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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페미니즘으로 본 탈북여성
지금 한국사회에 들어와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3만여명을 흘쩍 넘어섰습니다.
우리 한국의 인구가 5천만명을 넘는데 3만여명은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탈북민들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정치, 사회,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여 자주 회자가되는 이유는 이 탈북민들이 숙명처럼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그 태생적 사회신분의 특수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회자사건들들 중에서 늘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혀지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한국 사회에서 살고있는 탈북민들, 특히 탈북민여성들의 인권문제입니다.
좀 더 나가서 일부 언론들과 사람들이(언론에 글을 냈다하면 대부분 그대로 기사화 할 수 있는 사람들) 북한 사회의 여성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마치 한국에는 그런 현상이 없는 것처럼 여론과 분위기를 호도하면서 탈북여성들이 당하는 성착취와 성폭행 또는 성희롱의 일상에 대하여 무섭게 겁을 주어 그들 스스로가 입을 닫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서초구 탈북모녀의 아사 사건과 얼마전 한 언론에 의해 기사화 된 양천구 30대 탈북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 등 많은 탈북여성들의 사망사건들에 대해서 저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 즉 패미니즘으로 탈북여성들의 삶을 보려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책임을 놓고 고민합니다.
저는 북한에서 나서 자랐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두아내와 함께 두 딸을 키워 본 경험자로서 북한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떻게 법제화되어 있으며 그 제도가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탈북민들은 1990년에 북한 인민학교 4학년생이 였었나, 아니였었나로 구분을 해놓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1996년,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들은 최소한 북한의 중고등까지의 의무무료교육의 혜택아래 기본적인 교육은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1990년을 기점으로 봐야하는 이유는 현재 한국사회에 들어와서 살고있는 탈북여성들 중에 가장 왕성한한 사회활동과 생업을 하고있는 계층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탈북민 3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 70~80%가 여성입니다.
지금 이문장을 쓰는 제 눈에는 그들(탈북여성들)의 삶의 고달픔이 영화장면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들이 사회정착에 실패한 낙오자라서 이 한국에까지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그들의 사망원인을 생리체적으로, 물리적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이 어떤 심적 병을 안고 몸부림을 치다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며 또 관심도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한국사회의 정착에 실패한 "사회 낙오자"라는 얼토당토 않는 정체성으로 규정되어 버립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북한 사회내에서의 여성인권을 이러쿵 저러쿵 운운하면서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있는 탈북여성들의 인권유린행위들을 무마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에 저는 반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래에 소개 할 북한의 혁명가요(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불려진 노래를 북한에서는 혁명가요라고 말 함) "여성해방가"는 일제강점기시기에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지금의 중국 연변의 룡정, 훈춘, 연길, 안도, 왕청 등에 설치했던 혁명근거지 내의 인민들과 항일유격대원들이 불렀다고 선전하는 노래 가사입니다.
여성해방가
1)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 꽃
못피운 원한 아느냐, 그대여 여성동무들
2) 남몰래 조용히 우는 눈물로 청춘의 고운 낯에
주름생기고 매 맞아 얻은 병 살기 싫어요
3) 골방 안 감옥살이 언제 끝나나 꿈에도 싫어요
나는 싫어요 천대와 멸시는 더욱 싫어요
4) 아버지 어머니 나의 오빠여 지주 놈 장리 빚에
날 팔지 말고 차라리 이내 몸 없애버려요
5) 여성들 우리동무 다 일어나라 부르죠아 제도를
없애버리고 동등한 권리 위해 총들을 들자
6) 얽매여 하는 결혼 멍에를 벗고 구속에서 용감히
뛰쳐들 나와 동등한 권리를 다같이 찿자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 흥얼 부를 수 있는 저는 정말 좌파 빨갱이일까? ㅎㅎ
일제가 멸망하고 광복 후 북한에 들어 온 김일성은 1945년 10월, 맨 먼저 당을 창건하고 그 다음으로 북조선임시인민정부를 수립하였고 아주 빠른 시기인 1946년 여름에는 이른바 민주주의적 제반 사회개혁법령들을 채택하고 발표하는데 이를 5대사회개혁법령이라고 부릅니다.
