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욥기 12장 1절 – 25절) 12: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5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21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23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24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25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과 친구들 간에 벌어진 1차 변론(4-14장)이 끝나는 결론 내용이자 2차 변론(15-21장)의 시발점이 되는 욥의 변론 내용(12-14장)입니다. 1차 변론에서 친구들은 고통 받는 욥을 위로하고자하기보다, 욥의 고난이 그가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는 인과응보 논리로 욥에게 회개만을 강요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지막 변론(11장)을 한 소발에 대한 욥의 답변이자, 그동안 욥의 고난의 원인을 가지고 온갖 변론을 했던 세 친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한계에 대한 반박과 함께,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기가 저지른 죄악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단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상황임을 고백합니다. 1차 변론에서의 욥의 답변(12-14장)은, 친구들에 대한 반론의 내용(12:1-13:19)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13:20-14:22)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말로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하고, 또한 사람들의 말로 상처를 받아 절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위로와 힘보다는 절망과 좌절의 상처를 안겨줍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묘한 심리적 이중성 때문입니다. 특히나 잘 나가던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그 사람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뻐합니다. 어쩌면 욥의 친구들이 그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태평무사한 자의 눈에는 재난에 빠진 자가 천더기(천덕꾸러기)로 보이고, 미끄러지는 자는 밀쳐도 괜찮은 자로 보이는 법이지.”(12:5,공동번역)라며, 욥을 위한답시고 정죄를 일삼는 친구들인 것 아니냐는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말이 많으면 빈 말이 많아진다. 많은 말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가?”(전6:11,새번역)라고 경계합니다. 야고보 선생도 우리에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8,18)고 일깨웁니다. 1. 욥은 친구들의 한계를 어떻게 지적합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욥을 위로하기보다 회개만을 촉구하며 책망하기에 급급해하는 친구들을 향해, 욥은 그들의 지혜를 어떻게 조소하며 반박합니까?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12:2-3). “백성”이라는 단어는, 부와 학문을 갖춘 부류로서 ‘유식한 자, 지혜로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본문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곤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너희와 함께 사라질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 너희가 한 말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라고 표현합니다. 현세적이고 도식적인 인과응보 논리로 욥을 질책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친구들이 펼친 지식적 한계와 지적 교만에 대한 욥의 반박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욥 앞에서 다들 혼자 똑똑한 척 떠들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은 욥은 나도 그 정도는 안다면서,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라고 친구들의 지혜를 풍자적으로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토로합니까?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12:4). 욥은 위문하러 온 친구들이 위로하기는커녕, 자신을 “웃음거리”와 “조롱거리”로 삼았다고 분노합니다.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썼고 그 기도의 응답도 받았었다는 고백입니다. “의롭고 온전한 자”라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위선과 가식이 없이 하나님 앞에 바른 자로 살려고 애썼다는 고백입니다. 그러한 자신이 시련을 당하자, 친구들로부터 조소 섞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부당한 처사에 대한 탄식이자 반박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친구들이 고난과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해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친구의 재앙을 고소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며,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12:5), 곧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새번역)라고 분노하며 탄식합니다. 2. 인과응보 논리의 한계를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위로해준답시고 하는 말들이, 마치 혼자만 다 알고 똑똑한 척 행동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대부분은 어떻게 해야 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힘들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상황과 시간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수많은 말로 고통 받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그 잘못을 고쳐주려고 애쓸 때 그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욥이 쉴 새 없이 충고한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12:2)라고 조롱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선생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며, 오히려 우리의 충고가 논쟁을 불러일으킬 때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3:16)고 경고합니다. 오늘 욥도 친구들에게 너희가 아는 그 잘난 인과응보 논리의 지혜로만 내 문제를 보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12:6) 곧 “강도의 장막에 도리어 평안이 깃들이고, 하느님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자가 오히려 태평하다네”(공동번역)라며,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한 경우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왜냐하면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마지막으로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11:20)고 악담을 퍼부은 것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악한 자는 세상에서 형통할 수 없고 반드시 재앙과 심판이 임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반박이었습니다. 사실 타락한 인간은, 재산과 권력과 쾌락에 대한 남다른 집착과 탐욕의 열정으로 살기에 한때 번영을 누리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악한 자들의 형통을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12:6)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악인의 형통을 하나님께서 잠시 용납하시는 이유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고 밝힙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단순히 악의 결과로만 보지 말 것을, 친구들에게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는 문제를 통해서 제기합니다. 따라서 욥은, 나아가서 선악의 개념이 없는 짐승들이나 조류나 식물들과 바다 고기들이 겪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고 반박합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12:7-8). “짐승”은 땅에 있는 동물과 가축을 가리킵니다. “땅”은 육지 식물과 파충류를 가리킵니다. 욥은 특별히 “네게”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욥을 정죄했던 친구인 “나아마 사람 소발”(11:1)을 향해서 자연만물“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네게 설명하리라”고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소발”이 욥을 향해서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11:12)며, 아무 생각이 없는 “허망한 사람”과 고집스러워 변화가 쉽지 않은 “들나귀 새끼”로 비유하여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은 자연만물의 운행 섭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12:9)고 묻습니다.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12:10)며, 피조물 가운데 증거 되는 하나님의 광대하고 오묘하신 주권적인 섭리를, 어떻게 다 설명할 것이냐고 친구들에게 반문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세워졌고, 그의 통치 섭리 아래 놓여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최소한 이것만큼은 분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을,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12:11)고 친구들에게 반문합니다. “입” 곧 혓바닥이 짜고 맵고 싱거운 다양한 “음식의 맛”을 분별해내듯이, “귀”도 듣는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들 생각만을 강요하지 말라며, 듣는 자가 알아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주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또한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고 변론합니다. “명철”은 이해력과 판단력을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나이가 들어가면 그 정도는 다 알아서 판단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책망이었습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12:2-3)고 반박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어떻게 말합니까? 