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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전주지역 유적 답사 2013. 7. 6 대구에서 전주에 간다는 것은 접근성으로 따져서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전주의 문화유적답사를 한 적이 없었다. 마침 소요유적답사회에서 전주의 역사유적을 답사하는 기회에 동참하면서 전주의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경기전 위치도
흔히들 전주하면 한지, 부채, 비빔밥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번에 전주를 답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테조 이성계의 관향(貫鄕),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慶基殿), 전주읍성의 남문격인 풍남문(豐南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인 전동성당(殿洞聖堂), 전주향교, 오목대(梧木臺), 한벽당(寒碧堂), 각종 전통문화시설, 전통문화가 숨 쉬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마을 등 가장 한국인의 숨결을 호흡하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의 전주, 고려 조선의 두 개의 왕조를 꽃피운 천년의 저력만큼이나 전통생활양식의 근간인 한옥, 한식, 한지, 판소리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는 거점도시인 전주를 살펴보게 되었다.
전주시 문화유적 위치지도
천년고도 전주지역 유적 답사-경기전(慶基殿)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태조왕(太祖王)의 초상화(어진)를 모신 집이다. 정문에서 일직선으로 정전(正殿)이 보인다. 오른쪽 대나무 숲에 전주 사고(史庫)가 있고, 왼쪽에는 부속 건물들이 있다. 그리고 뒤로 돌아가면 조경묘(肇慶廟)와 어진 박물관이 있다. 조선 태조 어진은 201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출입문에 서있는 조선시대의 복장을 한 수문장
임금의 초상화(肖像畵)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어진은 삼국시대부터 고려ㆍ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제작되었다. 왕조시대의 어진은 조종(祖宗) 및 국가(國家)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있어 그 제작은 국가적인 중요행사가 되었다. 그래서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圖監) 또는 어진모사도감(御眞模寫圖監)이 설치되고 당대의 최고의 화원(畵員)들을 선발하여 주관화사(主管畵師), 동참화원(同參畵員), 수종화원(隨從畵員)이라는 이름아래 전신(傳神 : 초상화)의 막중한 소임을 맡겼다. 이렇게 완성한 어진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 진전(眞殿)이라는 별도의 건물에 봉안하고 관리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정전
경기전의 본전 안에 봉안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은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로 피난 다니면서 낡고 해짐에 따라 고종 9년(1872)에 새로 제작하였다.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모사케 한 것이 지금의 경기전의 어진이다.
정전의 다포와 단청
어진 제작 방법에는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의 3가지 방법이 있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어전(御殿)에서 사생하여 그리는 방법이고, 추사는 왕이 살아 있을 때 그리지 못하고 승하(昇遐)한 뒤 생전의 모습을 추상하여 제작하는 것을 말하며, 모사는 이미 완성되어 있던 어진을 모본으로 하여 옮겨 그리는 것을 일컫는다. 경기전의 어진은 모사의 방법으로 이룩된 이모본(移模本)이다.
어진이 모셔진 정전 내부의 방
정전에 모셔진 어진
이렇게 하여 경기전에 갈무리된 태조 어진은 불과 십수년 뒤, 갑오농민전쟁(1894) 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어진을 위봉산성(威鳳山城)으로 피신하여 위기를 면하기도 하였다.
