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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꼭 필요한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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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꼭 필요한 사람
어제 저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고 욕망을 끊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라고 아주 짧은 강론을 한 바 있는데
오늘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회개가 바로 사랑과 선행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단식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과 선행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이 고생하는 이를 흡족하게 하고,
병든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지금 세계적으로는 전쟁과 지진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고,
멀리 가지 않고 우리 주변만 해도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 많은데
자기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 우리가 단식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주님을 위해 단식한다 해도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지요.
비근한 예로,
지금 형제가 가난하고 병까지 들었는데
그런 형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모에게 보약을 지어드린다면
그 돈으로 형제 도우라고 하시지 보약 드실 부모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약이 필요 없고 우리의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보약이 필요하고 우리 사랑이 필요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지
하느님께 애정결핍이 있으시거나
그래서 우리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하느님은 Self Sufficient God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으시고,
하느님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고 자체적으로 흡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웃을 흡족하게 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흡족하게 하실 거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불만이 많고
우리의 불만을 채워달라고 자주 징징대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느님께.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남을 흡족하게 하냐고 또 징징댈 수 있는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하느님과 복음의 주님은
이제 애 짓은 그만두라고,
언제까지 애처럼 젖 달라고 징징댈 것이냐고,
이제는 네 젖을 아기에게 물릴 어른이요, 엄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사랑할 수 있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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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하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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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을 자처하는 죄인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실패인 듯이 보일 수 있으나 믿음은 희망을 이루어 줍니다.
성 안또니오 아빠스는 어느 주일 성당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다음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 는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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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들 중에 ‘도시빈민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5년도 힘든데 어느덧 10년을 넘기고 20년째 하는 신부님들입니다. 봉천동,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에 건물을 얻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건물은 사제관이며,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이며, 친교를 나누는 사랑방이며, 업무를 보는 사무실입니다. 주방을 맡아 주는 직원도 없고, 사무실을 맡아 보는 직원도 없습니다. 모든 업무는 신부님이 도맡아 합니다. 신부님들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거리미사를 집전하였고,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도 거리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서도 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가을의 낙엽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신부님들은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곳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창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출소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대출해주는 은행도 만들었습니다. 남들은 모두 꽃길을 원하는데 굳이 가시밭길을 찾아다니는 동창 신부님들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어서 자랑스러우면서도 낮은 곳을 찾아가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10년째 선교사로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이 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과테말라 현지에서 지내면서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사제가 되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굳이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기름진 밭에서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밭길에서도, 돌밭에서도 땀 흘려 1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10년 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보내 주는 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북새통입니다. 납치의 위험도 겪어야 했고, 총을 든 강도도 만났었고, 온 몸이 썩어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라는 생각입니다.
소록도에서 50년을 수도자로 지내던 수녀님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평생 한센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봉사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편지 한 장 남기고 수녀님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우경식 선생님은 요셉의원을 설립하셔서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선생님들 도와서 요셉의원에서 3년간 봉사하였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틀니’를 만들어 주신 강대건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동안 진료한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독고 노인들에게 명절 때면 떡을 드리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형제님입니다. 저는 그 선행을 면장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목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의 빛을 비추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도와 화려한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사목자와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도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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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외국어를 잘 못합니다. 솔직히 언어에 재주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노력 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말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군요.
책을 읽다가 ‘홍소를 터뜨렸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소’. ‘소’자야 웃음 소(笑)일 것 같은데, ‘홍’자는 한자로 무엇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넓을 홍(弘)일까요? 아니면 붉을 홍(紅)일까요? 그래서 사전을 보니 홍소(哄笑)에서 ‘홍’은 ‘떠들썩할 홍’이었습니다. 매우 크게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가 제 형제들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간적이 있습니다. 이때 묵은 한옥팬션 이름이 ‘서로’였습니다. 짝을 이루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서로’라고 생각했는데, 한자로 ‘서로(徐路)’라고 쓰며 천천히 걷는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어를 잘 못해도 우리말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말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이 역시 노력 부족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알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득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 길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을 알려고 온 힘을 기울일 때, 그 간격은 좁아질 것입니다. 혹시 그 좁아짐에 기뻐서 주님도 또 자기 자신도 ‘홍소’를 터뜨리지 않을까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의 직분은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니 세리는 더 돈 욕심을 세웠고, 정의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도 부르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인들 모두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스스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기뻐서 ‘홍소’를 터뜨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홍소’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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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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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따름의 여정
-끊임없는 회개-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86,11ㄱㄴ)
어제의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10월초에 피정왔던 자매가 거의 5개월만에 다시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20대 중반의 착한 아들을 잃고 왔는데 이번은 그사이 60대 초반의 건강하고 착했던 남편을 잃고 답답하고 아픈 마음에 피정차 온 것입니다.
“죄가 너무 크고 잘못이 참 많습니다. 남편은 참 착하고 성실한 분이었고 끝까지 일하며 책임을 다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런 저에게 남편은 개의치 않고 충실했습니다. 나를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동안 냉담했는데 작년 세상 떠나던 즈음 12월에는 열심했고 2개월 동안의 시골 노동현장에서도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 합니다. 건강했던 분이 12월 그 추운날 눈이 많이 오던날 야외 화장실에서 변을 보던중 그대로 운명했습니다. 바로 그 전날 친구에게 보낸 카톡 내용입니다.
‘오늘 밤 저녁미사를 봤고 미사후에는 고백성사도 봤다. 너무 기분이 좋다. 밖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야외 화장실에서 그 추운날 용변을 보던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착한 아들에 이어 이렇게 착하고 건강하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죄가 너무 큽니다.”
