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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동읍 덕천교회 시작은 1916년 4월에 완주군 고산읍교회 정찬조 장로의 딸 정기향 자매가 삼례읍 수계리 덕천부락의 김중기씨와 결혼했다. 정기향 자매는 이웃에게 전도하여 4-5명의 새신자를 얻은 후 1924년에 사랑방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1926년에 삼례읍 수계리 686번지의 땅을 헌납하고 예배당을 신축했다. 친정인 고산에서 건축자재를 11 마차나 실어오고 마로덕(馬路德 L.O. McCutchen)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ㄱ”자 3칸 예배당을 건축하고 3-40명의 교인들이 출석했다. 그리고 이성옥 전도사를 청빙했으며 1927년 3월에 전북노회로부터 덕천교회라는 명칭으로 설립허가를 받아 마로덕 선교사가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현재의 봉덕읍 덕천교회
황 준 전도사가(1938.6~1944.9) 부임하여 6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1939년에 기와집 예배당 25평을 신축하였다. 1943년 12월에는 김춘호(최초교인 정기향 자매 아들), 최순홍 양씨가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아 조직교회가 되었고 1944년 8월에는 박판길 장로가 장로취임을 받았다. 1944년 9월에는 김제 난산 출신 이춘원 목사가 부임하였고 다음 해에 조국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쓰라린 역사 속에서 삼례. 봉동지역도 좌우익세력에 나누여 혼란이 계속되고 경찰관, 공무원, 기독교 신자 등 우익들이 공격받았다.
▲순교자 조현홍 집사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노당이 중심이 된 좌익세력들은 삼례읍의 지도자인 김춘호 장로(3대 국회의원)를 제거하려고 혈안 되었지만 김 장로가 익산으로 피신하자, 그 동생 김광호 집사 집으로 몰려갔다. 김 집사는 동네의 구장(이장)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좌경들은 김 집사를 농기구로 머리를 쳐서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친과 형이 찾아왔다. 좌익들은 “춘호가 나타났다”며 밧줄로 목을 매려고 할 때 그 부친 김중기 씨가 “죽이려면 나를 죽이라”며 그 앞을 가로막아 아들을 피신케 하고 자신이 밧줄에 목을 걸었다. 그 와중에서 김 장로의 부친도 목에 상처를 입고 피신했다.
난리 소식을 듣고 조현홍 집사가 찾아가 김춘호 장로의 공로를 말하며 수습하려 하자 좌익들은 조 집사에게 “너도 한패인 예수쟁이다”하고 장작개비로 몰매를 때리고 죽게 되자 모정에 버리고 가버렸다. 조 집사는 그때부터 몸져눕게 되었고 회생하지 못해 1951년 12월 31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밤에 즐겨 부르던 찬송 ‘주의 주실 화평’을 3번 부른 후, “천사들이 날 데리러 문밖에 왔으니 싸리문을 활짝 열어라. 예수님 잘~ 믿으라” 말씀하시고 천국에 입성하셨다. 조현홍 집사는 기도의 용사요 교회의 재정 관리자요 주민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교인이었다. 조 집사는 부인 임금옥 집사와 어린 5남매를 두고 순교의 잔을 받은 것이다.
순교자의 후손으로는 장남 조승기 목사(흑산도교회)와 손자 조정준 목사(방화동 행복한교회)가 목회자로, 차남 조만기(조광 환경 대표) 집사와 세딸(조남순 권사, 조길자 권사, 조정자 권사)들도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며 순교자의 유업을 이어 가고 있다.
▲정복량 목사가 고향교회에서 시무할 때
덕천교회는 개척자의 헌신과 여러 목회자의 희생과 순교자의 피가 밑거름되어 시골교회지만 귀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정복량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수석 졸업하고 통합교단에서 총회장을 역임한 존경받는 목회자이고, 김춘호 초대 장로는 익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30~40명이 목회자로 헌신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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