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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안제미(擧案齊眉)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깍듯이 공경함을 일컫는 말이다.
擧 : 들 거
案 : 밥상 안
齊 : 가지러할 제
眉 : 눈썹 미
(동의어)
제미(齊眉)
홍안(鴻案)
홍안상장(鴻案相莊)
밥상을 들어 (그 높이를) 눈썹에 맞추다. 밥상을 눈썹 높이만큼 받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거나 부부가 서로 존경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양홍(梁鴻)은 자가 백란(伯鸞)으로 부풍(扶風) 평릉현(平陵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왕망(王莽) 때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북지(北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
양홍은 어린 나이에 난세를 만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돗자리에 아버지를 말아서 매장했다. 후에 양홍은 태학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가난하지만 절조를 숭상했고 널리 책을 읽어 두루 학식을 쌓았다. 공부를 마친 후 양홍은 상림원(上林苑)에서 돼지를 쳤는데 그만 실화를 하여 다른 집들까지 태워 버렸다. 그는 피해자들을 찾아 다니며 돼지로 손실을 갚았다.
어떤 사람이 돼지로는 보상이 부족하다고 하자 양홍은 자기에게는 다른 재산이 없으니 그의 집에서 일을 해 주는 것으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주인이 허락하자 양홍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이러한 소식이 온 마을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양홍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며, 양홍에게 일을 시킨 사람더러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이웃의 노인은 양홍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그 주인을 비난하고 양홍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주인도 양홍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돼지를 돌려주었지만 양홍은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양홍의 높은 절조를 흠모하여 자기 딸을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양홍은 모두 거절했다. 같은 마을의 맹씨 집에 딸이 있었는데 몸은 뚱뚱한 데다가 얼굴은 시커멓고 몹시 추했다. 힘은 장사여서 돌로 된 큰 절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나이 30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처럼 덕 있는 사람이라면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홍은 이 소식을 듣고 예를 갖추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여자는 베옷, 짚신, 방직용 광주리, 새끼 꼬는 기구 등을 구해 놓고는 시집가는 날에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고 갔다. 그런데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양홍이 색시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색시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깊은 산 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대답했다.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하고는 머리 모양도 옛날처럼 하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양홍은 기뻐하며 그녀에게 덕요(德曜)라는 자와 맹광(孟光)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후부터 아내는 화장도 않고 산골 농부 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수지오, 의대가고백통, 거무하, 위인임용.
후에 이들은 오(吳) 땅으로 가 명망이 있는 귀족인 고백통(皐伯通)에게 의지하며 곁채에서 살면서 남의 방앗간지기로 일하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매귀, 처위구식, 불감어홍전앙시, 거안제미.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늘 밥상을 차려, 양홍 앞에서 감히 올려다 보지 아니하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바쳤다.
고백통은 이 부부의 사람됨을 예사롭지 않게 여겨 자기 집에서 살게 하고 허드렛일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 결과 양홍은 수십 편의 훌륭한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후에 양홍이 죽자 고백통은 열사인 요리(要離)의 곁에 양홍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며, 장례를 마치고 맹광을 고향인 부풍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 양홍(梁鴻)에 나온다.
그 후 사람들은 금실이 좋은 부부를 가리켜 양맹(梁孟)이라 하고, 부부간에 금실이 좋은 것을 거안제미(擧案齊眉)라 이르게 되었다.
같은 뜻으로 홍안상장(鴻案相莊)이 있다. 홍안(鴻案)은 양홍의 밥상이란 뜻으로 홍루몽(紅樓夢) 제49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대옥(林黛玉)이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가보옥(賈寶玉)이 찾아와 서상기(西廂記)의 제3본 제2절 요간(鬧簡)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언제부터 맹광이 양홍의 밥상을 받았던가?”라고 말했다.
是幾時孟光接了梁鴻案.
시기시맹광접요양홍안.