욥은 이어서 친구들에게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2:13-14)고 고백합니다. “지혜”는 자연의 이치와 존재하는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권능”은 지혜의 계획과 목적과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계략”은 ‘모략’(개역) ‘슬기’(새번역) ‘경륜’(공동번역)으로도 표현하며 목적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을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힘을 의미하며, “명철”은 ‘이해력’(새번역) ‘판단력’(공동번역)으로도 표현하며 옳고 그릇된 것과 정결하고 부패한 것을 꿰뚫어 분별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는 말처럼, 인간은 세월의 경험과 학식을 통하여 지혜를 쌓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나이만큼의 지혜를 가지지 않은 자는, 오히려 그 나이만큼의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랜 시간의 경험을 통해 쌓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달리, 본질적으로 태초부터 가지고 계신 속성이라고 욥은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32:39)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오늘 욥도 이처럼 하나님은 한 국가와 세상의 모든 것을 세우기도 하고 멸망하게도 하시며, 한 인간의 운명을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2:14)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욥이 당하는 고난이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사건인 것이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자연만물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보지 않느냐는 것을,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12:15-16)라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 가뭄과 홍수의 재해가 계속 반복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아니더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생사화복의 인간관계조차, 우리가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하는 것 아니더냐고 고백합니다. 세상만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뜻대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세상의 지혜자들과 권력자들의 양태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은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12:17)라고 고백합니다. “모사”는 ‘지혜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무리 지혜가 깊어도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벌거벗겨” 끌려가는 치욕과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장” 역시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판단해야하는 역할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분별력을 빼앗아버리면 하루아침에 “어리석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이들의 생각과 눈을 가려버릴 때가 있는 것을 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12:18-19)라고 고백합니다. “왕들”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권력자들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풀어주시고 오히려 그 권력자들을 결박하거나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제사장들”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주권에 대한 강조입니다. 셋째로,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12:20-21)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욥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충성된 사람들의 말” 곧 신임을 받는 자들의 말이라고 해서 항상 통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었다고 늘 올바른 판단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귀한 사람들이라고 항상 존경 받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힘 있는 자도 하루아침에 그 힘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악한 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1:28,2:2)고 일깨웁니다. 욥은 또한 세상의 전체 역사와 만물을 위대하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섭리로 다스리고 운행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12:22)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깊이 감춰져있던 악한 자의 은밀한 계획과 죄라 할지라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셔서 숨겨진 사악함을 폭로하신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소발의 말처럼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1:11)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소발도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욥을 정죄하는 데 썼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는 사실 논리적으로는 대부분 다 맞는 신앙적 권면이었습니다. 문제는, 욥의 고통과 그 심정을 헤아려주려는 마음은 전혀 없이 그를 무조건 회개케 하고자 정답만을 외치며 설득하려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하려는 강요의 자세가 아니라 같은 눈높이로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와 말에 공감할 때 스스로가 납득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자세입니다. 둘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12:23)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했던 고백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증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지만 종교적 열정만 있었지 죄악에서 돌이키는 신앙적 노력은 하지 않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셋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12:24-25)고 고백합니다. 백성을 온전히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가진 국가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서지 않을 때, 그들의 “총명” 곧 분별력을 빼앗으셔서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를 파멸에 처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친구들에게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12:3)라고 조소한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세상에는 자신의 지식과 힘과 가진 것을 자랑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함께 해주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다’는 말의 영어 단어가 ‘understand’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럴 때 그 단어의 의미가 ‘under+stand’ 곧 ‘밑에 서다’는 의미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위에서 교만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밑에 서서 그 사람의 입장과 상황과 처지와 말을 듣고자 하는 자세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욥을 위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가를 알면서도, 오히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11:2)라는 질책과 정죄를 일삼았습니다. 세상만사가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생각하는 논리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발생하는 문제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고통이 있고, 또한 신앙인의 고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욥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재난과 고통에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9:24)라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종말의 심판 때까지 이 땅에 선과 악이 혼재된 모순과 불합리가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이유와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이들이 복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고 일깨웁니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2-23)며,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이 직면한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인가에 대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연약한 우리 인간의 실상이라는 것을 또한 잘 드러내 보이는 부분 아닐까요? 우리가 신실한 믿음이 무엇인가는 누구나 잘 알고 또 변론할 줄은 알지만, 우리의 실체는 막상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히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