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7. 송혜영
할로윈으로 한껏 꾸민 캠핑장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고, 음료수도 수액맞듯 링거병에 넣어 마시는 마녀 컨셉의 식당이 유행이다. 학원이나 유치원에서도 호박등을 꾸며 사탕을 나누고 주황 검정 비즈에 박쥐 액세서리 달아 팔찌를 만든다. 몇 년 전만 해도 영어학원이나 어린이집에서 하는 행사인가 싶던 할로윈은 어느새 길을 지나 가면서도 크리스마스 트리 보듯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고 함께 즐기는 문화가 되었다.
첫째 친구 엄마들 단톡방에는 아이들에게 추억 하나 만들어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떴다. 10월의 마지막 날 테이블 펴 놓고 가볍게 모자나 망또를 걸치고 만나 준비한 사탕을 건내주는 건 어떠냐는데 좋은 생각이라며 답톡이 달리는 속도가 빠르다. 해리포터나 빨간 모자 아가씨로 변장하는 것은 귀엽지만, 마녀의 모자나 드라큐라의 망또를 걸치고 다닌다는 것은 내가 하든 남이 하든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아이는 친구들이 이런 행사를 한다면 당연히 이야기를 들을 테고 함께 하고 싶을 테다. 평소에는 먹기 힘든 여러 종류의 사탕과 간식거리를 다양하게 받을 수 있는 합법적인? 날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할까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할로윈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지인이 보내준 동영상을 열어보았다. CTS 로고가 우측상단에 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신뢰가 간다. 동영상에는 할로윈은 켈트족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10월의 마지막 날에 악령들이 자유로이 다니며 사람의 몸에 깃드는 것을 막기 위해 더 무서워 보이게 분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서는 처녀를 사탄에게 제물로 바쳤고 처녀 내놓기를 거부하는 마을에는 불을 지르며 협박을 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하는 'trick or treat'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영혼에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는, 소신을 갖고 배척해야 할 세속문화가 아닌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국제학교(영어유치원) 교사인 동생이 이 동영상도 한 번 보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두 아이를 키우며 미국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이 만든 동영상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지키는 크리스마스도 원래는 로마인들이 성대하게 보내었던 태양신의 축제일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할로윈도 켈트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카톨릭에서 성인들을 기리는 All Hallow Day로 지정하고 그 전날을 Halloween Day라 하며 시작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면 먹을 것을 주는 전통이 이어져 사탕이나 초콜렛을 이웃과 나누게 된 것이라 한다. 현 할로윈의 문화가 성인들을 기리는 것에서 변질된 것은 맞지만 크리스마스도 상술 속에 주인공이 산타가 되다시피 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래서 할로윈을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할로윈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고 다시 기독교 문화로 가꾸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하였다.
10월의 마지막날이 다가오며 분위기가 절정이 치달을 때 즈음 이태원에서 큰 일이 일어났다. 한정된 공간에 엄청난 인파가 유입되어 사람들이 가는데로 밀려갈 정도였고 좁은 골목에서 그리도 황당하고 슬픈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15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197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다. 지인의 친구도 사건 두어시간 전 그곳에 갔다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껴 빠져나왔다 하였다. 초 2 아이들이 동네 놀이터에서 할로윈 파티를 하려하듯 혈기 왕성한 2,30대 젊은이들이 그 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내 옆집 사람일 수도 있는, 한 가정의 사랑스런 자녀가 말이다.
착잡하고 차분한 한 주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일상은 흘러갔다. 놀이터 모임은 만날 일이 있을 때 사탕꾸러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즐겨 듣는 뉴스쇼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연일 보도했다. 항간에 거기를 놀러간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말이 들리거나 책임을 묻고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열띤 토론에 뉴스를 끄고 거리두기를 할 때도 있었다. 매일 아침 30분, 온라인으로 하는 책읽기모임도 계속된다. 요즘 함께 읽는 책은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다시, 성경으로>이다.
나는 근본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신의 본래 모습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양심과,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130쪽)
이따금 나는 독자들로부터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듣게 된다. 그들을 유산, 총기 사고, 지진, 이혼, 의사의 진단, 폭행, 경제적 파산을 당했을 때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성공과 돈, 특권을 우상시하는 승리 지상주의와 미국식 낙관주의는 슬퍼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능력을 상실한 신앙 공동체를 감염시켜 결국 공동체를 고사시킨다. 심리 치료사와 간병인들은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이 누군가 아픔을 겪고 있을 때 곁에 있어 주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판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그저 귀 기울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95쪽)
욥의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교훈적이고 하나도 틀리지 않은 성경의 에센스를 열거했지만 틀린 답이 아닌 그 성경 구절들이 욥 앞에서는 틀렸다. 저자는 차라리 전도서의 지혜가 욥의 친구들에게 더 적절했을 거라고 말한다.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듯, 욥의 앞에서 당신은 입을 다물고, 말하는 대신 듣고, 함께 슬퍼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아픈 사람들과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 같다.
특별히 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 일상을 덮을 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거다. 나 자신부터 내가 속한 공동체부터 마음을 하나님께로 맞추기, 말씀 앞에 서고 주시는 마음 붙들고 기도하기, 복음의 빛 아래 있기를 구하기. 그렇게 공감하며 기도하며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도울 것들에 함께 하기. 구조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정리되어야 한다면 그 사안에 관심갖고 지켜보기.
할로윈이 지난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차분한 늦가을의 공기만큼이나 마음이 묵직하다. 아이들 등교 준비에 손은 바쁘고 입에선 쉴 새 없이 잔소리가 나와도, 친구들끼리 억새가 이쁘다느니 가을 정취 속에 하하거리다가도 돌아서면 착 가라앉는 무언가가 있다. 삶은 복잡하고 성경은 명쾌해 보이지 않을 때, 그 때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하라고 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돈도 안 되고 여전히 흩어진 생각들이지만 한 번 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해 보아야겠다 싶어 끄적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