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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3장.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는 범죄로 말미암아 임신과 출산이라는 형벌을 당한 것이 아니다. 임신과 출산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서 에덴에서도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형벌로 추가된 것은 그에 따른 고통인 것이다. 이는 비단 실제 임신과 출산의 고통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그 전후의 모든 과정이 포함된다. 여자에게는 가임기의 시작을 알리는 초경부터 불임기의 시작을 알리는 폐경까지 수십년 동안을 매달 며칠씩 발생하는 월경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 여성처럼 가임기에 월경을 하는 동물은 거의 없으며, 그마저도 여성의 월경과는 같지 않다고 한다. 즉, 여성의 월경이라는 것은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 중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좋든 싫든 간에 자기의 대부분의 생활패턴을 월경 주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은 임신을 위해서는 자기 짝 된 남자와의 성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범죄로 말미암아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되었으므로, 여자는 아무리 가까운 자기 남편이라도 임신을 위해서는 그 앞에서 자기의 벗은 몸을 드러내고 통상적으로는 남자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부끄러움을 겪어야 한다. 임신 기간 중에는 여자의 몸은 자기 자신보다는 잉태 된 태아의 생명을 위해 맞춰지게 된다. 이로 인해 입덧을 비롯한 온갖 신체적 불편함을 10개월 동안 참아내야 한다. 여자에게 출산은 자기의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오늘날이야 의학의 발달로 인해서 산모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출산 방법이 발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은 여자에게 있어 매우 두려운 과정임에 틀림없다. 임신 기간 동안 태아에게 맞춰진 여자의 신체는 출산 후에 급격하게 틀어져 버린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되면 평생 출산으로 인한 후유증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요즘에는 남자들도 자녀 육아에 일정 부분 참여하는 분위기지만서도 엄마로서의 여자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출산 후에 여자는 자녀의 엄마로서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고된 육아를 대부분 책임져야만 한다. 특히나 자녀가 어린 동안에는 여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거의 상실할 정도로 자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남자를 도와야 하는 본연의 임무와 기능은 자연스레 자녀를 돕는 자로 바뀌게 된다. 다자녀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경우에는 그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한다. 그렇게 2,30여 년을 자녀 뒷바라지로 보내다보면 어느덧 젊은 때의 아름다움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임신조차도 불가한 폐경을 맞이하게 되며 황혼기에 접어들게 된다. 여자가 그렇게 임신과 출산과 육아에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와가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건네줌으로써 그의 사랑을 유혹하고 시험하여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여자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호르몬에 따른 신체 변화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모성애를 부여하셨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기꺼이 자녀에게 내어주고서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하와는 아마도 이런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수 백 번 반복하면서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평생 동안 느꼈을 것이다.
(여성이 겪는 임신과 출산 등의 과정 및 고통은 진화론적으로는 너무나 불합리한 현상들이다. 만약에 진화론이 맞다면, 임신과 출산 및 육아에 걸리는 기간은 어느 동물보다 짧아야 하며 고통은 없도록 진화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기간이 길 수록, 고통이 클 수록 생존에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의 정점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가장 길고 고통도 크다. 과연 이를 진화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자가 받는 형벌과 고통은 안타깝게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자는 자기 남편을 시험하여 범죄하게 한 대가로 여자 자신이 아담과 동등한 지혜와 능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비단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시대와 지역과 사회와 문명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차원으로는, 아무리 미모가 출중하고 다재다능한 여자라도 자기 남편감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 자기를 이끌어주고 자기에게 의지가 되는 남자를 찾게 마련이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여자는 항상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갈구하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싶어한다. 집안의 관계를 보면 아들을 보낸 시댁은 갑의 위치에 있고 딸을 보낸 처가는 을의 위치에 있는 것이 오랫동안 통념으로 굳어져 왔다.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 및 사회 요직은 대부분 남자가 차지해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남성 중심 사회로 흘러가게 되었으며 그 사회에서 여자들은 여러가지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여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더라도 대체로 그로 인한 사회적 배려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런 차별은 남성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당하게 되는데, 고부갈등이나 간호사 태움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여성끼리의 차별과 괴롭힘은 과연 남성 중심 문화의 산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전쟁이 나면 여성들은 말도 못할 치욕스런 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일제 시대 위안부라는 이름의 식민지 성노예 할머님들을 보면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남성에 비해 여성이 당해 온 모든 부당한 대우들은 사실상 하와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여성은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없고 잠잠해야 하게 되었다. 