱이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형에게 쫓겨 집을 떠나 밧단아람 삼촌 집으로 가던
벧엘에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을 보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 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인자하심에 생명보다 나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시인의 목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임재 속에서 경험한 것은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하심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생명의 위험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책임지고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찬양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무슨 병이 낫는다든지
무슨 좋은 일이 생긴다든지
무슨 돈이나 권력이 생겨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를 만나면서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고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주의 이름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할 때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장소에서
영상을 통해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전쟁도 아니고 천재지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모이지 못하고 각자의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을 세상을 비대면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비대면은 하나님을
비대면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만나지 못하고 드려야 하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공동체가 드리든지 혼자 드리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느 장소에서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잊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겪는 육체적인 그 어떤 고통
곧 그것이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교제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라는 존재는 등 따습고 배 부르면
하나님의 인자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압니다.
내가 돈이 많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압니다.
잘 먹고 잘살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인자를 깨달을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두십니다.
우리의 실수로든, 잘못으로든,
아니면 어떤 시험 때문이든 땅끝에 있게 합니다.
나 혼자 밖에 없다는 그 어디에도 도움이 없다는
그래서 낙망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옵니다.
그때 눈을 떠집니다.
아 하나님의 인자가 필요하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어야 겠구나
하나님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2.하나님에 대한 신뢰 고백(4-8절)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손을 들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이 할 일은 주를 송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삶이고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송축한다는 것은 손뼉을 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손뼉을 치겠다고 합니다.
나에게 손뼉을 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손뼉을 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 때문에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 때문에
나의 손을 들겠다고 합니다.
손을 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인다는 의미도 있고
나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돼지고기 삼겹살을 좋아하고
소고기 투 뿔 등심을 좋아하는 것은
기름진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는 일을
마치 기름진 고기를 먹음같이 만족하며
그렇게 행하신 주님을
자신의 입으로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찬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침상 누워 곯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이를 때까지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겠다고 합니다.
너무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서
그 말씀을 기억하며 밤이 새도록
그래서 새벽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되새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이 나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오른손 곧 가장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의 날개 아래 그늘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 상황에 대해
즐겁게 노래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침상을 어떤 곳이었습니까?
자신의 삶의 고통으로 인해 눈물로 지새던 곳입니다.
한숨이 있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하고 보니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장소가 되어
주의 날개 아래 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삶의 장소가 변화하게 됩니다.
슬픔이 기쁨의 장소가 되며
눈물이 웃음의 장소가 되며
낙망이 소망의 장소가 됩니다.
그렇게 행했을 때 시인이 느끼는 것은
한 몸인 부부처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되어
살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기도자의 확신(9-11)
이러한 시간을 경험한 시인에게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무슨 확신입니까?
시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멸망하여
깊은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쫓고 있는 자들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죽어서도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고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끔찍한 저주입니다.
아합과 그 자손들이 당했던 그런 저주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됩니까?
시인은 왕이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왕은 소송의 판결자로서 시인과 그의 원수들
사이의 갈등을 법과 정의에 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판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께 맹세한 자와
거짓말하는 자의 운명이 서로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는
입에 영원히 열리게 되지만
거짓과 악을 행하며 하나님 밖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입은
영원히 닫히게 될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던 시인은
절망 속에 있던 시인은 깨닫게 됩니다.
인자함으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
공의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더 이상 고난 속에 있지 않고
절망 속에 있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뻐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음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니
하나님은 원수를 벌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바라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시편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시인이 누렸던 그 은혜로
시인이 만났던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은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만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놓아두는 행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써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묵상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멀리 떠나버리신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그 장소를 성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던 것이 떠오르게 되고
그것을 묵상하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리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반드시 나에게 은혜를 주실 것을
앞당겨 확신하게 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선포함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담대함과 평안함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깨달은 바가 무엇입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이 땅에서 최고의 자산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생명보다 우리에게 만족함과 배부름을 선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이 인자하심 내 뿜는 광채는 우리가 최고라고 말하는
생명이 초라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과거에 함께 했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묵상함으로 현실을 대처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가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시인의 모습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면 곧 나의 과거 삶 속에 함께 했던
기억을 묵상하면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과 묵상은
미래의 희망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프고 힘든 그 장소를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가 되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