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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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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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wrrEJYjA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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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대비해서 겸손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면 좋을 삶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위선적이지도 않고 위선적이지도 않더군요. 그들의 삶을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으로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과 이중성의 끝판왕이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인 행태가 얼마나 눈꼴 사나운 것이었으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되었습니다.
이중적인 모습을 죽어도 싫어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즉시 그들을 향한 강력한 펀치를 미련없이 날리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1장 43절, 46절)
따라서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대비해서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많은 것을 쥐고 있을수록,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그 날을 생각해서 작아져 있어야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를 통해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을 위한 좋은 비결을 하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 비결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비결은 매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언제나 육의 통제를 벗어나게 됩니다. 인간적 욕망을 다스리기가 어려워집니다. 자연스럽게 일탈과 방종의 길을 걷게 됩니다.
“육의 행실을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티아서 5장 19~20절)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신 악의 세력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도께서 제시한 여러 가지 악의 세력 가운데 하나에 함몰되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악덕들이 하나하나 추가됩니다. 그 악덕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집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자유와 은총, 그리고 축복이 우리를 휘감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티아서 5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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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UdCCJQaP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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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가을동화’(2000)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린 준서가 태어난 동생을 보기 위해 신생아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후 신생아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동생과 다른 아이의 이름표를 바꿔 놓습니다. 다른 아이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후 14년, 은서는 중학교 1년생 준서는 3학년입니다. 윤 교수 부부의 사랑을 받으며 두 아이는 남매로서 행복하게 생활합니다. 둘은 정말 행복한 남매입니다. 그러나 서툰 자전거 솜씨로 준서를 쫓아가던 은서가 차에 치이면서 준서와 은서의 행복은 깨지고 맙니다.
부모와 혈액형이 둘 다 O형인데 은서는 B형인 것입니다. 추적해 본 결과 은서는 작은 식당을 하는 순임네 딸이었습니다. 은서는 그동안 순임네 딸인 줄로만 알았던 신애와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신애는 14년 동안 가난하게 산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은서를 따돌립니다. 은서는 생일에 외톨이가 되어 홀로 바닷가에 갑니다. 그런데 오빠는 신애의 생일에 있지 않고 홀로 있을 은서를 찾으러 바닷가에 온 것입니다.
남매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어쨌거나 한 명은 그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가을동화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 이야기가 되기 위해 은서는 몹시 가난하고 험한 곳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1,45)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욕’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신랑 앞에서 그들이 신부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신부가 될 수 없다면 창조자의 본성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창조자만 영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지옥까지 낮추셨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으려면 하느님께서 한 분은 남자가 한 분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여자의 역할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 낮아짐이 없이는 창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는 양과 음, 하늘과 땅이 만나 역동적인 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임신하기 위한 부부의 관계와 같습니다. 여기서 여성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녀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왜 아드님을 지옥의 고통까지 떨어뜨려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과 극이 만나지 않으면 창조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지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당연하다 여겨야 합니다. 그분이 진리이시면 우리는 거짓이고 그분이 빛이시면 우리는 어둠입니다. 그분이 선이시면 우리는 악입니다. 이것이 거북하면 그분과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조자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은 수많은 병자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적의 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샘물이 어떻게 솟아나게 되었는지 알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욕당하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에게 아홉 번째 발현하셨을 때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지금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 그 가까이에서 자라는 풀을 먹도록 해라.”