토지개혁법령, 산업국유화법령, 노동법령, 남여평등권법령입니다.
이 남여평등권법령은 수천년을 내려 온 봉건적 질곡속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키고 여성들에 대한 온갖 사회적 구속과 압박을 없애버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를 담당하는 일꾼"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광복 후 정치, 사회제도의 시기를 철저히 구분 짓고 교육하는데 1945년부터 6.25 한국전쟁 전까지를 이른바 민주조국건설시기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시기에는 1946년 7월 "남여평등권법령" 발표와 더불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지위와 위상에 걸맞게 그들의 열의를 고취시키기위한 가요들이 창작되고 보급도는데 지금은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 곡조만큼은 선명합니다.
...
인민주권 다지며 나가는 여성들아
우리 손에 조국 터전 날마다 건설된다
공장의 여성도, 농촌의 여성도
다같이 손잡고 일해가며
씩씩하게 뭉치자 김장군 두리에
찬란한 우리 조국 완전 독립 위하여
... ...
북한에는 3년간 한국전쟁 때도(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명명함)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사회주의건설시기, 그리고 사회주의공업화시기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더 공고화 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시기에 걸쳐 그 시대마다 여성의 역활과 지위와 위상을 강조하고 또 고양시키는 수많은 영화, 소설, 가요들이 창작되여 보급되고 불려졌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 사회제도의 풍토속에서 자주적인 여성사회상은 확립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북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은 사회의 주인이라는 자긍심에 넘쳐 살아왔습니다.
물론 북한도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보니 이런 저런 사회 악과 퇴페 풍조로 규정되는 현상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살고 있던(1990년대 중후반까지) 당시 북한 사회는 여성의 인권과 인격이 그 무슨 성 매개체로 치부되여도 되는 그런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저의 아내도 결혼 당시 처녀로서 청진편직물공장에서 초급 당간부였고 두 딸을 낳아 키우면서 아내의 정치적 인격도 격상되면서 당간부로서 직위도 상승하였습니다.
때문에 저의 집안에서는 남편이 남자로서 가부장적인 지위와 위상이 있다, 없다에 대한 헤게모니 생각을 저는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성상이 인식되면서도 세상과 단절 된 북한사회에서 살았던 탈북여성들은 세상의 모든 국가들의 여성상은 자기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고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올해였던가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스"에서 밝힌 탈북단체의 지도층에 있는 한 탈북남성이 탈북여성의 성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만행을 일삼으면서 나중에는 그 여성을 사업상 영업목적이라면서 한국의 다른 지도층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했던 사건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1990년도에 북한 인민학교 4학년생이 였나?를중요한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현재 한국사회에 정착한 대부문의 성인탈북여성들이 실질적 자존감은 바로 이런 높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당당한 여성 의식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기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들과 탈북민 인텔리 지도층들이 북한 내에서의 여성상을 왜곡하고 펨훼하면서 그들이 겪고있는 실제한 심적 고통과 억울함을 토로하지 못하게 억누르고 압박을 가하므로써 그들을 죽음이라는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지만,
...
양천구 30대 탈북여성은 통일부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상담원으로 2~3년을 근무도 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전 쯤에 그 일을 그만 두고 집안에서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있다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신문 기사의 내용)고 하는데 ... ...
저는 그 여성의 내면에 자기 정체성에서 가장 소중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성이 훼손당함이 그를 참을 수 없도록 괴롭혀 결국에는 죽음에로 몰아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몇년 전 경기도 화성시의 한적한 시골 면에 갑자기 다방들이 줄비하게 들어 서서 들여다보았더니 그곳엔 탈북여성들이 불법적으로 성매매를 하면서 자기들의 생계를 해결해 가는 현장이였다는 사실.
