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
제목 ΚΑΤΑ ΜΑΡΚΟΝ(카타 마르콘, 마르코에 의한)이라는 헬라어 제목에서 나옴.
저자의 이름을 반영.
저자 로마식 이름으로 '마르코'(뜻 : 큰 망치)는 히브리식 이름으로는 '요한'이다( 행 15 :37)
마르코 요한은 당시 유대의 사정에 밝았으며, 아람어에 익숙했다(마르코 3:17, 15:41).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페트로가 아람어로 설교하는 것을 헬라어로 바꾸는 페트로의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다음에 페트로가 가르친 예수의 행적과 설교인 '마르코 복음'을 기록했다고,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AD60-130)와 폴리갑(AD69-169)이 이야기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수 제자 페트로가 아람어로 이야기 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을
페트로의 제자 (페트로 알파 5:13) 마르코가
페트로 순교한 다음 헬라어로 적은게 마르코 복음이다.
즉 마르코 복음은 예수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시작할 때
페트로가 보고 들은 것을
마르코가 글을 잘 모르던 페트로가 이야기 한 것을 마르코가 글로 적은 것이다.
기록연대 A.D. 65-70년. 페트로 순교(A.D. 65년경) 이 다음에
그의 통역관이었던 마르코가 페트로의 설교를 기록했다는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s, AD132~202) 의 주장과,
13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이 미래형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기록 연대의 추정이 비교적 쉽다. 4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 되었다.
A.D64년에 네로는 로마에 화재를 내고, 그 원인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고, 페트로도 순교 되어,
마르코가 페트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페트로가 불러주는대로 마르코 복음을 기록 하였다는 것이다.
기록목적 1. 크리스토가 핍박 받은 것을 기록함으로써
괴로움당하는 외국(특히 로마교회)의 성도들의 용기를 북돋아서 힘을 내게하기 위하여
2.크리스토의 땅위의 행적을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주제 :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예수는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했지만,
다시 살아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배경 : 네로 황제의 박해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로마의 예수 믿는 교인들은 본서의 내용을 페트로의 설교를 통하여 많이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적인 기록물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특징 1.네로 황제(AD48-68)시대에 로마에서 박해 받는 크리스토인을 위해서 기록했다.
2. 간결함-내용과 문체가 매우 단순하고, 저자의 덧붙인 설명이나
해석 없이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기록
3. 고난에 중점을 둠- 전체 내용의 1/4 이상을 예수의 고난 기사를 다루었다.
4.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록-예수와 제자들과 군중들의 반응이나 감정을 삭제하거나
덧붙임 없이 사실 그대로 글로 나타내었다.
마르코는 페트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마르코 복음을 기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세례자 요한 부터 기록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이 왕으로 온 메시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마르코 복음은 종으로 온 메시아의 수난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이 예수의 전기를 기록 하듯이 시간순서로 기록하는데 비해,
마르코 복음은 사건들을 주제별로 기록하고 있다.
마타이오 복음과 같이 구약성경은 인용하지 않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가르침이나 비유를 기록하지 않고,
예수가 열심히 일한 것만 다루었다.
독일의 신약성경 비평가 그리스바하(Griesbach, 1745-1812)가
마타이오, 마르코,루카 복음 이 세 성경을 공관복음이라고 한 이후
계속 모든 성경학자들은 이 세 성경을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말은 "같이 본다"는 뜻이며 그래서 세 성경은 공통점들이 많다.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세 성경은 아주 다른 특징도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이라고 할 때
같은 내용, 같은 사건, 같은 관점, 용어, 문장 등에 있어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세 복음서가 공통의 자료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1835년 라크만(Lachmann)에 의하여 마르코복음 우선설이 나오면서
지금은 누구나 세 복음서 중에 마르코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이라는 설이 마치 정설같이 내려오고 있다.
지난 18세기까지 마타이오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으며
마르코복음은 마타이오복음을 발췌하여 간단히 요약한 것이며,
루카복음은 조금 더 보충한 것이라고 말했다.
18세기말에 들어오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르코복음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가장 오래된 성경,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이며,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중요한 발견은 마르코복음을 근거로 하여 마타이오복음과 루카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르코복음은 661절로 되어 있다.
그 중에 마타이오복음에 606절이, 루카복음에 320절이 병행하고 있다.
마타이오가 채택하지 아니한 55절 중에 31절을 루카가 사용하고 있다.
마르코복음의 24절만이 마타이오복음과 루카복음에 인용되지 않고 있다.
마타이오나 루카가 복음서를 쓸 때 예수의 생애의 많은 사건들을 나열할 때
마르코의 순서를 참고로 하고 있다.
마르코는 신약 성경에 그래도 많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마르코는 예루살렘 상류 계급의 부인인 마리아의 아들로 그의 집은 초대 교회의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 요한이라는 이름과 (라틴어) 마르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한, 마르코 또는 요한 마르코로 쓰여지고 있다.
요한이 본명일 것이고, 마르코는 로마식 이름이요, 개명한 이름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의 집은 아주 유명한 집이 되었다.
그의 집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먹은 장소로 유명하고,
펜테코스테(오십(50))절 때 초대 교회가 탄생한 장소였다.
그 후 제자들은 이곳에서 자주 모였으며,
감옥에 갇혔던 페트로가 찾아간 곳도 이 곳 마르코 집의 이층이었다.
