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봉 남릉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을 데려 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내 앞에 있는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 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 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에서
▶ 산행일시 : 2017년 12월 30일(토), 흐림, 미세먼지
▶ 산행인원 : 19명(중산, 악수, 감악산, 대간거사, 한계령, 캐이, 더산, 버들, 모닥불,
산정무한, 인치성, 수담, 사계, 상고대, 두루, 숙이, 칼바위, 신가이버, 메아리)
▶ 산행거리 : 도상 10.7km
▶ 산행시간 : 6시간 30분
▶ 교 통 편 : 전철 이용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8 : 10 - 불광역, 산행시작
08 : 52 - 용화공원 지킴터
09 : 29 - 족두리봉(367.3m) 안부
10 : 35 - 향로봉(香爐峰, 527.4m)
10 : 45 - 비봉(碑峰, 560.3m)
11 : 10 - 승가봉(僧伽峰, 567m)
11 : 45 ~ 12 : 34 - 청수동 암문(淸水洞 暗門), 점심
13 : 05 - 보국문(輔國門)
13 : 25 - 대동문(大東門)
14 : 40 - 백련사공원 지킴터, 산행종료
1-1. 산행지도(2014년 판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 산행지도(2014년 판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2-1. 청수동 암문 아래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뒷줄 왼쪽부터 한계령, 산정무한, 인치성,
모닥불, 신가이버, 버들, 대간거사, 캐이, 상고대, 중산, 칼바위, 감악산, 사계, 앞줄 왼쪽부터
더산, 두루, 메아리, 수담, 숙이
2-2. 족두리봉
▶ 족두리봉(367.3m) 안부, 향로봉(香爐峰, 527.4m)
“(…) 둘레가 시끌시끌하던 시절도 지나고, 정다웠던 벗도 내 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인간세
상인데, 산만은 언제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북한산은 그 덩치에 버거울만한
일천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우이동 쪽에서 쳐다보면 빼어나게 출중한가 하면, 불광동 쪽
에서 보는 육중한 듬직함이 있고, 세검정 구기동에서 바라보는 가파른 설렘임이 있는가 하
면, 또 그 속에 군창지의 호젓한 골짜기가 소리 없이 엎드린다.”(김장호, 『韓國名山記』, ‘북
한산’에서)
오늘 같은 날 멀리 나갔다가는 해맞이 보러가는 행락객에 치일 것이 뻔한지라 오지산행 송년
산행으로 북한산을 선정했다. 결코 북한산이 만만해서가 아니다. 깊숙이 아껴두었던 비장의
산이다. 당초 산행계획 또한 야무졌다. 불광동에서 족두리봉을 넘는 것으로 시작하여 백운
대, 영봉 넘고, 왕관봉 넘어 우이령 지나 도봉산까지 내쳐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홀로 산행이 될 것을 염려하여 탈출하리라 작정하고 나대로의 배낭 짐을 꾸렸
다. 발걸음이 산행시작부터 꼬인다. 만남의 장소로 불광역을 택한 것이 이상했다. 9번 출구
로 나갔으나 미로에 둘러싸인 동네 한복판이다. 네거리 건너고 건너서 빌딩 모퉁이 돌고 돌
아 언덕바지 오르고 어렵사리 북한산 둘레길 데크계단 오른다.
처음에는 직등할 것처럼 기세 좋던 둘레길은 산자락을 빙빙 돌아간다. 혹시 산자락 뚫을 데
가 있을까 하고 고개 들어 쳐다보는 족두리봉 언저리는 시꺼먼 암벽이 둘러있고 주변 철조망
은 흑심을 품지 못하도록 엄중하다. 다소곳이 둘레길을 따른다. 불광사 절집 옆을 내려 동네
대로로 떨어진다. 도로변 가판대에 등산용품이 늘어선 것으로 보아 이 근처가 등산로 입구
다. 둘레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애로사항이 많다. 등산객들더러 부디 조용조용히 다니시라
는 표지를 줄줄이 붙여놓았다.
용화공원지킴터를 찾아냈다. 너도 너도 잔뜩 껴입었던 겉옷을 벗고 비로소 산행 길에 든다.