탈북여성들이 이런 음침한 구석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사회적 지위를 깎아내려서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죽어야만하는, 이런 사회 제도적 기반과 환경을 거부하면 굶어 죽던지 아니면 스스로 죽음이라는 그 먼 길을 택해야야만 하는, 탈북여성들은 정말로 사회 부적응자, 한국정착 실패자인지 저는 진심으로 묻고 싶습니다.
저의 이글에서 빠진 부문은,
북한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관한 해석부문에서 김일성일가와 그들 체제를 떠 받쳐주는 집권세력 일부도 과연 이글에서 언급한 북한 여성상에 공감할까라는 부문인데 ...
저 역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왜냐? ... 북한의 김일성일가는 그들 말대로 "최고 존엄"이고 그들에 적극 추종하는 세력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탈북여성들의 인격적 본질의 내면을 변론하고파하는 이유는 최고위층들과 다른 북한 사회현실속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함은 이미 해방직후 1946년 7월 30일에 법제정으로 해결되였으며 멀게는 일제강점기 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이를 중시하여 왔다고, 여성의 혁명적 위상을 규정짓고 세뇌교육을 시켜왔고 실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탈북여성들의 내면의 자존감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탈북민 1호 정치학 안찬일박사는 몇년전에 자기의 어느 기고글에서 북한의 여성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전후해 ... 이제는 암암리에 성매매도 한다면서 ...
북한의 여성들이 실제로 인식하고 느끼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마구 난도질하고 훼손했습니다.
사실 안찬일박사는 탈북자가 맞지만 그는 북한을 모르는 정치학 박사입니다.
안찬일 박사는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인민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10년을 휴전선 북방한계선안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1979년 여름, 그의 나이 만 27살 때 남한으로 귀순했습니다.
안찬일박사가 TV에서도 소개됐던 한 탈북여성이 진행하는 유튜브에 출연해서 본인이 탈북을 결심하게된 이유를 밝히는 것을 본 적 있는데 ...
북한의 당시 현실을 떠올려 본 제가 듣기엔 완전 가관이었습니다.
그는 탈북 1년 전에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평양에 가서 보니까 라이타 돌도 없어서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을 보며 지방은 더 한심하겠구나, 생각했고 휴전선에서 매일 듣던 대북 방송처럼 자유를 찿아 가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안찬일박사 개인을 중심에 놓고 북한 현실을 파헤쳐보면 그의 일가는 북한 당국에서 인정하는 이른바 "혁명의 기본 계층"에 속하며, 그의 부모님들은 그들 나름의 어떤 신분계급을 인정받을만 한 공로가 있는 집안의 자제일 것 입니다.
그런 출신성분이 갖춰지지 않고서는 "혁명보루의 최전선"인 휴전선에서 군복무를 수행할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또한 일반 군부대장병들보다 그들이 평양과 백두산 등 북한의 여러 곳을 견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도 말했듯이 남한으로부터의 대북방송에 현혹되지 말라고 이른바 "사상교양" 차원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의 북한에서 살아 온 나이와 생활환경을 볼 때 그는 일반 인민들의 삶속에서 일반 인민들의 삶은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민학교, 중고등 학생시절이 사회인으로서의 북한 삶의 전부이며 그가 군복무를 한 휴전선은 철저히 사회와 단절된 곳입니다.