이 집은 120명이나 모여 기도할 수 있을 만큼 넓은 2층집이었으며,
집안일을 거드는 하녀가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사는 집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집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도 파괴되지 않아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아주 넓은 홀을 가진 집이었다.
2019년 현재 이 마르코 집의 이층은 기념교회가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직제자는 아니었다.
후에 마르코는 페트로를 수행하면서 페트로로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으면서 신앙이 자라났는데
페트로는 이 마르코를 가리켜 그의 제자(아들)이라고 하였다.
페트로 알파 5:13에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교회가 당신들에게 문안하고
내 제자(아들) 마르코도 그리하느니라.
(이집트의 카이로에 (BC 664-525년) 바벨론 군이 주둔하였던 곳에 교회를 세운)
바벨로니아의 함께 뽑힘을 받은 교인들이 당신들에게 인사하고,
나의 (믿음의) 제자 (아들) 마르코(마르코 복음의 저자)도 인사합니다.
(참조 : 이강근 성지가 좋다)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외삼촌 바르나바의 생질이었다.
마르코의 집에 제자들이 모여서 어디로 가는 것을 본 마르코는
예수와 제자들이 간 마르코 아버지의 소유인 올리브 기름짜는 틀이 있는
겟세마니 동산(과수원)으로 찾아갔는데. 그 때 마침 예수가 붙잡혀 가는 것이었다.
마르코복음에는 이때에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주님을 따르다가
무리에게 잡히게 되니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청년이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만이 예수와 관계된 저자 마르코 자신의 이야기라고 본다.
마르코가 본격적으로 교회사에 나타나게 된 것은
파울로와 바르나바가 시리아의 안티옥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였다.
이때 예루살렘은 아주 큰 가뭄이 들었고, 두 사도는 구제금을 모아서 상경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마르코를 데리고 시리아의 안티옥에 왔으며,
이때 안티옥 교회는 두 사람의 사도를 선교사로 세워
키프로스와 아시아(터이키 지역) 지방을 선교하게 되었다.
이때 두 사도는 마르코를 데리고 기프로스 섬으로 갔다.
키프로스 섬은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 때의 전도를 파울로의 제1차 전도 여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마르코는 지중해를 건너 아시아(터어키)팜필리아 지방의 수도 페르가모라는 항구에 이르렀을 때에
사도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하나님은 더욱 더 역사하여서 더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역사로 선을 이루게 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마르코는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마르코는 이집트에 내려가 알렉산드리아에 콥트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마르코의 신앙이나 인격은 페트로를 만나면서 자라났다.
마르코는 페트로를 통하여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페트로도 내 제자(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마르코의 집에서 모였고,
초대 교회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페트로였기 때문에 페트로와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파피아스는 마르코는 페트로로의 통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페트로는 아람어 즉 근대화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이었고,
세계는 헬라어가 공용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르코는 일찍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외국어에 능통하였고,
페트로는 그렇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로마에서 페트로가 선교할 때 교인들은 통역하는 마르코에게 부탁하여
예수의 일생에 대하여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페트로로가 들려준 대로 예수의 일생을 기록하게 되었다.
페트로가 설교하면서 말하던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페트로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마르코를 통하여 남겨놓아서 예수의 공생애가 밝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페트로가 순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65년 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후에 마르코는 알랙산드리아에 가서 순교하였고,
그의 유해는 지중해를 건너 베니스(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로 왔으며
성 마르코성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시 마르코복음이 기록될 당시 로마는 그 사정이 아주 좋지 못하였다.
네로의 박해가 한창 진행되었고, 그 때문에 페트로와 파울로 같은 큰 지도자들이 순교하였고,
성도들은 카타곰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사정 아래 마르코는 먼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어야 했다.
위기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순교 신앙을 심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수난 받는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르코가 독자들에게 강조하려는 것은 좀 더 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보다도 사탄보다도 강한 분이었다.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에 그는 죽음보다도 강한 분이라고 외치고 있다.
마르코의 중요한 관심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여기 있지 않고 살아났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아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다시 살아난(부활) 승리자이었다.
마르코 복음은 수난의 신학이 아니라, 승리의 신학이여, 승리의 기쁜 소식을 증거 하는 소망의 복음이다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8 일의 기록은 복음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마타이오 21-28장, 마르코 11-16 장, 루카 21-24 장, 요한 12ㅡ21장
베다니아 (토: 옥합 기름부음 받음)
벧파게 (일 : 예루살렘 승리 입성)
성전 (월 : 성전 청결)
성전 (화: 논쟁)
올리브산 (화: 심판)
베다니아 (수: 침묵)
다락방 (목: 마지막 저녁식사)
성전 (금: 고난)
골고다 (금: 죽음)
골고다 (토 : 무덤)
골고다 (일: 부활)
마르코 복음 1장
*** 세례자 요한의 죄를 뉘우쳐 고침의 세례 ***
1.하나님의 아들 예수 크리스토((메시야를 뜻하는 헬라어, 구세주,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는 분)의
복음(반가운 소식, 기쁜소식, 멋있는 소식, 좋은 소식)의 시작이다.
( 참조: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단어는 너무나 익히 들었던 말이었다.
"황제의 복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신의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황제의 복음!
황제가 그들에게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 준다는 이 복음.
그러나 이 복음은 어떠한가? 모두를 위한 복음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었다.)