소나무 숲속 소로의 바윗길이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족두리봉 자락의 슬랩 암벽이 까칠하면
서도 따스하다. 땀나게 한 피치 오르고 암반이 나온다. 마침 목도 컬컬하것다 입산주 탁주 마
신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왼손을 가리고 마신다.
한 차례 가파른 슬랩 오르고 주등로 따라 족두리봉 남벽 밑을 돈다. 이럴 바에야 아까 걸은
둘레길의 연장이다. 돌길 다듬은 협곡을 잠깐 오르면 족두리봉 직전 안부다. 다만 눈으로 족
두리봉 암벽을 더듬어보고 발길 돌린다. 걷기 좋은 숲속 길을 가다 왼쪽 사면으로 비켜들어
오뎅타임을 마련한다. 신가이버 님 작품이다. 김치도 썰어 넣었다.
향로봉 오르는 길은 바윗길 슬랩이다. 걸음마다 경점이다. 원경은 짙은 미세먼지로 가렸지만
근경은 늘 그렇듯 가경이다. 뒤를 돌아보면 족두리봉 암봉이 훤칠하고 정면에는 향로봉 암릉
이 장성 장릉이고 그 옆으로는 비봉의 남릉 암봉이 북한산 일원임을 당당히 주장한다.
가파른 슬랩을 오른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많아 홀더로 알맞으니 오르기가 조금도 까다롭
지 않다.
3. 족두리봉
4. 가운데는 비봉 남릉
5. 향로봉 연봉
6. 뒤쪽이 비봉 남릉
7. 비봉
8. 비봉 남릉
▶ 비봉(碑峰, 560.3m), 승가봉(僧伽峰, 567m), 청수동 암문(淸水洞 暗門)
향로봉 남벽. 제법 짭짤한 세미클라이밍 코스였다. 손바닥에 아직 옛날의 짜릿한 여운이 남
아 있다. 지금은 위험구간이라 목책 두르고 초소 세우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대
로인 주등로 따라 돈다. 바위 턱 오르고 응달진 내리막 슬랩 몇 미터는 빙판이다. 그래도 아
이젠을 맨다. 박석 깔린 긴 오르막은 향로봉 직전의 야트막한 안부로 이어진다.
안부마다 여러 등로와 만나고 등산객들은 차츰 행렬을 이룬다. 이제 주릉 등로는 빙판이다.
발밑 아이젠 발톱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사뭇 경쾌하다. 비봉을 직등하는 이가 없다. 레이
백 자세로 오르던 암벽을 생각하자니 손바닥에 땀이 괸다. 빙판인 왼쪽 사면을 길게 돌고 비
봉 동릉 오르는 이도 없다. 내가 오르지 못할 바이니 적이 맘이 놓인다.
오른쪽으로 승가사 가는 갈림길을 지나고 이어 너른 헬기장 지나고 비봉능선의 명물인 사모
바위다. 예전에는 이 사모바위를 두고 여러 추측을 했다. 사모(思慕)인지, 사모(斜帽)인지,
사모(紗帽)인지 하고. 숫제 인파에 휩쓸려 간다. 다행히 진행방향이 모두 한 방향이다. 승가
봉 슬랩을 오르기가 약간 까다롭다. 승가 봉은 빼어난 경점인데 오늘은 미세먼지로 사방 흐
릿하다.
승가봉을 내렸다가 통천문 지나고 Y자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암릉인 문수봉 남릉으로 이어
지고 왼쪽은 청수동 암문으로 가는 길이다. 문수봉 남릉을 오르는 길도 조용하다. 나로서는
퍽 다행한 일이다. 청수동 암문을 오르는 길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너덜길이 길고 가
팔라서다. 차라리 임팩트하게 문수봉 남릉을 오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수동 암문. 북한산 산행교통의 요충지다. 북한산성 행궁 터로 내리기도 하고, 문수봉을 오
르기도 하고 의상능선을 가는 길목이다. 남장대 쪽으로 약간 오르기만 해도 문수봉 남릉의
설경이 한 경치한다. 의상능선 쪽은 캄캄 흐렸다. 어느 덧 점심시간이 가까웠다. 주릉에 들어
서는 이처럼 대부대가 점심자리 펴기가 마땅하지 않을 터이고 대성암 쪽으로 내려 설원에 자
리 편다.