이 말은 양홍이 맹광이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바치는 밥상을 받았다는 거안제미의 전고를 반용(反用)한 것으로, ‘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지, 언제부터 양홍이 맹광에게 밥을 차려 주고 맹광은 양홍이 차려 주는 밥상을 받았단 말인가? 부부 관계가 이렇게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변했단 말인가?’라는 뜻이다.
이 말에서 양홍이 차린 밥상이라는 뜻의 양홍안(梁鴻案)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홍안(鴻案)이 되었으며, 부부가 서로 존경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원래 거안제미는 부녀가 남편을 존경하는 부도(婦道)를 각별히 지키는 것만을 의미했지 부부가 서로 존경한다는 뜻은 없었는데, 홍안상장이 나온 이후로 거안제미도 부부간에 서로 존경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상장(相莊)은 서로 정중하게 대하며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청(淸)나라 심복(沈復)은 부생육기(浮生六記)에서 홍안상장이란 성어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鴻案相莊卄有三年, 年愈久而情愈密.
홍안상장입유삼년, 연유구이정유밀.
홍안상장하기를 23년, 해가 갈수록 정도 더욱 깊어진다.
요리(要離)는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위(衛)나라에 피해 있는 전왕 요(僚)의 아들 공자 경기(慶忌)를 암살한 사람이다.
(▲ 삼십육계의 제34계 고육계 참조)
양홍과 맹광의 일화를 통해 거안제미 속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어떤 남녀관계가 가장 이상적일까? 결혼생활은 어떠해야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최근 한 결혼정보업체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미혼 남녀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상형인 배우자감을 찾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남성은 자신의 능력을, 여성은 자신의 외모를 첫 번째로 꼽았다. 능력이라 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경제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일 테고, 외모라 함은 성형 열풍이 불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결혼생활에서 정말 이런 것이 근본적인 걸림돌일까? 밥상을 차려서 눈썹 높이까지 들어 올려 남편에게 바친다고 하면, 여성의 입장에서 살짝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남편을 공경해야 하는 아내의 의무만 강조한 이야기가 아닌가 해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얕지 않다. 우선 양홍의 처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단연 꼴찌 신랑감이다. 집이 가난한 데다 절개까지 있었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다 하더라도 그는 쉽게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산속에서 농사만 지었던 이유는 관직을 얻어 벼슬살이를 하기에는 조정과 황실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올곧고 개결한 선비들이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산속에 은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양홍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원래 가난한데다가 절개를 굽히고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면 그의 삶이 경제적으로 궁핍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고자 하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미혼 여성들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결혼 조건의 첫째로 꼽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양홍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맹광이다. 그녀는 황제(皇帝)의 처 모모(嫫毋),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왕후 종리춘(鍾離春), 동진(東晉)의 명사 허윤(許允)의 처 완씨(阮氏)와 함께 중국의 4대 추녀로 불린다.
피부가 검고, 몸이 비대하고, 힘이 장사인 여자, 남성들이 바라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그런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양홍은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그녀가 화려하기보다는 자신과 함께 어려운 삶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다.
양홍을 바라보는 맹광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녀는 남편의 가난을 부끄럽고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높은 학식과 곧은 절개를 높이 평가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좋은 혼처를 다 마다하고 양홍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양홍도 이런 여자라면 가난하고 소박한 자신의 삶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청혼했을 것이다. 양홍이 필화(筆禍)를 입어 오나라로 망명하고 방앗간지기 같은 허드렛일을 하게 됐을 때도 맹광은 남편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빈한한 살림에 밥과 찬은 넉넉했을까? 거친 밥에 나물 한 가지, 보잘것없는 밥상을 남편에게 내오면서 맹광은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곧은 마음을 굽히지 않는 그의 태도가 존경스럽기도 했으리라.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차린 것 없는 가난한 밥상이지만 있는 힘껏 높이 들어서 남편에게 가져다주는 것, 이것은 다름 아닌 남편을 향한 사랑과 공경의 유일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양홍이 그런 아내를 무시하고 하대했을까? 아내와 함께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 그 역시 아내가 자신과 뜻을 함께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거안제미 하는 아내를 향해 똑같이 예를 갖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상을 받았으리라. 부부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한다는 뜻의 상경여빈(相敬如賓)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좋은 배우자는 서로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양홍은 끝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아내와 손수 밭일과 집안일을 하며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양홍은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서, 맹광은 외모가 예쁘지 않아서 결혼생활이 불행했던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루저들의 결합이라고 감히 비하할 수 있겠는가?