공예배에서의 설교는 물론 금지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배가 아닌 소그룹 모임에서도 여성 리더를 세워 말씀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여자는 모르는 말씀이 있을 때는 집에서 남편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지시했던 만큼, 교회에서도 가급적 할 수 있는대로 남성 리더를 세워 소그룹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서 여성은 아무리 신학을 전공하고 성경 지식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위치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의 위치에 서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여성에게 내리신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기독교인 여성들도 정작 이런 가르침은 걸림돌로 여겨 부담스러워 하므로,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에서 조차도 이런 가르침은 점점 퇴색되어간다. 교회에서 어떤 여성이 남성 목회자와 방불한 사역적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그 여성은 남편이나 남성 목사를 통해서 자기의 은사가 드러나야 함이 마땅한데도 마치 그것이 주께서 주신 소명인 줄 잘못 알고 다른 교회를 개척해서 자기가 담임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일반화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자칭 여성 목회자들은 과연 자기가 받았다 하는 목회 소명이 정말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설령 그 여성 목회자로 인해 그 교회가 유익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 처럼 보인다 한들, 그 열매가 과연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인지도 의문이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는 그 여성 목회자들을 당신께서 세우지 않으셨다고, 모르는 이들이라고 쫓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성에게 있어서 설교나 목회는 그리스도의 교회 중앙에 세워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 수도 있다.
#20171113
#사사기 #제사 #예배
사사시대는 가나안 입성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사사들을 통한 회복의 반복이 사사기를 통해서 매우 드라마틱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특히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법도가 처참히 무너져 있음을 우회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제사 법도를 율법으로 제정하시고 훈련시키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인들이 전담하여서만 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사사들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레위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고 심지어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였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렇게 제사 법도를 가르침 받고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 법도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제사를 드려왔던 것이다.
사사시대 백성들이 드렸던 자의적 제사의 형태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의 족장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사사시대 백성들의 제사 수준은, 수 백 년 전으로 퇴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 법도를 무시한 자의적 제사 중에서 어떤 제사들(사사들이 드린 제사)은 받으셨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으로 제정하신 제사 법도를 무시한 자의적 제사를 받으신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사시대에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전적인 은혜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제사 법도에 의거한다면, 아무리 사사들이라도 그런 식의 제사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고 어떤 자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셔서 그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수 백 년이나 퇴행한 백성들의 신앙 수준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드리는 참으로 부끄러운 제사를 은혜로 그냥 받아주신 것이다.
사사시대에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한 번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언제나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에 있어야 하며,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정결예식을 거친 후에 일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마 대제사장에게 어떤 불결한 것이 있을 경우, 그는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언약궤임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 백성들은 너무도 안이하게 언약궤를 다루었다. 심지어는 전쟁에서 승리의 부적으로 언약궤를 지고 나왔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의 백성들에 의해 천대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예를 들어 언약궤를 직접 열어보려고 한다거나) 백성들을 죽이지 않으셨다. 심지어 그 지극히 거룩한 언약궤가 암소 두마리가 이끄는 수레로 이동되는 것마저도 허용하셨다. 그리고 지성소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어느 집안에 20년 동안이나 안치되는 것을 허락하셨고, 심지어는 그 집의 주인에게 복을 주시기도 하였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참된 예배의 규범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규범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의 예배는 솔직히 사사시대의 백성들이 제사 규범을 무시한 채 자기 멋대로 드리는 그런 제사와 같지 아니한가? 그런데도 예배의 감격을 누렸을 경우, 그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어떤 공로에서 찾으려 하지는 않는가?
