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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민진원(閔鎭遠)이 각종 상소를 기록한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1757)에 실린 신태영의 기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사대부 유정기의 아내 신태영
○남편 이혼 트집에 억울함 호소
○9년 진흙탕 싸움…상처만 남아
요즘 사람들도 부부간의 갈등이 심해져 이혼에 이르렀을 때, 그 싸움이 여느 진흙탕 싸움 못지않다고 한다. 부부간의 내밀한 갈등과 사소한 문제까지 만천하에 드러내고, 잘잘못을 따져 책임을 묻는다.
게다가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지느냐의 결과를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결정하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고 나면, 어느 사람도 승자가 없는, 양측 다 너덜너덜할 정도로 상처를 받아야 끝나는 싸움이다.
가부장제가 득세하던 조선시대에도 가정을 깨고 이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1704년부터 1713년까지 장장 9년간 이어졌던 사대부 여인 신태영과 남편 유정기 이혼 기록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이혼하려는 남편 유정기와 결백을 주장하는 아내 신태영의 싸움은 여느 법정드라마보다 생생하다.
1677년(숙종 3), 신태영은 유정기의 후처로 혼인했다. 이들은 평탄한 가정을 이루며 다섯 자녀도 낳고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결혼 12년이 되던 어느 날, 남편이 노비를 데려다 첩으로 앉히며 부부의 운명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첩을 들인 후 남편은 부인을 구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부인을 내쫓았다. 부인이 행실이 난폭해 시부모와 남편에게 욕하고, 사당에서 난동을 부리며 조상님께 올릴 술에 더러운 것을 섞었다고 모함한 것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신태영은 전처의 아들 집에서 10여 년간 지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남편의 구박은 계속됐고, 어느 밤 아들 집까지 찾아와 기어코 신태영을 쫓아내고 만다.
이혼 신청을 하고 싶어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던 유정기는 그제야 신태영이 밤에 나간 것을 트집 잡았다. 밤에 나가 정조를 잃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아내와 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혼을 신청한 것이다. 예조에서는 유정기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남편 말만 듣고 이혼시킬 수 있느냐, 신태영 말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쉽게 이혼 신청을 받아준다면, 이혼이 빈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했다. 화가 난 유정기는 집안사람 50여 명에게 억지로 서명을 받아 다시 이혼을 신청했다.
그래도 예조에서 허락하지 않자, 이번에는 숙종이 능으로 행차할 때 길을 막고 달려들었다.
그는 왕에게 이혼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며 자신의 상황이 억울하다고 호소했고, 왕은 예조에 이 일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논란 끝에 부인 신태영은 그해 10월 의금부에 이송됐지만, 논리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급기야 남편의 독특한 성적 취향과 잠자리 매너에 대해 폭로하는 등 싸움의 기세를 잡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정기는 아전을 매수한 사실이 발각돼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7개월간이나 옥살이를 하던 유정기는 건강이 악화돼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던 부인 신태영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했던 논리적인 발언들로 인해 남편의 과실을 들춰내고 남편을 모함하는 패악한 여성으로 낙인찍혀 유배를 떠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이혼을 안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유정기는 또다시 1712년, 숙종의 능행 행차 길에 자신의 이혼을 허가해 달라고 글을 올렸지만, 이번에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6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마무리 짓자며 다시 논의했지만 끝내 이 두 사람의 이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혼하고자 했던 유정기나 이혼하고 싶지 않았던 신태영 모두 승자는 없고 상처만 얼룩진 싸움이었다.
(문화일보ㆍ김은양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