서로의 장점을 알아봐 주고 마음을 함께하는 것, 그로부터 비롯된 신뢰와 공경, 그리고 사랑까지. 양홍과 맹광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다.
지아비 밭 갈나 디 밥고리 이고가
밥상을 들오디 눈섭에 마초이다
친코니 고마우시니 손이시나 다실까
위의 고시조(古詩調)는 무릉속집(武陵續集)에 실려 있는 조선 중종(中宗) 때 일명 무릉도인으로 불렸던 주세봉(周世鵬)의 시조로 오륜가(五倫歌)의 그 네번째 부분인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다.
이 시조 중장 글귀의 의미와 꼭 맞아떨어지는 한자 단어가 바로 거안제미(擧案齊眉)다. 아내가 남편 밥상을 두 손으로 받들고 가는데 눈썹 높이에 가지런히 맞춰 공경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흔히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이나 이상적인 부부를 비유할 때 인용되는 단어다. 부부 간 상호 존중, 사랑이 없다면 이런 자세가 나올 수 없다. 아내에 대한 동서양의 온갖 악평이나 악담을 다 무색하게 만드는 처신이다.
중국 후한 때 양홍이라는 학자와 맹광이라는 그의 처 이야기를 다룬 후한서 양홍전에 나온다. 각종 퀴즈너 시험 출제빈도가 높은 고급 단어다.
하지만 거안제미는 현 시대상에 전혀 맞지 않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남녀 평등의 현 시대, 여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군림했다, 갑질했다고 해석하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남편이 강요하고 지시한다고 해서 아내가 무조건 복종하는 그런 부부 관계는 이전의 왕조시대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이런 자세가 더욱 부각된다. 학식이든 경제력이든 남편의 존경할 만한 그 어떤 것이 아내로 하여금 저절로 존경심을 자아내게 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졸혼(卒婚)이나 해혼(解婚)이 성행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특히 아내에 대해서 혼인의 속박을 풀어주자는 배려는 의미가 크다. 자녀들을 다 키웠고, 살 만큼 살았으니 각자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취미생활을 간섭하지 말자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전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가부장적인 남편의 시중에 일생을 다 바치는 그런 아내를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은 남성들도 집안일을 같이 거들어야 하는 시대다. 주변을 살펴보면 남성들도 집에서 요리를 많이 하고, 밥상도 잘 차려 먹는다.
나이 들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한 남성들의 자발적 생존방식으로 보인다. 이런 시점에서 행여 거안제미(擧案齊眉)의 처(妻)를 동경하는 남성이 있다면 각성해야 한다. 헛된 희망일 뿐이므로.
부부(夫婦)의 첫 글자인 부(夫)는 원래가 하늘 천(天)자의 윗 부분을 꿰뚫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남편이 하늘보다 높으니 남편을 그만큼 소중히 모셔야한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고전류에 속하는 얘기이건만 오늘날의 부부애를 생각해 볼 때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우리의 농촌에서도 이런 일은 있었다. 들녘에서 남편이 일 할 때 아내가 들밥을 가지고 오면 그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아내는 남편 곁에서 다소곶이 앉아 기다렸다가 밥고리를 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남편은 서서 아내가 논두렁을 빠져나가 둑길 개울을 건너 동구 밖 모퉁이로 사라질 때 까지 그 뒷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다가 논으로 들어가 일을 하곤 했다. 이 얼마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부부애(夫婦愛)란 말인가.