70~80년도에 휴전선을 통해 혹은 동서해상을 통해 귀순을 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귀순자들을 6개월에서 8개월, 심하면 1년도 넘게 가둬두고 취조를 가하면서 사회에로의 복귀를 미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안찬일박사도 그 젊은 나이에 겪었던(당시엔 중앙정보부였을 터) 혹독한 취조의 휴유증으로 그의 심적 내면엔 "편집증"이라는 병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안찬일박사가 말하는 1979년도의 북한의 현실을 정확하게 평가하면 그때는 한국도 산업화, 근대화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때 쯤이라서 남과 북의 경제상황이 거이 비슷했거나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한이 북한을 앞지를까 말까 하며 들썩이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1983년 전두환정권시절엔 북한에서 수해 피해를 크게 입은 한국의 복구를 민족애로 돕는다면서 시멘트, 옷 감, 쌀, 각종 일용품 등 구호물자를 서해의 인천항과 동해항으로 보내주어 당시 한국은 북한의 쌀과 남한의 쌀로 밥을 지어 "통일 밥"을 먹어 본다고 이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당시의 북한을 "편집증"으로 마구 편집한 안찬일박사는 그가 직접 체험해 보지도 않은 북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뿌리기위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그는 진짜 무지한 국민의힘당 전 비례국회의원, "편집증"에 심하게 걸린 병자일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의 모든 언론들은 평양의 여성들도 짧은 치마를 입는다? 예술인들이 과감하게 댄스를 추면서 공연한다? 북한내부에서도 성매매가 성행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북한엔 성매매가 없었다고 시인하는 건가?) 고 무슨 특종이슈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여기엔 진보와 보수 색채를 가리지않고 언론이라면 누구라도 가릴 것 없이 경쟁적입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리기 페미니즘만이 성행하는 환경속에 살면서 이 사회에 정착해야하는 탈북민들, 특히 탈북여성들의 자괴감을 그 어떤 말로서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페미니즘을 헤게모니를 위한 이데올리기라고만 본다면 페미니즘의 한계가 부닫히게 되겠기에 보다 효과적인 문화적 시각과 방법으로 접근해서 풀어야 한다는 주장에 저는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백범 김구선생님께서 "백범 일지"에도 쓰셨다지요.
... 한없이 부럽고 가지고 싶은 것은 오직 문화의 힘뿐이다! ...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질문들을 계속해서 듣는 사람"이 사회적 약자라고 정의하면 한국사회에서의 페미니즘도 법제도화의 정착의 한계를 벗어난 문화로 전파되고 확산되여 시민들의 생활속에 의연중이라도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또 하나의 계층으로 새로 탄생했고 또 살아가고 있는 탈북민들, 탈북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 본 강의에 수강신청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저는 함께 수강 중인 선생님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저의 후기에 공감해주셨으면 참 좋겠다! 는 희망을 말하겠습니다.
2022. 12. 3.
* 경향신문사 후마니타스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시민인문학 강의를 들은 후기입니다.
강사는 권김현영선생님.
첫댓글 디아님~~저한테 조금 길고 어려워서 완독을 못했습니다ㅜㅜ
다시 도전해 볼게요
연맘님 잘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후기글은 본 강의에 수강하시는 분들과 나눔이라고 생각하면서 쓴 글이라서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하면 좀 어렵죠.
탈북여성들, 북한도 성매매가 있고 가부장적인 헤게모니가 있어서 여성의 사회적 구속이 심하다는데 ... 하면서 북한여성인권상을 펨훼하는 조류에 대한 반박이구요,
다음으로 한국에 들어 온 탈북여성들이 한국여성이 아닌 조선족 여성, 이주민 여성, 탈북민 여성이기 때문에 하급 계층에 속하는 여성은 성매매 및 여성인권의 기준 잣대가 낮아도, 사정당국이 칼이 무뎌도 괜찮다는 식의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 글의 요점입니다.
북한엔 유흥업소가 없었습니다.
1990년에 북한에서 초등학교 4학년생인 탈북민 여성이라면 북한의 정책제도적 시스템안에서 여성 권익에 대한 자존감이 높을 수 밖에 없다,
1996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으니 그때 쯤 이들은 북한 중고등교육을 다 받았으니
그러니 자유주의 이데올리기로 한국여성, 또 다른 계층 여성으로 구분 짓지 말라,
뭐 이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