베르나데트는 성모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시체를 태우기까지 하는 매우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 흙탕물을 먹고 거기에 난 풀을 먹고 그 물로 자기 얼굴과 손을 씻는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아이가 되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지만, 그 자라에서 샘물이 솟았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120,000만 톤이 솟습니다. 그 물을 마시고 베르나데트는 천식이 치유됩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멸시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당신 창조자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고통과 멸시와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 앞에서 고통과 낮아짐은 창조와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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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며칠 전부터 이가 시리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셔도 이가 시리고, 가만히 있어도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치과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이의 뿌리가 약했습니다. 미세하게 금이 갔습니다.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뿌리가 약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잘 견뎌준 이가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수고 했으니 이제 치과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문득 나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합니다. 기초가 약한 곳이 아팠던 것처럼 악의 세력은 영적으로 부족한 부분으로 들어옵니다. 저의 부족함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함에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장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단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부족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우유부단과 반대되는 말로는 ‘직정경행(直情徑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의 충동대로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성격을 받아들여서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겐 '직정경행'은 긍정적으로 사용되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목을 베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 사고방식이 면면히 흐르다 보니 저울질도 해 보지 않고 미국과 싸움을 꺼린다는 것은 악으로 보고 하와이의 진주만(灣)을 선전포고도 없이 비굴하게 공습해 멸망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앞과 뒤를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신다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대로 예수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우유부단한 것도 고칠 필요가 있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중용(Indifferentia)'을 강조하였습니다. 우유부단과 직정경행의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점과 단점의 중간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용이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진다.” 결정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같이 기도 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직정경행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유부단할지라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직정경행할지라도 신속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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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님은 또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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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당대 유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십일조의 세세한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에는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그 규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구현해 내야 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에서는 언제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즐기며 언제나 높은 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신을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매장하고서 어떤 표식도 해 놓지 않은 그런 무덤을 뜻하는데,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거나 접촉한 유다인들이 결국 부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민수 19,16 참조). 성화의 직무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더러움으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서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서, 정작 사람들이 그 규정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판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구, 계명이나 규정의 본질을 망각한 채 형식적 준수만을 강조하는 태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경건함을 가장하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고충과 힘겨움을 외면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만일 이런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그들 못지않게 우리 또한 매우 불행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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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권고와 저주>
우리는 잘못 사는 이들을 저주하지 말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권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그렇게 살면 불행해진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면 불행이 닥치니 깨우쳐 바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듣고 율법 교사가 주님께 “저희를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자기는 쉽게 살고 남은 어렵게 살도록 하는 것을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현이 종교의 가르침을 받고 알고 있으면서 그 시대의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 같이 살고 있습니다.
첫째 장애는 재물입니다. 법을 잘 지킨다고 교무금, 주일 헌금 잘 내고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는 사람, 나눔을 모르고 부정이나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는 사람은 결국 불행해집니다.
둘째는 명예심입니다. 자기 하는 일에 집착하여 자기 명예만 생각하고 존경받기만 원하는 사람, 겉만 꾸미고 허울만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는 학력을 속이고 자기 죄를 덮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권력의 무덤에 묻혀 그 위를 사람들이 온갖 비난과 불평으로 누릅니다. 권력을 앞세우는 사람은 또 다른 권력에 의해 억눌리게 됩니다. 10년 세도가 없는데 권력의 끈이 떨어지면 보잘것없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 같은 일반 사람도 그 불행의 덫에 걸리면 불행해집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에서 모두가 자유로우려면 가난한 마음이 제일 묘약입니다.
누가 저와 페친을 끊겠다고 해서 내 잘못에 대한 충고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하며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나를 다 떠난다 해도 주님이 함께 계셔 주시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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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의로움>
한자로 의(義)는 양(羊)과 나(我)를 합친 글자입니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거기서 나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진 양과 같은 일을 행할 때 의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사실 의로운 일,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처지,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 더 큰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의로움과 사랑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교회는 정의로운 일에 투신해야 할 당연한 소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 연약한 인간이 되시고, 그 인간이 다른 수많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데서 최고로 드러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는 것이 정의라고 하겠지요.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되어 다른 사람이 평안을 얻도록 하는 것, 교회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가 속한 사회가 하느님 나라를 닮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지만 스스로 희생자가 되지 못하는 개인과 교회는 불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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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다>
루카 11,42-46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고 싶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는 사람
오래 있어도
지겹지 않은 사람
생각만으로도
웃음 짓게 하는 사람
가만히 있어도
살맛나게 하는 사람
가까이든 멀리든
힘이 되어주는 사람
사람이 사람이게끔
사람을 섬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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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늘 있기에 없어도 되는 줄 아는 불행>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는 불행하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행하다고 하시는 이유들이 사실은 우리 인간이 행복해하는 이유들입니다. 윗자리에서 인사 받고 대접받을 때 우리는 행복해하고, 내 죄와 잘못 드러나지 않을 때 참 다행이라고 하며, 나는 무거운 짐 안 져도 되고, 다른 사람이 대신 져주는 처지이면 행복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행복한 것은 그 반대가 될 때 불행하고, 우리 인생은 얼마든지 그렇게 역전될 수 있는 거지요. 대통령의 비호아래 권력을 농단하던 사람들이 권력의 말기에 가니 그 비리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행복을 행복으로 여기는 불행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들보다 십일조는 잘 바치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행에 대해 더 묵상코자 합니다. 왜냐면 인간에게 기대는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불행도 문제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잘못함으로 인한 불행이 더 문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만으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퉁 치거나 삭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십일조 많이 내도 그것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대신할 수 없고, 십일조를 하나도 안 내도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요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으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의로워지고 사람들에게 의롭게 하는 것을 더 바라십니다.