경기전 전각의 역사를 알아보면 1410년(태종 10년) 완산(전주)·계림(경주)·평양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을 짓고 이름을 어용전이라 하다가 1412년(태종 12년)에 태조 진전(眞殿)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442년(세종 24년)에 전주는 경기전(慶基殿),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흥전(永興殿)으로 각각 이름을 달리 했다. 임진왜란 때 경기전이 불에 타 1614년(광해군 6년)에 다시 지었고, 1872년 전반적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운데 정전과 양쪽의 부속건물
경기전 정문 안으로 들어가니 일직선으로 홍살문과 바깥 삼문(外三門), 안쪽 삼문(內三門)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안쪽이 초상화(어진)가 모셔진 정전(正殿)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제일 먼저 보이는 홍살문은 가운데 태극문양(太極紋樣)이 있고, 태극 문양 위에 삼지창(三枝槍) 있다. 그 양 옆으로 각각 7개의 화살창이 있다. 홍살문이 언제, 무슨 의미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 시대 때에도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는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귀신(鬼神)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홍살문에 옷자락이 걸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따라서 홍살문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위해 세운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즉, 홍살문 안은 신성(神聖)한 곳으로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잡귀(雜鬼)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인 것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능묘(陵墓), 사당(祠堂), 서원(書院), 향교(鄕校) 등 제례(祭禮)를 하는 곳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그러다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조선시대에는 관청(官廳)과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를 기리는 전각(殿閣) 앞 등에 일반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홍살문 - 태극문양(太極紋樣)과 삼지창(三枝槍), 좌우 양쪽에 7개의 화살창
홍살문을 지나면 바깥 삼문(外三門)이다. 삼문(三門)은 세개의 문이란 뜻이다. 가운데 정문(正門)이 있고, 좌우에 곁문인 동협문(東夾門)과 서협문(西夾門)이 있다. 삼문은 궁궐과 관청, 절, 서원, 사당 등에 있는데, 궁궐, 관청의 삼문과 절의 삼문, 사당의 삼문은 서로 의미가 다른데, 사당이나 경기전과 같이 제사를 모시는 건물의 삼문은 가운데 문인 정문(正門)은 신이 드나드는 문인 신문(神門)으로 평상시에는 닫혀있고, 제사를 지낼 때만 열며, 사람들은 좌, 우의 곁문(협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지금은 우측 통행을 하기 때문에 우측 곁문으로 들어가고, 죄측 곁문으로 나오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고 신분에 따라 구분해서 드나들었다고 한다..
경기전의 외삼문(外三門)
바깥 삼문을 지나면 안 삼문(內三門)이 있다. 바깥 삼문과 안 삼문은 둘 다 맞배지붕인데, 바깥 삼문은 주심포(柱心包) 양식이고, 안 삼문은 다포(多包) 양식이다. 바깥 삼문은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고, 장식의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안 삼문은 기둥 위의 공포 사이에 또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이다. 다포 양식은 주심포 양식에 비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경기전의 내삼문(內三門)
안 삼문을 들어서면 태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신 정전이 있다. 가운데의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로 일반인들은 다닐 수가 없다. 초상화가 있는 정전과 직각을 이루는 덧집인 배례청(拜禮廳, 절을 하고 예를 올리는 집)을 위에서 보면 'ㅜ'자형(영어로 T자형, 한자로 정(丁)자형)이 된다. 이 형태의 집은 왕릉 앞에 흔히 있는데 이를 '정자각(丁字閣)'이라고 한다. 한자로 '정(丁)자형 집'이라는 뜻이다.