#사무엘상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소환한 영적 존재가 사무엘이냐 악령이냐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 영이 사무엘이면 사울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고, 악령이면 부당한 것인가? 그 영의 정체와는 상관없이, 사울의 초혼 행위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기 때문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쟁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 영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에 따라 사울의 행위에 정당성이 매겨지기라도 하듯이 논쟁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소환된 이 영이 사무엘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성경에서 이 불러낸 영에 대해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무엘이 이르되’, ‘사무엘의 말’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사무엘과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이 사무엘의 영이 사무엘이 생전에 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의 영이기 때문에, 악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기 마련인데, 이 영은 가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에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내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나고 나서 떠나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나는 사울이 수하들을 시켜서 그 여인을 죽이고 그 집을 불살라 버리는 장면을 추가하겠다.)
#20221113
#신앙고백 #칼케돈 3.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聖子이시고 主님이시며 唯一하신 獨生子이시나 同一하신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두 本性인 神性과 人性은 섞이지도 바뀌지도 나뉘지도 떨어지지도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one and the same Christ, Son, Lord, Only-begotten, recognized in two natures, without confusion, without change, without division, without separation;
unum eundemque Christum, filium, Dominum, unigenitum, in duabus naturis 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arabiliter agnoscendum:
ἕνα καὶ τὸν αὐτὸν Χριστόν, υἱόν, κύριον, μονογενῆ, ἐκ δύο φύσεων [ἐν δύο φύσεσιν], ἀσυγχύτως, ἀτρέπτως, ἀδιαιρέτως, ἀχωρίστως γνωριζόμενον·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인성은 물질세계에서 비롯된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그분의 인성을 향해 주님이라 부르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라보고 통할 수 밖에 없는데 네덜란드 청교도 목사인 빌헬무스 브라켈이 주장한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섬겨서는 안되고 그분의 신성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로마카톨릭이 주장하는 성상숭배나 성자숭배와 다르지 않게 된다. 사도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하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여호와’라는 명칭을 ‘주님’으로 변경하는데, 이는 구약시대를 다스리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성육신 전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셨고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존재하셨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타당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섞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 섞임으로써 신성도 인성도 아닌 무언가의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바뀌지 않으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신성과 인성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두 본성 중 하나로만 계시다가 필요에 의해 다른 본성으로 전환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으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가지고는 계시되 어느 부분은 신성만으로, 다른 부분은 인성만으로 구성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떨어지지 않으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인성만 지니시고 신성이신 성자께서는 하늘 보좌에 성부와 함께 계시다가 필요할 때에만 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신 때에야 비로소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신 상태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신 것이라는 고백이 추가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神性과 人性은 相互聯合을 이루신다고 해서 絶對 區別이 無意味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各 本性이 保存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神性과 人性은 함께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人格과 本質을 形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사람이신 그리스도 두 분으로 나뉘시거나 分割되시는 것이 아니라, 聖子이시고 獨生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께서 主 예수 그리스도와 同一하게 한 분이신 것입니다.
the distinction of natures being in no way annulled by the union, but rather the characteristics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coming together to form one person and subsistence, not as parted or separat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begotten God the Word, Lord Jesus Christ;
nusquam sublata differentia naturarum propter unitionem, magisque salva proprietate utriusque naturæ, et in unam personam atque subsistentiam concurrente: non in duos personas partitum aut divisum, sed unum eundemque Filium et unigenitum, Deum verbum, Dominum Jesum Christum;
οὐδαμοῦ τῆς τῶν φύσεων διαφορᾶς ἀνῃρημένης διὰ τὴν ἕνωσιν, σωζομένης δὲ μᾶλλον τῆς ἰδιότητος ἑκατέρας φύσεως καὶ εἰς ἓν πρόσωπον καὶ μίαν ὑπὸστασιν συντρεχούσης, οὐκ εἰς δύο πρόσωπα μεριζόμενον ἢ διαιρούμενον, ἀλλ᾽ ἕνα καὶ τὸν αὐτὸν υἱὸν καὶ μονογενῆ, θεὸν λόγον,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하나님의 세 위격께서 각각으로나 연합함으로나 더 크지도 작지도 않으신 완전충만하신 한 하나님이시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도 완전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인성도 완전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두 본성의 연합으로서도 완전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주로 드러나셨고 간간이 이 땅에 하나님의 사자로서 내려오시거나 살렘 왕 멜기세덱으로 계실 때에 한해서 인성이 좀 더 드러나셨다. 때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무덤에 안치되시기까지는 신성은 연합하여 계셨어도 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독보적으로 인성께서 활약하셨다.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육신 전에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하늘의 모든 영광을 회복하셨다.