또 주세봉은 이 글에서 부부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항상 남편이 집에 들어갈 때는 집안에 귀한 손님이 와 있거늘 하고, 또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반가운 손님이 오거늘 하는 마음으로 늘 손님대하듯 조심하고 공경하라고 한다. 이러면 부부간에는 싸움이 날리도 없고 피차간 정이 돈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려운 경제난을 맞아 조기 이혼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젊은 부부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 쉽게 만나 살아보니 별 것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빨리 헤어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 갈수록 이혼에 따른 위자료를 많이 주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 이유란다.
또 반면에 중년이나 노년부부로 갈 수 록 이혼율은 떨어진다고 한다. 정이 들어 떨어질 수가 없는 지고지순한 얘기가 아니라 중년에 갈라서면 이혼을 요구하는 쪽에서 충분한 위자료를 주어야 하는데 그 돈을 줄 형편이 안된다 해서 이혼율이 떨어진다고 하니 근래 어려운 경제난이 낳은 부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옛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로 ‘부부가 만나면 검은머리 파 뿌리처럼 희도록 살아야 한다고 한다.’ 부부는 그렇게 평생 오랫동안 동고동락한다는 얘기이다.
또 어떤 시인은 부부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젊어서는 연인으로, 말년에는 의사와 간호사 역할로, 늙어서는 친구로 지낸다’라고 했다.
거안제미(擧案齊眉)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바치다
(남편을 극진히 공경한다)
1. 매 맞는 남편의 시대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때 생존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변화에는 늘 방향과 속도의 문제가 개입된다. 특히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방향이 잘못되어 변화 이전보다 못한 세상이 되기도 한다.
인류 역사 시작 이래로 수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그 변화는 문명의 세기라는 20세기 이후 만큼 급속하고 많은 변화를 이룬 적은 없었다. 특히 문명의 발전은 세상을 여러 측면에서 변화시켜 왔으며 특히 상당한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를 이룩했다. 그중에서 인간관계의 질서의 변화와 혁신도 포함된다.
인간관계의 질서의 변화는 흔히 맹자가 말하는 인륜의 핵심이라 하는 오륜의 영역에서 보면 혁명적이다. 군신유의(君臣有義)는 사라지고 국민과 지도자(대통령) 사이에는 의리의 관계가 아닌 계약의 관계로 변화되었으며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수직적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고 수평적 질서만 존재한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존재하기는 하나 그 의미는 상당히 전이되었다. 거기다가 부자유친(父子有親)마져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기초적이고 소중한 가족제도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인간관계의 질서에 있어서 문명 발전은 특히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확대 신장시켜 왔다. 그리하여 이제 문명국이라 하려면 신분은 폐지되어야 하며, 남녀 간의 평등은 필수적이어야 한다. 특히 산업 문명 발전과 민주주의의 발달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 확대와 가정에서 해방을 촉진시켰다. 일부 영역에서는 여성은 사회적 생산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문명화된 지금 과거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니 하는 말은 아예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문명사회에서 오랫동안 비판받아 온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여존남비(女尊男卑)의 세상이 된 듯하다. 그런데 남존여비도 폐기되어야 하지만 여존남비 또한 폐기되어야 한다. 남녀는 동등하게 존중받고 동등하게 비하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도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였는데 그것이 적대적 페미니즘 운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 페미니즘 운동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되어 창과 방패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을 볼 때 전에는 남북갈등(南北葛藤) 남남갈등(南南葛藤) 빈부 갈등, 지역 갈등, 이념 갈등 등이 문제였으나, 이제는 남녀갈등이 사회의 표층으로 올라와 서로 심하게 다투고 있다. 특히 남녀갈등은 사회 전반에서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회의 가장 심한 갈등은 남녀 갈등(33.5%)이었다. 이것은 빈부 갈등(32.5%, 이념 갈등(12.8%)보다 높은 수치였으며 남녀 갈등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헤럴드 경제, 2022. 01.05. 우리사회의 가장 큰 갈등,‘남녀․빈부...이념 갈등’은 후순위) 이는 남녀관계가 이제는 역할의 보완관계가 아닌 지독한 경쟁 관계로 바뀌었으며 특히 취업, 국방, 육아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서로 간의 책임공방과 피해 의식에서 출발한 것 같다. 이러한 피해 의식은 공정의 상실을 내면에 깔고 있다. 이제 여성은 가정에서 살림하고 육아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엄연한 정치 사회적인 행동 주체이다.