이는 모든 부모가 당신에게 뭘 사가지고 오는 것보다 형제들끼리 서로 잘하며 지내는 것을 더 바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올 때는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면서 동생 것 가로채고, 형제들에게 인색한 자식을 좋아할 부모 어디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주님께선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아랑곳하기를 바라시는데 여기서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좀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번역과 개신교 성서 그리고 영어 성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또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이라고 번역하는데 비해 지금 우리의 번역은 그저 ‘하느님 사랑’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곧 우리의 사랑이겠지만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필요하고 있어야겠지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더 필요하고 꼭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 사랑 없이 한 시 또는 한 순간인들 살 수 있겠습니까? 햇빛이 잠시 없어도 우리는 당장 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햇빛 없이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한 시 또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느님 사랑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사는 것은 한시도 그리고 한 순간도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늘 있었기에 부모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돈 없으면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산다면 그것이 진짜 불행한 것임을 우린 오늘 새삼스러운 듯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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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 11,46)라는 예수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 12,11) 회개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 12,15)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게 받아들이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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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까?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까요? 많은 학자의 의견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로 생존 능력 때문입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늘 위로 날 수도 없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없었습니다. 또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날카로운 이빨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덩치도 초식동물보다도 작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앞에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저 맹수는 나와 친구가 될 거야.’하며 다가갔을까요?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힘차게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부정 편향성이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잘 보이고, 상대방이 잘해준 것보다 못 해준 것이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칭찬의 말보다 비난의 말이 더 오래 기억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존의 문제로 부정 편향성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적들을 만들어 피곤해지고, 혼자 살기에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전히 부정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진화가 덜 된 것이 아닐까요? 진화가 잘 된 사람은 현대에 맞게 긍정 편향성을 더 많이 지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 편향성을 이제는 긍정 편향성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나를 지켜주시는 함께해주신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세상을 더 쉽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를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불행하여라 라고 선언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긍정 편향성이 아닌, 부정 편향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는 허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를 자세히 규정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 규정을 면밀하게 지켜야 했고, 그것을 지키려면 몹시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규정을 제정한 율법 교사는 그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켰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규정들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강요하곤 했지요. 진정한 사랑의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이웃을 부정 편향으로 이끈다면 우리에게도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긍정 편향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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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
- 성령만이 무지에 대한 답이다 -
행복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은총의 성령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성령으로, 믿음으로 살 때 행복입니다. 이런 성령만이 무지에 대한 답입니다. 안이 성령의 사랑으로 깨끗하면 밖은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화장이 성형이 불필요합니다. 안이 밝고 환하면 밖도 밝게 환히 빛납니다. 바로 마음이 깨끗하여 밝고 환하면 얼굴도 저절로 밝고 환히 빛나 영육으로 건강한 삶, 행복한 삶입니다.
어제는 주님 안에서 참 좋은 분들과의 만남으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코이노니아 자매회 여섯분들이 참석하여 오전에는 강의가 있었고 오후에는 미사가 있었습니다. 마침 선물로 나눠드린 7월 강론집 “축제인생”처럼, 축제의 하루를 지낸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 함께 찍은 아름다운 사진에 다음 덕담을 담아 나눴습니다.
“모두가 멋지고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늘 이렇게 사세요!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자매님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성령 충만한 밝고 환한 모습으로 기쁘게 떠나니 여운의 향기가 지금도 남아있는 듯 합니다. 이어 두 분의 방문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한 분은 거의 15년 만에 찾은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운전해온 커다란 차 안에는 고기와 과일 선물로 가득했습니다.
