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해서 무지몽매한 세력으로 부터 비난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하비콕스는 ‘신이 된 시장’으로 책을 썼다. 즉 시장이 신이라는 것이다.
현대는 종교의 나와바리가 심각하게 침식 당해 전통적 종교의 영향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옛날에는 아니 지금도 지구의 어느 후미진 한 모퉁이에서는 도를 닦기 위해서 혹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 몇 년씩 동굴에 들어가 개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인간의 의식을 발달시키는 프로그램과 이론이 잘 발달되어 있어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그 과정을 제대로 밟기만 하면 누구든지 도사나 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인지공학으로 뇌과학으로 자아초월 심리학으로 학문이 발전된 탓이다.
지금은 이미 한 물 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마디로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요, 새로운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이나 경향이 아니고 여러 현상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명칭이라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과학과 이성을 넘어선 기독교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빛 아래서 산산이 부서진 기독교, 그것이 서구 교회의 모습이다. 서구 교회는 신앙에 대한 근대의 도전에 KO 패를 당했지만 샤머니즘과 결합한 한국기독교는 반짝 빛을 보았지만 앞 날은 훤하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대중은 더 이상 거대담론에 관심이 없다. 이제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한 잡담거리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 이성, 계급, 민족 등과 같은 근대 역사학의 주류 지배를 이루고 있는 거대 담론 체제를 해체하고 개인의 다양성, 사상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미시적 담론을 추구한다. 즉 개성. 자율·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소품종 대량생산의 초기 산업사회 단계에서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트랜드가 바뀌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영생, 구원 등등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두 조각이 나는 종말이 오더라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고 교회로 달려가지는 않는 시대가 되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정립되었다.
즉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관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극성을 포함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그렇다면 신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은 알겠는데 신이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이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넘어(beyond in our midst) 있다"라는 의미이다. 초월(transcendence)로부터 내재(immanence)로의 轉移이다. 즉 신을 밖에서 찾으려는 노력보다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초월(超越)’과 ‘포월(匍越)’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초월이, 뛰어넘을 超 자에 넘을 越 자. 즉, ‘뛰어 넘다’라면 포월은, 길(기다) 匍 자에 넘을 越 자. 그러니까 ‘기어 넘다’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초월이 이 곳을 훌쩍 뛰어넘어 저 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포월은 이 곳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고 낑낑 기어가는 것이다.
가령 선녀가 나무꾼과 아이들을 버리고 그냥 하늘나라로 승천해 버리면 초월이지만 산골에서 잘 살아서 그 산골을 하늘나라로 만들려고 한다면 포월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다. 포복을 잘못 하면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진다. 그러나 포복에도 요령이 있는 것이다. 포복에도 높은 포복과 낮은 포복이 있어서 팔과 다리 전체로 기는 낮은 포복을 해야만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신병 훈련소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안다.
나는 요령 있게 세상을 기어가는 것 그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심지어 가슴에 끌어 앉고 속박과 번뇌 속에서 사는 것이다. 벗어나 보려고 애를 쓰지만 애초에 그런 길은 없다. 그러므로 포월을 훈련해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