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의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평설 / 신상조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는 무언가가 모자란다. 혹등고래 같은 것이 베네수엘라의 외로움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세포분열을 하거나 결승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침울한 영혼에 가깝다고 삶에 가장 가까운 어둠이란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수평선이 아니다. 죽은 뒤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 가까운 우리는 결국 시제가 없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여행자란 결국 돌아오는 사람인가? 나는 당신의 조금 더 먼 곳에 도착함 이제 돌아가지 못함 과 같은 문체로 베네수엘라에 가보지 못했는데도 새벽의 어둠 속에는 여행자들이 떠돌고 있다. 혹등고래가 배를 보인 채 떠오르는 순간에 외로운 심판은 종료 휘슬을 길게 울리고 나는 어둠을 끄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후보 선수처럼 ―시집 『음악집』 2024.3 .......................................................................................................... 아프고 쓸쓸한 당신, 혹시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 시를 읽고 휴대전화로 혹등고래와 베네수엘라를 검색하다 잠드는 건 하루의 마무리로 꽤 괜찮은 방법이다. 다만 포경선을 따돌리며 해상에서 해상으로 유유히 이동하는 혹등고래의 자유를 갈망하거나, 베네수엘라의 난처한 경제 상황이 전염시킨 우울함이 당신의 단잠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싶다. 예민한 당신이 마치 “세포분열”하듯 혹등고래와 환경문제를, 베네수엘라와 최근의 정치상황을 연결한다면 너무 나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매사에 심각해지는 버릇은 시인에 따르면 결승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는 일만큼이나 침울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잠들지 못하고 누워 가만히 천장을 응시한다. 당신은 오늘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서 환하게 빛나는 주연과 조연들을 뒤로하고 자리를 비운들, 누가 ‘나’의 부재를 눈치채거나 조금이라도 걱정하겠는가. 혹은 당신은 병의 진단과 사망 선고를 동시에 받은 말기 환자로, 자신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갈 세계를 생각한다. 아니면 당신은 오래전 누군가를 떠나왔거나, 최근에 누군가를 영원히 상실한 사람.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후보 선수처럼” 무의미함에 굴복하고 싶어지는 순간과 마주한 처지다. 당신은 마치 고대의 지혜로운 왕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중얼거리며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외로운 심판은 종료 휘슬”을 아직 울리지 않았고, 덧없음과 관련한 진실은 벽 너머의 일상처럼 가려져 있으나, 먼 예감으로 존재하는 생의 한 소실점을 관통하며 꿈속의 꿈을 꾸는 중이다. 당신은……. 페이소스의 거대한 심연이 우리를 가라앉힐지도 모를 위험 앞에서 해럴드 블룸의 조언은 유효하다. 그는 우리가 '시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가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 교감하게끔 돕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멋진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예외가 있다면 어떤 기묘한 순간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일 것이다. 더 자주 우리의 상태를 나타내 주는 표시는 고독이다. 그 고독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더 분명하고 더 완전하게 말하도록 도와주며, 또한 그 말소리를 엿듣게 해준다. ―해럴드 블룸, 「하우스먼, 블레이크, 랜도, 테니슨」 ―계간 《가히》 2024년 여름호, 「페이소스의 시학」, 부분 --------------------- 신상조 / 2011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저서로 『붉은 화행』 『시 읽는 청소부』가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