두 분 역시 성령으로, 믿음으로 사는 분들입니다. 알뜰하고 조촐한 기쁨 가득한 만남에 오늘은 “두 분 성녀의 수도원 방문축일”이라 덕담을 드렸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성호경 기도를 바친후 사진을 찍은 다음 덕담 메시지도 추가하여 전송했습니다.
“사진처럼 멋지고 단아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성령을, 믿음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성령으로, 믿음으로 습관화하여 살 때 참 행복입니다. 이어지는 카톡 메시지도 행복하게 했습니다. 성령으로, 믿음으로 사는 형제의 메시지 전부를 인용합니다.
-“삶은 과정입니다. 삶은 흐름입니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리듬입니다. 커다란 위안은 모두가 주님 안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단면만 볼 것이 아니라 널리, 멀리, 높게,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래야 현재의 고통이나 슬픔에 빠지지도 않고, 기쁨이나 행복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한결같이 푸른 배경의 하늘로 잔잔한 기쁨과 평화중에 살 수 있습니다.” 아멘
“부족한 죄인이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한 번 더 기억합니다. 세상속 이치보다 말씀을 기억하는 기쁨과 축복이 참 큽니다. 신부님과 함께 하기에 더욱 가슴 벅찬 지금입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드릴수 있는 기쁨에 감사할 뿐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행복한 사람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람들이 바로 육에 따라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일부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성령의 빛에 따른 영적 삶이 아니라 무지의 어둠에 따라 피상적 육적 삶을 살 때의 부정적 인간 모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모습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니 자기 중심의 허영과 교만, 태만의 외적, 육적 사람들입니다.
우선순위에 대한 분별력도 없고 전체에 대한 조화와 균형 감각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감, 존중도 전무합니다. 참으로 무엇보다도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회개가 화급한 이들입니다. 회개 은총과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의 어리석은 삶에 대한 결정적 답이 성령으로 사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 갈라티아서에서 명쾌하게 분별해 줍니다.
“무지로 인한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비슷한 것들입니다.”
무지의 선택으로, 스스로 자초한 정말 총체적인 재앙이요 불행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면 사람은 이처럼 망가지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 하여 결코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새삼 천국도 지옥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무지에 불행에 대한 답은 성령에 따른 행복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을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참 좋은 성령의 열매를 선물하시며, 우리의 욕정과 욕망을 당신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니 이또한 은총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성령을 따라 갑시다.
성가 142장 “오소서 성령이요”도 한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7절 끝까지 노래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지의 어둠’에 대한 답은 ‘성령의 빛’뿐입니다. 성가 142장 1절만 인용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 위로자신 이여, 주님 찾는 슬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맘의 위로자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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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성령을 따라가는 행복한 신자가 되자!>
지난 토요일 저녁미사부터 주일 저녁미사까지 수원교구 원천동성당 신자들과 함께하는 뜻깊은 시간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전례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 원천동성당 미사 전례 분위기가 넘 좋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예배인 전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頂點)이며,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10항)
전례 중의 전례가 바로 성체성사인 미사(Missa)입니다. 배둔공소 성전 건축기금 마련을 위해 원천동성당 신자들과 함께 4대의 미사를 드렸는데, 전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하는 신자들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전례를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따라가고 있고, 이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사의 본질이며, 믿는 우리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미사에 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제가 본 원천동성당 신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과 규칙이라는 틀에만 갇혀있는 불행한 신자들이 되지 말고, 그것들의 본질을 찾고 그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행복한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5,19-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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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CkPYgA1v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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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루카 11, 44)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덤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어두워지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불행하다는
사실도 모른 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불행의 씨앗이
우리자신의
거짓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대체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무덤같이
우리자신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과 아집의
모순덩어리만
키울 뿐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멋진
시작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순을
멈추고 새로워지는
실천의 기쁨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정직한 관계입니다.
참된 종교는
정직한 관계와
올바른 실천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신앙인이
올바른 실천을
잃어버리면
이기적이 되고
아집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다.
건강한 일치는
무덤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모순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임없이 바로잡아
가는 여정입니다.
이 섬과 저 섬을
이어주는 다리를
볼 때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삶으로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결심합니다.
누군가에게
불행의
무덤이 아닌
행복의 다리가
되는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바로잡아야 할 대상은
언제나 먼저 제자신이며
바람직한 길은
교만과 아집이 아닌
사랑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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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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