이러한 변화는 가정에서의 부부관계의 질서도 완전히 변화시켰다. 옛날 황제처럼 군림하던 남편은 이제 설 땅이 없어졌다. 남자들은 이제 가정에서 살림하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결혼도 과거는 대체로 남자가 여자를 선택했지만, 이제는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 그래서 ‘퐁퐁 남’, ‘설거지 론’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이제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잡혀 살아야 한다. 잡여 살지 않더라도 적어도 군림하면 갈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한편에선 남자가 비참해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늘 사회문제가 되어 온 가정 폭력을 놓고 볼 때도 과거에는 남편의 폭력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아내의 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아내들의 역할과 힘이 강해졌다는 증거이며 남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제 매 맞는 남편을 위한 보호소까지 생겨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정폭력방지법에 따라 3년 주기로 하는 가정 폭력 실태조사를 전국 단위로 시행된 첫해인 2004년에는 ‘최근 1년간 아내의 폭력을 경험’한 남성이 10명 중 3명꼴(32.6%)로 집계되었다.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아내는 37.3%였다. 그런데 15년 후인 2021년 조사에선 아내의 폭력을 경험한 남편과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아내의 비율이 26% 대 28.9%로 비슷해졌다. 아내의 폭력 비율이 늘어나고 심해졌다는 이야기다.
남편에게 가하는 가장 빈번한 폭력은 ‘통제’와 ‘정서적 폭력’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귀가 시간을 허락받게 하고, 본가 사람이나 친구와 못 만나게 하고, 누구와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는지 감시하는 행동이 통제의 폭력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 욕을 하고, 남편의 물건을 부수고, 위협하는 등 정서적 폭력이다. 성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남편은 100명 중 1명이 넘는다(아내는 100명 중 6명이다).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촬영해 동의 없이 공개하는 식이다. 때리고 밀치고 꼬집고 차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흉기로 위협한다. 어떤 집은 장모까지 가세해 피해를 키운다고 한다. 남자가 왜 약한 여자에게 맞고만 있을까. ‘오죽 남자가 못났으면’ 싶어 수치스럽고, 아이들 생각해서 참는다. 때리는 아내를 말리려다 몸싸움이 나 경찰이 오면 남자가 불리하다. 아내가 때리기 전 남편이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국 가정폭력상담소 128곳에 접수된 상담 건수가 2021년 하루 평균 722건이었는데 2021년엔 750건으로 늘었다. 상담 건수 10건 중 3건은 피해자가 남성이다.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온 남성들은 모텔을 전전하거나 노숙자 보호시설을 찾는다고 한다. 여성가족부는 새해 업무보고에서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 남성을 위해 첫 전용 보호시설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남녀 간은 물론 부부간은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지 서로 적대하거나 공격하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존중받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중받아야 한다. 한 일방이 다른 일방을 딛고 서는 구조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옛날에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존중하던 시절에도 남편은 아내를 극진히 존중하였다. 존중하였기에 존중받게 된 것이다.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는 바로 그런 예의 하나이다,
2. 거안제미(擧案齊眉)의 유래와 의미
거안제미(擧案齊眉)란 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바친다는 뜻이다. 밥상을 눈썹까지 올리니 얼마나 극진한가? 물건을 상대에게 줄 때 고개를 조아려 숙이고 눈썹까지 치켜들어 올려주는 것은 왕이나 황제에게 하는 행위이다. 남편에게 그렇게 하니 남편을 황제나 왕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아내가 남편을 극진하게 받든다는 의미로 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내만 남편을 극진히 받던 것이 아니다. 남편도 아내를 극진히 사랑한 것이었다.
