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一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
誠則明矣, 明則誠矣. (성즉명의, 명즉성의.)
[스스로 성실하면 반드시 밝아지니(지혜로워지고, 행복해지고, 분명해지니) 이것을 性이라한다. 스스로 지혜로우면(밝으면) 자연히 성실해지니 이것을 敎라 한다.
그러한 이치로 성실하면 밝은 것이요 밝으면 성실한 것이다.]
子思가 공자의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의 뜻을 받아서 논리를 세운 것이며 이 후의 글도 자사의 글로 이 20장의 뜻을 되풀이 한 것이다.
우리는 성실하지만 지혜는 완성하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지혜는 완성을 하지 못하였더라도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실이란 하지 않을지언정 하면 끝을 보는 것이니 성실한자는 무엇을 이루어도 반드시 이루는 것이다. 또 반대의 논리로 지혜가 있으면 반드시 성실하여질 가능성이 높으니 알고도 행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아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성실은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비록 좀 어리석어도 우직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많이 보듯이 비록 지혜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우선은 성실하도록 노력하자.
앞 에서도 말하였듯이 자사는 학자에 가까운 것 같다. 공자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정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스스로 갈등하고 해결하고자 많이 묻고 생각한 공자님은 말씀을 하시어도 항상
時中하는 것인데 子思는 학자에 가까워 말의 의미에 매달리고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그 정리한 것은 현장의 바로 그때의 그 일에 대한 말이 아니므로 時中이 아니어서
후에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게 많은 오해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글은 항상 性, 中庸, 孝 등 그 말의 의미를 알려주고 읽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나름
대로 이해하여 자신만의 생각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이룬 바가 있으니 그것을 제
외한 다른 것은 性, 中庸, 孝 등이 아니라 하며 서로 논쟁하고 시비하게 되니 진실
은 감춰지고 거짓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글이란 자신이 고민하는 바가
없이 읽을 때는 모두 단순한 지식이 될 뿐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인데
하물며 살아있는 글도 아닌 정의의 글은 더욱 그러한 것이다. 더 더욱 깨달음이란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더 생각해보게 해야 하는 것이니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
를 내려주는 것은 더욱 사실과 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책에서 지혜를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책에서 지혜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책에 있는 정의를 나의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설사 그 것이 공자님의 말씀이요 부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하여주고 또 남이 보아도 그러한 이치로 알아지지 않으면 그저 나의 생각 중에 또 하나의 검증 없는 지식을 보태놓은 것과 같으니 이러한 지식은 많이 쌓아두면 둘수록 나에게 고집만 늘게 하는 것이고 다른 이도 망하게 하는 것이다. 또 인간세상의 대부분의 문제가 이렇게 형성된 각자의 생각이 부딪치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만 쌓은 사람이 대중 앞에 서면 머리 속에 모아 놓은 꽤 복잡하고 멋진 논리를 자신은 전혀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떠들다가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갈 곳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고 나는 분명히 중용을 떠들다 왔건만 살면서는 도통 중용을 모르니 이것이 중인지 저것이 중인지 헤매다가 분명히 이 것이 중인데 왜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하고는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나 홀로 자만심만 키우는 것이다. 내가 나를 속임도 죄이거늘 하물며 남까지 헷갈리게 한 것이니 그 죄는 세세생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는 말씀을 들으러 시간을 내어 다닌다. 나의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여 많이 아는 자를 찾아가 배우는 것은 가상한 일이나 대개 설교나 강연은 일방적인 것이 대부분이어서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설하는 자도 모르고 말하며 듣는 자는 자신에게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오는 것이 오늘날에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요 강연인 것이다.
말은 부처님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설교하는 자의 소견이며
듣는 자도 저것이 하나님의 말이고 공자님의 말이다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듣고 오는 것이다.
우리가 스님, 목사님 신부님,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와서 또는 좋은 책을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말한 자도 모르고 한 것이고 듣는 이도 헛것을 듣고 온 것이다.
즉 효는 이러한 것인데 왜 너는 효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성실은 이러한 것인데 당신은 성실하지 못하여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사는구려.
주님, 공자님, 부처님 만이 옳은 말을 하셨으니 너는 교회에, 절에, 유교에 귀의하라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바로 되는 것이야 너도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라.
성실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하는 사람도 자기생각으로 말하고 듣는 사람도 자기 멋대로 듣고 와서는 이것이 성실이다 하며 주위 사람을 못살게 하니 이런 설교 아무리 들어도 소용 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바뀌어야 달라지는 것이지 설교나 강의를 듣는 것에는 내가 바뀔 법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초대교회처럼 모여서 기도하고 함께 머리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또
오늘부터 나는 착하게 살아야겠다.
