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왕 단종과 조선 최고의 여인에서 노비로 신분이 강등되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의 이야기 입니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했고, 타고난 성품은 공손하고 검소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비극은 단종비로 간택되면서 시작되는데, 1454년(단종 2년) 1월1일, 문종의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 양녕대군, 정인지 등이 왕비 간택에 착수합니다.
최종후보 3명에 풍정창부사 송현수, 예원군수 김사우, 전사정 권완의 딸이 올랐고, 이 중 송현수의 딸인 그녀가 간택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수양대군의 뜻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월 25일 14세의 단종과 15세의 송씨가 백년가약을 맺게 됩니다.
이는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를 위하는 양 단종의 결혼을 추진해 송씨를 택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막역한 사이로써 일찍이 그의 여동생이 수양대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 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은 뒤에 수양대군은 송현수의 딸을 단종비로 맞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비극이 시작됩니다.
단종과 그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란(癸酉靖難)은1453년(단종1) 10월10일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태종이 일으킨 1차, 2차 왕자의 난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데, 수양대군과 한명희 등은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 걸고 거사했고, 그들의 대부분을 숙청하였습니다.
정란의 가장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던 안평대군은 즉시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습니다.
1455년 6월 또다른 위험 인물인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유배됨으로써 위험이 될 만한 인물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수양대군이 갖지 못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권위는 왕위였습니다.
결국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를 받아들여 국왕으로 등극함으로써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목상의 권위까지 모두 인수하게 됩니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남에 따라 정순왕후는 왕비가 된 지 1년 6개월여 만에 의덕(懿德)왕대비의 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곧이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왕대비 송씨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두물머리를 비롯한 단종의 영월행 유배길 곳곳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결국 세조 3년 (1457년) 11월 7일, 영월에서 고달픈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은 결국 그의 복위를 두려워한 세력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숙종실록에는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오는데,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할 때는 차마 올리지 못하고, 그저 단종앞에 엎드려 통곡하기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 옵니다.
그녀의 비운은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녀는 단종이 사사되고 난 뒤 노비의 신분으로 격하되었으며, 친정 집안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소꿉친구이자 그녀의 친정아버지인 송현수도 교형을 받아 처형되었으니 세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셈이었습니다.
수양대군과 송현수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우정이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1457년 6월 창덕궁을 나온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는 날이었습니다
귀양가는 단종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그녀는 청계천 영도교 (永渡橋)에서 작별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고, 멀리 사라져 가는 단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세조가 마련해 준 거처를 마다하고 그녀는 동대문 밖 청룡사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녀는 백성들이 몰래 가져다 주는 음식과 함께 생활한 궁녀들이 구걸해 얻은 것으로 겨우 연명하였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조는 쌀과 음식등을 하사했는데 그녀는 "내가 굶어 죽을지언정 원수가 주는 음식은 안 받겠다" 하여 다시 궁으로 돌려보내니 세조는 대노하였고 누구든 그녀를 도와주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어명을 내립니다.
생활이 궁핍하여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다가 호구지책으로 옷을 만들고 염색을 하며 빨래를 해 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청룡사 근처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명주를 널어 말렸던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색으로 채색되는 샘물)이라 새겨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궁핍한 생활을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불행은 끝이 없었습니다. 영도교에서 남편을 이별한 지 4개월, 남편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정순왕후에게 들려온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죽음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 뒤 동산에 올라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그녀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하라" 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냅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입니다.
사실 신숙주가 페서인된 정순왕후를 첩으로 삼았다거나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육신 사건과 같은 반정이 터지면 관련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는데, 이중 직접 관련된 인물들은 관노도 아니고 대신들에게 사노비로 하사한 사례가 특히 조선 초기에는 많았습니다.
때문에 사육신 사건 이후에도 그 부녀들이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는데, 그 목록이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숙주에게 내려진 것은 최면의 누이 선비와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뿐이었고,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저런 청을 했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엄청난 비판에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친정 집안은 멸문지화를 입었고 게다가 의지하고 지내던 시누이 경해공주(단종의 누이) 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설상사상으로 아들처럼 의지하고 사랑했던 경해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도 죽고 나니 그녀의 노년은 참으로 외로웠습니다.
그녀가 죽기 몇년 전, 경해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고 재산을 정리하여 노비문서와 함께 정미수의 아내에게 상속하였습니다.
82세가 되던 해,정순왕후는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가 죽을 때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묻힐 한 평의 땅도 없어서 해주 정씨(경해공주의시가)의 배려로 해주 정씨의 종중 땅(경기도 진건음 사릉리 소재)에 묻히게 됩니다.
남편 단종의 능이 영월에 있으니 그녀는 죽어서도 남편과 함께하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중에서 왕비가 왕의 곁에 묻히지 못한 경우는 태조, 단종, 중종밖에 없습니다.
함께 묻히지 못한 사연들이야 다 있지만 생이별의 아픔을 지닌 채 잠든 경우는 그녀의 무덤인 사릉이 유일합니다.
중종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와서 단종이 복우되면서 정순왕후도 함께 왕비로 복위되었습니다.
왕비에서 물러난 지 240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해주 정씨의 종중 땅에 묻혀 있던 그녀의 무덤도 왕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녀의 무덤 주위에는 이미 해주 정씨의 무덤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를 이장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의 무덤도 가까이 있었습니다, 시양자였던 정미수의 후손이 정순왕후의 제사를 봉사하여 왔던 터라 해주 정씨의 여러 무덤들을 이장시키지 않고 왕릉을 복위하는 것으로 숙종은 어명을 내렸습니다.
멀리 영월에 묻힌 남편이 그리워 그녀의 무덤 주위 소나무 가지들이 동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니 호사가들은 그녀의 그리움이 표현된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 (영월)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영원히 남편 곁으로 다가가지 못한 정순왕후, 그 혼령이 소나무에 깃들어 남편 곁으로 옮겨졌으니 실로 사후 478년 만의 해후라 할 수 있습니다.
~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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