점심시간도 산행의 중요한 한 과정이고 분수령이다. 무엇보다 여러 악우들과 공식(共食)하
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서로 마주보며 아무 일도 아닌데 웃고 또 웃고, 마시고 또 마시
고. 얼굴이 상기한 듯 불콰해지고 산까지 잡아먹기에 이른다. 도봉산이 물 건너가고, 이미 금
이 간 사발인데 영봉, 육모정이라고 남아나지 않는다. 마지노선인 하루재(혹은 용암문 도선
사)도 무너졌다.
대동문 진달래능선으로 낙착한다. 불감청고소원이다. 이나마도 산성주릉 길은 군데군데 암
릉으로 미끄러울 거라며 설사면을 돌아서가자고 한다. 설원을 내린다. 눈밭에 널린 단풍나무
낙엽이 여기 눈이 만년설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대대적인 불사 중인 대성암 근처에서
오른쪽 사면을 올랐다가 옆으로 돈다. 눈길이 잘났다. 지능선을 넘고 넘는다.
9.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비봉
10. 사모바위(紗帽--)
11. 왼쪽이 비봉, 앞 오른쪽은 사모바위
12. 앞은 나한봉, 왼쪽 뒤는 나월봉
13. 왼쪽은 문수봉, 오른쪽은 보현봉
14. 의상능선, 왼쪽부터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15. 가운데가 문수봉, 그 왼쪽 안부는 청수봉 암문
16. 문수봉 남릉
▶ 대동문(大東門), 진달래능선
보국문. 잠시 숨 고르고 성곽 길을 오른다. 눈 쌓여 더욱 날렵한 칼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대동문이 이른다. 오래 휴식한다. 곧 있게 될 저녁이 부담스럽다만 계절의 진미인 신가이버
님의 배추전을 마다할 수가 없다. 탁주 없는 맨입으로도 맛있다. 대동문을 나서고 대로인 진
달래능선으로 잡는다. 산행은 확실히 파장이다. 줄달음한다.
오늘은 용암문 만경대 동벽이 어떤 모습일까? 진달래능선을 가는 뜻인데 아쉽게도 그 윤곽
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흐릿하다. 더 볼 것이 없다. 아이젠 풀고 315m봉 직전 안부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 튼다. 돌길 골짜기로 난 주등로다. 양지쪽이라 봄날처럼 훈훈하다. 아스팔트 포
장한 대로와 만나고 현곡 양일동, 심산 김창숙, 동암 서상일의 선생을 묘소를 지난다.
인치성 님은 도로 옆에 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 묘소에 올라가 큰절을 올렸다. 그렇게 하지 않
을 수 없다고 한다. 그 분들의 의기를 생각하면 한 걸음 한 걸음을 소홀히 걸을 수가 없다. 막
판까지 씩씩하게 걷는다.
시인이자 산악인인 김장호(金長好, 1929~1999)의 북한산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그가
『韓國名山記』의 ‘북한산’을 마무리하며 쓴 자작시 일부를 인용하며 송년산행을 마친다.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 밑을 헤집고,
하냥 기어오른 마루턱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나를 만났다.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사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북한산!
17. 청수동 아래에서 점심식사 마치고
18. 칼바위
19. 대동문과 중산 선배님
20. 대동문, 현판 글씨는 집자한 숙종 어필이다
21. 용암봉, 만경대, 인수봉이 흐릿하다
22. 용암봉, 만경대, 인수봉이 흐릿하다
첫댓글 새해에는 아디스아바바처럼 마구 달려주세염.
새해에는 더욱 강건하고 흥미진진한~
중단없는 산행입니다 !!!
새해에도 형님의 아름다운 필체를 일주일에 한번씩만 보여주세요 건강하시고, 복 마니마니 받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