舊約時代의 先知者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對해 豫言해왔고, 우리의 主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에 對해 우리를 가르치셨으며, 信仰의 어버이들의 信仰告白이 우리에게 傳授되었습니다.
even as the prophets from earliest times spoke of him, and our Lord Jesus Christ himself taught us, and the creed of the fathers has handed down to us.
sicut ante prophetæ de eo et ipse nos Jesus Christus erudivit et patrum nobis symbolum tradidit.
καθάπερ ἄνωθεν οἱ προφῆται περὶ αὐτοῦ καὶ αὐτὸς ἡμᾶς ὁ κύριος Ιησοῦς Χριστὸς ἐξεπαίδευσε καὶ τὸ τῶν πατέρων ἡμῖν καραδέδωκε σύμβολον.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 스스로나 사도들이나 한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체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을 진리로 증거하셨으나, 교회와 복음이 로마 제국의 승인을 받은 이후 교부 시대로부터 헬라 철학의 유입과 영향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영원 전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진리가 훼손되고 가려져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주님의 인성이 피조물이라는 천동설에서 벗어나 영원 전 인성이라는 지동설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20211113
#예수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우주만물과 역사의 앏하와 오메가이시고 당신께로부터 나고 당신께로 말미암으며 당신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으므로,성경의 모든 교리의 앏하와 오메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빌헬무스의 해석과는 달리,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할수밖에 없다.성자는 하나님이시므로 굳이 천사와 비교되실 이유나 필요가 없으시다.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신게 아니라,영원전부터 영광의 인성이 땅의 인성으로 한없이낮아지신 것이다.
#성령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수동적으로 보내심을 받으시는 동시에 성부와 성자에게서 능동적으로 스스로 나오신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에 완전 충만하게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의 의지와 육의 지시에 따라 역사하신다.
#삼위일체 #기독론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은 함께 다뤄져야만 한다.
#20201113
#민수기 #Numbers 9:9-14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11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13 그러나 사람이 정결하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의 죄를 담당할지며
14 만일 타국인이 너희 중에 거류하여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유월절 율례대로 그 규례를 따라서 행할지니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는 동일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부정하여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된 백성들에게서 받은 요청을 품하여 여쭈자 그에 대한 대안적인 규례를 마련해 주시는데, 그것은 원래 유월절인 첫째 달 14일이 아니라, 그 다음 달인 둘째 달 14일에 지키라는 것이었다. 부정하게 된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영구히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한 상태로 다른 백성들과 뒤섞여 유월절을 지킨다면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정결한 백성들은 원래대로, 부정한 백성들은 따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해법을 주신 것이다. 이는 교회의 권징의 원리와도 연관이 있는데, 만약에 어떤 신자가 무심코 교회에 해를 끼치는 죄를 지었으면 그 사안의 경중에 따라 적절히 권징을 하되, 설령 그가 출교를 당할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완전히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 멸망당할 자처럼 취급해서는 안되고 언제든지 그의 회개를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는 잠시 죄에 빠질 수는 있어도 죽을 때까지 그 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건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 죄를 범한 신자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된다. 이 규례는 유아세례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부정하게 된 백성들이 여호와의 은택으로 말미암아 원래 유월절은 아니더라도 다음 달에 별도의 유월절을 지키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신자 부부의 어린 자녀들도 자기 의지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상태여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인들의 세례와는 별도로 어린 자녀들을 위한 유아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규례는 오늘날 성찬에서 더욱 그 의미와 원리가 확장되어 성찬 대상자는 설령 자기 마음에 죄로 인한 거리낌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주저되더라도 성찬을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께 참회함으로써 같은 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규례는 교회에서 신자들 간에 신앙이나 외적 조건 등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으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준다. 원래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백성들은 자기들이 정결하다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는 부정한 백성들을 차별하거나 분리하거나 배제할 수 없었듯이, 오늘날 교회 구성원 사이에서도 차이점으로 인한 구분을 둬서 사역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서로간에 부당하게 차별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처음부터 유월절 규례를 주실 때 부정한 자들을 위한 규례도 함께 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심으로써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된 백성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고자 하셨다. 