중국의 후한 시대에 양홍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자는 백경(伯冏)이었다. 그는 선비로 부풍 평릉 사람이었다. 집은 가난했으나 지조와 절개가 곧아 선비의 풍모가 넘쳐났다. 같은 현(縣)에 맹씨 성을 가진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몸이 몹시 뚱뚱하고 얼굴이 검었는데 돌절구를 번쩍 들 만큼 힘이 세었다. 그녀는 서른이 넘도록 여기저기서 혼사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하고 시집을 가지 않아 사람들이 그녀에게 왜 시집을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양홍 같은 현자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양홍만 있었다.
양홍이 이 말을 듣고 그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양홍이 색시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색시가 궁금하여 “혼인을 하였는데 왜 잠자리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양홍이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색시는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하고는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옷차림으로 생활을 하였다.
양홍은 그런 아내를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행복하고 단란한 생활을 했다. 양홍은 글을 많이 한 선비인지라 농사짓는 틈틈이 시(詩)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에는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은 퍼져 왕실에까지 들어갔고 왕실에서 그를 잡아 문초하려 하자, 그는 가솔(家率)을 데리고 오(吳)나라로 가서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었다. 양홍이 매일 고백통의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아내는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梁鴻字伯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肥醜而黑 力擧石臼擇對不嫁 日欲得賢如梁
양홍자백부풍평릉인야 가빈이상절개 동현맹씨유녀피추이흑 역거석구택대불가 일욕득현여양
伯者鴻聞而聘之 字之曰德曜 名孟光至吳爲人賃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 仰視擧案齊眉
백자홍문이빙지 자지왈덕요 명맹광지오위인임매귀 처위구식 불감어홍전 앙시거안제미)
-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 -
위의 고사를 보면 양홍의 아내가 그저 남편에게 거안제미(擧案齊眉)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결혼 대상자를 택할 때부터 집안과 가문보다 존경할만한 현인(賢人)을 택했다. 맹씨의 남편 양홍은 바로 그러한 존경할만한 현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맹씨를 자진하여 택한 양홍 역시 현인다웠다. 남자들 대부분이 아내를 택할 때 미색(美色)과 몸매, 집안과 가문 등을 따지지만 양홍은 아내의 사람됨 하나만을 살폈다. 이렇게 보면 둘 다 사람됨이 훌륭했고 서로 의지하고 존중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가는 것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둘의 이상과 가치관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했던 것은 온갖 어려움이 있어도 남편은 남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고 아내 또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존경심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부는 부창부수(夫唱婦隨-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따른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부부가 함께 존중하는 사회를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가정은 부부가 함께 존중할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이혼율이 세계 상위이며 가족과 가정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걱정들을 많이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겠지만 가족 특히, 부부의 필요와 존재에 대한 가치관과 인식의 왜곡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배우자는 함께 부족함을 채워가고 위로하는 존재이지 욕망 충족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배우자를 통해 욕망을 충족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가정, 부부, 배우자의 개념과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배우자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부족함을 채우고 위로해 가면서 행복을 만들어 가는 대상이라면 서로 간에 욕망보다는 존중과 배려, 사랑과 위로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너나 할 것 없이 욕망 충족에 너무나 집착한다. 물론 욕망은 삶을 개척하는 에너지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의 욕망만을 앞세울 때 모든 인간관계는 균열이 간다. 특히 부부간의 관계는 더욱 균열이 간다.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이나 남편을 직간접으로 폭행하는 아내 역시 자기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평생 욕망만쫓다가 나이 들어서 보니 허탈함만 남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하여 실의에 차 방황하고 있었다. 