튀어나온 배례청(拜禮廳)으로 인하여 '정자각(丁字閣)'을 이루고 있다
정전의 덧집인 배례청의 풍판(風板 : 비바람막이 판)을 보면 가운데 양 졸대목 사이의 방풍널에 거북이 두 마리가 있다. 나무집들의 가장 큰 위험은 불이다. 따라서 경기전 정전에 불과 반대되는 물의 상징으로 거북이를 조각했다. 아마 화재의 재앙을 거북이로부터 보호 받고자 하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화마를 막기위해 풍판의 가운데 거북이 두마리가 있다
정전에서 내삼문을 거쳐 왼쪽으로 나오니 전주 사고(全州 史庫)를 복원한 실록각(實錄閣)이 나온다. 전주 사고(全州 史庫)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는 서고(書庫)이다. 이 실록각은 2층 다락집인데, 서책(書冊)을 보존하기 알맞은 옛 실록각의 구조를 음미(吟味)할 수 있고 실록각의 역사를 반추(反芻)하는 장을 제공해 준다. 1473년(성종 4년)에 건립되었다. 습기로 인해 책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樓閣)으로 지었고, 창을 열어 수시로 환기(換氣)를 하고, 3년에 한번 씩 포쇄(曝曬, 햇빛과 바람에 말리는 것)하였다. 포쇄를 할 때에도 사관(史官) 1명이 파견되어 규칙에 따라 시행하고, 실록의 내용이 누설(漏泄)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 첫 임금인 태조부터 25대 왕인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실록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편연체(編年體)인데, 사관이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석하여 주요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의 특별한 점은 왕뿐만 아니라 누구도 실록 편찬 자료인 사초(史草)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왕이 즉위하면 앞선 왕의 실록을 편찬하고, 편찬이 끝나면 사초는 물에 풀어 없애버렸다.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이를 창피하게 여긴 태종이 사관에게 이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며, 만일 기록하면 너와 네 가족 전부를 사형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사관은 왕이 사초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왕이 협박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사초에 기록해서 태종 실록에 실렸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진귀한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옛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재현한 실록각(實錄閣)
사고의 변천사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肇慶廟)가 있다. 조경묘는 조선 왕조의 씨족인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묘(祀廟)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이한의 21대 손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수리공사가 한창이라서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조경묘(肇慶廟)
경기전에서 남동쪽 담장 부근에 예종(睿宗)의 태실(胎室) 및 태실비(胎室碑)가있다. 작고 아담한 크기의 태실은 조선초기 고승들의 종형(鐘形)부도(浮圖)와 흡사하다. 태실비는 거북받침위에 통돌 하나로 이수(螭首)와 몸돌을 깍은 대리석비를 올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몸돌 옆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란 각자(刻字)가 태실의 주인공을 밝혀주고 있다.
예종(睿宗)의 태실비(胎室碑)
예종(睿宗)의 태실(胎室)
예종(睿宗)의 태실(胎室)과 태실비(胎室碑)
여기를 빠져나와 다시 정문 앞에 도착하니 다른 곳에서 볼 수없는 특이한 하마비(下馬碑)를 볼 수 있었다. 두 마리 사자위에 받침대를 놓고 하마비를 세웠다. 경기전의 존엄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에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표석(標石)이다. 왕, 장군 또는 벼슬이 높은 유명한 성인들의 태생지나 사당 앞에 세웠으며 경의(敬意)를 표하는 뜻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곳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것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至此皆下馬 雜人毋得人(지차개하마 잡인무득인)이라 새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1641년(광해군 6)에 세워졌다. 이 하마비는 태조 이성계의 존엄성을 나타낸 격조높은 하마비이다.
至此皆下馬 雜人毋得人(지차개하마 잡인무득인)
두 마리 사자 받침대 위에 서있는 하마비(下馬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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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벽한 답사기에다 적절한 사진이 정말 훌륭한 이보다 더 좋은 답사기를 본적이 없네.
다시 한번 얘기 하는것이지만 답사기를 모아서 출간을 하면 좋을것 같네. 멋 져 !
정말 훌륭한 재주를 갖었네.
똑 같은 사물을 보는데도 보이는 게 다르니....
처음처럼님, 구천아재 과찬의 말일세.
그저 부끄럽기만 하네.
좋은 곳 다녀오셨군, 덕택에 감상 잘 하였습니다. 전주 갔으니 점심은 비빕밥을 하셨겠네.
전에 전주에 볼일이 있어서 잠간 스쳐가고, 이번 전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처음 접하였다네.
자네 말과 같이 유명하다는 <종로회관>에서 전주비빕을 맛있게 먹었다네.
부지런도 하시지....언제 이렇게 자세하게 올려 놨는가? 나는 지금 새로 공부하는것 같네...나도 전주 유적답사는 첨이라네....
항상 소요유적답사에 참여하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데,
초남 권오규의 공로라고 생각하네!
경제부총리가 아니었다면 이런기회를 가질 수없다고 생각하네.
참으로 고맙네!
늘 고맙게 생각하네,
대단한 관찰과 표현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