즉시 답변을 드렸습니다.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저도 보속하는 마음, 대속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늘 함께 하시면서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자매님은 편안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입니다. 길잃고 방황하거나 떠도는 삶이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는 삶이요 여기에 동반하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따름의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점차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을 따라나선 레위가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주님과 세리 레위의 만남이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세리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과 순수를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다음 장면이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짧은 대목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섬으로 이제 길을 찾았고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평생 살아야 할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주석을 잠시 인용합니다.
‘루카는 마르코나 마태오와는 달리 그리스 말의 “따르다”를 단순 과거가 아니라 반과거로 쓴다. 이로써 그는 “따름” 곧 “제자됨”이 점진적이면서 항구적인 일임을 가리킨다. 루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레위의 행동을 회개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한두번의 따름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서 다시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레위를 부르신 다음 당신 제자들 공동체 합류시킨후 함께 식사합니다. 말그대로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이젠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회개한 죄인들인 도반들과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르게 된 레위입니다. 그러니 더불어 따름의 여정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주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자 누가 있겠는지요!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죄인이자 동시에 병자인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치유요, 이것은 평생과정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임과 동시에 치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평생 최고의 명의가 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필요로 하는 회개한 죄인들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개해야 부패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따를 때 악취나는 부패인생이 아니라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됩니다. 인생 부패를 막아주면서 발효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결정적 효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 은총입니다.
이래서 따름의 평생 여정에 끊임없는 회개를 습관화 해주는 평생 성사인 성체성서와 고백성사가 그렇게 고마운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평생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중심과 질서가 확실한 하루의 일과표입니다. 이런 구체적 일과표에 따른 삶이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끊임없는 쇄신과 내적혁명이 회개입니다. 바로 이런 분투의 노력의 훈련에 충실한 자들이 성인입니다. 제가 옛 한국 위인들의 평전을 읽으며 새삼 감동하는 것도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을 다하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이율곡 선생이 그렇고 성군이라 칭하는 세종대왕이 그렇습니다. 평생 휴식이 없는 고군분투의 모습들이요 심신이 소진될때까지 최선을 다하며 책임을 다한 모습들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옛 훌륭한 선비들이나 임금들에 비하면 오늘의 지도자나 고위 정치가들의 수준이 난쟁이 같고 너무 미흡함을 느낍니다. 옛 조선 선비들은 인격적으로나 실력으로도 진짜 엘리트였습니다. 이런 선비사상이나 전통이 사라진 천박한 오늘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빛나는 실천을 통해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바로 이사야서가 어제에 이어 참된 단식의 정신을, 참된 수행, 참된 회개, 참된 종교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너무 고무적인 신바람 나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실천과 분발을 촉구하는 명문名文입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참 회개 실천의 은총이 이렇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끊임없는 개선과 쇄신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 지리라.”
참으로 이렇게 참된 회개의 실천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세상 높은 것 위로 달리게 될 것이라니 얼마나 멋진 삶인지요! 최고의 명의이시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더불어의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치유의 구원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한연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이 상징하는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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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례식 전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예비자 교리를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세례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도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중 세례식 막바지에 하는 것이 바로 ‘찰고’입니다. 아마 자신의 찰고 시간을 기억하시는 신자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는 찰고 시간과 세례식 강론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새 신자분들에게 들려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을 세상살이 백으로 두심에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께서 어렵고 힘들 때, 그리고 기쁨 충만할 때마다 함께 그 모든 것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가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여기 계신 분들을 축하하고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기억해 주십시오.
우선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언젠가 사막과 같은 시간을 만날 것입니다. 그 시간이 오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천사가 아님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투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할 것입니다. 이 또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하는 모자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사는 건강한 이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이에게 필요하다.’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언제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사이시며 치유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늘 낳게 하고 계심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모자란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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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법칙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 얼마나 많을까요? 예를 들면….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낮에 뜨는 것을 해라하고 밤에 뜨는 것을 달이라 한다.
구름이 검게 변하면 곧 비가 온다.
비가 온 뒤 땅은 더 굳어진다….
아마 써 내려 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나누고자 하는 자연의 법칙은 이것입니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머물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기 마련이다.
위의 말을 뭐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맞아, 맞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큰 사람이라면 아래에 머물러 주십시오. 든든하게 바쳐주고 흔들릴 때 잡아주십시오.
어쩌면 우리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 ‘너는 반석이다.’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리는 자연의 법칙이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늘 강하고 큰 사람일 수 없습니다. 가끔은 부드럽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도움을 받으시오. 그리고 지켜주고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할 때는 꼭 든든히 아래에 머물러 주십시오. 이 모습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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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따르렴>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나를 따르렴>
난 그래
그래, 넌 그래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난 어쩔 수 없어
그래, 넌 어쩔 수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난 할 수 없어
그래, 넌 할 수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나에게 바라지 않아
그래, 너에게 바라지 않아
아니야,
그렇지 않단다
그런 것이 아니란다
내가 나에게
모두가 나에게
늘 그렇듯
그저 그렇게
실망하고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그 때에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새롭게 일어나라 말씀하시지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차게 나아가라 말씀하시지
그분은
홀로라도
결코 내버려두지 않고
참으로 살아라 말씀하시지
나를 따르렴
나를 따르고자 하잖니
나를 따르렴
나를 따를 수 있잖니
나를 따르렴
바로 내가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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