아마도 부정한 백성들과 모세의 대응방안은 여러모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렸을 것 같다. 부정한 백성들은 유월절에서 배제된 것에 안도하지 않고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자기들 스스로는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었기에 여호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모세에게 대책을 문의하고 요청하였다. 모세 또한 자기의 신앙을 과신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받지 않은 규례에 대해서는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께 의탁하였다. 이런 모든 과정이 여호와의 뜻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한 별도의 규례를 주심으로써, 그들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누구든지 유월절 시기에 부정하게 될 수 있는 모든 백성들도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해주셨다. 유다 왕조의 어떤 선한 왕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을 재개하면서 당시 분리되었던 북이스라엘에도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은 어느 지파이건 상관없이 초청을 했는데 여러 미비한 상황과 여건으로 인해 원래 일정대로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다음 달인 둘째 달로 연기해서 치렀는데, 이는 아마도 이 규례를 근거로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수시로 발생하는 신앙의 문제와 의문들을 어떻게 풀어가아 하는지를 가르쳐주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는 목회자를 통해서 성경의 해법을 찾는 것이고 목회자는 성경과 성령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교회 사역이 전무후무하게 전방위적으로 차단된 경우에 교회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그러해야 한다. 코로나를 핑계로 교회 가지 않을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성경적 방안을 강구해야 마땅하다.
부정한 백성들과 모세의 대처는 분명 그들 자신의 선한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나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은밀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화 덕분이었다. 즉,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부정한 백성들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셔서 유월절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자기들의 부정함 때문에 지킬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주셨고 이로 인해 자기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자발적으로 의뢰하게 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성령께서 드러나시지 않기 때문에 백성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성령께서 선한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사람에게 기계적이라거나 강제적인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특히나 성령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하느라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의지의 능력을 폄훼하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물론 모든 것이 성령의 전적인 역사이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것이 택하신 사람의 자원하는 의지속에서 은밀히 드러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의 선한 의지로 말미암은 선행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것과 같이 성령의 전적 의지임과 동시에 성도 자신의 전적인 의지로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유월절을 충분히 지킬 수 있는데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라도 결국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여호와를 거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배를 비롯한 교회의 통상적인 사역에 불참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유가 이처럼 정당하지 않고 단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 교인들은 주로 무지와 실수와 불가피함으로 자기들의 범죄를 완화하고자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가 지양되고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 되면서 점점 나태해지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온라인 예배니까 굳이 예배 시간이 아니어도 된다는 나태함, 온라인 예배가 있으니까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태함 등이 그러하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족속 타국인이라 하더라도 유월절을 지키고자 한다면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 문을 열어 놓으시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지키도록 받아들이셨다. 여호와께서 모든 족속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족속들을 완전히 배제하신 것은 아니셨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의인이라 칭함받은 우스 땅의 욥과 그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그러하고, 여리고의 창녀 라합이 그러하며, 보아스의 아내가 된 모압 여인 룻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여호와를 흠모하는 이방인들은 마치 농부가 길가에 떨어진 수많은 씨앗 중에서 몇 개를 주워들어 좋은 땅에 뿌린 것과도 같다. 사도 시대에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빌립의 전도를 받은 은혜를 누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