살 집이 없어 부부와 두 자녀를 데리고 산자락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겨울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 비닐하우스 지붕이 무너져 잠자는 안으로 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부는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날을 새웠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후 모든 빚을 갚고 서민 갑부가 되었다. 오늘날은 아내나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배우자가 참아주지 않고 이혼을 해 버리는 것이 일상이 된 것 같다. 그 서민갑부는 자기가 재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아내의 위로였다고 한다. 힘들 때 배우자의 존중과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고사에 나오는 거안제미(擧案齊眉)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제 남편도 아내를 위하여 밥상을 차려 바쳐 올릴 수 있어야 하고, 아내도 남편을 기다리며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부는 각자의 욕망을 점검하고 조정하고 존중하면서 절제도 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나의 욕망만 쫓는다면, 부부는 다투게 되고 결국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동양고전인 소학(小學)에 이르기를 ‘부화부순가화지본(夫和婦順家和之本) 즉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양순한 것이 가정 화목의 근본’이라 하였다. 온화하고 양순하려면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 간에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욕망 충족기반의 개방적 문명사회에서 욕망의 종류와 지향 방향에 대한 점검과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방향이 불명확하고 가치가 왜곡된 욕망 지향은 오히려 그 자체가 독이 되어 자기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매 맞는 아내, 매 맞는 남편이 양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방향과 가치를 상실한 무한욕망 추구의 산물이다. 모든 화목의 중심에는 중용(中庸)의 도리가 숨어 있다.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미덕은 쌍방이 그저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통한 최선의 도리를 취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쌍방의 노력이 성실해야 한다. 욕망의 중용을 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매 맞는 아내, 매 맞는 남편이 없는 세상, 가정이 건강한 세상을 꿈꾸어 본다. 그런 세상이 바로 가장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남녀평등의 세상, 남녀가 함께 세상에 나아가 일하는 세상에서 남편도 아내에게 거안제미(擧案齊眉)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거안제미(擧案齊眉)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부부, 더없이 좋은 가정이 될 것이다. 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인간이 문명의 도구는 아니다. 욕망을 잘 조절하고 그 방향과 가치를 함께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쌍방의 거안제미(擧案齊眉)는 가능하리라.
▶️ 擧(거)는 회의문자로 举(거), 挙(거), 㪯(거)는 통자(通字), 舁(거)와 동자(同字), 举(거)는 약자(略字)이다. 擧(거)는 음(音)을 나타내고 더불어 같이하여 정을 주고 받는다는 與(여, 거)와 손(手)으로 물건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들다를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할 위(爲), 옮길 이(移),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온 나라 모두를 거국(擧國), 온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어 하나로 됨을 거국일치(擧國一致), 일에 나서서 움직이는 태도를 거동(擧動), 어떤 사람의 이름을 초들어 말함을 거명(擧名), 손을 위로 들어 올림을 거수(擧手), 스승과 학인(學人)이 만나는 일을 이르는 말을 거각(擧覺), 기를 쳐듦을 거기(擧旗), 바둑을 두는 데 포석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거기부정(擧棋不定), 살받이 있는 곳에서 화살이 맞는 대로 기를 흔들어 알리는 한량을 거기한량(擧旗閑良), 머리를 들어 얼굴을 맞댐을 거두대면(擧頭對面),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음을 이르는 거석이홍안(擧石而紅顔),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거세개탁(擧世皆濁),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 이름 난 사람의 장례 때, 사회 인사들이 모여서 통곡하고 장송하는 일을 거애회장(擧哀會葬), 한 가지를 들어서 세 가지를 돌이켜 안다는 거일반삼(擧一反三), 모든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을 거조실당(擧措失當), 다리 하나를 들어 어느 쪽에 두는 가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되어 세력의 우열이 결정된다는 거족경중(擧足輕重), 명령을 좇아 시행하는 것이 민첩하지 못하다는 거행불민(擧行不敏) 등에 쓰인다.