오늘부터 깨끗이 살아야지
이제는 성실하게 살아야지
사랑을 실천함이 제일이니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러나 작심하면 삼 일이다. 그러니 삼일 후에 또 강의, 설교 들으러 가야 한다.
가서 듣고 또 작심하나 삼일 후면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우리가 다람쥐도 아니고 이 무슨 일인가. 점점 설교에 중독되어 마약과 다름 없이 되는 것이니 들으면 고귀해 진 것 같고 지나면 도로 묵이고 그러니 또 들으러 가야하고 가면 빈 손으로 가나 몇 푼 쥐고 가야 사람대접 받는 것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이세상이 조금이라도 살기 좋아질까?
현실이 이러하니 몇몇 용기 있는 이들은 이런 반복적 행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니 잘 찾으면 좋으련만 특별한 것을 찾다 보면 십중팔구 사이비에게 속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일상을 다 놓아버리고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든지, 참선 수행한다고 방안에 틀어박힌다든지, 새벽기도다 산상기도다 무언가 남이 하지 못 하는 것을 해야 한다 생각하고, 더 나아가면 스님 된다 수녀 된다 하여 가족을 떠나고, 스님 되어서는 보통스님들보다 더 특별한 곳 찾아가니 토굴 짖고 앉아보고, 장좌불와 하여보고 끝없이 특별하게 하여 보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도는 평범한 것이니
특별한 생각이나 행을 하면 더욱 도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도를 이루려거든 내가 바뀌어야 하고
내가 바뀌려거든 내 생각이 옳아야 하고
내 생각이 바로 되려면은 내가 틀린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틀린 줄 알려면은
많이 묻고 생각하고 현재의 내 생각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묻고 생각 할 것인가?
보현행자의 구도행를 보면 53인의 선지식(스승)을 찾아 다니니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식은 학자도 아니며 목사님도 아니고 스님은 더 더욱 아니다. 그 스승은
목수요, 창녀요, 이웃집 아주머니며, 동네 할배요, 보통사람들이다. 보현보살은
그렇게 묻고 생각하여 大知를 이루었으니 이 것이 친절한 가르침이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고 말하여 왔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고 진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은 틀린 것이 아니고 그 것이 다가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정확하여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일 뿐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 보아도 일리는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많은 보통사람의 생각을
모아 놓으면 다 알 수 있는 것이 이치이다.
보현행자의 구도의 길만 이런 것이 아니다 공자님도
노비에게도 물었다 하시지 않는가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경험이 많아서 말이
정확한 경우가 많으니 살아보고 하시는 말씀이므로 귀담아 들으면 얻을 것이 많다.
즉 젊은 목사님 말씀보다 더 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도인에
가까워 지는 것이다. 다만 젊어서부터 알면 이 세상이 좀더 빨리 좋아질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다시 학생이라면 정말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데 하고 말이다. 그러니 경험은 정확한 것이다.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은 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
공자님의 지혜를 배우고 싶은 자,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자,
자식을 잘 키우고자 하는 자,
결혼생활을 잘하고 싶은 자,
이 모든 사람들은 지식을 쌓고자 하면 강연 설교를 들을지언정 그러한 목적이 아니면 모여서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라 현실 속에서 고민하면 답은 항상 실질의 세계에 다 있는 것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일까? 성경의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부처님의 말씀도, 공자님의 말씀도, 진지하게 그리고 양심껏 대화하라 셋만 모여 대화해도 정답에 가까우니 (마태복음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바로 설 것이며 돈 밝히는 스님들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교회와 절의 크기는 작아 질 것이고 교회와 절의 의미는 커질 것이다. 어디 교회 절뿐이겠는가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사회도 모두 지금보다 성숙할 것이니
잘 생각해보고 사회를 바로 할 법이면 즉시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전 두가지 지혜를 생각합니다. 6바라밀의 반야를 지혜로 보는 그 지혜는 눈물이 있고 축축하고, 사랑스럽고, 행복을 느끼는 정서적인 지혜이고, 보통 떠올리는 지혜는 건조하고, 지식으로 아는 지혜, 정보가 있는 지혜 중 우리 불교의 지혜는 축축한 눈물이 있는 지혜 즉 반야를 생각합니다. 맞나요? 가르침 부탁합니다
지혜로운 말씀 같습니다.
실천되어야 할 마땅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직업의 수단으로서의 종교인,,,,돈만 밝히는 교회와절의 갖가지 행태들은 정말 싫어요,정말 어떻게든 고쳐져야 하는데,,,청치과님의 견해가 모두에게읽혀지고,반성하게 만드는 횃불이 되었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