▶️ 案(안)은 형성문자로 桉(안)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安(안)이 합(合)하여 책상을 뜻한다. 나무로 만들어 단단히 안정시켜 놓은 것으로 책상을 뜻하고,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생각하므로 案(안)을 문서나 생각 따위의 뜻으로 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상 궤(机), 책상 황(榥)이다. 용례로는 인도하여 내용을 알려 줌을 안내(案內), 토의하거나 연구하려고 글로 적어 놓은 거리를 안건(案件), 앉을 때에 벽에 세우고 몸을 뒤쪽으로 기대는 방석을 안석(案席), 책상의 한쪽 가를 안두(案頭), 책상에 쌓이는 문서들을 안종(案宗), 술을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음식을 안주(案酒), 생각하여 낸 안을 안고(案考), 얼굴을 마주 대함을 안대(案對), 글의 뜻을 생각함을 안문(案文), 책상 위를 안상(案上), 책상 아래를 안하(案下), 초안에 쓰는 용지를 안지(案紙), 생각하여 냄을 안출(案出),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에 비치는 책상이라는 형창설안(螢窓雪案),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 등에 쓰인다.
▶️ 齊(제)는 상형문자로 斉(제)의 본자(本字), 䶒(재)와 동자(同字)이고, 齐(제)는 간자(簡字), 亝(제)는 고자(古字)이다. 곡물의 이삭이 가지런히 돋은 모양을 본떴다. 齊(제)는 가지런하다, 단정하다, 질서 정연하다 등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집안을 바로 다스리는 일을 제가(齊家),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소리를 질러 부름을 제창(齊唱), 어떤 행동이나 동작을 일제히 함을 제거(齊擧),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바침을 제납(齊納), 반열을 정돈하여 가지런히 함을 제반(齊班),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분개함을 제분(齊憤),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정성을 바침을 제성(齊誠), 여러 사람이 다 같이 큰 소리로 호소함을 제유(齊籲), 큰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음을 제좌(齊坐), 여럿이 일제히 떨쳐 일어남을 제진(齊振), 여럿이 한 자리에 모임을 제회(齊會), 한결같이 가지런함을 제균(齊均), 금전이나 물건 등을 균등하게 나누어 줌을 제급(齊給), 일제히 길을 떠남을 제발(齊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일제히 소리를 지름을 제성(齊聲), 마음을 한 가지로 함을 제심(齊心), 가지런히 열을 지음을 제열(齊列),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죄를 일제히 꾸짖음을 제성토죄(齊聲討罪), 남편과 한 몸이라는 뜻으로 아내를 이르는 제체(齊體), 음식을 눈썹 있는 데까지 받들어 올린다는 제미(齊眉) 등에 쓰인다.
▶️ 眉(미)는 상형문자로 눈썹의 형상이다. 그래서 눈을 더 그려넣어 눈썹을 표시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눈썹먹 대(黛)이다. 용례로는 두 눈썹의 사이를 미간(眉間), 이마의 눈썹 근처를 미우(眉宇), 눈섭과 눈을 미목(眉目), 짐승의 꼬리에 난 털을 미모(眉毛), 눈 같이 흰 눈썹을 미설(眉雪), 눈썹 모양 같이 된 초승달을 미월(眉月), 눈썹 모양으로 된 쇠를 미금(眉金), 눈썹 모양과 같은 납작한 돌을 미석(眉石), 두 눈썹의 사이를 미심(眉心), 눈썹 모양과 같이 생긴 논밭을 미전(眉田), 미목의 아름다운 모습을 미채(眉彩), 눈썹 근처의 뼈를 미릉골(眉稜骨), 썩 가까운 사이를 미첩간(眉睫間), 새의 눈 위에 세로 박인 무늬를 미반(眉斑), 미인의 눈썹을 미부(眉斧), 눈썹과 눈을 미첩(眉睫), 눈썹이 가고 눈이 온다는 뜻으로 서로 미소를 보냄을 이르는 미거안래(眉去眼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